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오른편
2024년 2월 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시는 것을 마지막 때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 드러내시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나뉘어진 내부 사정을 드러내지 않으신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없이 그냥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나게 되면, ‘하나님 우편’의 기능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의 기능은 하나님의 원수를 드러내고 심판하는 기능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즉 심판 기능없는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심판할까요? ‘하나님의 우편 기능이 누락한’그 하나님을 심판합니다. 인간에게는 존재의 바탕과 바닥을 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편’기능은 이 바닥과 바탕을 공격합니다. 즉 인간은 도무지 이 땅에 살 그 어떤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기능’으로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롬 4:17) 그래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자들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은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상태를 아에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다루어지고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의 기능에 의해서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살아 가고 있음이 밝혀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나무를 따먹을 때에 악마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선악 지식을 아는 결과에 대해서만 알려 주었습니다. “ 따 먹는 날에는 눈이 밟아져 신이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창 3: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의 효과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정녕 죽게 될 것이다”(창 2:17) 악마의 유혹을 따라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자기답게 만든다는 원리에 따른 겁니다. 즉 인간에게 온전함이란 스스로 자신의 창안자가 되는데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원인을 주입하므로서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보겠다는 방식으로 인해 자체적으로 자신이 완전하다고 자부하고 싶었던 겁니다. 즉 ‘나의 완전함’이란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알아보는데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성경의 다음 말씀이 해명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인간들은 자신의 운명이 자기 밖의 외부 요소로서 결정되어 버린 것에 대해서 대단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본인이 스스로 예수 믿어서 그 믿음으로 구원받아 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편의 기능에 의하면 인간은 구원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창세기 35:18-19에서 야곱의 아내 라헬이 죽습니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창 35:18-19) 여기서 아들의 이름을 놓고 야곱은 다른 의견을 내어놓습니다.
죽어가는 아내 라헬은 자신의 현 심정을 반영해서 아들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짓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도리어 그 아들 이름을.‘오른 손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변경시킵니다. 드디어 여기서 ‘하나님 오른손’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스스로 자신의 매장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즉 자신의 출생지를 매장지와 연결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므로서 비로소 자신의 매장지를 발견했습니다. 이삭은 아들 야곱에게 속아넘어가므로서 자신의 매장지를 발견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다른 형제에게 죽임을 당하므로서 자신의 매장지를 발견했습니다.
나를 이땅에서 죽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오른손의 기능을 작용을 합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그 효력이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었던 겁니다. 언약대로 죽은 자만이 언약대로 사는 방식입니다. 야곱이 라헬이 죽은 그 장소를 ‘오른손의 아들’이 출생한 자라로 봅니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베들레헴에는 예수님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2살 밑의 아이들이 몰살합니다. 출생의 자리가 죽음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거쳐서 예루살렘을 공략합니다. 그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곳입니다.
사람들은 그 성전을 유지하고 관리하고 그 성전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보장받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은 와해됩니다. 46년 동안 지어온 그 예루살렘 성전이 처음 자리를 대표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 자리는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종 깊이 들어 있는 본심입니다.(고전 2:10-11)
그 어느 누구도 이 십자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조건 예수님께서 곁을 지키고 떠나면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님께서 오른편에 앉으시면서 비로 성도의 마음 속까지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자기 원인과 상관없이 ‘효과’로서 주어진다는 말은 하나님편에서 이미 서류, 곧 언약이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9:16-17에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그 매장지에 합류된 자들입니다. 그들이 무슨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유언(언약)이 효력을 발생하는 자리가 그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하나님의 영광은 이제 성도 안에 ‘거룩한 로 인하여 성사됩니다. ㅗ룩성령께서 성도의 마음 속까지 들어오시므로서 ‘사랑의 온전점’이 성도 내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요일 4:13) 이제 성도는 자기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거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어디까지 주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가 늘 죽은 자임을 일깨워 주실 겁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이 사망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만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강-히브리서 1장 3절(하나님의 오른편)240204-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장 3절입니다.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로 나누어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로 나뉘기 전의 하나님은 구약 때의 하나님, 구약에서 내내 이어오던 그 하나님은 신약에 와서 아버지와 아들로 분명하게 그 내막이 드러납니다.
구약 때까지 있었던 그 하나님이 마지막에 신약에 와서 아버지와 아들로 나눠진다는 것, 여기 오늘 1장 2절의 말씀처럼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마지막 때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로 구분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구약 때는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그렇게 되는데 신약에 와서는 마지막 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고 이젠 아들을 모르면 지옥 간다, 그렇게 마지막 때에 드러나는 겁니다.
아들을 믿어야 구원받고 아들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을 왜 구약 때부터 이야기를 안 했느냐, 왜 마지막 때에, 세상 끝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느냐 하면, 그 동안 인간들이 알았던 하나님이 있는데 아들이 오시지 아니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다는 사실을 마지막 때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고 아들을 모르면 그동안 알았던 하나님이 다 잘못되게 알았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마지막 때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못되게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지막 때에 알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어요.
‘그동안 우리가 아들을 모르고 그냥 하나님만 알았으니까 그게 잘못됐다면 신약에 와서 이제는 하나님도 알고, 곧 아들도 알고 아버지도 알면 우리는 온전하게 아는 것이 되었다.’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이 그런 뜻이 아니고 아들을 몰랐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구원이라는 자체가 성립되지 아니한다는 그런 뜻이 있어요.
우리 인간에게 구원받고자 하는 이것이 하나의 악마의 미끼였다는 사실을 노출 시키는 겁니다. 제가 질문을 한번 해 볼게요. 속으로 답변해도 됩니다. 강의 시간이 아니니까요. 속으로만 답하세요. 교회를 통해서 천국 가는 겁니까? 교회를 통해서 천국을 간다. 1번 맞다. 2번 아니다. 교회를 통해서 천국 간다. 이게 맞는 이야기냐, 틀린 이야기냐? 우리 교회 교인 같으면 이야기할 거예요. “이거는 아니다.”
그러면 교회를 빼고 두 번째 질문 하겠습니다. 나는 천국 간다, 못 간다? 어느 게 맞습니까? 성경을 모르면 교회를 통해 천국 간다, 가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 간다, 가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제가 두번째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럼 내가 천국 가는 게 맞느냐, 틀리느냐?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천국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마지막 때까지 인간들이 계속 쥐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나, 이 자아에 대한 집착, 애착,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결집력, 이런 것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서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자 시도하는 거예요.
교회를 통해 구원받지 못한다, 그거 동의함. 그러면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된다, 그거는 인정함. 하지만 중요한 것, 질문 하나가 더 남아있어요. “과연 내가 구원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는 근거, 우리가 거기에 관심이 있었느냔 말이죠.
‘내가 구원받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면 되지?’에는 관심이 있는데 내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에 우리는 관심을 안 가져요. 아예 거기에 관심을 안 가져요. 나에 대해서 우리는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지옥 가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우리는 잘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설교를 할 건데, 설교할 내용은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았던 그들은 왜 구원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살아왔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 3절에 나옵니다.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우편(右便)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어디에 주목을 못 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오른쪽에 있다는 걸 주목을 못 하고 있어요. 왜 주목을 못 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구원을 하면 우리는 챙길 거 다 챙기고 알고 싶은 거 다 알았으니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5장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가르시고 그 뒤에 따라오는 군사들을 몰살시켰는데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나온 능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의 오른쪽에 의해서 파괴되는 대상이 아닌가에 대해 생각을 해야 돼요.
‘애굽의 군사들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의해 다 몰살당했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쪽의 어떤 기능으로 인하여 저쪽은 몰살되었는데 왜 이스라엘 우리는 몰살 되지 않는가?’ 거기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라요. 어디까지 가야 하냐면, 신약에 와서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야 비로소 알아요. 야, 우리가 하나님 여호와 믿고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 자체가 지금 오류적인, 우리 구원에 잘못된 착오가 있었다는 사실이 마지막에 소급해서 발견되는 겁니다.
이러한 오류와 착오는 창세기에도 나옵니다. 창세기 35장 16절에 보면 야곱이 두 아내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라헬이 죽습니다. 에브랏이라는 곳에서 죽게 되는데 죽으면서 마지막 아들을 낳고 자기는 죽습니다. 야곱이 받은 복이 뭐냐 하면, 자녀를 낳게 되어있어요. 야곱의 두 아내는 불임여성이면서 자녀가 생겨난다면 이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담긴 아들들의 나타난다는 조건하에 아들을 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야곱의 열두 아들은 뭔가 하나님의 숨어있는 계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어있어요.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준 것은 이삭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도로 죽음에 돌려주기 위해서 이삭을 준 겁니다. 그리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는 것도 아기를 못 낳는 가운데 아기를 주기 위함이에요.
이것을 로마서 4장에서는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런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린다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이 사람들이 진짜로 자기 구원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생각한다면 어디로 다시 돌아가야 되느냐? 내가 없을 때, 내가 죽는 자리에 돌아가야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제대로 발견되는 거예요.
야곱의 열두 아들도 그 기능을 하는데 마지막 열두 번째 아들 낳을 때 드디어 라헬이 죽습니다. 산고로 인하여 심히 난산할 때에 그때 혼이 떠나요. 자기 애는 낳았는데 자기가 죽어가니까 너무 슬퍼서 아들 이름을 ‘베노니’라고 지었어요. 이게 ‘슬픔의 아들’이에요. 슬픔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미가 이렇게 슬프다, 너는 태어나면서 어미의 슬픔을 잊지 말라고 슬픔의 아들이라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곱이 그 아들 이름이 슬픔의 아들로 있는 걸 가지고 의도적으로 이름을 바꿔요. ‘오른손의 아들’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 35:18)
오른손의 아들로 바뀌는 거예요. 오른손의 아들로 바뀐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야곱이 비로소 뭘 알았느냐 하면, 인간의 출생지가 곧 인간의 매장지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출현 되는, 계시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 땅에 출현 된 사람은 어떤 임무, 어떤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인간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평생을 살고 결국 그것으로 빠져들어가야 된다는 그런 역할이 있어요. 살아서 있는 이 모든 것이, 내 사는 것이 나를 만들어 준, 나를 없는 데서 있게 한 그 의미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그 지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약속을 남겨주기 위해서 오는 출처가 되고 그게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일단 구멍이 났는데 그 구멍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 오른편 옆에 계시는, 하나님의 숨어있는 아들이죠, 아들이 이 땅에 왔을 때 어떤 통로로 와서 어떤 통로로 귀환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에 언약이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지난 울산 강의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이 베들레헴이 라헬의 매장지가 됩니다. 베들레헴이 라헬의 매장지가 된다면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 운명은 이미 베들레헴에서 결정이 나버렸어요.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헤롯이 그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군대를 보냅니다. 따라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자체가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이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던 두 살 애들 다 죽었어요. 그 말은, 사람이 내가 죽은 자로 태어나는 이유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류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세계는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내용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아시는 내용이 하나님의 언약 사람들에게 그 계시를 전수하고 전달하게 되면 그 언약의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내가 어디서 죽으면 하나님과 합류가 되는가’를 드러내는 기능으로 사셔야 되는 겁니다.
이 베들레헴에서 장사됨으로 말미암아 장차 이 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출생하시는 장소입니다. 라헬의 죽은 자리가 메시아가 출생하는 그 지점이에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이 라헬의 매장지 말고 다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이런 사람들의 매장지는 베들레헴이 아닙니다. 헤브론 땅 근처에 있는 막벨라 굴에 그들이 있게 되죠. 그 막벨라 굴이 나중에 구약을 통해 신약까지 이끌어 오게 되면 그 장소가 어디냐? 베들레헴이 아니에요. 예루살렘입니다.
베들레헴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종교적인 것을 공격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드디어 갈릴리로 우회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곳이죠. 인간으로서는 마땅히 성전이 있는 곳이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라서 그들은 고집스럽게 예루살렘을 붙드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베들레헴 출신 예수님은 이미, 이미 죽은 분으로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그 바탕, 바닥 자체를 무효화시켜버립니다. 무효화시켜요. 예루살렘에 46년간 지은 성전이 있다는 거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인간으로서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 이것을 너무 귀하게 생각했죠. 내가 하나님을 앎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나라에 간다, 이게 인간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소망 같은 겁니다. 그걸 묵살해버려요. 그걸 없애버립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여호와를 믿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열심히 핍박했어요. 그 사람은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에서는 요지부동, 이건 누가 뭐래도 진리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진리라고 믿었던 그것이, 하나님을 믿었던 그것이 결국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하나님께서 둘로, 두 하나님으로 벌어진 그 취지에 대한 공격이 되어버린 거예요.
“하나의 하나님을 믿으면 되잖아.” 할 때 하나님께서 “너는 아버지와 아들이 분리되어서 아들이 이 땅에 보내진 취지를 아느냐?”에 대해 사울이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던 거예요. 그거 몰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오른편의 자리’라는 것은 이 땅에 있는 인간 자체를, 인간의 모든 존재하는 바닥과 바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걸 없애버리는 기능이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출애굽기 15장에 홍해 바다를 건너오는 애굽 군대, 그들은 땅으로 난 홍해 바다를 건너왔죠. 그런데 거기에 땅에서 두 다리 믿고 열심히 말과 병거를 달리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오른손의 권능으로 폭파시키고 그걸 공격한다는 그 내용에 대해 애굽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뭘 딛고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이게 나쁜 짓이고, 이건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을 어떤 인간도 해본 적이 없어요. 인간은 바탕이 없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어떤 바닥이 없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이 땅에 인간이 살 어떤 자리도 없어야 된다는 것을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 하나님 섬기면 되는 줄 알았던 겁니다.
다시 창세기 라헬을 통해 드디어 야곱이 깨닫는 것은 뭐냐? 오른손이라는 이름을 왜 붙였느냐? 오른손의 아들, 오른손이라는 아름은 바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일하는 시작점이 되고 출발점이 되고, 하늘에 있다는 그 오른쪽, 하나님의 오른쪽, 그 오른쪽이 우리 존재의 새로운 바탕이고 존재의 바닥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지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땅도 우리가 존재할 만한 그러한 바닥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여기서 야곱이 발견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 본인이 바닥이 아니고, 기초가 아니고 이삭이 아브라함 자신의 기초요, 바닥인 것을 알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지만 이삭은 몰랐어요. 나중에 이삭이 아들을 통해서, 계시를 품고 있는 두 아들을 통해 아들에게 속고 난 뒤에 자기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꼴 그대로 복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나를 지울 수 없기에 나를 지워버리기 위해 자식을 통해서 나의 존재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로 하여금 있는 이삭이 없는 이삭으로, 살아있는 이삭이 죽은 이삭으로 귀소 되고 자꾸 돌아가게 하는 그 언약적 기능이 아브라함에도 있었고 이삭에게도 있었던 겁니다. 이번에는 야곱 차례에요. 벤야민 낳고 난 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전부 다 잃어버린 자식이 돼요. 자식이 다 무효가 되는 겁니다. 나의 자식이 아니었던 거예요, 나의 자식이.
아내를 죽게 했던 그 오른손, 하나님의 능력이, 아내가 죽은 그 자리가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하고 출발하는 자리로서 야곱은 그 아들 이름을 오른손의, 하나님의 아들로 지어준 거예요. 능력의 하나님. 어느 인간이 죽을 능력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이 아니면 인간은 기꺼이 죽지를 않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게 이건 내 모습이 아니야. 이건 가짜야. 죽는 모습이 내 진짜야.’라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아무도 수용할 수가, 받아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야곱은 뒤에 죽었던 아내를 생각해서 아내의 첫째 아들 요셉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잃어버린 아내가 너무 그리워서. 그래서 채색 옷도 입히고 특별대우를 하죠. 그런데 그로 인하여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죽였습니다. 그럴 때 ‘네가 사랑하는 네 자식을 내게 바치라’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그대로 복사되어 야곱 내 인생 속에 깊숙이 박아놓고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날 사랑한다는 것,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대비가 되고 정반대가 되는 일인 것을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면 이걸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자기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거든요.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3장, 선악과 따먹는 이야기로 한 번 되돌아 가봅시다. 더 가봅시다. 거기 가보면 선악과를 따먹는데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악마가 따먹으라고 했어요. 그때 아담과 하와는 악마의 의도를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악마는 선악과를 따먹는 그 결과에 대해서 알려주었습니다.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신처럼 된다는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미리 아시고 아담에게 미리 선악과 따 먹는 효과에 대해 언급을 해줬습니다. 그 효과가 뭐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라고 했어요.
이 효과와 따먹는다는, 내가 내 행동에 원인을 제공하는 이 사이에 엄청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담과 하와가 몰랐습니다. 효과라는 것은 내가 뭘 하지도 않았는데 외부에서 밀려오는 영향력을 가지고 효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뭘 하지도 않았는데.
아까 기도하신 분 말씀대로 “내가 일한 것도 없는데…” 효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악마의 꾐에 빠져가지고 그다음부터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면, 내가 나한테 원인이 되어버렸어요. 내가 나한테 원인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내가 어떻게 행하냐에 따라서 내가 어떤 결과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었다, 이게 바로 악마가 그렇게 해서 망한 것처럼 악마가 인간이 똑같이 자기처럼 되어 망하도록 유도한 거예요.
인생은 네가 꾸려나가는 것이라는 거예요. 맞습니까? 우리 인생?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를 몰라요. 내가 믿지를 않았는데 내가 믿기로 한 그 순간부터 나는 구원된 자고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마귀가 우리에게 알려준 거예요.
“네가 뭘 안 했잖아? 그러면 안 돼. 뭘 해야 돼. 예수 십자가를 피를 믿어. 예수를 믿어. 그럼 너는 구원을 받아.” 내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그 행위가 나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그러한 공식, 방식을 인간은 그때부터 악마에 의해 받기 시작했습니다.
효과가 아니고 내 인생은 내가 챙기는 거예요. 그 작업을 위해서 악마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했습니다. 잠언서를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와요. 그게 과연 성경적으로 맞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죠. 잠언서 16장 1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참, 보통 문제 아니죠, 이거?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어도 그건 그거고 결과는 나한테서 난다는 겁니다. 잠언서 16장 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나의 일이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네가 어떤 계획, 하나님까지 동원시켜서 어떤 계획을 할지라도 그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생각을 네가 하고 있다. 네가 수상해, 네가.” 그런 뜻이에요.
잠언서 20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사람이, 내가 계획을 한다든지 나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계획을 잡는 것 자체가, 내가 원하는 인간이 아니기에 너는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으로 폭파 대상이라는 거예요.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줘도 인간들은 꿈쩍도 안 해요. 그건 전체를 아는 하나님 뜻으로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내 나름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는 그런 오기 같은 것이 발동을 하는 겁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라는 정신 분석가에게 손자가 있었는데 손자가 한 살 때 하는 놀이를 봤어요.
엄마가 장에 갔는지 잠시 헤어지고 프로이트 할아버지 자기하고 놀면서 아이가 뭘 하느냐? 실패, 던졌다가 잡아당기면 또르르 굴러오는 그 실패를 가지고 놀면서 “포(fort)!”, 하고 던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또 실을 잡아당겨서 “다(da)!”, 여기 있다, 하고 놀아요.
거기서 프로이트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1살 아기입니다. 인간에게 어떻게 자아가 발생 되는가를 알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엄마와 내가 동체, 같은 몸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엄마가 장에 가고 없을 때 뭘 느꼈느냐? 어떤 부재의 자리입니다. 엄마 없으면 그 전에는 울었는데 약간 커서 한 살쯤 되니까 엄마의 빈자리를 뭘로 채우느냐? 자기 놀이, 자기 게임으로 채우는 것을 발견했어요.
‘아, 인간의 자아가 저렇게 형성되는구나.’ 엄마의 부재, 그 빈자리를 자기의 명령 지시 요구와 의지에 의해 채우고요, “포~!” 그다음에 “다~!” 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잡아당김으로써 내가 스스로 내 안에서 자체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으로 인간의 자아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 지식을 알고부터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런 하나님의 효과란 지시, 그건 들어오질 않아요, 들어오지도 않고 나에게 없었는데 새로 들어온 것, 선악 지식을 내가 대상화해서 저 선악지식을 내가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서 나는 자체적으로 완전한 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예요, 선악 지식으로서. 마귀가 했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뭔가 미흡하다, 모자란다 싶으면 그건 선악 지식으로 나한테 나쁘지 않고 좋게 되는 타인을 만나서 타인의 지식이라든지 행동이라든지 도움을 받음으로써, 그것을 대상화함으로써 그걸 도로 나에게로 흡수 통합을 시키는 거예요. 자체적으로 통일 시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걸 통일시키듯이 인간은 이미 자체적으로 자기가 작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통일시키는 거예요.
통일시키면 내가 아무리 남들 보기에 못났고, 모자라고, 가진 것도 없다 할지라도 내가 나라는 사실로 완전체가 됐다는 기쁨이 자기한테 제공되는 겁니다. “나는 나다. 뭐? 끝!” 이거에요.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서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하니까 ‘내가 믿지 뭐.’ 왜? 나는 내 자체가 어떤 행동을, “포~!” “다~!” 내 자체에서 성경을 보고 “믿습니다.” 믿어서 결과는 “천국 내 거! 뭐가 문젠데?” 이게 진리 아니냐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선악 지식 차원에서 제대로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만한 인간으로 살아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마귀도 똑같아요. 마귀도 똑같은데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결정적 허점을 준 게 있어요. 그게 무저갱입니다. 마귀를 어디에 집어넣었느냐 하면, 무저갱에 집어넣었어요. 이게 감옥인데 그 특징이 바닥이 없어요. 무저(無低), 바닥이 없는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마귀의 꼬임에 빠진 인간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자체적으로 나의 완전체, 누가 뭐래도 ‘욕을 해. 누가 뭐래도 나는 나한테 귀해. 소중해. 나는 나를 사랑해. 내가 남아있으면 그걸로 나는 족해.’라고 하는데, 그래서 재산이든 뭐든 자꾸 모아요. 성경 지식도 모으고 하는데 이게 특징이 뭐냐? 바닥이 없어요. 던졌는데 없어요. 또 던졌는데 없어요. 구멍이 없어서 아무리 집어 넣어놔도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 매장지에 집어넣은 거예요. 자기 무덤에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계속.
악마가 무저갱에 갇혀 아무리 해도 악마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갈 수가 없습니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것은 인간도 마찬가지거든요. 로마서 7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사망의 몸에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통밥으로 만든 거예요. 대통밥 알죠? 대나무로 만든 거예요. 대통밥엔 마디가 있어 바닥이 있지만 인간은 바닥도 없어요. 그냥 통과에요.
열심히 살았는데 누구 집 출신이고, 초등학교 어디 나오고, 국제 중학교 나와서, 하버드 대학 나와서 미용사 해서…, 전에 예 안 들었습니까? 그냥 통과해요. 그냥 흐를 뿐이에요. 액체 같아요. 그냥 흘러가요.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왜? 우리 몸 자체가 대나무 통 같아요. 그냥 사망의 몸이에요. 저축을 해도 소용없고, 한국 축구팀 4강 올라가도 아무 의미 없고. 바닥이 없으니까. 바닥, 바탕 자체가 없어요.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언약이 와야 돼요, 언약이. 인간은 자기가 자기 인생 책임을 지려 하고, 자꾸 어떤 행위를 하려 하고, 자기에게 지시와 명령과 원인자로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과 멀어지냐 하면, 나 말고 다른 분의 일방적인 효과에 대해 점점 더 멀어지는 겁니다.
효과는 어디서 오는가? 효과는 계약에서 오는 거예요. 계약서에서 와요, 계약서. 아브라함의 유언장이 이삭이고요, 이삭의 유언장이 야곱이에요. 야곱의 유언장이 요셉입니다. 아브라함은 유언장을 남긴 거예요, 유언장을. 그 유언장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게 히브리서 9장 16절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9장 16절에 보면, 상당히 난해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꼭 볼 필요가 있어요.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되어있어요. 효력이 없다. 예수님 살아있을 때 예수님 붙들고 주여, 주여, 막 베드로가 “목숨까지 다 바치겠습니다.” 해도 효과 없어요.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기 의지와 결단, 그것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뭘 몰랐는가? 예수님이 죽어야 자기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자기가 몰랐어요. 예수님이 죽으셔야 예수님이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자기 원인자로서의 자기를 포기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능력도 없는 인간,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그 문제, 그것은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기 하나님의 우편이 나와요. 하나님 우편이 어떤 자리냐 하면,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하는 자리, 원수를 원수로 폭로시키고, 그에 대해서 적합한 징벌을 내리는 자리가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에요.
그러면 원수가 누구냐? 선악과 따먹은 우리가 원수지 뭐 원수가 누가 있어요? 우리가 사망의 몸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원수 됨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어떤 분은 ‘우리가 예수 믿고 열심히 바르게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우리가 하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말씀대로 그렇게 하면 되지요.’라고 아직도 자기원인을 고집하는데 로마서 3장에 보면 그걸 아주 일거에 잘라내 버려요.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사망의 몸으로서는 영광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갈 수가 없어요. 사망의 몸은 징벌을 받아야 되고 합당한 저주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1장 3절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했는데 이 대목은 바로 이사야 6장에 있는 대목이에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올라갔을 때 갑자기 성전이 환해지면서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3절에 보면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땅에 충만할 때 그 현장에 있던 이사야는 어떤 고백을 하느냐? 5절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아까 본 로마서 7장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똑같은 고백이에요. 영광을 봤기 때문에 그 영광 앞에서 ‘나는 망하는 것이 맞다, 당연하다, 지당하다, 나는 지금껏 망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망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구나.’
이게 자연적 고백이 되는 거예요. 이런 고백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놀라운 사실은 이런 고백 한다고 “네가 그런 고백 했나? 구원해줄게.” 이런 것 없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사야 6장 끝에 보면 잘려야 되는 거예요. 십분의 일로 잘려야 돼요.
잘려야 뭐가 나오느냐? 거룩한 씨가, 이 땅에 그루터기가 나타나요. “그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주님께서는 성도를 잘라내고 성도 안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매장지를 찾아내는 겁니다. 거룩한 씨, 예수님과 합장했던 그 씨, 매장지, 주님이 너와 함께 죽었다고 주님 먼저 죽으시고 그 다음에 우리를 잡아당기는 그 매장지,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매장지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안에 들어 있지요, 우리 안에. 우리 안에 그 매장지가 있다고요, 우리 안에.
오른손의 능력이 안에 들어온다고요, 오른손의 능력이. 하나님과 땅이 통하는 그 지점을 우리 안에 집어넣었어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보기에 가장 기본적으로 뭔가 잘못돼 있는 것을 언급을 하고 싶어요.
설교 시작할 때 한 질문이 뭐냐? “교회가 사람을 구원시키느냐?” 아니요. 예수님이 구원하지요. 그러면 교회 빼고 “너는 구원 받느냐?” 아니지요. 구원받을 수가 없지요. 사망의 몸이 무슨 구원을 받아요? 그러면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제가 똑같은 말씀을 보는데요, 이게 보여야 돼요. 로마서 8장 23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라고 하면서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본문은 뭐냐 하면, 이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닌 거예요. 히브리서 7장 2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께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한다는 말을 여러분은 이렇게 들으셔야 돼요. 구원 문제가 이게 내게 속한 문제가 아니고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끼어들 나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주님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닌 거예요, 구원이! 왜 남의 일에 우리가 신경을 씁니까? 주의 일인데.
성령께서 간구하고, 주께서 기도하고. 내가 다 하는데 너는 그 하신 일의 효과만 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왜 못하는가?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상당히 난해한 이야기지만 성경에 나오니까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고린도전서 2장 10, 11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아무도 알지 못한다, 여기에 밑줄 쫙!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아무도 알지 못했어요. 내가 아는 것은 내 안의 성령께서 나보다 더 많이 아셔요. 내가 걱정하는 게 아니고 내 속의 성령께서 걱정 더 해요. 왜? 깊은 것은 성령님의 몫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는 거예요. 정신 차리라고 뒤통수 패고 때리고 난리도 아니지요. 네가 없어야 네가 있고, 네가 죽어야 네가 산다는 원리에 따라서 계속 뒤통수 때리는 거예요. 네가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너는 주님의 유언이에요, 유언. 유언장, 우리는 하나의 계약서가 돼요, 계약서.
계약서에 있는 글 내용은 예수님이 쓰시는 거예요, 성령님이 쓰시는 거예요, 우리가 쓰는 게 아닙니다. 내 인생 이렇게 꾸려 나가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쓰신 내용대로 우리가 그대로 이끌려 가는 거예요. 그 내용이 성경책이에요. 계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나에게 어떤 원인을 제시할 수가 없고, 제공할 능력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했는데 왜 마지막 때냐? 이게 심판 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심판 때에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사람과……, 인간들은 스스로 자기를 창안하고 있어요. 이렇게 자기를 스스로 창안하는 사람과의 그 구별이 마지막 때에 이루어져요. 그 심판이.
내가 예수를 위해서 교회 봉사했습니다, 예수를 위해서 헌금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믿었습니다, 이런 것. 이런 것들, 이 가라지 치우는 작업, 치우는 작업이에요. 이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심으로써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어요.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구원은 이렇게 돼요. 선물이에요. 에베소서 2장의 하나님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선물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우리한테 박혀서 선물이 선물답게 됨으로써 우리는 이제는 누구한테, 곧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늘 얻어맞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에요. 그리고 이 깊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십자가를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네가 하나도 몰랐던 사건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만약에 누가 십자가를 미리 알았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고린도전서 2장 8절에서 하고 있거든요.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 말은 뭐냐? 이미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이미 일어나버렸어요. 따라서 어떤 인간도 그에 대해서는 전무, 없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가지고 때리는데, 늘 때리는데 때릴 때 뭐냐?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라는 식으로 때리는 거예요.
“손흥민 한 골 넣으니까 좋디?” “좋아요!” “에라! 한국 축구 4강 가니까 좋아?” “좋아요!” “에라, 그럼 그냥 이 땅에서 살아!” 이 땅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십자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너도 몰라, 아무도 없다는 것을 효과로서 뒤늦게 소급해서 우리에게 알려 줄 때 ‘야, 내가 몰랐는데 구원받았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에 대해서 설명해도 이것은…, 백날 신학 동원해서 십자가를 설명해도 그것은 십자가 근처에도 안 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십자가 아는 그것을 무효화시키고 십자가로 구원하는, 십자가 선물로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 그게 우리에게 성령으로 선물로 줘서 그런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계속해서 주시는 선물이에요. 세례받은 그분이 늘 우리에게 세례를 주는 겁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요 1:33)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끝으로 생각할 것은, ‘방금 이야기한 그것을 우리가 말로 잘 설명하면 나 구원받은 사람 맞아요?’ 하는 생각이, 설교 다 끝나고 난 뒤에 그런 귀신이 또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요렇게, 저렇게 설명하면 저 구원받은 것 맞습니까, 라고 하는데 성경이 그걸 차단시켰습니다.
요한1서 4장 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라고 하면서 요한1서 4장 1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2절부터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온전히 다 이루었다 그 말이지요.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여기서 인간의 언어를 다 빼버렸어요.
사랑하신다. 어떻게? 성령으로. 성령을 어떻게 아느냐? 사랑으로. 뭐예요 이거? 이거 뭐냐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그러면 성령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주신 영. 그러면 성령은 뭐냐? 우리 자신을 늘 매일같이 죽이게 하는 영.
우리가 안다는 것, 내가 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런 나라고 우기게 만드는 것을 늘 제거하고 죽임으로써 있는 것을 없게 하시고, 살았다는 것을 죽게 함으로써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계약서로서, 효력이 있는 계약서로서, 주님의 유언장으로서 이 땅에 우리를 남겨두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 하나님 오른편에 있다는 의미를 우리가 알았습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어떤 인간도 오른 편에서 오신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주님의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가는 그러한 성도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