고난과 고생
2024년 3월 2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2:10-11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반발합니다. 예수님을 기껏 해봤자 여럿 메시야 중의 하나의 후보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인물에 대해서 구원받아야 될 자신의 관찰과 판단력에 의해서 고르고 싶다는 겁니다. 꼭 노예시장처럼 여럿 메시야감을 줄지어 세워놓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이처럼 자신의 구원자를 자기가 뽑고 싶은 이유는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고생하면서 살아왔기에 그 고생한 값을 기어이 챙겨보고 싶었던 겁니다. 대가없는 고생만큼 허망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일 겁니다. 지옥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대와는 달리 벌써 하나님께서 일을 저질러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요청없이 일방적으로 이 세상에 내왕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함과 노고와 고생을 거부하시고 오로지 자신의 고생과 고통만으로 모든 구원의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일성입니다. 거룩한 자와 거룩함을 받는 자는 오로지 하나의 출처를 통해서만 결합이 성사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이십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고생을 일절 거절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고생을 구원받고자 하는 고난을 승격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노고를 절대화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벌써 아담은 인간들의 이러한 시도가 성립될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운명임’을 통보받고 난 뒤, 그는 자기 말고 또 남아 있는 인간인 아내 이름을‘생명’이라고 짓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후손은 해내지 못하는 것을 ‘여자의 후손’은 해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즉 여성은 남성보다 죄와 더 뚜렷하게 보여주기에 이는 또한 구원을 보다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해산하므로서 구원입니다.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 해산이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 고통은 곧 ‘나는 죽고 자식은 살아라’와 관련된 고통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출산과 관련된 고통입니다.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은 예수님의 가시는 곳마다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8:24-27에 보면,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폭풍 속으로 한꺼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은 곧 행함입니다. 고생입니다. 노고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기들에게 엄습하는 죽음을 무효화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들은 잠자던 예수님을 깨웁니다.
깨나신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부터 나무랍니다.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풍랑을 꾸짖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솔직한 본심을 말합니다. “이 분이 누군가?”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생의 가치를 지키는 것에 혼신의 힘을 기울렸기에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던 겁니다.
특히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하나됨’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비교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자들의 집결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아비도 하나요 지도자도 오직 하나입니다.(마 23:8-12) 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형제를 구성할 권한이 없음을 뜻합니다.
근원적인 인간성은 배후에 악마가 있습니다. 악마는 현재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을 기초로 구원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의 기초에서 자기를 배제하고 생명인 아내가 기초인 것을 압니다. 이러한 기초성은 창세기 4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역사 지평에 구체화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의 행함과 그리고 결코 버림받지 않으려는 시도는 멈출 수 없음이 드러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래도 절 버릴 건가요?” 이것이 바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심성이 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임으로서 그는 자신이 자기의 기초가 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이 자기의 창조주가 되려고 합니다. 고생과 고난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 마감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 그 어떤 인간은 자신의 고생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있고 난 뒤에 주님은 자신의 고난에 참여할 자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 고난 보다 예수님의 부활과 살아 계심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고난’이란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쳐들어온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에게 여전히 발동하고 있는 ‘자기 고생’의 의미를 철저하게 벗겨내고 설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고생의 의의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을 예수님 고난의 노선으로 이끌어 들어는 것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의 고난의 유일성이 훼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방식은 세례입니다. 세례에는 세 가지 절차를 가집니다. 첫 번째는 물세례, 두 번째는 불세례, 세 번째는 성령 세례입니다. 물 세례는 자신의 노력을 성과는 본인이 가져 갑니다. 물에 빠진다고 아주 죽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 세례를 통해서 인간의 셀프 구원은 다 막힙니다.
세 번째 성령세례를 통해서 오로지 ‘부르심을 입은 자’만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더는 자기 고생담을 늘어놓지 않는 가운데서도 ‘저절로’ 주님이 고난의 효과로서 천국이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룩 같이 말입니다.(마 13:33)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마귀의 뜻으로 무장해서 집요하게 예수님의 유일성을 방해하는지 절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히브리서 2장 10-11절(고생과 고난)240317-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2장 10-11절입니다.
히브리서 2:10-11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두 분이라고 했습니다. 한 분은 하늘에 계시고 또 한 분은 어떤 하나님이냐? 사람이 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천사가 오면 될 텐데 왜 천사는 오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셔야 하는가? 천사는 몸이 없습니다. 육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이 땅에 파견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쳐시고 알려주시며 이 주어진 뜻은 어떤 방해 공작도 무릅쓰고 필히 다 이루게 된다는 것을 자기 아들을, 육신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고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냥 그분의 고난에 집중되어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궁금하고, 하나님의 뜻도 궁금하고, 기도할 때마다 철야 할 때마다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진정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렇게 10시간, 12시간 철야 하면서 외쳤는데 그렇게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미 뜻을 알려줬어요. 알려줬는데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세서 하나님이 알려준 뜻은 자꾸 밀어내고 ‘주의 뜻은 무엇입니까?’ 얼마나 주의 뜻이 모호했으면 이런 찬송가도 나와요.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생각해도 우스운데요. 굉장히 경건해 보이는 것 같지만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은 ‘주님 뜻대로 할 테니까 내 뜻 좀 어떻게 안 됩니까?’ 하는 꼼수 같은 것이 자꾸 느껴지는 건 나만의 느낌인가요? 나만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요? 이게 고집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이 주의 뜻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주의 뜻을 분명히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주의 뜻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자꾸 하나님께 들이대는 것은 주님의 고난 말고 따로 자기 인생 고생한 것에 대한 어떤 결과 같은 것을 손에 쥐고 싶다, 라는 노림수 같은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고난이 주의 뜻으로 종결됐다면 내가 이 땅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의의가 없지 않습니까?” 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이 작동하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줄 아시고 창세기 3장에 이와 같은 조치를 내렸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부터 20절에 보면 아담이 한 사람 나오고 하와가 한 사람 나와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나와요. 사람이 두 사람인데 각각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뜻과 조치가 달라요. 우선 남자한테는, 아담이죠, “너는 죽도록 고생하고 죽어라.” 이게 아담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네가 저주를 받아 죽도록 고생했는데 그 고생의 성과가 뭐냐? ‘없다.’입니다. 네가 땅에서 죽도록 고생하는데 아무 성과가 없다, 그리고 넌 기필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땅, 땅, 땅! 주님께서 결정해버렸어요. 그러니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창세기 3장 19절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겠다는 의사가 내부에 들어있는 거예요.
“자식 잘 키우고 이만큼 고생고생 살았는데 주님, 소박하게나마 아담한, 우리 누울 수 있는 내 집 하나는 마련해줘야 내가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간적으로 따져서 고생했는데 아무 대가가 없으면 너무하지 않습니까?” 주의 뜻은 “흙으로 돌아가라. 흙이 왜 말이 많아?”
아담은 여기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자신이 주의 일에 기초가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보니까 자기 옆에 여자가 있거든요. 여자가 있으니까 아담은 일찍 자기를 포기합니다. 포기하고 어디에다 기대를 하고 희망을 거느냐 하면, 약속, 주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기대를 여자한테 해요. 창세기 3장 20절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라는 이름은요, 생명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아담이 자기는 죽음이니까 두 사람 중에 남아있는 사람이 또 한 사람이 있을 거잖아요. 네가 생명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우리를 이 지경으로 작살 낸 그 뱀을 처단할 수 있는 것은 여자 너에게 그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이건 남자인 자기가 하나님의 일에 기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 거예요. 내가 고생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생각한 겁니다.
이 같은 취지를 예수님도 요한복음 6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28절, 29절, 예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물어요. 그런데 이 물음은 모든 인간, 특히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의 기도 중에서 “주여, 주의 뜻은 뭡니까? 응답은 어떤 식으로 옵니까?”라고 궁금했던 이 모든 것을 대변해 어떤 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일을 합니까?” 하고 물으니 29절에 예수님 답변으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무슨 뜻이냐면 “나는 네가 고생하는 걸 하나님 일의 기초로 삼은 적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배제하고 일하신다는 것을 네가 믿어라.”
이 이야기를 함축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체험을 하느냐 하면, 자기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 이건 지식이 아니에요. 인간이 고생한다는 것은 누구나 지식 이전에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겁니다. 몸이 고생하니까 고생하는 이 인생사, 자기 자신이 고생하는 ‘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가 없어요.
고생하는 나. 그러면 고생하는 나에게 고생에 대한 어떤 보람이나 성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고생하고 있다,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서 내가 정작 원하는, 자신이 고생한 것을 토대로 내가 원하는 행복한 삶, 편안한 삶, 편안한 미래, 이걸 달라는 겁니다.
소위 하나님 계시다는 곳이 교회니까, 교회 와서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교회라는 건물, 교회라는 이 단체가 인간을 얼마나 현혹시키는지요. 진실과 진리에 거리가 너무나 멀어진 단체가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인간들이 떼쓰는 집단, 장소, 그게 교회에요. 그 교회에 와서 기도 빡세게 했습니다, 헌금했습니다, 전도했습니다, 뭐 했습니다.
이런 고생에 대한 어떤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나님 우리 인간적으로 이야기해서 줄 거 주고받을 거 받아야 내가 고생하면서도 사는 즐거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며 따지러 오는 거예요. 어디 뭐 예수님이 공무원입니까? 멱살 쥐고 따지게요.
그래서 이것을 정확하게 공격하는 것, 뭐 봐주는 게 없어요, 정확하게 공격하는 그 문구가 11절에 나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하나’를 언급하고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고생은 오직 유일한 것 하나만 인정한다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예수님의 고생이에요. 다른 고생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룩? 영생? 생명요? 천국? 구원? 오직 하나에서 나와요. 하나님 외에는 가라, 다 빼라, 이 말이죠.
그래서 성도의 인생이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의 고생 빼놓고 다 제거하는 거예요, 빼기를 하는 거예요. 성도의 인생이라는 게. 주님 고생 앞에 내 고생의 의미를 다 빼는 거예요. 고생도 고통이지만 이 고생한 걸 아무 소용없는 고생이라는 식으로 제끼고 빼는 것도 보통 마음고생이 아니에요. 보통 고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자신의 고통을 빼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드는가? 마귀가 우리 편이거든요. 마귀가 우리 편이라서 네가 고생한 만큼 어떤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게 예수님의 유일성이에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에요. 오직 예수님께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고 그 외에는 하나님이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악마는 무지무지한 반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예수님의 그 유일성을, 예수님 한 분만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다 마감되었고, 끝장났고, 확정 났다는 것에 대해 인간들을 재촉해서 그들을 데리고 그것에 대해 항의성 발언들을 쏟아내게 만들어요. 그 결과가 예수님을 살해하는 결과까지 낳습니다. 왜 나는 안 되고, 왜 다른 이들은 안 되고 왜 너냐는 거예요. 왜 너냐. 그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뭐냐? 나만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 나만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 바리새인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저거 완전히 정신병자다.”
사람이 뭘 믿으려면요, 나의 노력한 것, 행한 것, 수고한 거, 고생한 거, 거기에 가치가 약간이라도 같이 결부가 되어야 그걸 내가 믿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회사의 주식에 투자했는데 그 회사가 잘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입가에 미소가 확 번지면서 ‘아, 나의 선택이 괜찮은 선택이었네? 나는 이 회사가 잘 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주식을 투자했기 때문에. ‘나는 하늘나라가 확정될 줄 믿습니다.’ 했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하늘나라를 위해 기도를 했다는, 약간이나마 뭔가 하나님의 일에 협조를 했다는 느낌이 결부될 때 우리는 그걸 “믿습니다.”라고 표현을 해요.
“믿습니다.”라는 말을 좀 더 상세하게 분석 해 보면 자기 행함에 대한, 자기 고생에 대한 절대성이에요. 자기가 지금껏 살아온 것에 대한 절대성은 절대적으로 포기 못 한다는 자기에 대한 강한 집착을 말합니다. 그러니 진짜 복음 아는 사람은 교회에서 설교할 맛이 안 나요. 왜? 교인들이 다 그렇게 앉아 있는데요. 전해봐야 종소리 나는 것 같아요. 팅~ 튕겨 나오는 소리. 전하면 팅~. “한평생 고생한 거 그 보상은 없습니다.” 팅~ 튕겨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어느 정도냐 하면, 자신이 고생한 것을 고난으로 승격시키려고 해요. 성경에 나온 고난 있잖아요. 주님의 남은 고난이거든요. 우리 고난 아니에요. 우리에게 쳐들어온 주님 자기 고난이라고요. 골로새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게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골로새서 1장 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인간은 고생밖에 몰라요. 왜? 고생이 자존심이니까.
그런데 여기에 누가 쳐들어왔는가? 성령 받은 주님이 성령을 앞장세워서, 자기 십자가를 앞장세워 쳐들어온 거예요. 성령은 십자가 다 이루었다, 함이 없으면 오지 않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협조를 받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왜냐, 홀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혼자 고생해서 혼자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이상 우리의 고생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자기 백성이 자기 고생을 자기에서 쏙 빼는 거예요. 완전 기름기 빼는 겁니다. 바비큐도 이런 바비큐가 없어요. 기름기 완전히 쭉 빼는 거예요. 빼려면 주님의 고생과 나의 고생을 대결 구도로 가져가는 겁니다.
아담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아담은 자기가 이미 끝났다는 걸 알아요. 자기가 아무리 고생해도 저주받는 게 당연하고 이제 남은 것은 흙인데 그러면서도 아담이 주님을 믿는 것은 나 말고 남아있는 여자의 후손이 뱀을 치기 때문에 여자 이름을 생명이라고 규정 한 겁니다. 그걸 보면 참 신기하죠.
디모데전서 2장, 남자에게 여자가 어떤 존재냐면, 저지레를 한 존재예요. 먼저 저지레를 했어요. 남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여자 혼자 돌아다니다가 뱀과 만나서 작당이 되서 선악과 따 먹은 거예요.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13절에서는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언급하는데 남자는 나중에 선악과 따 먹었고 먼저 따먹은 것은 여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강조하는 이유가 여자 쪽에 죄가 더 뚜렷하다는 거예요. 여자 쪽이 죄가 더 뚜렷하다는 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왜 언급하는 이유가, 구원하는 쪽은 남자가 잘난 척을 해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보다 여성 쪽에서 죄가 더 뚜렷하기 때문에 구원도 여자 쪽에서 뚜렷하게 등장한다는 겁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수치를 뭐로 가리느냐? 화장발로 가리거든요. 화장발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만큼 내 속은 부끄러운 게 있다는 뜻이에요. 남자의 부끄러움은 자기의 객기와 노동력으로 드러내지만 여자는, 이건 어디까지나 내 주장입니다, 믿진 마세요, 여자의 객기는 화장발입니다. ‘내 얼굴 이쁜 거 봐라.’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여성에게 죄가 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 죄인을 가지고 천국 백성을 어떻게 만들어낼까요? 육에서 어떻게 영이 나오는가? 자기 고생밖에 모르는 저주 받은 자를 어떻게 주님의 고난까지 이해하고 자기 고생을 아낌없이 무의미하게 내버리고 주님의 고난만이, 오직 그것 하나 고난의 유일성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바로 새로움에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이에요.
디모데전서에서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5절 ‘남자 너희들은 해산 못 하지?’ 이런 뜻이에요. ‘남자 너희들은 해산 못 하지? 우리는 해산한다?’ 해산이 뭔데? 해산은 여자가 죽고 죽은 다음에 여자 안에서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해산이라고 해요.
그러면 엄마는 뭐 다 죽어야 하는가. 죽을 만큼 아픈 것, 죽을 만큼 아픈 것. 고통을 통해 나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먼저 느끼는 건 여성이에요. 왜? 새 생명 때문에 아낌없이 구 생명은 날아가야 됩니다. 그 고통을 직접 경험한 것은 아기 낳는 여성입니다.
이러한 고통이 하나님이 죄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 작전이에요.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거든요. 이름이 예수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는 길은, 바로 마리아가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 그 아픔을 이제는 예수님께서 잉태된 자로서 거꾸로 죄인에게, 죄인 속에 그걸 집어넣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미 거룩한 자가 거룩에 대해 거룩함을 받아야 될 자를 집어넣음으로서 거룩한 자와 거룩 받는 자가 오직 하나에서 난다는 것, 예수님의 고통이 십자가에서 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하나님의 뜻. 이 세상에 그 뜻 말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른 뜻은 다 사기에요.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교회가 사기 단체에요. 교회는 인간들의 고생을 끌어모아서 천국 보내주겠다고 사기 치는 곳이에요. 헌금 하는데 얼마나 고생이 들어가요? 기도하는 것도 그렇고 전도도 그렇고. 그리고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고생이에요. 마태복음 8장에서 그 예수님의 일관된 취지가 제자들과 함께 더불어 있으면서 일이 하나 터지죠. 8장 23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갑자기 바다에 파도가 일어났어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이젠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어요. 인간은 하도 고생이 많으니까 제발 고생을 줄이든지 없애주면 좋으신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을 용의가 있어요. 그래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내 개떡 같은 인생 좀 이렇게 삐까삐까 빛나는 인생으로 바꿔주시면 내가 손들고 교회 나올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사기에 걸려든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난데없이 파도가 일어나면서 제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이 뭐냐?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에요. 여기서 제자들의 숫자가 열두 명입니다. 열두 명인데 주님의 뜻에서 유발된 단 하나의 폭풍 속에서 열둘이 날아가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같이, 직업, 인물, 인격, 키, 성격, 관계없이, 출신성분 관계없이 모두가 폭풍 속에서 하나 같이 그들은 죽음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물을 퍼냈죠. 이 물 퍼내는 게 뭐냐? 고생이에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정의가 성립됩니다. 인간이 고생하는 것은 안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이미 네가 죽었다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고난 주신 거예요. 네가 안 죽으려고 고생해 봐야 너만 고생이죠. 일 다 끝난 겁니다. 다 끝났어요. 아담의 고생은 아담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에요. 다 이루었어요. 생명을 이루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데 쓸데없이 그들은 물 퍼낸다고 한 거예요. 옛날 했던 행세처럼. 그들의 행세가 뭐냐?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겁니다. 고생 뒤에 지옥이 오겠죠. 분명히 이야기해요. 고생 뒤에 지옥이 오지 고생 뒤에 낙이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고생하면 천국 가겠지.’ 그게 바로 수녀원이고 수도원이에요. 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이 수도원 수녀원이에요. 무슨 뜻이냐면, 내가 이렇게 안일하게 고생하면 천국의 합격이 영 보장이 안 되거든요. 더 빡세게 고생할 대로 한 번 고생 해 보자, 이게 수도원 수녀원입니다. 참 여러분 위험한 곳에 와 있는 거예요. 이 교회 온다는 거,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모르고 단지 주님을 위해 노력하고 고생한 것만 기억하는 이것이 바로 자기를 도리어 지옥으로 가세시키고 속도를 더 증가시킨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풍랑이 일어날 때 그들은 자기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왔는가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다 드러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생이 끝났을 때 할 도리 다 했는데, 꼭 아담 같애, 끝났어요. ‘야, 이건 죽었다.’ 그렇게 치고 예수님이나 한 번 깨워보자는 식으로 깨웠습니다. 예수님이 깨어나니까 주께서 이 풍랑에 어떻게 조치를 취해주실 줄 알았는데 제일 먼저 한 것이 제자들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행함만 있고 믿음이 없느냐?” 너희들은 왜 너희의 고생과 노력을 믿느냐, 이 말이거든요. “나를 믿어라.”
그런데 인간은 고생에 대한 대가만 염두에 두고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 바깥으로 못 나와요. 내 고생함을 믿는 게 믿음의 최종적인 방식이고 그것만 마귀에게 배웠기 때문에 다른 믿음은 생각도 못 하는 거예요. 꾸중 실컷 듣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풍랑아, 파도야. 조용해. 조용해야지!” 이러니까 금방 잔잔해졌어요.
그러니까 풍랑과 파도보다 더 못한 거예요. 풍랑과 파도는 잔잔해졌는데 옆에 제자들이 웅성거립니다. “저분이 누구지? 저분이 누구시기에 풍랑과 파도도 잔잔해지는 가?” 꼭 폭풍의 소용돌이속에 들어가야 우리가 이렇게 정신을 차리는 겁니까? 내 고생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있으면 안 돼요. 나는 이미 죽은 자인데 시체가 있다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시체는 시간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시체는 죽었기 때문에요.
그러면 시간은 뭐냐? 시간이 있다는 것은, 모든 시간은 인간을 위한 시간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시간이에요. 요한계시록 12장 14절에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라는 구절이 나와요. ‘한때, 두 때 반 때’
이것은 뭐냐? 인간을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 안 돼요. 인간을 위한 시간은 없고요. 주님의 고난의 절차를 그렇게 ‘한때, 두 때, 반 때’로 설명한 겁니다. ‘때’라는 것은 한 시간 당 한때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때, 그다음에 또 한 때가 되어야 하는데 두 때라는 말은 앞에 있는 한때가 없으면 뒤에 두 때라는 말이 성립이 되지 않거든요.
한때, 그다음에 첫 번째 때가 있으니 두 번째 때라는 뜻의 한때, 두 때에요. 한때 두 때, 그다음 인간들이 예상하기엔 세 때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세 때가 아니라 반 때에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시간이라는 것은 1에서 2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방향성의 최종 지점이 반 때라는 겁니다.
사건 하나에 한 때가 할당이 되는데 반 때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되거든요? 그럼 반 때는 뭐냐? 반 토막 난 때, 이게 다니엘 9장에 나오는 건데, 사건이 어디에 걸쳐 있느냐? 지상에 반 때가 걸쳐있고 지하, 이 땅에 반 때에 걸쳐있어 통합해 한때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육에서 영으로 가는 거예요. 육으로 오신 주님이 어떻게 영으로 소멸되는가, 사라지는 가를 유일하게 주님의 인생을 통해서만 그게 밝혀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제자들 또는 마리아보고, 막달라 마리아인데 마리아가 만지려고 하니, 예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인간에게 만진다는 것은 행함입니다. 관찰하고 측정하는 행함이에요. 행함은 고생의 일종이죠. 행위의 일종이니까, 고생. 자기가 주의 일에 끼어드려는 하나의 몸짓일 수 있어요.
그런데 “만지지 말라. 너는 육에 속했고 나는 영에 속했다. 너는 하늘과 중첩되지 않은 상태고 나는 이미 중첩된 상태다.” 이렇게 부활이 되고 난 뒤에 주님의 육신은 그 다음에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밀려오게 되어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부활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비로소 성도에게 뭐가 주어지는가? 고난이 주어져요. 부활이 먼저 있고 고난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 내게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거예요.
성경에 베드로전서 그리고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나오는 모든 환란은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완성된 구원을 가지고 쳐들어온 그 현상을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 이루심이 쳐들어오는 것을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천당, 천국 가려고 애쓰는 것은 고생이고요.
그러니까 그 마주침, 주께서 다 이루심과 내가 알아서 구원하겠다는 이 마주침에서 십자가 사건은 날마다 퍽, 퍽, 하고 터져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고생을 담보로, 고생에 기초해서 자기 자신을 버티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아주 명쾌하게, 참으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거 진짜 줄 그어놔도 괜찮아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십자가가 우리에게 확장되어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걸 위하여 어떻게 되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입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보편성에 대결하는, 보편성과 맞닥뜨리는 유일성입니다.
그 유일성에 대해서 누가복음 4장 25절에서 27절까지가 정말 명쾌하게 잘 표현되어 있어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많은 과부, 일반성 또는 보편성이라고 했죠,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뿐이었으며” 이게 뭐냐?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지나 개나 성경 공부하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불러주지 않으면 구원이 없어요. 그런데 그 부르심이 고난을 위한 부르심이에요. 고생고생하지 말고 고난 속에 참여 하라는 겁니다. 왜? 이 고난이 부활의 능력으로 오기 때문에 그래요. 선교단체에서 대학생들 모아놓고 하는 여러 가지 들이대는 중요한 성경 구절 중에 하나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11절입니다. 이 말씀 들으면 “아, 그 말씀!” 하고 알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분명히 이 본문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구원받는 것은, 부활에 가는 것은 고난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교단체는 뭐냐? 고난이 아니고 고생을 언급해요. 아, 글자 한 자 차이인데, 고난인데! 고생이 아닌데! 애들이 뭘 알겠어요? 고생하면 천국 간다는 겁니다. 그런 복음은 마귀가 그렇게 하지요, 마귀가.
천사는 하나님 편이에요. 그러나 성령은 누구 편이냐 하면, 우리 편 아니에요. 성령은 예수님 편입니다. 그러면 우리 편은? 우리 편은 없어요. 전부 시체한테 무슨 편이 있어요? 시체가 시체 되어야, 흙이면 흙이 되어야 마땅한데 무슨 내 편이 있습니까? 여호와는 내 편이라 했던 여호와는 망했어요. 시편에서. 인간은 본인이 알아요. 하나님한테 원망할 게 아니고 본인이 벌써 그걸로 완전무장하면서 이 땅에 태어났어요.
외손녀가 뜬금없이 자기 할머니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할머니, 우리나라도 전쟁해요?” 갑자기 뭐가 걱정이 되었는지. “그래, 전쟁한다.” “누구하고 하는데요?” “북한이 쳐들어오면 전쟁한다.” 막 근심에 젖었어요. “전쟁하면 할아버지도 전쟁터에 나가요?” “할아버지는 나이 많아서 안 나간다.” “그러면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나가야 될걸?” “그러면 나는요?” “여자는 군대에 가도 되고 안 가도 된다.”
옆에 보니 자기 남동생이 있거든요. 남동생 보면서 “그러면 남자는 군대 가야 된다면 나단이도 가야 돼요?” 그 소리 듣고 외손자가 철퍼덕 이불에 엎어지면서 “나 안가!” 외손녀가 하는 말이 “우리 아빠도 빨리 할아버지처럼 70이 되었으면 좋겠다. 군대 안 가게.”
이게 뭐냐? “난 안가!” 이게 자기 절망입니다. 벌써 김정은이가 있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인간이 얼마나 평소에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지를. 이 정도로 인간은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겠다는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되어가는 이미 저주와 더불어 함께 있어요. 저주받은 거예요.
자기 고생에 울고, 고생에 웃고. 인간사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고생에 대한 의미를 창출하는 것, 그 생각으로 24시간 다 보냅니다. 이제 문제는 그겁니다. 인간이 자기 고생에 집착해서 고생밖에 모르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 주께서 구원하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의 이 모든 조치가, 십자가 죽음 조치가 인간을 악마가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 그 내부적으로 악마와 결탁되어 있는가를 파헤치면 거기에 해답이 나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말은, 인간 자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하려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이름 말고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을 거기다가 이 땅에 내려보낸 거예요. 그러면 복수형 아버지 이름이 돼요. 두 개의 아버지 이름. 복수, 하나가 아니고 두 개.
어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내용을 여러분이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아들보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회사를 너에게 물려줄 수 없어. 너는 이미 잘렸어.” 아들이 이렇게 해요. 답변이 너무너무 자기의 본심을 노출시켰어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께서 악마보고 “너 잘렸어.”라고 할 때 악마의 심성을 갖고 있던 모든 인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뭐냐?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행함을 딱 제시를 해요, 행함을.
그것은 아버지의 결정을 모독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또 나오는 아들의 이야기에요. 이것은 <재벌×형사>라는 그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에요. 아버지가 큰아들 잘라낸 거예요. 구체적인 내용은 동영상 찾아보면 되고요. 먼저는 진명철 회장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거고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 “아버지, 저한테 이래도 되는 거예요?”
이게 놀랍게도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악마의 본성은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것이 몽땅 내 것이 되는 여기에 악마의 속셈, 본심이 인간대대로 저주를 물려받은 인간성입니다. 인간성은 아버지를 모델로 하되 아버지를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아버지로부터 해방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갖고 있는 절대적인 권력을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내가 아버지처럼 절대성을 갖고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건 악마가 심어준 타고난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에게 제사를 받음으로써 형인 큰아들이 잘렸거든요. 그 큰아들이 동생을 제거함으로써 곧 이제는 내가 나의 창조의 기초가 되면서 나는 내가 창조한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요? 그것은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서 믿는 거지요. 하나님을 다루기 위해서 믿는 거예요. 하나님을 다룰 것도 없고 재미 없다 싶으면 이제 교회 안 나옵니다. 자기 맘대로 살아요. 빠라빠라빠라빰~, 이러고 살아요. 내 고생, 내 보람으로 사는 거예요.
이게 숨겨놓은 하나님의 비밀이고 이게 본색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자기 의라고 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주께 은혜를 받아놓고 이때까지 있던 나의 모든 의는 이제는 배설물로 이제부터 설사하겠습니다. 좍좍 빼겠습니다. 내가 고생한 것, 내가 이만큼 되게 노력한 것 다 주님의 성령으로 좍좍 빼겠습니다.
싹 빠지는 거예요. 플러스가 아니고 마이너스가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빠지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그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또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좍좍 빠지는 것, 이게 바로 주의 말씀으로 죽을 때만 우리는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자살한다고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고생과 고난의 전쟁.
하나님의 방법은 주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생을 삼킵니다. 삼켜버려요. 삼키게 되면 이걸 가지고 주의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게 돼요. 내 고생 자랑하려고 사는 게 아니고 주님의 고난만이 모든 것이 완료된다, 완성된다는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복수형, 두 개의 아버지의 이름이니까, 예수님에게 또 하나의 아버지의 이름이 있지요. 인간의 이름은 자식이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자기를 절대화하는 그것을 인간은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를 위한 천국이지요.
그런데 반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은 뭐냐? 후손이 도리어 아버지를 살려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살려요. 이삭이 아버지를 살리고 야곱이 이삭을 살려요. 아버지는 뭣도 모르고 첫째 아들 에서한테 축복을 줬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을 틀어지게 만들어서 둘째 아들 야곱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살리게 만든다고요.
그리고 마지막 후손, 끝이 되는 후손, 마지막 낳은 아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 살리는 방식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세례라고 이야기해요, 세례. 세례는 막혀있는 입구를 뚫어버리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세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물세례, 또 하나는 불세례, 또 하나는 성령세례입니다.
물세례부터 나오는 이 세례의 공통점은 내가 원치 않는 고생 속에 다이빙하는 겁니다. 풍덩 뛰어드는 거예요. 아까 마태복음 8장에서 제자들은 폭풍 속으로 강제로 몰려 들어갔지요. 그냥 강제로 몰려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그냥 ‘이 예수가 누구지?’ 이렇게 하고 끝났는데 그 예수가 누구냐, 하는 그 질문, 그 질문 속에서도 아직도 제자들에게 남아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저 버릴 거 아니지요?’ 이런 주문이 성경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죽 보면 수시로 삐져나와요. 계속 나와요.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뭔가 대화를 한다든지 말을 걸었다 하면 “저 천국 가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주님, 저 아예 버릴 거 아니지요?” 이 두 가지가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마태복음 23장 8-12절에 끝 장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헤어질 장면에 왔어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지금 저 뭐하면 돼요? 저 버릴 것 아니지요? 주님, 저 떼놓을 것 아니지요?’라는 그런 질문 앞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할 마음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요. 자기는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큰 자가 되고 싶고, 겸손에 대해서도 경쟁하기 마련이에요. 누가 더 겸손한가 시합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시면서 마감을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결별입니다, 결별하는 것. 물세례는 그게 잘 안 나타나요. “여기 물에 빠지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씻어줍니다.” 할 때는 어떤 경우냐?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물세례 받으면 돼요? 물세례 받으면 내 지은 죄는 깨끗하게 허물어지고 이제는 죄 없는 깨끗한 사람 되지요?”라는 생각을 가지고 물세례를 받기 때문에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에 대한 미련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 하나 고생해서 그 덕으로 내가 구원받는 그런 방식이라면 나는 고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거예요. 이게 물세례에요. 그런데 물세례 다음에 성령세례가 와야 되는데 주께서는 뭘 언급했느냐 하면, 세례요한한테 불세례를 언급해버린 거예요.
불세례를 언급하니까 물은 산채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되지만 불은 들어가면 홀라당 태워버리기 때문에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불세례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저 버릴 것 아니지요?”라는 그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 불세례에 대해서 돌아서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불 세례를 지나가야 나오는 게 뭐냐? 성령세례에요. 따라서 불세례는 누구만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만 십자가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을 세례, 불.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주님만 받을 수 있어요. 이게 뭐냐? 주님 불 세례, 십자가로 말미암아 드디어 제자들과 예수님은 결별상태에 들어갑니다.
결별해 버려요.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결별. ‘저 버릴 것 아니지요?’ 네 관심사는 주님의 관심사와 헤어진 결별이 돼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주께서 성령세례를 홀로 주시지요. 오면 되고, 안 오면 끝이에요. 성령 오면 구원이고 안 오면 끝이에요.
이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주님의 고난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부르심을 받기 전에 내가 내 구원을 위해서 어떤 작당을 하고, 내가 나와 모의하고, 내가 내 안에 있는 마귀와 어떤 식으로 논의했는가가 다 드러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길 속에 길이 있으니까요. 바깥에는 고난의 길, 안에는 고생의 길. 고생을 통해서 고생이 소용없다는 것을 바깥에 난 고난의 길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성령 안에 육신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남은 우리의 생애가 어떻게 되는가?
끝으로 마태복음 13장 31-33절이 그걸 말해줍니다. 잘 한번 들어보세요. 이게 무슨 뜻인지요. 주님의 말씀이니까 무슨 뜻인지 한 번 새겨보세요.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두 개의 비유의 공통점은 ‘저절로’입니다. 저절로. 저절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주께서 훅~! 부풀게 하시고 훅! 우리로 하여금 너와 내가 형제가 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말고 주님의 형제라는 말은 ‘유일성’, 주께서 집어넣은 부풀게 한 그 유일성, ‘주님, 주님 홀로 다했다’하는 것만 계속 남아있을 때만, 형제간에, 성도 간에 대화가 돼요. 자기의 고생이 끼어들면 대화가 안 됩니다. 자식 키우고 손자 키운다고 고생하면요, 짜증나요. 짜증난다고요. 특히 장거리 차 타고 가는데 뒤에서 자기 고생한 이야기 하면 앞에서 운전하다가 살짝 신경질 나요.
말만 꺼내면 자기 고생한 거. Are you Messiah? 당신 메시아요? 당신 유일하십니까? 고난이라는 것은 오직 한 분밖에 없는 주님이 눈치코치 없이 내 스케줄, 내 인생 사이에 그냥 허락 없이 밀려 닥치고 밀려 들어오는 겁니다. 어떻게? 저절로! 뭐가? 누룩이요! 뭐가? 하나의 밀알, 믿음이요! 아, 바로 주님의 다 이루심과 함께 있는 이것이 바로 ‘천국’이고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주와 동행하는 성령 안, 성령 안의 세계…, 방금 불세례에서, 불심판에서, 지옥불에서 벗어난 그 세계, 그것이 바로 주님의 행하심만 자랑하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그 세계가 바로 성령의 세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동안 자기의 고생한 것에 대해서 미련을 두고 남 앞에서 그거 키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키우지 말아야 될 것을 키우고, 내세우지 말아야 될 것을 내세우면서 남한테 안 지는 인생 되려고 시도한 그 배후에 득달같은 악마의 활동이 있었음을 이제는 눈을 뜨고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