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기적의 극단

아빠와 함께 2024. 3. 10. 18:24

기적의 극단 

2024년 3월 1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2:4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악마가 인간에게 찾아와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건넨 말씀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그런데 이 말씀에 중간에 끼어든 존재가 있었습니다. 악마입니다. “그 과일을 먹으니 인간은 신이 된다”입니다.

이 악마의 말에 의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인간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더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인간은 이로소 악마의 구현체가 되었습니다.

악마의 마음이 곧 인간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요구하는 기적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기적과 대치되는 것이 된 겁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인간을 배제한 채 오로지 아들이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연락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이 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생존과 자손 번식에 관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간에게 언급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이미 죽었다”고 말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면서 “나는 살아 있다”고 외칩니다. 이로서 인간은 이미 악마의 구현체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인간 자체로서 하등 살 이유가 없음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4장에 나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눅 4:25-26)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인 줄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이 어려운 시기에 많은 과부가 있으되 아무도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오직 사렙다 한 과부의 아들과 먹을 마지막 음식까지 빼아버린 선지자의 행위가 기적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은 철저하게 인간이 기대하고 희망하는 모든 것들을 좌절시키는 식으로 찾아듭니다. 인간들이 기어이 자신을 죽은 자로 안 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사력을 다하여 자기를 살리는데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 것들은 모조리 다 끌어모으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에 대한 태도로 이어집니다. 숱하게 많이 나오는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믿습니다!”고 자신 만만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그 ‘믿음’이란 기껏 일시 장착되는 것처럼 보이는 지식일 뿐입니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톤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을 안다고 해서 자기가 굳이 죽을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하던 자신은 자신을 살리는 쪽으로 매진하면 그만이다는 겁니다. 이 말씀 하나를 두고서 목숨을 바칠 하등 의사는 없습니다. 혹시 죽고 난 뒤에 자신을 살릴 수도 있다고 희망을 가져 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죽을 때에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살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 자신이 실은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도 편지에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믿습니다’고 외칠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해서 ‘모조리 다 거짓말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부합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8:30의 말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에 대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흔히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렇다면 당신이 이 말씀만 있다면 당신이 인생이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지요?”라고 물으면 “그건 곤란합니다!”라고 답합니다.

인간들은 말씀을 믿는다고 여기지만 속마음은 자신이 초라하고 망해서 부끄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악마가 자신의 말 상대자는 인간을 찾아온 것처럼, 인간들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합니다. 인정받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제 이야기 잠시만 들어 주실래요?”이게 인간들이 기적을 원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성경 요한일서 4: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즉 성령을 받은 자는 ‘악마의 구현체’가 아니라 ‘성령의 구현체’라서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연락내용 속으로 들어온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음’→‘없음’→‘나타났음’의 코스를 밟아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 코스를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악마의 구현체로서 인간은 이 ‘없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즉 인간은 생존과 번식 외에는 아무 것도 안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것 외에는 다 거짓이라고 단정짓습니다.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시는 걸까요? 세례 요한이 이점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은 사막, 곧 죽음의 땅에서 활동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은 ‘생존의 땅’에서 먹고, 마시고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그 광야와 생존의 땅 가운데 강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침례의 강, 곧 죽음 속으로 침수되는 틈입니다. 그 틈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일한 반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없음→있음’으로 나아간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 팀에서 나온 성령을 기적으로 부여받게 되면 그 심령은 ‘가난한 심령’이 됩니다. 곧 살아 있으나 도리어 “왜 굳이 저를 계속 살려내십니까 당장 죽여도 합당한 존재를!”라고 감사할 자들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살리시는 이유는 말씀이 억매이지 않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말씀을 통해서 이 땅에서 자기 무덤을 만드는 일에 매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올라오는 우리의 과거를 말씀으로 매일같이 절단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히브리서 2장 4절(기적의 극단)24031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2장 4절입니다.

히브리서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적은 하나님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 자신의 아들인 독생자가 하신 일을 증거 하는 용도에 준해서 거기에 맞춰서만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 말고 이미 인간들은 따로 어떤 기적들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는 겁니다.

인간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인간들이 어떤 기적을 원하는지 그걸 먼저 알아야 어떤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은 인간이 원하는 기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인간에게 찾아옵니다. 여기서 그때부터 인간들이 원하는 기적이 있어요. 그걸 문장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제 이야기 잠시만 좀 들어줄래요?” 제 이야기 잠시만 들어줄래요.

모든 인간은, 말은 하지 않더라도 누구를 만날 때 “혹시 당신이 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맞습니까?”라는 태도를 가지고 타인에게 접근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걸었어요. “선악을 알게 한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미 말을 하나님 쪽에서 분명히 주신 적이 있어요. 있는데 여기에 누가 끼어드냐면 악마가 끼어듭니다. 마귀가 끼어들어요.

쉽게 말해서 악마가 인간보고 하는 이야기가 “인간님, 제 이야기 잠시 좀 들어주실래요? 제 속사정 이야기요. 제가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지 제 이야기 잠시만 좀 들어주시렵니까? 내가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데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이러한 태도를 악마가 인간에게 먼저 제시했어요.

하늘 전쟁에서 추방된 마귀가 외로워서 인간을 찾아왔고 이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미 말이, 그 관계가 성립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중간에 끼어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지 않을 겁니다.” 악마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끄집어냈고 거기에 인간은 말려들었습니다. 이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먼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죽는다는 이야기와 완전히 충돌을 일으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과 인간보다 먼저 충돌한 존재가 하늘나라의 악마입니다. 악마가 하나님께 대들다가 미카엘에게 깨져 땅으로 쫓겨났거든요. 그러니까 악마가 이 땅에 올 때는 마음 단단히 먹고 온 거예요. 하나님이 하는 일에 전부 반대하는 쪽으로, 반대하는 말을 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악마의 속성 쪽으로 전부 다 끌어당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시도하는 것이 ‘말 건넴’이에요. “제 이야기 조금만 들어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이야기를 끄집어낸 나의 존재에 대해서 당신이,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겠습니까, 확인해주시겠습니까, 하는 그런 말,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이 땅에 왔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때부터 악마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죠. 그렇다면 인간은 뭐냐? 악마의 구현체, 악마의 발현체. 살아 있는 악마가 인간의 모습으로 화(化), 인카네이션 된 것, 악마가 사람 모습으로 등장하는 게 그게 바로 인간인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생각은 악마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동일합니다.

욥기 1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내세우기 위해 악마와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을 건넴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가지고 있는 속마음을 폭로시키고 동시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도 사탄과 똑같은 마음으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각시키는 작전을 벌렸어요. “욥의 믿음이 대단하다.” 이렇게 하니 1장 11절에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악마는 자신만만합니다. 모든 인간에 대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악마가 자신만만한 것은, 욥이 하나님을 믿는 척하고 신앙 있는 척하지만 그의 소유를 뺏으면 하나님께 욕을 할 것이라고 그렇게 미리 예언을 해요. 이것은 악마가 마음이 참 못됐다, 가 아니라 모든 인간도 이 악마의 마음을 그대로 동일하게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기적을 원한다, 어떤 기적을 원하느냐? “내 소유를 뺏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소유를 늘어나게 하는 데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하나님께 우리가 기쁨과 찬양과 영광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조건하에 교회 나오고 또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미 뭘 잊은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이 말은 이미 인간이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너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죽는 건 그것은 나중 문제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가가 우리 가슴에 와닿는 우리 마음에 와닿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 악마의 마음으로 자기를 무장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어도 “저 죽은 거 맞아요?”라고 묻는 사람이 없고 “저 살려주세요. 살려 주시면 헌금하고 뭐 하고…, 그것도 아니면 봉사부터 하고 다 할 테니까, 섬길 테니까 제발 살려만 주세요.” 그거 외치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거죠.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집어 넣어주는 말 때문에, 그 성품 때문에, 속성 때문에 이게 가로막혀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정말 불가능한, 인간에게는 어떤 것이 가능치 않은 가를 먼저 확실하게 드러내 놓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기적을 동반해서 같이 보여주는 거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집니다.”라고 마태복음 7장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인간들은 그 말씀 듣는 순간 자기 본색을 확 들켜버렸어요.

안 무너지려고 반석을 찾아갑니다. 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니고 무너져 봐야, 푹 꺼져봐야 비로소 거기서 반석이 보이는 거예요. 인간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어떤 연결 고리가 악마로 인하여 전부 다 차단되고 끊어져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턱 턱 던지면서 어디로 가느냐면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모든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모든 인간이 따라오는 것이 불가능한 그 지점까지 가죠. 그리고 예수님이 홀로 아버지께 갑니다. 홀로,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 가요. 베드로도 따라가다가 실패했습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 종이가 하나 있는데요. 여기 여러분 보입니까? X표를 두 개 쳐놨어요. 이 땅, 밑의 지점에서 위의 지점으로 올라간다. 인간은 말씀을 지켜서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백날 해도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걸 접어요. 이걸 접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 버립니다.

구멍을 뚫으면 수평적 요소가 아니라 이 구멍 뚫림, 이걸 통해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거예요. 이 구멍 뚫림이 뭐냐?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인 동시에 성도 본인의 죽음의 자리에요. 성경에는 굉장히 많아요. 죽지 않고서는 사는 길이 없습니다. 왜냐면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성경대로 바른 말인데 인간은 그 이야기까지 내가 안 죽고 갈 수 있는 방안으로서 그 말씀을 믿으려고 합니다. 죽으면 구원받는다는 말도 내가 안 죽는 방식의 일환으로 그걸 사용하려고 해요. 그만큼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장악한 악마는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내보내질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한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우리 속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는 우리 힘으로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악마는 늘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너는 살아 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든 말든 믿지 마라. 넌 살아 있잖아. 거울을 봐. 거울을 보면 손이 이렇게 움직이잖아. 살아 있잖아. 그게 확실한 거야. 살아 있는 네가, 죽음이라는 건 나중 문제니까,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거냐, 지옥 갈 거냐는 건 살아 있는 네가 어떻게 하기 나름이야.” 그걸 악마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산에 어떤 목사님이 계신데 아주 오래전에 그 목사님과 잘 아는 어떤 분이 저에게 “그 목사님 설교가 어떻습니까?”라고 저한테 비평을 부탁한 일이 있었어요. 아주 옛날이에요. 목사님이 그분과 잘 아시니까요. 그분 설교가 늘 뜨니까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그분 설교의 장점부터 먼저 언급했어요. 그분 설교의 특징은 장점이 성경대로 말씀을 전한다는 거예요. 그분의 설교하고 성경을 비교하면 구분이 안 돼요. 성경 그대로 해요. 성도가 되었으면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고, 그 많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용서하심을 믿어야 되고, 그리고 우리가 성도가 되어 열심히 하는 것은 행함이 아니고 이건 성령이 와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 영광될 수 있다, 그 목사님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새사람 되었으면 새로운 피조물답게 항상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서 주께 영광 돌리는 것이 이게 성도의 본분이고 세상과의 차이점입니다.” 늘 바르게 사는 것, 이걸 이야기하시는 분이에요. 그게 그분 설교의 장점이라는 거지요.

단점은 딱 하나에요. 바로 그 설교가 죄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게 단점이에요. 개혁주의 신학에 합당하게 다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가 자기 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인정을 못 해요.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본인이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시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오늘 본문대로 하면 기적을 받은 적이 없어요. 아예 악을 쓰고 애를 써요. 꼭 등반가 같아요. 등반하는 사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마귀와 싸워서 이겨서 기어이 저 고지에 이르려고 줄 타는 사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기적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의 연락 체제에요, 기적이.

우리가,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교회를 한다? 성경을 본다? 이거 다 자기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인간의 분투, 노력입니다. 교회와도 아무도 안 믿어요. 말씀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 구절을 가지고 그 태도에 대한 측정을 속으로 하고 있는데 오늘은 속으로 말고 실제로 한 번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믿습니까, 라고 하면 “믿습니다.”라고 해요. 그건 믿는 게 아니고 지식입니다.

로마서 1장 6절에 보면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믿습니까,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거 믿는 게 아니고 지식이에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1장 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 부르심을 입은 자들, 그리고 1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믿습니까, “믿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게 믿는 게 아니고 지식이 되는 거예요.

몇 가지만 더 하면요, 고린도후서 1장 10절에 보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이것도 지식 돼요. 고린도후서 4장 14절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믿습니까, “예, 압니다.” 지식이니까, “압니다.”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믿습니까, “예, 압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12절에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믿습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 아니고 워싱턴입니다. 믿습니까?” “예, 압니다.” 지식이 왜 아는 것으로 되느냐 하면,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든, 워싱턴이든 LA든 그 사실이 나를 죽이지 않잖아요.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이라는 사실이 날 죽입니까? 더 멋있게 살게 만들죠.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 “너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우리가 죽는 쪽으로 가야 이게 기적인데 교회에 와서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나는 꿈쩍도 안 해요. 안 죽어. 미국의 수도가 로스엔젤레스다, 이전을 하든 말든 내일부터 내가 직장생활하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어요? 아무 관련도 없어요. 주께서 우리 죄를 사해줬다, ‘했겠지 뭐. 믿습니다. 좋네, 뭐 받아들일게요. 그런데 날 건드리진 마세요. 난 살아 있으니까. 날 힘들게 하지 말라고.”

내가 원하는 기적은 내가 보다 잘 사는 거고, 내가 건강한 거고, 내가 남에게 자랑할 게 있어서 누구를 만나든 “아저씨 제 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요?”라고 외롭지 않게 내 말에 편들어 주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 악마가 이미 심어준 기적을 확장시키는 그 기적을 우리는 원하고 있습니다.

악마의 소원은 안 다치고, 벌 안 받고, 존재가 계속 존재하고, 자기 행세 다 하는 것처럼 우리는 똑같이 닮았어요. 우리가 마귀와 똑같이 닮아서 우리도 안 다치고, 몸 안 아프고 건강하고, 사람 대우받는 것, 누가 이야기해도 “내 이야기 들어주세요.”라고 하면 “들어줄게요.”라고 할 수 있는 것, 그런 존재를 원해요.

연예인들, 가수들, 배우들, 이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의 소원은 물론 돈 벌게 하지만 돈보다 더 깊은 자신의 삶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남들이 나를 알아준다는 거예요. 내 존재를 인정해 준다는 거예요. 길 걷다 보면 “어? 누구 아니세요? 사인 해주세요.” 이거. 여기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최고 절정을 만끽한다는 것을 연예인들이 노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기 떨어지면 자살하려고 하죠.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으니까. 유명한 의사, 유명한 판사, 유명한 변호사 되면 방송국에 나와요.

하나만 더 해볼게요. 디도서 3장 4, 5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믿습니까,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과 내 목숨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장착할 생각은 있는데 장착, 소유할 생각은 있지만 내가 이 말씀을 들으려고 죽기 위해 교회 나오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살기 위해 나온 자들의 집합체입니다. 교회가 그럭저럭 운영이 되는 이유는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에요. 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고 아무도 안 믿어요. 믿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목사 본인도 안 믿어요. 교회 몇 명 나오는지, 헌금 얼마나 하는지 그것만 믿어요. 아무도 안 믿어요.

그래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인하여 하나님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찾는데 전부 다 산 자로 행세하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들은 사람도 없어요. 인간 세계 자체가 정화조 같아요. 좀 더럽고 추잡지만.

하나님의 뜻은 넌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뒷배에 심어놓고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넌 이 더러운 땅에서, 이 사탄의 땅에서 무덤을 만들면 돼.” 네 무덤을 만들기에 나서면 돼요. 말씀으로. 거기에 필요한 게 뭐냐? 주님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에요.

내 목숨과 주어진 말씀과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어요. 그런데 그걸 바꿀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성경의 많은 말씀, 구원에 관한 말씀, 요한복음 11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는 그 모든 말씀들, 그런 말씀들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내 사는 위주로 예수님과 관계하고, 말씀을 당겨서 가져오는 그런 모든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함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걸 기적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인간은 자기 존재와 사는 걸 규정해서 기적인지 아닌지를 판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이게 바로 기적입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뭐가 기적이냐? 많은 과부에게 가지 않은 게 기적이에요.

이 땅에 사람들이 힘들다고 해서 도와주는 게 기적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인간은 도와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시체들이고 시신들인데 뭘 도와줘요? 다 죽은 존재를 왜 도와줘요? 죽은 존재를 죽도록 해주는 환경이 오히려 사랑인 줄 알아야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것, 그 기적은 하나의 기적을 겨냥합니다.

그건 뭐냐? 과부가 된 것도 기적이 아니에요. 과부가 되어도 마땅해요. 하지만 엘리야를 만나는 환경 조성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것과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죽어 마땅한데 안 죽게 된 거예요. 망해도 마땅한데 이상하게 왜 망하지 않는지를 모르겠어, 이게 기적이에요. 기적이란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의 연락 체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는 기적이 없어요. 기적은 이 땅에만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야 늘 잘 사는데 무슨 기적이 필요합니까? 왜 이 땅에 기적이 필요하느냐? 예수님이 오셔서 “나 여기 있다.”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서 있잖아요. 있는데 없어졌어요. 없는데 하늘나라에 나타났습니다. 있는 것도 없게 만들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게 기적이거든요.

이 코스를 누구에게 적용시키는가? 천국 백성에게 그대로 반복해서 적용시키면 이게 기적이에요. 나 있어도 없는 자며, 없어야 되는데 있게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의 코스, 성령과 함께했던 그 코스로 안에 그대로 진입하게 되면 그게 바로 기적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걸 알려주죠.

그러니 “지금 멀쩡하게 거울 보며 있는 나, 살아 있는 나를 죽었다고 하고 분명히 거울 보고 있는 나를 없다고, 과연 그럴 수 있어? 그건 말이 안 되지.”라고 이야기 할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여러 말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 성경 말씀에 나오니까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우리가 약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믿습니까?”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 압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믿지를 않아요. 그냥 이 말씀을 알고 있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예요. 방금 했던 고린도후서 4장 14절을 보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믿습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 말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다음 이야기, “이 말씀에 대해서 당신이 목숨을 내놓겠습니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고 남편 죽고 과부가 되어 자살하기 위해 마지막 음식을 먹는 그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면 돌로 치려고 덤벼들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믿습니까,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 말씀에 의해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부서지고 망가져도 상관없겠습니까?”라고 할 때 일단 대답은 안 해요.

하지만 속으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모든 성경 말씀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거짓말이라고. 성경 전체가 다 거짓말이다, 모든 성경 말씀은 다 거짓말이고 그걸 듣고 안 듣고는 상관없이 내가 먹고 사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그렇게 인생 정리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왜 이 성경 전체가 다 거짓말이라고, 방금 이야기한 죄의 사함이고, 부활이고 뭐고 다 거짓말이라고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가? 말을 하면 그게 부끄럽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이 맞아요. 이제 걸려든 거예요, 창세기 3장에.

인간이 죽은 이유가 부끄럽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부끄럽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오는 거예요. 성경 말씀이 진짜 믿어진다면 무엇도 날아가야 되느냐? 두려움도 같이 날아가야 돼요, 성경 말씀에. 두려움이 같이 날아가야 된다고요.

왜냐하면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일 3:10)고 했어요. 성경 말씀을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 두려움이 날아가 버려요. 왜 그러냐? 부끄러울 게 없기 때문에요.

그런데 성령의 기적을 안 받은 사람은…, 왜 목사가 바른 설교를 하려고 애를 쓰냐면, 내가 성경 말씀을 잘 못 전하면 하자 있는 목사가 되는 게 부끄럽고 무섭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이게 무서우냐? 이건 나에게서 들통날 타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타인의 앞에서 나를 제대로 감추지 못한 나에 대한 분노에요. 개뿔도 믿음도 없으면서 그걸 남에게 들키냐, 이겁니다.

교회 왔으면 믿는 척이라도 연기를 잘 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못 하는 거예요. 정말 우리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 어느 자리든 어느 말을 하든, 이게 나와야 해요. 굳이 아직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나타내야 돼요. 굳이 살 이유도 없는데 굳이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말해야 합니다. 맛있는 커피 먹으려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롯데리아 가서 치킨 먹으려고 사는 건 아니라 이 말이죠.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 다른 이유. 아이들 교육시키려고 사는 게 아니거든요.

이처럼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 맘 부림을 쳐도 창세기 3장에 딱 걸리게 되어있어요. 3장 7절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딱 걸렸어, 딱 걸렸어. 인간은 이미 시체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자만이 남이 시체라는 것을 알아요. 왜?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보이기 때문에.

뭐 총선 나간다고? 죽은 시체가 총선 나가 뭐 합니까? 동구에 국민의 힘 후보가 누가 됐나? 그거 누가 되든 시체인데 뭐요. 국회의원 돼도 시체에요. 우리나라 국회의원 300명, 시체 300명.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한 가지에요. 자기 죽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구원도 없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디모데후서 2장 9절에서 10절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 다 아는 이야기죠, 또 다 아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이거 충격적인 이야기에요.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 죽었다는 거죠. 나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안 죽었다.

그러면 성도에게 있어 눈과 코와 입은 뭐냐? 말씀에 응답해서 반응을 나타내기 위해 붙어있는 거예요. 말씀에 대해 반응하기 위해. 바로 사렙다 과부가 그런 사람이에요. 엘리야 선지자의 찾아옴에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게 하나님의 찾아가는 서비스, 기적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에 성질이 급해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불러내죠. 그게 바로 사무엘상,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28장 4절에 보면 거기 보면 사울 왕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냅니다. 사무엘을 불러냈는데 상봉에 실패했습니다. 절단된 관계의 끊어짐만을 확인했을 뿐이에요.

죽은 세상에 있는 죽은 자를 불러냈는데 그 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된 이유가, 저쪽을 죽은 자로 봐서 문제가 된 거예요. 불러내는 내가 죽었기 때문에 불러낸다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죽음이라고 보거든요. 죽었다는 말은, 숨이 끊어졌다는 게 아니고 저주가 살아 있는 걸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가 살아 있는 것을 죽음이라고 보는 겁니다.

네가 선악과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저주받으라는 뜻이에요, 이게. 악마한테 하는 이야기와 동일한 이야기에요. 그러니 이건 뭐냐 하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죽음이 돼요. 이건 더 골치 아프죠. 사람이 안 죽어요. 죽어도 예수님 부활 날에 무덤에서 다 불러냅니다. 죽지 않아서 골치 아픈 거예요.

사울 왕이 사무엘 불러냈어요. 사무엘상 28장 14절에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 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신접한 여인, 여자무당, 그리고 사울 왕, 여기에 제3의 인물이 홀연히 등장했어요. 유령사무엘.

그런데 그들의 관계는 통합에 실패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 지금 예수님 불러내잖아요? 죽은 예수님 불러내도 통합실패입니다. 우리를 상대 안 합니다. 우리는 기껏 교회 와서 종교 생활했을 뿐이지요. 통하지 않아요. 안 통합니다, 그것은.

그러면 주님께서 이러한, 이 불가능함을 어떻게 가능으로 바꾸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선지자를 보내주면서 우리에게 알려준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막이에요, 사막, 광야. 사막의 특징은 살 수 없는 곳이에요. 네가 거기에 딱 적합하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어디서 활동했는가? 광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사막에서 활동했어요. 죽음의 땅에서 활동했습니다. 엘리야도 어디서 활동했는가? 광야에서 활동했어요.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어디를 통과했는가? 사막에서 살았습니다. 사막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부여받은 거예요. 너희들은 사막에서 죽어 마땅함을 율법을 통해서 그들에게 알려줬던 겁니다. 이 사막이, 너희들을 죽음으로, 무덤으로 만드는 사막이 너희들에게 적합한 환경이라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율법의 취지가, 그럴 때 말씀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들에게. 그들이 믿을 것은 오직 모세, 더 나아가서 모세의 지팡이 외에는 믿을 게 없습니다. 유일한 통로가 모세와 하나님과의 관계, 연락체계가 되어있거든요. 그게 사는 방법이에요. 본인이 노동하거나 본인이 농사지어서, 본인이 고기 잡아서는 못살아요.

오직 위에서부터 오는 연락체계, 그걸 언약이라 하는데, 모세 언약, 약속의 통로, 그것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근육, 힘줄이 없어서 죽습니까? 뼈가 없어서 죽겠어요? 노동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딴 것은 사는 게 아니에요.

그런 입장에서 디도서 3장 5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라는 이 말이, 불쌍히 여겼다는 이 말이 일체 죽은 자의 노동과 행함을 안 받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우리 본성은 어떻습니까?

인간은 자체적인 기억이 있어요.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지식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기억이라 하는 것은 생존과 번식에 특화된 종족으로 악마로부터 개조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생존, 그리고 자기가 늙어 죽는다 싶으면 자식 번식하면 돼요. 번식함으로써 가문을 만들면 그게 종족보존이에요. 거기에 특화된 종족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해서.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만든 사람 아닙니다. 이것은 악마에서 개조된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살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지식을 끌어모읍니다. 그 끌어모으는 지식 중 하나가 뭐냐? 율법이고 말씀이에요. 계속 끌어모으는 거예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자기를 더 살리기 위해서.

거기서 그들은 개인적인 힘도 모자라서 집단의 힘, 동족의 힘을 모으고 국가의 힘, 단체의 힘을 믿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거예요. “도와줄 수 있습니까? 제 말 들어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바로 인간의 주체가 곧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7, 38절에 보면 인간의 본능이, 본심이 나와요.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다음에 누가복음 같은 경우에 ‘사고팔고’가 추가되어 있어요. 사고팔고, 돈 벌고, 장사하고, 취직하고, 그리고 장가갔으니까 자식 낳아야지요. 애 하나 낳고, 또 둘 낳고. 국가에서 보조금 얼마 주는지 계산하고, 이거. 인간의 생각에서 이것 빼놓고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이게 전부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인간들을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겁니다. 너 자신이 누군가를 알도록 그렇게 몰입하게 하는 거예요. 사는데에, 생존과 자손 번식에. 인생 전체를 다 걸게 만들었어요. 왜 사고팔고, 여기에 노력합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 죽기 싫다는 거예요. 왜 죽기 싫지요? 아직 안 죽었다는 거예요.

이거는 진짜…, ‘정녕 죽으리라’ 한 그 말씀을 완전히 개차반같이 여기는 거예요. 애초부터 말씀과 차단되어 있어요. 말씀 안 믿습니다. 그 말씀 들은 적은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믿지는 않아요. 믿는 것은 내가 살고자 하는 노력 외에는 아무것도 안믿어요.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는데 7년 동안 성전을 지었습니다. 짓고 난 뒤에 낙성식을 하는데 열왕기상 8장 63절에 보면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전의 낙성식을 행하였는데…” 여기 소가 이만이천 마리, 양이 십이만 마리였습니다.

이거 기적입니까? 기적이 아니에요. 왜? 소도 바치면 되고 양도 바치면 되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두 지점까지 기어 올라갈 수는 있어요. 믿는 것, 바칠 수가 있어요. 기적은 아니에요. 이걸 뚫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은 성전 세우고, 예배당 세우고, 인간이 다 해내는 겁니다. 교회도 만들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기적 아니에요.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인간은. 이러면 살겠지, 이러면 구원받겠지, 이러면 천국 가겠지, 이것은 기적 아닙니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그 노력의 확장이에요.

인간의 그 모든 노력의 문제가 이 기억 때문에 그래요, 기억 때문에. 과거의 기억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기억을 자꾸 붙잡고 있어요, 붙잡고. 왜? 기억이 있어줘야 그게 에고, 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 나는 기억의 뭉치를 나라고 해요. 나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그만큼 기억의 꼬리가 길기 때문에, 과거의 꼬리가 길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지난 낮 설교가 그거였습니다. 율법이 침투되면, 율법이 추가되면 그 과거를 싹둑 끊어버리는 거예요. 엿가락 끊어버리듯이 과거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과거가 살아 있으면 내가 무슨 일을 해도 거기서 분노가 일어나요. 그걸 애써 억누르지만 매일같이, 날마다 분노하는 이유가 날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자기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주의 말씀은 뭐냐? 날마다 발생되는, 날마다 생성되는 기억을 날마다 잘라내는 것이 말씀의 역할이지요.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말씀은 “어쩌라고? 말씀은 얽매이지 않아. 너는 죽어 있어. 얽매이지 않는 말씀이 너를 매일같이 살려내고 있는데 네가 왜 자꾸 거기서 과거 운운하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과거를 이야기하는데 그걸 왜 끄집어내? 그러니까 분노가 함께 일어나지요, 분노가!”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는 나 안 다치려고 하는 거예요, 날 안 다치려고. 내 기억이 남에 의해서 피해 안 보려고 하는 겁니다. 정신병이 다른 게 있어요, 그게 정신병이지요.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세례요한을 광야에 살게 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광야에 살게 하는 이유는 이쪽 생존의 땅, 인간들이 먹고 마시고 살고 팔고 하는 그 땅, 그 사이에 요단강이 있어요.

그게 뭐냐? 침수하는 침례를 행하는 거예요. 보통은 세례라고 하지만 오늘은 침례라는 말을 특별히 쓰고 싶습니다. 물에 빠뜨려 죽여버리는 거예요. 틈이에요. 건너올 수 없어요. 죽음의 땅과 그리고 생존의 땅, 생존의 땅은 죽음의 땅을 싫어하고, 죽음의 땅에서 생존의 땅으로 건너가고자 할 때 그 누구도 연결될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해당이 안 돼요.

예수님도 이 땅에 왔으면 필히 버림받고 죽어야 돼요. 말씀 잘 지켜도 소용없어요. 예수님께서 말씀 다 지켜도 안 돼요. 버림받아야 돼요. 이게 이 땅의 속성이고 운명입니다. 바탕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 그 죽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게 바로 성령의 기적,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준 기적이 그겁니다.

“죽어라, 인간아! 인자야 죽어라.” 나의 아버지라 했어요. “아버지여, 이 잔을 안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된다. 마셔야 한다.” “제가 꼭 죽어야 됩니까? 꼭 저주받아 죽어야 됩니까?” “저주받아 죽어야 된다.” 그래야 악마의 속성과 작별할 수 있습니다.

악마는 네 소유가 없는 너는 무의미하다는 거예요. 내 소유가 나를 살리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다소 어려운 말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실컷 칭찬해 놓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대단한 존재로 이야기해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을 끝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놓고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 말씀을 왜 덧붙였느냐? 구약의 선지자들 대단해요. 정말 대단합니다.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왔고 주의 말씀만 의지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구약 선지자들이 신약의 성도보다 못한 이유는 그들에게 긴 과거의 꼬리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과거에 이렇고 고생했고, 이렇게 고난받았고 수난받았다는 긴 꼬리가 있어요.

그런데 신약에 있는 성도는 그 꼬리가 완전히 잘려버렸습니다. 꼭 어린애 같아요. 그걸 가지고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창녀와 도둑과 그리고 장애자들, 과부들, 고아들, 나그네들, 공통점이 뭐냐? 뭐 내세울 과거가 없어요. 자랑할 게 없어요, 자랑할 게 없어.

산 게 아니고 꼭 죽은 자 같아요. 누가 옆에서 툭 치면서 “아이고,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렇게 소경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나아’ 날마다 느끼는 것은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아.’ 그런데 그다음 질문이 뭐냐? ‘왜 살려주십니까? 그런데 왜 살려주지요?’ 말씀의 구현체가 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성도는 성령의 구현체에요. 전에는 악마의 표시였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 성령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고 보이지 않는 주님이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의 말씀의 구현체로 살아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살리라. 누가 이걸 받아들입니까?

이게 바로 성령의 기적을 받은 사람은 성령 안에서의 침례, 성령의 세례, 이미 죽은 자로서 말씀이 살아나니까 매일같이 사는 사람, 아파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고, 망해도 괜찮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도 괜찮고, 사기당해도 상관없고요. 사기 안 당하려고 하니 문제지만 사기당해도 문제없고, 폭삭 망해도 상관없고, 전쟁해도 상관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성경 봐도 거짓말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이게 우리의 솔직함인데 이런 자를 왜 살려주셨습니까?” “죄인이니까 살려 준거야, 죄인이니까?” 네가 죄를 보여주니까 살려준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욥을 버렸습니까? 안 바렸어요. 그러나 욥으로 하여금 제일 추락하는 자리까지 데려가는 것, 그게 욥이 보여주는 십자가라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보여줄 십자가는 주께서 기적적으로 여러분 속에 담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놀기 삼아, 친목계 삼아, 그저 자랑거리 삼아, 시간 때우기 삼아 교회 다녔던 저희들, 이제는 교회가 우리의 유일한 무덤인 것을, 말씀이 무덤인 것을 저희들은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일체 과거와 단절된 말씀으로 새롭게 살아났다면 어떤 두려움과 부끄러움도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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