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교제
2023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빌레몬서 1:4-7
(1: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1: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1: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1: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두 종류의 교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교제입니다. 이 교제가 인간 세계에 투입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즉 이 세상의 인간들은 천국에서 살기에 합당치 않는 태도로 삶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자기만 편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자기를 인정해주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사이에도 상호 자신의 업적은 다른 하나님에게 밀어주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성과를 아버지에게로 돌립니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이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밀어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1-23)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밀어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이번에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에게 밀어주는 바도 있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게 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이런 식으로 ‘하나님 교제 내부’의 성과가 이 지상에 ‘천국 백성 사이의 교제’를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구원이란 일종의 추수입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4:35-36)
이런 마음을 성령을 통해서 사도에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일의 성과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상(償) 자체로 여깁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전 9:18)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일치시킵니다. 세상 사는 것이 고생은 되지만 책임을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한 일을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기존의 세상 교제에서 벗어남을 압니다. 인간들 끼리의 세상 교제를 남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것은 자기 내부의 ‘복수(複數)적 자아’를 단일 자아로 형성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출생할 때부터 부모 양쪽으로부터 상호 자아를 한 육신에 받게 됩니다. 언어를 통해서 훈육받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인간들은 아버지의 자리를 모델로 해서 자신을 완전체로 만들어보려고 시도합니다. 여럿의 자아를 단일 자아로 만들려고 주변에서 숱한 언어들을 차용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쏟아지는 그 많은 언어들은 귀신들이 이 세상에서 뿌려놓은 것들입니다. 그런 잡다함은 인간들로 하여금 단일 자아가 실은 여럿 자아의 쓰레기 통으로 만들어놓습니다. 그 쓰레기를 단 하나의 자아로 묶어놓으려고 하니 억지스럽게 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런 식의 삶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서만 성령을 보내십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단독 세상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하늘나라의 영광을 둘러친 핵막 같은 것이 있었지만 이 세상에 오실 때는 그 핵막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속성을 쏟아지게 됩니다. 그 속성이란 자기 행함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돌리는 속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약속 구현을 위해 쓰레기통같은 자들을 수집하십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심으로 예수님의 단일체를 만드시는 데 성공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죄이었던 자들과 사귐에 들어가십니다. 성도는 이제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과 앞으로 살 모든 것이 ‘과거’가 되는 절차에 놓여 있음을 압니다.
사람들도 같이 있으면 안 보고 싶어도 만나게 되면 과거에 만나고 싶었음을 반복해서 소환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더는 자기에게 매이지 않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신랑 하나만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등을 준비합니다. 여럿 처녀가 하나의 신랑을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개인적인 윤리/도덕적 잘남을 뚫고 상황 고백이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자기 세상이 마땅히 불태워져야 마땅한 세상을 감사하면서 남은 과거를 채워나가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교제를 연장으로 성도끼리의 교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얼음짱 밑의 세계에서 버려두지 않고 꺼내주시매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자유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빌레몬서 1장 4-7절(두 종류의 교제)23123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빌레몬서 1장 4-7절입니다.
빌레몬서 1:4-7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과 사람끼리의 교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제에서 빌레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의 교제를 언급하면서 사도 바울이 거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빌레몬이 알고 있는 교제 + 사도 바울’, 거기에 또 뭘 집어넣느냐면, 오네시모를 이제 슬쩍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빌레몬이 알고 있는 교제 + 사도 바울 + 오네시모.’ 사도 바울 자신을 오네시모화 시키는 겁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도망친 사람이고, 노예로서 자기 살아보겠다고 사도 바울에게 온 사람이죠. 그런데 이제 다시 그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고자 합니다. 상당히 거리가 멀어요, 로마와 골로새, 거리가 상당히 멀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이 인간들의 교제에 뭘 또 집어넣느냐 하면, 하나님의 교제를 여기에 집어넣어요. 하나님의 교제를 여기에 집어넣으면 하나님의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 내부 교제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자체 내에 연대성을 갖고 있어요.
성도의 교제는 무엇을 반영하느냐?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의 하나님 내부에 있던 교제가 땅에까지 그대로 반영이 되면서 이 세상에 인간들끼리의 긍정적 교제가 자리 잡습니다. 이 말은, 기존의 인간들의 교제는 하늘나라에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안 받아준다는 겁니다. 오직 새로운 믿음의 교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교제가 인간 속의 나눔, 사귐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의 하나님 사이에 사도 바울이 거기 끼어들게 되고, 사도 바울이 끼어들면서 사도 바울 알고 있는 빌레몬이 끼어들고, 빌레몬이 끼어들면서 빌레몬과 관련 되어 있는 모든 자의 교제가 같이 합세하게 되고, 그 가운데 제대로 하나님 교제가 인간 교제까지 이어졌다는 증거가 뭐냐? “너 오네시모 받아줄래, 안 받아줄래?”였습니다. 그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오네시모에 대해서 저지른 이런 범죄라든지 주인에게 행한 그런 것들이 있으면 사도 바울이 “내가 대신 갚아줄게. 내가 처리해 줄게.” 이것은, 하늘 교제와 땅의 교제 사이 중간에 서 있는 사도 바울은 이 지상에다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이 교제할 때의 특징을 그대로 인간들의 사귐 관계, 연대성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게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거예요. 이게, 이게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일어나는 교제의 특징입니다. 내가 했는데 내 것으로 돌리지 않고 그 연대성 속에 내놔버리는 것.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자기의 재산이고 노예잖아요. “저거 내 건데, 저거 내 거야.”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내 것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오네시모와 만남으로서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내 것’이라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성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빌레몬이 받아들였을 경우에 알게 됩니다. 물론 당연히 받아들이겠죠.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하나님께 뭘 제공했고,
㉯아들 하나님은 성령에게 뭘 제공했고,
㉰성령은 예수님께 뭘 제공했고,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께 뭘 제공했고, 이걸 먼저 알아야 되지요. 그걸 먼저 알고 난 뒤, 그게 갖춰지고 난 뒤에는
㉲아들 대신 아들 하나님이 인간에게 뭘 제공했느냐를 아셔야 돼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께 뭘 또 제공했는가?
그렇게 해서 교제란 이름으로, 사귐이라는 이름으로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할 때 기도내용이었어요. “내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저희들도 나와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되어있어요.
이러한 사실을 제가 언급해야 될 이유는 어떤 것을 자꾸 염두에 두는 것이냐?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는 이 대목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한다, 라는 이 대목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 구원에 꽂혀서 구원받는 데 넋이 나갔어요. 정신이 나갔어요, 구원받는 데에 대해서.
구원만 받아 챙기면 된다는 거예요. ‘왜? 그게 하나님의 소원이니까, 소원 들어주자. 하나님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데 좋습니다, 내가 구원받을게요, 됐죠? 하나님 소원을 내가 들어줬으니까 마땅히 천국 가는 것은 당연한 거죠?’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4장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누구든지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 이야기하고, 방금 읽었던 디모데전서 2장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한다, 이 두 개를 하나로 연결시켜 봅시다.
연결시키면 이런 문장이 나와요.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이 어떤 소유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기를 원한다.’ 이게 구원이에요. 구원 넘보다가 집안 거덜 나게 되었어요. 천국은 탐이 나는데 자기 소유는 다 날아가게 되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걸 방금 이야기한 버전으로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천국 가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의 하나님이 갖고 있는 교제에 뛰어드는 것, 합류하는 것, 참여하는 게 구원인데 그 구원이 되려면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만 이 교류에, 연대에 같이 참여하게 해 줄게.” 그런 조건 하에 천국 백성이고 네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실컷 성경 이야기했는데 결국 우리한테는 impossible, 불가능한 이야기로 밀려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성경은 이렇게 항상 불가능부터 먼저 언급을 합니다. ‘불가능한데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천국에 간 사람들이 있잖아.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합격한 거야? 어떻게 패스한 거야? 어떻게 그 세계에 도달한 거야?’ 그 사이에서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제시한 게 무엇인가가 드러납니다.
정리합시다.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자기 소유를 버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전혀 없는데 인간은 천국 못 간다는 것이 확정된 상태에서 주님이 우리한테 준 게 뭘까? 확정된 상태에서, 못 들어가는 것이 이미 굳어진 상태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뭘까?’를 생각해 봐야 해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인간세계 내에 유포를 하게 되는데 그 유포한 것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 바로 빌레몬 밴드와 거기에 합세해야 될 오네시모와 그리고 그걸 그렇게 정리 정돈해 주는 사도 바울, 이자들은, 예수님이 내놓은 것처럼 그들은 뭘 내놓았는가를 봐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 일까보냐” 여기서 권(權)은 권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권리)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다른 사람처럼 나도 결혼할 수 있고…, 옛날에는 결혼하면 요즘과 같지 않아서 하나의 비서, 매니저 역할, 충실한 종을 하나 갖는 걸 의미하죠. ‘내가 다른 사람처럼 여자 비서 하나를 둘 권한이 없겠느냐? 하지만 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복음을 위해서다.’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뭐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부득불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전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상황을 조성하게 하는 것, 조성하게 하는 이유가, 내가 상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무슨 상? 내가 행해서 내 것으로 돌아오는 상은 일체 내게 없게 만드는 그것이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는 상황이에요. 복음에 장애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천국 갈 수 있는 조건은 뭐냐? 어떤 소유도 내 소유가 되지 못하는 작용이, 그 힘이 복음에서 나온다는 거죠. 이걸 아주 간단하게 줄여버리면 이런 겁니다. 고생은 되게 했는데 일한 것은 하나도 없게 만들어 버려요.
광부? 새우잡이? 주부들 애 키우는 거? 고생들 되게 해요. 그런데 내가 일하지 않았어요. 내가 일하지 않았다는 말은, 내가 일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 이 말이에요, 아무것도. 일한 게 있어야 책임을 지죠. 일한 게 있어야 책임을 지죠. 아무것도 없어요.
그거 왜 그러냐면요? 항상 우리가 현재-현재-……, 가 연속되면서 나중에 구원받을 때도 구원받는 순간이 현재가 되는데 현재가 되면 그 과거에 있던 모든 것이 현재의 취지를 위해 재소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누가 한게 되느냐 하면, 주님이 한 게 되어서 일체 우리가 책임질 게 없어요. 책임진다는 그게 복음의 방해자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겠다는 그거 자체가 수상한 거예요. 지옥 갈 사람이에요.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윤리 도덕의 게껍질을 뚫고 나오는 상황 고백이, 자백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나 이렇게 살았다, 가 아니라 그걸 깨부수면서 구멍을 뚫고 ‘내가 이런 고백을 왜 하지? 미친 거 아니야?’ 이런 생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불가능성, impossible.
내게서 나올 수 없는, 나를 지키는데 몰두하는 내게서 도대체 나올 수 없는 고백인데 그게 상황 고백이에요. ‘내’가 아니라 내가 속해있는 이 상황이 이런 상황이었다, 상황 고백이 나오는 현상이 일어나면 합격입니다. 내가 뭔데, 또 합격이라고 함부로 할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거거든요, 사람에게서.
사람은 자기 소유 지키는 것 외에는 다른데 정신을 안 돌립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나는 내 걸로 사는 거예요. 그게 무슨 교제입니까? 교제 아니죠. 남 이용하는 거죠. 인간에게는 엄밀하게 교제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만 살면 돼요. 그걸 완전체라고 하는데 나만 완전체가 되면 돼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런데 그게 뚫린다니까요. 그게 깨뜨려지고 뚫리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내 것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절에 보면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이것이 바로 나에게 주는 상이다, 이 말이죠. “상을 받는 게 아니고 활동하는 자체를, 이런 놀라운 직분을 행하는 자체를 너는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아.” 이렇게 한 그게 자기에게 상이에요.
“뭐 아무나 이런 사도 일 하는 것 같아? 아무나가 아니야. 예수님이 하는 일의 확장과 연장 속에 사도 바울이 그 계시 전함에 참여한 것, 이게 바로 상이다.” 무엇이 상이고, 그 상을 통해 사도 바울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이냐? 전에는 나에 대해 집착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이해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다만 이해만 하라.” 옛날에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무엇인지 이해하라는 거예요. 좋다고 웃고, 슬프다고 울고 하지 말고,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상황에 대한 고백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되죠.
주어진 상황, 주어진 상황이 나온다는 말은, 나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고 이건 하나의 필드에요, 하나의 필드, 장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장이 뭐냐? 인간은 바로 얼음장 밑에 있는 존재, 뭔가 나를 위해 열심히 몸부림치기는 치는데 이 얼음장 밑에 있는 답답함, 괴로움, 천국은 가고 싶은데 불가능성, 가지는 못해요, 그 답답함, 그 얼음장을 깨고 바깥에 나간 상태에서 다시 보게 되면, 지금 현재와 내가 앞으로 살아 있는 날이 남아 있을지라도 과거의 재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같이 있으면 안 보고 싶은데 만날 때마다 보고 싶음이 새록새록 소환돼요. 같이 있으면 안 보고 싶은데 만날 때마다 ‘참 많이 보고 싶었지.’ 이게 다시 기억이 난다니까요? 왜? 현재가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 과거는 지나간 일이 현재를 위해 소환되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 가 있으면, 천국은 영원한 현재거든요, 영원한 현재에 있으면 과거에 내가 얼음장 밑에서 몸부림, 맘 부림 치면서 구원받으려고 쏴 댔던 그것이 얼마나 한심스럽다는 그 사실을 천국의 순간에 또다시 그것을 회상하게 되고 주께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그 작업,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내가 빠져나올 수 없던 상황을 후배들이 또다시 못 빠져 나온 채 자기 한 몸 먹고 살려고 애쓰는 그것을 이렇게 물끄러미 편하게 볼 수 있는 이 자유가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 상입니다. prize에요. 상이에요. 이런 상, 여러분도 같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았,었,었,지.’
“뭐 천국 가야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할 건데 매일이 천국, 날마다 천국이고 날마다 마지막 최후의 순간이니까요. 미래는 주님 소관이니까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버티고 있어서 얼음장 밑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교제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가를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니까 후딱 한 번 풀이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자기 모든 공로를 갖다 바치는 것,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예수님도 아버지께 바칩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23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사망도 내 것, 내가 죽는 것도 내 것이고, 그런데 그게 내 것으로 끝나지 않죠. 너희는 그리스도 것이고, ‘아, 사망이 내 것이라고 여겼는데 아니구나. 그리스도께서 일으킨 일이구나.’ 그런데 그리스도 것은 하나님 것이다. ‘아, 이게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이구나. 예수님을 통해서.’
그러니까 사망할 때까지가 천국 있는 사람한테는 과거지사가 되는 겁니다. 과거를 소환하는 거예요. 과거 이야기가 성경에 가득 담겨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랬었,었,지, 라고 과거 완료를 쓰는 거예요. 문법에서 완료라고 하는 것은 그다음 현재가 되도 변하지 않는 상태를 표현할 때 씁니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가 아니라 그때 틀려서 지금도 틀리고 그때 맞으면 지금도 맞는 것이다, 이게 완료적 안목이고 시선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몽땅 아버지께 바치죠.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께 뭘 주시는가?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겼다고 이야기하면서 심판의 기준점으로,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심판하도록 하나님께서 권리 인수인계를 해 버린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권한 이행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성령에게 또 뭘 주시는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마치 예수님의 참 대단한 겸손처럼 나와 있습니다. 12장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다음 32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그 ‘사하심을 얻지 못하느냐, 사하심을 받느냐’ 하는 그 권한을 성령에게 인수인계해 버립니다.
그다음에 성령님은 예수님에게 뭘 주시는가? 요한복음 16장 13절에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께서 자기가 행한 것은 입을 다물고 오직 예수님이 행한 것만 자기를 통해 너희에게 전달하게 될 것이다, 성령님께서 자기는 빠지고 예수님을 자기 앞에 앞장세우는 일을 하신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과의 연대성, 헬라어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perichorésis)라고 그렇게 해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을 쉽게 하면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콜라보 합동작전, 합동작업, 연합작업,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내부적인 교제를 인간에게 전달하는데 예수님이 인간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지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나옵니다. 제가 말씀드리면 “아~ 그거?”라고 하실 거예요. 26절에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주님께서 하나님 자체적인 내부의 결실을 우리에게 줄 때 유일한 게 뭐냐 하면, 피로 나타내요, 피. 피 안에 모든 교제, 모든 완료됨이 피로 전달되는 겁니다. 피 줘봐야 우린 못 알아듣잖아요. 그래서 주께서 주시는 게 있어요. 피도 주시고 그다음에 뭘 주시는가?
누가복음 11장 9절에서 “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렇게 하시고 11-13절에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가장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주는데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자신을 알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행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죠. 그 순간 우리는 하늘 하나님만의 교류에 천사가 되어서 거기 합세가 되는 겁니다. 합류가 되는 겁니다.
합류가 되어 버리면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는 자기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넘겨주는 교류가 일어나잖아요? 소용돌이, 포석정, 빙빙 도는 것, 거기다가 우리를 집어넣으면 어떤 인간도 자기 소유라는 게 없으니까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는 그것이 말씀대로 이뤄진 거예요.
내 것을 빼는 재미로 성도는 살아가는 거예요, 내 것 빼는 재미로. 책임을 안 지니까요. 그러니까 성도의 기쁨은 뭐냐? 딴 거 없어요. 지옥 불에 안 들어가게 해주는 그것만으로 이미 감사하옵나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이제는 자유가 생겼고요, 그 자유가 어떤 자유냐면, 어떤 일이 생겨도 상관없고,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고! 이게 자유 아닙니까? 이게 너무너무 행복해서 더는 이 세상에 살 마음도 없어요, 너무 행복해서.
그러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항상 감사하고,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해버리면 그 순간에 현재가 되면서 과거는, 지나온 모든 일들은 하나의 지나간 과거지사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참 부질없는 짓들을 했구나. 쓸데없는 짓들을 했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교제가 되면서 이 교제를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통해서 오네시모를 합류시키듯이 다른 성도끼리 편지를 보낸다는 것, 이 편지가 사적인 개인 간의 편지가 아니고 성경으로 나왔다는 것은 이 교제를 확장 시키는 거예요.
확장 시키면서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교제가 성령을 통해 인간 속에 침투하기 전에 이미 인간과 인간 사이에 교제가 있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 교제가 왜 천국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불가능한 교제인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를 통해 시작을 하죠.
빌레몬은 오네시모한테 피해를 봤고, 오네시모는…, 그가 도둑질 아니면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요. “나 잡아봐라~”하고 도망쳤다 이 말이죠. 괘씸하기 짝이 없죠. “너 걸리기만 해봐라.” 이렇게 된 거죠. 그럼 인간관계라는 건 뭐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거든요. 서로가 이용하는 관계인데 도대체 인간이 서로 이용하게끔 되어있는 그 인간이 속해있는 상황,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기에 인간은 서로에 대해 이용하고 싶은 생각부터 먼저 생기느냐? 그것을 사도 바울이 복음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 가정이 뱀이 똬리 뜨는 것처럼 한데 틀어져 있어요. 한데 꽉 틀어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건데 이런 겁니다. 인간의 육신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생식 세포에서 태어나죠.
태어나서 거기서 체세포를 만드는데 체세포 안에는 아빠 것, 엄마 것, 두 종류가 나눠져 있어요. 인간의 유전 물질을 DNA(Deoxyribo Nucleic Acid, 디옥시리보 핵산)라고 하는데 유전 물질이 아빠 것과 엄마 것, 두 종류가 딱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세포는 세포질과 핵으로 되어있고 그 핵 안에 두 개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DNA가 흩어져 있어요. 그걸 염색사(染色絲, chromatin), 실이라고 하는데 흩어져 있어요. 나중에 세포가 자체적으로 또 복제를 해요. 생식 말고 세포 자체가 또 복제를 할 그때 어떻게 하느냐? 실처럼 흩어져 있는 세포가 또렷해지면서 둘이 짝을 이뤄요. 그 가닥이 세포 안에 총 46개가 들어있습니다. 그게 또렷해지면서 염색체가 돼요. 그러면 23쌍이 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 하려고 하냐면, 지금 이 이야기 하려고 해요. 세포분열에서 제가 깊이 박힌 내용은 뭐냐? 핵막(核膜, nuclear envelope)이 사라진다는 거예요. 핵막이 있으면 단독이 되는데 핵막이 사라지게 되면… 간기니, 중기니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거 치우고요.
핵막이 사라지면서 안에 내부 속성이 밝혀져요. 왜 저에게 이게 인상 깊게 다가오냐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자기 백성을 복제를 하는 겁니다. 복제를 할 때 모든 영광을 누릴만한 자격을 갖고 있는 분의 그 하늘과 땅의 불가능성의 막이 이 핵막이 엷어져 사라져버려요.
핵막이 사라지면서 예수님이 내부에 갖고 있던, 아버지께 받았던 모든 약속의 속성이 와르르 이 땅에 쏟아져 버리는 겁니다. “나 이 일하러 왔다.” 확 쏟아져 버리는 거예요. 나 죽으러 왔다는 거예요. 이 죽음은 나 혼자의 죽음이 아니고 너와 함께 죽는 죽음의 내부에 자기 임무와 역할과 기능을 이 땅에 와르르 쏟아내는 겁니다.
쏟아내면서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속성을 복제를 해버려요. 그게 세포분열이에요. 세포를 딱 분열해 놓고 잡아당깁니다. 나중에 방사체로 해서 양쪽으로 잡아당겨요. 중앙에 정렬하고 있는 걸 잡아당긴다고요. 그리고 또 하나의 세포가 등장하거든요.
그러니까 구약도 마찬가지고 신약까지 전체 내용이 뭐냐? 이 이야기에요. 핵막은 사라지고 이 땅에 왔던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속성은 또렷하게 드러나는 그 과정의 책이 성경책이에요. 뭐 하려고 주께서 이 땅에 와서 그걸 쏟아내느냐? 복제하려고요. 누구를? 천국 백성을. 누굴 닮아서? 천국에 살 만한 사람으로 복제를 해야 돼요.
현재 인간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인간 자체가 천국에 적합하지 않은 그러한 인물이기 때문에, 인품이기 때문에 그걸 천국에 적합한 인품으로 갖춰야 돼요. 내부적으로 천국에 합당한 인품은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와서 복제를 해줘야 돼요. 마치 세포분열처럼.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항상 자기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어디서 잘못되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도록 성령께서 인도합니다. 자꾸 자기 믿음에 의심을 해줘야 돼요. 왜 의심을 해야 되느냐?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들은 마귀에 의해서 자립하는 존재에요.
자립을 할 때 아빠와 엄마의 요소가 우리 세포 안에 있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자아는 뭐냐? 복수적 자아에요. 여럿의 자아에요. 단독 자아가 아니고요. 이게 단독 자아가 되려면 아빠 것 엄마 것으로 해서 내부에서 여럿으로 되어있는 것을 하나로 굳히기에 들어가는데 그 굳히기의 모델의 뭐냐? 아버지의 자리에요.
나도 아버지 같은 권력자가 되고 싶다는 것, 이것은 딸이든 아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누리고 있는 전횡적인 권력, 그 권력으로 내가 단독 자아가 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 언어, 엄마 언어가 다 들어오는 겁니다. 다 들어와서 초등학교, 중학교 들어가고 그렇게 되면 점점 더 굳히기,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알아서 할게, 이런 식으로 굳히기에 들어가는데 굳히기에 들어가면서 쏟아지는 게 뭐냐? 이 세상에 귀신이 뿌려놓은 언어들이 있어요. 귀신이 뿌려놓은 언어들을 세 글자로 하면 ‘U-tube’라 합니다. 유-튜브의 언어들이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아빠 엄마, 이 종류밖에 없던 복수적 자아에 잡다한 자아가 내 한 육체 안에 완전히 꾹꾹 담듯이 쏟아지게 되어있어요.
이걸 품위 있는 용어로 말해서 뭐냐? 대통밥이라는 거예요. 대통밥 몰라요? 죽통밥. 대나무에 잡곡 쑤셔 넣어서 밥 지은 것. 나라는 인간 속에 유-튜브에 들어있던 것을 꽉꽉 담는 겁니다. 계속해서 단단해지고 강화된, 콘크리트 화 된 오직 나만의 자아를 위해서 담는 거예요. 이젠 결혼도 싫고 자식도 싫어요. 꾹꾹 담는 거예요. 나만 행복하고 나만 편하면 돼요. 그저 나 편한 게 인생 목적이라고요.
“우리 다 같이 고생합니다.” 하는 유-튜브 봤습니까? 그런 것 없어요. 혼자 편하게 살기, 이게 주제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은 이게 단독 자아인데 그 내용을 뜯어보면 잡다한 자아에요. 귀신들이 이쪽과 저쪽, 동서남북에서 쏟아내는 많은 언어들의 귀신들, 그 잡다함이 내 안을 다 채웠던 겁니다.
우리는 헉헉거리면서 그걸 가지고 쏟아지는 그 지식 가지고 힘을 다해서 단독자, 나는 나다, 이걸 굳히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온갖 것을 다 수집하는 거예요. 이 과정 속에서 인간은 나름대로의 교제를 합니다. 자기들만의 교제. 이걸 좀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이 세상의 구조를 말하기를, 이 세상의 구조는 경제가 밑에 깔려 있다, 하부구조, 그리고 하부에서 경제가 받침이 되어야 그 위에 정치, 문화, 종교라는 것이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제가 보기에 마르크스가 정말 엄청난 실수를 한 겁니다. 인간의 제일 바닥에 뭐가 있느냐? 경제가 아니에요. 가정입니다. 가정.
왜냐하면 성경에서 인간은 혈육적 존재기 때문에. 인간의 세포 안에도 아빠 것, 엄마 것, DNA 가닥, 46개의 가닥이 있어요. 이것은, 인간은 아빠 엄마는 생겨날 수 없다. 육신은 아빠 엄마를 그대로 대물림하는 거예요. 복제한 겁니다. 이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다시 쉽게 말해서 나는 비록 죽어도 내 것을 복제하는 그 자식을 위해서 우리는 가정이 있고 그 위에 정치, 경제, 그리고 교회, 종교가 그 위에 얹혀 있습니다. 육신입니다.
그래서 이 가정이라는 이 단독자,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언어를 차용해서 자식들 자아에 쑤셔 넣는 겁니다. 이거 요번에 수능에 나온다, 이거 킬러 문항이다, 막 쑤셔 넣어요. 자 그런 과정속에서 인간의 교제, 인간끼리의 최소단위가 가정이에요. 빌레몬서에서도 그 점을 의식하고 이야기합니다.
빌레몬서 1장 1절 중간부터 보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 압비아는 빌레몬의 부인이고요,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이에요. 처음의 교회도 가정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중심에서 아빠 엄마에게 교육을 받고 양육을 받은 애가 아빠의 자리를 포기를 못해요.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서 아빠가 가졌던 아버지의 자리를 자기중심에 놓고 거기에 필요한 것들을 사회에서 채우고자 친구들을 만나고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그들만의 교제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그들만의 교제.
제가 어떤 명단을 부를테니까 이게 무엇의 교제인데 여러분이 알아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리아킴, 나이키, 왁시, 윤지, 모니카, 허니제이, 릭제이, 리정, 하니문. 뭐 해태제과 과자 이름? 아니지요. 이게 <스트릿 우먼 파이터(Street Woman Fighter)>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오는 길거리 여자 댄서의 멤버들이에요.
이들은 자기들끼리의 돈독한 교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명단은 혹시 여러분 중에 아시는 분이 있을 거예요. 김산하, 별사랑, 요요미, 두리, 마이진, 반가희, 김양, 한봄, 린, 신미래. <현역가왕>에 나오는 출연진이에요. 거기 나오는 가수들입니다. 일곱 명 뽑아서 일본의 일곱 명과 대결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트로트 가수.
이들끼리는 나름 치열해요. 왜? 여기서 살아남는 게 자기 아버지의 자리를 대 이어 물려받으니까. 아버지 자리가 왜 탐이 나느냐? 아버지의 자리는 명령하는 자리고 최고권력의 유일한 자유하는 자리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두 종류의 교제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교제는 이 땅에 올 때 핵막(核膜, nuclear envelope)이 사라졌다는데 인간들은 단독자, 자기만의 구획의 막, 경계선을 더 공고히 해요.
경쟁하고 그 경계선을 더 공고히 할 때마다 자기는 인생 승리자로 자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교제를 염두에 둘 때 이 핵막을 어떻게 해체 시키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뿌려진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구체화 시키느냐, 그 작업이 구약성경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참 불가능한 작업인데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그 불가능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작업은 어떻게 되는가? 방금 이야기했어요. 핵막, ‘나는 단독적인 자아다’라고 하는 그 핵막을 제거하는 작업과, 두 번째는 하나님이 갖고 있는 속성을 거기다 집어넣는 작업, 두 가지 작업을 병행해서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시도하는가? 창세기 32장 보겠습니다. 1, 2절에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떼쓰리 천사들을 만났어요. 떼쓰리 천사들인데 천사들 이름이 하나하나의 이름이 없어요. 집단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군대가 누굴 만나는가? 야곱을 만나요. 이 야곱은 단독자입니다. 자기 이름이 있어요. 그런데 이 야곱이 누굴 만나느냐? 그 하나님의 군대, 집단, 떼쓰리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인간들은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그걸 어떤 집단과의 만남에서 집단의 대표자 속에 내 이름, 나를 나라고 절대 자아로, 완전체로 간주하는 이 착각, 이것을 녹여버리는 거예요. 녹여버려서 합세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 하나의 이름에 합세하게 만듭니다. 그 하나의 이름이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에 천사 자리 하나에 끼어드는 거예요.
전쟁 그렇게 하는 겁니다. 사사기 6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미디안 군대가 드디어 쳐들어왔거든요. 13만 5천 명입니다(삿 8:10). 그때 대장도 없고 아무도 없어요. 농사짓던 방앗간 주인이 졸지에 성신 받아서 대장으로 나서는 거예요. 못한다고, 나는 자격이 안 된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냥 몰고 가는 겁니다.
기드온이 군사로 몇 명을 뽑는가? 2만 2천 명 모았어요. 너무 많아요. 다 보내고 달랑 제일 적은 숫자, 3백 명만 딱 뽑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 물 마시는 것을 보고 뽑은 겁니다. 제일 적은 숫자가 어떻게 마시는가, 그걸 보고 뽑은 거예요. 제일 적은 숫자.
왜? 그래야 자기 소유의 공로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페리코레시스(perichorésis, περιχώρησις) 하나님 내부에 있던 원리원칙이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그 속성으로 전달되고 그 속성을 이스라엘 역사의 바닥에 쏟아내는 겁니다. 쏟아내 버리면 내가 한 게 아님을 아는 속성이 단독 자아 속에 하나둘씩 스며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액체자아’예요. 물풍선이라 보면 됩니다. 또는 날계란. 깨지면 와르르 쏟아져요. 겉모습은 하나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잡다함이 있습니다. 잡다함은 편하게 이야기해서 그냥 쓰레기. 인간이 살다 죽으면 ‘쓰레기가 쓰레기 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냥 쓰레기예요. 쓰레기인데 주께서 그 쓰레기가 필요한 거예요.
쓰레기를 모아서 대표 인물이 하신 일을 증거케 하는 거예요. 그걸 요한복음 4장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는 그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현장에서 빵 사러 보내지요. 허겁지겁 제자들이 빵 사서 오니까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님, 배 많이 고프셨지요? 우리가 빵 사왔습니다.” 하니까 “내 양식 있다.” “무슨 양식이요? 우리 말고 누가 예수님께 양식을 사줬습니까?” “나의 양식은 바로 추수해서 그 수확물을 얻는 그것이 나의 양식이다.”
요한복음 4장 32-35절에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이 추수해서 얻은 수확물이에요. 결과물이지 본인이 애쓴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냥 획득될 뿐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이에요. 복제가 되어야 되니까. 사사기 7장 2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이걸 신약적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칼이여. 여럿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우리 여럿을 모집한 그분의 솜씨였고 공로였다. 우리는 그 공로의 추수물이고 결과물로 우리는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 하신 일로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 공로라는게 있을 수가 없지요.
열왕기상 19장 19절에 엘리야가 엘리사를 우연히 만납니다. 먼저 16절에 보면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그 7천 명은 여럿, 다수에요. 이 여럿은, 주님에 의해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여럿은 기존의 모든 인간의 여럿, 인간세계의 인간끼리 교제하는 그 여럿을 하나로 묶어버려요. 그건 마귀가 되겠지요. 그렇게 묶어 버리고 이쪽의 구원받은 백성도 하나로 묶어 버리면 결국 여럿 대 여럿의 싸움을 일 대 일의 싸움으로 주께서 조정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여럿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일한 것은 없어요. 고생은 했지만 우리가 일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고생은 되게 해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 뒤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9장 19, 20절에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24마리죠)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사도 알아요. 인간의 교제의 최소단위가 가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가정에 가서 인사하고 오겠습니다, 해서 엘리야가 허락하니까 21절에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 들었더라.”
이 말은 뭐냐? 엘리사가 소를 잡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불태운 거예요. 가정출신의 나를 태워버리는 거예요. 누가복음 9장 58절에도 같은 말씀 나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니까 어떤 사람이 59절에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62절에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부모한테 작별하는 것도 구약에서는 허락되었지만 신약에서는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아요. 왜? 불가능성이 되어야 되니까. 부모한테 작별인사 안 하고 예수님 쫓아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이 말은,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불가능한 자라는 것, 그 한계를 끝까지 드러내는 말씀을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가 나오는데 이 열 처녀의 특징은 뭐냐? 등불, 한 분을 기다리는 등불이 필요한 거예요. 처녀 열 명이지만 그 10이라는 숫자를 무시하고 오직 한 분을 기다리게 돼요. 여럿이 한 사람을 기다리는데 그때가 밤이거든요. 밤을 밝히는데 필요한 게 뭐냐? 신랑을 신랑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게 뭐냐?
그게 뭐냐 하면, 나를 비추는 등불이 아니에요. 이 어두움에 오는 그 신랑을 비추는 등불, 그 등불 준비한다는 것은 이미 나의 단독성을 포기했다는 말이에요. 나는 내가 있음에 내가 사는 보람이 아니고 ‘주님 있음에 내가 어찌 됐든 나는 괜찮습니다.’ 하는 고백, 그것이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 신랑이 어두운 가운데 오니까요, 어둠 속에 우리가 같이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직 어두운 속에서도 신랑만 쳐다보고 있는 그 비유가 천국 비유입니다. 등불 비유입니다. ‘나’가 아니고 ‘여럿’이에요. 그게 교제입니다. 사귐입니다.
끝으로 요한일서 4장의 말씀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늘에서 쏟아진 주님의 속성이 요한일서 4장에서는 그렇게 표현되고 있어요.
그런데 요한일서 1장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너무나 명확하게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끼리의 자체 연대성, 내부적 교류 속에 시건방지게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도록 하는 방법은 뭐냐?
우리의 인생자체를 과거지사로 돌리는 방법이에요. 우리가 한 것은 죄밖에 없음을, 그걸 기뻐하는 거예요, 죄밖에 없음을. 그게 죄와 피의 만남입니다. 주께서 피 주시는 것은 너는 죄밖에 없었다는 것을 확정시켜 주는 고마운 표적이지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으니까요!(히 9:22)
그리고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그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성도끼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만날 때마다 좋은 친구죠. 만나면 좋은 친구. 어떻게 해야 되는가? 노래 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어떤 60대 부부가 있었는데 아내가 먼저 죽었어요. 죽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남편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메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 시험
뜬 눈으로 지새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세월을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 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 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성도끼리의 교제는 편지를 쓸 때 마지막 그것을 처음으로 돌리면 돼요.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안녕히 잘 가시게.” 일기 쓰듯이, ‘오늘 날씨가 맑다’ 그런 것 쓰지 말고 “여보, 나 먼저 가니 당신 알아서 고생 되게 하세요.”라고 하면서 줄줄이 하루하루 생활을 해가는 겁니다.
왜냐? 주님과 함께 있는 그 교제 안에 우리가 아직 살지는 않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과거를 과거로 만드는 그 작업에 우리가 죄인으로 현재, 벌써, 미리, ‘미리 크스리스마스’ 미리, 미리 참여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에게 준 교제요, 자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일을 내 위주로 했던 것이 얼마나 주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나 이해할 생각 하지 말고 주님 하신 일만 이해하면서 그 자유를 만끽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