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변경
2024년 1월 14일 본문 말씀: 빌레몬서 1:15-19
(1:15)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 된 네게랴
(1: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18)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1: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사도와 빌레몬은 오네시모에게 일어난 변화를 주목하고 자신들의 그 변화를 자기 인생에 적용시키려 합니다. 오네시모에게 정체성 변경이 일어났으며 이는 오네시모가 일반인에서 특수한 사람으로 전환했음을 나타냅니다. 오네시모는 일반과 특수의 그 경계선에 있습니다. 양면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일반성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일생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의 포부와 뜻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님을 일반인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고 여기기에 계속 밀어붙이게 됩니다. 바르게 살면 신이 내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해 봅시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바르게 살기’가 가장 악한 짓입니다. 그것은 평생을 자기 의로움에 몸 바치는 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잘남을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은 ‘악마의 자식’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각된 바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 마귀에게 속하여 너희 아버지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기를 원한다”(요 8:44) 즉 그동안 인간들은 귀신들의 활동으로 눈에 막혀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구약의 욥기 1장은 인간이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9-12)
즉 인간들이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감으로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악마와 인간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은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은 이 세 가지를 기본 요소로 하여금 이 인간 세계를 파헤칩니다. 그 파 헤치는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인 것은 본 모습인 것을 드러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값을 속인 채 헌금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사단을 언급하면서 그의 행위를 평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행 5:3-5)
사도행전 8장에서는 시몬이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18-20)
즉 사도행전은 기존의 말과 개념과 사상들의 질서들이 사정없이 다 파헤쳐버립니다. 그것은 기존의 일반들이 자신이 수집한 지식으로 자신을 자꾸만 재정립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러합니다. 자기 인생이 복음으로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고서는 자기 정체성은 재구성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해놓으신 정체성은 이미 선악과 나무에 관해 말씀하실 때, 정해진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실 때는 규칙과 더불어 벌칙과 형량도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것이 신약 때까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사람이 무거운 연자맷돌을 몸에 거는 경우를 언급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마 18:6) 여기에 나오는 연자맷돌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형량입니다. 이 형량은 융통성이라는 것은 전혀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는 나락으로 계속 깊이 내리꽂을 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벌칙이 이 정도입니다. 즉 인생이란 그저 지옥으로 추락하는 것 외에 다른 인생이란 없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악마는 인간을 놓고 하나님과 벌리는 내기에서 대단한 자신감을 보이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제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경에 놓인 인간들 세계에 주님께서 친히 뛰어드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께서 친히 뛰어드시므로서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 매여 살고 있음이 노출됩니다.
주님과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인간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을 바꿔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 안으로 끌려 들어가게 하는 방식입니다. 십자가 사건 안에는 ‘주님과 주님 사이에만 벌릴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로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주님에게 굴복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시 110:1-2) 여기에 등장하는 이 원수, 곧 악은 인간들이 이겨낼 수 없고 오로지 주님만 처리하실 수 있는 악입니다.
인간은 무소유, 무욕심으로 천국갈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욕심 없음‘도 욕심입니다. 인간은 그저 무의미하고 무가치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목숨 코인들은 모조리 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만드는데 허비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위로 해주는 자들은 나와 같이 귀신들린 자들 뿐입니다. 즉 모두 다 자기 자신의 가치에 미친자들입니다.
성도는 미쳤으되 주님의 사랑에 미쳤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4) 하나님의 사랑에 압살 당하게 되면 그저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즉 자신이 망하는 것도 자신에게 과분한 사랑의 처사인 겁니다.
나의 잘남을 비추는 거울 말고 십자가 사건이 비취는 거울로 이끌림을 받게 되면 우리 자신이 주님을 슬프게 한 귀신과 한 통속인 것이 차후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가리웠던 귀신이 나간 증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것들을 다 다 갚아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빌레몬서 1장 15-19절(정체성 변경)240114-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빌레몬서 1장 15-19절입니다.
빌레몬서 1:15-19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빌레몬과 사도 바울, 이 두 사람이 오네시모라는 이 사람의 개인적 정체성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는 이 땅에 완전히 희망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주인에게 속했던 종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멋대로 자유자인 것처럼 도망쳐서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을 따로 구성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인간세계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를 바라보는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통해서 과연 인간이 자기만의 인생이라는 것을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만의 인생이 되려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기 뜻대로 돼야 하는데 세상의 모든 일은 나의 모든 계획과 예상에서 빗나가면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종이었다는 그 점을 감안해서 ‘우리는 오네시모와 같은 신세 아니냐, 우리는 종 아니냐?’ 문제는, 우리는 누구의 종이냐, 하는 그것을 지금 오네시모를 통해 파악해 줍니다. 오네시모는 사람의 종이지만 그럼 우리는 누구의 종인가? 우리는 오네시모와 비교해서 자유자라고 우기는데 자유자나 종이나 이 세상 살면서 내 뜻대로, 내 원한 대로, 내 계획한 대로 안 돌아간다는 것은 누구한테 우리가 붙잡혀 있다는, 종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경험한 대로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 인간세계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이 오네시모의 정체성을 변경하는데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두 종류의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과 특별한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그냥 자기가 태어난 인식대로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이죠. 오네시모도 마찬가지고. 종인데 종으로 살기 싫어서 주인으로부터 도망쳤다, 너무나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가 오네시모에게 일어났습니다. 그건 오네시모의 뜻이 아니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자신의 예상과 자기의 뜻과 자기의 계획을 자기 정체성과 관련해서 계속 그걸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래야 내 세계가 구성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일반적인 사람이고요. 일반적인 사람이 뭐로 바뀌었느냐? 특별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 거예요. 특별한 사람은 내 예상과 내 계획과 전혀 무관한, 생각지도 못한 현상이 나한테 일어났을 때 그때는 나의 정체성, 내가 생각한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담겨버린, 그러한 복음의 특별성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람과 특별한 사람의 양쪽 그 경계선에 오네시모가 놓여 있는 겁니다. 오네시모를 통해서 사람이 산다는 것, 종으로 사는 게 힘들어서 자유인이 되고자 했다? 그럼 그 자유인은 과연 자유인일까? 자유롭고 싶어도 그 자유를 써먹을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니까. 그건 자유인이라고 하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한 종이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종에서 벗어난 자유는 따로 상정되야 돼요. 따로 생각해야 된다, 이 말이죠.
오네시모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 인생이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복음으로 재구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완전히 오징어 쥐포 찢듯이 그렇게 찢어버리는 거예요. 안 찢어지면 자꾸 내 인생을 구성하려고 해요. 어떻게 구성하는가, 대단한 인생으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대단한 인생.
보통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고 싶어요. 그러나 성경은 다시 태어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대단한 사람과 다시 태어난 사람. 일반적인 사람, 누구나 그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그게 실패로 끝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보다 더 대단한 존재의 종이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렇게 보고 교회를 오래 다니고 복음을 공부했으면 내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 그 정도는 이쯤에서 정리해야 돼요. 오늘 이 시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 내기 대상입니다, 내기 대상.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쥘 수 없는 형편에 있어요.
하나님과 악마가 내기하는데 욥이 걸려든 겁니다. 그래서 욥의 운명은 욥과 별개의 문제에요. 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내기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결정 나는 겁니다. 주님이 이기면 천국, 마귀가 이기면 지옥. 내 인생에 대해 내가 결정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내 뜻대로 하고 싶어,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악마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보고 자신감을 갖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이 ‘바르게 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 의로움에 몸을 바치는 거거든요. 늘 바르게 살기 위해서 애는 쓰는데 감사함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가스펠 송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낮에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욕심도 없이’ 욕심도 없는 게 그게 욕심이에요. 인간이 욕심 없이 사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 귀신, 사탄은 인간을 두고 내기할 때 자신감이 넘칩니다. “쟤 안 됩니다. 인간 제가 알고 있어요.” 사탄이 이야기해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내가 알고 있다고. 왜? 자기가 꼬셨거든요, 선악 나무로. 자기가 꼬셨으니까 뻔하죠, 뭐. 내 마음이나 지마음이나 똑같은데 그 마음이 어디 가겠어요?
항상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대단한 사람 되고자 할 때, 밥입니다. 악마의 밥이에요. 성경에 보면 이 세상은 세 종류로 되어 있어요. 하나님과 마귀와 그리고 인간. 딱 셋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말이 없어요. 자연에게는 그냥 말이 없이 주인이 안 나타나요.
그러니 주인이 없는 이 자연 세계에서 하나님이 주인이든지, 마귀가 주인이든지, 인간이 주인이든지 셋 중에 주인이 하나거든요. 그래서 숨어 있는 마귀가 인간 보고 이렇게 합니다. “이 자연은 네가 주인이다.” 이렇게 자꾸 독려하고 밀어붙여요. “네가 주인이다.” 그러면 인간은 이 자연을 이용해서 자기가 자유를 얻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걸 누가 바라보느냐? 마귀가 이미 바라보고 있다, 이 말이죠. 백날 해봐도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그 점을 아셔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선악과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할 때 두 가지만 생각하면 돼요. 선악과 하나 가지고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뭐냐?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규칙과 거기에 대한 형벌이 거기 같이 붙어있어요. 규칙과 거기에 맞는 형량, 형벌, 그게 같이 붙어있어요. 그게 ‘죽으리라.’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 다루는 방법은,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하나의 예가 나와 있습니다. 18장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다시 읽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어린애, 하찮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하나를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연자 맷돌은 이스라엘의 고고학 발굴에 보면 옛날에 발굴됐었어요. 엄청나게 큽니다. 무게가 나가요. 연자맷돌을 소 두 마리가 돌리면서 곡식을 빻는 게 그 기능이에요. 엄청난 그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놔 버리면 그 연자 맷돌은 융통성이 하나도 없이 그냥 자유 낙하합니다. 추락해요. 그러면 연자맷돌에 목매인 인간도 추락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면서 규칙과 거기에 대한 벌칙을 같이 나란히 결합해서 줬듯이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이 소자 하나 건드리면, 믿는 소자 건드리면 벌칙을 내리는데, 연자 맷돌 매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서 자력으로는 두 번 다시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연자맷돌 달아서 빠뜨릴 때 연자맷돌 자체는 맷돌 보고 어떤 사정사정을 해 봐도 소용없다는 거, 어떤 융통성이 전혀 없어요. “연자맷돌님, 어떻게 좀 봐주소.” 이런 거 없습니다. 자유 낙하, 그냥 빠진다니까요. 그러니 우리 인생은 그냥 빠지면 돼요.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참 쉽죠? 그냥 빠지면 돼요, 그냥. 왜? 그게 주의 뜻이니까. 주님의 뜻이니까요. 무슨 다른 꼼수 같은 거 자꾸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마태복음 18장 8절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이 말씀이 무엇과 충돌하고 대치되느냐면 ‘나는 이 땅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냐 안 되냐, 이것은 내 융통성에 달렸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벌칙은 융통성이 하나도 없다니까요? “너는 원래 그래. 그냥 추락해. 끝!” 그뿐이에요. 이미 우리의 정체성은 확정되었습니다. 확정된 겁니다. 여기 무슨 다른 생각을 갖는다는 자체가 주님에 대한 반항이고 도발이고 도전입니다.
내 뜻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 주의 뜻대로 추락시켜 줄 테니까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 말아요, 그대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세상에서는 네가 나쁘다, 나쁘다, 참 나쁜 사람이라고 자꾸 비난들 하는데 이 세상엔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무의미한 거죠. 나쁜 게 아니고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얕은 지식에는 나쁘다, 좋다, 이건 반대다, 부정적이다, 이게 있지만 깊은 진리에는 반대조차도 없어요, 그냥. 무의미하기 때문에 이건 곧 내가 어떻게 살아도 무가치한 거예요. 무가치한 것은 가치 없는 겁니다. 가치 없는 것은 살아도 헛산 거예요. 헛산 것은 죄만 지은 거예요. 이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뭔가 움직이거나 해 봐도 소용없어요. 다만 욥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복음은 그런 욥조차도 하나님이 내기 상대로 썼다는 거예요. 내기 상대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뭐냐? 하나님께서 마귀와 도박하는 하나의, 강원 랜드의 코인이다. 그냥 코인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매일같이 그 코인을 하루 치만 준 거예요. 목숨 주고, 목숨 주고, 하루 치만 코인을 주는데 코인을 가지고 우리는 내가 나를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데에 허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낭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계획 세우고, 오늘도 비전 갖고, 또 희망 갖고. 저는 그걸 ‘희망 돌려막기’라고 하거든요. 희망해 봤자 그거 다 카드 사용하고 또 다른 카드로 땜질해야 돼요. 계속 희망 가지고 돌려막고 갈아 치우기 하는 데 그러면서도 주님이 주신 코인을 전부 도박판에 낭비합니다. 매일 같이 도박하고 판돈 날라가고요.
‘오늘은 럭키 머니일 것이다.’ 럭키 머니가 어디 있어요, 럭키 머니가? 없어요, 그런 거.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다?’ 벌칙이 지금 시행되고 있는데 무슨 행운입니까? 연자맷돌 이거 안 보여요? 지옥으로 지금 꼴아박고 있는 거예요. 오네시모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분투 노력했죠. 종으로 살기 싫다, 살려고 보니 돈 좀 있어야 살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어제 토요일 날 몇 년 만에 돌아볼 기회가 있어서 동촌 유원지에 갔어요. 동촌 유원지에 다리가 있는데 경치가 좋아서 휴대폰으로 사진 찍고 있는데 어떤 60대 아주머니가 와서 “사진 좀 찍어주세요.” 합니다. 그건 뭐 쉽죠. 사진 찍어주려 하니까 이 사진도 찍고, 이번에는 이쪽 폼으로 한 번 찍어주시고, 내가 뒤돌았을 때 찍어주시고, 지팡이 버리고 찍고, 이 손 벌릴 때 찍어주시고, 하는 거예요. 이건 뭐 사진관도 아니고. 와, 이런 정신병자.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요. 그리고 밑에서는 또 마이크 대서 유행가 불러 가지고 노래 막 열창하고 있고, 떠오른 생각이 ‘아, 우린 교인들이 이런 정신병자들을 상대로 돈 벌고 있구나.’ 이래도 미쳐 있고 저래도 미쳐 있는 거, 어중간히 미치지 말고 아예 복음에 미쳐버리세요. 어차피 미칠 거, 어차피 코인 줘봐야, 목숨 줘봐야 헛되게 매일 날리는 거요, 매일 도박판 날리는 거, 이왕 미치는 거, 진리와 복음에 제대로 미쳐버려야 돼요.
미치지 않으면 미친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어요. “너 미친 건 미친 것도 아니야. 내가 미친 게 미친 거야.” 그래야만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제대로 미친 사람이 누구냐, 사도 바울입니다. ‘이 오네시모 정체성 바꿔야 되겠다.’ 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죠.
예수님 보고도 미쳤다고 했으니까 사도 바울도 미쳤다 했죠. 고린도후서에서(5:13, 14). “그래 나 미쳤다.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됐냐?” 뭐 이렇게 나왔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이 사도 바울의 모든 행위, 그 앞에 베드로부터 사도 바울의 모든 행위가 어떤 행위를 하냐면, 사도행전을 쫙 보면 이래요.
응급 환자가 차 사고 나서 병원에 가면 응급실에서 의사들이 환자의 옷 벗길 시간이 없어요. 상처하고, 피하고 고름하고 떡이 돼 있으니까 수술용 가위 가지고 아예 옷 채로 잘라 버립니다. 찢고 잘라 버려요. 뭐 하나하나 공손하게 배려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난폭하게 옷하고 상처를 강제로 떼 내 잘라버리듯이,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지고 이 세상 질서를 난폭하게 잘라버려요, 가위로.
기존의 개념, 의미, 단어, 인간이 유통하고 있는 그런 뜻 같은 거,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개무시해 버리고 잘라 버려요. 사람들은 어떤 신을 섬기고 종교를 섬기면 자기가 아는 개념 틀을 먼저 잡아놓고, 그 내용을 이렇게 바꿈으로써 나로 하여금 새 사람 되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 모든 질서를 그냥 뚫고 촘촘한 인간의 개념 질서, 질서의 촘촘함을 권세, 권력을 사정없이 뚫고 지나가 버려요. “뭐야 이거?” 그 결과가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대목에 나옵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같은 말을 사용해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이 일어났을 때 그때 하늘의 질서 새로운 질서가 왔을때 사용했던 그 말은 같은 말을 사용해도 그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방언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은 자가 통역해야 알아먹는 다른 세계의 언어 질서, 그걸 방언이라고 합니다. 말은 하는데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기존의 질서에서 응급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에요. 좋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서 정체성이 바뀔 리가 없습니다.
얼마나 과격한지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엄청나게 과격하죠.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극단적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게 꼭 죽을 일인가?” 하는데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면, 삶과 죽음도 이게 내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주신 코인이었습니다. 하루 치 코인이었어요. 주님 자기 것을 자기가 회수하는 것뿐입니다. 내 목숨이라고 하는데 내 목숨 자체가 인간에게는 주어진 적이 없어요. ‘내 목숨’ 준 적이 없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1-3)
이것을 설명하는데 이 세상은 딱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만 알면 됩니다. 하나님과 사탄과 그리고 인간. 이 셋을 통해서 새로운 천국 질서를 새롭게 형성합니다. 지옥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 이렇게 지옥 만드는 거예요. 다른 요소는 없어요.
사도가 자기 교인들에게 그렇게 했는데 이런 추세에 따라서 사도행전 8장 17절 19절에 보면 이런 말 나옵니다.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여기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 제안을 했죠.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만나고 뚫고 지나가는데 십자가 복음이 밭을 가는 하나의 쟁기라고 봅시다. 쟁기를 가지고 세상 질서, 인간들이 그동안 쌓아온 세상 질서를, 땅을 파헤치니까 거기서 귀신이 나오고 사탄이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파헤치는 겁니다. 파헤칠 때 8장의 이것뿐만이 아니고, 시몬이 돈 주고 성령 받고 사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죠. 그 뒤엔 점점 더 권력체와 접근합니다. 권력체를 말씀으로 파헤쳐 버려요.
그리고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부터 해서 줄기차게 쭉 나오는 것은 뭐냐? 인간들이 예상 못 한 그 질서, 복음을 담고 있는 언어 질서가 기존의 언어 질서를 뒤엎는 행위를 하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공생애을 사시면서 십자가로 갔던 그 절차를 사도도 똑같이 밟아가는 거예요, 똑같이.
예수님도 처음에는 귀신 쫓아냈거든요. 나중에는 권력자와 직접 마주합니다. 권력자와 직접 마주하면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보고 언급을 했어요. “네 아비는 마귀다. 네가 마귀다. 마귀가 낳은 자식이 네 모습이니까 마귀 안 보이지? 보이는 네가, 네가 추구하는 것이 마귀야.” 보이는 마귀, 보이는 귀신이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로마서 10장에, 자기 의를 포기를 못 해요. 나의 잘남을 지키는 겁니다. “낮에 해 같이 밤에 달 같이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이거, 이거 파헤치면 뒷면에 귀신 나옵니다. 사울 왕이 죽을 때 그 끝부분에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울 왕을 위로해 줬어요. 한통속이거든요.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적에 의해 조성된 거짓 질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에서 어떻게 하셨는가? 이미 사도 바울이 그걸 해왔던 거예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네시모의 정체성을 변경하면서 사도 바울은 평소에 어떤 취지를 가지고 일해 왔는가를 소개하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인간관계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2장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냥 추락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늘에서 직하, 내려와서 목표점이 어디냐 하면, 죄의 종, 버림받는 자리까지 그냥 직강하, 낙하산도 없이 그냥 꼴아박는 거예요. 그건 이 세상 사람들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자꾸 나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아나니아 부부가 잘못된 것은, 그러니까 시몬이 잘못된 것은 우리가 귀신과 연관 없이 인간들의 질서 가지고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귀신과 관련 없이, 사탄과 관련 없이 설명한다면 “그 사람이 좀 욕심이 많네? 소유욕이 있네?” 그 정도예요.
그러면 우리는 성경에서 “아, 이게 욕심이 많구나. 헌금 반을 왜 감췄지? 시몬 이 사람이 성령까지 소유하려고 했구나. 우리는 그러면 안 돼. 우리는 그걸 본받으면 안 돼. 우리는 주신 것에 감사해야 돼.”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건 뭐냐? 내 정체성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파헤쳐졌습니까? 그건 아니죠.
나에게서 정체성이 파헤쳐지려면 내 속에 귀신이 나가야 돼요. 마귀가 나가야 된다고요, 마귀가! 우리는 그러지 말자, 이래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개과천선할 문제 있습니까? 인간에게 무슨 개과천선이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는 문제가 없고 그동안 잘못 배웠다는 거예요. 그거 아니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까지 안 드리려고 하는데 이 예를 안 들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서 설명해 드립니다.
어떤 절에 주지, 중이지만 스님이라고 합시다, 주지 스님이 있는데 면회가 왔어요. 옛날에 세상에 있을 때 사귀던 여자가 왔는데 그 여자하고 헤어진 지 10년 됐는데 면회와서 사정사정하는 거예요. “오빠, 오빠 생각 많이 했어요. 10년 동안. 나는 오빠 너무너무 사랑했어요.” 그러니까 그 주지가 하는 말이 “내가 왜 속세를 떠났는데? 너 때문에 속세 떠났잖아.”
“오빠 우리 같이 미국 가서 살아.” “나 미국 안 가.” “오빠 나 없으니까 너무 허전하지?” 그 주지가 하는 말이 “내 빈자리 부처님이 채워주셨어.” 그러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우리 행복했잖아. 아침에 알람 소리 들으면서 잠 깼잖아.” 주지가 하는 말이 “나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불경 소리 듣는데 익숙해졌어.”
여자가 하는 말이 “우리 저녁때 오빠와 스테이크 먹으면서 와인 한 잔씩 했잖아.” 주지가 하는 말이 “나 요새 비건 식밖에 안 먹어.” “오빠 나랑 남산에 올라가서 자물쇠 걸고 소원 빌었잖아. 우리 헤어지지 말자고.” 주지가 “이제 내 소원은 성불뿐이야.” “오빠 이제 그만 절을 떠나 속세로 오면 안 돼?” “당신의 행복을 위해 백팔번뇌로 빌어줄게.”
“이러지 말고 잠깐 이 근처에서 밥 먹으면서 이야기 계속해.” “오늘 나 산채비빔밥 먹었어.” “그럼 우리 집 가서 라면 먹고 갈래?” 그러니까 주지 스님이 할 말 없으니까 “마하반야바라밀다~” 여자가 이제 말로 안 되겠으니까 뒤에서 확 껴안아 버려요. 껴안아 버리니까 그 주지가 하는 말이 강제로 손 떼면서 “마하반야바라밀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지금 목청이 어울리죠. 마하반야바라밀다~ 그러니까 여자가 이제 돌아갔어요. 그때야 주지가 입을 틀어막고 오열합니다.
지금 이 불교의 주지는 형(形)은 그대로 있는데 용어 바꾸면 새사람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하반야바라밀다~ 이런 소리 왜 합니까? 내 과거를 바꾸면 새사람 된다? 이게 오네시모의 정체성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 전체, 우리의 몸을 쟁기로 뒤엎어서 짐승과 마귀가 튀어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쟁기로 후벼낼 때 후벼내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중요해요. 그것은 바로 두 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빌레몬한테 이렇게 합니다. 오네시모를 중간에 놓고 오네시모로 하여금 우리 두 사람이 오네시모의 어떤 정체성에 영향을 주는 일에 우리는 주님의 지시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삼위일체지만 성경에 보좌가 두 개입니다. 두 개밖에 없어요. 세 개가 아니고 두 개밖에 없어요.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보좌가 딱 두 개밖에 없어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요한계시록 21장 22절에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을 묘사하는데 하나님 성전, 어린 양 성전으로 같이 병행해서 나열하는 이유가 뭘까요?
새로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가 도 닦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아까 기도하신 분이 예후 이야기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 몰살 시킬 때 그건 됐는데 예후 본인을, 자신을 몰살시키지는 못했어요. 아까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마찬가지예요. 시몬도 그렇고. 이 오네시모나 빌레몬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도 바울 만나기 전까지는.
거울을 보는데 맨날 거울을 볼 때 자기의 대단한 모습을 염두에 두고 거울을 보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거울을 보는 거예요. 거울을 보는데 그 거울이 귀신이 만든 거울인 걸 모르는 겁니다.
그러면 오네시모와 빌레몬과 사도 바울을 통해서 형성된 새로운 거울은 십자가 사건이 나오는 거울을 봐야 돼요,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에는 반드시 귀신과 악마가 그 십자가 사건 현장에 있는 거예요. 욥이 본 게 바로 그거에요.
욥이 자기 잘난 것만 보다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났을 때 그 주님 안에서 주님의 상처, 주님의 아픔, 나한테 욕 얻어먹는 주님, 나한테 원망받는 주님, 나로 인하여 상처받는 주님, 그게 바로 십자가가 담겨 있는 사건이 터져버린 거울이었어요, 그 거울.
마귀와 한통속이 되면서 “하나님, 왜 날 안 도와줍니까? 왜 날 대단한 사람으로 안 만들어 줍니까? 나를 왜 부자 되지 않게 해 주십니까?” 이런 거예요. 분명히 성경에서 주님께서 했어요. 부자는, 부자는 지옥 간다고 분명히 언급했잖아요.
기존 교회의 올해의 목표는 뭐냐? 집단으로 모조리 지옥 보내는 게 새해 목표예요, 거기는. “부자 되게 해주세요.” 이게 지옥 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교회의 목표는 뭡니까?” 따로 정해놓은 게 있어요. 요한복음 16장 11절,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같이 죽으러 가자. 이게 목표지요.
다시 말해서 그 주신 코인 있잖아요. 카지노 회사의 그 코인. 그 코인은 하루 치밖에 안 줘요. 그러면 준다는 것은 소환시키는 방법입니다. 정체성은 거울 속,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그 거울속에 들어가는 게 그게 바로 말씀을 주신 주께서 소환하시는 방법이에요. 나에게서 귀신 뽑아내고 십자가 사건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귀신과 한통속이고 한 몸이었다는 사실, 목숨은 주님이 줬는데 그 영광은 나의 의로 소환시켰던 이 마귀가 작당한 거예요. 사기 친 거예요, 그동안, 평생토록 사기 친 거예요. 너 훌륭할 수 있어, 너 대단할 수 있어, 너 구원받을 수 있어, 이런 사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사기가!
오네시모는 자기 자신만을 아는 사람이에요. 일반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로 하여금 이렇게 복음을 알게 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화 하는 방식을 오네시모방식으로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빌레몬이에요. 오네시모가 문제가 아니고. 오네시모의 정체성 변경은 빌레몬의 정체성 변경으로 이어져야 됩니다.
그거 하기 위해서 시편 110편 보면 주께서 하신 그 일이 거기 나오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주’가 두 번 나오지요. 성령은 주님이 아니냐, 라고 따지지 마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주’개념하고 달라요. 성령이 주님이 되시는데 그것은 숨어 있지 않기 때문에, 두 분을 보좌하기 때문에 주가 되시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주’가 두 번 나옵니다. 성령은 빠져요. 성령은 빠집니다. 인간도 빠집니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원수를 다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이 원수를 다루게 하셨어요. 우리가 새인간 되기 위해서 내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설 문제인가? 우리가 마귀와, 귀신과 한 패였다는 것으로 계속 유지가 되어줘야 돼요. 그러니까 구원받는 것은……, 이번 겨울수련회 1강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알겠습니다만, 그냥 통보해 주는 거예요. 그냥 통보하는 것. “다 되었습니다!” 카센터에 가보면 차 맡긴 사람들이 들어가서 기름 묻혀가면서 수리하지 않잖아요.
사무실 안에서 따뜻하게 앉아서 TV 보고 있다가 “다 됐습니다”하고 문 열고 들어오잖아요. 다 됐습니다,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걸 하셨고, 그 성령이 우리에게 옴으로서 다 됐다는 뜻이에요. 성령이 우리한테 왔다는 것. 성령이 오고 보니까 우리에게 내 인생은 내가 갖고 놀, 내가 재구성할 대상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상대, 내기의 하나의 결과물이었던 겁니다. 하나를 두고서.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 ‘까지’라는 말은, 앞으로 계속해서 그 상태로 간다는 뜻입니다. ‘까지’로서 마감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이제는 그 상태가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전에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내가 나를 자꾸 지켜봐야 될 나였어요.
이것을 설명하고자 하면 참 설명이 힘들어요. 내가 내 인생을 지켜보고, 검사하고, 검사했는지 안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또 지켜보게 되고. 무슨 말인가? 내가, 나 같은 것은 지워져야 되고, ‘나’에서 마귀가 나와야 구원받는다면 어떤 상태가 되느냐 하면, 내가 나를 제대로 지웠는지, ‘나’에서 귀신이 나갔는지를 그걸 지켜보는 나가 또 있는 거예요.
그 지켜보는 ‘나’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깜빡할 때 새사람되었는지, 아니면 지켜봤는데 되었는지를 그걸 지켜보는 졸지 않는 나를 또 상정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귀신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노력과 철학과 어떤 신학을 해도 못 빠져 나오게 만드는 귀신의 함정, 늪입니다.
이 소룡(1940-1973)의 영화 가운데 제가 최고의 영화라고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 거울방에서 싸움하는 그 영화입니다. <용쟁호투> 최후의 적과 싸움하는 대목에서 분명히 쳤는데 살아 있어요. 다른 거울에 또 비취는 거예요. 도대체 내 안에 귀신이 몇 마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한쪽을 쳤는데 한쪽이 또 튀어나와요.
분명히 자기를 부인했는데 자기를 부인했다는 것을 박수 치고 있는 ‘나’가 또 튀어나와요. 우리보고 구원받았다고 격려해주는 귀신이 또 튀어나와요. 도대체 귀신이 몇 겹이에요, 몇 겹? 성경은 말합니다. 딱 둘이라는 겁니다, 둘. 둘 빼고 나머지는 다 잡귀들이에요. 딱 둘로 정해져요, 둘로.
한 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 분은 실제로 십자가에 피 흘렸던 그분. 또 한 분은 절대 존재에 나오지 않고 사건으로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성령님. 세 분 다 내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를 복제하면 안 돼요. 자꾸 복제하고 싶어요. 자 그러면 오네시모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빌레몬서에 와서 사도 바울이 빌레몬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에 일어나는 특수한 경우가 빌레몬아, 너에게도 일어났냐?”라고 묻는 거예요.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나에게는 이미 일어났는데 너에게도 일어났나?”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너한테는 분명히 종이지만…, 15절에 보면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사도 바울의 이 말의 질서라는 것이요, 인간의 언어 질서를 완전히 파헤쳐요. 떠남으로써 영원한 관계는 유지되게 만드는 말을 쓰고 있는 겁니다.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우린 영원히 사랑할 거야. 그 관계가, 오네시모는 어떻다, 네가 어떻다, 내가 어떻다, 그걸 뛰어넘는, 그러한 고민거리 자체를 압살…, 압살이란 말은 뭐냐 하면 압도적으로 그걸 덮어버리는 것이 압살입니다. 성경적으로 그걸 ‘세례’라 합니다, 세례.
성령 안에서 모든 관계가 하나의 형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압살이에요 그냥. 숨 막히듯이 사랑이 우리를 덮쳐버리는 겁니다. 너와 나의 구분이 의미 없게 만드는 새로운 관계, 오네시모가 지금 세 사람 사이에 주입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 본인도 오네시모를 통해서 새롭게 자기 자신을 지금 구성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잘났다, 너는 못났다, 지금 그런 관계 아닙니다. 너에게는 종이었지만 나는 일단은 형제로 받았다. 그러면 형제가 뭐냐? 이 뒤에 나옵니다. 17절에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내가 갚는다는 것, 아, 사도 바울이 얼마나 이 말을 자주 했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갚았다고 했잖아요. 그게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었던 그 일, 그 공로, 그 의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 사이는 뭘 갚아주고 안 갚는다고 따지고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거에요. 전부 다 똑같은 형제 입장에서 같이 놓여 있다는 거예요, 형제 입장에.
이거 설명하고 말씀 맺고자 합니다. 18절 다시 보겠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융통성 없는 연자맷돌을 집어넣은 거예요. 마귀가 목에 걸렸다, 마귀. 이것은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그냥 가는 겁니다. 이것은 당연한 거고 한데, 지옥에 가면서 뭐라고 하느냐?
마태복음 18장 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12절에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길을 잃어버린 양은 마땅히 잃어버려야 돼요. 마땅히 지옥가야 돼요. 뭐 그 사람보고 미련 갖을 것 없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이 왜 중요하냐면, 안 잃어버린 양에게는 없는 것이 잃어버린 양에게 있는 겁니다. 잃어버린 양이 되었다는 말은 사후적으로, 소급해서 누군가 그것을 갚아줬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내가 잃어버린 양이었다는 인식, 정체성이 새롭게 만들어진 거예요.
주께서 내 죗값을 치렀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즐거이 이땅에 잃어버린 양이 된 겁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내 인생이 망하는 것도 내 존재에 과분한 거예요. 내가 망하고 내가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도 고맙소~, 고맙다 해야 돼요. 그걸 어떻게 알아서, 도대체 내가 놀라야 돼요, 우리 자신 보고 놀라야 돼요.
나를 지켜보는 나는 누구냐, 또 만들지 말고 너는 그냥 사라져야 되는데 왜 사는지가 놀랍고, 살면서 이 값 때문에 값, 주께서 치른 값 때문에, 십자가 피 값 때문에 그 십자가 피 값을 드러내라고 우리는 이 마귀만 있는 세상에 버티라고 계속 하루 치 코인을 준 겁니다. 요새 코인값 좀 올랐잖아요. 아, 귀한 코인이에요. 주님의 값이 그대로 쌩쌩하게 살아 있게 하는 겁니다.
마귀는 날마다 주의 주신 값을 가리기 위해서 대신 ‘너 대신 훌륭해야 되잖아. 신자가 그 꼴이 뭐야? 바르게 살아야지. 사람들이 너보고 뭐라고 욕하겠는가?’ 그것은 기존질서예요. 기존질서에서 유통하는 단어들이라니까 그게. 그들은, 이 세상은 미쳐 있습니다. 우리도 또한 미쳤습니다.
이왕 미친 세상, 이 진리와 복음에, 이 주의 값에, 값 받은 자로서 나 자신은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양에 불과했다는 것, 이 연자맷돌, 이거 슬슬 만지면서 주께 꼴아박은 그 지점, 십자가 지점 사건으로 가면서 거기서 비로소 생명을 만나는 거예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나무 두 개입니다. 왜 나무 두 개냐? 인간아, 거기 끼어들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은 거기 끼어들 자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선악과 심판하시고, 생명 나무 예수님 주시고, 그 사이에 특수한 인간, 주님께서 새로 만든 특수한 인간으로 오네시모를 만들 듯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정체성, 다시 말해서 어떤 것도, 어떤 것도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신근(辛勤)할 필요 없다는 것은 바로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거늘, 그 십자가가 모든 것을 이미 해결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아도 도대체 어디까지 속아야 되는지, 속다 속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에게 매일 같이 속았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내가 뭘 해서도 안 되는데 자꾸 마귀는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주여, 주님이 주신 값에 압살당하고 그래서 그 값에, 사랑의 피 값에 눌리는 그러한 즐거움과 감사가 하루하루 살면서 내내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