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강제 조치

아빠와 함께 2023. 11. 3. 09:15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은 솥뚜껑만 봐도 놀란다는 속담이 있다. 놀라는 이유는 목숨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것과 비슷한 것만 봐도 두려움을 표출하며 거부한다. 죽을까 싶어서. 그런데 솥뚜껑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라같은 진짜 실체를 마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강제조치가 아니고서야 그것을 스스로 쳐다볼 사람은 없다. ‘모순이든 억측이든 살 수만 있다면 다한다’라는 인간의 오기조차도 이것 앞에서는 꺾인다. 싫은 정도가 단순히 이론으로 자신을 다독여 설득할 정도를 초월한다. 이유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나 인줄 알았던 진짜 나인 악마가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없구나...내가 진짜 죽어있는 시체 맞구나...

광야를 지나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을 쏟아놓았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민21:4) 어제의 일도 기억할 가치가 없게 만들어버리고, 현재 움직이나 어떤 노력도 미래를 위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게 하는, 자신들에게 아무 의미없는 하루살이같은 하루만 주어졌다. 보이지도 않는 약속의 땅은 신기루 같고 현재를 직면한 고통스러운 육체는 대가 없는 삶에 원망을 토로한다.

여호와께서는 그 길이 더 마음에 들지 않는 방법을 취하셨다. 불뱀을 보내어 뜨거운 맛을 보게 하시며 많은 백성을 죽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살려주는 방법은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은 불뱀, 장대 위에 달린 불뱀의 모양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무나 그 놋뱀을 쳐다본다고 아무나 다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불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쳐다보면 구원되는 것이다. 그건 마치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는 것과 같고, 마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손을 떠난 방법이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 누구나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살기로 하나님을 죽인 자가 그분이 달려 피 흘리신 십자가를 쳐다보면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자는 소경이 뭔지 모른다. 원래부터 안 보였던 세상에 갇혀있었고 그게 자연스럽다. 눈이 멀쩡한 누군가가 보이는 세상을 설명한 들, 소경은 여전히 어두운 세계에서, 아는 만큼만 상상한다.

먼저 눈을 떠야 자신이 소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소경이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경된 저주를 대신 가져가신 분이 친히 그분의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게 되면 어느 것도 그를 꾈 수 없다. 마귀에게 꾐을 당하지 않으려는 의지조차도 사그라들고 진짜 없는 자가 되면서, 정말 살아있는 한 분만 있고, 그분의 눈만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다. 자기 마음을 언제까지 속일 수는 없는 은혜의 때를 만나고, 쉴 새 없는 새로움의 공격 앞에, 변치 않으려 했던 나는, 나라는 실체는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나는 울부짖는다. ‘절대 꼴도 보고 싫고, 보면 또 예수님 죽일 거야’ 나에게는 나는 없고 죽이고 싶은 한 분만 있다. 그래서 영적 세계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 마귀가 있고, 마귀는 오직 예수만 알아본다.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자신이 마귀 들린 것을 아는 인간과 마귀 아닌 척하는 인간. 악마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정작 악마 자신의 복제품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어차피 지옥 갈 것들이라 죽일 가치가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악마는 예수도 알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알아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몰랐다. 그래서 묻는다. 넌 누구야?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19:15)

악마에 사로잡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증상은 과거의 기억에 다시 매이는 것이다. 마귀는 속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접착제로 사용해서 잘린 과거를 다시 연결되도록 하고, 자기가 속은 것들을 자체 상정(想定)해서 속인 대상에게 분노하게 만든다. 그러면 이걸 미리 알고 그런 악마의 간교한 술수에 말리지 않으면 될 일인가. 그렇지 않다. 내 뜻대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내가 무의미한 껍데기인데 무엇이 되고 어떤 일이 벌어진들 내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것은 한때 그러했던 공상이고 자신에 대한 무책임이었다. 더 속지 않으려면 이런 속임수에 다시는 말려들면 안 된다. 그렇게 발버둥 치면서 더욱 암울한 어둠의 늪으로 자신을 빠뜨린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할 수 있다. 그 순간은 내가 나의 주인이니까.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된 자들이 타락하고, 회개함으로 다시 새롭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비취고 맛보고 참여된 스티커나 얼룩같은 신앙생활은 제거하면 말끔해진다. 지워지지 않는 약속의 성령의 인치심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뚫고 들어가서 이루어지기에, 인간은,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욕보이는 것이 불가능하다.(히6:6)

이 불가능함에 안도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자가 복된 자이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었다는 착각을 버릴 수 있는 자가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한 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고치지 않는 방식으로 치료하신다. 다만, 하나님은 마귀의 상처를 치료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껍데기를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상처만 치료하신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고 그냥 용도별로 사용되고 각자의 길로 분리수거된다.

이 사실을 극구 거부하기에 우직하고 경건하게 파수꾼의 마음으로 복음과 말씀을 사수한다. ‘내가 꼴보기 싫은 건 마귀지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 악마의 궤계에서 구하옵소서’라고 쉴새 없이 기도한다. 악마가 무섭고 강해서 인간이 마귀에게 눌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이길 수가 없다. 바다에 어부들이 공포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사이렌의 유혹에 빠져든 것이 아니라, 너무 거룩하고 아름다운 소리여서 그곳에서 떠나지 못했다.

천국이 그쪽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고 있는 지식이 그 소리로부터 분별력과 저항력을 발휘해서 자신을 구출해 낼 수 없다. 구원을 생각했건 그딴 거 생각 안 하고 살았건, 천국을 향하는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그냥 그 마음에 끌려간다.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는(눅17:21) 생각을 도려내는 것은 불뱀을 보내신 분이 친히 장대에 달려 대신 죽어주시는 힘이다. 뱀의 머리를 치신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온 부활의 능력이 뱀에게 물려 마땅한 것을 아는 자들을 찾아내시고, 대신 머리가 되어주셨을 때만 쳐다보게 되는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 자는 더이상 천국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의 죽으심만 바라보며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출애굽부터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담으신 어린양의 피만 보셨고, 피를 드러내시기 위해 감싸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껍질을 가차없이 부수고 깨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보배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이 담긴 질그릇을 밟으시고 깨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종의 자식을 내어 쫓고 약속의 자식에게만 유업을 주셔야 직성이 풀리는 하나님, 이스마엘이라는 껍데기를 벗기고 이삭의 기능만 살려내시는 분이 진정 하나님이시다.

이삭의 기능이 최종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며 발생된 사랑, 주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이제 마음껏 이스마엘의 일을 하며 육신의 질문을 한다. “어찌하여...어떻게...” 그리고 주님의 답변에 기뻐하며 주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퇴장시키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주께서 쓰신다”(창18:13, 욥13:24, 민11:11, 눅1:34, 눅19:33...) 질문의 적임자, 이미 답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물음을 하나님께 하실 때(막15:34),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아들에게만 대답하시는 분임이 밝혀졌다. 성경 속의 기능자들을 통해 뱉어진 모든 말씀이 십자가 위에 예수님에게로 회수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죄를 생각해낼 능력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제사법을 알려주셨다. 해마다 절기마다 제사 드리며 죄를 기억하게 해주셨다. 그러나 그것이 죄를 없이 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제사 드리는 그것이 죄를 상쇄시키는 자기 의를 만들어내며, 하나님의 뜻하시는 제사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딸이 집에서 해주는 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맛이 없어서이다. 그래서 주로 달콤한 간식거리들로 배를 채운다. 하루는 일 끝나고 집에 들어갔는데, 딸 아이가 김치찌개랑 반찬을 꺼내서 밥을 먹고 있다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저 밥도 잘 챙겨먹고 있어요. 엄마에게 밥 먹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랬구나. 어서 맛있게 먹어. 그리고 나를 위해 밥을 먹지 말고 너를 위해 먹어. 네가 너를 챙기면서 너를 위해 먹으면, 마침 준비된 밥과 반찬들이 고마울 거야. 그런데 엄마를 위해 일부러 먹으면 준비한 사람의 고마움은 없어지고 예진이가 엄마에게 해준 것만 기억이 날 것 같네...

예수님이 자신을 단번에 드려 제사법을 구원해 내셨기에 더이상 지킬 율법은 남아 있지 않고, 이제는 대신 심판 받고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 능력이 분리해 내시는 선택작업만 남았다. 생명의 부활로 그리고 심판의 부활로. 하나님의 사랑이 오직 어린양으로만 향하고 있음을 알고 찬양할 수 있는 자들은 이미 아들의 품 안에 있다. 신랑의 마음이 입혀졌기에 한 몸처럼 한마음으로 예수님이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를 외친다.

이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물으시는 것은 하나뿐이다. ‘너의 죄가 무엇이냐’ 그러나 대답 듣기를 원하시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 그분의 뜻만 청종하게 하신다. ‘너의 죄를 기억지 아니한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계신 한 분으로 말미암아 흘러나오는 긍휼을 입은 자는 죄를 아는 자가 아니라, 이제는 소유자가 바뀐 몸을 통해 죄를 보이는 자다. 그래서 주의 백성은 이 지옥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에 신나게 자신의 죄를 기억한다.

겉으로 돌출된 죄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가 고스란히 박혀있는 몸을 통해 복음이 작동될 때마다 알알이 세포속에서 발작하는 죄의 아우성을 듣는다. 성도의 특권은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더하는 고마움에 있기에, 이 세상에 머무르면서 부지런히 죄를 기억한다. 하나님의 기억지 아니하심의 자비가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를 알아가며 마음껏 즐거워하고 감사한다.

내가 나를 위해서만 울고, 웃고, 뭐든지 하는 철저한 이기적임을 경과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일방적으로 준비하신 예수님의 완성된 업적을 온전히 고마워할 수없다. 나는 나를 위해 산 적이 별로 없다는, 늘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먼저 위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는,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만났다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죽인다. 기필코. 그렇다고 ‘나는 이기적인 인간인 거 인정한다’라는 허세와 허풍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자신이 피해자고 자신의 희생만 기억하는 고질병을 안고 이유도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예수님은 이런 나의 희생을 쓰레기 취급하며 뭉개버리시는 분인 것을 그분을 찌르고 난 뒤에, 피 흘리게 한 뒤에 더 분명히 알게 되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완악함이 더해져서 담력을 얻어 그의 죽음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행8:1, 창4:23) 울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럴 리가 없다’라는 나를 위한 가짜 울음이다.

악마는 이 세상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우리를 속여준다. 우리가 절대 뚫을 수 없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속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마귀다. 주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창에 찔려 주시고, 그 창에 몸이 관통되시며 대신 뚫려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영원히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망 없다”

“언제까지 있지도 않은 너를 붙잡고 씨름할 거냐. 이제 그만 좀 찔러라. 나를 핍박하는 자야”라고 책망하시는 소리가 다윗의 노래처럼 은혜롭게 들린다. 임마누엘의 날개 아래에서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은 우리의 착하고 싶은 욕망을 역행해서, 반드시 음녀로 드러나도록 조치해주고, 예수님 예표의 사람들의 손에 붙들려서 우리를 부지런히 십자가 현장으로 실어 나르게 하신다. 소돔으로, 애굽으로, 그리고 바벨론 땅으로, 우리의 원초적 죄가 기다리는 사건의 현장으로.(슥5:9~11)

난데없이 출몰하는 이웃을 그리고 형제를 통해, 모세가 반석을 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고, 하나님 앞에 분을 발하게 하시고, 약속의 땅에 넘어갈 자격이 없는 육체와 마음을 가진 자로 드러나게 하는 십자가 현장이 바로 천국과 맞닿은 지점이다. 모세의 육체가 넘어가지 못했지만 높은 곳에 서서 바라본 천국,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주인공은 오직 어린양의 피, 언약궤뿐인 것을 보게 하셨다.

천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어린양의 나라인 것을 알게 하는 마음이 이미 모세 안에 심겨 있기에, 모세는 벌써 주님의 지체로 하늘에 합류되어 있었다. 이미 쪼개진 반석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아픔으로 주의 백성을 쪼개지게 해주시고, 그 사이에서 피의 복음을 건져내시며 듣게 하신다. 이미 새로운 세계로 탯줄이 연결되어 있기에 들린다. “이걸 본 너의 눈이 복되고, 그것으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12:9)

미치거나 정신 멀쩡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야지. 미칠락 말락 하는 곡예를 펼치며 광야를 헤매듯이 아직도 나를 찾고 있다면 찢어지는 고통은 자업자득이다. 뭘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면 그냥 겪어야지 별수가 없다. 자체적으로 고쳐 보려고 용써도 허사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강제조치 속에서 살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자신들이 버리고 싶어서 과거 버리고, 고향 버리고, 집 버리고 애굽을 탈출해서 황무한 공간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영문도 모르고 광야에 놓여 끝까지 버텨보려고 고집만 부렸다.

이제 십자가를 향한 섣부른 감사는 금물이다. 살려고 하는 감사는 도리어 예수님을 찌르는 창으로 변하니까. 고뇌하며 스스로 들풀처럼 돌멩이처럼 되려고 억지 부리지 않아도, 감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쓰신다. 고쳐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쓰신다. (계4:11) 그리고 반드시 이기신다. 악마의 상처를 예수님의 상처가 이기고, 내가 주께 감사하지 않음을 주님의 감사가 이기시며, 내가 주를 사랑하지 않음을 주님의 사랑이 이기신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주님의 손에 빠진 것이,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이 기적중에 기적이다.(삼하24:14) 징계를 받아도, 저주를 받아도, 그리고 죽어도, 그 자리가 복되다.

 

 

댓글

이근호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은 불뱀, 장대 위에 달린 불뱀의 모양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무나 그 놋뱀을 쳐다본다고 아무나 다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불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쳐다보면 구원되는 것이다.”


기계, 전쟁 기계. 누구와 싸우는 것도 모르고 평생을 싸운다. 따라서 주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눅 8:30)  나를 뚫고 악마가 대신 답변한다. “주님, 우리는 ‘우리 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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