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서 아들로
2024년 1월 7일 본문 말씀: 1:8-14
(1: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1: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12)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13)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오네시모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두 사람와 관련된 인물입니다.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가 누락된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빌레몬입니다. 빌레몬은 부자입니다. 갇힌 자 된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즉 그는 자신이 노예라는 인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는 빌레몬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에 전혀 부담을 못 느끼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는 복음으로 인하여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이런 체험이 주는 중요성은, 빌레몬은 스스로 사람이라고 여길 수가 있지만 오네시모는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인식을 지니게 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기존의 혈육적 관계말고 다른 방식이 가족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여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종으로 사시던 분이 죽고 부활하셔서 아들이 되시는데 중요한 것은 이 아들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 ‘주’가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땅에 종으로 오시지 아니하면 결코 예수님은 주가 되지를 못합니다. ‘주’라는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시간이 흐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악마를 영원한 시간에 가두어두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악마의 활동 범주는 이 시간이 흐르는 이 세상에 전부입니다.
이 땅에서 악마는 설쳐대면서 인간을 종으로 부려먹었습니다. 히브리서 2:14-15에 보면,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인간 세계가 악마로부터 장악당하게 하시므로서 인간세계는 힘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자유자와 노예로 구분되었습니다. 인간 세계는 끊임없이 전쟁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모든 그극도의 잔인성이 다 동원되는 이유는, 포로로 잡힌 자들에게 노예 근성을 유지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월된 힘에 대해 공포심이 절로 내부적으로 일어나게 합니다. 이는 마치 아무리 개 종류가 다양한다 할지라도 개장수는 개 도축업자가 나타나면 개의 종류와 상관없이 그 사람들과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합니다. ‘살육의 페르몸’을 후각적으로 맡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성으로 악마의 죽음 권세에 자족을 못쓰며 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2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종의 경험 속에서만 구원을 느끼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도 예외가 못됩니다. 저주의 종, 심판의 종, 악마의 종, 율법의 종이 되게 하시는 방식으로 구원을 드러내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7:47-49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합니다. “예수라는 자는 누구기에 남의 죄도 사하는가?” 악마의 종이 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만드는 식으로 각자 분주합니다. 하지만 에베소서 2:10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자기 인생 만들기에 진력을 다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따로 아들을 만드십니다.
천국에서는 사람을 받지 않습니다. 아들들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악마가 갇힌 그 시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양과 양 사이도 건널 수 없는 차단막이 쳐져 있습니다. 누가복음 15: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99마리의 여유분을 몽땅 소비하여 한 마리의 양의 취지를 살리는데 투입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차단막의 ‘불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고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나를 대신해서 알려주셔야 되는 겁니다. 흔히들 세상에서는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려주는 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가져가서 나의 인생이 되신 자만이 갈 수가 있습니다. 종의 존재란 주어진 현실을 감당할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이런 종을 아들이 되기되면 모든 세상이 다 ‘아들 중심’으로 집약되고 집결되기에 벌어지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은 딴게 아니라 세상이 ’아들 중심‘이 되어짐을 말합니다.
이로 인해 세상은 이미 악마 밑에서 종노릇하고 있음이 밝혀집니다. 예수님을 대했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안 죽이고 관리하려고 했습니다. 서로가 각자 자기 할 것만하지만 하지만 주님쪽에서 거부하고 자신을 그들 손에 죽으시는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이로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정체는 ‘천국 못갈 존재’ 드러났습니다.
성도는 다른 인간 존재와는 달리 긍휼, 곧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것이 없는 존재’를 말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각가지 법과 규칙들을 다 끌어당겨서 법적으로 하자 없는 존재이고 싶어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자력으로 이 세상에서 자유함을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율법은 이러한 탈출이 허사임을 밝혀줍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처럼 천국이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즐거워하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것은 아예 없음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빌레몬서 1장 8-14절(사람에서 아들로)240107-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빌레몬서 1장 8-14절입니다.
빌레몬서 1:8-14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사도는 오네시모와 본인의 관계를 통해서 빌레몬 가족들에게 가르칠 게 있습니다. 물론 명령으로 할 수도 마땅하게 명할 수도 있지만, 8절에 나오죠, 그냥 일반적으로 지시해도 되지만 내가 사랑을 가지고 너에게 부탁하는 방식으로 네게 이야기한다, 이 뜻은 사도와 오네시모와의 관계에 대해서 네가 지금 모르고 있고, 누락되어 빠뜨리고 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오네시모가 빌레몬 너에게는 종이 되지만 나 바울에게는 아들이 되었다는 거예요. 사도가 감옥에 갇힌 자 가운데서 내가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자기 아들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내가 오네시모와 하나의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복음이 오네시모와 나 사이를 아들과 아버지 관계로 형성시켰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갇히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는데, 13절에 보면 “내 복음”을 위해 갇힌 자 중에 벌어진 사건이 바로 어떤 도망친 노예가 내 아들 되는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가르치고 싶은 게 뭐냐? 사도바울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느냐? 지금 로마에 가 있어요. 빌레몬은 어디에 있느냐? 지금의 튀르키예, 내륙 지방에 있습니다. 굉장히 멀어요. 골로새에 있으니까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편지를 보내서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뭘 가르치고자 하냐면,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낼 때 종이 되게 했었습니다. 아들이 종이 되고 그다음에, 종이 됐던 예수님이 다시 아들로 승화되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자기 자신의 일을 무사히 마감을, 완료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물어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로 이 땅에 와서 왜 굳이 종이 되어야 했느냐?’ 그 사실에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 있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성령이 우리에게 뭘 알려주느냐면, 성령은 모든 걸 통달하시는데 어떤 것을 했을 때, 우리가 어떤 것을 알았을 때 모든 걸 통달했다는 그러한 규정을 내릴 수가 있는가? 그건 바로 성령께서 모든 것을 통달하는데 하나님의 깊은 것도 성령께서 아신다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하나님의 깊다는 그 내용이 뭐냐? 도대체 어떤 걸 가지고 모든 것들의 가장 깊은 것, 인간의 수준에서, 능력에서 도저히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그걸 능가하는 가장 깊은 것이라고 하느냐?
그건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명예를 걸고, 이름을 걸고 하시는 일이 뭐냐? 하나님의 깊은 것을 자기 아들에 담아서 드러내는데 그 일이 뭐냐?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그 사실이에요. 왜 굳이 종이 되어야 하느냐? 이미 인간 세계가 영적인 마귀에 의해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격을 맞춰가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가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 안 하고 있어요. 그걸 인정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모든 관심은 자기에게 있어요. 자기한테 관심을 두는 이유가 있어요. 내가 나를 만들어가는 그것이 인간 평생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그 목적입니다. 내가 원하는 나를 내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되어 있어요. 완전히 차이나죠? 인간들은 부지런히 자기 마음에 드는 자기가 되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거기에 시간을 할애하며 만드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거 말고.” 하늘나라 천국에서는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천국에서 필요한 것은 아들입니다, 아들. 아들이 필요한 거예요.
천국에서는 사람이 필요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들이 되려면 어떤 경과를 거쳐야 해요. 사람이 자기가 누구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돼요. 그리고 인식해도 소용없어요. 인식해도 내가 마귀의 종이라는 인식에서 내가 알아서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겐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불연속성이라고 해요, 불연속성.
불연속성이라는 말을 좀 더 쉽게 하면 차단막이죠. 종하고 아들 사이는 차단되어 있습니다. 넘어올 수가 없어요. 책에 있는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다른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의 그 차단막, 종은 종이고 아들은 아들이고, 사람은 사람이고 사람이 갈 곳은 지옥밖에 없고, 아들이 갈 곳은 천국밖에 없다는 그 차단막, 장벽, 펜스, 그것이, 말씀이 들어온 순간 말씀과 더불어 우리 안에 그 차단막이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 차단막이 들어오게 되면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일을 통해 또 말씀을 통해 줄곧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에 나와서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 많이 들을 거예요. “남이 나 대신 살아주나?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지, 남이 내 인생 어떻게 살아줘?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못 해.” 이 얼마나 많이 우리가 동의했고 많이 들었던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마태복음 8장 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준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한테 관심 있고 자기 만들기에 나서는데 인간이 자기 만드는 그것이 왜 천국 지옥을 가로막고 있는 그 차단막을 뛰어넘을 수가 없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을 따로 친히 만드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내가 천국 가는 인생에 내 노력을 집어넣어도 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그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준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대신 살아준 분이 있어서. 사실 이거 아시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거의 다 안 셈이 된다고 할 수 있어요.
누가복음 7장 47절에 어떤 질이 좋지 않은 소문이 난 여인이 와서 예수님 발 앞에, 어떤 사람은 이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요, 울면서 자기 모든 향수를 예수님 발에 붓고 울면서 입 맞추고 예수님 발을 씻어줄 때에 바리새인들이 49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이 바리새인의 이야기가 굉장히 복음의 핵심부분을 째고 이야기 한 거예요. 저가 누구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는 거예요.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예수님을 비난하는 용도로 이야기 한 거예요. “네가 뭔데? 각자의 인생은 본인이 알아서 책임져야지. 예수 네가 뭔데 그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해줘? 네가 그럴 쨉이 되는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해요, 바리새인 입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거든요. 그 여자가 죄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그 행실 나쁜 여자가 죄 없다고 하는 게 아니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 이 말입니다.
죄 많은 내 인생 누가 대신 살아줬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더이상 자기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의 죄를 일거에 다 용서하신 그분에게 꽂혀 살아간다, 이 말이에요. 그게 바로 천국은 나의 것이 없는 세계라는 사실을 주께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내 것을 챙길 필요가 없어요. 내 것을 챙기면 내 것 가지고 내가 원하는 내가 원하는 내 인생 만들기에 나설 것 아닙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천국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열심히 살고 가기는 지옥 가고, 왜? 차단막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건너뛸 수가 없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목, 주일 학교 애들도 아는 대목이 나옵니다.
15장 4절부터 제가 읽어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주께서 99와 1마리 사이에 차단막을 딱 쳐요. 차단막을 치는데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양 100마리 한 마리 잃어도 신경 안 씁니다. 왜? 여유분이 많기 때문에, 99마리 잘 키우면 100마리 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연속성이 아니고 불연속성, 차단막을 쳐가지고 패를 두 패로 나눠요. 99쪽이냐, 아니면 잃어버린 한 마리 쪽에 네가 서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자, 이 말씀이 한 마리 양이 구원받았다,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99마리의 양을 희생하기까지 한 마리 양을 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말이죠. 왜? 99마리는 자기 인생 살지만 한 마리는 예수님이 대신 살려주는 예수님의 생명이 가미된 단 한 마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비슷한 이런 일이 있었어요. 1955년도에 이집트의 어느 시골 농부인데 닭을 치다 보니 한 마리가 없어요. 찾다 보니 우물에 빠져있어요. 닭이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농부가 자기 키우던 정이 있어서 우물 속에 닭을 구하러 들어갑니다. 들어갈 때는 들어갔는데 나올 방법이 없어서 빠져 죽었어요.
그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 동생 세 명이 형님 구한다고 들어갔는데 차례대로 다 빠졌습니다. 그걸 보고 노인 두 명이 그 가족 불쌍하다고 들어갔다가 또 나올 길이 없어 죽었어요. 그래서 6명 다 죽고 난 뒤에 포크레인 동원해서 시체 다 건져냈는데, 닭은 살았어요. 닭 한 마리는 살았습니다. 닭 한 마리를 살려내기 위해 사람 여섯 명을 희생시킨 셈이 되죠.
여기 보면 의인,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의인 하나, 99마리를 소비해서 하나님께서 건지시겠다는 것은 단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에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불연속성입니다. 차단막을 치고 주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차이, 그리고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의 차이, 오네시모가 중간에 있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하고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와의 관계가 서로 지금 달라요.
빌레몬에게는 어디까지나 내 밑의 노예입니다. 노예라는 말이 종이라는 뜻인데요, 종의 특징은 주어진 현실을 본인이 감당할 권한이 없다는 거예요. 주어진 현실을 본인이 감당해서는 안 되는 그 신분이 종이에요. 그러니까 어느 인간도 종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인간은 자존심이 있어서 어떤 현실이 있으면 현실을 극복할 생각이 먼저지, “나 이거 감당 못 합니다.” 뒤집어지는, 나자빠지는 그런 건 비겁한 종이다, 이 말이죠. 비겁한 노예근성이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종이 되지 말고 그 종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 되고 싶을 때 사람들은 그걸 ‘자유자’라고 이야기해요. 지금은 여러분들이 노예 제도가 없다고 생각을 하시잖아요? 물론 마르크스에 의하면 그 생각은 틀렸다고 보는 거죠. 임금 노동자도 종이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에 노예 제도라는 게 왜 있는가? 종이라는 게 아예 없었으면 오네시모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 사도 바울이 주인인 빌레몬에게 부탁할 이유도 없었을 건데 노예 제도 자체를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이유가 뭐냐? 아예 안 만들고 평등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노예 제도의 발생은 전쟁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을 다시 보게 되면, 성령은 모든 것을 통달한다, 아까 말씀드렸죠. 모든 것을 통달하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보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는 7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십자가 지혜는, 그다음에 이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전쟁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 전쟁은 인간을 상대로서 벌이는 전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역사책에서 주장하는 거고요. 실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벌인 전쟁이 인간의 전쟁이라고 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전쟁은.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지금 전쟁을 본인이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누가 하느냐? 인간은 누구의 종이거든요. 본인이 노예이면서도 노예 아닌 것으로 사칭해서 자유자가 되기 위해 ‘나는 자유자요, 너는 전쟁에서 패배해 나의 전리품 노예가 되어라.’ 이런 식으로 전쟁을 해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소유권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 노예에요. 인간을 소유함으로서 내가 누구한테 소유당하지 않은 상태를 가지고 ‘자유인’이라고 규정하고 싶은 겁니다. 내가 누구한테 예속되지 않은 것, 대기업 시험 치려고 토익에 그렇게 몇천만 원씩 학원 다녀서 들어가 놓고 6개월도 안 돼서 “나는 카페 차릴래.”하고 튀어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삼성의 종이야? 내가 LG의 종이야?’ “아빠 자금 대줘. 대출 좀 받으면 안 돼?”
아, 사람이 누구에게 지시받고 사는 것을 그렇게 역겨워하는 이유가 뭐냐? 자기가 사적으로 살아있는 멀쩡한 존재라고 사칭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중에 대표적인 게 바리새인인데요.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처음에 설치고 다닐 때 예수님을 죽일 마음이 없었어요.
어떻게 하든지 구슬려서 살려주면서, 하는 일을 인정하면서 다만 예수라는 사람이 하는 범주보다도 지금 유대나라를 쥐고 있는 권력자의 범주가 더 넓은 범주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어요.
그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마귀가 제안한 최종 마지막 카드였어요. “나한테 절하고 같이 살자. 너 성공하고 싶잖아? 보장해 줄 테니까 우리 같이 살자.” 이렇게 된 거예요. 바리새인이 그렇게 한 이유는 자기가 현재 살아서 나 만들기 하는 것 이것이 정상적인 바른 행위이며 이것은 하나님도 인정한 행위라는 것을 스스로 믿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했는가? 기어이 그들이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어요. 죽이도록 유도했죠. 죽이도록 유도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 그 관계보다 더 큰 관계를 죽음 이후까지 포함시킨 넓은 범위까지 포획하고 장악하려는 시도를 예수님은 하신 거예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시간 속에 영원히 가두어 두었다.’ 악마를 영원히 시간 속에 가두었기 때문에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는 악마가 왕질 하는 거예요. 이 왕질 했던 그것을 표집한 것, 그 모든 것을 다 수집하고 모아놓은 것을 바로 행위라고 이야기하고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행위를 기록한 책을 행위책이라고 한 겁니다. 행위책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영원한 불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악마가 시간 속에 갇혀 있어요. 인간은, 악마는 시간 밖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치 누구와 같이? 인간과 같이. 인간들의 모든 기억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시간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인간은 도무지 알지를 못합니다. 깨닫지를 못해요.
어떤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 53년 후에 만났어요. 남자 나이가 86세 여자 나이가 80세. 둘이 인사동에서 만났습니다, 2층 카페에서. 남자가 이야기해요. “그때 네가 왜 날 떠났어?” 남자가 여자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날 떠나서 일본에 갔는지 모르겠다.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안 돌아오데?”
여자가 이야기합니다. 할머니죠. “우리 과거 이야기 치우자. 너는 너 한 거 모르지? 이 뻔뻔스러운 인간아, 과거 이야기 치우자.” 울금 내어놓으면서 “너 지금 나 버리고 다른 여자랑 살잖아. 그 여자 너 같이 성질 더러운 인간하고 산다고 애먹었는데 간이 안 좋을 거야. 내가 경험해서 아는데 같이 사는 아내에게 보약 하라고 내가 이거 가져왔다.”
남자는 시간을, 과거를 마주하는 자세가 달라요. 그 남자는 과거를 보고 살아가고 여자는 현실을 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남자가 또 이야기합니다. “그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세 살짜리 딸 있을 그때 너는 다른 여자와 자고 왔잖아. 아직도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뭐라고 좀 하니까 변명한답시고 발길질해서 유리창도 깨고 했었잖아. 네가 변변한 직장도 없이 뺀질대고 다니면서 (경상도 말로) 기집질이나 하고 다니면서 살았잖아. 애 하나 살려보려고 일본 가서 보따리 장사했어. 애가 커서 나중에 승무원 되어서 영화배우까지 되었는데 넌 딸에게 돈이나 얻어 갔지.” 그 영화배우 이름이 이 성령인가 아마 그럴 거예요.
둘 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너는 네 인생 네가 만들었잖아. 나는 내 인생 내가 만들었으니 따로 만들자”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 만드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아들 만들기 하는 거예요. 아들을 만드는데 노예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의 노예, 종.
인간의 종은 전쟁에서 나옵니다. 구약의 앗수르, 바빌론, 전부 전쟁 이야기잖아요. 구약의 95퍼센트가 그래요. 그들은 전쟁하는 것밖에 몰라요. 이름도 이스라엘, 전쟁하는 민족이에요. 그 전쟁하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20장 2절이에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구원이라는 건 뭐냐? ‘종이 되었던’ 너희들, 하나님이 일부러 종이 되게 하셔요.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손을 왜 종이 되게 하시는가? 종이 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불연속성, 차단막, 인간이 어떤 힘으로 해도 구원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종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애굽의 종에서 건져냈잖아.” 하는데 지금 그들이 종 되었던 것을 건져냈다는 게 문제가 아니고 이미 히브리인 마음속에 종의 노예근성이 스며 들어가 있는 거예요, 노예근성이. 노예 근성이 뭐냐?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힘이 없이는 다른 사람의 힘에 기대 살아야 된다는 이 관계를 벌써 양육 받고 훈련받는 거예요. 이 세상의 신 악마로부터 훈련 받고 있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일종의 유전병이에요.
그동안 악마가 인간에게 계속 독을 타서 먹였어요, 계속. 전쟁을 하면서 인간은 그걸 통해 모든 잔인함을 총동원시켜서 공포심을 극대화해 포로를 잡아요. 그러면 포로는 ‘까불면 우리는 죽는다’는 인식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이게 죽음의 공포에요. 죽음에 공포화 되어 어떤 큰 나라에 잡혀가 어떠한 큰 수모를 당해도 우리는 노예로 살아야만 계속 살 수 있다는 근성을 이미 애굽에 있을 때부터 체험케 된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까불면 너 죽어.” 이게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둔 노예근성이에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래도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는데 그럴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겠죠. 개 보면 종류가 많잖아요. 진돗개, 셰퍼드, 푸들, 치와와, 테리어 종류, 하운드 종류, 개들이 많은데, 그 많은 개들이 얼굴도 다르고 개성도 다 다르죠. 하지만 그 개들로 하여금 일체 눈도 못 마주치고 오줌 지리게 만드는 것은 개장수예요. 개 대통령이 아닙니다.
개장수가 딱 오게 되면 살육의 페로몬, 개를 만나면 무조건 죽이는 그 살육의 페로몬 냄새를 피워요. 냄새를 피우는 그 앞에서 사납다는 그 개들이 눈만 마주치면 벌벌 떨어요. 이게 죽음의 공포에요. 이게 마귀의 공포고요. 뭐 남자, 여자, 직장이 어떻고, 국회의원, 대통령 해도 저승사자 앞에서는 사족도 못 쓰죠.
히브리서 2장에 나온 말씀처럼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 한다.’는 거예요. 뭐 똑똑하고, 배우고, 백날 수능 만점 맞고, 뭘 어떻게 해도 인간은 후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죽이는 공포심에 대해 이미 오랫동안 마귀로부터 길들여져 온 거예요. ‘죽기 무서워서 종노릇한다.’ 히브리서 2장 15절 말씀입니다.
인간의 복이라는 게 딴 게 복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는 게 복이에요. 진화론이라는 게 뭐냐? 뭐 완전히 구라지만요, 그들은 주장해요. 생물책에 다 나와 있어요. 500만 년 전에 짐승과 인간이 분화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불연속성이 아니고 연속성이에요. 계속 연속성을 주장합니다.
왜 그런 이론, 진화론 이론을 주장하는가?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살육의 페로몬을 느끼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 종을 인간 만들기 위한 방법이 뭐냐? 주님이 먼저 종이 되셔서 그렇게 인간들이 무서워하는 죽음에 자기가 뛰어드는 거예요. 자기가 죽음에 뛰어드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예수님 보고 “너 죽인다.”는 말은 뭐냐? 본인이 죽는 게 무섭다는 뜻이에요. ‘나한테 무서운 거 너한테는 안 무서울까?’ 이렇게 겁을 주기 위해 널 죽인다고 협박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입장을 바꿔버려요. 그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만들어버려요.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이성을 대표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강제로 이 땅에 없애버리는 인물로서 예수님이 유도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확정 난 결과에요. 죽기를 무서워해서 결국 그 행동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분을 죽였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깊은 작전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마태복음 3장에 예수님 세례받을 때, 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유일한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을 경유해서 천국을 만들어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근거로서 주께서 하시는 것은 ‘아들 만들기’에요. 아들 만들기 하는데 차단막 해놨어요. 사람이 사람 만드는 것을 끊어버리고 인정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영이 와서 하나님의 깊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거기다가 집어넣어서 직접 아들 만드는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가지고 ‘내 아들’이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내 아들. 이 점에 대해 빌레몬 네가 좀 수용해 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빌레몬 이 사람이 부자에요. 감옥에 갇히지 않았어요. 자기가 자기 인생을 이 정도 하면 넉넉하게 스스로 자립해서 내 행복을 위해 이렇게 산다, 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빌레몬이 스스로 나는 ‘자유자’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빌레몬이 생각하는 그 자유자는 어디를 경유하지 않았느냐? 오네시모의 상황을 안 받은 상태에서 나온 자유자이기 때문에 그 자유자는 착각입니다. 자유를 하려면 제대로 자유 해야죠. 죽음의, 살육의 페로몬, 그 냄새까지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얻어야죠. 그런 자유를 못 얻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과 오네시모를 잇는 그 관계에 이제부터는 빌레몬도 동조하기를 요청하는 명령을 한 거예요. 내가 이 아들 낳았는데 어디서 낳았는가? 감옥에서 낳았다. 뭐로 낳았는가? 복음으로 낳았다는 거예요, 복음으로.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에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만들었죠? 하와는 흙에서 안 만들었어요. 아담에게서 만들었어요.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었어요. 그 이유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아담의 운명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되죠. 그런데 아담이 흙으로 돌아가는 그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뭐냐? 하와(חַוָּה). 이름을 번역하면 생명. 생명은 누군가 흙으로 돌아가는 그 과정에서 불연속적으로 생기는 것이 생명입니다. 여자 이름이 생명이에요.
그래서 영화배우 이 성령 낳아준 엄마 같은 경우의 특징이 뭐냐? 시간이 2023년도든 2024년도가 되든 뭐만 생각하느냐? 영원한 현실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뻔뻔스러운 자기 아버지는, 영원한 백수죠, 과거를 생각하면서, 시간 속을 생각하며 살아가요.
시간에서 벗어나야 돼요. 악마가 협박 중인 곳은 시간 속인데 시간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뭐냐?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아까 기도드린 집사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내 솜씨가 아니고 선물입니다, 뭐든지. 그래서 내 것이 없는 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해요. 내 것이 없는 걸 사랑이라고 해요.
자기 걸 잔뜩 가지고 사랑한다? 그건 엉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소개하는 이 정신, 그 일관성은 어떤 말씀의 일관성이냐 하면, 율법과 그리고 그 율법에서 자유케하는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결과와 동일합니다.
야고보서 2장 8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어요. 이 말씀은 어떻게 설명해도 설명이 안 됩니다. 설명이 될 수가 없어요. 왜 설명이 안 되느냐? 여기 ‘나’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설명이 안 돼요.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은, 네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를 하나님의 율법 안에다가 끄집어 당기는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자기 자신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 가가 먼저 정립되야 하겠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살아가는 정립된 방법이 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게 유전병입니다. 자꾸 법을 동원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계속 규칙과 법을 만들어내서 집어넣는 거예요.
엠페도클레스(Empedoklcles, 기원전 493년경 ~ 기원전 430년경)라는 기원전의 그리스 철학자가 자기가 불사조인 것을 평소에 늘 이야기했어요. 사람들이 안 받아주니까 화산 불 속에 자진해서 뛰어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뭐 그런 짓을 다 해요.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년경~기원전 399년)에게 제자들이 망명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악법도 법이다.” 하며 독배를 마셔버립니다. 이거 뭐 천재입니까?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70~기원전 495)라는 사람은 평소에 콩이라는 것은 좋지 않으니까 콩밭에 가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적들이 쳐들어 와서 공격했을 때 다 물리치고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앞에 콩밭이 딱 있었어요. 콩밭이 있어서 자기가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내가 콩밭을 그냥 통과하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이 제자들이 보기에 얼레리 꼴레리, 할 게 뻔하고 멈춰버리면 따라온 적들에 의해 죽는데 둘 중에 어떻게 할까?’ 피타고라스는 거기서 멈췄어요. 그래서 죽었어요.
이 뭐 이런 바보 같은 짓들을, 이거 유전병입니다. 아담의 유전병이에요. 다들 하고 있잖아요. 그게 뭐냐면, 인생을 패턴대로 살아가요, 패턴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오메가3 챙기고, 이게 전부 다 뭐가 빠지면 안 돼요. 패턴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패턴이 제일 편해, 몸이 익숙해지니까요.
패턴대로 한다는 게 내 인생 내가 만드는데 나에게 충실하자는 거예요. 내 계획 잡은 대로. 내 것이 없는데요? 그냥 내가 나 만들어버리면 나는 어디까지나 불연속이 아니라 연속적이 돼서 내가 훌륭한 사람이 돼요. 훌륭한 사람 돼서 지옥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율법을 가지고 이야기해줘요. 율법을 주니까 사람들은 이참에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깨끗하고, 얼마나 남을 배려하며, 동정하고, 착실하게 사람 구실하며 살아가는지 본때를 보여주리라, 하고 법들을 모집해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인간은 주변에 있는 규칙들을 다 끌어모아요. 규칙을 끌어모은다는 말은 감히 목사라 할지라도 남이 나한테 가르치지 말라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가 원하는 내 인생 만들어 갈 테니까 목사가 아니라 집사가 됐든 장로가 됐든 누구라도 나한테 간섭질, 지적질하지 말라는 것이 인간이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0절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을 다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지키고 지켜도 결국 이것은 악마의 꾐에 빠진 거예요. 계속 지키고 지키다가 그중에 하나를 어겼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범법자가 돼요. 그 범법자가 된 상태에서 처음에 있던 율법으로 다시 돌아오는 겁니다.
네가 만약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면 이게 최고의 법을 지키는 것인 잘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이 말이 아니고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라, 는 법이에요. 그러면 내가 나를 일단은 사랑 해봐요. 뭘 가지고? 율법을 동원해서 자기를 사랑해본다고요. 해보는 데 실패로 끝나요. 실패로 끝나면 그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범법자가 돼요.
성경은 인간을 아주 치밀하게 몰아세웁니다. 이건 뭐 청문회도 이런 청문회가 없어요. 마태복음 5장 25, 26절에 보면,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곧 네가 형제를 만나서 화목하지 못하면 옥에 가두고 그 옥의 관리자가 하나라도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단 하나라도 갚지 못하면 나오지 못해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잖아요. 하나님의 처벌은 아벨을 죽였으니까 즉결 처분, 당장 사형, 이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조치는 집행유예였어요, 집행유예. 용서를 해주는 것이 아니고 네가 동생을 죽였던 그 죄가 뭉쳐져 있는 거예요. 뭉쳐져 있는 것을 역사, 시간을 통해서 하나 둘씩 전개시키고 풀어나가면 역사의 어떤 면면들이 보이는가를 가인의 후손을 통해 보이고자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인과 노예 관계라는 것이 모든 역사, 인간 사회의 체제와 구조로 자리 잡히게 만든 겁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에요. 노예가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비정상이라는 거예요. 지난주 설교 끝나고 난 뒤에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예수님을 의지해야 우리가 구원받는다, 그건 이해되는데 왜 하나님이 굳이 그래야 되느냐, 이게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하나님께서 구원한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일을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뭡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이 꼭 지옥이 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주되심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아들인데 아들은 주가 아니에요. 아들이 종이 되어야 종이 되고 난 뒤에 다시 죽음을 거쳐 아들이 되어야, 그때 아들은 주님이 되는 아들이 되는 거예요.
심판주가 된다, 이 말이에요, 심판주. 심판주라는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논의됐던 모든 관계에 대해서 더 넓은 범위로 포획시켰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인간 수준에서 나오는 모든 범위는 악마 밑에서 나오는데 악마는,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장악했다고요. 그래서 죽음의 페로몬이 나온다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악마마저 본인이 그렇게 시킨 거예요. 악마가 했던 시간의 포획 안에, 악마를 시간 안에 가둠으로써 시간보다 더 넓은 범위로 포획시킬 때 영원한 주가 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좁디좁은 인식이냐 이 말이죠, 이게. 너무나 시답지 않은 것에 너무 치중하고 살아가는 모습이요.
그 아들의 영이, 주가 되시는 영이 우리에게 와 버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것도 책임질 일이 없고 문제 삼을 일이 하나도 없어요. 이게 내가 이룰 범위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 인생이 내가 책임질 내 인생이 아니라니까요? 교회라는 것도 보면 교회가, 사람들이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데 그건 세상의 노예 됐던 내가 자유 되겠다는, 자기 안에 차단막이 빠져있는 채, 불연속성이 빠져있는 채 고생하는 나를 내가 스스로 내 힘으로 호강시키겠다는, 하나님 덕분에 호강시켰다는 의도를 가지고 교회 나온 거예요. 백날 까불어 봤자 마귀 안에 있는 거예요.
야고보서에 율법으로 하나를 어기면 모든 걸 다 어긴다, 해 놓고 그다음에 야고보서 2장 13절에서 아주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11절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지금 이 말씀 들으면 여러분들이 뒤에 막 이 말을 집어넣고 싶어요. “난 간음도 안 했을뿐더러 살인도 안 했으니까 됐죠?” 이런 거 있잖아요. 그 이야기에 대해서 지금 말씀이 해당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뭐냐? 12절에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너희는 자유케 하는 율법을 보면서도 모르느냐, 하는 겁니다. 율법을 보라는 것은 율법에서 관계없다는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네게 스스로 확인되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자유하기 때문에 율법을 보라, 이 말이에요. 율법과 상관없기 때문에 율법을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왜? 이유가 뭐냐?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미 네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긍휼을 이미 받았잖아요. 이미 긍휼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전에 어디에 매여있었는가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거예요. 그래서 뭘 소개하느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바로 그분이고 내 인생을 가져와서 자신의 죄 사할 수 있는, 주가 되시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 해요. “목사님 그 말은 맞는 것 같은데 그럼 너무 외롭잖아요?” 외롭다는 말을 해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외롭다는 것은 이 세상이 내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내 자리가 아니라면 우리는 나그네고 이방인이죠. 나그네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아이고, 그냥 하고 싶은대로 다 하시고 가세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어차피 남의 땅 아닙니까? 지옥이잖아요.
하나님이 철저하게 이 세상을 더욱더 지옥 되게 하시는 그것이 예수님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이라는 것,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 주님을 증명 못 한다는 것, 지옥을 더욱더 지옥 되게 하는데 그 지옥 가는 방법 중 하나가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걸 지옥인 줄 모르고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왜? 왜? 사람 구실 하려고요. 사람 구실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푸들이고, 그레이하운드고 우린 그냥 개에요. 마귀가 기르시는 가축입니다, 우리 인간은. 개에서 사람 되려고 하지 말고 개에서 아들 되면 돼요.
끝으로 이사야 53장 보겠습니다. 빌레몬은 몰라요, 안 갇혔으니까. 사도 바울 갇혔고, 오네시모도 갇혔고, 주님도 갇혔어요. 자기가 자진해서 노예가 됨으로서 이게 내 자리다, 원래 태어날 때 종으로 태어났다, 죄의 종, 심판의 종, 저주의 종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죄의 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의 저주의 노예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께 버림받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예수님의 노선과 우리의 노선이 겹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인생을 살아오신 겁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도대체 이 분이 종이라고 했는데 종으로 하신 일은,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 쪽에선 대단히 요란해요. 뭐가? 채찍 맞고 뭐 하는데 주님이 하시는 일은 늘 젊고 건강합니다.
왜? 주님은 시간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저희들도 우리의 인생을 시간을 초월한, 늘 주와 함께 있는 이 자체를 이미 시작된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영원한 현재로서 주께서 여러분한테 허락한 일을 마음껏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내가 규칙을 끌어모아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서 용서받은 것을 통해 주를 소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전부를 알게 하옵소서. 일부를 알지 말게 하옵시고 우리 자신의 전부를 통달하게 하옵소서. 주님에 대해서 일부를 알지 말고 전부를 알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같이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해 준 것을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