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악마의 알박기

아빠와 함께 2024. 3. 3. 18:21

악마의 알박기

2024년 3월 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2:1-3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인간 세계에 천사가 들락거린다는 것은 상당히 수상하고 위기적 상황입니다. 천사는 인간들을 도와주려고 온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 세상을 심판하려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율법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진노로 저주하기 위함 바탕이 됩니다.

이 천사들의 출입으로 인해 인간 세상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율법은 어떤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확정이 난 세상 심판의 절차로 주어지는 겁니다. 율법의 투입으로 이 세상은 율법의 요구에 완벽하게 실천하지 아니하면 사정없는 처벌이 주어집니다.

벌써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능력이 상실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율법 제시로 인하여 세상 처벌의 정당성을 알리십니다. 창세기 19장에서 롯의 가정에 천사가 찾아옵니다. 롯은 그 소돔과 고모라 생활을 일시에 청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강제로 그 롯의 가정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가게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은 스스로를 챙기려는 것과 그 챙기려는 그 내용물은 자신의 과거로 가득 채워져 있기에 미련이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확정된 율법 처벌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과 결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육신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 자아 의식이 절단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바로 이 일을 성취시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취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롬 7:9-13)

즉 인간은 이 땅을 죽을려고 태어났는데 이는 율법의 선함과 그로 인해 인간 속에 알박기된 죄의 존재를 살려내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방향으로 이끌어가십니다. 반면에 악마는 인간을 자꾸만 살려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본인이 자신이 신이라는 점을 자각시킵니다. 즉 ‘나는 살고 싶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를 추구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율법을 통해서 “너는 심히 죄인되었음을 율법을 통해서 증명해줄게”라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율법과 인간을 만나게 해줍니다. 당연히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 가지 조건을 살리는 취지로 율법의 인격화에 참여한 자를 살려냅니다.

그 세 가지 조건이란 포도와 관련된 것과 멀리하고, 몸에 난 떨을 밀지않고, 장례와 관련된 행사나 시신과 접촉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인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과 관련된 율법 조항입니다. 결국 나실인으로 부름받은 자가 정해진 기간 동안 세 가지 조건을 완수하게 되면 드디어 인간의 신체 일부가 거룩한 제물과 연합하기 됩니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민 6:18-20)

결국 아무리 몸부림쳐도 인간은 죄의 알박기의 위세로부터 탈출치 못합니다. 하지만 율법이 제시한 조건 안에서 거룩한 율법의 세계 안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나실인(하나님께서 서원해서 바쳐진 인물)의 삶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정과 욕심을 감당하지를 못합니다.

그 예가 사사기 15:15-16에 나옵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자기 아내를 뺏아갔다고 해서 삼손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언약의 진척을 좀 더 살피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3-5)

하나님은 율법으로 인해 모든 인간이 마땅히 죽은 자로 단정짓고 그 죽은 자들을 향하여 설교하십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쪽에서의 일방적인 율법 달성책입니다. 마태복음 13:4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성도는 아낌없이 자신을 포기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육신까지 천국을 위하여 기꺼이 기쁨으로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세례요 연합입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0-13)

즉 성도는 더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오해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육신이 자기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애초부터 자신의 육신은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연합 복음으로 인하여 더는 세상을 부끄럽지 않게 삽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단지 그림자에 불과함을 알게 하옵소서. 진정한 처소는 오직 예수님의 몸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히브리서 2장 1-3절(악마의 알박기)24030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2장 1-3절입니다.

히브리서 2:1-3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 을 받았거든 received a just recompense,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사도가 성경에서 우리를 대하는 태도,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부정적 분위기가 있어요.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우리를 좋게 보지 않죠? 그리고 천사들이 등장하게 되면 일단 사람들은 천사의 등장을 굉장히 반가워합니다. ‘아, 우리를 도와주려고 오셨구나.’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 천사의 개입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범죄 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있는 자리에 천사가 개입을 한다고 여기서 그렇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나쁘게 보죠. ‘걸리기만 해봐라.’ 이런 식입니다. 그다음에 “공변된 보응” 공식화된, 이미 확정 난…, ‘보응(報應)’이니까 공식적으로 확정 난 처벌, 봐주기 없기, 철저함에 철저함을 더해서 확실하게 처단시키는 징벌과 관련되어 있는 것, 천사들이 그 말씀을 가지고 왔다는 거예요.

천사가 말씀을 주는데 줄 때 ‘걸리기만 해봐라. 너는 이제 끝났어.’라는 결과, 확정된 결과를 같이 연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말씀이 왔다고 되어있는데 사도행전 7장에서 이걸 율법이라고 해요. 7장 53절에 보면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이렇게 되어있어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는다. 천사가 율법을 우리에게 준 이유는 이 땅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주하기 위해서 이 땅에 천사가 오는 거예요. 우리를 도와주려고 온 게 아니고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처벌할 만한 이유가 뭐냐? 3절에 보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라고 되어있어요.

여기서 사람들이 연결이 되지 않는 거예요. 구원이라고 하는 건 그냥 건져 주면 되지, 그냥 건져 주면 구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치 아니함과 범죄에 대해서 처벌을 동반하지 않는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손 볼 건 손 보고, 손 볼 것은 손 보고 난 뒤에 내가 너희를 건지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 사람들은 ‘이건 우리 뜻이 아닌데. 우린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3절에 보면 큰 구원…, 천사가 와서 처벌하는 조항인 율법, 그것을 집어넣는 이유에 대해 관심이 없으면 큰 구원에 등한시 여기는 걸로 간주해요.

큰 구원을 등한시 여긴다는 말은 픽, 하고 조롱하고 얼굴 돌리는 거예요. ‘그거 뭐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 율법? 나하고 뭐? 나는 그거 관심도 없어.’라고 얼굴을 돌려버리면 이것은 큰 구원을 등한시 여기는 것이고, 율법의 처벌에서 얼굴을 돌린다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 얼굴을 돌린다는 겁니다.

난 구원은 받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럼 구원을 안 받게 되면 어떤 일이 있는가 하면 3절에 “어찌 피하리요” 그 처벌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느냐? 처벌을 면할 수 없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큰 구원에 대해 사도가 이렇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근거는 뭐냐?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예수님이 없었으면 몰랐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꽂힘으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번져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 드디어 일어나게 된 겁니다.

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요. 하나는 뭐냐? 예수님이 오기 전에 천사들에 의해 미리 주었던 율법이 장난이 아니라는 거예요. 율법의 처벌이 장난이 아니라는 거예요. 율법이 그냥 잔소리하는 것으로 마감되는 게 아닙니다. 율법과 천사와 결합이 된다는 것, 천사들은 무엇에 치중하느냐?

‘율법의 정신, 율법의 실효성이 있을까? 그게 훼손되지 않을까?’ 바짝 신경 쓰는 반면에 천사와 달리 인간들은 뭐냐? 인간들은 자기가 죽을까 봐 바짝 신경쓰는 거예요. 천사의 일하는 목적과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이 서로 대조가 되고, 대치가 되고, 반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제대로 아는 자라면, 전에 율법 없을 때는 나와 더불어 살았는데, 자아가 육신과 더불어 살았는데 율법이 딱 주어지게 되면 율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 같으면 ‘아, 나는 행복하면 안 되는구나. 내가 살아 있으면 안 되는구나.’ 그걸 알아요.

율법의 처벌의 대상이 결국 마귀에게 가는데요, 마귀에 대한 영원한 지옥 형벌인데, 마귀와 인간이 있을 때는 자꾸 모든 삶의 초점이 ‘어떻게 내가 사느냐?’에 초점이 있어요. 그리고 마귀가 인간에게 신에 대해 자꾸 거짓말을 했어요. “하나님은 너를 살려주신다. 살려주신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들은 그게 거짓말인 줄 몰랐죠. 왜냐, 본인도 살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살려주면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인간을 죽여가면서 이용합니다. 그게 율법의 기능 때문에 그래요. 율법을 통해서 율법은 이미 처벌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운명은 율법에 의하면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마귀로 확정돼 있고, 처벌받기로 확정돼 있고, 죽기로 확정돼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죽음이 왕노릇 했다고 표현돼 있어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옴으로서…, 로마서 5장에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방금 로마서 5장 이 말을 함축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나 때문에 벌 받는 게 아니고 율법 때문에 벌 받아요. 율법이, 범죄하면 죽인다는 것을 확정 짓고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났어요. 율법은 우리를 조진다, 죽인다. 율법은 양보도 없고 봐주는 것도 없다. 태어나서 죽이는 과정속에서 율법이 얼마나 센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 살라고 부추겨요. 자꾸 장학금을 줘요, 우리에게.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고, 독려하고, 긍정적 사고방식을 심어놓고 ‘하면 된다’고, 좌절하지 말라고, 희망을 품으라고, 계속 우리를 어쨌든 간에 살리려고 애쓰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악마가 창세기 3장에 선악과 앞에서 했던 그 작업 있잖아요. 그 작업, 악마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같이 추방되고 난 뒤에는 이 세상 자체가 본격적으로 악마가 작업하는 작업의 현장입니다. 작업의 현장이기 때문에 악마는 인간에게 신이 되라고 자꾸 부추기거든요.

제가 신학교 가고 성경을 보면서 늘 마음속에서 찜찜하게 해결되지 않는 대목이 하나 있었어요. 초창기에. 지금은 이해하지만 초창기에는 ‘이게 무슨 뜻이지?’ 그게 뭐냐면 ‘왜 서민들은 귀신 들리는데 마귀의 자식이라는 바리새인은 멀쩡하냐? 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멀쩡하고 정상적이냐?’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이 없었으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율법을 가까이 하면서 율법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파싱(parsing, 구문분석) 하고, 율법에 완벽을 기해서 신에게 더 어프로치, 접근해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그당시 일반 서민들 보기에 얼마나 고상하고 거룩해 보이겠습니까?

막 눈만 뜨면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경외. 그중에 사울도 있어요. 베냐민 지파의 사울,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그 시대의 사람들은, 유대교 사회는요, 그 일반인들이 보기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어요. ‘나도 생계에 대해 걱정 안 하고 남은 시간 저렇게 율법이나 파고 말씀이나 연구하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뭐 돈 번다고 정신없어서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해 안타깝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하여튼 악마와 인간이 협잡 했다면 그 속에는 진리가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일반 서민들은 뭐 장애인도 많고, 귀신들린 자도 많고요.

그런데, ‘누가 봐도 그건 율법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관심이 없으니까 장애인 됐고, 관심이 없으니까 귀신 들린 거 아닌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 증거가 뭐냐? ‘율법을 열심히 탐구했던 저 사람들을 봐라. 건강하고, 잘먹고 잘 살고, 심지어 병도 고치고, 얼마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고상하고 경건스럽고.’

이게 마귀의 자식 같으면 악마의 악마 모습을 더 뚜렷하게 투명하게 들춰내야 하는데 귀신 들린, 마귀 들린 모습을 왜 서민 쪽에서 더 노골적으로 밝혀지는지 그 이유에 대해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죠. 그게 뭐냐? 바로 서민들, 귀신들린 자가 인간의 원판이라는 사실, 원판.

마귀가 그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을 율법으로 꼬깃꼬깃, 인간이 처음부터 죽어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함을, 율법을 총동원해서 꼬깃꼬깃 숨겨 놓은 거예요. 감춰놓은 거예요, 자신의 원판을. 그래서 소경 된 자 절름발이 보고 “참 안 됐다. 신의 저주를 받았구나.” 심지어 문둥병자 보고 “너 저주받아 문둥병 걸렸다.”라고 그들이 자신 있게 그들을 비난하고 얕잡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왜냐? 자기는 문둥병자 아니니까. 건강하니까. 아픈 데도 없어요. 돈도 많아요.

그런데 예수님 오시고 어떻게 했습니까? 세례요한도 혹 갔죠. “예수님은 오신다 했는데 왜 하늘나라는 아직 안 오십니까? 좀 더 기다려야 합니까? 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잘못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물으니까 마태복음 11장 4, 5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은 현재 인간이 귀신 들리고, 또 귀신 들린 것부터 해서 잘난체하는 바리새인까지의 그 폭, 간격 전부는 인간이 아무리, 아무리 노력해도 악마가 벌이는 작업장에서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스펙트럼이었어요. 오히려 밑이 노골적으로 잘 드러난 반면에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소위 성직자들은 그게 잘 드러나지 않고 거룩한 체, 거짓이면서도 위장을 잘 하는 거예요. 마치 어린 양 같이 순결을 표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보고 화 있을진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너희들 끝났어!” 이 말이에요. “독사의 자식들아”(마 3:7) 세례요한도 이야기했어요.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세례를 받아? 너희들이 가만히 있어도 돌들이 들고 일어날 거야.” 돌들이 들고 일어난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렇게 완전히 반대로 뒤엎는 말씀 중 결정적인 말씀 중 하나가 마태복음 13장 44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밭에서 농사짓다가…, 물론 자기 땅이 아니라 남의 땅인데 농사를 짓다가 자기 혼자만 발견한 거예요. 밭 속에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다는 걸. 이게 바로 천국의 가치입니다.

자기만이 아는 보화가 들어있는 밭을 발견한 사람 같으면요,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분노하지 않아요. 남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성내지 않아요. 왜냐면 이 농부는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에, 우연히. 율법을 지켜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해서 발견한 게 아니에요.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발견해서, 너무 좋아서, 기뻐하며 돌아와 아낌없이 자기의 모든 소유와 그 보화를 맞바꾸는데 당근 마켓도 이런 당근 마켓이 없어요. 주저 없이 바꿔버렸습니다. 아낌없이 자기를 소멸하고 그 밭에 있는 보화 때문에 자기와 안녕을 고하죠.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그동안 육신 붙들고 산다고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내가 귀하다고 하는 것은 악마가 나에게 해준 거짓말이었고, 그 거짓말과 더불어서 내 안은 악마가 활동하고 작업하는 작업장으로 대여해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원한과 과거에 쌓인 분노를 오늘까지 끄집어내서 제대로 복수 못 했다고 길길이 뛰면서 설쳐대는 그 모습, 그 모습이 노골적인 것 같으면 귀신들린 자, 화내는 자, 하지만 이걸 이성적으로 성경적 지식으로 꾹꾹 누르면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에요.

자기의 과거와 떨어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얼굴이 기쁘질 않아. 전혀 기쁘지가 않아요. ‘도대체 얼마나, 얼마나 더 공부해야 돼? 얼마나 공부하면 내가 구원을 받아?’ 그러나 천사의 율법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관계를 의도적으로 떼어놓게 했어요. 인간과 떼어놓아야 거기서 악마의 작업 소리가 들리고 악마의 모습이 나올 거 아니겠습니까? 떼어놓기 위해서 율법을 거기에 집어넣었어요. 율법을 계획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이 들어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 율법이 들어왔다는 말은, 바로 에스겔 37장에서 예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어디 골짜기에 가는데 거기 가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 사람들이 살았던 최후의 모습이 뼈다귀에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식당 보고 가장 무서워하는 식당 이름이 ‘장모님 집 뼈다귀 해장국’이래요. 장모 뼈다귀 삶아서 식사로 내준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뼈들만 가득했어요. 뼈들만 가득했다는 말은 “인간이 사람이다. 사람이네? 대단해요!” 했던 그 시절도 전부 다 뼈 앞에서는 과거지사에요. 모든 과거가 응축이 되면 뼈가 됩니다. 간단한 공식이죠. 아주 간단한 공식이에요.

어떤 장례식장에서는 행정착오로 조상 뼛가루가 바뀐 적도 얼마 전에 있었어요. 바뀌어 봐야 그 뼈가 그 뼈, 별 차이도 없는데 ‘우리 아버지다.’하고 받아오면 되지 그걸 또 시비 걸고. 이 뼈나 네 뼈나, 내 뼈나, 남자 뼈 여자 뼈 관계없어요, 전부다.

인간이 그렇게 힘들게 애써서 살았는데, 자식 낳고 키우면서 애써 살았는데 마지막 모습은 뼛가루에요. 뼈에요, 뼈. 예수님은 그리고 인자라 불리는 옆에 있는 에스겔은 뭘 보고 설교하는가? 죽은 자만 보고 설교해요. 죽은 사람보고 설교하는 게 그게 율법의 정신입니다.

“살아라.”가 아닙니다. 너는 왜 죽는지를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천사의 율법이 개입한 이유입니다. 그 율법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하여 진노하는 것이 율법적 근거에 의하면 그건 합당한 조치고, 예상했던 조치고, 요지부동 달라질 게 없는 확정된 결말이에요.

이게 공변된 부응입니다. 누구든지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뼈. 뼈에요, 뼈. 모든 몸과 영혼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다 쏟아붓지 않으면 진노의 대상. 이미 죽은걸 아시고 죽는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천사를 통해서 율법을 집어넣게 한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율법의 작용이 구약에 보면 일련의 순서가 나와 있어요. 제일 먼저 인간과 율법을 결합시킵니다. 창세기 19장 15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찾아와요. 천사는 율법대로 움직이고 율법대로 적용하는 담당자가 천사입니다. 천사가 와서 다른 사람을 찾아가지 않아요. 우연히 롯의 가정에 찾아갑니다.

롯의 가정에 찾아가서 이곳에 하나님의 불 심판 떨어진다고 율법적으로 언급을 했거든요. 확정된 사실을 알려줘도 롯이 뭉그적뭉그적거리고 안 나가는 거예요. 왜? 과거 동안 자기가 살아온 체험이 있고 기억이 있기때문에 그래요. 내 인생이 있기때문에. 그걸 일거에 포기하고 나올 위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15절에 “동틀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하고 강제조치를 해 버립니다. 그다음에 창세기 19장 22절까지의 이야기의 주 주제가, 천사와의 대화가 뭐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과거가 담겨 있는 소돔과 고모라 그 과거와 지금의 나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가 대화 주제에요. 모든 살아왔던 과거는 소돔과 고모라 거기 담겨 있어요. 거기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끊는다는 거요? 제가 아까 이야기 한 이건 천사가 개입해야 하는 일입니다.

농부가 땅을 샀는데 예상도 못 하게 우연히 보화가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자기 모든 소유를 기쁘게 팔아 그 땅에 대해 기뻐하고 안심을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천국이 주는 기쁨이라는 거예요. 천국은 그렇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있는 재산 보태서 천국 오는 게 아니고 있는 재산은 나의 과거의 결과물이잖아요.

‘이거 재산 25억, 이거 뭐 이게 재산이야? 76억 이거 뭐야? 아무것도 아니지.’ 76억 좀 있어 봤으면 좋겠다. “100평짜리 아파트 이게 뭔데 이거? 짜증 난다, 정말! 난 주님한텐 짜증 안 나요.” 이런 거요. 자기 과거와 결별 한다는 것은 뭐 친구하고 헤어지고 그런 게 아닙니다. 나와 헤어지는 거예요.

그동안 악마가 얼마나 나를 들쑤셔 놨는지, ‘너 없으면 너 없다’는 거예요. 악마의 표어는 간단해요. 조폭 표어는 뭡니까? ‘하면 된다.’잖아요. 똑같은 말이에요. 너 없이는 의미 없다는 거예요. 너한테 너 없이는 의미 없다는 거예요. 얼마나 거짓말로 우리를 들쑤셔 놨는지 우리는 나에게 내가 전부에요. 혼신의 에너지를 나 지키는 데 투자한 거예요.

‘쟤는 남의 자식이고 얘는 내 자식’ 이런 것. ‘저건 남의 집이고 이건 내 집’ 이런 것. ‘저건 네 땅 이건 내 땅, 저건 남의 교회 이건 우리 교회’ 이런 거. 이름도 이상해, 우리 교회. 지금 농부는요, 지킬 게 없어 좋아요. 지킬 게 없는 것에 대해서 로마서 1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이 말씀이 굉장히 난해한 말씀인데요.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어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은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부끄러울 게 없도록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과의 차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무슨 짓을 해도 안 부끄러워하는 사람과, 바르게 살아야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사람과의 차이, 이 말입니다. 한 사람은 그냥 사는 사람과, 한 사람은 조심스럽게 사는 사람의 차이. 조심스럽게 사는 사람 지옥에나 가라. 바르게 사는 사람 지옥에나 가세요.

이 바르게 산다는 것이 남들 보기에 내가 혹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존재가 아닌지 늘 신경 쓰다 보니까 기쁨이 없어. 농부의 기쁨이 없어요. 늘 조바심을 가지고 살아가요. 혹시 과거에,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내가 안다, 혹시 지난 여름날 한 게 들통날까 봐.

미 투? 니 투라 캐라. 미투고 니투고 간에 벌벌 떨면서 살아가요, 벌벌 떨면서. 그러니까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 되기 싫고, 소경, 절름발이, 문둥병자 되기 싫고 동창들 만나면 전부 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다 모여 있어요. 인간은 악마의 연기자들입니다.

악마가 신에게 대들고 노렸던 것이 뭐냐? “너만 신이야? 나 홀로 신이다. 나도 좀 신 좀 되자. 왜?”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율법을 줍니다. 그리고 성도를 매일 같이 말씀으로, 율법으로 패십니다.

“내가 너 죽었다고 했지? 죽었다고 했어, 안 했어? 뭘 부끄러워해, 뭘? 여기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럼 네가 복음 알고 다른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복음을 준 취지를 네 속에 있는 마귀가 ‘그 복음 찢어라, 찢어라, 찢어라.’ 매일 같이 찢으라고 이야기했던 그 상황에 놓여있는 거잖아, 네가. 네가 지금 그런 상황이잖아. 내가 천사를 통해 율법 동원해? 율법 드론 한 번 띄워 봐?”

율법은 우리에게 진노케 하는 겁니다. 그것도 확정된 진노, “잘하면 뭐 해 줄게.”가 아니라 확정된 거예요.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함축해서 우리에게 진노하심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말하지 않았어요. 굉장히 난해하고 함축된 내용을 품고 이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로마서 7장에다가 사도바울이 그걸 담아놨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이해되면 이해되고 모르면 할 수 없지.’ 해놓고 로마서 7장에 보면 꽉꽉 눌러 담았어요.

로마서 7장 2절에 보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이 어려운 이야기부터 해서 그다음에 무슨 이야기 하냐면, 결정적인 것은 로마서 7장 12절, 13절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하면서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

이걸 성령 안 받으면 무슨 수로 이해합니까? 이런 겁니다. “난 너를 그냥 곱게 안 죽인다. 너 죽는 거 그건 문제 거리도 아니야. 다만 율법을 살리기 위해 널 죽음으로 몰아넣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네가 그동안 너에게 어른 노릇하고 왕 질을 했던 죄를 살리게 하기 위해 너를 죽이는 방향으로 나가겠다.”라는 뜻이에요.

네 속에 있는 죄를 살리기 위해서 너를 율법을 가지고 죽이는 쪽으로 몰아세우겠다는 겁니다. “네 속에 악마의 알박기 있다?” 이런 거예요. 알박기, 한 평에 돈 1억 줘도 안 나가는 알 박기 있잖아요. 아무리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선교하고, 순교를 해도 나갈 생각이 없는 악마의 알박기, 나는 죽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 알박기, 그게 뭐냐? 태어날 때부터 박혀 있는 악마의 죄, 바로 죄입니다. 이 죄. 하나님 앞에 대들기. ‘하나님 네가 뭔데?’ 이 의식.

이거 하나님의 율법 천사의 도움 없이는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몰라요. 그냥 몸이 아파요. 그냥 죽어가고 있어요. 그냥 귀신 들렸어요. 그냥 성경 공부해요. 그런데 이 짓이 바로 죄가 되는 이유를 몰라요. 분명히 이게 죄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하면 할수록 그 미비점 때문에 이상하게 내가 하는 행동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냐 조금 더 노력해야 돼. 다음에 기도할 땐 꿇어앉아서 해야 돼. 십일조 했지만 십일조만 해서는 안 돼. 십의 이조 해야지. 십의 이조 하고 난 뒤에는 십의 삼조까지 해야지.’ 물론 우리 교회 하고는 전~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재산 반 줬는데 죽어버리고, 도대체 무슨 조화가 이런 조화가 다 있습니까?

그래서 구약 성경을 통해 먼저 인간과 율법을 만나게 해요. 인간과 율법이 만나는 그 대목이 민수기 6장에 오면 슬슬 예언이 시동이 걸려요. 민수기 6장 18절 19절에 보면, 원래 민수기 6장 1절부터가 나실인에 관한, 나실인 서약을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포도와 관련된 것은 다 먹지 말고, 그다음에 몸, 머리카락에 칼 대지 말고, 세 번째는 죽은 자, 친척이라도 죽은 자와 가까이하지 마라, 이 세 가지 조건이 함유된 채 서원해야 될 사람. 그러니까 인간 시계에요. 인간 시계가 째깍째깍 가면, 시간이 가면 머리카락도, 하루에 0.1mm 자란다고 하는데, 째깍째깍, 세 가지 조건도 째깍째깍, 세 가지 조건이 계속 이어진다, 이어진다, 이어진다 하면 거기에 비례해서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자라난다, 자라난다.

그러면 그 나실인의 용도가 뭐냐? 바로 어떻게 율법이 인격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율법이 인격화가 되려면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그 제물에 인간 몸, 신체의 일부가 결합이 되는 겁니다. 민수기 6장 18절 19절에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동안 자랐던 째깍째깍, 그 시계,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찌며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이렇게 쭉 나와 있어요.

이게 뭐냐? 인간 속에 있는 귀신이 인간과 결합이 되면서 인간들은 귀신을, 이 악마를 신으로 이미 섬기고 있어요. 인간들은 종교인들이에요. 자기를 긍정해주는 종교인들 “내가 너 살려줄 게.”라고 늘 격려해주는 그 신을 이미 신으로 확정 지은 상태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서민들에게는 이상징후가 나타난 거예요. 귀신 들렸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그런데 그 악마와 가장 가까운 뱀의 자식이라는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살찌고 멀쩡해요. 공부도 잘하고 아이큐도 높고요. 그런데 아무리 몸부림쳐도 인간의 힘으로서는 귀신의 장악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철학가들, 공부 좀 한 사람들이잖아요. 서민들로부터 해서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까지 국회의원까지 어느 누구 빠져나간 사람이 없어요.

사망이 왕 노릇, 죄의 왕 노릇, 왕이라는 말은 모든 권한을 장악했다는 뜻이에요. 권력에 누수가 없는 게 왕의 통치구조에요. 이미 악마가 왕인데 뭘 구원을 받아요? 악마가 왕 아니에요? 왕인데! 이 세상의 왕인데 못 빠져나가요. 구원은 없습니다.

해결책이 뭐냐?

■하나님께 율법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거예요. 신약에 와서 이걸 세례라 합니다, 세례. 연합, 연합이에요. 그 연합을 민수기에서 나실인으로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사사기에 보면 그 연합에 대해서 이게 인간 편에서 잡아당기는 연합인지 아니면 주님 쪽으로 끌려가는 방향의 연합인지를 삼손이 보여줍니다.

사사기 14장에서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좋아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블레셋 여인의 집에서 삼손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여인을 강제로 다른 사람하고 결혼을 시켰어요. 그러니까 삼손이 독이 올랐어요. 사사기 15장에서 삼손이 염소 새끼 가지고 아내를 찾으러 가니까 너는 내 사위 아니라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어요.

그리고는 하는 말이 “아직 시집 안 간 여동생이 더 예쁘니까 네 아내의 동생하고 결혼하지?” 한 겁니다. 15장 2절에 “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이건 모독이거든요. 삼손의 자기 결정, 자기결정권에 대한 모독.

그래서 삼손이 여우 3백 마리 잡아서 동네를 불 질러 버립니다. 4, 5절에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그래서 그 장인과 아내는 어떻게 했는가? 불살라서 죽여버렸어요. 최소 무기징역입니다. 사형감이에요. 자기 원하는 여자 안 준다고 보복살인을 한 겁니다. 폭력적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블레셋 사람들이 가만있습니까? 삼손의 행동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그 블레셋 사람들이 유대사람들에게 찾아갔어요.

“삼손이 이토록 블레셋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렸는데 너희들이 가만히 있으면 돼? 체포해” 하니까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삼손을 체포하기로 하고 대듭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더 독이 올라서 어떻게 했는가?

14, 15절에 “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

그리고 하는 말이 16, 17절에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더미, 두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명을 죽였도다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라맛 레히’는 ‘턱뼈의 산’이라는 뜻이었어요. 18절에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성질 실컷 내고서 큰 구원을 베풀었다고는 했는데 목이 마르거든요. 그래서 19절에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해서 물 마시고 자기 집에 갔다는 이야기에요.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이 결합은 했는데 결합한 당사자인 인간이 율법쪽으로 끌려가는 게 아니고 자신의 야심, 또는 욕구, 이 만족을 위해서 신의 결합을, 하나님의 율법을 그런 식으로 활용했던 자가 삼손이었습니다. 나실인이고 바친 자? 개코나 무슨 바친 자? 뭘 바쳤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바쳤지요. 자기 성질내는데, 복수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힘을 사용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삼손, 그 막돼먹은 삼손, 막 돼먹은 삼손을 기다렸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마중 나오는, 율법이 완성화 되어서 마중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는 막돼먹은 죄인마저도 연합이 가능하도록 조치한 세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은 삼손의 두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도 짧아졌을 때 찬스, 이때다, 해서 삼손을 통해서 쑥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에 집어넣었어요.

뭘 통해서? 죽음을 통해서. “내가 율법으로 너 죽인다 했지? 율법에 의해서 너는 이미 뼈다귀라 했지? 이미 살아도 산 게 아니라고 했지?” 그 율법의 공변된 보응을 율법과 동시에 같이 나타나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그것이 구약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신약시대에요.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9-13절인데 아, 이 말씀도…, 성경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말씀이 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말씀도 만만치 않아요. 다 어렵지만. 여기에 보면 주께서 준비한 몸이 있어요. 육신이 있습니다. 그동안 육신은 내 것이라고 여겼거든요. 육신을 주님의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을 안 합니다.

성경공부를 했으니까 지식으로는 알지만 그것은 지식이고요, 그것은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거라서 소용이 없어요. 뭔가 내가 불행하게 되지 않으려고 성경 지식 확보하는 수준밖에 안 돼요. 안 죽으려고, 안 죽으려고 성경공부 하는 것밖에 안 된다고요.

그래서 주님께서 준비한 것은 뭐냐? 네 육신에서 옮겨타기를 하기 위해서 기존의 육신을 아주 내팽개치고 주의 육신으로 옮겨가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평소에 애써서 살아가는 이유는 뭐냐? 자기 육신의 노동으로 애쓴 그 결과물이 바로 인간의 기억을 꽉 차지하고 있어요. 나, 자아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어요.

내가 어릴 때 이런 수모를 당했고, 내가 어릴 때 이런 어려움이 있었고, 내가 이렇게 애를 썼고…,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는가? 이게 육신이 내 것이라는 의식에서부터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은 그 육신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새로운 육신으로 옮겨타기 위해서 그 새로운 육신에 대해서 골로새서 2장 9-12절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건 뭐냐 하면, “네 육신에 대해서 그만 죽도록 좀 놔두면 안 돼?” 이런 뜻이에요. “그동안 네 육신 때문에 골병들었잖아. 네 몸이 네 몸이라고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 하면서.” 이게 주의 몸이거든요. 우리는 주님에 활용당하는 소재에요. 내 것이 아니에요. 주의 것인데 내 것이라고 자꾸 우기니까 자아가 이 육신과 결별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귀의 밥이지요. 고마운 율법이 우리를 죽이는 가운데서 내 안에 내가 그동안 처리 못 했던, 내가 손댈 수 없는 죄가 알박기로 박혀 있다는 사실을 율법이 와서 들춰주는 겁니다. 한 꺼풀, 두 꺼풀 벗기면서. 그래서 성도의 복은 뭐냐?

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게 복이에요.
■그런데 더 큰 복이 뭐냐? 그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끄러움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그냥 아담이 옷 안 입고 있으면 돼요. 그런데 눈이 밝아졌어요. 이것은 율법의 공변된 보응입니다. 눈이 밝아지면 안 돼요. 내가 나를 내 것이라고 발견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반칙이에요, 반칙.

내 것은 있는 그 자체가 주의 것인데 내가 눈에 보이니까 이게 내 것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모든 사달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내 것 있으니 네 것 있는 거예요. 이웃사랑 다 물 건너갔어요. 네것 내것 구분하는 데 무슨 이웃사랑이 있어요? 못 고칩니다. 소경 된 자, 문둥병자는 고쳐도 바리새인은 못 고쳐요.

물론 바리새인 가운데 고침 받은 사람이 있어요. 사도바울같이. 그만큼 독하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독한 것을 인간은 부러워하고 있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율법의 완성단계로서 우리에게 들이미는 이유가 안 된다는 겁니다. 네 몸이 네 몸이라 여기고 내 몸을 내가 천국에 올려보내는 어떤 생각도 이것은 다 실패라는 거예요. 그냥 죽으라는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냥 죽으면 돼. 그냥 턱뼈로 개 패듯이, 율법의 턱뼈로 그냥 계속 맞으면 돼요.

■성경이 안 읽힐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안 고마울 수가 없어요. 패주는데 팰 때마다 부끄러움이 없어져요. 남들이 날 어떻게 보느냐 걱정이 늘어나는데 “아직 정신 안 차렸지?” 하고 말씀으로 패주니까 농부가 사놓은 보화가 숨겨진 그 밭, 천국이 내 형편보다 더 좋은 걸 어떡해?

그런데 골로새서 2장 14, 15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그동안의 모든 알박기가 없어졌습니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17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 말은 현재 거울에 비치는 우리는 이게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림자 못 살려서 안달 내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그림자인 나와 그림자인 남과 비교한다고 쓸데없이 평생을 다 허비해 왔던 겁니다.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폭이 없는 그림자에 불과한데,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불과한데 물에 비친 달처럼, 실제로는 그저 물, H2O인데 그 물에 비친 이미지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미지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무슨 자랑질을 하겠다고 평생동안 우리는 악마에게 농락당하고 속아왔잖아요. 영주에 가면 ‘내매교회’라는 100년 된 교회가 있어요. 아주 오래된 교회지요, 일제때의 교회인데 그 때 몇 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세운 겁니다. 그때 영주 내매 교회의 향약, 작은 고을에서 통하는 약속같은 것을 6개로 만들었어요.

【첫째, 우상숭배와 선조 제사를 엄금하고 구습타파와 미신을 일소한다.
둘째, 동민 전체가 주초, 장기, 바둑, 도박, 주막 출입을 불허한다.
셋째, 일제의 앞잡이인 경찰관 지원을 엄금한다.
넷째, 신·불신을 막론하고 빈약한 관혼상에는 자비량으로 협조한다.】

돈도 돈이지만 몸으로 부역을 해줘서 관혼상을 잘 치르게 도와준다는 겁니다.

【다섯째, 소 이외의 가축 사육을 금지하며 깨끗한 신앙촌을 만든다.
여섯째, 주일은 성수 주일하며 우물문을 잠그고 전날에 준비한다.】

토요일에 우물에 줄 서고 바쁘게 생겼어요. 하나의 예지만 이게 바로 초창기 교회에서 만들었던 율법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영주의 내매교회의 당회장이 마귀라 하는 것을 상상이나 해겠습니까? 이걸 교인들이 납득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해가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율법을 지키면, 지키면…. 지키면 뭐? 지키면 내가 주인인 내 육신을 천국까지 올려보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보세요. 악마가 얼마나 무서운 작전을 벌입니까? 요한복음 14장의 처소는 뭐냐? 예수님 자신의 육신, 육신이 처소가 돼요.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베드로는 육신이 따로 있기 때문에 합류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이 이 땅에 성령으로 오셨고 베드로의 육신은 죽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게 성령이라는 처소에요. 성령 안에서는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 십자가로 승리했다. 그리고 너의 옛날 육신은 하나의 그림자고 진짜 육신은 예수님 육신 하나로 충분하고 넉넉하다. 왜? 그 예수님의 육신은 복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로마서 1장 16절에 세상 어딜 가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여러분, 이제 남은 인생을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웃으면서 ‘땅 사놨다!’ 보화의 우연한 만남, 성령의 찾아오심을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것보다도 이제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남은 세월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율법으로 보기에 이미 죽은 자인데 뼈가 될 수밖에 없고 뼈로 갈 수밖에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뭐 남들 앞에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악마의 속임수에 빠져서 자립해서 잘난체하고자 하는 그 의도, 우리의 과거의 그 악마의 심성, 이제는 율법의 개입과 복음의 개입으로 절단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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