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사흘의 죽음

아빠와 함께 2024. 1. 28. 20:27

사흘의 죽음 

2024년 1월 2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2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0-11에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고 나옵니다. 즉 이왕에 창조 한 것이 쭉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받기 위해 창조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창조는 기존의 세상 창조가 아니라 저주와 복의 창조입니다. 지옥과 천국의 창조입니다. 따라서 이왕에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 주시니 끝까지 천국까지 책임지실 것이라고 생각은 잘못된 겁니다. 도리어 창조했기에 세상 멸망할 때, 우리의 육신도 같이 망해야만 하는 육신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갑니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존재를 가지고 그것을 창조하신 분을 안다고 해서 바른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지어졌다’는 이야기는 이 예수님이 사람들의 본성으로 천대와 미움과 거부를 사정없이 당한 바로 그 분인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박해받은 분이 하나님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지금껏 ‘나’라고 규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야 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자체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끊어짐과 이어짐이 형성되어 있는데 우리 자신들은 기어이 끊어짐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존재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사흘이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날 저녁에 당장에 부활시키지 않는 겁니까? 왜 한 달 뒤에 부활시키지 않으시는 겁니까? 왜 하필이면 사흘입니까? 그 구체적 내막은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게시록에 나오기 전에 먼저 우리는 호세아를 봐야 합니다.

호세아 6:1-2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2.  After two days will he revive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in his sight. 고 되어 있습니다. 이 호세아 말씀은 먼저 예수님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요 5:39) 39.  "You search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in them you have eternal life; and it is these that bear witness of Me; 이 호세아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곧 새로운 창조를 위한 절차에 관한 겁니다. 1. 자기 사랑하는 사람(백성)은 불러다가. 2. 찢으시고. 3. 도로 싸매어주시는 겁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를 바로 ‘때’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한 때, 두 때, 세 때’가 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2:14에는 14.  And to the woman were given two wings of a great eagle, that she might fly into the wilderness, into her place, where she is nourished for a time, and times, and half a time, from the face of the serpent. ‘한째, 두 때, 세 때’가 아니라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 사건 당 ‘한 때’만 작용되는 것이 인간 세계의 시간 개념입니다. 한 사건에 대해서 ‘반 때’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반 때’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두 개의 온전한 결과를 양산할 경우에 가능합니다. 즉 세 번째 절차의 내용을 품은 사건은, 온전한 ‘죽은 자 세계 창조’를 위한 것과 온전한 ‘영원히 산 자’를 위한 세계 창조가 겹쳐서 들어 있게 됩니다.

두 개의 온전함이 한 사건에 포함되니 ½ 때가 됩니다. 즉 ½+½= 두 개의 사건이 됩니다. 이와 같은 예가 1 이레를 반 이레로 쪼개서 ‘반+반’이라는 형식으로 그 담긴 사건의 앞 뒤가 서로 상이함을 묘사하는 방법입니다. 27.  침략하여 들어온 그 통치자는 뭇 백성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굳은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한 이레의 반이 지날 때에, 그 통치자는 희생제사와 예물드리는 일을 금할 것이다. 그 대신에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흉측한 우상을 세울 것인데, 그것을 거기에 세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끝 날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이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7) 27.  "And he will make a firm covenant with the many for one week, but in the middle of the week he will put a stop to sacrifice and grain offering; and on the wing of abominations [will come] one who makes desolate, even until a complete destruction, one that is decreed, is poured out on the one who makes desolate."

요한계시록 11:9에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십자가 사건과 동질의 사건을 묘사하면서 그 사건 속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반(半)의 사건을 담아서 표현합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9.  And those from the peoples and tribes and tongues and nations [will] look at their dead bodies for three and a half days, and will not permit their dead bodies to be laid in a tomb.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따로 계심을 드러내는 절차를 진행시키신 겁니다. 두 개의 지층판이 끊어지고 그 단층면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런 단충면을 보이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요소가 들어있지 않는게 됩니다.

사도신경에 봐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기준이 바로 자기 행함으로 사는냐와 주님의 행하심으로 사느냐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끝부분에 최후의 심판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책’이요 다른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 키우고자 하는 모든 것이 기록된 그 행위책은 그 자체로 지옥갈 자들이 범주가 됩니다. 반면에 생명책은 오로지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이 기록되어 있기에 천국에 가는 자들의 범주가 됩니다.

선지자들의 특징은 자기 것을 하나님에게 빼앗긴다는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남(아비멜렉 집안)의 불임을 치료해주면서 정작 자신의 아내는 불임 그대로입니다. (창 20:17) 그리고 하갈은 자기 자식이 이스마엘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로부터 핍박을 받고 쫓겨나가면서 기어이 자기 자식만큼은 사수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 이삭을 하나님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내 것 없음’이 성립됩니다. 이는 곧 ‘잉태치 못한 자만이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를 나타내 보여줍니다.(갈 4:27)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자기 내부 안에 밀고 들어선 자를 뜻합니다.

주님에 의해서 성도는 자기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반복적으로 작동이 일어납니다. 이는 곧 이미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되어 오로지 ‘이미 죽은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원칙’을 나타냅니다. 십자가 자신 분만이 우리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자기 일에 돌아 본다고 정작 혼인잔치를 소홀히 하지는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강-히브리서 1장 1-2절(사흘의 죽음)240128-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장 1-2절입니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 이제 시작하는데 히브리서 1장 초장에 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10절에 나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해서 누구나 아는 이야기, 천지를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했는데 11절에 보면 그것들이 멸망할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정 창조한 것은 천지냐, 아니면 천지는 하나의 예비적인 것이고 다른 것을 창조하시는? 다른 것을 창조하십니다. 그것은 뭐냐? 복과 저주를 창조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인간으로 지음받았을 때 우리가 지음받은 이 육신도 예비적인 거예요.

천국을 창조하시고 지옥을 창조할 때 그 창조에 우리 몸은 어디에서 어떻게 창조의 자재가 될 수 있느냐? 이게 우리에게 남아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진다, 하는 그 하나님, 이건 진짜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만들었기 때문에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히브리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1장 2절에 나온 것처럼 모든 세계를 지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게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 천지를 창조했다, 라고 어떤 변경 요소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왜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하느냐?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하느냐?’ 선지자들이 평소에 부분적으로만 이야기를 했던 건데 이 선지자들의 이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람들이 핍박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선지자의 주장은 이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내가 만들어졌다.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만들어줬다. 하나님은 만들고 나는 만들어졌으니까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니까 난 신자다.’ 이걸 달리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천지가 멸망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그 멸망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만들어진 우리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더 깊이 나가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든 게 아니고 멸망을 만들었으며, 하나님은 나를 만든 게 아니고 죽음을 만들기 위해 나를 만든 셈이 되는 겁니다.

죽음을 만들었다는 것은 생명을 따로 만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거예요. 따라서 이 히브리서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천지를 만들었다는 이 의미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이 아들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아들, 이 예수님은 인간들이 그동안 선지자 특히 구약의 유대인들이죠. 선지자들이 공부를 많이 했을 건데 인간이 많이 공부를 해 봐야 아들을 믿을 수 있는 게 못 된다는 겁니다. 이건 인간이 단순히 실착, 실수, 또는 철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 전체, 이 부분으로 된 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차단돼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고, 그걸 뭉개버리고 그 뭉개진 사실을 안다고 해서 전체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선지자는 부분으로 이야기하는데 선지자는 여러분, 상속자가 아닙니다.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상속자예요. 선지자는 상속자가 아닙니다. 왜냐면 선지자는 부분으로 알거든요. 그런데 부분을 다 끌어모은다고 이게 전체가 되는 게 아니에요.

부분의 총체, 부분의 전체와 진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전체 사이에 뭐가 있느냐? 단절이 있습니다. 이게 끊어져 있어요. 수정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게 안 됩니다. 인간들이 인간들을 만나봐야 그저 부분과 부분으로 알 뿐이지 전체는 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이 단절돼 있다는 이 사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이 사실이 사도신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신경 아시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거기에 보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이렇게 되어있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죽고 난 뒤 15분 후에 살리지 않고, 일주일 뒤에 살리지 아니하시고, 두 시간 뒤에 살리지 않으시고 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는가? 왜 사흘인가? 사흘의 뜻이 뭐냐? 왜 하필이면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는지 사도신경에 보면 해답이 나와 있어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러 오시려면 예수님이 사흘 동안 하신일 속에서 어떤 자가 산자고 어떤 자가 죽었는지 그 기준이, 표준이 사흘 동안에 형성 돼야 해요. 사흘이라는 기간, 예수님이 죽은 기간이 하루가 아니고 3일이에요. 예수님이 3일 동안 죽어 계신 거예요. 죽어 있으면서 3일 동안 예수님은 뭘 통과했는가를 봐야 되는 겁니다.

그게 호세아에 보면 나옵니다. 호세아 6장에 보면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라고 돼 있어요. 1.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For He has torn [us,] but He will heal us; He has wounded [us,] but He will bandage us.
2.  "He will revive us after two days; He will raise us up on the third day That we may live before Him.


호세의 이 이야기는 일단 먼저 예수님이 이루어 주셔야 되거든요. 우리가 되기 전에 예수님 단독으로 호세아의 말씀이 그대로 여기에 응해야 됩니다. 순서가 그런 거예요. 그런데 여기 보게 되면

먼저 존재하는 자가 있고, 여기 ‘우리’라고 되어 있는데,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 존재하는 것을 찢어버려요. 이게 두 번째 단계 순서고요.
세 번째, 찢어진 것을 도로 낫게 하시고, 즉 싸매 주시는 단계가 있어요. 이렇게 세 번의 절차가 필요한 겁니다. 원, 투, 쓰리, 에요. 그 세 번의 절차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3일 뒤가 우리가 사는 날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도대체 이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는 날이 되는가?

호세아 6장 이 대목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사흘’이라고 하지 않고 ‘한때’ ‘두 때’ ‘반 때’라고 되어있어요. 한때, 두 때, 반 때. 인간의 시간에서 때는 반 때, 2분의 1 때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루 단위로 계산할 때 하루, 하루, 하루에요. 반나절, 하는 게 이게 없어요.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3일 동안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 둘, 삼, 그걸 요한계시록에서는 한때, 두 때, 반 때, 라고 설명을 하면서 그 한때, 두 때, 반 때, 일어났던 소위 죽은 자들이 그 3일, 예수님 죽은 그 기간 동안에 함축돼 있던 지옥 갈 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기간이에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보게 되면…, 여러분, 상당히 난해한데요. 상당히 어려워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인간이 이미 시간 계산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어려워요. 인간이 시간을 모르면 이게 어렵지 않은데, 시간이 예수님께 속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인간은 시간을 계산하기 때문에 인간이 계산하는 시간과 주님의 시간이 다른 점을 인간은 수용하기가 상당히 곤란한 겁니다.

인간의 시간은 뭐냐? 자기 몸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따져서 인간은 시간을 측정돼요. 그런데 정확하게 해서 그건 시간이 아니고 시계입니다. 인간 자체가 자기 몸이 시계로 되어있어요. 시계는 여러분, 시간이 아니에요. 이런 말도 참 어려워요.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고 시간 속에서 자기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이용하는 것 밖에 되질 않습니다.

【저만큼 가버린 세월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나훈아가 그런 이야기 했어요. “벽시계는 고장 났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안 난다.” 어떻게 보면 철학적인 중요한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인간은 멸망하는데 부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쓸 때 인간의 말로 썼잖아요. 인간의 언어 개념을 사용했다고요.

그럼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내게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왜 굳이 그 말을 해야 하느냐 하면, 인간들은 성경을 자신을 위해 쓴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도 생각이 틀어지는 거예요. 마가복음 5장 39절에…, 참, 이 성경을 보면 전부 다 인간들 위주로 살아가는 경향들이 있어서 성경은 둘 다를 소개하는데 그 둘 다를 다 알아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35절에 보면 야이로의 딸이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장례식에 갑니다. 가니까 그때 주위 사람들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아, 참! 오늘 이 히브리서와 대응해서 너무나 꼭 필요한 말을 지옥 갈 자들이 해주는 거예요. 지금 이 야이로의 딸이 죽을지 말지 숨이 간당간당 이게 아니고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었는데 예수님이 와도, 천하에 누가 와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이미 죽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도 네가 예수 믿냐, 죽었잖아.”

이 말은, 살아서 예수 믿는 것은 다 거짓말이고 가짜라는 거예요. 이건 예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혹시 살려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이건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히브리서에서는 모든 게 멸망하게 되어있어요. “창조됐냐?” “예.” “그럼 멸망해야 되겠는데!”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이 너를 만들었어.” “예.” “그럼 너 죽어.”

이게 원칙이에요, 이게. 히브리서의 원칙이라고요.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어버렸는데 당신들 자꾸 예수 찾지 마라. 끝났어. 그만 괴롭혀, 그만 괴롭혀.”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정말, 그 불신자들이 이야기했죠. 이게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층판이 끊어졌어요. 단층이에요. 단층이 되면 끊어진 단면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끊어진 단면이에요. 너희들이 부분적으로 아는데 그 부분은 다 합쳐도 절대로 전체가 될 수 없다.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길은 끊어져야 된다. 왜냐면 심판을 심판답게 하기 위해서 끊어진 그 기간 동안에 주님 하신 것, 어떤 자가 죽은 자고 어떤 자가 산 자인 것을 주께서 정리하는 그 순서, 절차가 필요한 겁니다.

그럴 때 이제 예수님이 와서 “괴롭게 하지 마라”고 하는 걸 들으시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막 울고 있죠. 예수님이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가니까, 40절에 보니 어떤 사람은 비웃었어요. 비웃게 된 이유가 예수님께서 “얘는 지금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 하니까 비웃은 거예요.

“예수 당신은 우리가 납득할 만한 이야기만 해야 돼. 그런데 당신은 지금 우리가 의도적으로 믿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예수님 보고 비웃는 거예요. “이래서 대화가 되겠어? 당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겠어? 당신 우리를 구원하는 게 소기의 목적이잖아. 안 되잖아?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줘야 우리가 믿지.”라고 나온 거예요. 예수님이 비웃음을 당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달리다굼’이란 말을 했어요. 이건 산 자한테 이야기 해도 산 자가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다른 사람들 다 나와 있는데, 자기 아버지도 있고, 다 있어요. 그런데 너희들 말고 나는 죽은 자를 상대로 이야기 한다는 거예요. “죽은 자야, 일어나라.” 비웃을 만해요. 죽었는데 무슨 말을 들어요? 그런데 ‘달리다굼’ 하시고 손을 잡으시니 소녀가 “아이, 잘 잤다.” 하고 일어나는 거예요.

소녀는 죽은 거 맞습니다. 죽은 거 맞는데 그 소녀가 살아난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창조, 예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의 창조의 위력에 의해서 소녀는 살아났어요. 여기에 대한 적절한 예는 이렇습니다. 유명한 미국의 마술사 카퍼필드가 있는데 저도 어릴 때 카퍼필드 마술을 본 적이 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 트릭을 알지만 그 때는 너무 놀랐던 게, 세트가 아니라 진짜 중국의 실제 만리장성 앞에서 자기가 만리장성 그 속으로 들어가요. 들어가는 장면을 카메라로 보여줘요. 물론 그림자로 보여주지만, 보여줘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 말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만리장성인데 주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 소녀한테 주의 말씀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을 믿을 생각을 했어요. 지킬 생각 했던 겁니다. 지켜서 뭐 하는데요? 안 죽으려고. 지켜서 뭐 할 건데요? 안 망하려고 하는 거예요. 망하라고 만들어 놨는데 안 망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거 아주 대단한 마귀의 고집이에요.

인간들은 계산은 3일이에요. 예수님이 사흘 동안 있었으니까. 3일이 아니라 순서를 이야기해요. 한때, 두 때, 그다음에 반 때에요. ‘한때’ 멀쩡한 거, ‘두 때’ 찢어버리는 거, 세 번째가 ‘반 때’에요.

한때, 멀쩡한 예수님,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멀쩡해요.

두 번째, 아버지가 예수님을 찢어버립니다.

호세아 말씀은 예수님부터 먼저 지켜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킨 그것이 그대로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호세아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살아서. 세 번째가 ‘반 때’입니다. 이 반 때가 무슨 뜻이냐?

2분의 1인데 그다음의 사태, 그다음 세계의 전체를 2분의 1로 나눠서 보여주는 거예요. 2분의 1은 죽은 자의 전부가 2분의 1, 나머지 2분의 1은 천국 갈 사람의 전부가 2분의 1, 둘이 합하면 3일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날이 되는 거예요.

사도신경 다시 보게 되면 주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에서 살아나신 이유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 이거에요.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책이 두 권이 있는데 한 책은 인간의 행함에 대한 책이다, 인간의 행함은 인간이 자기에 대해 서술한 거예요. 내가 이렇게 뭘 했다는 걸 서술한 거예요. 이게 행위책이에요.

생명책은, 주님이 뭘 했다는 거예요. 아버지 앞에 나는 이런 일 했다는 게 생명책입니다. 예수님 쪽은 살아있는 게 2분의 1이고, 행위책은 뭐냐? 죽은 자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2분의 1이에요. 그 2분의 1, 그 반 때에 대해서 다니엘 9장 27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24-27절까지 보면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에 ‘70 이레’에서, 7 이레, 62 이레, 그리고 나머지 ‘한 이레’를 ‘반 이레’로 나눠요. 두 개로 나눠요. 나누게 되면 이게 3.5날이 돼요. 한때, 두 때, 그리고 세 번째는 사흘이 아니고 ‘사흘 반’이 돼버리는 겁니다. ‘반’의 의미를 그 세 번째에다가 주입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0절에 보면 그때 죽어야 될 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난 뒤에 두 선지자도 증거 하다가 죽어요.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그리고 9절에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사흘 반’ 동안에 목도한다고 되어있어요.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 되셨어요. 여기는 ‘사흘 반’이에요.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이 죽으심을 좀 더 두 증인을 통해서, 두 선지자를 통해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반 때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요.

한때를 왜 반 때로 나누느냐? 그래야 단절이 돼요. 불연속성이 되는 겁니다. 이쪽 2분의 1에서 저쪽 2분의 1로 못 건너가요. 2분의 1 자체가 이제까지 살았던 세상의 전부를 보여주는 2분의 1, 앞으로 등장할 2분의 1은 2분의 1의 단절을 지나서 새롭게 등장할 전체는 2분의 1로 보여줍니다. 인간은 그 반을 넘어올 수가 없어요. 왜냐면 십자가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살았다, 하는 모든 것들은 죽여버리는 그 날이 바로 세 번째 날에 있어야 될 2분의 1을 보여주는 그 사건의 날입니다. 2분의 1. 세상에 때가 반 때라는 게 없잖아요. 반 때라는 게 인간 세상에는 없어요. 때라는 것은 숫자를 셀 때, 카운트 할 때 그때가 어떤 때든, 1초든 1분이든 1시간이든 하나로 쳐버려요. 반이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 머리에선 반이라는 게 없어요. 반이라는 건 뭔가 온전치 못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어? 내 반쪽이 날아가 버렸어.’ 이렇게 반은 온전치 않아요.

주님께선 이 세상이 온전치 않다는 겁니다. 어디에서 막히느냐? 한때, 두 때, 십자가 그 반 때에서 막혀버린 세상은 온전치 않은 세계에요. 이 온전치 않은 반 때의 세계를 자재로 생각해서 그걸 인수해서 그 2분의 1에서 전체를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는데 여기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이 대목도 상당히 난해한 대목이에요.

인간의 시간상에서 ‘첫’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있을 때 저쪽이 첫 번째가 되고 나중에 하면 두 번째가 되거든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경우가 더러 있었잖아요. 아까 이야기한 야이로의 딸도 죽었다가 살아났고,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도 살아났잖아요. 그건 뭐예요? 그거 뭐 부활 아닙니까? 분명히 죽었는데. 분명히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부분이라고 해요. 더 어려운 대목은 뭐냐? 십자가 달릴 때 옆에 있는 강도에게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어요, 오늘 밤에.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면 그 강도는 결국 죽지 않고 주와 함께 부활 한 걸로 되어 있는데 그건 부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강도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더욱더 어려운 대목은 어디에 나오느냐? 바로 누가복음 9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요. 그때 부분을 담당하는 두 사람이 여기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엘리야, 한 사람은 모세, 둘 다 선지자입니다. 둘 다 선지자가 되어서 이미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서 지금 변화된 모습을 하고 서로 대화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봤을 때 누가 봐도 저 엘리야와 모세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맞습니다. 살아있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있는 모습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살아있는 모습이 아니죠. 베드로 보기에는 예수님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본인이 자기가 몸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듯이 저들도 살아있다 하는데 그건 2분의 1이라는 단절을 뛰어넘지 못해서 그래요.

이쪽에 인간들이 살아있는 것은 베드로가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서 숨 쉬고 이야기 하는걸로 살아있지만 엘리야와 모세가 생각하는 살아있음은 그 살아있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중에…, 여기 31절에 나옵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별세하실 것을 이야기한다는 말은, 부분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전체가 될 수 없어요. 아무리 모세가 선지자 노릇 하고, 엘리야가 선지자 노릇을 했어도 그 모세와 엘리야가 경험한 것 다 합쳐도 하늘나라에는 온전치 못합니다. 뭐가 온전해야 되는가? 단절이 있어줘야 온전해요. 그게 예수님의 별세입니다.

이 변화산 이야기할 때 모세, 엘리야는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언제 죽으십니까?” 다시 번역하면 “주님, 이 엘리야를 끊어낼 수 있는 죽으심은 언제 일어납니까?” 모세는 “이 모세를 모세로 끊어낼 수 있는 그 사건은 언제 일어납니까?”

나 자신의 동질성에 단절이 없고 끊어짐이 없으면 이건 생명이라고 할 수 없어요. 기존 세계의 이어짐은, 이것은 부활도 아니고 생명도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모든 세계는 다 무너져야 돼요. 예수님께서 무너지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단절을 거쳐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중요한 의문점을 우리가 떠올려야 되죠. ‘그래서 망해야 될 이 세상 같으면 이 세상을 없애버리지 굳이 왜 지옥이라는 것을 만들어 놨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아예 세상 확 없애고 모조리 다 천국으로, 여호와 증인처럼 모조리 다 천국으로, 불교처럼, 다 천국으로 가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그렇게 되면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이뤄지지 않아요. 뱀의 후손을 작살 내는 그 공간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그건 안 돼요. 마귀가 한 일로 인하여 지옥 만들어 놓았고, 거기에 합세한 자들이 거기 같이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 지옥도 없애면 되지 않겠느냐? 마귀도 구원시키고 가롯유다도 구원시키면 되지 않느냐, 이런 주장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가롯유다가 공로자니까 공로패 드려야지 왜 그걸 지옥보내냐고.

이 사람들이 뭘 모르냐면, 예수님 자체내의 단절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심판주가 안 돼요. 구주가 아니고 그냥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뿐이에요. 그냥 그렇고 그런 하나님 밖에 안 돼요. 하나님이 심판주, 주님이 되려면 중간에 당해야 될 자가 있어야 되고, 그 당해야 될 자가 영원한 심판을 증거 할 수 있는 영역이 새로 만들어져야 돼요.

지금 이 선지자들이 부분적으로 이야기해 오면서 그들은 어떤 메시아를 기다려야 될 이유가 있어요. 우리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 전했잖아요? 하나님한테 말씀 받았잖아요. 그 말씀 전했잖아요. 뭐? 아무 문제 없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고 말씀을 전해도 그 중간에 말씀 전하는 나도 온전치 않고, 그 온전치 않다는 것을 알려줄 중보자, 중간에 어떤 분이 오셔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선지자지만 아브라함은 예수님 때를,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렸어요. 하나님 말고 예수님. 내가 전하는 이 예언, 나는 부분인데 이 예언조차도 전체로 다 완성되는 어떤 분, 그분이 오셔야 돼요. 그 일을 위해 선지자한테는 결함, 결여가 생깁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남의 아줌마 불임은 잘 낫게 해 줘요. 20장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남의 집 불임여성은 치료를 해줬는데 정작 자기 집에 자식은 없습니다.

이게 결여에요, 선지자가 함유해야 될 뻥 뚫림. 남은 도와주되, 부분이죠, 정작 자기 것은 단절되어있어요. 끊어져야 돼요. 내가 나와 끊어지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상태, 그게 이제 전체가 아니고 부분인데 부분의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자기 지혜로 세상을 보면서 부분을 끄집어내요.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0 이게 삼강이고요, 아이스크림 아닙니다. 오륜(五倫)은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이게 오륜입니다.

자, ‘삼강’부터 설명하면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 아버지는 자식의 근본이고, 남편은 아내의 근본이다. 이거 삼강입니다. 부분이죠. 이 부분 아니였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오륜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사랑이 있어야 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되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차별, 분별이 있어야 되고,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에겐 서열이 있어야 되고, 붕우유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된다, 이 이야기에요.

자, 여기서 문제를 내면 사람들이 이 말에 대해 동의하는 이유가 뭐냐? 딱 이거에요. 나를 없애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게 부분입니다.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전체로 보는 이걸 마귀가 계속 집어넣는 거예요.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백날 이야기해도 지금도 교회 가면 성경 쓰고 있어요.

성경 쓰고, 성경 가지고 Q.T하고. 그런 짓 왜 합니까? 나를 잃어버리기 싫어서 그래요. 내가 나를 구원하고 싶어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나 구원받습니까? 뭘 믿으면 됩니까?” 주님의 불연속, 죽었다는 사실이 전혀 들어오질 않았어요. 만리장성인데 앞에 마술사를 세워놓으면 끝이에요. 마술사가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내가 허락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전체 내용이 어떤 내용이냐? 인간의 개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 주님은 병행주의로 나섭니다. 또 뭐 무슨 ‘주의’ 나오면 짜증이 팍 올라오잖아요. 나만 올라오나? 병행주의라는 것은 뭐냐 하면, 버릴 것을 버리지 않고 나란히 둔다는 거예요. 병행주의.

창세기 16장…, 제가 신학교 가기 전부터 또 신학교 가고 난 뒤에, 또 목사가 되고 난 뒤에 설교를 하면서 계속해서 찝찝하게 해결되지 않은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창세기 16장에 보면 하갈이 종이거든요, 사라의 종. 하갈이 임신하고 난 뒤에 사라가 구박을 좀 했어요.

그러니까 사라가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갈이 가출을 했어요. 이건 충분히 이해가 돼요. 이런 경우 보면 정말 인간적인 면에서, 부분적인 면에서 설움을 받을 입장이 아닌데도 설움을 받잖아요. 자기가 혼자 애 낳습니까? 아니죠. 자기 남편 아브라함이 씨받이 해달라고 해서 임신해 있는데 왜 본부인이 구박을 하느냐, 그 말이죠.

이게 바로 꼬마 인형이에요. 꼬마 인형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불륜남의 아이를 임신한 걸 꼬마 인형이라고 해요.

그 날 밤 황홀한 시간을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처음
당신을 알고 말았죠
말 없이 흐르던 눈물을
난 감출 수가 없었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하나둘 세고 있었죠
늦어도 그 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간 주 중
늦어도 그 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꼬마 인형을 가슴에 안고~” 혼자 눈물 흘리고 있어요. 자기 남편이 임신시킨 것을 두고 본부인이 하갈을 구박을 해 버리면 하갈은 처지가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16장에 어떤 대목이 있느냐? 하갈이 가출을 했는데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서 어디 가느냐 물어보니까 “주인 피해 갑니다.” 답하니 “하갈아 네 주인에게 돌아가.” 이렇게 했습니다. 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 했는데 뭐가 찝찝하고 이해가 안 되느냐?

분명히 여기서는 집으로 돌아가라 했거든요. 그런데 창세기 21장에 보면, 이제 이삭을 낳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그 하갈을 어떻게 하느냐?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내어쫓으라 했어요.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

아브라함 참 나쁩니다. 책임지지도 못할 애를 낳아놓고 또 쫓아내요. 쫓아냈을 때 제가 어디에서 이해가 안 되느냐? 하갈이 쫓겨나서 방황하면서 물이 없을 때 “하나님, 지금 집에서 쫓겨나서 굶어죽을 판입니다. 나는 상관없는데 애가 물이 없어 못 견디는 것을 보고 제가 참을 수가 없어 웁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창 21:19)

이 대목에서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쫓겨났는데 그 쫓겨난 쪽을 왜 편들어주느냐 말이지요. “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 목말라 죽어라.” 이래야 되는데 하나님은 양쪽에 다 나타나서 도와줘요. 처음에 다시 자기 주인한테 돌아가라 해 놓고는 여기서는 뭘 정당화 하느냐 하면, “그래, 너는 추방되어야 마땅해.”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뭐냐, 이 말이지요.

인간미도 없고, 매정하기가 짝이 없고, 매정하려면 끝까지 매정해야지 물이 없어 목말라 죽는 것을 보고는 물을 또 줘요.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 21:18) 번창을 왜 합니까, 번창을?

이게 바로 뭐냐? 병행주의, 나란히 가야 되는 거예요. 살았다는 것, 생명은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산자라는 말은, 죽은 자가 누구냐를 알아야 돼요. 죽은 자는 자기 행함에 관심이 있을 때 죽은 자에요 그게. 행함 책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에요.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자기 안에 단절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 동네, 그쪽 동네도 번창해야 돼요.

그러면 이삭 낳았으니 아브라함 가정은 남이야 죽든 말든 쫓아낼 것 쫓아내고 저희끼리 행복했겠다?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없애버려라, 함으로서 내가 없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하나님께서 수립합니다. 내가 내 앞에 버티고 있는 한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다 엉터리 하나님이다. 사실상 인간의 인생에 있는 살아가는 모든 것은요, 자기 장례식을 위한 비용마련 때문에 살아갑니다.

결국은 주께서 주셨던 모든 것은 너로 하여금 너를 단절시키고 그 단절됨으로써 비로소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가는게 아니고, 모세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이 사람들이 선지라면서 선지자는 어떤 경우라도 상속자가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우리는 상속자가 아니라고요. 상속자에서 끊어짐을 우리는 알아야 돼요. 끊어지고 상속자는 따로 있어요. 상속자가 그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죽은 우리를 불러 줄 때, 불러 줄 때 우리는 주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부름 받은 나라가 천국입니다. 내가 행한 것, 내가 믿은 것 말고.

로마서 8장 30절에 그 대목이 나오잖아요. 여러분이 이걸 다 외우고 있으니까 굳이 찾아볼 이유도 없겠지만요. 29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복사 한다고 했지요, 복제를 해버려요.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9, 30절)

예수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죽으심으로서 죽음의 단절을 하시고, 그 단절된 2분의 1의 새로움을 가지고 거기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서 부활의 능력이 오게 되면 그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에게 부르심이 이루어지고, 그 부르심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에게 이루었던 모든 상속분을 같이 공유하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이 맞아요. 모든 인간이 죽은 것 맞아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14절)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 거예요.

주님에게 필요한 원자재는 주님 자체가 생산재입니다. 경제에 두 가지가 있어요. 소비재가 있고 생산재가 있어요. 소비재라 하는 것은 일종의 껌이에요. 씹다가 벽에 붙여놨다가 또 떼서 씹고, 있음이 있음을 낳고, 있음이 있음을 낳고, 순환되는 것, 이것은 소비재지만 생산재라 하는 것은 아예 없는 데서 새롭게 주어진 게 생산재거든요.

예수님의 생명은 생산재입니다. 우리가 “저도 그 생명 원했습니다.” “원하지 마! 원하는 그것도 네 행함이야.”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임으로써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요. 남의 불임여성이나 잘 해결하지 자기 아내는 불임여성으로 끝났어요. 자식이 아무도 없어요. 잉태치 못한 자가 천국 백성입니다, 잉태치 못한 자.

잉태치 못한 자가 상속자예요. 이것은 아브라함뿐만 아니고 가인과 아벨도 마찬가지예요. 아벨은 자기가 죽었습니다. 아벨이 죽었기 때문에 비로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벨의 씨가 바로 하늘나라와 이어져서 나중에 에녹과 관계된 것은 아벨의 씨에요. 아벨이 죽었기 때문에 아벨의 씨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의도적으로 살인했는데도 불구하고 살려줘요. 자식 풍풍 많이 낳게 해주고 살려줘요. 그들은 자기가 동질성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가인의 세계에는 끊어짐이 없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죽겠지, 이런 식이에요. 살다 보면 죽는 것은 그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사흘 동안의 죽음에 일어난 일을 통해서 그 기초가, 뿌리가 전제가 되어야 돼요.

한때, 두 때, 반 때, 있는 것 찢으시고 찢으신 것 다시 새롭게 완전하게 치료해주시는 그 기간, 3일의 십자가라는 단절성이 우리 내부에 들어와야 돼요. 우리 안에서 십자가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그것이 필히 나오는 질문이지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단으로 보여준 게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 보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고 3,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밖에 없는 물, 하나밖에 없는 음식을 다 같이 먹은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4절 계속 보면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나 아니다 그 말이지요. 나 아니에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반석의 물을 먹는 겁니다. 그러면 그 환경이 뭐냐? 나를 아예 죽이겠다는 환경, 광야지요, 광야.

광야나를 장례 치러야 할 환경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가는 그러한 환경이 이 세상입니다.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는 것, 내가 손댈 수 없는데 주께서 죽여주신다는 이것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인지요? 얼굴 보니 별로 기뻐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고린도전서 10장 19, 20절에 보면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한테 하는 것이다. 엄마 살아 계실 때 큰아들이 자기가 유세한다고 “야, 내가 아버지 제사하는데 동생들 다 오너라. 돈 봉투 들고 와라. 제사가 공짜로 되는 줄 아나?” 이렇게 할 때 엄마는 그 소리 듣고는 “당연하지!” 했지요.

그런데 엄마가…, 지금 우리 엄마 말고 다른 사람 이야기입니다. 엄마가 죽고 난 뒤에 제사로 유세 떨던 그 형님이 “야, 동생 이리와. 이제 제사 네가 가져가라. 네 아내는 음식도 잘하잖아. 전도 잘 굽고. 뭐든지 잘하데?” 걸걸, 유교 걸, “뭐든지 너무 잘하니까 네가 제사 가져가.”

평소에 형에게 세뇌가 되어서, 가스 라이팅 당해서 못 합니다, 라고 말을 못 해. 큰아들이라고 제사 지낸다고 유세 떨고, 상속재산 자기가 다 챙겨놓고 엄마 죽는 그 순간부터 동생한테 제사 네가 가져가라고. 이게 어디서 잘못됐느냐 하면, 이방인들이 제사를 드린다는 자체가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하나의 몸부림이에요 이게!

‘부자유친’이에요, 부자유친. ‘부위자강’이에요. 나의 뿌리는 아빠다. 부모가 내 뿌리다. 세상에 있는 모든 모습들이 인간의 행함과 언어와 태도가 자기가 자기를 끊어내지 못하는 데서, 나를 지켜보려고, 나를 사수하려고 시도하는 데서 나오는 겁니다. 주께서 행위 책에, 하늘나라 서기관, 천사들이 다 적어놨어요. 네가 안 죽어서 나오는 행동과 말을 다 적어놨어요. 지옥에나 가라!

내가 키울 나도 없고, 내가 지킬 나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친척한테 이야기했어요. “교회 안 나오나?” “제가 그 시간에 음악 강의 들으러 갑니다.” 그 시간에 음악공부 하는 게 있어서 거기 참석한다는 거예요.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는 용납이 되는 핑계지요. 그러나 성경 마태복음…, 주님께서는 하여튼 단도리를 단단히 했어요.

인간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부 다 성경에 다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22장에, 임금님이 혼인 잔치를 하는데 거기로 오라 했거든요. 나는 밭을 사서 못갑니다, 내가 사업차 못갑니다, 나는 내 장가가야 하기에 못갑니다, 하는 거예요.

천국은 이와 같다. 천국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지켜야 된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천시당하고, 학대당하고, 배척받는 그 모습으로 이 땅에 천국이 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결과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죽는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고민한다, 우리는 뭘 걱정한다, 하는 데 가만 생각해 보면 고민 걱정이 뭐냐? 전부 다 나를 지키기 위한 고민과 걱정이었습니다.

자, 끝으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 고린도전서 11장, 10장에서 귀신한테 하는 제사인데 그러면 11장에서 우리는 뭐냐? 11장 23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이게 바로 제사입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 주께서 죽고 난 뒤에 남기신 그 떡과 그 피를 우리가 우르르 와서 먹고 마시는 거예요.

주께서 3일 동안 이루었던 그 결과물, 십자가 사건의 결과물, 이것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작동하도록 참여하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면 주님 혼자 하면 되는데 ‘우리’라는 존재는 왜 그렇게 있느냐? 기생 라합과 여기에 두 정탐꾼과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해서 만들어낸 것이 창문에 내 걸린 붉은 줄이었습니다.

이 3인 1조가 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붉은 줄이에요. 기생 라합, 기생 라합은 자기의 고향을 떠나버렸어요. 그리고 정탐하러 온 정탐꾼, 천사와 같은 정탐꾼, ‘날 숨겨줘’ 날 숨겨달라 하는 그것, 기생 라합이 숨겨줬잖아요.
“숨겨줘.” 그리고 “날 숨겨줬으니까 이 예수, 또는 이 예수에 속한 천사를 숨겨줬으니까 내가 너를 잊지 않으마.” 곧 “네가 나를 시인했으니까 나도 마지막 날에 너를 시인하마.” 이러한 협약, 이러한 계약, 약속, 그렇게 만나도록 주선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은 십자가 피, 오직 끊어낼 수 없는 나를 끊어낸 그 십자가, 그 십자가가 여러분 속에서 늘 작동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산 자와 죽은 자,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천국과 지옥,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닌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는 입 다물고 멸망하는 세상과 함께 멸망하고 죽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십자가 알려주셔서 이제는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운반체로 만들어 주셨사오니 이제는 사나 죽으나 십자가 하나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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