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와 형제
2024년 3월 31일 히브리서 2:12-13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사도는 이 짧은 내용을 설명하면서 구약의 구절들을 많이 인용합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22:22) ‘의지 한다’에 대해서는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리고 ‘내게 주신 자녀에’ 대해서는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사 8:18)에서 인용합니다. 구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징조와 예표’를 통해서 비로소 ‘형제’가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현 관계망으로서는 결코 ‘형제’가 성사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예언의 힘이란 곧 하나님께서만 해내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천국은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언 안에 포집된 채 ‘형제’가 되고 구원됩니다.
그 이유는 이 ‘형제’가 ‘예수님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형제는 맏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경우가 그대로 적용받게 되고 침투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일어난 일은 히브리서 2:9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예수님의 형제는 인간들의 의도를 가지고 될 수 없는 것도 이사야 8:18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에만 국한 됩니다. 인간들이 천국가고 싶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아닌 겁니다. 먼저 주님쪽에서 움직이여 합니다. 찾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인간들이 천국에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사적인 의욕과 의도에 의해서 천국 가려는 것을 굳이 막으시려는 겁니까? 그것은 최우선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장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의 이유는 ‘찾아주지 않음에도 천국을 기어이 가겠다’는 인간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개인주의적 의도를 막으시려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형제’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개인을 절대화하는 식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고립과 은둔과 도피와 자폐적 생활 태도를 보이면서 개인을 절대화하는 성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만나는 것은 결코 하나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기 절대화를 도모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것 할텐데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무얼해 주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 흥정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나를 천국까지 이끌어주시겠습니까?”라는 태도를 갖고 교회에 나옵니다.
이런 인간들의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언을 들고 그들을 거부합니다. 예언은 인간들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당사자인 예수님께서는 이미 인간들에게 거부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이미 모든 인간들이 자기 무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함을 전제로 한 예언의 성취이십니다.
즉 인간들의 진로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몽땅 죽임을 당하고 그 다음에 천국행일지 지옥행일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정하기 나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부활된 자들은, 더는 자신을 산 자로 여기지 않고 죽은 자로 여겨서 그 죽은 자가 왜 꼭 죽어 마땅한지를 살피게 됩니다.
마치 살인이 일어난 현장을 보존하고자 하는 현장 감식반의 태도와 세상을 조망하는 관점이 성령을 통해서 생겨나는 겁니다. 죽은 당사자가 자기 죽음의 감식반으로 투입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죽고 난 뒤에 아직 경험하지 않는 자신의 남은 과거를 미래에 접하게 되는 겁니다.
이는 조금이라는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나오는 구원욕구를 거부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고기를 풍성히 잡아주고 난 뒤에,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을 생각해 보세요.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즉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자신은 자신의 본업이 고기잡는데 열중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이고 이것이 주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개인주의는 너무나도 지독해서 가족의 깊은 정이라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이 율법 속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됨은 오로지 하나님의 희생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사기 2:7-10에 보면,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전하는 진리를 아버지가 듣고, 또 손자에게 전달하지만 갈수록 그들은 그 ‘하나님의 희생’을 언급하는 진리에 관심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자신을 사는 쪽으로 지키고 싶은 겁니다. 개인들은 같은 개인들이 형성해서 구축된 의미체계를 신봉합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식으로 자기를 안 죽은 자로 유지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개인주의 의식으로 단단하게 굳어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그들 보기에 꿈같인 내용을 집어넣습니다. 꿈을 꾼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고 그 요셉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장자가 됩니다. 그것은 꿈의 내용대로 그가 희생을 했고 다른 지파들은 요셉의 꿈의 덕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창 37:9-11)
인간의 현실은 개인주의+개인주의+개인주의+ … 해서 생겨난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예언은 여기에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주님의 희생된 몸에 인간들의 개인주의적 죄로 인해 생긴 구멍이 있습니다. 이 구멍과 연결된 자가 바로 ‘예수님의 형제된’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이미 죽은 것도 모르고 살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 죄가 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히브리서 2장 12-13절(개인주의와 형제)24033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2장 12-13절입니다.
히브리서 2:12-13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오늘 본문에 구약에 관한 그런 내용들이 연이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구약에 언급된 내용,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이 말은 시편 22편 2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이것은 시편 18편 2절에 나오는 말씀이고 다음에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이건 이사야 8장 1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히브리서를 쓴 사도가 구약을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구약 내용 가운데 ‘형제들’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형제들이란 사람들이 신약 성경에는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형제라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그러면 어디에 있느냐? 형제는 구약의 예언 안에 들어있어요. 말씀 안에 형제가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단합하고 연결하기 위한 인간들의 언어들이 있지요. 그 안에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형제라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없는 형제를 구약에 예언된 대로 만들어 내게 될 때, 없었는데 예언이 성취되면서 비로소 나타난 그 형제들이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약들을 언급한 거예요. 여기 12절에 나오는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할 때 형제란 말 앞에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이 형제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형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비로소 형제가 된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 주의 이름이 누구냐? 여기 히브리서 2장 10절에 보면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러니까 이 형제들을 위하여 주님이라는 분이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게 되는 겁니다. 2장 9절에 나와요.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을 함축하면 형제라는 것은, 천국 갈 백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데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여러분 아시죠? 연결되어 있는 거, 형제 중에 맏이가 되는, 맏아들, 장자 되시는 분이 죽었다가 고난을 받고 다시 사시게 되면 그 장자, 맏이에 따라서 비로소 없었던 형제들이 계속해서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거예요. 형제라는 게 없는데 계속 이어져 나오는 겁니다. 마치 기차놀이 하듯이.
그렇게 예수님에서 잇지를 못하고 그냥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 형제들의 차이점이 뭐냐? 이 쭉 이어져 나와서 나온 사람들 형제들의 특징은 12절에 나오는 것처럼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 고난받으신 주의 이름 덕분에 살아가는 사람이고 거기에 종속되고 매인 사람들을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인간들이 이렇게 형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12절 13절에 사도가 구약에 있는 예언을 언급하는 거예요. 예언을 언급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행위 해야만 비로소 등장하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형제들이다, 이 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형제가 될 수 있는 어떤 권한이나 여건 그런 것은 인간세계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왜 인간세계에서는 천국 가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느냐? 왜 없어야 되는가? 그것은, 형제들의 특징은 주님의 이름에 종속되어 있어요. 주의 이름에 매여있다고요.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어디에 매여있느냐? 자기 개인주의에 매여있어요. 주의 이름 아니고 자기 이름에 매여있어요, 자기이름.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개인주의+개인주의+개인주의’들이 모인 거예요. 그냥 개인이 모인 것이 아니고 개인주의자들이 모인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 하는 자들만 모여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며 그 세상에 통용되는 그것이 의미인데요, 그들 사이에 있는 인간관계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주님의 형제라는 것, 주님의 형제라는 새로운 관계망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같이 합세 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되지 않느냐,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 저 주의 이름을 부르니까 천국 보내주세요.” 하면 될 게 아니냐, 하는데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맏이 되시는 분이 실제로 죽음의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안 돼요. 맏이 되시는 분과 동일한 체험이 없기때문에, 그 맏이 되시는 분의 동생 또는 맏이 되시는 분의 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의 이름이 너무 남발되고 있는데 남발될 만큼 인간이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불러도 그 주의 이름은 어디서 나온 이름이냐, 어디서 나와 어디로 돌아가느냐? 개인주의 입장에서 나와서 개인주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것은 거짓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네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너는 부를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주의 이름을 불렀냐?’고 물어요. 네가 하나님의 예언된 것에 의해서, 예언의 성취 차원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닌 게 명백하고 확실한 거예요. 어떻게 해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될 수 없고, 하나님 예언의 힘과 능력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야 돼요.
내가 내 개인주의적 의도에 의해서 부르는 주의 이름과 예언에 의해서 부르는 주의 이름에는 어떤 차이가 나는가? 예언에 의해서 주의 이름을 불러버리면 그것은 이 세상 전체를 다 조망할 수 있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 수 있어요. 그걸 영어로 미라클, 기적이라고 해요. 모든 게 기적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모든 게 기적이 되는데, 사도는 지금 예언을 동원하면서 기적을 전 우주까지 확장 시켜 버렸어요.
모든 우주에 하나님의 예언이 포함되지 않는, 거기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 예언된 대로 움직인다. 그 결과가 뭐냐? 그 결과가 참 신기하게도 인간의 개인주의는 개성들이기 때문에 자기 기분대로 살아가서 따로 따로 노는데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어떻게 되느냐? 아무리 인간이 애쓰고 노력해도 천국 갈 사람은 천국행으로, 지옥 갈 사람은 지옥행으로 딱 분류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다는 거예요.
세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천국 갈 자는 필히 천국 가고, 지옥 갈 자는 필히 지옥 가는 거예요. 이게 예언된 거예요. 그 증거가 13절에 나옵니다.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개인주의 입장에서는 제일 무서운 예언이 이 예언이에요.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게 모토입니다. 이게 원칙인데 여기 보니까 하나님의 예언된 바에 의하면, 예언되어서 형제 된 바의 공통된 점은 뭐냐?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가 따로 챙겨져 있다는 것, 따로 분류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언이 아무나 찾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 주님께 주신 자에게만 예언이 들어가서 불러내는 거예요.
이번에 모스크바 테러범이 잡혔어요. 잡혔는데 현장에서 심문하는 게 동영상으로 나와 있어요. 경찰이 묻죠. “너에게 테러를 지시한 사람 이름이 뭐야?” “이름은 모릅니다.” “그럼 연락처 대 봐.” “연락처도 모릅니다.” “그럼 너 왜 총 들고 테러했어?”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는 거예요. 자기는 테러할 생각도 없고 70만 유로인지 돈 얼마 하지도 않아요, 뭐 몇백만 원 받고 테러해주는 거예요. 그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거예요. 이거 미라클, 기적이죠. 얼마나 신기합니까.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이 죽으실 때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의미를 아는 자가, 예수님 열두 제자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부터 전부 다 개인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모든 의미 체제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주의 체제 속에서 이 세상에서 산다는 말은 ‘내가 너한테 해 주면 넌 나한테 뭐 해줄 건데?’ 이거에요. 이게 이 세상의 개인주의적 의미 체제입니다. ‘내가 예수 믿을 건데 하나님 나한테 뭐 해줄 거요?’ 이게 개인주의적 의미 체제에요. ‘계산해 보니까 하나님 믿는 게 이익이 되네? 그럼 내가 예수 이름을 불러야지. 십자가 믿어야지.’ 이게 바로 개인주의죠. 하나님의 예언과 관계없는, 전혀 예언과 관계없는, 나중에 자기가 죽어서도 이익 보기 위해 개인적인 욕구가 발동한 거예요. 가짜 아닙니까? 당연히 가짜죠.
예언된 내용에는 주의 이름을 위해 예언되었지 내가 사적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언된 그런 예언은 없어요. 그래서 이 교회라는 것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야 되는데 개인과 개인이 모이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의 모임이 교회에요. 교회 숫자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왔기 때문에. ‘교회 참석해 주는 대신 하나님 나한테 뭐 해줄 거요?’ 이런 사고방식 가지고 왔기 때문에 전혀 예언과는 관계가 없어요. 형제도 아닙니다. 형제일 거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어요, 그 자체가.
이 개인주의의 가는 방향은 고립이고 은둔입니다. 닫힌 생활이죠. 그리고 내빼는 겁니다. 폐쇄적이고 스스로 자폐고, 도망치고, 내빼고, 내빼고 도망치면서 그러면서 항상 마음속은 긴장해 있으면서 ‘내가 당신에게 해 주면 당신은 나에게 뭘 해줄 건데?’ 그거죠. 왜냐하면 그게 개인이 개인을 살리는 의미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따라서 이 개인주의는 어딜 가도 경쟁이고, 다툼이고, 특히 유념할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방어기제로 작용한다는 것, 내가 살기 위해 요령 피웠던 것이 지금의 나를 지켜주는 방어체제, 방어 장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여기 ‘주의 이름’이라는 개념과 ‘형제’라는 개념 그리고 12절에 ‘교회’라는 개념 13절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 전부 다 예언 안에 박혀있는 단어들이에요, 예언 안에. 그래서 개인주의는 이 예언의 세계 속에 자기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 여기 끼어들 수가 없어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천국 가고, 주님의 형제 된 사람은 어떻게 형제가 되는가? 그것은 맏이 되시는 예수님 본인의 역할이에요. 이건 다른 사람은 못해요. 맏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일단 형제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형제와 마찬가지로 죄인 된 육신의 몸으로 오셨거든요. 태어날 때부터 죄의 몸으로 태어나신 거예요. 이것조차도 하나님 예언된 대로 되어야 하거든요.
이게 뭐냐면, 예수님의 몸은 그 자체가 쌍둥이입니다. 어떻게 쌍둥이냐? 산 자의 몸과 죽은 자의 몸, 더 나아가서 죽은 자의 몸은 선악과와 관련되어 있고, 산자의 몸은 생명나무와 관련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몸은 하나인데 그 자체 안에서 쌍둥이로 되어 있어요. 쌍둥이가 되어 있어야 예언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언급하는 그 예언,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 예수님이 부여받은 예언의 효과, 예언의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예수님의 몸은 하나로 시작하지만 그 내용은 둘로 갈라지고, 둘로 갈라진 것이 다시 하나로 통합됩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몸으로 이 땅에 먼저 오셨어요. 그러니까 죽을 몸이 먼저고 산 몸은 나중이 되는 겁니다. 죽을 몸이 먼저인 이유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몸을 입고 왔거든요. ■선악과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저주,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저주받으리라, 죽으리라, 하는 그것이 작렬하는 몸으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 몸 안에서 이것이 생명 나무의 몸으로 전환이 돼요. 그 절차가 완료가 돼야 되고, 예수님이 많은 형제들 중 맏이라는 위치에서 그것을 성취시켜 줘야 ■예수님이 홀로 이루셨던 그 결과물이 형제라는 것을 생산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근거가 되는 거예요.
여기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되어 있어요. 왜 에서와 야곱 가운데서 어차피 야곱이 맏이가 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야곱을 먼저 태어나게 하든지 아니면 먼저 태어난 자를 야곱이라고 이름하면 되는데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태어난 에서를 저주받는 자로서 태어나게 만들어 버렸어요. 순서가, 절차가 저주받는 거예요.
그다음에 두 번째 태어난 동생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복 받는 자가 돼요. 로마서 9장에 에서과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는 미움받고 하나는 사랑받는다고 했잖아요. 미움받을 자를 먼저 태어나게 하고 사랑받을 자를 나중에 태어나게 했어요.
둘 다 개인주의자입니다. 육의 몸에서 태어났으니까,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태어난 아버지 밑의 자식도 개인주의,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를 지키고, 사수하고, 방어하고, 경쟁하고, 이기고. 야곱의 별명이 뭐냐? 지고는 못 산다는 거예요.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육의 몸이죠.
그래서 하나님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거예요. 왜? 자기밖에 모르는, 그래서 이겨야 된다, 해 놓고는 감히 어디를 넘보느냐면 주님의 천국 백성을 넘보고 있는 거예요. 이게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둘 다 말이 안 돼요. 둘 다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둘 다 자기밖에 모르는 여기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 서로 붙이고 경쟁하고 싸우게 해 놓고서는 거기에 무엇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드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거기에 끼어듭니다.
하나님 자신이 뛰어드는 것이 바로 얍복강 가에서 야곱과 하나님이 씨름하는 거예요. 경쟁하고 투쟁하고 씨름하고 ‘지고는 못 산다. 필히 이겨야 되겠다. 이기는 자가 천국 간다.’ 뭐 이런 의식이겠죠. ‘복 받는다.’ 그런데 거기에서 누가 지고 누가 이기느냐면, 야곱이 이겨요. 그리고 누가 지느냐? 하나님이 인간에게 집니다, 져요.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이겨놓고 뭘 깨닫느냐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그리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섬겨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 자기가 상대한 자는, 자기가 태어날 때 계시를 줬던 그 하나님 당사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긴 자가 되었는데 이긴 자가 되었다는 입장에서 처음에 자기가 태어날 때 엄마와 아빠에게 주어졌던 그 계시와 비교해보니까 거기에서 갈라짐이 생긴 거예요.
인간에게 나왔던 인간 자기의 개인주의적 욕구와 욕망과 하나님의 계시와 내용이 불일치가 되는 겁니다. 맞지가 않은 거예요. 여기에서 야곱은 자신의 죽음,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그 자체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뜻과 끊어진 상태인 것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이미 모든 벌어진 상황에서 전체적으로 조망한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예수님의 부활이. 그래서 주님의 영, 성령을 받게 되면 이미 부활 상태에 놓여있게 돼요. 예수님의 성령을 받게 된 자가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고 모든 것이 기적 아닌 것이 없는 이유는, 자기하고 관계없이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의 애씀과 관계없이.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가 이미 죽고 난 뒤에 죽은 자기에 대해서, 이 살인 사건에 대해서 현장감식반이 경찰에서 투입되잖아요? 경찰 감식반 중에 한 일원이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본인이 자기 죽은 상태를 보고 이 인간이 왜 죽었는가를 살피는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왔다는 말은, 부활하신 분의 영이 왔다는 말은 예수님 빼놓고는 모든 인간이 죽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죽고 난 뒤에 아직 경험하지 않은 남은 과거를 미래에 접하는 것, 그게 성도의 남은 생활입니다. 더 쉽게 간추려서 말하면 ‘이미 죽었는데 뭐 하지?’ 이거에요. ‘이미 죽었는데 뭐하지?’
죽었다가 주님에 의해서 살아났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왜 꼭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고, 내가 뭘 해도 뭐든지 해도 죄가 되어야 될 그 이유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고, 이게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미라클, 모든 게 기적 아닌 게 없이 된 거예요.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가? 개인주의이기 때문이에요, 개인주의 때문에. 이 개인주의에서 인간이 못 벗어납니다. 성경을 봐도 개인주의로 봐요. 예언으로 보지 않아요. 예언은 누구 몫이냐 하면,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님의 몫이에요. 형제 되고 형제 안 되고,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그것은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일단 모든 인간을 죽여놓고 일방적으로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는 거예요. 이게 성령 받은 성도한테는 그렇게 즐거운 일이에요, 이게. 즐겁고, 고맙고, 감사하고, 기쁜 일이에요.
인간이 개인주의로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주체 중심입니다. 자기중심, 주체 중심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새로운 형제를 구성하게 되면 그 형제에는 주체가 없어요. 집단적 주체성만 있을 뿐이에요. 전체의 의미지 사적인 의미는 새롭게 등장한 천국 백성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다 죽은 인간인데 주의 의미, 주의 이름, 주의 행하심 외에 다른 의미는 없어요. 개인 해석 없습니다. 집단 해석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집단은 뭐냐? 집단은 개인 속에 구멍을 뚫어놓은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주님의 자기 해석만 적용될 뿐이에요.
처음에 도마가 예수님 부활했을 때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봤다고 하니 “난 못 믿겠다. 나는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특별히 도마를 위해 다시 예수님이 등장하시고 도마하고 대화하면서 벌써 도마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다 알고 있었어요. 손 쓱 잡아당기면서 “도마야, 내 못 자국과 창 자국에 손을 집어넣어 보아라.”
손 집어넣는다는 말은, 예수님 몸에 공백이 있었어요. 빈 구멍이 생긴 겁니다, 빈 구멍.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없는 것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빈 구멍, 창 자국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그 사실 때문에 생긴 구멍이에요.
따라서 그 창 자국에 내 손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개인이 개인적으로 완전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 개인적인 추구를 하기 위해서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공백도 스스로 메우는 이 작업, 이 작업을 하나님께선 일체 예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너는 나에게 종속되어야 되지, 형제라는 새로운 관계망 속에 네가 끼어들어야지 네가 따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걸로 구원받기 위해서 온갖 성경의 모든 의미를 자기에게 끌어당겨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그 믿음을 막는 것이 뭐냐? 지식입니다. 지식을 끌어모아서 자기의 빈 구멍들을 그때그때 채워서 완벽에, 철저에 철저를 기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노력, 그것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 죽게 만든 그 작당들이죠.
성령을 받은 성도는 남은 일이 뭐냐? 바로 내가 얼마나 철저한 개인주의로 살아왔는가를 이미 죽은 입장에서, 현장감식반 입장에서 ‘이 인간이 어디서 죽었어? 이래서 죽었구나!’라는 걸 본인이 본인을 감식하는 거예요. ‘이래서 죽어 마땅하구나.’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이 지금 사는 모든 세계가 개인주의입니다.
드라마도 이런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는데요. 3개월짜리 인턴으로 들어와서 힘들게 살아가는데 이력서가 다 비어있어요.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정당방위로 어쩔 수 없이 싸우다가 사람 죽여서 살인죄라고 했지만 재판에서 무죄 받아서 이제 자기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냉혹한 세상에서 어떻게 버티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취직을 했는데, 회사에서는 ‘근본 없는 저 인턴을 어떻게 하면 3개월 뒤에 쫓아낼까’ 퇴출할 생각만 하고 있고, 그걸 알고 있는 이 아가씨는 그걸 견뎌내기 위해 회사에서 더 열심히 일하면서 집에 가서는 쪼그려 앉아 엉엉 울고.
이게 아이유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 계속 나오는 그 드라마에요. 낮에는 죽어라고 일하고 밤에는 집에 와서 혼자 운다고 눈 퉁퉁 다 부어있고. 너무 외롭고 버티기 힘들어서. 그때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나의 아저씨, 이선균. 그 드라마의 주제가 가사에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눈을 감아 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스스로 자기에게 격려하는 거예요.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깰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은
나를 버리면
모두 깰 거라고
………
언젠가 한 번쯤
따스한 햇살이 내릴까
나는 내가 되고
별은 영원히 빛나고
잠들지 않는
꿈을 꾸고 있어
바보 같은 나는
내가 될 수 없단 걸
눈을 뜨고야
그걸 알게 됐죠】
손디아(Sondia)가 불렀던 <어른>이라는 노래의 가사에요. 이 가사에 모든 인간이 동감할 수밖에 없어요. 동감합니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개인주의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개인주의가 아니면 살길이 없어요.
왜? 나는 내가 되어야 하니까. 나는 내가 돼야 해요. ‘별은 저렇게 영원히 빛나는데 나는 언제쯤 빛날까.’ 그러니까 만약에 그 아가씨가 교회에 나왔다면 마찬가지예요,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저는 언제 안정적인 생활 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 나의 아저씨, 착한 아저씨, 내 마음을 알아주는 착한 아저씨 언제쯤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언에 의하면 이 개인주의는,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고 착한 아저씨 누구를 만나도 이 개인주의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개인주의는 바뀌지 않습니다. 교회 50년 다녀도 개인주의는 바뀌지 않아요. ‘나에게 가족이 있었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라고 하죠.
이스라엘 역사는 가족 중심주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알고 있던 그 정보, 진리를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아버지가 아는 것을 손자에게 이야기하고 그런 식으로 대대로 전수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2장 7절에 보면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다음 10절에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 단단한 가족관계도 개인주의와 개인주의가 결속된 가족관계였어요. 심지어 가족도.
그 사랑을 많이 받은 가족도 내 안에 들어있는 나만을 위한다는 이 개인의식을 극복해 주지를 못 합니다. 그걸 파내지를 못해요. 그래서 이 사사기에 들어오면서 여호수아 죽고, 벌써 하나님의 출애굽을 아는 사람은 다 죽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주같이 모시고 전했던 그 어른도 다 죽어버려요. 다 돌아가셨어요.
3대째 장로 되는 할아버지가 손자들 모아놓고 “내가 너희들에게 다른 소원은 없다. 그저 나 죽더라도 교회는 나가라.” 손자가 안 나갑니다. 안 나가요. 개인주의인데요. 내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내가 왜 나가요. 정보 전달 안 됩니다. 교회 나가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요. 교회가 밥 먹여 줍니까? 점심은 준다만. 교회가 내 인생에 어떤 혜택을 줘요? 지금 교회가 사회가 아니잖아요. 사회는 경쟁사회에요.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져 버려요. 지면 내가 죽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전하는 건 뭡니까? 이미 너희는 죽었다는 거예요. 이미 너는 죽었다는 사실을 손자들에게, 자식들에게 어떻게 그걸 합리적으로 납득 되도록 전할 수가 있겠어요? 여기서 오늘 본문 13절의 예언을 다시 봐야 돼요. “볼찌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인간이 정신 차려서 예수 믿고 하는 거 전부다, 그런 일은 없어요. 다만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찾아가죠. 우연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우연히. 미러클, 기적이죠. 우연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내가 행하지도 않은 일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내가 관심 없는 일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내가 시도한 적도 없는 일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고집스러운 나 때문에 이미 생겨버린 그 구멍이 있어요. 그 창 자국, 내가 주님을 죽인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네가 나를 죽였다 하지 않고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희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도는 내가 하지 않은 희생에 참여하는 자에요.
사사기 내내 인간은 어떤 식으로 살아갔는지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사람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더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했더라.
이 본문만 보게 되면 사람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으면 ‘제대로 판단하면 제대로 된 일도 할 수 있겠네’ 하는 이런 오해를 할 수 있는데 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다는 그 증례, 그 사례가 사사기 17장 6절에 나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는데 아들이 엄마의 돈을 훔쳐갔다는데 엄마는 아들이 훔쳐간 줄도 모르고 저주를 한 거예요. “돈 훔쳐간 인간 저주받아라.”
그걸 듣고는 아들이 화들짝 놀라서 “엄마, 내가 가져갔다.” 하니까 엄마는 그 때부터 아들에게 돌아갈 저주를 해소시킬 방책으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빌면서, 그리고 그 아들을 위해서 제사장까지 취업을 시킵니다. 예컨대 신학교 학생 취업시켜서 하는 일이 뭐냐? “아들에게 내가 무심코 퍼부은 저주를 없애주는 역할만 해주면 너에게 성과급 줄게” 이런 일을 벌이면서 6절에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자기 소견에 옳다는 말은, 개인주의적인 것에 철저하고 또 철저했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그러면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이미 유월절 희생이라는 그 정보는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날아갔는데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끈끈히 이어졌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입다의 딸이 죽어요.
나라가 당시에 갑자기 어려워지니까 힘깨나 쓰는 깡패 두목, 갱단 두목을 이스라엘 장로들이, 연장자들이 요청해서 개인주의적으로 거래를 했어요. ‘네가 우리한테 뭘 해주면 우리가 너한테 뭐 해줄게.’ 이렇게 된 거예요. 이게 개인주의적인 원칙이에요. 손해 보는 일은 안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되었든 누굴 상대로도 손해 보는 일은 안 해요. 내 행동이 나를 살려야 되니까 그런 거예요, 내 행동이, 내 행함이.
“만약에 네가 적들을 물리치면 깡패 두목 하지 말고 우리나라 대통령 시켜줄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입다라는 깡패가 ‘이참에 잘됐다. 신난다.’ 했어요. ‘안 그래도 신분이 안 좋은데 신분세탁도 하자’ 하면서 객기를 부린 겁니다. “오, 신이시여! 나를 도와주신다면 제가 적들에게 승리하고 돌아올 때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소가 나오면 소를 바치고, 닭이 나오면 닭 바치고, 돼지가 나오면 돼지를 바치고, 하여튼 뭐가 나오든지 바치겠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자기 딸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생각 못 했어요. 입다가 승리하고 나서 기분이 좋았어요. ‘나는 이제 대통령 되었다. 왕이 되었다.’ 했는데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딸, 그것도 시집도 안 간 딸이 튀어나왔을 때 입다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합니다.
사사기 11장 34, 35절에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이스라엘 나라에 구멍이 생긴 거예요. 의미가 온전치 않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무의미가 침투한 겁니다.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는 나한테 의미가 되기 때문에 나는 살아가는데 사적으로 아무 의미가 되지 않는 게 이게 쑥 들어온 거예요. 자기 인생에. 그것도 희생의 모습으로.
성도가 주님의 형제가 된다는 것은 내가 예상치도 않았는데 십자가,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십자가가 훅 들어온 거예요, 내 인생에. 너는 너밖에 모르는 네 인생에 내가 훅 치고 들어온 거예요. 졸지에 우리는 소위 나한테 의미 있게 살아온 모든 것이 전혀 하나님 앞에 의미 없다는 것이 발각되었지요.
남한테 안 지려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싸우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고, 집에서는 외로워서 훌쩍이고, 다음 날 아침에 눈 퉁퉁 부어서 또 출근하고. 그저 착한 아저씨, 참 착하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아저씨 음성이 듣고 싶어서 도청을 해보니까 이선균이도 자기 집에 가서 또 우네요. 자기 마누라 바람나서 또 울고 있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동병상련, 똑같은 병을 갖고 있는 두 아픈 자가, 아픔의 두 개인주의가 서로 동정하면서 만나는 거예요. 인간관계가 그게 한계입니다.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아픔으로 서로 정을 나누고 결속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형제가 아닙니다. 그냥 인간관계지요. 개인주의와 개인주의의 만남이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입니다.
어떻게 좀 해보려고 할 때 입다의 딸이 “아버지! 이 일은 하나님이 나 하나 희생해서 이스라엘을 살리려는 겁니다. 아버지는 주위의 나라에서 힘으로 살렸지요. 그것은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희생이 부각이 되어야 진짜 살아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희생!”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이 희생되었다는 그 희생, 그 희생이 빠져버리면 이스라엘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제라 할 수가 없어요. 내 인생에 주님의 희생이 빠져버리면 이것은 주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 희생, 십자가와 매일같이 나의 개인주의와 날카롭게 비교할 수 있어야 돼요, 매일같이. 현장감식반처럼. 죽은 내 눈을 내가 뒤집으면서 요 눈으로 네가 이기주의로 살았구나, 이런 것. 귀를 잡아당기면서 ‘너 좋은 소리만 들었지?’ 하고 잡아당길 수 있는 것.
이러한 어린양 중심, 희생주의를 성경에서는 아주 난해하게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7장 5-11절에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꿈 이야기를 합니다. 6, 7절에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러니까 형들이 “야~, 잘하면 네가 우리 왕 되겠네” 하고 비비 꼬는 이야기를 했어요. 8절에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그러니까 요셉이 또 꿈 이야기를 합니다. 그 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꿈이 있습니다.
9절에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이게 바로 꿈이었습니다. 꿈이 현실이었던 거예요. 꿈이 현실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세계와, 개인주의 세계와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침입은 전혀 현실적으로 의미 없는, 아무 쓰잘떼기 없는, 쓸모없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침투하는데 그게 우리한테는 허황된 꿈처럼 보인 거예요.
50년 교회 다녀도 교회에서 들은 모든 설교가 허황된 꿈처럼 들리는 겁니다. 교회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데가 교회에요. 중요한 것은 내 몸이 중요해요. 내가 살아낸 이 현실이, 현실이 이게 소중하지요. 버텨낸 내 인생이 중요한 거예요. 이런 내 인생을 무의미하다, 쓰잘데기 없다, 개꿈이다? 누가 그래요, 누가? 누가 그래? 우리는 그런 식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욕했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 때 했는지 설교에서 그랬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것 같아요.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식으로 기적을 행할 때는 제자들 다 떠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는요, 주님이 없어졌어요.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데 기적적으로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게 미러클이에요. 보고 믿는 것은 누가 못 믿습니까? 물 위를 걷는 것은 누가 못 봐요? 그런데 그냥 예언만 있어요. 복음만 있고 예수님이 안 보여요. 안 보이는데 안 보이니까 죽은 자거든요. 그 죽은 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다?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이게 비현실주의자 아닙니까?
사도바울도 아주 그것을 굉장히 신기하게 이야기하고 그것을 성경에 표현을 해 놨습니다. 사도바울이 형제라는 것을 어느 정도를 형제라 하느냐?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을 것이다.
형제가 어느 정도냐 하면 “사도님, 복음 전하는데 제 눈 빼가세요.” 이게 형제의 관계입니다. ‘내가 이거 주면 너 뭘 나에게 줄 건데?’ 이런 것 없어요. 이미 자기는 죽은 자기 때문에. 빌립보서 2장 29절에 이런 말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 요 수준이 형제와 형제 사이의 수준입니다.
이 형제 사이의 수준은 주인공이, 주체가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개인주의적으로 ‘하나님, 제가 눈 빼주면, 제 목숨 바치면 주께서 뭐 주시겠습니까?’ 이런 것이 성립이 안 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난번에도 했는데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고기 잡는 데 고기 없게 하다가 고기를 있게 했거든요.
그럴 때 베드로의 말을 굉장히 신기하게 들어야 돼요. 실제로 신기하고요. 베드로의 관심은 뭐냐? 베드로는 어부니까 고기 잡는 데 있어요.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것은 기쁨이 되는 거예요. 개인주의적으로 기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지금 앞뒤가 맞는 이야기입니까? “주님, 고기 잡아줬으니까 동업합시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맞는데 “주님, 이제 비로소 내가 고기에만 신경 쓰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같은 인간은 상대할 필요 없이 가셔도 됩니다, 라는 뜻이에요.
이 말은, ‘내 쪽에서 주님은 좋은 분이라고 내가 이용할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것은 말도 안 됩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뭐냐? 주님이 주신 자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자기가 주님이 필요한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필요한 거예요, 주님 쪽에서.
전에 터키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제가 굉장히 인상 깊었던 구조현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6살 정도 먹은 소녀 같았어요. 뭉개진 철근콘크리트 더미 안에 이틀 동안을 있었어요. 그때 구조반이 포기하자, 포기하자, 하다가 그래도 찾아봐야지, 해서 보니까 소녀가 거기 있었어요.
소녀와 구조반이 눈을 딱 마주쳤을 때 여섯 살 먹은 그 소녀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저씨, 혹시 저를 구해주시면 제가 아저씨를 위해서 뭐든지 할게요.” 그게 왜 중요하냐 하면, 그 순간 굉장히 공손한 거예요. 굉장히 공손했던 겁니다. 자기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해서 이제 중요한 것은 사는 게 중요하지 그 아저씨가 나에게 해코지한다든지 그런 것, 해코지해도 괜찮다,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공손함을 준 거예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와 개인주의의 만남의 극치입니다. 아주 감동적인 개인주의의 만남의 순간이에요. 그런데 마가복음 5장 41절은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소녀가 나오는데 그 소녀는 이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달리다굼!” 즉 “소녀야, 일어나라”고 일방적으로 손을 잡고 일방적으로 끄집어당겨요.
그러니까 개인주의적인 공손함도 주께서 우리 죽음에 같이 묻혀야 돼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정성도 다 묻혀 버려야 돼요. ‘주님, 구원하시면 제가 잘하겠습니다.’ 그것도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인데 그것도 묻혀버려야 돼요.
요셉이 꿈속을 살아갑니다. 그게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시편 105편 13-19절, 길지만 줄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방민족에게 나그네 되게 하시면서 17-19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이 요셉이 나중에 열두 지파의 장자가 됩니다. 맏이가 됩니다. 맏이는 철딱서니 없는 자를 전제로 해서 먼저 자기가 꿈속에서 꿈같은, 꿈속의 계시, 예언의 세계 속에 먼저 살아요. 말씀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러고 난 뒤에 말씀이 성취되었을 때에 요셉을 욕했던 형제들은 아빠와 엄마는 요셉에게 절하는 거예요. 그 꿈의 내용대로 절을 하는 거예요. 종속되는 겁니다.
이제 의미는 요셉의 희생이 의미 있지 그 앞에서는 나를 위한, 내가 잘되는 의미는 이것은 다 죄에 해당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위하여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율법이 주어졌고 그 율법아래 있는 자를 속량하시고,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 형제라는 새로운 관계망 속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주님의 의미로만 살아가는 것, 죄용서, 죄사함을 받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맏아들과 양자의 결합체가 예언된 예수님의 형제들입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17장 9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아무나 찾아가는 게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우연히 찾아온 거예요. 연락처도 없고 이름도 없어요. 그냥 찾아오니까 비로소 연락처를 알고 비로소 이름을 알게 된 겁니다.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도 그런 말씀 나오지요.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어도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모든 일이 미러클, 기적입니다. 모든 일이 감사할 것뿐입니다. 세상 버리고 꿈같은, 요셉처럼 꿈같은, 희생을 다 이룬 그 세계 속에 저와 여러분이 같이 형제로서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홀로 하신 일이었습니다. 야곱처럼 복 받기 위해서, 복받은 티 내다가 하나님과 싸웠던 것을 생각하고 비로소 내가 죽은 자에 불과한 것을 안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보고 죽은 다음에 뭐 할 것인가만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