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기억!

내부 전쟁

아빠와 함께 2024. 2. 9. 19:25

 

(엡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에 있어서, 이스라엘 안에 갖추어야할 틀-이스라엘 백성을 네 진영으로 나누고, 열두 지파를 동남서북 사방으로 분산시키고, 그리고 각 면, 즉 외부의 적과 접하는 일종의 막인데, 그렇게 열두 지파를 배정해놓았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움직이신다. 그렇게 해서 움직이면,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방민족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는민족)이다.

그들의 신은 당연히 우상이 되는데헛된 신, 즉 아무런 내용이 없는 신이다. 그 신의 내용은 과연 누가 채우겠습니까? 인간의 야심과 욕심이 그것을 채운다. 참된 신의 내용은 하나님 쪽에서 채웠기 때문에, 틀어지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있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그 신은 인간에게는 배제를 당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배제를 당할 것을 아시면서 그 내용을 채우신다. 그것으로 인한 최초의 사건이 바로 살인사건이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스라엘을 이방민족 전체가 다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 내부에 열두 지파가 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분으로 한 지파를 남겨두었다. 진영의 가운데는 언약궤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는 상자다. 그 상자주위에 또 하나의 띠를, 즉 막을 형성하는 지파가 있는데, 그게 레위지파이다.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언약궤에서 나오는 특수한 죽음, 즉 언약궤가 특수한 피를 흘리면, 인간들에게 있는 피와 특수한 피를 구분하는 기능인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 레위기 17장을 보시면서, “피가 같은 피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감 잡아야 한다. 희생 제물에서 나오는 피, 특정 장소, 즉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잡는 특정 피와 그 외의 피를 날카롭게 구분을 짓고 있다. 특수한 피와 일반 피.

그러니까 이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특수한 죽음의 피, 그 피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육체에 가지고 있는 피로부터 아주 냉혹하게 접근을 금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전쟁은 결국 뭐냐 하면, 그것은 내부 전쟁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는,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싸운다라는 것인데, 그러나 이방민족과 싸우는 것이 이스라엘의 목적이 아니다. 이방민족은 허수아비이고 들러리일 뿐. 진짜 본격적인 싸움은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의 특수한 생명을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내부 전쟁에서 패배해서 궤멸을 당할 것인가?” 라고 하는, 그 내부 싸움이다. 그것이 진짜 싸움안데, 이 내부 싸움에서 실패하게 되면, 그 특수한 피가 이방민족을 작살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외부로 나가기 전에, 먼저 내부 전쟁부터 철저함을 기하면서 열 세 지파를 만들어서, 거기서 하나의 지파를 열 두 지파로 하여금 보초를 서게 한다. 여기에서만 생명이 나오고 다른 쪽에는 생명이 없다라는 것인데, 즉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고, 죽은 목숨이다. 그러면 생명과 죽은 목숨과의 차이를 남기게 되는데, 그런 차이성을 위한 전쟁을 하나님은 염두에 두셨다.

 

이렇게 평면으로 하면 여러분이 잘 모르니, 제가 손으로 위로 당겨보겠습니다. 그러면 평면이 수직이 되는데, 수직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이렇게 수직적으로 당겼으니, 가운데가 쏙 올라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일 정점에 언약궤가 있고, 여기서 피가 중력에 의해서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 落水效果) 라는 이론이 있다. 이것을 여기 민수기에 적용시켜봅시다. 피가 위에서 내려올 때, 그렇게 피가 내려오게 되면, 사람들은 이 거룩한 피와 자기가 살고자 하는 목숨과의 극렬한 차이를 보여주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차이를 보여주면서, “아하, 중요한 것은 언약궤의 피이고, 내 생명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민 3:39)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 명이었더라

(민 3: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민 3:13)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핵심부분은 누가 유월절 양과 교체해서 살았는가?” 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규정하겠다고 하신다. 그러한 규정을 위한 레위인의 숫자가 339절에 보면, 그것이 이만 이천명이다.

(민 3:43)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었더라

이것은 일대일 대응인데, 쪽수 맞추기. 레위지파의 숫자와 그 레위지파를 대신해서, 즉 레위지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로서 태어난 자들은, “유월절의 취지가 아직 이스라엘 내에서 움직일 때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된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열두 지파는 하나의 경비부대고, 중요한 것은 레위지파와 그들 목숨과의 차이를 이스라엘이 느껴야 한다.

온전하게 위에서 내려오는 낙수정책에 의해서, 즉 언약궤로부터 내려오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자들, 즉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 태어났다. 여기에서 레위지파는 이만 이천명이고,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의 수는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다.

그렇게 해서 쪽수를 맞추는데, 그런데 왜 이것이 딱 맞지 않는고 하니, 이게 딱 맞지 않아야 쪽수가 맞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나머지 273명을 위해서, 여기 46,47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민 3:46)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삼 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민 3:47)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그러니까 이 차이나는 273명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쪽수가 맞다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즉 새로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에는, 레위지파가 일하는 직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 레위지파가 어디에서 일을 합니까? 그게 성소라는 말이죠. 성소의 존재가 새 생명과 관련성이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숫자를 맞는 듯 아니 맞는 듯, 맞는 것 같은데 약간 다르게 해놓았다. 그 약간의 다름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의도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샘플로 뽑는 것은 전체를 대표한다. 그러니 이것은, “이 성소의 존재가 현재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샘플이 된다라는 것인데, 달리 말해서, 전쟁의 성패는 지금 이스라엘의 내부 전쟁이 제대로 원활하게 돌아가느냐? 마느냐?” 라고, 그렇게 된다. 그 나머지 이방민족은 전부가 좀비와도 같은데,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이것을 "붙이시는 전쟁"이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같이 있는 자들이 아닌, 그 나머지는 좀비로 본다. 기다려봐. 너희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게 생명인지 아니면 그냥 죽을 목숨인지, 내가 확인하겠다라고 하시는데, 즉 이스라엘을 만드셔서 확인에 들어가신다  그래서 그것 봐라. 죽었잖아라고 하시는데,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

 

 이 군대 진영이라는 것이 무기가 되고 마는데,  단일 무기’  즉 무기가 딱 하나밖에 없다 . 왜냐하면 언약궤가 하나이니까.  그게 에베소서의 전쟁과  연속이 된다.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가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가 되어야 그것이 무기라는 말이죠. 우리의 구원은 없는데, 다만 무기로 사용될 뿐이다.  

우리가 이미 했듯이, 단 하나로 통일이 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죠. 성도는 언약의 무기에 집결하면서 철저하게 자기 안에, 나는 나밖에 모른다라는 자기 안에 주님의 하나가 들어와서, 여기서 틈, 그 차이를 인정하는 내부 전쟁의 연속성을 가지고, 그것을 에베소서 6장에서는 전신갑주라고 한다.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진리의 허리띠를 띠게 되면, 이것은 하나가 되는데, 즉 독수리 5형제가 된다.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예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이것들이 다 어디서 온 것입니까이것은 자기 게 아닌데, 자기 안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다.. 그러면 어떤 사람만이 이것이 쉽게 용납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곧 주님과 자기 사이에 차이성을 발견한 사람이다. 차이성.그래야 내부 전쟁에서 자기가 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종속되고, 주님 앞에서 패배자가 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주님과의 밀착된 결합력이 유지가 되고 하나가 될 수 있다. 나와 너 사이에 학력, 인품, 수입, 계층, 남자, 여자 등등, 그런 것에 관계없이 똑같은 것을 뒤집어썼다라고, 그렇게 된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 옷을 입은 대상을 보니까 모두가 다 다르다 다만 그들에게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사실, 그것이다.이것이 민수기 3장에서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쟁의 형태다. 이 세상은 이미 좀비라는 것을,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전쟁이다.  

배는 이미 좀비 배인데, 그렇게 좀비들이 타고 배는 지금 침몰하고 있는데, 거기서 성공을 하겠다고 하면서 빈대처럼 바닥에 딱 붙어있다. 이쪽의 특수한 피 쪽과 저기 쪽과의 차이가, 그것이 불연속적으로 갇혀있다.완전히 막혀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막혀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여호와를 부르고 해도, 우리 쪽에서 올라가는 것은 위쪽에서 차단해버린다. 그래서 위에서부터 내려오는데, 그것도 완료된 상태에서 내려온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도바울은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난입한 천국에 의해서, 성령의 영역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십자가의 피에 의해서, 내 피를 보존하는 것, 내 목숨에 연연하는 것을 두 동강내는 일이 있었다라는 것인데, 그것을 전에는라고 한다.

 나는 의당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하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로소 주님에게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그러니 자기 안에서 내부 전쟁을 겪은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천국백성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보여주는데, 즉 내부 전쟁이다. 자기도 어떻게 감당이 되지 않는데, 자기 인생이라고 여겨서 전에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감당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자기 인생도 아니고,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바울을 샘플이 되게 하시는 것인데, 마치 옷가게에 전시가 되어있는 마네킹과도 같다.철에 따라서 옷을 갈아 입히는 마네킹인데, 즉 쇼윈도에 내세우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사도로서 우리 앞에 등장시켰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인데, 하지만 내가 입은 전신투구를 봐라. 이것은 나의 구원용이 아니야. 주님이 하시는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나를 불렀다라는 것인데, 그것이 디모데전서 1장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그렇지 않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한번 보세요. 이게 디모데전서 1장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뭐냐 하면, “나는 폭행자요 핍박자다라고 해서 무엇이 강조되었느냐 하면, “내가 주님을 핍박했다라는 쪽으로 강조를 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더욱 더 심화가 되어서, “그것마저도 내가 한 행위가 아니었다라고 한다.

이것은 주님이 스스로 자기를 친 것인데, 마치 킹콩처럼 말이죠. 킹콩이 “우갸갸갸” 라고 하면서 자기 가슴을 친다. 이것이 뭐냐 하면, 민수기 구조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가지고 가서, 자기 내부에 불연속성으로, 즉 주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자기 안에 내부 전쟁을 먼저 일으키고, 그 내부 전쟁을 바깥으로 전개시키는데, 그것이 비밀이고, 역사 속에 확장되는 원칙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나의 전쟁’ 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즉 라면을 끓인다고 물을 얹어놨다가 물이 넘치는 것까지도 전부 주님의 전쟁이다. 소소한 것, 정말 하찮은 것까지도. 그래서 아들이 수능시험을 망친 것은 너무나 하찮은 이야기고, 또한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도 역시 너무나 하찮은 이야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장사지내게 하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대단한데,  그러나 주님은 “그게 대단해? 그것은 네 명예와 가문의 싸움이잖아. 너의 싸움이란 말이야. 하지만 지금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너의 전쟁과 너를 불연속적으로 끊어내기 위해서다” 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는 전쟁은, 이 민수기 3장의 구조에 의해서, 즉 단일 무기에 의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키는 전쟁과는 차이가 나야한다. ‘내부 전쟁’ 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되는 것은 주님의 적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여러분에게 누가 묻기를, “너는 뭐야?” 라고 한다면, “나? 나는 적이야” 라고 하면 된다.. “나는 적이다. 주님의 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 마을을 보고 너는 뭐야?” 라고 하면, “저는 이단인데요라고 하면 되는데, “, 이단이지?” 라고 하면, “어떻게 알았어라고 하면 된다.

 

교재에 “성령이 오셨다. 십자가를 반복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그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음을 알려주신다라고 되어있는데, 누가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까? 바로 예수님이다..

계속해서 새삼 추가시킬 신비는 없다. 그저 고귀한 거짓말만 제시하신다. ‘출현된 어리석음에 우리 정신이 부딪쳐 깨어지기를 요구하신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낳겠다는 것이다라고 되어있는데, 그게 어디 안에서 그렇다는 겁니까? 그 배태하는 장소가 ‘우리 안’ 이라는 것인데, 즉 죄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집어넣는, 그런 낙수원칙을 적용시키신다 

 

다시 말해서, 언약궤의 피가 현재 네가 보존하는 네 생명과의 차이성을 두면서, 너는 이제 유월절을 대신해서 목숨이 바뀐 새로운 생명을 출현시키는 전쟁에 초대를 받았다그러면 우리는 정들었던, 우리 목적과 삶의 희망으로 삼았던 이 좀비의 세계와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이제 헤어져야 한다. 바로 그 전쟁이다자기와의 내부 전쟁이다.

그래서 내가 살아도 내 것이 아닌데, 그런데 나는 사나 죽으나 나의 구원만을 추구했구나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했는지 모른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교회에 다니고 복음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이고 마귀의 짓이었는지,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복음을 사랑합니다라고 해놓고는, 그렇게 우회해서 결국 노린다는 것은 나는 천국에 가게 되었어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주님과 나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없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언약궤 바깥에서 기다려라.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 위에서 성령을 흘려 보내줄 게 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그 무기가  오직 하나밖에 없는 단일 무기. 그야말로 독수리 5형제인데,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이죠. 새 생명인데, 주님께서 주셨다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에게서 무기를 들어낸다고 하면, 주께서 진리의 무기, 전신갑주를 벗겨내면, 우리는 똑같다는 말이죠. 불신자도 자기가 죽어서 좋은 곳에 가길 원하고, 우리도 천국에 가길 원한다. 그런데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은 것은, 주님이 혼자 단일체로, 즉 통일체로 만든 그 무기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좀비는 주님 세계에 허락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그러니 이 세상 노래들을 따지고 보면, 그것이 다 복음과 관련이 되어있는 노래들이라는 말이죠. 물론 좀비 작사, 좀비 작곡인데, 그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이중성, 내가 이전에 폭행자였던 그것마저도 주께서 행하신 일이구나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을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침몰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가 투구를 쓰는 순간,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신세가 된다 

우리는 이 땅에 이단으로, 죄인으로 태어나서,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보면 된다는 말이죠. 어디에 누워서 말인가요? ‘저 빳다에 누워서’, 그렇게 해 저문 노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고, 그게 성령이라는 겁니다. “, 침몰하는구나. 어느덧 우리의 강의도 서서히 끝나가는구나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의 몸에 합류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예수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중 구조로 위와 아래, 그렇게 두 개의 시선을 다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이전까지는 나의 전쟁밖에 없었고, 그래서 남들에게 지지 않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질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이 침몰하는 것도 주님의 안목으로 발견하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창세 전에, 이미 주 안에서 계획된 주의 일이고,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 자신의 일이 없음을, 거기에 도리어 홀가분하게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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