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처소
2025년 2월 2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0-14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나타날 것은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 나타나야 할 분은 사라질 것들을 재료로 삼아 나타나십니다. 흙으로 돌아가야 할 비참한 몰골들을 수집해서 그것 속에서 예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메시야의 덕을 보자는 식으로 종교를 가집니다.
자기도 잃지 않은 것을 전제로 해서 신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나옵니다. 과연 인간은 생명을 얻을 자격이 되는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멸망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거역하고 대드는 수상한 존재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 세상은 이 ‘원수’의 천지입니다.
이미 인간들은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기에 따라서 인간이 내놓은 그 어떤 구원의 아이디어도 악마로부터 나옵니다. 악마는 말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을 붙들면 너도 영원한 존재가 된다”고 말입니다.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구원될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될 자는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온 인류를 대표하는 가설무대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작업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데 보이십니다. 에스겔 13: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여기에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라는 말씀도 나오지만 특히 그 뒤의 말씀에 유념합시다.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린다’는 대목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의 지배를 받으니 거짓말만 듣기를 원합니다. 거짓말이란 곧 하나님이 벌리시는 바꿔치기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장담합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테니 그저 말씀을 주시면 잘 지키고 바르게 살겠습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꾸로 된 존재인 지를 모릅니다. 우리 인간은 마땅히 죽을 인간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자진해서 멸망할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인간들이 해내지 못하는 ‘살 영혼 영혼 살리기’를 어떤 식으로 성사시켜 왔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 대원칙은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도저히 짐작 못할 것을 준비하시고 인간으로서 하여금 절대적 절망을 거치게 해서 그 준비해 두심을 보게 하십니다.
인간을 자기 자리로 삼은 귀신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립의지를 높여줍니다. 자기에 대한 집요함을 지속시킵니다. 뭐든지 자기 승리를 도출하려 합니다. 따라서 악마는 예수님의 복음까지 붙잡도록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나 구원받았다’를 갖게 합니다. 하지만 귀신이나 인간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란 메시야에 자체적으로 끊어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 동앗줄이라고 여기에 강력하게 붙잡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이 의지 마저 자신이 멸망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특수한 이방민족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겐족속, 즉 레갑족속입니다. “야베스에 거한 서기관 족속 곧 디랏 족속과 시므앗 족속과 수갓 족속이니 이는 다 레갑의 집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족속이더라”(대상 2:55) 이 이방만족이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접촉한 것은 모세의 장인으로서 등장한 이드로입니다.(민 10:29)
이 레갑 족속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유다지파에 편입되는데 이스라엘이 온통 바알 종교로 뒤범벅이 된 후에는 이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는 레갑 족속은 요지부동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안정성있는 질서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5장은 바로 여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주류가 아닌 보조적 입장에 있는 겐족속이 망해가는 이스라엘 속에서 언약을 지켜내고 있었던 겁니다.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렘 35:2,6-7)
선지자 예레미야가 왜 레갑족속을 떠보는 발언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시켰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말로는 순종한다하면서 전혀 순종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기에 그 대비가 되는 레갑족속을 보라는 겁니다. 즉 레갑 족속은 이스라엘에 있어 내부적인 ‘여호와 이레’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 선조가 그들에게 명한 그 명령을 준행하나 이 백성은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렘 35:16) 레갑 족속에 속한 여호나답은 혁명가 예후와 더불어 엘리사 선지자 시절에 남북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자들의 씨를 말렸습니다.(왕하 10:15) 그렇다면 진정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인간들은 악마에게 까닭없이 팔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곧 내니라”(사 52:5-6)
따라서 인간의 구원도 까닭없이 구원됩니다. 이점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나다나엘의 찾아오심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다나엘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5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참 이스라엘의 주가 되시기에 위해 죄인들의 모집에 나서신 것이고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말씀에 삼킴을 당한 겁니다. 이로서 성도는 더는 자신의 의를 챙기지 않고 더는 자신의 인생 승리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그 어떤 경우도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그 주님의 영존하심의 세계에 별처럼 박히게 된 겁니다. 그곳이 하나님 우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할 수 있는 식으로 하지 않게 해주시고 자신의 모든 행함은 철저히 절망해야 하는 요소가 담겨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히브리서 1장 10-14절(귀신의 처소)24022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장 10-14절입니다.
히브리서 1:10-14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여기 나오는 단어, 말이나 문장을 듣고 “아멘.” 나오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 이유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단박에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골라서 나오고 있습니다. 10절, 11절 같은 경우에 여기 ‘멸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낡아진다는 단어가 나오죠. 그리고 13절에 보면 ‘내 원수’가 나오고 ‘발등상’ 나오고 ‘우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4절에 ‘천사’가 나옵니다. ‘부리는 영’이라는 단어 나옵니다. ‘구원을 얻을 후사’ 나옵니다.
자, 제가 방금 언급한 이런 단어들을 다시 뽑아서 여러분들이 한 번 조립해 보세요. 방금 언급한 단어만 뽑아서 여러분들이 문장을 한 번 만들어 보세요. 어떤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 이거에요. 세상 사람들에게 여기 나오는 중요 단어들 ‘멸망’, ‘낡아지는 것’, ‘하나님의 원수’, ‘발등상’, ‘하나님의 우편’, 그리고 ‘부리는 영’ 이런 단어를 제시하면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네 자로 답변할 겁니다. “관심 없음.” 그게 정답이에요. 관심 없음.
왜 그러냐면 여기 나오는 단어는 기존 세상 사람들이 평소에 쓰는 단어와 대립적인 위치에 놓기 위해 이 단어를 썼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멸망이라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단어에요. 용납이 안 돼요. 너희 집은 나중에 쇠퇴할 것이다, 이것은 분노가 일어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마귀? 이건 더군다나 완전히 왕짜증이 나는 개념이 되겠죠.
수능 시험 칠 때 문제에 하나님 원수에 대해 논하라, 이런 문제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교회 나와 히브리서 1장 10절에서 14절 다 듣고 집에 돌아갔다고 칩시다. 다 듣고 집에 돌아갔는데 나오는 결말은 간단해요. 관심 없음. 나와 관계없음. 그렇게 나올 게 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걸 아시고 11절의 말씀, “그러니까 멸망할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이 멸망할 거야.”라는 그 말씀대로 하나님이 하나님대로 일을 이렇게 하실 거예요. 멸망시키는데 그냥 멸망시키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에까지 이 말씀을 제시하고 그걸 거두어들이면서 “그러니까 멸망 받을 만하잖아. 이젠 군소리하지 마. 멸망할 테니까 딴소리하지 마. 너희들 하는 거 모두 쇠퇴하게 만들 테니까 딴소리하지 마. 내가 미리 이 계시를 줬잖아. 줬는데 관심없음으로 끝났으니까. 그게 너희들 본색이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게 멸망하느냐? 그 점에 대해서 여기 히브리서11절에 보면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라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영존하심, 주님이 계속 살아계셔서 영광 받으시고 주님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는데 “제발 너희들 좀 멸망해 줘야 되겠다.”라는 것이 조건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멸망하는 조건으로 주님은 영존해요. 이 해석을, 이 설명을 듣고 난 뒤에 더욱이 히브리서 1장 10절 11절 13절 이 말씀을 듣기 싫을 요소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뭐냐? 한마디로 말해 바꿔치기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와 더불어 있는 이 세상을 그대로 두지 않고 주님이 통치하는 세계로 반드시 바꿔치기할 거다, 라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 계시는 겁니다.
바꿔 치는데 그 바꿔치기 하는 방법이 뭐냐? 어떤 식으로 바꿔치기할 거냐? 그건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샘플로 다 보여 줬습니다. 우선 바꿔 치는 한 방법은 이겁니다. ‘아담+언약=주님.’ 그런 공식이 있어요. 아담 더하기 언약은 주님이 되십니다. 아담에 속한 죄인을 갈아 넣어 그게 뭉쳐지면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설탕을 녹이면 달고나 되죠? 물성적 변화죠. 금붙이를 녹이면 금괴가 됩니다. 그것은 물성적 변화에요. 외형적 변화라 할 수 있어요. 본 성질은 똑같고 물리적인 것만 변하죠. 화학적 변화가 아니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통해서 바꿔치기할 때 그 바꿔치기 원리 원칙을 이스라엘 안에서 꾸준히 해 오고 있었던 겁니다.
무엇을 집어넣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으니까 물성적 변화가 아니라 ‘죄인을 모았는데 그게 주님이 되시더라’는 완전히 희한한 현상들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언약을 접하면서 일어난 거예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의 많은 변화 중에서 에스겔 13장 1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가 두어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가르치는 자도 거짓말하고 백성들도 거짓말만 듣기를 원했던 거예요.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이 율법이라는 언약을 주셨지만 이 율법이 교체하는 용도라는 생각을 못 하고 기존에 있는 나를 더욱더 멀쩡하게 강화시키고 멀쩡하게 만들어서 대단하고 위대한 존재로 만드는 율법인 걸로 생각했던 겁니다.
바꿔치기하는 걸 몰랐어요. 너희는 필히 멸망해야 되고, 그 멸망하는 것이 뭉쳐져야 주님의 영존이 나온다는 히브리서 1장에 이미 최종적으로 나 있는 결론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리 알지 못했던 거예요. 멸망이 없이는 천국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멸망 안 당하고 천국 가려고 시도 한 거예요.
히브리서 1장 11절은 그런 원리가 아닌데. 반드시 멸망해야 되요. 그래야 바꿔치기가 되는 거예요. 옛날 아담은 새로운 아담과 바꿔치기 되는 겁니다. 그 바꿔치기 되는 원리가 에스겔 3장 19절을 마저 읽으면,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다음에 나오는 말씀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 도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특히 교회죠, 교회가 이걸 보면서 뭐만 남기고 뭐는 없애 버리냐면, 죽을 영혼을 살린다는 말만 남겨요. 죽을 영혼을 살리고 살지 못한 영혼을 죽인다는 이 대목을 빠뜨렸어요. 반칙이죠. 이거, 거짓말입니다.
바꿔치기가 되려면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을 지옥 보내고, 지옥 가야 된다는 사람을 천국 보내는 이 바꿔치기가 돼야 해요. 그런데 교회엔 전부 다 천국 가고 싶어 환장해서 온 사람들이거든요. 이걸 바꿔치기해야 돼요. 바꿔치기하지 않으면 다 거짓말 되는 겁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 이야기를 해서 ‘천국 가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소망이 아니고 나의 소망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야 해요. ‘내 욕망이구나.’ 멈출 수 없는 구원의 욕구, 자신의 구원의 욕구를 마치 하나님도 거기에 이미 동의한 것인 양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니까 목사들은 그런 교인들을 위해 거짓말만 내뱉을 수밖에 없어요. 본인도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왜 진짜 천국 갈 인간을 너희들은 지옥 간다고 그렇게 욕들을 했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인 내가 사람이 될 때는 너희가 보기에 지옥 천 번 만 번 갈 만한 지옥 갈 사람으로 올게.’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옥 갈 사람으로, 귀신 들린 사람으로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변신의 취지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 보고 귀신 들렸다, 저주받을 자다, 욕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뭐 여러 번 나왔어요. 마땅히 죽을 자다, 그럴 때 주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그래, 너희들의 본색이 서서히 드러나는구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방금 에스겔 3장 19절의 말씀, 율법을 줬고 하나님이 말씀을 줬는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그걸 마귀가 어떻게 바꿔치기 했는지에요. 천국 갈 사람을 지옥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을 천국 보내는 그 짓을 이스라엘 내부에 소위 율법을 아는 자들이 어떻게 바꿔치기했는가, 그 한 가지.
두 번째, 바꿔치기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그냥 주시만 하거나 방치하지 않고 어떻게 바꿔치기한 것을 다시 바꿔치기했느냐, 어떤 방법으로 그게 됐느냐는 겁니다. 상당히 난해한 문제죠. 난해한 문제기 때문에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에 와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메시아를 믿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사고방식은 이스라엘에서 내내 꾸준히 유지해 왔던 그들의 사상이에요. 유대교의 사상입니다. ‘메시아 만나면 메시아가 우리의 구세주다.’ 그들의 메시아, 바꿔치기 한,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나왔던 그들에게 빠진 것이 있어요.
예수님을 붙들게 되면 예수님 자체 안에 예수님이 예수님과 뚝 떨어지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빼 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마지막 동아줄로 잡았는데 그 동아줄이 어떤 동아줄이냐 하면, 잡으면 떨어지게 되어있는, 끊어지게 되어있는 동아줄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지옥 가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오셨다, 이 말입니다.
교회가 이걸 몰라요. 인간은 자기의 욕구와 욕망을 정당화하거든요. 나는 아무 문제 없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이건 당연한 거 아니야?” 이러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아담의 후손이고, 그런 아담 후손들이 집결한 것이 인류에요. 그 인류를 압축해서 샘플로 보여준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그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온 인류의 가설무대에요. 거기서 벌어지는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하나님 뜻과 얼마나 정반대되는 쪽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예수를 붙잡았는데 붙잡은 동시에 “잘 먹고 잘살아라.” 하고 뚝 떨어져 나가요.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예수 피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예수 피를 믿는다고 했는데 믿었기 때문에 더욱더 지옥 가는 사람으로 들통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전략이고 작전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 난해한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동화 이야기 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스라엘 역사로 들어가면 너무 복잡해요.
동화 이야기를 먼저 하게 되면, 독일의 어느 시골 마을인데 너무 가난해요. 먹을 게 없어요. 거기에 애가 둘이 있었는데 아빠가 새엄마와 결혼을 했어요. 아이 이름은 헨젤과 그레텔이에요. 너무 먹을 게 없으니까 새엄마가 의견을 제시합니다. “애 둘 때문에 먹을 게 없으니까 숲속에 버리고 옵시다.”
그 이야기를 하필 오빠 헨젤이 들었네요? 듣고 아빠 마음 상하지 않게 고분고분 둘이 숲속으로 갑니다. 헨젤이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집 떠나며 하나씩 떨어뜨렸어요. 숲속에서 아빠 엄마는 아이들을 방치하고 집으로 후딱 돌아왔어요.
그러니까 누이동생 그레텔이 “오빠 어떡해?” “걱정하지 마. 내가 던져놓은 돌이 있으니 따라가면 돼.” 돌을 따라갔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애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니까 새엄마가 너무 놀란 거예요. ‘그래? 다음 기회에 보자. 다음에는 더 깊은 숲속으로 데려가야지.’라고 계획을 짰어요.
집에 먹을 건 또 없어요. 새엄마가 불평합니다. “입이라도 줄여서 우리끼리라도 삽시다.” 더 깊은 숲으로 갔어요. 그때는 오빠가 빵 조각을 가지고 갔습니다. 더 깊은 숲 속에 아이들을 두고 와버린 후에 해가 졌어요. 누이동생이 또 걱정하면서 “오빠 어떡해? 집에 가고 싶어.” 안정된 처소를 그리워할 때 “걱정하지 마. 내가 데려다줄 게.” 가보니까 떨어뜨린 빵 조각을 새들이 다 먹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두 단계가 있어요. 첫 번째 단계가 뭐냐? 내가 주머니에 돌을 넣었기 때문에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 원래 생각했던 영원한 처소를 내 행함으로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단계가 1단계에요. 주머니에 돌멩이 넣어두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자기가 한 행위를 거슬러 올라가 찾으면 거기 자신의 안정된 처소, 자기 집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 내가 머리 짜내어서 ‘이렇게 하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 못 한 상태, 새들이 빵 조각을 다 먹어버렸다는 이 자체. 절망적이에요. 낙망, 끊어져 버린 거예요. 이게 두 번째 단계에요. 예수님은 이 두 번째 단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종교, 기독교는 뭐냐? 첫 번째 단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살아 있는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고 해석하시면 당신들이 그리워하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건 주머니에 돌멩이 넣고 돌 따라가는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두 번째는 정말 오빠도 누이동생도 절망적입니다. 해는 져서 어둡고 그냥 숲속을 헤매는 데 저기 불빛이 보여요. 가까이 가보니 과자로 만든 집이에요. 과자로 만든 집이라서 배고프니 실컷 먹었습니다. 여기서 친절한 할멈이 등장해서 “얘들아 너희가 배가 고팠구나. 그거 말고 더 맛있는 수프를 끓여줄게.” 하고 수프까지 끓여주네요?
얼마나 친절하고 고마운지. 그 할멈, 마귀할멈이었습니다. 마귀할멈의 취미는 애를 잡아먹는, 삐쩍 마른 애 말고 그것도 통통한 애를 잡아먹는 그 할머니가 통통한 애를 보고 반가웠고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기 위해서 살을 찌운 겁니다. “더 먹어라, 더 먹어라.”
실컷 먹여놓고 오빠가 잠들었을 때 마귀할멈은 오빠를 새 우리 같은 곳에 가둬놓고 동생은 일을 시키기 위해 풀어놨어요. “물 긷고 저 화로에 불을 지펴라.” 이제부터는 서서히 갑질합니다. 시킵니다. 오빠부터 삶아 먹고 동생 삶아 먹기 위해 그렇게 시켰을 때 동생이 온 힘을 다해 할멈이 화로 근처에 갔을 때 확 밀어버려서 죽이지요.
그 후에 집을 살펴보니 엄청난 보석이 있어서 그걸 들고 집으로 어찌어찌 찾아가니 그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새엄마는 병들어 죽었고 아버지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첫 번째 단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역량 안에서 구원 방법이에요. 1 단계죠.
두 번째 단계는, 와장창 망해버린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소용없게 되었어요. 이것은 멸망입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십자가 보고 수작 부리고 요령 부리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나의 마음에 너도 같이 망해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참여되지 않은 자에게는 두 번째 단계에 들어올 수가 없는 거예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어디에 볼모 잡혀 있는지를 몰라요. 마귀할멈 속에 있다는 걸 모릅니다. 마귀할멈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13절에 ‘하나님의 원수가’ 마귀는 우리 편 아니에요. 요한복음 10장에서 악한 목자는 양을 잡아먹는 게 그게 즐거움이고 취미에요.
우리가 왜 자꾸 돈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느냐? 그거 마귀가 통통하게 살찌우는 거예요. 비리비리한 세리와 창기는 보기도 싫어. 똑똑하고, 잘났고, 의롭고, 경건하고, 착하고, 훌륭하고…, 그거 통통하고 잡아먹기 좋아요. 살쪘어요.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몰라요. 세상은 마귀의 존재가 보이질 않습니다.
내 속에 마귀 있다는 걸 언제 볼 수가 있느냐? 요양병원 가서 치매 걸리면 알 수 있어요. ‘아이고 우리 엄마가 저런 엄마가 아닌데. 우리 아빠가 저런 아빠가 아닌데.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지?’ 원래 다 있어요. 원래 태어날 때부터 다 그런 괴물이 있어요.
말씀을 주니까 마귀가 이스라엘 백성들 보고 “지켜! 경건하게 살아야지! 이게 말씀이야.” 계속해서 부추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율법대로 지킴으로서 다른 민족보다 의로운, 구원받는 택한 민족이라고 자부했던 겁니다. 그게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어떤 율법사가 예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헨젤과 그레텔이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똑같은 이야기에요. 이미 하나님의 영생은 끊어졌어요. 이 끊어진 게 내가 싫은 거예요. 선악과 정복했으니까 생명 나무까지 정복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 마귀가 부추기고 하니까.
누가복음 10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니까 27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러니까 2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문제는 이겁니다. 옳을 줄 아는데, 지식으로는 아는데 주머니에 돌멩이는 있어서 이 돌멩이 따라가면 되는 줄 아는데 문제는 이웃이 누구인지 그 점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웃이 누구인가를 모르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준비한 이야기는 이겁니다.
율법은 지식이 아니고 사건 속에 휘말리는 거예요. 그 사건이 뭐냐?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사건, 강도 만난 사건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거예요. 강도 만난 사람은 1단계가 아니고 2단계입니다. 절망적이에요. 새엄마 잘못 만났어요. 강도 만난 거예요. 배고파서 허덕이다가 마귀할멈 만난 거예요. 잘못 만난 거예요. 세상은 나를 잡아먹기 위한 세상이에요. 나를 위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악마의 먹잇감이고 노리갯감이고 사냥감이에요.
이사야 52장 5절에 보면 너희들은 악마의 사냥감이라는 거예요.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까닭 없이 팔렸어요. 원인도 이유도 없이. 그냥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우리는 사냥감입니다. <아포칼립토(Apocalypto, 2007>라는 영화는 인신 공양하는 마야 시대 이야기입니다.
마야 신에게 바치기 위해 제물이 필요합니다. 포로들에게 몸에 파란 칠을 해놓고 풀어주는 척합니다. 풀어주는 척하며 “저 옥수수밭을 넘어가면 살려줄게.”하고 가기 전에 화살 쏴서 다 죽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영화가 안 되니까 영웅적인 한 사람은 살아남았지만.
타인은 나 잘 되기 위해서만 존재할 때 의미가 있는 걸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안에 있게 되어있습니다. 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속에 마귀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거와 정반대되는 성질이 우리 안에 마귀라는 이름, 귀신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바꿔치기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그 묘를 파내는 거예요. “파묘(破墓)요~!” 묘를 파내는 거예요. 파내면 이중으로 매장돼 있어서 난리도 아니에요. 귀신이 막 나가서. 우리를 파헤치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파헤치는 거예요. 네 안에 귀신이 있다는 거예요.
<파묘>라는 영화에 보면 무당이 그 귀신을 쫓아낼 때 돼지 다섯 마리 걸어놓고 합니다. 김고은이 무당춤을 추는데 기차게 춰요. 음향도 멋지고. 노인들 6천 원 하니까 보세요. 왜 돼지를 그렇게 해놓느냐? 무덤 속에 있는 불길한 귀신이 그 돼지 속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세상에 이 작가가 마태복음 8장 29절을 어떻게 알았는지.
마태복음 8장 28절에서 34절에 보면 인간 속에 있는 귀신의 목적은 사람 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존재, 정체를 감추는 겁니다. 귀신은 자기 정체를 감추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껍데기, 육신 속에 들어가서. 인간의 몸은 인간 자기 고유의 것이 아니고 귀신의 거처에요.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인간은 로봇이에요, 로봇. 하나님의 로봇 되기 전에 이미 죄의 로봇이에요. 죄의 종이에요. 자율성, 그거 마귀가 다 만들어 낸 겁니다.
마귀가 이렇게 하니까 마귀는 자기 정체를 감추면서도 뭐라고 인간에게 제안을 하냐면 “너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면 천국 보내줄게. 성경 말씀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지? 그대로 해.”라고 자꾸 마귀가 속삭이고 있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 나가 포동포동 살찌우고 일요일 한 번 교회 나와 말씀이라는 지식 얻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참이에요, 지금 마귀가.
마귀라는 존재는 ‘저 미친 사람 저 사람 이야기지 내 이야기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뭘 하느냐? 말씀대로 지키는 수작과 요령들을 배우는 거예요. 수작과 요령, 간단히 말해서 이단입니다. 그냥 이단이에요, 이단.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두 사람이 귀신들려 있었을 때 귀신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이건 무슨 뜻이냐면 “우리로 하여금 사람과 더불어 살게 내버려 두지 여기까지 찾아와서 아직 심판 때도 아닌데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우리가 나갈 곳이 없습니다.” 육체가 없으니까, 귀신은 천사에 속하니까요. “나갈 데가 없으니 육체가 필요합니다.” 30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먼저 요청했어요.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
무당이 돼지 다섯 마리 걸어놓고 귀신보고 거기 들어가라고 하는 이야기와 마태복음 8장 31절의 말씀, 우리를 돼지 속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그러니 주께서는 “들어가라.” 했어요. 그러니까 그 돼지들이 냅다 달려서 뭍에 사는 돼지가 자기 살 곳도 아닌데 바닷속으로 자진해서 전부 자살해요. 그 돼지가 인간이잖아요, 그 돼지가. 김 돼지, 최 돼지, 박 돼지, 이 돼지, 전부 다 돼지라니까요. 귀신 들린 돼지. 죽기 살기로 투구하는 소처럼 그냥 지옥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을 보면 성도는 별이에요. 하늘의 성좌입니다. 별처럼 빛날 거예요, 하늘의 별 만큼. 오를 수 없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갑니다. 인간 더하기 언약은 주님이 돼요.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이 나옵니다. 1장 47절,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걸어요.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자, 하나님이 생각했던 진짜 언약의 사람 이스라엘은 예수님으로 인해 삼킴을 당해야 해요. 삼킴을 당하면, 내 쪽에서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헨젤과 그레텔의 1단계밖에 안 된다는 것, 그리고 1단계가 그동안 마귀가 나에게 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 와서 이것저것하고, 성경 공부하고, 시킨 대로 하고, 참석해서 봉사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 아까 그게 수작이라고 했죠? 요령이죠. 이단입니다. 성경 보면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성경 말씀 어떻게 지키냐? 성령 받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 어떻게 지킨다, 거기다 더하면 상급 받고 덜하면 상급 없이 천당 간다, 그런 거 줄줄줄 잘 외우죠. 교회 2년만 다녀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이단입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이 그렇게 좋은 거예요. 왜? 내 안에 귀신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요청한 게 있어요. ‘하나님, 제발 천국 가는 정보는 알려주시되 저는 바꾸지는 말아주소서.’ 이게 사람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귀신 입에서 나오는 거예요. 내 입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저를 바꾸지는 말아주소서. 내가 착실히 내 힘으로 할 테니 나로 하여금 절망에 이르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동아줄을 잡았으니 이게 끊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칼 가지고 잘라 버려요. 예수라는 동아줄을 잘라버려요.
교회 와서 그동안 장난치고 있었구나. 놀고 있었네. 오락이었어? 나다나엘에게 먼저 주께서 말을 해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삼킴을 당했습니다. 나다나엘을 가지고, 나다나엘이 죄인이거든요, 죄인을 가지고 뭘 만드는가? 예수님이라는 의를 만들어내요, 바꿔치기하는 그 작용을 해서.
어떻게? 나다나엘아, 나의 죽음에 네가 초청되었다는 거예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외칠 그 절망에 너도 초청받아 너도 그 절망에 함께할 때 그때 너는 새로운 나의 일부로서, 주님의 일부로서 네가 영존할 것이라는 겁니다. 너는 멸망할 것이나 너는 내 안에서 영존할 것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의 의는 주님의 의로 바뀌게 되죠. 나의 의가 주님으로 바뀌는 그날까지, 나의 승리가 날아가 버리고 나의 승리가 주님의 승리로 바뀌는 그 날까지. 이 날을 위해 자기에 대한 집요함을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시켜 이걸 사라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제는 네가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자리에 처소가 있는 거예요. 어떤 처소? 말씀의 처소가 있는 겁니다.
율법은 말씀이거든요, 하나님 사랑하기 위해 내 몸을 사랑하라, 인간은 자기는 멀쩡하게 여기고 그 말씀을 지키면 된다고 하는데 그 선한 사마리아인, 첫 번째 제사장 지나가고, 두 번째 레위지파 지나가고, 세 번째의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자리를 그냥 지나가도 되는데 자기의 처소로 여기고 덜렁 거기에 말려들어요. 자진해서 말려듭니다. 죽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나는 내 모습으로 바꿔치기 하고 싶습니다. 자진해서.
강도 만난 사람이 성도일 수도 있고요, 예수님일 수도 있고 둘 다 돼요.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는 자가 예수님일 수도 있고 성도일 수도 있어요. 절차상 그렇게 돼요. 절차가 강도 만난 사람은 천국 갈 천국 백성입니다. 그걸 치료하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 뒤에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강도 만났고 성령에 의해 즐겨 그 예수님께 참여되게 된 자,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과 한 처소를 이루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어느 처소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는 망하는 역사에요. 멸망해야 돼요. 멸망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멸망하는 그 이스라엘, 결국엔 쇠퇴하지만 그 쇠퇴하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안정성 있게 그대로 계속 이어지는 다른 어떤 숨어 있는 요소, 이스라엘에 같이 섞어 동행하는 어떤 줄기를 거기에 집어넣어 놨어요.
그게 겐 족속입니다. 그 겐 족속의 후손이 레갑족속. 레갑이 잘 기억이 안되거든 담배 한 갑 두 갑 이런 식으로 하면 기억납니다. 레갑족속. 예레미야 35장에 보면 이 레갑족속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지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망하는 것이 결정되었어요.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이 결정되고 난 뒤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레갑족속에게 갑니다.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라고 했어요. 5-7절에 “내가 레갑 족속 사람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했습니다.
장막이라 하는 것은 ‘처소 없음’의 인물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이 땅에 어떤 공간이 없는 존재가 예수님이에요. 마치 멜기세덱과 똑같은 거예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이 땅은 존재의 세계인데 그 존재의 세계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없는 존재이면서 나타난 거예요.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레갑족속이 예수님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처소자체를 이 땅에 둔 적이 없어요.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가자” 할 때 그 집으로 가기 위해서 돌멩이로 길에 표시하는 식으로는 성공했지만 빵 조각으로 했을 때는 다 없어져 버렸어요. 하여튼 두 번째 단계에서는 돌아갈 처소가 없고 돌아갈 처소가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유일한 처소는 바로 귀신이 있는 처소만 있어서 거기에 인간은 이미 예속되어 있고 복속되어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 땅은 귀신의 처소입니다.
인간을 위한 처소는 없어요. 그렇게 할 때 16절이 결정적입니다. 결정적인 반응이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15절부터 보면 “나도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좇아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거하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나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 선조가 그들에게 명한 그 명령을 준행하나 이 백성은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예레미야가 어떻게 이야기했느냐 하면, 레갑족속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명령했어요. 예레미야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선지자에요.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선지자가 명령을 했는데 레갑족속이 선지자의 말을 완전히 개무시하고 ‘나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다’ 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에 대한 불순종이에요. 불순종이 순종이라는 거예요. 이게 결정타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택한 백성 바꿔치기하는 하나님의 결정적 방법이 이거예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아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순종한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마세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자체가 순종이 안 되는 족속입니다. 그런데 순종이 안되는데 순종을 했다니까 그게 수작이고 그건 요령부리는 거예요. 주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이 레갑족속 이전에 이미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에서도 이미 언급을 했어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칠 때입니다.
창세기 22장 13, 1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다 그 말이지요. 여호와이레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몰래, 몰래, 어떤 인간도 알지 못하는 처소를 따로, 따로 마련한 거예요.
그렇게 따로 마련하기 위해서는 인간 쪽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해야 돼요. 절망해야 이게 여호와의 준비가 돼요. 주께서 마련한 것을 미리 알면 안 됩니다. 이것은 수상한 겁니다. 귀신의 종이 귀신이 가는 길로 가는 것이 마땅하지 여기서 뭘 대비를 한다고요? 귀신이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요?
우리가 어떻게 천국 가려고 대비를 하느냐, 그걸 모를까요? 다 알아요. 오히려 우리를 격려한다고요. ‘잘한다! 신앙생활 잘한다! 은혜받았구나. 그래, 그쪽으로 가야지.’ 도무지 끊어짐이 없는 거예요, 끊어짐이. 도무지 내가 아닌 내가 되는 바꿔치기가 안돼요. 바꿔치기는 생각도 해본 적도 없어요.
내 인생, 천당 가는 인생, 그것은 내 쪽에서 준비해요. 여호와 이레가 아니고 나의 이레에요. 내가 알아서 보험 들듯이 보험 한 다섯 개 들듯이. 내가 알아서 보험 드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기독교로 모자라서 천주교, 천주교로도 모자라서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다 해요. 보험 한 열댓 개 들어서 ‘이거 안되면 저거라도 맞겠지.’ 내가 내 앞가림 다 하는 것, 그거 귀신이 시킨 겁니다.
제 아내가 동창회 참석했어요. 오랜만에 동창회에 참석하게 되면 절에 나가는 불교신자들이 많아요. 그런데 지난 금요일에 동창회에 가니까 동창 중 하나가 하는 말이 교회에 나간다고 한 거예요. “전에 네가 절에 다녔지 않아?” 그렇게 하니까, 며느리가 새로 들어왔는데 교회에 나가는 며느리라서 그 때부터 교회에 나가게 되었답니다.
교회 나가고 난 뒤에 며느리를 막 나무랐데요. “이 좋은 것을 왜 진즉 이야기를 안 했느냐?” 한 거예요. 그러니까 며느리가 하는 말이 “어머니, 그게 다 때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한 거예요. 그래서 왜 교회 나가는 게 좋은가 보니까 제사 안 드려도 된다는 거예요. 제사 안 드려서 좋은 종교, 기독교, 그것은 버스 안에서 옆에 있는 빈자리로 갈아타기입니다.
백날 갈아타 봐야 그 버스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거기서 종교 바꿔치기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답변을 “제사 안 드려서 너무 좋다.” 이러지 마시고요 “내가 나와 결별하니 너무 좋다. 나의 의와 바이바이, 하니 너무 좋다. 나는 아무것도 승리 안 해도 돼. 주님이 승리 다 했어. 며늘아기야.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진즉 안 알려줬느냐?” 이런 소리를 해야 될 텐데 제사 안 드리니 너무 좋다는 거예요. 1단계입니다, 1단계. 해도 다 쓸데없는 헛짓뿐인 1단계. 아무리 해도 자기하고 작별하지 못하는 1단계.
주님께서는 이 레갑의 족속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망할 때마다 비로소 나타나게 만들었어요.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사라질 것이 사라질 때 나타날 것이 나타나게 하는 방법에 레갑족속이 들어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드로. 모세가 자기 맘대로 민족해방 한다고 독립투사 하다가 잘려서 도망쳤을 그 때 레갑족속, 겐족속에 속한 이드로가, 모세의 장인어른이지요, 장인어른이 와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나라 조직 이렇게 해야 됩니다(출 18장), 하고 가르치게 돼요.
민수기 10장 29절에 보면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이드로라고 해도 되고요)의 아들 호밥…” 여기 호밥이 나와요, “…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진행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레갑족속은 뭐냐? 겐족속은 원래 애굽에 있던 민족이 아니에요. 약속의 땅에 미리 앞당겨서 하나님이 심어놓고 이스라엘이 오기를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우리 도와줘서 좋~다고 까불대고 촐랑대던 그 이스라엘, 결국 멸망할 이스라엘이에요. 그 멸망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그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이방 민족으로 미리 하나님의 선발대로 가 있던 족속이 겐족속, 이방 족속이에요. 미디안 족속 중에 겐족속이에요.
호밥이라는 사람이 드디어 모세를 만나서 모세가 호밥에게 요구합니다. “같이 가자. 하나님께서 함께 있으면 복을 줄 것이다.” 사사기 4장 11절에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사사기 4장의 이야기는 뭐냐? 여자 사사 드보라가 가나안 왕 야빈과 전쟁을 벌이는 그때 비겁한 바락장군은 드보라에 빌붙어서 “앞장서세요. 저는 그냥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남아 있는 것은 적장이 남아 있어요. 적장이 남아 있으면 전쟁 끝난 것 아닙니다. 적장이 남아 있으면 그 적장 죽일 때까지 이스라엘은 폭격을 할 수밖에 없어요. 가자지역 이야기입니다. 아직까지 안 잡혔거든요.
사사기 4장 17절에 야빈의 군대장관이지요,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시스라가 왔을 때 쫓겨 다니는 중이니까 힘들었겠지 않습니까? 그때 적장을 누가 쳤느냐?
적장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고요. 두 번째 어떤 여자냐? 겐 사람, 이방 여인이지요,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는가? 21절에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자고 있는데 말뚝을 박아서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 손이 아니라 이방인, 이스라엘 속에 같이 섞여 있는 이방인인 겐사람에 의해서, 레갑족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되지요. 물론 이게 보조적인듯하지만 보조적이지 않아요. 숨어 있는 거지요. 보조적인 것은 숨어 있고 주류가 되는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지요.
예수 믿는다고 깝치는 나는 나의 주류가 되지요. 내가 바로 이스라엘 역사 그것을 전부 다 움켜서 주께서 언약으로 내 안에 다 집어넣어요. 나는 이스라엘 역사의 재현이 되는 겁니다. 반복이 돼요. 내가 구원받는다고 깝치는 나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마귀의 종일 수밖에 없는 것을 들춰내면서 그 가운데서 여호와이레, 내가 예상치도 못한 준비된 다른 은혜가 있어서 멸망 받는 이스라엘을, 우리를 그때마다 살려주십니다.
죽었던 자를 살리고, 잃었던 자를 얻게 하시고,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그 언약적 원칙이 우리 안에 작동될 때 우리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로 완성을 시켜주는 겁니다. 꼴랑 알지도 못하면서 선악에 대해서 따지면서 이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걸 죽여버려서 생명나무로 완성하시는 것, 죄인을 긁어모아서 우리 주님의 몸, 지체 자체가 되게 만드는 그 작업,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 안에 있음을 발견하고 주께서 찾아오신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멸망시키고 자기가 영존하는 그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또 나온 게 열왕기하 10장 15절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 그 안부를 묻고 가로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가로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무슨 이야기 하면, 남쪽과 북쪽이 한통속이 되어서 전부 다 바알신을 섬겼어요. 구약에 보면 남북의 나라가 다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 말은, 우리 안에 바알이 있고 우리 안에 우상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나를 우상시하는 것이 있어요. 나의 의를 우상시하겠지요. 나의 착함과 훌륭함과 성실함과 재능 있음과 나의 뽐냄이 그게 우상화되어 있는 것, 귀신이 시키는 대로 가득 들어 있는 것, 이런 판국인데 이걸 어떻게 손댈 수가 없어요. 너무나 우리 자신이 우상이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하느냐? 레갑족속이 와서 그걸 확 파묘(破墓)해야지요. 무덤을 파내고 귀신을 불러내서 십자가 사건과 마주치게 만들어야지요. 강도 만난 사람 되게 해야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예후라는 사람, 깡패가 등장하는데요. 이 깡패가 엘리사의 지시를 받고 그다음에 그 예후가 사람들을 남쪽 북쪽 다 죽입니다.
예후가 여호람 왕 죽이고(왕하 9:24), 그 다음에 요람의 아들 70명 다 죽이고(왕하 10:7), 거기에 남쪽 유다 왕, 관계도 없는 남쪽 왕 아하시야 죽이고(왕하 9:27), 그 다음에 아하시야왕의 형제들 42명 다 죽이고(왕하 10:13), 아합의 부인 이세벨을 죽여요(왕하 9:33).
다 죽일 때 누구와 손잡고 했는가? 열왕기하 10장 15절의 말씀대로 여호나답, 레갑의 아들과 합세해서 이스라엘 속에 있는 바알종교를 싸그리 청소합니다. 예레미야가 레갑족속에 대해서 넌지시 하나님 지시에 대해서 테스트해 본 거지요. “포도주를 마시라.” 선지자의 말인데요. 안 먹습니다.
이미 레갑족속은 안정권에 들어가 있어요. 새삼스럽게 내가 뭐가 될 필요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바알은 어떻게 손댈 수가 없어요. 맨날 말씀 전해봐야 말씀에 관심 없어요. 이 방법을 예후가 사용하지요. “이제부터 이 나라는 바알만 섬기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 바알 예복을 입고 모조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바알신전에 모이세요.” 열왕기하 10장 19, 20절에 나옵니다.
모든 바알선지자를 다 모아놓고 한꺼번에 몰살시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넌지시 떠보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말씀은 우리 속에 숨 고르기 하는 거예요. 우리 자아 속에 엉터리가 있더라도 이사야 40장 3, 4절이나 누가복음 3장 3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례요한이 마지막 심판 때에 어떻게 하느냐? 이사야 40장 4절에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작업은 토목작업, 토목건설현장이에요. 높은 것은 전부 다 고르게 해서 주께서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영원한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우리 속에 있던 모든 것, 우리의 자아가 소실되고 소멸되고 우리 생각, 우리의 애착, 우리에 대한 집요함, 이런 것은 다 평탄하게 해서 다 완전히 돌조각이 되고 흙 조각이 되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흙이 되어야 해요. 아무것도 아닌 흙을 주워모아서 주님께서 그걸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내는 것, 이게 바로 십자가의 살아 있는 능력이고 솜씨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능력을 주님께 떠맡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우리는 건방져서 우리에게 손대지 말라 하지만 택한 백성인 우리를 일찌감치 손대서 우리로 하여금 죽어가면서도 몰랐던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의로 십자가 사건 안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이미 다 안정권에 속하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어서 날마다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그런 살아 있는 말씀의 처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