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인간은 비유다

아빠와 함께 2023. 12. 20. 10:47

강남-누가복음 20장 9절 (인간은 비유다) 231205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20장 9절 보겠습니다.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거기까지 봅시다. 여기에 방금 여러분들이 딱 듣기만 들어도 그 내막이 뭐지 확 들어오지요. 산뜻하게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는 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포도원 주인 입장에서 우리가 있어버리면 이 내용이 굉장히 깔끔하게 산뜻하게 들어옵니다. 우리가 주인과 같은 편이라고 여기면. 그런데 우리가 농부와 농부의 관련된 한 사람이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렇게 봐야 돼요. 무턱대고 좋은 편에 서려고 하지 말고 성자의 편에 서지 말고 진리 편에 서지 말고, 진리라는 것은 장애가 뚫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진리에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주님은 진리지만 주님만 진리에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주님만 진리거든요. 그럼 우리는 진리가 아니란 말이죠. 그럼 성경을 볼 때 진리가 아닌 쪽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하시면 성경은 거의 다 풀립니다. 우리가 진리가 아닌 쪽에. 그럼 여기서 포도원을 다른 사람을 주리라 라고 되어 있는데 그럼 우리는 본문 해석을 할 때에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만약에 농부라면 농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야 돼요. 농부가 포도원에서 농부가 열심히 일하면서 원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그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이거에요. 정착이에요. ‘정착’. 우리 일상을 감추고 일상을 고려하지 않고 거기서 추가적으로 성경 봐서 추가적인 구원의 진리 천국의 진리를 확보하려고 하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내가 의도하는 것과 천국 이게 불합치 됩니다. 일치되지 않아요. 합치되지 않습니다.


잠깐 히브리서 4장 2절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러니까 히브리서 4장에서 하는 이야기가 광야 때 이야기에요. 광야 때 그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왔는데 애굽에서 나왔는데 다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약속을 주신 분의 믿음이 있어요. 이 믿음과 약속을 받겠다는 자의 믿음이 틀어진 거예요.  (히6: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주님께서 주시고자하는 그것에 대해서 받고자하는 사람은 엉뚱한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이게 불일치 일어나서 화합치 않은 겁니다. 약속을 주신 분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약속의 땅에 갑니다. 천국 갑니다. 그런데 주시는 분의 뜻하고 자기가 챙기려는 자기 뜻하고 이게 불일치가 일어나게 되면 비록 약속이 있어 안식에 있다할지라도 거기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히브리서 4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에서 왜 구약이 이스라엘이 먼저 있어야 할 이유가 뭐냐 하면은 불일치된 경우를 사례로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음으로 들어갔다 그거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있음으로서 그동안 몰랐던 하나님 생각 인간 생각 이게 틀어져있다는 것이 비로소 노출된다는 겁니다. 그게 구약의 의미에요. 말씀을 주신 의미고.


이런 이야기 들으니까 아휴 큰일났어 큰일났어 나 이거 큰일난거야. 불일치되면 어떡해. 말씀은 들었는데 불일치되면 어떡해 어떡해. 하니까 못 들어가는 거예요. 믿음이 화합치 않을 경우에 믿음이 화합되려면 고집을 부릴게 아니고 어느 믿음을 포기하면 돼요? 내 쪽에 문제 있다 생각하잖아요. 내 쪽에 문제 있잖아요. 그 문제 있는 내 쪽을 문제 있다고 알고 깔끔하게 나의 의도를 포기하면 되잖아요. 참 쉽죠 잉. 굉장히 쉬운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 농부가 진멸 당했잖아요. 그러면 후딱 농부가 어떤 마음으로 있었는가를 농부의 마음을 알면 돼요. 농부의 마음을. 농부의 마음을 아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포도원 농부가 그냥 농사만 짓는 겁니까? 안 그러면 자기의 노동의 대가와 자기 마음속에 있었던 은근히 자기가 원했던 소망과 이게 달성된다는 기대가 없이 노동했겠어요? 있지요.


농부가 왜 자꾸 포도원에 열심히 일합니까. 언젠가 이 포도원이 누구 것이 된다? 내 것이 된다는 거예요. 왜 내 것이 돼야 돼요? 내 것이 될 때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뭡니까? 이익은 뭐에요? 정착이죠. 정착. 내 땅이 생겨요. 나뿐만 아니고 내 자자손손 대대손손 더 이상 이사 다니지 않고 삶의 생활의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안전빵으로 안정되게 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열망도 없이 노동했겠습니까. 우리는 일 해봤자 포도원은 주인의 것이니까 그냥 일한 대가만 받아야지 라고 한다면 절대로 이걸 주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아요. 노동자가 노동해서 대가만 받겠습니다 시급 받겠습니다 하면 이 이야기 자체가 안 나와요.


이건 뭐 노동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기가 살아가지고 야 이거 포도원 우리 단합해서 우리 것 만들자 지금 이렇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고 주님께서 이야기하시고 이런 경우가 곧 바로 이 세상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 이 세상은 주의 은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도 은근히 노리는 게 있어요. 주여 그동안 감사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내 이름으로 등기 바꿉시다. 인간 본인도 몰라요. 내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본인도 몰라요. 주님은 아시니까 이 비유를 우리에게 들이대신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정착하고자 하는가. 세상에 정착하면 안 되지 라고 화낼게 아닙니다. 화낼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이 노래를 들으시면 야 이게 참 화낼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시게 될 겁니다. 이거는 가사만 봐서 느낌이 안와요. 가락과 함께 느껴야 돼요.



하늘에 흐르는 구름이 내 맘이라면
두둥실 날아서 다녀나 오리라만은
내 고향 물 맑고 산 높은 곳 끝없이 넓은 들에
뛰놀던 어린 시절 돌아가고 싶어라
풀잎을 베개 삼아 밤 새워 별을 헤며
내 꿈을 키우던 곳 언제나 다시 갈까
지금쯤 내 생각에 등잔불 밝히운 채
홀로 앉아 계실 어머님 보고 싶어라
산나물 무쳐놓고 오롯이 둘러앉아
재밌게 살자시던 어머니 보고파라



어떻습니까? 예수를 50년 100년 믿어도 우리 마음속에는 뭡니까? 이 망향이라는 노래 홍민 나이 70먹었는데 1970년대 노래거든요. 김세환이랑 같이 활동한 사람이에요. 홍민. 목소리 좋지요. 여기 나오는 가사의 모든 이 심정이 인간의 마음속에 깔려있어요. 이게 깔려있다고요. 이게 깔려있으니까 아무리 성경을 공부하고 누가복음을 공부하고 뭘 한다 할지라도 내 속에서 고향, 어느 게 내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입니까? 예수 믿을래요? 고향에서 산나물 무쳐먹고 그때 그 시절 안정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 이게 죄냐? 이렇게 묻고 싶죠. 이게 그토록 죄냐? 그거 나한테 묻지 말고 오늘 본문 누가복음 예수님한테 물으란 말이죠.


농부들이 왜 노동을 합니까? 정착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정착하기 위해서. 이 나쁜 농부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상속자,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담되고 있어요. 왜? 홍민부터 시작해서 영원히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어릴 때 꿈속 같은 그것이 지금 이 순간과 미래의 내 삶에 정착된 내 모습이고 싶은 거예요. 어릴 때 그 좋았던 그 시절이. 이것도 모르고 그냥 농부들 진멸하고 뭐 보복하니까 그래 그들은 당해도 싸지. 뭘 당해도 싸요. 사람 사는 게 자기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 사는 게 인간의 본심인데요. 이거 보세요. “풀잎을 베개 삼아 밤 새워 별을 헤며” 이게 뭐냐 하면은 고향의 뒷산에 가가지고 누워가지고 하늘 보는 거예요 이게. 고향 보면 주님이 막 떠올라요? 주님이 떠오릅니까? 아니면 산나물 무쳐놓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라요? 인간은 예수를 믿고 교회 간다 하지만 자기 본성을 어떻게 이깁니까. 못 이기죠.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은 그만큼 깊은 뜻이 있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농부들이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 농부가 아니에요. 농부들이죠. 농부들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인간은 인간과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왜? 인간에게 인간관계뿐이니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관계뿐이에요. 다른 관계는 별로입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맞춰보세요. 다음 중 어떤 상황이 가장 암담하고 참담한 상황인가. 1번, 사람이 아예 없는 경우. 2번, 주변에 말을 걸 사람이 없는 경우. 3번, 나보고 나가라고 하는 경우. 이 셋 중에 어떤 경우가 가장 기가 막힐 경우입니까? 2번 내가 말 걸 사람이 없어. 전부 다 딴 짓하고 있고 안녕하세요 해도 인사 안 받아 줘요 그런 경우. 3번 노골적으로 나보고 욕하고 나가라고 하는 그런 경우. 둘 다 만만치 않지요. 그러나 이것도 배부른 소리에요. 제일 참담한 것은 주변에 고양이하고 개밖에 없고 집구석 들어가면 고양이 개 밖에 없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 TV 소리만 나오고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는 경우. 이게 어떤 경우입니까? 암담하고 참담한 경우지요.


이게 왜 암담하고 참담한 경우입니까? 사람은 누굴 찾는가? 주님 찾는가? 아니에요. 누구 찾습니까? 같은 인간을 찾습니다. 농부들이 한 마음이 되는 것은 우리 끼리에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이게 그들의 타고난 천성이고 본성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본성이에요. 그리고 같이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이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우리나라의 조선인들이 이민 가서 고생한 거 보세요. 그렇게 힘들더라도 견딜 수 있는 것은 같은 조선 사람이 같이 고생을 같이 한다는 거예요. 군대생활 힘들어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같이 머리 깎고 같이 고생을 같이 한다는 거예요. 혼자 하라면 못합니다. 군에 가서 같이 빡빡 기고 보초 서고 잠 못 자고 한 사람들은 몸 살찌고 요래 저래 빠져 군대 안간 애들은 3년 뒤에 말라있고 왜 그런 겁니까? 군대에서 야윈 사람 못 봤어요. 왜 그런 거예요?


고생을 같이 했잖아요. 동지애가 흐릅니다. 동지애. 동지애가 뭐냐 하면은 사람은 뭐가 있어야 산다? 주변에 말할 수 있고 말 걸 수 있고 대화하는 상대가 있어야 사람 사는 게 돼요. 그래서 이 농부들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래?! 같이 힘든 포도원 농사 지으면서 같이 일해가지고 우리 헤어지지 말고 같이 일하자 이게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이거든요. 그걸 모르고 여기 20장 16절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하니까 야 농부들 나쁘다. 뭐가 나빠요 우리 사는 게 그건데요. 사는 게 사람 만나서 주고받는 게 그게 사람 사는 재미 아닙니까. 그 재미 말고 뭐 할 건데요 기도원에서 혼자 기도하면서 살 거예요? 그런 것은 산장의 여인. 혼자 살면 사는 겁니까 그게. 자진해서 유폐하는 거예요 자기를.


모든 인간은 자살 중입니다. 자살하고 있어요 지금. 모든 인간은. 이게 시기가 빨리 온다 늦게 온다 그것뿐이지. 모든 인간은 군중 속에서 고독이에요. 군중 속에서. 많은 사람이 있고 식구들이 애가 5명이고 부부가 함께 화기애애하고 같이 놀러가고 우리 어디 놀러갈까. 가봤자 고독을 실어날라요. 둘 다 고독을 실어나르는 거예요.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은 뭐냐? 같은 인간 붙들고 자기 사연, 자기 살아온 것, 자기 억울한 것, 자기 고생한 것, 듣던 말던 터놓고 그냥 내 이야기 들어줘 하면 그나마 숨통 트이잖아요. 숨통이. 아 사는 것은 사람하고 끼리끼리 사는 게 사람 사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주님하고 사는 것은 사는 것도 아니에요 그거는.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이야기 들어주지도 않을 건데. 눈에 보이는 사람이 내 이야기 들어주는 거예요. 사람이. 교회 커뮤니티입니다. 사람 관계에요 교회라는 게.


그러니까 이 농부 이야기가 쉬운 이야기가 아니고 정확하게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아무생각 없이 사는 게 뭐냐? 나는 마음 맞는 대화되는 사람하고 만나서 살고 싶어라 하는 감추어놓은 자기 본심이 있는 거예요. 자기 본심이. 자식 너 키웠으니까 독립해라 하고 그렇게 닦달하다가 자식이 집에 오면 또 반가워요. 그래서 가져온 가사가 님 그림자입니다. 혹시 모르는 사람 있을까 해서 틉니다. 이 노래 모르면 간첩 아닙니까.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일까


자, 보세요. 여기 님 그림자에서 나는 가고 또 누가 있냐 하면은 저만치 앞서 가는 님이 있지요. 이게 바로 인간이 세상사는 거예요. 혼자 못 살아요. 누군가가 있고 누군가를 지향해야 돼요. 그 사람이 앞서가잖아요. 두 사람이 등장하지요. 지금 밤중이라서 달그림자 있잖아요. 그 님 그림자를 밟고 가는 거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님은 나의 마음 헤일까. 당신은 내 마음 압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사회는 사람사회는 다른 사람이 내 마음 알아주는 여부에 따라서 행복이 결정되는 거예요 사람은. 님 그림자에요. 여러분 이거 모르면 간첩이죠.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다만은 이게 인간관계고 여기서 인간은 못 벗어난다가 아니라 아예 벗어날 마음도 없어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되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은 어디 계시죠? 끼어듭니까? 못 끼어듭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인간과 인간들의 형성된 인간관계에서 주님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런데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끼어들 자리가 없는데 주인이 자기 아들을 끼어들었어요. 아들이 끼어드니까 농부들이 어떻습니까? 아무리 아들이라도 낯선 사람이에요. 같이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 아니에요. 끼어드니까 같이 합세해서 이 상속자만 죽이면 그 다음에 이 포도원은 미래의 우리의 정착지가 되죠. 그러니까 이 본문을 이해할 때 자꾸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누구 입장해서 생각합니까? 진멸당할 농부가 어떤 마음으로 그들은 살아가는가? 왜? 농부의 마음이 오늘날 일상 인간들의 마음을 대표해주기 때문에. 딱 이렇게 이야기하면 결국은 어떤 인간도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 없다가 되죠. 그게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미 인간과 인간관계가 너무 돈독하기 때문에 거기에 끼어들 예수는 없어요.


교회라는 것도 인간과 인간들 친하고 재미나게 살기위해서 교회 만든 거예요. 예수님과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는 끼어들면 합세해서 추방시켜버려요. 교회에서는 교회 이야기해야지 교회에서 복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예의에 어긋나요. 특히 부교역자들 다 짤립니다. 주일학교 이번 주 몇 명 나왔냐 그거 묻지요. 주일학교 그런 같은 인간이 몇 명 나왔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철이 되게 없는 부교역자가 “이번 주는 주님이 다녀가신 것 같아요.” “너 이리와 짐 싸 나가. 나가 이씨.” 내가 묻는 것은 이번 주 숫자 세니까 몇 명 왔어요 교인들? 이거 묻지 주님이 다녀갔습니다. 그런 소리하면 여전도사님 짤려요. 어디서 교회 와서 왜 주님 이야기 왜 해. 교회 와서. 미친 거 아니야 정말. 이 세상은 인간관계로 돈독합니다. 이거는 어떤 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느냐?


이제부터 어려운 거예요. 20장 9절에 나옵니다. ‘비유’. 모든 인간은 비유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이 세상에 신비는 없어요. 그냥 비유에요 비유. 다 아는 이야기에요. 당신 내 이야기 잘 들으면 우리 좋은 친구하자.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까? 이게 어려운 말 아니지요. 이게 뭐 신비로운 말입니까? 아니지요. 알아듣는 이야기죠. 알아듣는 이야기는 이 인간사회에서는 비유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있음 그 자체로 전부에요. 내가 여기 있고 네가 있고 나 꼬집으면 아프고 너 거기 있다는 걸 내가 눈으로 보면 그게 진짜고 가짜로 있는 게 아니고 진짜로 있고 이게 전부에요. 비유라는 게 없어요. 이 땅에서는 내 몸 있고 네 몸 있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게 그게 전부에요 그게. 비유라는 게 없어요 이 땅에서는. 그러나 주님께는 모든 게 비유밖에 안됩니다. 허구에요 허구.


비유라는 말은 인간 자체는 뭐가 된다? 허구다. 돈독한 인간관계가 허구에요. 왜 허구냐? 마태복음 16장 4절을 읽어보세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라고 되어있지요. 그 이야기하기 전에 노래 3개 준비했는데 김광석의 거리에서는 왜 안합니까 하는데 님 그림자가 또렷하게 등장하는 두 사람의 관계죠. 두 사람. 그 사람 아쉬워서 달그림자 밟으면서 가는 것. 달그림자 밟으면 앞서가는 사람이 아야 누가 밟았네 하면서 멈춥니까? 그렇지 않죠. 하지만 밟고 싶어요. 당신하고 이 관계 청산하기 아쉬워서 밟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뭐냐?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그리고 뒤에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먼저 가버렸어요 이제는. 그분의 그림자조차 밟을 기회도 없어서 아쉬워서 노래가 님 그림자에요.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사람관계는 사람이 그리워서 미치는 관계가 사람관계고 현실세계입니다. 주님 보고 싶어서 미친 사람 없어요. 사람 보고 싶은 거예요. 내 믿음 좋은 거 알아주는 사람. 그걸 원하는 거예요. 주님이 다 안다. 그런 주님의 위로 싫어요. 눈에 보이는 사람이 날 알아줘야 돼요. 형제님 자매님 해싸면서 사람이 알아줘야 돼 사람이. 그거 아니면 교회 나가지도 않아요. 그러면 김광석 거리에서는 왜 하느냐. 이 관계를 더욱 더 세밀하게 한 것이 거리에서라는 이 노래에요. 더 설명할게 없어요. 그걸 아주 더 세밀하게 들어간 거예요 김광석이. 거리에 가로등불 하나 하면서 폼 잡아가면서 검붉은 노을 해가면서.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지요. 이게 뭐냐? 외롭다 이 말이에요. 외로운 거예요. 그냥 외로운 거예요.


그 다음 가사가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가다가 쇼윈도에 자기 모습 보이거든요. 자기 처지가 서글프기 짝이 없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묻는 거예요. 야야 너 요새 무슨 생각하고 살아. 아이고 불쌍한 나야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사람이 그리운 거예요. 사람이. 터놓고 이야기하고 마음 놓고 이야기하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 그리운 거예요. 주님이 그립지 않아요. 아무리 교회 50년 다녀도 마찬가지에요. 주님이 그립지 않아요. 성경 말씀이 그리운 게 아니에요. 성경공부하게 되면 혹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지 않을까 뭐 이런걸 응답으로 여기고 생각한다니까.


자, 마태복음 16장 4장에서 이 세대를 뭐라고 하느냐? “악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단어가 이상하죠. “악하고 음란한 세대”죠. 자, 성경에서 음란이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우상을 이야기하는데 음란이 뭐냐? 음란은 예수님을 가운데 두지 않는 관계망을 음란이라고 해요. 예수님을 가운데 두지 않는 관계망.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이 음란한 거예요. 음란한 것. 보통 음란하면 이 세상에서 음란하면 구역질나는 거죠. 인간이야 동물이야 토하고 싶다 하잖아요. 하나님이 토하고 싶은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토하고 싶은 거예요. 구토하고 싶은 겁니다. 농부와 농부 사이에 의논하는 게 구토하고 싶은 거예요. 진멸하고 싶은 거예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0장 16절의 말씀처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 모든 것에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예수님을 교차로로 여겨서 그냥 네가 나한테 오지 말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나한테 오고 나는 당신한테 가지 말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당신한테 가라 이 말이죠. 부모와 자식 관계도 마찬가지고 부부관계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맺어준 관계거든요. 예수님이 옛날에 맺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현장에서 둘 다 숨 쉬게 만들었고 그 둘이 만나게 해준 것이 중간에 예수님이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왜 만나게 해주는가? 예수님이 하는 일이 이 세상의 현실이고 우리는 뭐냐? 우리는 그 교차점. 그걸 가지고 우리는 비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기판의 서양 체스 있지요. 체스 판의 말 같은 인형 말 같은 존재에요. 예수님의 세상을 형성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말로 사용한 거예요.


그런 이 현실을 두고서 하늘에 흐르는 구름이 내 마음이라면 물 맑고 산 높은 곳 끝없이 넓은 들에 뛰놀던 어린 시절 돌아가고 싶어라. 자, 어린 시절 돌아가고 싶어라. 이거 무슨 생각이에요? 뭐가 빠진 거예요? 무슨 중심이 빠진 거예요? 예수님 중심이 빠져버렸죠. 예수님 중심.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목사님, 뭐 교회 가서나 주님 생각하지 일상생활에 사는 거 바쁜데 뭐 언제 예수님 생각할 수 있습니까 라고 변명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누가복음 20장 16절은 어떻게 되는데요. 그 농부들 진멸하고, 농부들을 진멸한다는데 다 죽여버린다는데. 주님이 죽여버리는 이 심정을 그런 식으로 헤아릴 수 있겠어요? 제가 아까 히브리서4장 이야기했지요. 히브리서 4장 약속의 때가 남아있을지라도 못 들어간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약속을 주신 분의 마음과 약속을 받는 마음이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기서 농부들 진멸하겠다는 것이 주의 뜻인데 우리는 변명조로 그 진멸까지 왜 하십니까. 사람이 사람 만나는 게 상식이고 그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하니까 문제는 이게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화합치 않은 거예요 이게. 성경공부는 하는데 마음은 하나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성경 공부하는데 마음이 하나가 안돼요. 마음은 딴 데 가있어요. 고향에 있는 어머니 산나물 무친 게 먹고 싶어요. 한번 돌아보세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의 소망이 뭡니까? 누굴 만나고 싶은 거예요? 주님 만나고 싶은 거예요? 내 마음 말 통하는 그런 마음 통하는 사람 만나고 싶은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사람이 혼자 살지 결혼을 왜 합니까? 당신에게 반했어요 사랑합니다 그런 되도 않는 소리 다하는데 결국 딱 까놓고 결혼 왜 합니까? 저 사람하고 살면 서로 말 통할까 싶어서. 오래 가잖아요.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건전지. 밧데리 오래 가듯이 오래 갈 사람인가 싶어서 결혼하고 결혼 못하는 것은 오래 갈 사람 못 찾아서 그래요. ‘나는 솔로’ 나와서 장난치는 그 사람밖에 없지요. 일시적인 사랑. 그렇지 않으면 돈 보고 하던지. 돈 많은 사람이 미쳤다고 나한테. 없잖아요. 결혼 전에 성경을 못 봤어요? 봤지요. 복음을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복음은 들었지만 관심사가 복음에 있는 게 아니고 내 행복에 관심 있어요. 내 행복. 하나님의 덕 보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덕 봐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충족되면서 하나님까지 믿어가지고 죽어서는 천국까지 보험 들어놓으려는 그런 얍삽한 그 생각을 한 거예요.


자, 그러면 그 다음이 문제에요. 모든 인간이 농부의 수준을 못 벗어납니다. 전부 다 농부 수준밖에 안되지요. 그렇다면 주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을 이 오늘 농부 이야기를 통해서 구원코자 하는데 구원의 방법이 뭐겠습니까? 이 농부 이야기가 복음이거든요. 이 농부 이야기가 복음이라면 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어떤 식으로 적용이 되느냐. 아까 제가 힌트를 드렸어요. 뭐냐 하면은 ‘나’라는 실체를 뭐로 바꾸는 거예요? 비유. 내가 어떤 관계를 보여주는 형성하는 하나의 비유 같은 존재, 비유니까 단독적으로 내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되는 것. 나의 행복? 나의 인생 즐거움 그거는 잘못된 거예요. 비유에 해당이 안돼요. 비유는 전체 그림속의 일부여야 돼요. 전체 그림 속에.


우리가 예수님의 세계에 하나의 비유로서 가담하면 되는 겁니다. 가담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는데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시간의 분할. 인간은 거울을 보면 아까 가사에 나오지요. 거리에서 보면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거리에 가니까 쇼윈도에 확 비칠게 아닙니까. 자기 사는 게 서글프기 짝이 없는 거예요. 내가 나보고 빈정대는 거예요. ‘야 인간아 너 지금 뭐하고 사니’ 하고 빈정댄단 말이죠. 자, 이럴 때 거울에 비친 내 모습보고 이렇게 자기를 빈정댈 때 이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나한테 관심 있지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나에게 관심사 없으면 나는 이 땅에 살 이유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우리는 매순간 누구한테 관심이 집중되어있습니까? 나한테 집중되어 있는 거예요. 비유입니까 실제입니까? 실제되는 거예요. 실제거든요.


여러분 구원이 없지요. 주님과 상관이 없어요 이거는. 맨날 자기 생각만 하는데 무슨 주님 나라에 가요. 자기 생각만 하는데. 믿음이 화합치 않는데요. 주의 믿음과 내 믿음이 일치, 합치되지 않는데 무슨 구원을 받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포도원 비유를 가지고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지요. 어떤 작용을 하느냐 하면은 실체를 뭐로 바꾼다? 비유로 바꾸면 되지요. 바꾸는 방법은 시간이 나를 분할시키면 돼요. 분할시킨다. 시간이 나를 분할시키는 거예요. 돔배기라고 경상도에서는 아는데 돔배기 무슨 뜻인 줄 알아요? 돔배기. 제사할 때 상어 고기를 돔배기라고 해요. 살점만 해서 제사상에 올리는 게 있어요. 그러면 물고기 모양을 돔배기 쳐버리면 네모 돼요. 시간이 뭐냐 하면은 칼이 되가지고 실제인 나를 분할, 돔배기처럼 잘라버려요. 자를 때 뭐로 자르느냐? 시간의 종말이 와서 심판이 와서 미리 나를 둘로 쪼갭니다. 둘로 쪼개는 게 뭐냐 하면은 시간의 종말이 시간은 아직 안 끝났는데 종말이 왔느냐. 시간이 벌서 끝났어요. 상속자의 등장입니다. 상속자의 등장.


이게 누가복음 20장 13절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이렇게 되어있지요.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요.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 보고도 여전히 자기는 자기만 챙기려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이건 뭐 타고났어요. 가르쳐준 것도 아니에요. 어릴 때 엄마 찾는 게 그게 가르쳐서 된 겁니까? 본능이죠. 모든 짐승도 새끼가 다 어미 찾잖아요. 그런 우리를 나는 비유야 이렇게 이야기할 사람 없단 말이죠. 시간이 나를 분할시키는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사랑의 아들의 나라죠. 자, 주님께서는 하나님 자기 아들을 인간들이 인간관계만 집착하는 이 세계에 보냈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떤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죠. 아들의 나라가 인간들에게 어떤 대우받았습니까? 추방되었습니까? 환영받았습니까? 추방되었지요. 그러면 인간들이 가는 천국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왜? 추방된 자만이 천국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인간이 가고자 하는 나라는 천국이 아니지요. 정작 천국의 주인공은 추방했다는 거죠. 따라서 인간은 천국에 못가지요. 갈수가 없어요. 왜? 추방된 분의 나라만이 천국, 아들의 나라, 하늘나라는 아들의 나라거든요. 그 아들은 인간하고 좋은 관계가 아니에요.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쫓아낸 그분 나라에요. 인간나라는 가고 싶지도 않고 갈 생각도 없고 가지도 못하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이게 상속자의 나라입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그렇게 짜고 한 거예요. 창세전부터. 이 모든 인간들 재끼고 누구에게만 상속자 준다? 아들에게만 팍팍 밀어주는 겁니다. 밀어주는데 인간들은 이 아들을 학대하고 죽였지요. 그럼 죽였다는 말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은 아들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이 본색이 드러나고 무슨 나라냐? 인간의 나라는 뭘 추구합니까? 인간의 나라에요. 인간은 인간의 나라를 원합니다. 아 대한민국을 원해요. 인간의 나라는 인간들을 원합니다. 인간의 나라에서 제일 작은 단위가 뭐게요? 가정. 인간의 나라에서 제일 작은 단위가 가정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행복은 뭐냐? 가정이 다복해야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게 뭐냐 하면은 인간의 집착과 추구가 거기 다 모여있어요. 그 가정을 위해서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 과감히 목숨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것도 타고난 거예요.


말로는 맨날 나 너 낳은 거 후회한다. 나가 죽어 나가 죽어 호적에서 뺀다 맨날 하지만 그게 집착이고 나는 산나물 무쳐 놓고 오롯이 둘러 앉아 재밌게 살자시던 어머니 보고파라. 여기서 누가 발을 뺍니까? 발 뺄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못 뺍니다. 교회 와서 찬송가 부르고 집에 와서 이런 노래 부르면서 눈물 흘리고 베개 막 축축 젖고 내가 남자인데 왜 울지 하면서 보면 어머님 보고 싶어라. 그리고 혼자서 서울에 자취하면서 보면요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 보면 내가 뭐하는 짓이지 내가 왜 이 동네에 있지 이런 거. 빨리 정착해야 될 텐데. 정착하다가 아가씨 하나 만나면 왜 저만치 가버리는 거예요. 또 달은 왜 그리 밝은지. 사람 일상사는 게 이 노래 세곡에 다 담겼잖아. 이게 빼고 뭐 있어요. 없잖아요. 무슨 복음이에요. 무슨 성경공부입니까 이게. 무슨 예수님을 찾아요. 구라를 쳐요 구라를.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0장 9절 (인간은 비유다) 231205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최소 단위가 가정입니다. 교회 나와도 후딱 어디로 갑니까? 집으로 가지요. 집이 반겨주니까. 교회 오래 있는 사람은 뭐냐? 집에 문제 있다는 뜻이에요. 집에 가도 재미없다 교회가 더 재미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노리는 것은 가정을 공격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삭입니다. 분노할 상황에서 그 분노를 터트리지 못하고 감수해야 될 사람. 자기가 믿어준 큰 아들에게 모든 재산이 돌아가지 못하고 상속되지 못하고 감히 아버지를 속인 야곱에게 모든 축복이 돌아갔을 때 주께서는 네가 그토록 집착하는 이 가정을 주께서는 파괴시켜버리죠.


그게 뭐냐 하면은 이삭 개인의 시간의 끝장남이에요. 인간은 자기를 비유로 보지 않고 실체로 봐요. 그러면 인간의 실체는 뭐냐?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그건 내 시간이다. 내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시간이 무슨 시간과 충돌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처음이요 나중의 시간과 이게 합치되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의 시간 보기에 여기 인간의 시간은 뭐냐 하면은 하나의 예수님의 시간을 드러내는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이걸 가지고 비유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주님의 이미지에요. 이미지. 이미지란 뜻은 언어가 되기 전에 있는 원형을 이미지라고 해요.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그러니까 이미지는 아무리 언어로 표현해도 이미지를 표현 못하기 때문에 언어로 이야기하면 비유가 돼버린다고요. 비유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쓰는 언어, 언어는 인간자체가 분할되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과 인간끼리 엮어보는 힘의 교류, 그걸 세력이라고 해요. 세력. 힘의 교류를 통해서 우리 인간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통용되는 단어가 언어에요. 언어. 문자란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이미 종말을 통해서 상속자에게 모든 것을 밀어붙이는 언어에요. 언어. 이미 상속자 한 분에게 모든 것을 밀어붙였어요. 그러면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하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으면 되게 심심하겠네 하지요. 예수님은 무엇을 인정받았느냐 하면은 아버지가 자기가 원하는 자를 선택한 것처럼 예수님 본인이 원하는 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예수님이 부여받았어요. 선택받았어요. 선택받을 때 주께서는 구원의 조건이 있습니다.


인간이 이 비유가 활성화 되게 되면 이게 실체가 되어버려요. 비유가 뭘 만난다? 말씀을 만나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의 공로와 만나고 구원의 효과와 만나 버리면 이 비유는 진짜 천국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시작을 비유에서부터 시작해야 돼요. 말씀이 나를 건드려줘야 돼요. 그래야 내가 아닌 천국에서 영생 얻는 나로 이게 탈바꿈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포도원 농부 비유를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은 비유니, 무슨 뜻이에요? 네 주제파악을 좀 해라. 너는 진멸의 대상이야. 본성을 이기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본성을 못 이깁니다. 인간이 인간을 찾는 이 본성을 인간은 이걸 타고난 건데요. 안돼요 안 됩니다. 안 되는데 주님께서는 이걸 이미지로 만들어버려요. 순간 순간 주님의 시간이 나의 시간에 와서 돔배기, 작살을 내버려요. 매순간마다 말씀으로 작살을 낸다고요.


그러면 우리의 시간은 뭐냐 하면은 우리의 시간은 인간관계란 내 시간은 뭐냐?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기대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요. 현재의 내가 소망하는 것을 어디서 이룬다? 내가 바라고 바라면 언젠가는 영화처럼 이루어질 것 같은. 노래 가사가 생각나네 부활의 노래. 인간은 바라는 게 기대치가 있어요. 그 기대치는 어디서 모델로 얻느냐 하면은 인간관계에서 남이 먼저 선점해서 가졌던 것이 그게 내 욕망의 대상이 돼요. 아 나도 참 좋은 차타고 싶어라. 나도 하루에 두 시간 일하고 한 달 수입 천만 원 그런 직업 없나 이런 거. 나도 좀 잘 생긴 예쁜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다 이런 거. 인간사회의 기대치가 나를 파탄 낸다. 기대치가 나를 파탄 내요. 돈을 원 없이 벌었으면 좋겠다 이런 거. 실내가 150m되는 집에 살고 싶다. 실내가 150m. 달리기해도 되겠다. 그걸 저택이라고 합니다.


이 기대치는 뭐냐 하면은 이미 먼저 기성세대에 먼저 있었던 그것이 나의 선택의 모델이 돼요. 내가 어느 직업을 가질까? 어떤 류의 남자나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할까? 나는 어떤 집에 살면 좋겠어? 이게 먼저 기성세대에 쫙 깔려있는 거예요. 그것이 나의 삶의 동력이에요. 모티베이션. 나의 살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에요. 주님 본받아 우리 십자가 지고 주의 길로 가자 아니 이건 전혀 동력이 안돼요. 누구 망하는 꼴 보려고 하나. 이 기대치를 하는 이유는 ‘나’라는 이 실체가 또렷하게 현실적 실체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고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나는 죽어도 허상이 아니다. 나는 죽어도 허무한 안개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농부들이 농사를 하면서 이 농부들이 기대치가 뭡니까? 언젠가는 이 포도원은 누구 것이 된다? 내 것이 된다. 내 것이 되어서 정착할 수 있다. 완전히 바벨탑 따로 없지. 이게 숨길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 이것과 그 다음에 뒤에 나오는 말씀. 누가복음 20장 22절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이런 대목이 나오지요.


자,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인간세계에서 최소 단위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최소단위? 인간과 인간관계망에서 최소 단위 가정. 그럼 최대단위 국가죠. 국가. 좋은 나라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안정된 나라에서 안정된 백성이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다. 이거잖아요. 그래서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기도할 때 뭐부터 나옵니까? 매뉴얼대로 하면 뭡니까? 당회부터 어린아이까지 뭘 기도한다? 우리나라 잘 되기를 하지요. 이 모든 것이 뭐가 아니다? 허구가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이게. 이게 허구가 아니다 란 뜻이에요. 이게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나 어릴 때 고향의 꿈이 잘 사는 나라가 됨으로서 달성이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있다는 것을 몰라요. 세력. 힘. 힘이 여기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힘을 얼마나 무서운 힘인지를 몰라요. 그게 성경에서 아주 친절하게 나와요.


이 힘에 대해서 아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힘에 취해서 힘 속에 있으면서도 힘을 못 이기는 인물이 등장해요. 누구냐 하면은 바로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 이야기를 잠시 해드리겠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원래 자기가 총독인데 AD 26년에서 36년까지 통치한 사람이에요. 원래 본가는 바닷가에 있어요. 지중해 바닷가에 있어요. 가이사랴에 있어요. 가이사랴에 있는데 유월절 되게 되면 유월절 날 종교에 미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되면 로마 당국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어요. 진압하는데. 그러니까 책임추궁이 들어가요 총독에게. 따라서 자기 행정적 책임을 다 해야 된다고요. 이태원에 가가지고 무슨 축제입니까? 할로윈. 할로윈 때 경찰서장이 상주해 있어야 돼요 그게.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가 공간이 따로 있어요.


거기 있을 때에 밤중에 자기가 귀찮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와가지고 어떤 죄수를 잡아와요. 죄수를 잡아와서 이 사람 좀 처벌 좀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가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불러놓고 하는데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데 나한테 왔느냐고 물어요. 그러니까 장로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이래요 이러거든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그럼 그거 말고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내 소관 아니잖아. 아 귀찮아 죽겠네. 너희들 법대로 이 사람 처리해. 그렇게 하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죽이지는 못하잖아요 이렇게 나오거든요. 죽이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또 자기 아내한테 전갈이 왔어. 여보 밤중에 꿈자리가 사나워가지고 아마 지금 당신이 심문하는 그 사람 때문에 그런 것 같으니까 대충하고 풀어줘라. 나 너무 힘들었다. 그 사람 의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나도 그런 생각이었어. 그래가지고 본디오 빌라도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풀어줄라고 그렇게 애를 써요.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 바깥에 떠드는 소리 봤지? 나는 당신에게 풀어줄 권한도 있고 내가 당신 죽일 권한도 있는데 이 말을 예수님한테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은 나 당신 풀어줄 마음이라는 뜻이에요. 대충하고 가자 그 뜻으로 그 이야기한 거예요. 나한테 잘 보여라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지금이라도 천사가 와서 나 풀어줄 수 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인데 그것은 바로 내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이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가 무슨 말인지 나는 모르겠고 본디오 빌라도가 수를 부려요. 양쪽 다를 만족시킬 수 있는 타협점을 한 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죽이는 대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아주 모진 고문을 하고 때리는 거예요. 채찍으로. 그걸 공개적으로 때리면서 누굴 의식하느냐 하면은 고소한 그 유대인들 권력자를 유도해가지고 마구 때려요. 때리면서 됐냐 이 정도 하면 됐지? 너희 만족했지? 너희 유월절 풍습 보면 한 사람 풀어준다는 풍습 있잖아. 내가 때릴 만큼 때렸잖아. 너희들 원한도 풀렸잖아. 대충 끝내자 쫌. 그냥 끝내자. 로마에 사람을 죽여도 죽일만한 게 있어야 죽이지. 이러다 나한테 책임추궁 들어간다 그러니까 당신들 원하는 거 때릴 만큼 때렸다. 내가 조롱해줄게. 가시 면류관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혔어요.


그건 뭐냐? 예수님을 의식하는 거예요. 봐 당신들 보기에 내가 이렇게 모독을 줘도 그 사람 아무소리 못하잖아. 너희들 유대인 왕이라고? 내가 보기에 변변치도 않아 이 사람은. 내가 모욕을 줘도 아무 소리 안할 정도로 아무 가치 없어 이 사람들아. 그러니까 죽이지 말고 그냥 좋게 때리고 그냥 풀어주자. 너희들 명절에 한 사람 풀어준다면서. 이 예수님 풀어줘라 이렇게 하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합니다! 살인강도를 원합니다! 이것들 미쳤구나. 사람 죽인 살인강도를 왜 풀어줘. 아무 죄도 없는 이 사람 두고. 선언합니다. 이 사람 아무리 봐도 죽을죄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난 이 사람을 풀어줍니다 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어요. 우우우~~~~~ 민중이 일어나버렸어요.


당신이 지금 예수님을 풀어주게 되면 우리는 왕에게 고소할겁니다. 당신도 로마 왕 밑에 그 세력권 안에 있잖아. 우리의 왕은 오직 가이사랴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고 뭐고 없어요. 우리는 가이사랴 밖에 없습니다. 하여튼 유대인은 마음을 합해서 예수님을 기어이 죽이겠다는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을 하면서 정말 당신 독합니다. 이 사람 당신들 요구대로 죽일 건데 이 죽인 죄에 대해서는 나는 죄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 우리한테 돌려주세요. 우리가 감당할거에요. 보니까 이 사람들이 미친 거에요. 아무것도 아닌 뺨을 때려도 그냥 참고 있고 모욕을 해도 그냥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못 죽여서 잡으려고 환장을 했는지 나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죄는 당신들이 뒤집어써야 돼요. 그래! 좋습니다! 타협을 본거예요.


해놓고 마지막 자존심이 뭐냐? 나 이 사람 십자가 달 때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식을 하라. 그러니까 유대인 지도자들이 또 달려들어요. 거기에 글자를 하나 더 쓰세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세요. 자칭. 나는 나 쓸 거 썼다. 마지막 총독으로서 권력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그것조차 너희들 맘대로 할 줄 알아? 나는 안 해. 나는 여기서 손 뗐다는 증거로서 나는 자칭 유대인의 왕 아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어요. 죽게 하고 이 소동이 일어나는데 이쪽 예수님 편의 소동도 고려해야 돼요. 어떤 사람이 총독님, 예수님이 평소에 자기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 시체를 가져가서 살아났다고 조작을 할 거니까 군인 배치해가지고 경비 세워가지고 시체 없어지지 않도록 밤새 보초 서주길 부탁합니다. 좋아 좋아 그렇게 하지!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에 허가 하에 본디오 빌라도 군대가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본디오 빌라도마저 어느 세력을 못 이깁니까? 어두음의 세력을 못 이기죠. 어둠의 권세에서 뭐로 바뀌었다? 무슨 나라? 아들의 나라. 골로새서 1장 13절. 어두움의 권세 어떤 한 인간도 어두움의 권세에서 총독이라는 사람도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요. 단 한명도 예외가 없어요. 로마의 가이사랴는 어둠의 권세입니까 아닙니까? 어둠의 권세죠. 요한계시록에서 심지어 모든 왕들은 어둠의 권세의 하수인들이에요. 이걸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 세상이 어두움의 권세죠. 어둠의 권세는 뭐냐 하면은 인간의 각자의 시간을 개인의 시간들이 흐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면서 다 이루었지요.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다 이루었다.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것은 주님의 시간이 따로 있어요. 주님의 시간을 다 이루어서 이 어둠의 권세에 있는 모든 등장인물들 있잖아요. 본디오 빌라도, 장로, 바리새인들 환호했던 군중들 죽이라! 모든 죄는 우리가 알아서 다 뒤집어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당신은 사형만 내리소서 하고 하는 그 모든 역학을 했던 그러한 사람들, 이 시간이 전부 다 뭐냐? 전부 다 분할해버려요. 분할해버리면 모두 다 각자의 하나의 이미지로서 제 역할을 다한 거예요. 역할을. 악마는 악마역할, 왕은 왕의 역할, 본디오 빌라도는 본디오 역할, 모든 역할을 다 한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 당시에 그 바리새인들 쪽에서 제사장들 쪽에서 책잡기 위해서 예수님을 정탐꾼을 보내가지고 가이사의 세금을 주느냐 마느냐 하는 그 질문을 하는 역할도 무슨 역할입니까? 하나의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한 하나의 관계망 속에서 이미지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들도.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인간이 움직이는 동기는 기대치. 기대치와 기대치의 비교, 대조가 인간의 삶의 활력소가 돼요. 삶의 활력소. 애들 학원은 왜 보냅니까? 기대치와 기대치의 비교, 대조가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이 전체가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몰라요? 본인은 모르죠. 몰라요. 그런데 이 어둠의 권세마저도 누구 권세 안이냐 하면은 주님의 권세 아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상처가 나보다 먼저. 자, 예수님의 상처는 어디 나와 있느냐 하면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 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만날 때 정답게 악수하면서 만납니까? 어떻게 만납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요.


창세기 3장 15절 한번 보세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뱀 보고 이야기하죠. 뱀의 후손이 뱀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뱀의 후손은 마귀입니다. 마귀보고 이야기해요. 그럼 여기서 하나님의 만든 이 각색 드라마의 이미지가 아니고 주인공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과 누구밖에 없습니까? 악마밖에 없어요. 둘 다 눈에 안보여요.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실체가 벌여놓은 이미지 세계, 이게 오늘날 현실세계입니다. 현실세계죠.


이 세상에 보면 이미지 세계 속에 비유의 세계 속에 예수님은 어떻게 나타는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죠. 그리고 십자가 누가 사형인도 했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죠. 마리아도 비유고 본디오 빌라도도 비유고요.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채 뭐가 됩니까? 임신이 되어버리죠. 성령으로 잉태해버려요. 그러니까 누가 황당하느냐 하면은 마리아 본인이 황당해요. 왜냐하면 사람이 이미지가 되고 누구를 위한 비유가 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의 삶의 동력, 기존에 있는 것과 욕망의 대상으로 내가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삶의 활력소 동력이 써먹을 데가 없어요. 이게 써먹을 데가 없는 거예요.


복음 아는 사람들이 저한테 자주 질문하는 것이 이거에요. 목사님 그럼 기도 뭐 해야 됩니까? 뭘 위해 기도해야 됩니까? 기도할게 없네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내 상태는 내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 내 상처는 내 이전에 먼저 있었으며 약속이 먼저 있었으며 상처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걸 똑같이 성도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성도가 마리아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는 상투적인 말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상처를 위하여 우리가 마리아가 태어난 거예요. 복음은 십자가지 예수님의 존재성이 복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 자신이 하나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한 비유로 쓰여지고 있다는 내용이 거기 합류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예수님이 복음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새로운 타자, 타인으로 생각해서 자꾸 의지하고 믿으려고 해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거는 구원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예수 믿게 되면 결국은 돌아서 순환되어서 누굴 믿게 돼요? 예수 믿는 것을 누가 믿어요? 예수 믿는 나를 누가 믿어요? 내가 믿게 되잖아요. 그거는 내 시간이 분할되지 않았던 거예요. 내 시간이. 내 시간이 도중에 돔배기처럼 주님의 시간에 짤려야 돼요.


예수님이 묻습니다. 너는 왜 나를 믿으려고 하느냐? 구원받기 위해서 믿으려고 합니다. 성경에 네가 구원하는 게 어딨어.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겠고 있잖아요. 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에 주께서 약속했잖아요. 그렇게 나와요. 지금 인간은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자기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모르는 채 자기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주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채 자기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시간달성과 목적달성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활용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누구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어요. 여호와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똑같은 짓을 교회에서 하고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천국은 무슨 나라? 아들의 나라. 아들은 이미 인간에게 추방된 사람이에요. 천국 근처도 못갑니다. 본인이 추방했는데요. 모든 죄는 누구한테 하겠다? 우리에게 돌리소서. 이미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그 돌리소서 하는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뭘 믿는 사람들이에요? 여호와를 믿는 사람이죠. 여호와를 믿는 사람의 특심, 특심이 있어요. 특심으로 믿은 사람 누구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 누굽니까? 바로 사도 바울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잖아요. 스데반 죽일 때 자기가 준책임자로 참여했지요. 자기가 이거는 사도 바울은 내가 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 보면 이것은 내가 그렇게 한 것은 주의 은혜가 되는 거예요. 기가 막힐 일이에요. 기가 막힐 일.


나도 스데반 죽이는 것도 하나의 역할이었다는 겁니다. 어떤 역할? 죄인의 역할. 이게 뻔뻔스러운 건지 이게 되바라진 건지 아니면 지독한 자기변명인지. 인간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이 말과 이 말의 차이점을 한번 이야기해보세요. 수동적과 소극적의 차이점. 목사님 말 대로면 기도할 것도 없네. 자, 수동적일까요? 소극적일까요? 소극적이죠. 수동적과 소극적의 차이는 자기 방어에요. 정신적인 자기 방어 기제. 메커니즘.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에 주의 주권사상, 주께서 다 하셨는데 나 뭐 할 거 뭐가 있는데 나는 그냥 누리기만 하면 되지. 이게 뭡니까?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고 나 건드리지 마라. 주께서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하니까 그냥 내가 그냥 살렵니다. 자기 방어 모습이죠.


수동적은 뭐냐 자기방어 아니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예속됨의 기쁨이에요. 고마움이고. 시켜만 주이소. 시켜만 주이소 하는 것은 수동적이에요. 소극적은 뭡니까? 나 복음 잘 아니까 더 이상 나한테 이거 하라 저거 하라 시키지 마세요. 수동적, 소극적 우리는 같은 뜻인데 따져보면 뭡니까? 서로 대비되고 반대되는 거예요. 소극적은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은 자기 정당성에 관심이 있어요. 자기 정당성에. 다 주의 은혜인데 나 탓하지 마세요. 나 은혜로 알고 있습니다. 다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이거고 수동적은? 얼마나 내가 모든 것이 다 죄가 되었으면 주께서 나를 꼼짝 마라 해야 주의 일이 되는지를 감사하는 거예요. 기도하고 헌금한 게 뭐가 되기 때문에? 죄가 되기 때문에. 나한테 맡기지 않고 나를 주께서 마음대로 쓰시는 겁니다.


다시 누가복음 20장 돌아오겠습니다. 17절 봅시다. 가이사랴 다시 한번 정리하고 갑시다. 인간은 어느 아래 있다? 세력권 안에 있다. 인간은 세력권 안에 있다. 인간이 어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의 주님의 십자가의 비유에 해당되지 않고 내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이 세력에 어떻게 버텨보겠다 내가. 본디오 빌라도도 마찬가지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했던 당신 우리 말 안 들으면 누구한테 고소한다? 나 당신 왕한테 고소할거야. 저 사람 예수가 우리 왕이 아니라 가이사가 우리의 왕입니다. 잘 보일려고 했지요. 여호와가 우리의 왕이다라는 말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서는 가이사가 우리의 왕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본디오 빌라도를 압박을 하기 위해서. 그 참 신기하지요. 그 마누라 꿈에 뒤숭숭해가지고 저 사람 관여하지 말라고 의도적으로 그 요소가 개입되는 것도 희한하지요.


이 말은 뭐냐? 아무리 마누라가 꿈자리 이야기해도 정작 본디오 빌라도는 어둠의 권세에서 탈피할 수 없는 어둠의 권세로 움직이는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악한 권세. 그 악한 권세가 있어줘야 무슨 사건이 일어납니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요. 십자가 사건. 마귀가 배후에 있는 실체 아닌 척 숨어있는 마귀를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 전할 때 마귀는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있어요. 본색을 드러내면 드러내면 드러내면 되는데 왜 드러내야 되는가? 그게 17절에 나옵니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 말은 숨지 말고 나와 이런 뜻이에요. 숨지 말고 나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어떤 학교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부잣집 애가 망나니 애가 가난한집 애를 돌로 쳤다. 팔을 부러트렸다. 그런데 누가 봐도 부잣집 애가 망나니처럼 행동해서 나쁜 짓 했다 이렇게 하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아요. 가난한 집 엄마가 애 혼자 키우면서 저 부자 돈을 얼마나 빼낼 수 있는가를 전략을 꾸민 거에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 부잣집 망나니라는 점을 노리는 겁니다. 노리고 일부러 약을 올리는 거에요. 성질을 게이지를 확 올려요. 팔 부러트리고 돌로 칠만큼 분노를 자제할 수 없을 만큼 약을 올리는 겁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어떻게 합니까? 망나니 애니까 성질나서 패버리죠. 그걸 의사 진단서까지 첨부하고 팔 깁스하고 경찰에 안갑니다. 경찰서에 왜가요. 경찰이 돈을 줍니까? 안가지요. 안가고 어딜 가느냐? 부잣집 부모를 찾아가는 거에요.


너 한 짓이 나한테 고스란히 담겨있지 증거로. 그러면 부잣집 재벌 마나님이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사과하거든요. 사과는 됐고 사과 받으러온 거 아니고 큰 거 세 장만 내놔. 큰 거 세 장. 치료비 2천만원에다가 정신적 보상 2억8천만원. 합해서 큰 거 석 장만 내놔라. 맞은 돌이 이제는 뭐 할 판이다? 때린 쪽을 돌로 칠 판이다. 그게 주님의 전략이에요. 너 내 발꿈치 물었잖아. 네 머리 내놔. 작살을 내버릴테니까. 잔챙이 인간들은 빼고 이야기해요. 잔챙이 인간들 빼고. 비유에 해당되는 인간들 빼고 어둠의 권세들 빼고. 권세자 네가 나와. 권세자. 모든 왕들 조정하는 권세자 네가 나와. 본디오 빌라도 말고 가이사 말고 더 쎈 거 나와. 참 이런 도박은 우주의 운명을 걸고 하는 도박이에요. 주께서 하시도록 우리는 주님 앞에 예속되면 됩니다. 참 성도 살기 편하지요. 주께서 얻어맞았잖아요. 이제는 누가 얻어맞으면 돼요? 누가 팔 부러지면 되죠? 우리. 우리가 팔 부러지면 돼요. 머리 깨지고.


갈라디아서 5장 한번 보겠습니다. 5장 10절,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뭘 받는다? 심판을 받으리라 라고 하면서 갈라디아서 6장 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내가 내 몸에 뭐가 있다고요?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했지요. 그 흔적이 뭡니까? 십자가에요. 아 이게 어려운거에요. 자,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예수님의 흔적은 어떤 흔적입니까? 이게 진짜 어렵지요. 내가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그 핍박한 나를 누가 구원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한 거예요. 구원할 때 구원의 매체가 뭐였는가요? 6장 14절 그 매개체가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


제가 아까 예가 팔 부러지고 폭력을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흔적은 폭력이 아니고 죄인마저 용서하시는 거예요. 죄인마저. 그러면 유대인들의 율법관은 뭡니까? 죄지은 자는 어딜 가야돼요? 지옥. 그리고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천국.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와 바리새인 기도하는 대목 나오지요. 정확하게 그들의 구원관이 나오잖아요. “내가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잖아요. “간음하지 않고” 이렇게 되어있죠. 주님의 구원은 뭡니까? 간음한 여인을 구원하지요. 이게 흔적이에요. 다윗의 흔적은 뭡니까? 내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내가 죽였다는 그 흔적이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언약의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이미지가 되는 거예요. 역할이 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또 목사님 우리는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는데요 하거든요. 참 내. 성령을 받은 성도가 평생 아직까지 안 죽고 살아있는 이유가 뭡니까? 그보다 더한 죄와 연류되어 있는 거예요. 더한 죄가. 죄가 뭐 간음 그런 것만 죄가 있어요? 그것만 죄가 아니에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죄고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고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도 죄고 맹세하는 것도 죄고 심지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도 뭐다? 죄가 되는 거예요. 그게 다윗 죄 못지않은 죄입니다. 모든 율법에 하나라도 어기면 다 죄 짓는 거에요. 이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뭘 받았다? 용서를 받았는데 뭐로 용서한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했다. 피로. 이 흔적을 가졌다. 이 흔적을 건드린 자는 뭘 받는다? 재벌 3세라도 큰 거 석 장. 석 장뿐이 아니겠죠. 지옥가야 됩니다.


주님의 시간에 의해서 스스로 먼저 시간의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이 성도에요. 성령은 종말이 돼야 와요. 요엘서에 보면 마지막 때 성령이 와요. 그럼 성령이 왔다는 말은 그 사람한테는 이미 더 살아봐야 신분상 달라질게 없어요. 이미 성령이 와버리면 이건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이미 천국이에요. 왜? 주의 영이니까. 부활의 영이니까. 이미 온 거예요. 그럼 왜 안 죽이느냐? 왜 안 죽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관계망 속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역할을 해야 되기 때문에. 주님의 역할을. 그래서 대구강의제목이 뭐였던가요? 송장의 할 일. 송장이기에 하는 일이 바빠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굉장히 바빠요. 그리고 송장의 할 일의 특징이 뭔지. 뭐든지 고맙게 여기고 한다는 것. 궁시렁 궁시렁 대고 내 주제에 이런 거 못하는데 하지 않아요. 심지어 마리아는요 동침도 하지 않았는데 임신했어요. 여러분 그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욕 다 얻어 먹을 건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얼레리 꼴레리 할 텐데.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안 됩니다. 소극적으로 해서 안돼요. 예속되어있기 때문에. 수동적이기 때문에 되는 거예요.


일체의 자기방어 자체를 주께서는 날려 보내버립니다. 매순간. 매순간 내 시간에다가 주님의 시간, 이미 끝났잖아 끝났어. 주님 이것만 잘되면.... 시간을 기대하지 마. 네 시간은 이미 다 소비해서 너의 끝에 네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까지 다 줘버렸다. 이제는 네 시간은 없어. 너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내 시간, 십자가와 더불어 증거하기 위해서 뭐든지 죄가 되는 그 일만 그 역할만 남아있다 이 말이죠. 이 세상은 주님의 거대한 단일체에요. 단일체.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다 이해하고 다 받아들였다 합시다. 다시 한번 우리 본성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왜 우리는 매사에 주님을 밀어버리느냐? 오늘 강의 들었으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왜 매사에 우리는 주님을 밀어냅니까?


그것은 무슨 관계가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겁니까? 인간 대 인간관계. 이것이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 죄송합니다만은 예수님은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요. 그때 쥬스 한 박스 들고 찾아갈 테니까 주님은 내 인생에 너무 깊숙이 개입은 하지 마세요. 내가 힘듭니다. 나는 지금 나는 뭘 원하느냐? 산나물 무쳐놓고 여럿이 둘러앉아 어머니 보고 싶어요. 내 인생 정착하고 싶어. 그만 돌아다니고 안정적인 인생 살고 싶어. 어느 교회 목사해가지고 편하게 월급 따박따박 나오고 끝나면 삼분의 일 연금 나오고 교회에서. 그런 거 하고 싶어요. 그래가지고 놀러도 좀 다니고 지중해 가가지고 크루즈 여행하면서 빠라라 바라라라라~~~산토리니가서 좀 놀고. 그동안 주의 일 많이 했으니까 나도 좀 쉼을 얻겠습니다. 주님 안 믿는 게 아니고 믿을 테니까 좀 이렇게 좀 나가주실래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뭐라고 한다고 했죠? 악하고 음란한. 더러운 거하고 즐길라고 음란이거든요. 매사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거기에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 죄, 그리고 너의 죄를 만남을 통해서 거기서 노출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인도해주십니다.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친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포도원의 농부 딱 누구다? 딱 우리 얘기잖아요. 정착하고 싶다. 나는 사람하고 같이 으쌰 으쌰 하고 싶다. 그게 나의 잠재되어있는 본성이며 이 본성은 내게서 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과천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뭐로 구원받습니까? 십자가 피로 구원받아요. 그 피가 저와 여러분들의 흔적으로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끝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게 되게 되면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없어요. 왜냐? 하나의 다루어지는 연극단원이거든요. 연극단원. 연극주인은 주님이고. 단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역할에 충실하게 해주신 것, 나의 다른 기대치보다도 주님께서 원해서 일으킨 일에 대해서 고맙고 새로운 감사와 새로운 고마움이 늘 새롭게 등장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너무 세상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남들처럼 잘 살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겠습니까? 건강하겠습니까? 복 받겠습니까? 그것이 삶의 동력으로 살아왔던 것, 그게 다 안개 같은 허구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저희들 이제 알았사오니 주님만 실제로 힘주시고 주의 역할만 하는 주님의 종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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