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군락
2024년 1월 21일 본문 말씀: 빌레몬서 1:20-25
(1: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1:21)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1: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1: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1: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고 그런 일반인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 가운데 특정된 자만 “오,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지요? 로마서 8:2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의 맏아들 기능을 위해 필요한 형제들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았지만 필히 이 형제들도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 굳이 성령을 받아야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사람‘이라는 붙여준 이름 자체가 사람들의 운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흙으로 태어나는 흙으로 돌아갈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따로 갖기를 원합니다. 나만의 개성있는 인생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즉 자신은 누구의 형제이기보다 먼저 자신만의 인생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런 바램은 환상일 수 밖에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3인 1조가 되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세 사람은 한날 한시에 십자가 사형집행을 당합니다. 누가봐도 세 사람은 동일한 처지에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빠지고 오직 한 사람만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빠진 두 명 사이에 대조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로부터 자기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죽기 전에 있었던 일들은 그 죽음으로 인해 무효가 됩니다. 즉 환상에 불과했던 겁니다. 환상이 아닌 것은 자기 죽음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죽음으로서 비로소 자기와 헤어지는 겁니다. 이게 실상입니다. 그전에 자신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행세한 것은 악마가 배후에서 사주하고 지령한 대로 움직여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연속성에 의해서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들이 가려집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는 오직 이것 하나입니다.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그래야지만 인간은 아담이라는 단일 이름에서 예수님의 단일 이름으로 전환이 가능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 예수님은 12제자들을 샘플로 뽑아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사들의 신체를 직접 접촉합니다. 수건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을 발을 씻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서비스 하는 줄 알았습니다. 즉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자에게 있어 주인공이고 주님이 이 점에 협조해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발 씻음은 죄를 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베드로 자체를 제거하고 새로운 베드로로 전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더는 베드로가 자신에게 주인노릇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10)
‘다는 아니다’는 말씀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구원받을 자도 생기지만 필히 버려질 자도 생긴다는 겁니다. 즉 예수 믿는 자, 아니 믿는 자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챙겨주시는 자와 버려야 될 자의 구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자기네들 구원에 도움되라고 온갖 용어나 개념을 가득 준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천국에 들어갈 믿음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못한 개의 믿음’입니다. 막 7:26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집안에 귀신이 작렬하면 자신은 그 귀신을 감당하지 못함을 인정합니다. 이로서 그녀는 자신이 ‘인간됨’으로서 유지될 수 없음도 인정합니다.
‘인간보다 못한 것’, 바로 그것은 개입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여인이 이방인이면서 제대로 이방인의 위치나 신분이 뭔가를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민족에 의하면 이방민족에 하나님에게 관계가 끊어져 지옥갈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접속되지 못한 족속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이 관계 끊어진 자에 대한 관계 이음이 진정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취지에 부합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9:20에는 12년 동안 혈류병 들린 여인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감히 자신이 예수님과 접촉될 수 없는 분이신 것을 알기에 그저 옷 깃만 만지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형제란 사람의 군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군락으로 형성됩니다.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구원된 자와 그렇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냉정한 계약에 의해서 성립합니다. 갈라디아서 4:22-26에 보면 이 내용이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기 환상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을 알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약서를 통해서 정립됩니다.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여기서 인간이란 기껏 계약서를 드러내는 비유로 동원됩니다. 한쪽 아들이 육신으로 태어났다면 그것으로 지옥행입니다. 그런데 다른 아들은 사람의 육신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잉태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모세 계약과 다윗 계약입니다. 모세 계약은 인간의 실패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반면에 다윗 계약은, 실패한 인간들의 요구에 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천국 백성을 생산함을 나타내는 계약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계약 사이에는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겁니다. 바로 이러한 계약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새로운 형제들이 출현하게 되는 겁니다.
이들은 더는 세상 환상에 억매이지 않고, 죽음 안에서만 진실로 영생있음을 알려주는 성도, 예수님의 가족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운명이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빌레몬서 1장 20-25절(사건의 군락)24012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빌레몬서 1장 20-25절입니다.
빌레몬서 1:20-25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
형제라고 한꺼번에 지칭하면서 사도 자기에게 누가누가 있는지를 빌레몬에게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자기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라고 하는데 여기 주보를 보시게 되면, 그만큼 허물없는 사이로 지냈다는 뜻입니다.
【에라브라가 현재 처한 상태에 대해서 빌레몬에게 알려줍니다. 사도와 더불어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빌레몬은 그 당시 골로새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라브라에 대해서 잘 아는 사이입니다. 왜냐하면 에라브라는 사도의 편지를 골로새까지 전달한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도 담당했던 사역자입니다.(골 4:13)】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골로새 전부 다 지금의 튀르키예의 내부 지역 한 곳에 모여 있어요. 김천, 상주, 구미, 이렇게 몰려 있듯이 그 장소에 모여 있는 겁니다. 여기에 누가도 같이 언급되어 있는데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도 있는데 아리스다고는 끝까지 사도 바울과 함께한 사람이고, 데마는 중도 탈락한 사람이고,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사람입니다. 마가는 한때 사도와 결별했지만 다시 사도에게 돌아온 사람입니다.
지금은 형제 아닌 자도 있고, 형제였던 사람이 다시 형제가 된 사람도 있는데, 그리고 변함없이 형제로 끝까지 간 사람도 있습니다. “자, 형제를 형제답게 하는 공통점이 뭡니까?”라고 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해서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명단, 이것은 그냥 보통 그렇고 그런 일반인입니다. 일반인이 사도에게 ‘형제’라고 호칭을 받는 것은 공통적으로 그들이 모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 주신 그 무엇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내 일 하라고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준 게 성령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그 집단을 “형제여,”라고 했어요. “어이 브라더ㄹ!” 하고 나오잖아요. “형제여” 이 형제는 인간들이 정으로 나누고 서로 친하게 지낸다고 형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형제라고 부르는 그것조차도 누구의 일이냐?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해내면 되지 않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해낼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19장 26절에 보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정의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은 반드시 끌어당겨서 사람이 하지 못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게 자기 노력이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없는 사람이죠. 내가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내가 굳이, 능력도 없는 내가 내 일에 관여할 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주보의 끝에도 나와 있지만, 중간에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라.”
예수님이 맏아들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라면 그 맏아들과 운명을 같이 해야 될, 영원히 천국에 살게 될 형제도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람이 해내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하신 그것을 표현할 때, 눈에 보이는 인간들을 대할 때의 표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오, 형제여”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일반 사람이고 일반 만남인데 그게 어떻게 해서 형제가 될 수 있느냐? 형제로 전환될 때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 형제로 전환 시키는지 그 방법에 관한 문제, 그 전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왜 인간은 서로 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는 걸 형제라고 할 수 없느냐?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형제님, 자매님, 붙어 있지만 그게 형제도 아니고 자매도 아니에요. 그냥 붙일 적당한 명칭이 없어 갖다 붙이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형제자매가 될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인간에는 각자 자기 이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이름이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 자기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이름 붙이기 전에 이미 단일 이름이 집단적으로 붙여져 있어요. 그게 아담입니다. 흙입니다. 이름은 갖다 붙인다고 이름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확정된 운명의 내용이 포함되어서 붙여지는 게 이름이에요.
어제 이름하고 오늘 이름 달라지면 안 되거든요. 그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한 방향으로 운명이 정해질 때 네가 나이가 40이 되든, 50이 되든 달라지지 않는 그 성질, 성격, 그 전체를 압축해서 그 사람의 이름이 되야 해요. 그게 바로 흙이라는 이름입니다. 태어났다는 말은 네가 흙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에요. 거기 적합한 이름이 아담입니다.
이건 집단적 이름이죠. 이 단일 이름에 모든 이름이 속해 있어요. 그렇게 집단적 이름이 돼야 되니까 인간들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왜 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있으면 안 되느냐, 해서 독자적인 자기 이름을 붙이죠. 물론 자기가 붙이는 게 아니고 자기 아버지 엄마가 붙이는 겁니다.
우리 가문은 특별한 가문이라고 해서 가문의 성 따라 이름을 지어버리죠. 그거 반칙이죠. 가문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이미 태어났으면 이름은 하나님이 지어주는 것이지 인간이 자기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것은 건방진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간의 독자적 이름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형제가 되려면 이 독자적인 이름에서
첫 번째 과정은, 단일 이름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두 번째, 그 단일 이름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야 해요.
개인적 이름이 단일 이름으로 한번 가야 하고요, 그 단일 이름이 집단 이름으로 바뀌어져야 해요.
내 이름은 작살나고 단일 이름, ♠흙이라는 이름으로 전환돼야 합니다. 그다음에 그 이름이 다른 이름, ♠주의 이름으로 전환될 때 하나님의 형제가 됩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막 3:33)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하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내 이름, 내게 주어진 운명이 나에게 찾아온 다른 분의 운명으로 이전하는 게 구원이에요.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서는 안 되죠. 왜냐면 인간은 독자적인 자기 생각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출애굽 때 인간의 이름이 집단의 이름으로 바뀌는 그 과정이 홍해 건너오기, 유월절과 함께 동행하기,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기 이름을 어떻게 자기에서 떼어 내느냐?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우리를 만날 때 여러분 장례식장에서 만나요.
장례식장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전까지는 “하나님 제가 살아서 하나님을 위해 뭘 할까요?” 질문이 그렇게 돼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는데 살아서 뭘 하면 됩니까?” 라고 질문을 했는데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을 본인의 장례식장에서 만나게 되면 질문이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님, 내가 죽어서 뭐 할까요?”가 됩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알고 있는데 하나님의 일은 네가 죽어야 일이 돼요. 하나님의 일이 된다고요. 그 말은,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며 온 사람들이에요. 방해했거든요.
독자적인 내 명예, 내 자존심, 내 이름이 있어서 이것이 주님이 붙여준 아담에도 부합되지 않고, 이게 뭐 엉뚱해, 도대체 누구 지령받고 누구 사주를 받아서 독자적인 내 세계를 자꾸 구성하려고 하는지, 자꾸 숨 쉬고 혈기 넘치니까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또는 주님을 위해서, 뭐 헌금은 어느 정도 하면 되고, 전도는 몇 명을 해야 되고, 예배 참석은 몇 번 해야 되고…, 자꾸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께서 ‘이거 죽여버릴까?’ 아직도 본인의 존재 자체가 죽음이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붙여준 이름인 것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어제도 그런 전화가 왔습니다만, 안산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무엇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면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인간은 환상의 스크린 안에 갇혀 있어서 환상을 제껴버리고 벗겨내면 환상이 또 있어요. 안산에서 전화하신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집에 세 들은 분이 계신 데 그분이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사상에 몰두해 있는데 목사님,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어떻게 전하면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간만에 전화가 왔고, 성의를 다해 답변을 해드리는 게 도리다 싶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마르크스 전공한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그렇게 경제 정의를 위해서, 또 노동자를 위해 활동하는데, 백날 해 봐야 죽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왜 죽는지를 마르크스가 이야기 한 그 점을 마르크스 연구한 사람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인간은 왜 죽습니까? 죽으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다 허사인데 그 허무한 것을 멈출 수 없는데 그 이유가 뭔지?’ 마르크스 전공했다고 한 번 물어보세요.” 그렇게 전화한 집주인에게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 듣고 집주인이 하는 말이, 그렇지 않아도 물어봤는데 마르크스 전공자가 ‘마르크스 그것도 다 헛되다’고 이야기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헛된 것이지만 왜 헛된 것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고 못 버리냔 말이죠. 마르크스는 핑계고요, 내가 나를 못 떼서 그래요. 내가 나를 떼 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나와 이별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이별 안 되니까 강제로 이별하는 것이 죽음이잖아요. 얼마나 친절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기를 떼어 내는 방법은 십자가에서 사건을 통해 벌써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은 자기에서 떼 내지 못해요. 자기와 헤어지지를 못해요. 마르크스는 핑계라니까요. 뭐 노자, 전부 다 핑계에요. 복음도 핑계에요, 복음도, 성경도, 주님도 핑계고.
중요한 것은 내가 나에게서 안 떨어져요. 내가, 나 자신이 환상 같아요, 나 자신이.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이런 사람하고 우리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떼어 내기 위해서 먼저 공관복음에 십자가 이야기가 나와요. 마태복음 27장 38절에 보게 되면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는데 3인 1조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단독 십자가가 아니고 3인 1조가 되어서 십자가 사건이 형성돼요. 형제들을 모은다, 오늘 본문에서 형제들을 모았지만 우리 보기는 존재의 군락(群落)처럼 보이죠? 주의 일은 존재의 군락이 아니고 ‘사건의 군락’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터졌던, 튀르키예든, 그리스든, 예루살렘이든, 어떤 지역이든 관계없이 십자가 사건이 터진 지역들을, 군락들을 모아보니까 “오, 부라더!” “오, 형제들!”이 되는 거예요.
그 십자가 사건, 처음의 십자가 사건 때 3인 1조가 되어 일으킨 사건입니다. 프랑스 요리에 이런 게 있답니다. 꿩 요린데 꿩 요리를 할 때 양쪽에 송아지 고기를 놔두고 그 안에 꿩고기를 집어넣어서 요리를 해 놓고 접시에 담을 때는 두 개의 송아지 고기를 버리고 꿩고기만 접시에 담는다는 거예요. 복잡하죠.
꿩 요리가 되려면 버려야 될 두 개의 암소 고기가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요리의 레시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을 대표해서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3인 1조가 되어 사건을 일으켜요. 그러면 예수님만 부각 되면서 나머지 둘은 그 사건에서 보조로 내려앉는 거예요. 보조로 내려앉는데 그 보조 중에 하나가 뭐냐? 한쪽은 천국 가고 한쪽은 지옥 가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내 이름이, 내게서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사건이 터져야 돼요. 예수님과 결합해서 예수님만 돋보이고 나는 뒤로 빠지는 사건이 일어나 줘야 돼요, 우리 심령 속에. 마태복음 25장에 마지막 심판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25장 32절 보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드라마 같은데 보면 시어머니 될 사람이 자기 아들 장가보내는 걸 염두에 둬서 사전에 아가씨를 단독으로 만나면서 심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카페에 아가씨 불러내서 아주 매섭게 생긴, 턱이 뾰족한 시어머니가 아가씨를 딱 째려보죠. 조심스럽게 운을 뗍니다.
“그래 아가씨는 뭐하고? 부모님은 살아계시고?” 이렇게 저렇게 묻다가 제일 결정적인 질문이 “그래, 아가씨는 내 아들을 어떻게 생각해? 아가씨는 내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지?” 이렇게 물어요. 그 대목을 보면서, 아주 매섭게 못되게 뾰족한 턱을 가진 시어머니가 묻는 대목을 보면서 마태복음 16장 13절이 불현듯 생각났어요. ‘불현듯’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래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아가씨, 내 아들 어떻게 생각하지?” 그 아주 성질 무섭게 생긴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만 딱 고집합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래,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이게 왜 중요한 질문이냐면, 마태복음 25장에서 마지막에 전 민족을 심판할 때 질문이 딱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느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양이냐, 염소냐. 그 뒤 마태복음 25장에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내가 어려웠을 때 목말랐을 때 배고팠을 때 네가 나에게 어떻게 해줬는가, 이건 주님의 고집이에요. 주님은 이것밖에 몰라요.
내가 몸이 아픈지, 감기 걸렸는지, 지금 통장에 돈이 떨어졌는지, 주님께서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어요.” “아가씨, 지금 그래? 통장에 돈 떨어졌는데 그래서 내 아들은 어떻게 생각해?” 이 못된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 밖에 생각 안해요. 지금 네 이름은 이미 죽은 이름이에요. 죽은 이름이 뭐 어디가 아프든지 돈이 없든지 죽는 마당에 돈이 없다, 이런 것도 환상입니다.
결국 심판주는 예수님 본인이에요. ‘주님 자체가 기준이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죠. 시어머니가 “너 내 아들 어떻게 생각하니?” 하면 아가씨에게 듣고 싶은 답변은 “사모님의 아들이 제 운명의 기준입니다.” 이렇게, 이게 웃어야 될 문젠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아가씨가 없기 때문에.
“사모님 아들이 제 운명의 심판 주십니다.” 이러면 고개 끄덕이죠. “됐다, 됐어. 자네 같으면 내 며느릿감이 되겠지.” 뭐 일방적으로 이렇게 하겠죠. 예수님께서 자신이 맏아들이기 때문에, 구약에 의하면 맏아들이 상속자에요, 상속자가 되게 되면 상속자가 모든 복을 일단 다 갖게 돼요.
그다음에 동생들은 상속자를 지분으로 해서 그것을 공유하는 식으로 아들의 나라가, 천국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동생들이 맏아들 되시는 주님과 동일한 생각을 지니고 있을 때 나의 패밀리, 나의 형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이 작업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못 해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의 형제로, 가족으로 들어갈 재주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냐? 주님 쪽에서 이걸 실시하죠. 그 십자가, 3인이 1조가 되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십자가 사건이 고린도후서 13장에 의하면,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고 역사 끝날 때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한 거예요. “너는 버림받았어. 너는 탈락이야.” 하는 일이 되려면 먼저 십자가 사건이 연속적으로 멈추지 않고 이어져 십자가 사건의 군락을 이룬다는 조건 하에 이것이 가능하거든요.
십자가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와요. 하지만 이 사도 바울의 편지는 그 이후입니다. 이후까지 누가 하나님께 채택된 자냐, 누가 버림받을 자냐, 주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멈추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는 거였어요. 공관복음에서 사도 바울까지, 그걸 빌드업이라고 합니다. 축구에서, 수비부터 공격까지 밀어 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 돌아가셨는데, 십자가 사건 다 이뤘는데 어떻게 이런 버리운 자라는 존재가 출현하느냐? 그걸 알기 위해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주께서 자기 이름을 자기에게서 자기를 떼 내지 못하는 자에게 어떻게 슬그머니 다가가 그 작업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죠.
그 작업이 요한복음 13장 4절에 너무나 잘 나와 있습니다. 함축되어 나와 있기 때문에 많은 설명이 필요할 텐데요, 그걸 미리 감안하시고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13장 4절에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이렇게 시작해요.
사람이, 본인은 누구나 단독자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허락 없이 타인이 내 신체에 접촉하는 것에 굉장히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난데 내 허락도 없이 당신이 왜 내 신체에 접촉을 하느냐.’
단독자니까, 아무리 스승이지만 ‘이렇게 해도 되겠냐’고 너에게 물어보고 발을 씻겨야 되는데 그냥 발 씻겨 버려요. 이게 접촉입니다. 접촉부터 주님 쪽에서 접촉해 가는 거예요. 접촉이 없으면 내가 나로부터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죽기 전에 자기 속에서 환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환상을 인간이 버릴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 십자가 사건을 제일 싫어하는 쪽이 마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귀신이 인간들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네 인생 살라고 계속해서 지령과 지시를 끊임없이 올려보내기 때문에 내가 나 되기 위해서는 항상 내 결정으로만 내 안에 가득 차 있어야 돼요. 다른 사람이 내 허락도 없이 접촉하고 이러면 안 돼요.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한테 가만히 와서 접촉했어요. 마태복음 9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옷 가를 만졌어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접촉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옷 가를 만진 거예요, 옷 가를. 내가 접촉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께서 접촉할 때에,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접촉할 때 베드로의 태도와 그 이후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요. 여기 13장 7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여기서 이전과 후를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후’는 모르겠고 그 전에, ‘이후’를 남겨둔 상태에서 주께서 접촉했을 때 베드로가 자기 속에 있는 속내를 여지없이 그대로 노출합니다. 발을 씻어줘야 한다, 할 때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요 13:8, 9)라고 했거든요.
지금 베드로가 후의 사정을 모르고 지금 당장 주께서 자기에게 접촉했다는 이 사실만 두고 베드로의 본심은 뭐냐? 주께서 자기를 위해 서비스하는 걸로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잘되게 하기 위해 죄를 씻어주는 걸로 생각한 거예요. 이건 ‘후’는 모르고, ‘후’는 남겨놓고, 씻어주니까 ‘야, 내 죄를 씻어주는구나.’ “그러면 발뿐만이 아니고 전신을 다 씻어주옵소서.”라고 한 거예요.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삭제시키는 거예요. 이게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의 베드로의 생각이었고 후의 베드로 생각은 베드로가 삭제당하는 겁니다. 베드로에서 베드로를 삭제시키고 빼내는 거예요. 베드로 자기 이름을, 원래 시몬이거든요, 베드로 원래 자기 이름은 날아가고 주님에 의한, 주님의 기능을 하는 베드로 이름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그거 말고 더 중요한 게 남아있어서 하는 거예요. 여기 10절에 보면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참 어려워요. 자, 베드로와 예수님을 대조해 봅시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내 신체는 내 신체입니다. 누가 허락 없이 만지면 안 돼요.
그런데 스승이기 때문에 용납하는데 네 죄를 씻어준다고 하니까 마치 하녀가 씻겨주는 것처럼 내 몸은 그대로 있고 외부에서 서비스해 주는 걸로 여겼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내 손과 머리뿐만이 아니고 전신을 다 씻겨 달라’ 했을 때 주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길 필요가 없다’라고 했어요.
발을 씻긴다는 말은 네가 주인이 아니고 이미 내가 주인으로서 내가 너 대신 주인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의 주인 됨, 내 안에 너를 끌어당겨 발 씻기는 것으로 접속한 거예요, 접속. ‘접속’ 하니까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요. 전도연의 노래, “How gentle is the rain~” 이런 노래가 있어요. 이게 ‘A Lover’s Concerto(사랑의 협주곡)‘이라는 노래인데 노래의 가사를 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랑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사랑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어요.
지금 이 형제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형제들이 되기 위해서는 그 형제들이, 에바브라, 빌레몬, 오네시모가 어디 있든지 간에 전부 다 접속돼야 하는 거예요. 사랑의 콘체르토, 사랑의 협주곡이 되어야 해요, 사랑의 협주곡.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의 3인이 1조가 되는 것처럼, 3인이 1조로 움직이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의 군락이 되어야 돼요. 사건의 군락, 존재의 군락이 아니고.
제가 요한복음 13장을 이거 이야기하려고 한 게 아니고 또 중요한 것이 남아있어요. 이제 후로는 네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삼킬 거라는 거예요. 내가 너를 다 내 것 만들 거라는 거예요. 네 이름 말고 내 이름으로 바꿀 겁니다. 그래야 맏아들에 예속되고, 맏아들에 예속돼야 천국 가는 거예요.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의 형제가 돼야 하니까.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요한복음 13장 1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다는 아니다. 다는 아니라는 거.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한 강도가 탈락한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에서 3인 1조가 되어 한쪽은 구원받고 한쪽은 탈락했을 때 그때 그 사건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계속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누가 버림받은 자냐, 누가 주님의 접촉에 의해서 주님 안에 형제로 들어온 사람이냐, 그 사건이 진행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리는 겁니다, 이 요한복음 13장에서.
그러나 이 사건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7장 26절에 보면 거기에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와요.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이게 귀신 들린 자거든요? 자기 어린 딸이, 자기 집안에 귀신 들었어요. 그 여인이 자기 딸에게 어떤 해결책이 없으니까 자기가 귀신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합니다. 자기가 귀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자기가 해결하죠. 도저히 자기가 해결할 수 없어요.
그러면 인간이 귀신들렸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더이상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된다는 하나의 현실의 징후로서 받아들였어요, 이 여인이. 귀신들린 인간은 더이상 인간일 수 없다. 그럼 뭐냐? 인간보다 못한 게 뭐예요? 개죠, 뭐. 개에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적 용어들을 온갖 것 다 짊어졌어요. 여호와, 율법, 천국, 약속의 땅, 하나님의 순종, 회개, 뭐 금식, 성전, 온갖 용어를 다 집어서 가져왔지만…, 이 얼마나 종교적 사회입니까? 그렇게 가져 왔지만 그 모든 것이 여전히 내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유지한 채 그 용어들을 사용한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본인들이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자백한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인간이 무슨 수로 귀신을 쫓아냅니까? 자기는 멀쩡하다는 거예요. 내가 게을러서 하나님 못 섬기지 시간만 나면 하나님 잘 섬긴다는 거예요. 이 말은, 아직도 나는 여전히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우기고 싶은 겁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여인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만한 믿음을 못 봤다는 거예요. 왜냐면 모든 인간들은 자기 인간의 믿음이에요. 그러나 이 여인의 믿음은 개 같은 믿음입니다. 개 같은 믿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쉽게 자기의 믿음으로 인수인계가 가능한 거예요.
이게 주님께서 인간을 자기에서 떼 낼 때 주께서 쓰시는 방법입니다. 귀신을 가득 가져다 집어넣는 거예요. 귀신을 집어넣는 거예요. 매일이 환상이에요, 매일 환상. 매일 생각하는 것이 다른 욕망, 다른 욕망, 다른 욕망으로 바꿔치기하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요, 인간은.
주님께서 이렇게 친절하게 그 여인에게 귀신이 나가게 함으로써 비로소 정작 내가 원하는 자녀는, 내가 진짜 원하는 천국의 자녀는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분명히 아는 그런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마가복음 7장에서 우리가 또 놓치면 안 되는 이유가, 이제부터 여러분 좀 참아야 돼요, 이제부터 좀 어려워요, 이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겁니다, 이방인. 이방인은 뭐냐? 이방인은 태어나면서 이미 지옥 가기로 작정 된 자가 이방인이에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옥 가게 태어난 자가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은 유대인들 보기에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입니다.
끊어진 사람인데 어떻게 주님께서 이 믿음, 이 개 같은 믿음을 진짜 믿음이라고 받아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버리고 한 사람은 건질 때 이게 구약에 의하면 계약에 의해 성사될 일입니다. 구약 성경의 중요 계약이 딱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모세 계약이고 또 하나는 다윗 계약입니다.
모세 계약은 실패하기 위해서, 인간과 하나님 관계가 실패하기 위해서 주어진 계약이 모세 계약이에요.
다윗 계약은 실패했음을 확언하고, 다지고 그 실패했음에서 인간에겐 더이상 계약 성사가 일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계약입니다. 그러면 오실 주님은, 메시아는 그 모세 계약과 다윗 계약, 그 틈 사이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 두 개를 살리는 거예요. 두 개의 송아지 고기를 살리고 거기서 꿩고기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다윗 계약을 알았다고 해서 ’나는 다윗 계약을 알았으니까 나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주께서는 일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방금 이 이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요.
갈라디아서 4장에 사도 바울은 점점 더 빌드업 해서, 함축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게 여기 두 언약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2절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되어있어요.
한쪽은 땅에 있는 엄마에게서 태어났고, 한쪽은 하늘에 있는 엄마, 예루살렘이라는 다윗 언약에 준해서 나온 어머니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되어 있어요. 이 갈라디아서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갈라디아서를 강의한 <복음과 다른 복음> 책이 나와서 제가 제 3자 입장에서 그 책을 한 번 봤어요. 1강부터 대충 봤는데 ‘꼭 이렇게 어렵게 해야 속이 시원했냐?’ 할 정도로, 이건 뭐 짜증을 내야 될지.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앞에 깔아야만 되는지? 1강, 2강, 3강, 그냥 계속 다른 이야기 더 하다가 이제는 3강 들어가서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8) 그 이야기가 나와요. 3강에 가서야 나와요. 그런데 왜 그 앞에 이 내용을 깔아야 되는가? 그것은 딱 이것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이 땅에 디딜 자리가 마귀의 자리 외에는 없기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자리가.
우리는 성경을 보든 뭘 관찰을 하든 그 관찰 자리 자체가 마귀의 자리고 귀신의 자리, 하나님께서는 귀신의 자리 외에 다른 자리를, 우리에게 존재의 자리를 허락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귀신의 자리부터 들춰내야 돼요. 이걸 파악을 해야 한다고요. 네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귀신의 사주를 받아서 움직인다는 그것부터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이게 무지무지 어려운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이 갈라디아서 4장, 이게 설명이 될 수가 없어요. 태어났는데 이게 육체로 태어났다. “너 태어날 때 육체 가지고 있었지?” “예.” “지옥 가라.”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게. “엄마 아빠가 날 아들로 만들었어요.” “그래, 축하한다. 지옥 가라.” 이게 갈라디아서 4장 이야기거든요. “네가 육체로 태어났니?” “예, 육체로 태어났습니다.” “가라, 빨리 가라. 지옥으로.”
“그러면 천국은요?” “모세 계약에 의해 탈락 된 자에게는 천국 없다. 천국은 그 언약 말고 다른 두 번째 언약, 새 언약, 다윗 언약, 예루살렘 언약에서 거기서 천국 갈 사람이 나올 것이다. 너하곤 상관없어. 넌 너하고 떨어져야 돼.”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거예요. 우리의 죽음 자리에서 만나는 겁니다.
그 장례식을 좀 앞당겨 보는 거예요. 죽을 때 장례식에 가지 말고, 용인 장례식장 가지 말고 조금 더 앞당겨 보는 거예요. 현재 있는 이 자리, 이 자리가 주께서 주신 자리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무덤에서 무덤까지’가 돼요.
한국에서 미국 이민 가는 것은 한국 무덤에서 미국 무덤으로 이민 간 거예요. 하나의 거대한 단일 무덤 속에서 사람들은 살고 있는 겁니다. 무덤에 비 내리고, 가물고, 또 눈 오고 그래요. 과학 연구하고, 무덤에서 정치하고, 무덤에서 4월에 총선하고요, 무덤 속에서.
이 갈라디아서 4장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요. 여기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사람도 아닌데 사람이라고 하는 건 비유로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도 아니고, 흙인 걸 인간이라고 잠시 했다는 거예요. 잠시 그렇게 인간이라고 불러 준다는 거예요.
두 아들이 태어났다? 두 비유가 태어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누가 보기에는 둘 다 똑같은 아들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뭘 묻는가? 출신 성분을 묻는 거예요. 그 사람이 태어나서 얼마나 훌륭하냐, 얼마나 착실하냐,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얼마나 가정적인지 일체 묻지 않습니다. 네 배후의 선, 네가 연결된 케이블이 어느 쪽에 박혀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케이블이.
하는 말이 “너 출신이 누구냐?”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 출신인데요.” “아, 내가 묻는 것은 아버지 말고 엄마를 묻는 거야.” 엄마를 묻는 거예요. “예. 우리 엄마는 계집종입니다.” “그래? 그러면 종이 가는, 율법의 종이 가는 곳을 내가 영원히 마련해 두었다. 그게 지옥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아들이 있어요. “너는 누구에게서 났는가?” “우리 아버지의 본부인 사라에게 났는데요.” “진짜야?” “진짜 사라에게서 났습니다.” “제대로 이야기해. 사라가 너 낳았어, 안 낳았어?” “안 낳았습니다.” 바로 그거에요. 사라는 아기를 못 낳는 여자에요. 낳지를 못합니다.
육체는 육체를 낳을 수가 있어요. 인간의 육체로 낳지 못한 인간을 낳아서 그들만 천국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계산입니다, 전략입니다. 그러면 엄마는 다른 데 있어요. 엄마는 뭐냐? 다윗 언약이 완성되는 다윗 계약이 완성되는 그 완성처(處)가 바로 우리 영원한 천국의 어머니가, 모친이 되는 겁니다. 당연히 예수님이죠.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것은 뭐냐? 계약이라는 사실이에요, 계약. 부동산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죠? 부동산은 움직이지 않아요. 부동산은 언제 움직이는가? 계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헐어버릴까, 재건축을 할까, 이건 계약에 의해 움직여지는 거예요.
인간은 사사로운 정 같은 게 있어요. 우리 뭐 살아온 정이 있으니까 잘해보자, 이런 게 있는데 부동산은 그게 없어요. 그거 붙들고, 건물 붙들고 사정해 봐야 내 거 되는 거 아닙니다. 부동산은 아무 말도 없어요. 차갑고 냉정하고 냉혹해요. 뭐가?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이 그런 거예요.
일방적 계약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계약에 의해서. 이게 언약이에요. 이게 계약이에요. 인간은 그 계약에 딸려있는 하나의 비유 또는 무늬에 불과한 겁니다. 그 두 개의 계약에 의해서 이 땅에 사건이 나오기 시작하죠.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유니까. 중요한 것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너는 나의 형제’라는 것은 주님의 사건, 하나님의 계약에 준해서 사건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빌레몬이고 오네시모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이끌어내신 확정된 계약에 의해 사건이 사건대로 환상과 대결해서 진짜 현실이 환상을 뚫고 나오는 그 모습을 보고 “오 브라더, 오 형제여”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계약에 의해 확정된 운명이 지금도 멈추지 않고 환상을 추방하고 진짜배기 현실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서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라고 편지하고 있는 겁니다. 아까 요한복음 13장 베드로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전과 후가 달랐어요. 전에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이 죄 씻어주는 줄 알았어요. “죄 씻어주면 고맙죠. 발만 씻지 말고 전신을 다 씻겨 주세요.” 여전히 자기 존재 위주로 살아가요. “내가 착실하게 내 목숨까지 드리겠습니다.” 참, 주님께서는 같잖아서 웃기지도 않죠.
여기서 주님께선 베드로에게 아까 하신 말씀처럼 ‘다가 아니다, 열 한 제자는 내가 버리지 않지만 한 제자는 버리기 위해 내 제자로 선택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왜 그렇게 하는지, 왜 11대 1로 나누는지 그 이유를 몰랐죠. 십자가에 달릴 때, 3인 1조가 되어 십자가 사건이 벌어질 때 버려지는 것도 계약에 의해 버려지고, 채택되는 것도 안면 보고, 뭐 인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주께서 찾아오시고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따라서 그 계약에 의하면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이미 그 세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강도 둘도 죽고 예수님도 죽었어요. 이건 뭐 CCTV 한 번 까봐요? 죽었어요. 세 분 다 죽었어요. 문제는 그중에 한 분이 부활했다는 거, 부활했죠. 그러나 죽는 그 순간은 세 분 다 죽었어요. 세 분 다 죽었지만 예수님의 죽음 사건을 통해서 기존에 있던 살아있는 인간이 짜낸 모든 환상과 환상의 연쇄 순환한 것이 죽음을 통해 뚫고 나와 버린 거예요.
살아있는 것이 환상이고 죽은 것이 진실이라는 거예요. 이게 진리라는 거예요. 죽음이 진실이에요.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게 죽고 죽음만이 살아있는 거예요. 죽음만이 살아있어야 주님의 말씀의 심판이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한 겁니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노?” “주님은 심판주잖아요.” “그러면 넌 살아있는 거고 또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뇨?” “나 당신 생각할 여유 없어. 내 생각하기도 바빠.” “그럼 지옥이나 가라.” 이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심판의 모습입니다.
모든 일을 할 때 주께서 주신 3인 십자가 사건에 우리가 초대받은 거예요, 모든 일에 대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십자가 사건의 재현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 사건에 다시 한번 들어감으로써 그동안 우리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내가 만든 환상입니다.
‘어제는 이렇게 살았지만, 내일은 잘 살아야지…, 지난 5년 동안 이렇게 망했지만 5년 뒤에는 한 번 보란 듯이 멋있게…, 한 번 봐! 내가 이렇게 성공했잖아’ 그 환상들, 주님의 장례식 나의 장례식에서 그것은 다 거짓된, 마귀가 장난친 거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있으면서 뭘 할까 생각하지 마시고 이미 죽은 자로서, 이제 어떻게 해도 죽은 자로서 죽어가고 있으면서 뭘 할 것인가? 그것은 환상을 매일 같이 제거하시면서 진리가 확정된 계약의 조건에 의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인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접속하고 접촉할 때 인간들은 모두 환상을 전부 쳐다보고 있어요. ‘전반전 2대1, 요르단 전에서 왜 이러나 이거? 이러다가 지는 거 아니야?’ 후반전 돼서 ‘이 조규성이 그 한 골도 못 넣고’ 이러면서 전부 다 환상을 쳐다보고 있어요. 제가 지금 중계방송하는 건 아니지만, 안 봤지만.
그렇게 비겨놓고 ‘그래 16강에서 일본 안 만나면 다행이야. 역시 작전이 멋지게 맞아 떨어졌어.’ 이렇게 하지요. 환상 쳐다보고, 전부 거기 쳐다보고 있을 때 주께서 어깨를 탁탁 두드려요. “나와.” 몰래 뒤로 빼돌립니다. 이게 접촉입니다. 접속, 주와의 접속, 맏아들과의 접속. “그거 환상이야. 축구하는 거랑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손흥민이 한 골 넣는 거랑 너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8강 되면, 4강 가고 싶고, 4강 되면 우승하고 싶지? 우승하면 뭐 할 건데? 잘 했다고 소고기 사먹을 거야, 뭐할 거야, 나와.”
진짜는 네가 내 양자라는 것과,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과,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 계약서 들이밀면서, 내가 계약의 완성자고 네가 어떻게 해도 모자람이 없다는 것, 그것을 주께서 형제라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부르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이루어진 운명이 사도 바울 운명, 그 운명이 이제는 예수님의 형제라 부르는 운명으로 되는 그 상태에서 빌레몬 편지는 하나의 계시로서, 오늘날 현실로서 다가오게 되어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보기에 예수님이 버려진 자처럼 보입니다만 그게 진짜 천국 가는 길이었던 것을 저희들 이제 후에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 가는 것이 아니고 특별하게 계약된 자만 들어갈 수 있다고 확정된 이 사실에 더 이상 주님만 생각하면서 다른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