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3층 구조

아빠와 함께 2024. 3. 18. 07:27

3층 구조 


2024년 3월 1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2:5-9

(2:5)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2: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2: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2: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천사와 먼저 비교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천사층 위에 예수님, 곧 하나님 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바로 하나님과 통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창세기 3:24에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천사층은 그 밑에 인간층을 두고 있습니다. 천사층에 있었던 말썽 일으킨 어떤 천사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인간층에다 자신들의 존재를 피신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층은 악마의 손아귀에 잡혀들어 갔습니다. 이제 인간들의 본인의 의지나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악마의 생각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악마를 위한 순교자들입니다. 악마가 시키는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런데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네가 신처럼 된다”입니다. 신이란 곧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의식하고 모든 것을 한 곳에 모으면 ‘신’이라는 개념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이 신에 대한 열망을 내부적으로 끌 수가 없이 분주하게 타오릅니다. 모든 많이 아는 것은 자신을 더욱 신 같은 존재로 느껴지게 합니다. 마치 어디를 가도 그 동네의 최고 식당의 음식맛에 집착을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러고서 인간들은 계속해서 최고의 윗층인 하나님 나라를 사모합니다.

그 방법은요? 모든 신화나 전설이나 성경 말씀이나 점술이나 신학이나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과학까지 다 끌어모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존재를 이대로 잃어버리기 싫어서입니다. 하지만 최고층에 계신 하나님의 원리는 이미 확정났습니다.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지만 악마와 한 통속이 된 인간들의 반발심도 만만치 않습니다.

“정녕 내가 너를 죽이리라!”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정녕 죽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존재가 신처럼 전지전능에 동생이 방해되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타인을 미워하기만 해도 이미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이는 자기 존재의 가치만을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층에서 최 아랫층으로 직하하듯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사라졌습니다. 죽은 자가 사라지면 소위 살았다는 자들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는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달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율법을 제공하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율법의 투하는 모든 인간은 이미 저주의 대상임을 확정짓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이 사실도 모르고 율법을 자기 행위로 마중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인간들은 의는커녕 죄가 더욱 더 죄 지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인간이 이 저주와 죄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 자체가 하나님의 ‘정녕 죽으리라’에 합당한 상황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를 피하는 방법은 ‘믿음’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부하십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가 되었지만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가 된 겁니다. 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인간의 믿음 조차도 무용지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존재만 인정하시고 그 존재의 믿음만 믿음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갈라디아서 4:4에는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율법을 먼저 투하하고 난 뒤에 성령이 오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층에서 1층으로 떨어지시면서 율법 아래를 경험하시는 이유는, 어느 천사도 해내지 못하는 것, 즉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유일하게 인정받는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온전한 죽음을 이루어내심으로서 모든 인간을 없앤 그 현장에서 새로운 피조물, 즉 성도를 생산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일체 물리치는 취지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의 존재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고 오로지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오는 것만 받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발생된 것이 새로운 어머니입니다. 곧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이로 인해 발생된 성령의 사람은 곧 다른 존재를 추방하는 기능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29-30)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성령을 받은 상태일까요 아직 못받은 상태일까요? 그것은 친절하게 사도가 알려주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

사도 바울은 성령이 없었던 자기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해줍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 12-14)

성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없앤 바로 그 바탕을 십자가 현장으로 삼아서 거기서 ‘성도’라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는 자로서 등장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잠깐 천사보다 못하셨지만 이점은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없는 천사들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 일의 줄거리로서 성도를 만들어 내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정녕 죽으리라’는 기쁜 소식이 매일같이 우리 육신에 작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히브리서 2장 5-9절(3층구조)240317-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2장 5-9절입니다.

히브리서 2:5-9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 긴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면 아무 줄거리도 생기지 않습니다. 줄거리가 없는 존재가 바로 천사입니다.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그 천사도 부러워하고 경배해야 될 분은 그 스토리,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이에요.

사람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일이 사람에게 덮친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줄거리가 인간에게 덮친 것이 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 천사들이 굉장히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러워하는 그 부사가 뭐냐? ‘잠깐’이라는 거예요, 잠깐. 7절에 보면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천사와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잠간 동안’, ‘잠간’이라는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천사와 비교한다는 것은 하늘나라와 인간 사이에 장벽이 있어요. 펜스가 놓여있다, 단절막이 놓여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제일 위의 3층이 하나님의 원리, 중간에 있는 장벽에 위치한 것이 천사의 원리, 그 밑에 인간의 원리. 인간의 원리는 중간에 있는 천사의 장벽, 펜스에 의해 하늘나라로 갈 수 없게 되어있는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는 장벽을 뚫고 하늘나라로 갈 수가 없고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찾아와야 되는데 그게 ‘잠깐’동안 일어났다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하늘나라로 갈 수 없는 이유가 중간에 장벽 노릇을 해야 하는 게 천사의 원리인데 이 천사 중에 수상한 천사가 있었던 겁니다. 악령이라 하죠. 타락한 천사, 뱀, 옛 뱀, 용, 요한계시록 12장에 용이라고 합니다.

그 천사 쪽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았어요. 두 번째에 자리를 지켜야 되는데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은 걸 타락이라고 하고 범죄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뭐가 되느냐? 인간은 쇼유가 되는 겁니다.

천사의 자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직능과 기능을 수행해야 될 자리에요. 그런데 악한 천사가 자기 자리를 박차고 자리를 떠나서 아래쪽에 있는 인간 자리로 공격해서 침범해 들어 와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에게는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유가 중요하게 되었어요. 나는 내 것이라는 거. ‘나는 내 거.’

악마가 자기 자리를 보존하지 않고, 지키지 않고 ‘나는 내 거다. 나는 나다. 누가 나를 건드려?’ 하는 식의 사고방식을 첫 번째 층에 있는 인간 나라에 확산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기능이 절단됐어요. 잘렸어요. “주님 뭘 합니까?”라는 말을 안 해요. 내 것을, 나라는 내 소유물을 어떻게 보존하고 키우느냐 여기에 평생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자기 자리를 버리고 자기 몸을 자기 소유로 여겼을 때, 그때 악마가 인간에게 넘겨준 본성이 있어요.

악마의 본성이 그대로 인간에게 왔습니다. “네가 신처럼 되리라.” 악마의 본성이 인간에게 들어온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악마의 순교자, 악마를 위한 순교자들이에요. “나도 신이지만 너도 신이야. 네가 신 노릇을 해야지?”

이걸 계속해서 이야기했고 인간은 내가 신이라는 그 점에 대해서 순교자가 될 각오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자살해 죽더라도 신인 것 맞다. 건드리지 마. 나 신이야.’ 제가 전에 채널을 틀다가 우연히 일본 채널을 봤는데 보니까 <고독한 미식가>가 나왔어요.

다큐멘터리 형식인데 드라마에요. 연기자들이 다 나오니까. 그 고독한 미식가를 보면서 그 사람 직업이 뭔지 궁금했던 거예요. 직업은 영업사원이에요. 각종 것들을 파는 영업사원인데 이상하게 그 드라마 내용은, 자기가 영업하러 돌아다니는 지역마다 그 동네 최고의 맛집은 어디냐, 그걸 찾고 있어요.

그게 바로 마귀가 인간에게 준 본성입니다. 그 본성이 뭐냐? 전지전능이에요. ‘그 맛에 대해 모든 걸 알아야겠어. 그리고 맛을 다 봐야 돼. 맛있는데 그걸 내가 못 참지. 돈을 주고라도 가야지.’ 도대체 영업사원으로 일해서 돈이 얼마나 남기에 맛집이란 맛집을 다 돌아다닐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한국까지, 전주비빔밥까지 먹었거든요. 그 고독한 미식가가.

신이 된다는 건 뭐냐 하면, 멈출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의 한도는 어디까지냐? 그다음에 그게 내 소유니까 내가 아는 그것을 기어이 소유 하고 싶은 거예요. 철딱서니 없는 젊은 사람들의 전지전능은 차 사기, 차 모으기. 돈도 되지 않으면서 2천만 원 더 주고 사야 하는 중고 벤츠 타고 돌아다니고, 그것도 모자라서 더 고급 차 찾고 다니고. 전지전능을, 인간이, 내 내부가 말릴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취미가 집 짓는 게 취미에요. 일꾼 하나 없이 자기 손으로 다 하고 옥상에 물 새는 것도 다 혼자서 하고, 천만 원 주면 될 걸 자기가 혼자 다 한다고 허리 나가고, 그렇게 하는데 집을 멀쩡하게 지어 놓고 하는 말이 “앞으로 뭐 하고 싶습니까?” “집을 또 짓고 싶습니다. 전의 하자를 줄이는 방향으로요.” 이게 미친 거예요, 인간은. 전지전능을 못 해서 환장을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의식은 어디서 오는지를 몰라요.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의식이 한 곳에 모아질 때 그 개념을 신이라고 합니다. God, 신이라고 해요, 모든 의식의 개념을 한 곳에 집중할 때. 방금 1층과 2층에 대해 통하는 걸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제일 높은 위층에 있는 3층, 하나님의 원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나오는 “정녕 죽으리라.”에요. 하나님의 원리는 ‘정녕 죽으리라.’입니다. 하나님의 원리가 정녕 죽어라, 인데 2층이 되는 천사의 원리를 거쳐 제일 아래층이 되는 인간 세계의 원리에 와버리면 이게 어떻게 변하느냐 하면, ‘내가 정녕 너를 죽이리라’로 바뀌어요. 정녕 죽이리라.

위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아래쪽에 가면 ‘나만 존재하고 나 빼고 다 죽이리라. 내가 죽이리라.’ 그 이야기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입니다. 우리 이야기에요. “왜 너는 나보다 더 전지전능해? 왜 신다워? 내가 널 가만둘 줄 알아? 정녕 죽이리라.”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 그렇게 미워하는 걸 가지고 살인죄라고 해요. 살인죄에 해당이 돼요. 미움의 이유는 너의 존재가 나를 슬프게 하기때문에 미워요. 그냥 있기만 해도 짜증이 나요. 그걸 무슨 판이라고 하냐면 총선판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공천을 받아야지 네가 왜 공천을 받아? 나 무소속으로 나올 거야.”

인간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비교를 통해 누가 더 신 다우냐, 누가 더 하나님에 접근했느냐, 그런 관계로서 1층의 관계, 인간의 원리로 작동하고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아시고 3층에서 “다 죽일거야.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2층, 천사의 영역에서 인간이 갈 수 없도록 막아 놓은 것이 창세기 3장 24절, 하도 많이 했는데요, 할 때마다 잊어버리니까 또 합니다.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차단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에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2층의 역할이에요.

2층의 역할을 천사들은 알아요. 인간은 천국에 못 간다는 걸, 하나님 있는 곳에 가지 못한다는 걸 알아요. 아니까 악한 천사가 “이왕 가지 못가는 것 포기하고 우리가 하나님 되면 되잖아.” 이런 논리와 원리를 유포시킨 것이 1층의 인간 세계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바로 자기 존재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잠깐 천사를 뚫고 천사보다 못하게 뚫었단 말이죠. 천사보다 못하다는 말은, 예수님은 마땅히 천사들로부터 마땅히 경배와 찬양을 받아야 되는데, 그 예수님 원래 자리가 하늘나라에서는 경배와 찬양을 받아야 하는데 그 자리를 포기하고 ‘정녕 죽으리라’ 자리까지 오니까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침투한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스토리, 하나님 일의 줄거리에요. 이 줄거리가 덮힌 사람을 성도라고 하고 줄거리가 없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은 정녕 죽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은 있어 봐야 없는 존재로 사라져요. 그런데 성도는 없는 데서 나와요. 성도는 인간이 아니무니다, 인간이 죽은 자리에서 나오는 게 성도에요.

인간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왜, 2층 때문에. 2층의 천사가 가로막기 때문에 인간은 하늘나라 못 갑니다. 교회 나와도 소용없어요. “본인이 인간이십니까?” 그럼 끝났어요. 인간에서 성도로 바뀌어져야 돼요. 주님께서 3층에서 1층으로, 2층 단절을 뚫고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현했어요. ‘정녕 죽으리라’에 합당한 죽음으로 죽어버렸어요. 죽음을 보여주고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죽은 자가 살아날 때 소위 산 자라고 우기는 자가 그 자리를 대신한 거예요. 죽은 자가 죽고 살아나서 사라지게 되면 그 빈자리가 있잖아요. 그 빈자리를 산 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그걸 자기 자리라고 여기고 딱 차지하고는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존재하는 자는 존재하지 말아야 하고 존재하지 않는 자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3층의 하나님의 줄거리고 뜻이에요. 인간은 자꾸 신이 되려고 하고 자꾸 위로 올라가요. 제일 아래층, 1층 주제에 제일 위에 있는 3층 쪽으로 계속 올라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신처럼 되니까요. 바로 그것을 위하여 인간들은 전지전능을 추구하면서, 라이벌 의식을 느끼면서 자기 존재에 대해 낙후함과 모자람을 깨닫게 하는 타인을 가만두지 않죠.

이렇게 인간들은 모든 성경을 다 끌어모아요. 모든 율법, 성경, 그것도 모자라면 힌두교 경전이나, 알라신 경전이나 계시란 계시는 모조리 다 끌어모읍니다. 끌어모았던 게 옛날 시대라면 요즘은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끌어모아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이게 실험으로 되느냐, 다 끌어모아서 혼돈을 질서로 바꾸려고 하는 거예요.

혼돈 없이 일체 모든 것이 설명될 때 전지전능을 증명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로 아는가? “질문해, 질문해. 내가 답변 다 해줄게.” 그렇게 될 때 그 순간에 자기의 맛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신이 됐다는 맛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들 옆에서 부모들은 전지전능해요. “우리 아빠는 참 모르는 게 없어.” 그 다음에 엄마에 대해서 “우리 엄마는 못 하는 게 없어. 돈가스면 돈가스, 계란 장조림이면 계란 장조림, 스파게티 다 만들고, 계란프라이, 계란말이 다 할 줄 알아.” 아빠는? “아빠는 영어 되지, 독일어 되지. 모든 게 다 되지.” 애한테는 모델이에요, 모델. 내가 신이 되는 모델을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에게 배우고 익히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얻어맞았다. 그러면 “내가 대신 때려줄까?” 든든하죠. 그때 애들은 비로소 사랑이라는 걸 느낍니다. 사랑이라는 게 뭐냐? 옛날에는 집이 좁아서 화장실이 밖에 있었거든요. 밖에서 볼일 볼 때 다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노래 불러주는 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나이 70 넘으면 압니다. 그 전 나이는 잘 몰라요. 어릴 때 저도 바깥에 있는 화장실이 그렇게 무서웠어요. 무서울 때, 볼일 다 볼 때까지 누가 이야기 걸어주고, 노래 불러줄 때 든~든함, 든든함을 느꼈습니다. ‘결혼해도 저런 사람이랑 해야지.’ 그때부터 이미 결혼 계획까지 다 짜이게 되는 거예요. ‘무조건, 무조건 나를 사랑해야 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존재에 대한 제거가 당연하다는 사실을 바로 말씀을 통해 또는 성령을 통해 발견하는 순간이 옵니다. ‘지금 내가 내 사랑에 미쳐있고 나는 나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 이게 제거 대상이 아닌가?’ 바로 이런 상태이기에,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기에 빵~! 하고 죽어 마땅한, 제거가 마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성령을 통해 드디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이 창세기 2장 17절의 말씀을, 그냥 옛날 신화 이야기에 ‘나는 몰라도 돼.’라고 이야기하지만 성령께서 그 말씀을 가만두지 않고 나에게 와서 자꾸 들이대고 자꾸 정신 안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이 장난처럼 들려? 이거 취소될 줄 알아? 끝까지 갈 거야, 끝까지.”

그러니까 여기서 인간은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게, 말씀에 대해서 내가 아는 신과 진짜 하나님이 다를 수 있지 않겠느냐에 대한 공포심이 확 밀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격차를 어떤 식으로, 내 노력으로 한 번 좁혀 보려는 노력을 하기 위해서 교회를 빠지지 않고 잘 다니고 있는 거예요. 행여나 일치될까 봐.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일 위층에서 제일 아래층, 인간 세계, 마귀 밑에 있는 세계까지 오신 이유는, 뭘 노리냐 하면, 우리를 닦달 내러 오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상대도 안 해요. 상대할 가치도 없어요. 마귀한테 매여 사는 존재인 우리에게 뭘 기대해요. 기대 안 하고 악마를 노립니다.

악마는 이거에요. 야고보서 2장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 걸 알고 믿고 떤다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이거에요.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말은 나의 절대적인 목표점이 돼요.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 앞에는 길이 하나만 있을 거고 그 길을 찾아서 꾸준히 말씀 지켜서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 거룩한 말씀을 하게 되면 그 길로 갈 수 있잖아. 누가? 현재 존재하는 내가. 누가? 살아 있는 내가, 갈 수 있잖아.’ 이건 악마가 집어 넣어준 신이 되고자 하는 본성을 굳이 부정할 필요 없이 말씀을 채워서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계속 살려 나가면서 어느새 신에 가까운 그런 신의 성품을 닮으면 천국은 손만 뻗으면 닿아서 도달할 것 같은 느낌을 주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고…, 이걸 또 둘이라고 하면 오해하는 사람 있어서 전화 막 옵니다, 시편 110편에 나와요. 주님이 두 분이에요. “주께서 내 주에게” 주님이 두 분으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위에서부터 갈라져 버렸어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한쪽은 천사에게 경배받고 한쪽은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버렸어요.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버린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침투했습니다. 인간은 바보 등신 같아서 무슨 일인지 몰라요. 예수 믿으면 되는 줄 알고, 예수 피 믿으면 되는 줄 알고, 십자가 믿으라면 십자가 믿고 목걸이 달랑달랑 하면 되는 줄 알아요. 그게 무슨 내막인지 뭔지도 몰라요. 난리 난 것은 악령 쪽입니다. 난리 났어요.

예수님 와서 귀신을 쫓아내는데 인간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속에 있는 귀신이 알아들어요. 인간 그 자체는 모르는데 귀신이 그 인간에서 나가면서 예수한테 이야기 합니다. “당신 오실 분 맞죠? 저벅저벅, 발소리 들릴 때부터 알아봤어. 우리를 멸하려 오신 거 맞죠?” 주님께서 “입 다물라.” 해요. “입 다물라. 넌 곱게 나가. 귀신 내보내는 식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네가 알지? 입 다물어. 내가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귀신을 쫓아내는 식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귀신에게 잡히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귀신한테 지는 방법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꾸 귀신 들렸다고 하면 귀신을 이기려고 하고, 귀신을 내쫓아서 다시 멀쩡한 나로 돌아오는 걸로 자기가 신이라는 모습을 유지하려 하는 겁니다. 그 영화가 무슨 영화냐? 파묘(破墓)죠, 파묘. 귀신 쫓아내고 멀쩡한 인간 되어 인간답게 사는 것.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딱 한 가지 원칙밖에 없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거기에 대해 악령의 대처는 “네가 죽으리라. 내 손에 죽으리라. 네가, 예수 당신이 내 손에 죽으리라. 감히 인간의 존재를 제거해?” 악마는 말합니다. “나는 존재 편에서, 인간 편에 서서 인간 존재의 죽음에 대한 부당성을 신에게 고발하리라.”

이게 바로 모든 인간의 입을 통해 지금도 발설되고 있는 세계, 그 세계가 질서의 세계입니다. 악마의 본성으로 질서 잡힌 세계, 주님께서는 그 질서를 완전히 뒤엎으려고 합니다. 혼돈으로 바꿔버려요. 그게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이 맞기 때문에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죠? 그러면 창조만 남기기 위해 자체적인 스토리와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래야 돼요. 이래야 창조가 돼요. 이 땅에 성도는 없어요. 성도는 창조돼야 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으면 되지만 성도는 인간의 시체에 성령을 주셔야 성도가 돼요. 영이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그냥 인간이고 흙으로 돌아가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성도를 보고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어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이건 하나님의 창조가 개입되어야 해요. 어디 아래층이 3층까지 올라가요. 안 돼요. 2층이 가로막아요, 2층이. 예수님께서 인간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 인간에겐 천국이 없어요. 인간은 갈 수가 없어요.

못 가니까 자꾸 이 땅에서 악마를 통해 천국을 만들어내요. 종교라는 걸 만들어내서 천국이 있다고 하고 자꾸 만들어내요, 성경을 가지고. 모든 의식의 집대성은 내가 신이 되는 게 목표기 때문에 신이 된다면 성경 해석도 내가 신이 되는 쪽으로 다 끝나버리는 겁니다. 성경 쓰고 읽고 난리도 아니죠.

그렇게 해서 ‘내가 신인 고로 신이 나, 라고 하는 것은 합당하다, 나를 죽여? 그건 불가하다.’ 이런 악마의 본성을 성경을 보는 순간도 멈출 길이 없습니다. 교회 나오는 순간에도 멈출 길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오셨느냐? 아이스콘 있죠?

아이스크림 장수가 콘에 수북하게 인심 좋은 티를 내며 아이스크림을 주잖아요. 옆에 지나가는 나는 조마조마해요. ‘쟤 저 아이스크림 못 먹는다, 못 먹는다, 못 먹는다’ 하니 못 먹어요. 까불다가. 담기는 왜 그렇게 많이 담았어. 콘이 거꾸로 뒤집어져서 먹지도 못하는 흙바닥에 그냥 처박히는 거예요. 아이스크림은 땅에 철푸덕 하고 터졌는데 손에 쥐는 게 뭐냐? 손에 쥐는 걸 가지고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해요. “나는 나다.” 인간은 내가 쥘 수 있는 것만 달랑 쥐고 있어요.

교회 와서 주님의 은총, 은혜, 십자가, 언약, 뭐 새롭다는 거 다 집어넣는데 딴짓하다가 결국 남는 것은 부서질 콘, 과자로 만든 얇은 콘, 그거 하나 쥐고 명복 공원에 갑니다. 명복 공원이라고 있어요, 화장터. 몸의 육신 덜렁 이거, 아무것도 없어요. 교회 5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목사, 장로도 소용없어요. 자기만 쥐고 가는 거예요. 교회 봉사고 뭐고 다 쏟았어, 필요 없어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주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 죽은 겁니다. ‘너희들은 아무리 천국 가려 애써도 결국 너희는 너희를 포기하지 못했잖아.’ 사람하고 성령은 결합이 안 돼요. ‘정녕 죽으리라’ 가 될 때 성령은 오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에게 와요. 인간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는 인간을 죽인, 율법으로 죽인 자에게만 성령이 오게 되어있어요. 아, 과정 참 복잡하죠.

어떻게 복잡하냐면, 제일 아래층에 인간의 원리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제일 위층에서 인간에게 오면서 뭘 갖고 오느냐? 중간에 천사에게 명령한 것이 있어요. “율법을 가지고 인간 세계에 쏴라.”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3장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천사들의 손에 의해 율법을 인간에게 주었어요. 모델로 준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인간 집단에게 준 겁니다. 그 율법을 먼저 주니까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 율법의 행위로 사람이 저주받지 않을 자가 없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저주받은 걸 인간들이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특히 이스라엘을 샘플로 잡아서 모범적으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줘버리니까, 물론 천사에 의해 줬지만, 이 모든 이스라엘은 망해야 마땅하고, 저주 받아야 마땅하고, 저주에서 헥헥거리면서 거기서 헤어나올, 빠져나갈 재주가, 능력이 전혀 없어요.

율법대로 모든 의를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버림받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 없습니다. 그런 주장 반영할 수 없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 “율법으로 말미암아” 22절에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죄 아래 가두었어요. 1층, 제일 아래쪽 인간 쪽의 현실은 율법을 줌으로 모든 것이 까발려졌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행하지 못한다면 저주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특히 죄가 있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 앞에 율법에 대해 인간이 가만히 있지 않고 자기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행함으로 마중을 하게 되어 있어요. “순결하고 순수하고 정결한 믿음을 집대성해서 율법 한 번 지켜봅시다!” 해서 율법을 마주하러 나왔어요. 율법에 의가 있다니까, 율법에 복이 있다니까 복을 내 소유화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인간으로서 계속 하나님 앞에서도 버틸 수 있는 그 여건을 만들고자 율법을 다 동원했어요. 그게 대표적으로 유대교입니다.

그러니까 이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썩었기 때문에 썩은 곳에서 나오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어요. 자, 그렇다면 천국 간 사람은 뭐냐? 어떻게 중간의 막혀있는 펜스를 뚫고, 어떻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늘나라에서 천사처럼 살고 있느냐는 거죠.

갑자기 시기가 또 확 나는 거예요. “당신들은 뭐야?” 거기에 대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 지금 아브라함 나보고 이야기 한 거야?” “그래. 당신은 왜 천국에 살아?” “나? 믿음으로 의롭게 됐거든.” 믿음으로 의롭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 믿음이 제공되는 출처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에게만 나온다는 거예요.

그‘에게만’, 아브라함 자손에게만 나온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믿은 게 아니고 아브라함은 자기 자손을 믿은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자손이 없어요. 아브라함의 부인은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지 못해요. 그러니 이건 그 집안의 혼돈이에요, 혼돈. 자식 없는 혼돈.

어떤 임의적인 것으로 자식 만들 수 있는 것도 주께서는 다 배제하고 거부해 버려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에서 난 자식 외에는 자식이 아니에요. 그 자식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그 후손이 어찌어찌하는 그 일로 인하여 조상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줄거리에요. 제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줄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줄거리를 타고 내려오시고 타고 올라가신 거예요.

제가 옛날부터 알고 있던 팝송인데요, 여러분도 다 아시는 팝송인데 그 가사를 어제 다시 보면서 새롭게 느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4장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되어있어요. 인간은 출생했다, 죽는다, 그거 밖에 몰라요.

그런데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님은 마리아를 이용했을 뿐이에요. 인간이 내가 출생하기 이전에 무슨 스토리가, 하나님께 어떤 줄거리가 마련되어 있었는가를 마리아의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알 수 있는 겁니다.

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어요. 자기가 남자도 모르고 관계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두 번째 층, 천사 층에서 통보가 와요. 누가복음 1장 27, 28절에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누가복음 1장 28 29절입니다.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이런 인사가 생소합니다. 왜 이런 인사를 해 주십니까? 저 사내를 모릅니다.” 하고 당황스러워할 때, 누가복음 1장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성령이 오려면 먼저 율법이 와서 인간으로 어떤 기여나 어떤 행함이 천국 가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명쾌하게 명백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 우리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고 했거든요. 그 가사가 성경에 있는 줄만 알았더니 내가 좋아하는 팝송에도 있어요. Mountain mama West Virginia, 엄마 같은 산. 그 엄마 같은 산이 어떤 산이냐? Almost heaven West Virginia~. 마치 천국 같은 웨스트버지니아 산. 그러면 그 산은 어떤 산인가? To be place I belong~, 오롯이 내가 가야 될 그 산. Country road take me home~, 존 덴버의 노래에 이게 나와요.

그렇게 되고 나면 내가 몰랐던 엄마가 있다면 지금 살아온 나의 모든 이야기는 나의 스토리, 나의 일생, 나의 줄거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엄마, 주님의 줄거리겠죠. All my memories gather around her~, 현재 나의 모든 기억은 엄마 중심의 이야기였다, 이런 가사가 있었네요.

그 가사하고, 또 이 팝송도 제가 알고 있는데 이 가사하고 둘이 한 번 결합시켜 봅시다. Whenever you go, Whenever you do~, 당신이 어딜 가고 무얼 하든지. Right here waiting~ 어딜 가든지 딴데 가지 말고 꼭 거기 있어. Right here waiting. 팝송 노래 제목이에요. 꼭 그곳에 있어 딴 데 가지 말고.

하늘에 있는 어머니, 그 하늘에 있는 어머니가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어떤 역할을 하느냐? 인간을 내어쫓는 이야기를 해요. 갈라디아서 4장 30절에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율법이지요, 율법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천국에서 다 내어쫓는 것은 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고 그 천국 자리는 뭐냐, 잉태치 못한 자, 이 땅의 혈육으로 태어나지 않은 자, 이 땅의 엄마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의 엄마에 의해서 새로 태어난 자만이 그곳에 갈 수 있다. 그자가 누구냐? 성령으로 난 자라 그 말이에요. 성령으로 난자.

그러면 이 성령으로 난자, 이 작업을 위해서 천사가 하는 일은 뭐냐? 심판이지요. 무슨 심판? 율법으로 심판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점을 이미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사람들이 나와요. 1장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나오는 이야기, 그러면 아니야. 네가 사람의 말을 듣고 살고 싶어? 그러면 아니야. 그것은 마귀 이야기야. 그것은 예수님을 죽였던 그쪽 세계의 이야기야.” 라고 배제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 13절에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다시 말해서 “내가 전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잡아들이고 잔해하고, 그렇게 한 것은 내가 유대교에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는데 그게 뭐냐? 내 조상이 시키는대로 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15절에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어머니의 태 이전부터 선택이 먼저 있었고, 그 선택받았다는 그 표시,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태어나지 않는 일이 나를 구원한다는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택이라는 것이 나에게 일어나서 나는 내 혈육과도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과 아라비아에 가서 예수님 지시받고 나는 움직인다는 겁니다.

정말…, 이게 바로 여러분이 같이 보고 있는 성경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경우가 사도바울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열두 제자에게도 다 일어났어요. 제자들은 예수님께 뭘 할 것인가 생각했어요. 자기 존재를 스스로 포기할 제자들은 없습니다. 가룟유다는 좀 과격했고 그랬어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뭐로 바꿨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서, 의식으로서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뭐냐 하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여해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여한다고요. 성령을 부여하는 게 뭐냐? 이 하나님의 이야기에 인간의 이야기가 끼어들 자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한 상태에서 그 상황을 가지고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성령받았다는 말은 내가 한 게 없고, 앞으로도 전혀 할 게 없음을 발견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성령 받은 겁니다. 갈라디아서 이야기를 계속 해보지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에 주님의 스토리가 잘 나와 있으니까요.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그다음에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예수님마저 제일 위층에, 하나님원리에 있다가 인간원리로 내려오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빼 내주기 위해서인 거예요. 빼 내주는데 조건이 있어요. 사람으로 빼 내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죽게 만들고, 그다음에 본인이 없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가지고 빼내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정도 이야기했으면 여러분들이 이제 슬슬 궁금할 때가 되었어요.
“저는요? 목사님, 저 성령 받았어요? 아직도 율법 아래 있습니까?” 막 궁금해 미치겠지요? 친절하게도 갈라디아서에서는 네가 성령 아래 있는지 아직도 네가 갈 수도 없는, 있지도 않는 천국 가려고 교회에서 애쓰고 봉사하고 하여튼 난리부르스를 하는지, ‘바르게 살면 어떻게 구원 받겠지, 노력하면 신의 형상에 더 가까이 가겠지.’ 이런 시도를 하는지의 그 증거가 갈라디아서 4장 8절에서 11절까지 아주 친절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다 생략하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빠지게 되면, 복음이 빠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아는 자가 성령 받은 자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가 어떤 상태냐?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못 알아듣겠다.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그건 모르겠고, 그것은 됐고 나는 내가 하던 식으로 갈게’라고 했을 때나 나오는 그 일이 뭐냐? 지키는 거예요, 지키는 것. 날과 달과 해를 삼가 지키는 거예요. 골로새서 2장에서는 이 지키는 것이 상당히 노골화되어 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을 지키고 그걸 과장되게 한다고 되어있어요.

골로새서 2장 18, 19절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20절에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주님은 이 세상에서 죽었잖아. 너도 죽어!” 쉽게 말해서 그 말이에요. 네가 죽는데 뭐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번개탄 피우라는 말이 아니고 그동안 무엇이 나를 죽게 했느냐를 보라는 말이지요. 무엇이 우리를 죽게 했습니까? 기독교 교리가 죽게 했지요, 기독교 교리가. 왜? 그것은 성령 없어도 인간이 해낼 수 있으니까. 인간에게 양심이 있고, 인간에게 이성이 있고, 인간의 판단력이 있으면 지킬 수 있는 게 기독교교리에요.

‘삼위일체 믿지 뭐, 십자가 믿지 뭐. 와, 와. 다 믿어줄게.’ 뭐 하는 짓입니까? 그렇게 해서 노리는 게 뭐냐? 나 안 죽었다는 거예요. 죽었는데 매일같이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어제부로 죽었는데 오늘 또 살게 해 준 거예요.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지키면 안 되느냐 하면, 지켜버리면 나름 나 위주의 질서가 생겨요. 그 질서는 우상입니다. 내가 지킨 질서, 내가 다듬은 나의 신앙 스토리, 신앙 줄거리, 신앙 연조.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 눈치 보니 전혀 먹히지 않고요. 다른 교회 가면 다 먹혀요. 교회 토박이 이런 것 있잖아요. 지금 여러분이 성경 말씀, 복음의 말씀을 이해했는지를 간단하게 제가 건방지게 테스트를, 저도 포함시키는 테스트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살았는데 국민학교 4학년 때 나는 대성 국민학교에 다녔어요. 서문시장 근처에 있었어요. 그런데 남부 쪽에 명덕국민학교가 있었어요. 나도 4학년, 어떤애도 4학년, 이름이 이윤복이에요. 그 4학년 애의 일기장이 대박 났어요. 그 일기장을 저도 봤어요. 제목이 뭐냐?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애 아버지는 술이나 먹고 노름이나 하고 맨날 싸우다가 엄마는 자식 네 명 낳아놓고 어디로 도망가 버렸어요. 그 엄마가 떠나고 난 뒤에 아버지가 그 모양이니까 윤복이라는 애가, 4학년밖에 안 되는 애가 동생 세 명을 건사하기 위해서 구두통 들고, 또 껌 팔다가 그러다 잡히면 희망원에 들어가고요.

구두닦이 하다가 또 텃세 부리는 깡패한테 얻어맞고 구두통 뺏기고요. 그런데 그 와중에 아빠는 정신을 못 차려서 있는 집도 홀라당 날려서 산골짜기에서 지내면서 빌어먹는 거지 생활을 했어요. 일자리도 없어요. 그냥 빌어먹는 거예요. 한 푼 줍쇼, 하고 빌어먹는 거예요. 애 세 명 데리고.

그걸 누가 아느냐? 담임 선생님이 알았고, 같은 학교의 김동식 선생님도 알았어요. 그 이름까지는 알 필요 없지만. 애가 말을 안 해서 몰랐는데 숙제로 낸 그 일기장을 보니까 세상에 이건 기가 막힐 일기장이에요. 그런데 그 와중에 거지 생활을 하면서 도 또 어떤 버스회사 사장님이 주선해서 집 하나는 구했는데 아버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술 먹고 오다가 차 사고 나서 아파서 누워 있어요.

동생 셋, 그리고 아버지는 누워 있고 장남인 국민학교 4학년 애인 윤복이가 다 건사하는데 여동생 하나는 또 하도 집구석이 엉망이니까 돈 번다고 서울로 도망갔네요. 그러니까 윤복이가 애 하나 업고 서울로 도망친 누이동생 찾는다고 돌아다니는데 찾지도 못했어요. 인생 꼬여도 참, 슬퍼도 그렇게 슬퍼요.

그런데 그때 마침 김동식 선생님이 주선해서 그 일기장을 출판하자, 했는데 그 애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여동생 찾으러 다녔어요. 그 일기장 출판한 것이 크게 히트를 쳐서 나중에 출판사 사장의 도움으로 동생도 찾고 대구 내려올 때 비행기 타고 내려왔는데 아버지는 부끄러워서 얼굴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 언론사 기자라는 기자는 다 와서 사진 찍고 했습니다.

책이 10만 부나 팔려서 집도 마련했을 때 그때 도망친 엄마도 다시 돌아왔어요. 그 윤복이가 나하고 나이가 동갑이에요. 동갑이라서 가슴이 너무 슬펐어요. 지금 봐도 슬퍼요. 대책도 없고 불가능해요. 그러다 1990년, 나이 38세(1953년생)에 너무 고생해서 간경화로 죽었어요.

자, 이제 테스트입니다. 이 이야기, 여러분이 그 윤복이라면 그 윤복이 입장에서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내가 윤복이라면 이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이 테스트를 우리가 넘어서야 돼요. 슬픔은, 슬픔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슬픔은 바로 내 존재에서 슬픔이 와요. 그 원천은.

그러면 내 존재는 어디서부터인가? 2층에 있는 천사의 모습, 그 기능이 에스겔에 나옵니다. 거기에 네 천사가 나오는데 사람의 얼굴, 사자의 얼굴, 소의 얼굴, 독수리 얼굴이 나옵니다. 그 천사들이 한꺼번에 같이 움직이는데 에스겔 1장 17, 18절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눈이 가득하다.

천사는 소유가 아니고 기능이 우선이에요. 천사에 박혀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여서 기능적으로 움직여요. 그 눈은 어디를 향하느냐?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악령이 없는 곳이 없기때문에 그것을 심판하는 천사도 같이 다 보는 거예요. 이 세상 어떤 것도 악령의 사고방식이 없는 곳이, 출렁이지 않는 곳이 한 것도 없이, 교회 안이든 밖이든 언제든지 악마의 소리, 악마의 본성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천사가 눈이 많아서 그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주시하고 있는 거예요. 저 슬픔, 저 기쁨, 저 환희와 저 촐랑댐,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 어느 것 하나 율법을 주신 천사 입장에서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천사는 인간이 천국 가고 있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사야 6장 4, 5절에 보면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윤복이는 누가 복음 이야기해 주는 사람도 없고 가정형편도 그랬어요. 그저 바깥에 있는 멀쩡한 사람들이 부러워서 나도 구두닦이하고, 껌 팔고, 깡패한테 얻어맞아 가면서 어쨌든 존재하는 동생 세 명과 아버지를 계속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분투노력을 다 한 거예요.

그러나 이사야 6장 5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서 그 윗 층,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세계와 아래층에 있는 이사야가 직접 대면하고 맞닥뜨린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사야 6장 11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스토리, 계획이 이사야에게 주어집니다. 이사야는 그대로 전하면 되지요. “내가 모든 것을 싹둑 다 잘라버리리라. 십분의 일이 남아도 다 자르리라.”

하지만 그게 잘려야 비로소 나오는 그 그루터기, 그 그루터기가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예요. 다 잘라야 돼요. 윤복이가 가난하다, 어렵다, 힘들다, 간 경화다, 좋아요. 하지만 그것마저 잘릴 때, 그것마저 잘릴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주님도 나보다 더 슬픈 존재로 이 땅에서 사셨다는 사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아무도 갈 수 없는 십자가에 주님 홀로 투신했지요.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불행의 자리, 슬픔의 자리, 지독한 슬픔의 자리에 주님은 아예 겨냥해서 노리고 투신한 거예요, 거기에. 그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고, 그 투신한 데서 그 구멍에서 뭐가 나오느냐? 성령이 나왔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내부에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지 않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는 소유가 아니고 성도는 자리에요. 끝으로 성경 말씀 한 곳 보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이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사가 왜 활동해야 되는지, 율법을 왜 줘야 되었는지,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나야 되는지, 심지어 악마가 왜 이 세상을 접수하고 장악하고 점령해야 되는지, 바로 우리 존재가 문제였던 것을 지적하기 위함인 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 육신은 ‘정녕 죽으리라’를 위해서 있고 우리의 성령께서는 ‘죽은 너희가 정녕 살리라’ 하는 주님이 주신 자리가 살아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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