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음란이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우상을 이야기하는데 음란이 뭐냐? 음란은 예수님을 가운데 두지 않는 관계망을 음란이라고 해요. 예수님을 가운데 두지 않는 관계망.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이 음란한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 모든 것에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예수님을 교차로로 여겨서 그냥 네가 나한테 오지 말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나한테 오고 나는 당신한테 가지 말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당신한테 가라 이 말이죠. 부모와 자식 관계도 마찬가지고 부부관계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맺어준 관계거든요. 예수님이 옛날에 맺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현장에서 둘 다 숨 쉬게 만들었고 그 둘이 만나게 해준 것이 중간에 예수님이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왜 만나게 해주는가? 예수님이 하는 일이 이 세상의 현실이고 우리는 뭐냐? 우리는 그 교차점. 그걸 가지고 우리는 비유다.우리는 하나님의 장기판의 서양 체스 있지요. 체스 판의 말 같은 인형 말 같은 존재에요. 예수님의 세상을 형성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말로 사용한 거예요.
일상생활에 사는 거 바쁜데 뭐 언제 예수님 생각할 수 있습니까 라고 변명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누가복음 20장 16절은 어떻게 되는데요. 그 농부들 진멸하고, 농부들을 진멸한다는데 다 죽여버린다는데. 주님이 죽여버리는 이 심정을 그런 식으로 헤아릴 수 있겠어요? 제가 아까 히브리서4장 이야기했지요. 히브리서 4장 약속의 때가 남아있을지라도 못 들어간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약속을 주신 분의 마음과 약속을 받는 마음이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어떤 식으로 적용이 되느냐. 아까 제가 힌트를 드렸어요. 뭐냐 하면은 ‘나’라는 실체를 뭐로 바꾸는 거예요? 비유. 내가 어떤 관계를 보여주는 형성하는 하나의 비유 같은 존재, 비유니까 단독적으로 내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되는 것. 나의 행복? 나의 인생 즐거움 그거는 잘못된 거예요. 비유에 해당이 안돼요. 비유는 전체 그림속의 일부여야 돼요. 전체 그림 속에. 우리가 예수님의 세계에 하나의 비유로서 가담하면 되는 겁니다.
ⓑ 시간의 분할. 시간이 나를 분할시키는 거예요. 시간의 종말이 와서 심판이 와서 미리 나를 둘로 쪼갭니다. 둘로 쪼개는 게 뭐냐 하면은 시간의 종말이 시간은 아직 안 끝났는데 종말이 왔느냐. 시간이 벌서 끝났어요. 상속자의 등장입니다. 상속자의 등장. 시간이 나를 분할시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비유로 보지 않고 실체로 봐요. 그러면 인간의 실체는 뭐냐?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그건 내 시간이다. 내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시간이 무슨 시간과 충돌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처음이요 나중의 시간과 이게 합치되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의 시간 보기에 여기 인간의 시간은 뭐냐 하면은 하나의 예수님의 시간을 드러내는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이걸 가지고 비유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주님의 이미지에요. 이미지. 이미지란 뜻은 언어가 되기 전에 있는 원형을 이미지라고 해요.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그러니까 이미지는 아무리 언어로 표현해도 이미지를 표현 못하기 때문에 언어로 이야기하면 비유가 돼버린다고요. 비유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내 상태는 내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 내 상처는 내 이전에 먼저 있었으며 약속이 먼저 있었으며 상처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걸 똑같이 성도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성도가 마리아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는 상투적인 말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상처를 위하여 우리가 마리아가 태어난 거예요. 복음은 십자가지 예수님의 존재성이 복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요.인간이 이 비유가 활성화 되게 되면 이게 실체가 되어버려요. 비유가 뭘 만난다? 말씀을 만나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의 공로와 만나고 구원의 효과와 만나 버리면 이 비유는 진짜 천국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시작을 비유에서부터 시작해야 돼요. 말씀이 나를 건드려줘야 돼요. 그래야 내가 아닌 천국에서 영생 얻는 나로 이게 탈바꿈되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마저 어느 세력을 못 이깁니까? 어두움의 세력을 못 이기죠. 어둠의 권세마저도 누구 권세 안이냐 하면은 주님의 권세 아래 있어요. 창세기 3장 15절 한번 보세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뱀 보고 이야기하죠. 뱀의 후손이 뱀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뱀의 후손은 마귀입니다. 마귀보고 이야기해요. 그럼 여기서 하나님의 만든 이 각색 드라마의 이미지가 아니고 주인공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과 누구밖에 없습니까? 악마밖에 없어요. 둘 다 눈에 안보여요.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실체가 벌여놓은 이미지 세계, 이게 오늘날 현실세계입니다. 현실세계죠.
이 세상에 보면 이미지 세계 속에 비유의 세계 속에 예수님은 어떻게 나타는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죠. 그리고 십자가 누가 사형언도 했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죠. 마리아도 비유고 본디오 빌라도도 비유고요.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채 뭐가 됩니까? 임신이 되어버리죠. 성령으로 잉태해버려요. 그러니까 누가 황당하냐 하면은 마리아 본인이 황당해요. 왜냐하면 사람이 이미지가 되고 누구를 위한 비유가 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의 삶의 동력, 기존에 있는 것과 욕망의 대상으로 내가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삶의 활력소 동력이 써먹을 데가 없어요. 이게 써먹을 데가 없는 거예요.
복음 아는 사람들이 저한테 자주 질문하는 것이 이거에요. 목사님 그럼 기도 뭐 해야 됩니까? 뭘 위해 기도해야 됩니까? 기도할게 없네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내 상태는 내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 내 상처는 내 이전에 먼저 있었으며 약속이 먼저 있었으며 상처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걸 똑같이 성도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성도가 마리아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는 상투적인 말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상처를 위하여 우리가 마리아가 태어난 거예요. 복음은 십자가지 예수님의 존재성이 복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수동적과 소극적의 차이는 자기 방어에요. 정신적인 자기 방어 기제. 메커니즘.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에 주의 주권사상, 주께서 다 하셨는데 나 뭐 할 거 뭐가 있는데 나는 그냥 누리기만 하면 되지. 이게 뭡니까?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고 나 건드리지 마라. 주께서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하니까 그냥 내가 그냥 살렵니다. 자기 방어 모습이죠.
수동적은 뭐냐 자기방어 아니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예속됨의 기쁨이에요. 고마움이고. 시켜만 주이소. 시켜만 주이소 하는 것은 수동적이에요. 소극적은 뭡니까? 나 복음 잘 아니까 더 이상 나한테 이거 하라 저거 하라 시키지 마세요. 수동적, 소극적 우리는 같은 뜻인데 따져보면 뭡니까? 서로 대비되고 반대되는 거예요. 소극적은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은 자기 정당성에 관심이 있어요. 자기 정당성에. 다 주의 은혜인데 나 탓하지 마세요. 나 은혜로 알고 있습니다. 다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이거고 수동적은? 얼마나 내가 모든 것이 다 죄가 되었으면 주께서 나를 꼼짝 마라 해야 주의 일이 되는지를 감사하는 거예요. 기도하고 헌금한 게 뭐가 되기 때문에? 죄가 되기 때문에. 나한테 맡기지 않고 나를 주께서 마음대로 쓰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예수님의 흔적은 어떤 흔적입니까? 이게 진짜 어렵지요. 내가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그 핍박한 나를 누가 구원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한 거예요. 구원할 때 구원의 매체가 뭐였는가요? 6장 14절 그 매개체가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 제가 아까 예가 팔 부러지고 폭력을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흔적은 폭력이 아니고 죄인마저 용서하시는 거예요. 죄인마저. 이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뭘 받았다? 용서를 받았는데 뭐로 용서한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했다. 피로. 이 흔적을 가졌다. 이 흔적을 건드린 자는 뭘 받는다? 재벌 3세라도 큰 거 석 장. 석 장뿐이 아니겠죠. 지옥가야 됩니다.
주님의 시간에 의해서 스스로 먼저 시간의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이 성도에요. 성령은 종말이 돼야 와요. 송장의 할 일. 송장이기에 하는 일이 바빠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굉장히 바빠요. 그리고 송장의 할 일의 특징이 뭔지. 뭐든지 고맙게 여기고 한다. 이제는 네 시간은 없어. 너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내 시간, 십자가와 더불어 증거하기 위해서 뭐든지 죄가 되는 그 일만 그 역할만 남아있다 이 말이죠. 이 세상은 주님의 거대한 단일체에요. 단일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거기에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 죄, 그리고 너의 죄를 만남을 통해서 거기서 노출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인도해주십니다.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친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포도원의 농부 딱 누구다? 딱 우리 얘기잖아요. 정착하고 싶다. 나는 사람하고 같이 으쌰 으쌰 하고 싶다. 그게 나의 잠재되어있는 본성이며 이 본성은 내게서 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과천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뭐로 구원받습니까? 십자가 피로 구원받아요. 그 피가 저와 여러분들의 흔적으로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너무 세상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남들처럼 잘 살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겠습니까? 건강하겠습니까? 복 받겠습니까? 그것이 삶의 동력으로 살아왔던 것, 그게 다 안개 같은 허구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저희들 이제 알았사오니 주님만 실제로 힘주시고 주의 역할만 하는 주님의 종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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