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겨울수련회 에베소서강해 제 8강 : 막 - 이 근호 목사
생물학에서 ‘살아있다’라는 것을 보통 확인하는 방법은 막입니다. 경계. 경계막. 막이 어떻게 사라지고 사라진 막이 어떻게 새로 생성되는가. 인간의 언어로 자연현상을 제대로 표현 못해요. 세포막이든지 분열하면서 희미해졌던 막이 새로 다시 생길 때 사람들은 굉장히 난처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막이 나의 막인지, 아니면 내가 막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건지 그게 모호한 거예요. 내게 필요해서 막이 생긴 건지, 막이 막 되기 위해서인지.
막이라는 것은 경계선이거든요, 이것까지만 오고 이것부터는 오지마세요, 경계선이란 말이죠. 사랑의 막도 마찬가지죠. 사랑의 막이 나를 위함인지 아니면 사랑 자체를 위해서 막이 생겼고 막이 사랑이라는 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막을 형성하는 하나의 세포로서 합류하게 하는지 그러한 인식의 차이를 분명히 우리가 해줘야 됩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렇습니다. 말씀만 살아있어요. 이것은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유명한 말씀인데 제가 확인해드리겠습니다. 40:6-8절까지,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걸 방금 제가 강의 시작하면서 언급한 ‘막’을 동원하면 “모든 육체는 막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막의 꽃 같으니 풀(막)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막)이로다 풀은 마르고 막(꽃)은 다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있었는데 사라지고 있어도 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은 어디에 대한 봉사냐? ‘진정한 막은 예수님에 의해서 형성된,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가름하는 지옥과 천국의 막을 형성하고, 막을 형성하는 세포로서 우리를 소환했다, 호출했다’ 이렇게 보는 게 좋아요.
그렇다면 다시 에베소서 갑시다.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에베소서를 한꺼번에 다 이해하자는 거예요. 한꺼번에. 그럼 에베소서 5장을 한번 봅시다. 에베소서 5장에서 하는 말이 여기 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되어 있죠. 이것이 바로 말씀 완성이죠. 그럼 말씀 완성을 위해서 막이 필요하죠. 막이 필요하다면 막 기능을 하는 나의 자아성은 어떻게 됩니까? 나의 기능성은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만을 위해서 여기서 자아를 버려야 돼요.
그럼 그 자아의 내막이 뭐냐? 여기 등장하는 모든 것이 우리 자아에게 해당되는 요소입니다. 4절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또 3절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 이건 다 어디서 나온 거죠? 주님께서 육신이 되면서 느꼈잖아요. 그럼 주님이 입었던 육신을 우리는 아직도 안 죽고 있으니까 지니고 있죠. 지니고 있는 육신에서 사랑이라는 말씀의 영원한 완성을 위해서 육신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나오도록 자극해주는 것은 사랑의 환경이 그 일을 친히 주체적으로 주도적으로 벌이시는 거예요.
자, 에베소서 5: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했죠. 여기서 막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내라는 위치, 남편이라는 위치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린 결론은 뭐냐? 주님을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서 온전한 아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주 대우를 받을 남편은 물론, of course, 물론 없어요. 결코 없습니다.
성경 말씀 들이대면서 “봐라.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라 했는데 너는 왜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주께 하듯 그렇게 안하느냐?” 할 때 그 성경책 집어던질 만해요. “네가 뭔데 감히 성경책을 들이대느냐? 막 주제에. 네가 주님이야?” “여기 남편 대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했잖아.” “네가 남편이야?” 남편은 주께서 남편이라는 기능을 사용할 그 순간 뿐입니다. 좀 긴 사람은 4분 25초 가는 사람이 있고 보통은 한 2초 내지 1초 가요.
특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할 때 아내 된 자도 마찬가지에요. 아내 된 자들이 남편을 주께 하듯 대할 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 남편한테 미안한 일을 했을 때, 2분 30초 갑니다. “갑자기 왜 나한테?” “여보, 이거 한번 잡숴봐. 이거 부산어묵이야. 진짜 부산어묵이야. 잡숴봐.” “아니, 안하던 짓을…. 무섭다. 갑자기 소름이 끼치네. 평소에 하던 대로 해. 겁나네.” “아니야. 오늘따라 당신이 주님처럼 보이네.” 이거 2분 30초 갑니다. 해줄 때 받아. 2분 30초 다 돼가. 해줄 때 주께 하듯 대우할 때 받아. 이거 시효 끝나면 너는 그냥 남자야. 남편 아니야.
말씀은 사건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자아가 말씀을 움켜쥘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풀이기 때문에 유한이 나서서 무한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다시 에베소서 제1강으로 돌아간 셈이죠. 에베소서 1장할 때 그 이야기했잖아요. 무한이 주도하지, 유한이 무한을 진두지휘하거나 요청하거나 요구할 권한과 자격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게 죄니 아니니 우리가 결정할 자격도 없어요. 주께서 없는 죄를 만들어내십니다. 없는 죄가 아니지만 사실은 감추어진 죄를 만들어내십니다. 왜? 사랑을 위하여.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보이지 않는 주님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의 모세의 지팡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도 바울 자기는 결혼도 안했잖아. 결혼도 안 한 인간이 어디 주제넘게 남편이 어떻게 하고 아내는 이렇게 하라고 말할 쨉이 돼? 오지랖도 무슨 저런 오지랖이.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너 뭐라고 이야기했어? ‘혼자 사는 것이 최고에요.’ 이랬잖아, 네가. ‘왜 고생을 자초해서 결혼이란 걸 했냐. 결혼을 한다는 자체가 주님을 온전히 섬길 자신감이 없다는 뜻이야.’ 이런 식으로 결혼한 사람을 그렇게 핍박해놓고 여기 와서는 아내 된 자들이여? 네가 양심이 있냐, 없냐? 왜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어? 결혼하지 마라 해놓고 혼자 사는 게 최고라 해놓고 여기 남편 된 자는 어떻고 저떻고. 결혼도 안 해본 주제에 이게 뭐냐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은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1절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런 인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계속 없어요. 없기 때문에 사건화 되는 거예요. 따라서 부부가 된 것은 둘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는, 이것은 내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우리 가정이 아니고 이렇게 말씀이 말씀되는 사건에 결혼한 우리를 거기다가 양도해야 될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해야 돼요.
‘이거는 행복한 내 가정이야.’를 주저없이 주께서 일으킨 말씀의 사건 앞에 이양해야 돼요. 나의 행복한 가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이끄는 가정이 필요해요. 그 가정은 우리가 더러운 육신을 가진 인간에서 기계를 거쳐서 성도가 되는 예수님 고유의 경로를 반복해서 가능한 거예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가정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 완전한 가정은 없습니다. 없어야 마땅해요.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일을 훼방하게 돼요. 어떤 식으로? ‘주님, 기도합니다. 재림하시더라도 우리 딸내미가 1월 14일에 결혼하는데 그 날짜 지나고 재림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설마 이런 식으로 꼼꼼 기도하는 사람은 없으되, 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곗돈을 3년 동안 부어서 타는 날짜가 1월 말인데 그때까진 일단 타먹고 그 다음날 재림했으면 좋겠다. 인간은 자기 존재성도 유지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생각을 안 갖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차마 그걸 기도로 구체화시키는 것은 우리교회 집사님 기도 외에는 없어요. 어떤 분은 너무 솔직해서 섬뜩하다니까요. 이거는 공공장소에서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생중계로 막 나가니까요. 참 용기도 대단해요. 그래서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우리교회에서 여자 분들은 기도를 제가 뺐습니다. 충격받기 때문에. 후유증이 너무 심해져요.
여기 보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달리 표현하면 나는 사건을 드러내는, 모세가 든 지팡이다. 사건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사건은 이미 통일되었어요. 그럼 나는 뭡니까? 통일체에요. 통일체.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낸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는 형태로 이 땅에 드러내서 지금도 망해가는 세상을 끝까지 포기 못하고 장악하고 있는 악마와 영적 싸움의 군사로서, warrior라고 하죠, 전사로서 사랑 안에 있는 우리를 이 현장 속에 보내는 겁니다.
결국 현장의 싸움은 뭐냐? ‘사건이냐, 존재냐’ 입니다. 너는 어느 쪽이냐? 존재는 고유성, 아까 얘기한 자기 동일성 이것이냐, 아니면 사건이냐. 주님께서는 여기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육신이 있는 존재성을 경유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사건으로 보이지 않는 쪽으로 돌려버려요. 그럼 우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막, 경계막의 기능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어제 부부라고 해서 오늘도 부부라는 그런 고유성을 유지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부부되게 했기 때문에 부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그다음부터 복잡한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둘이 부부라 했는데 한쪽은 남편 값을 하는데 여자가 아내 값을 못해도 그게 부부입니까?” 이런 질문이 막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나 잘하세요.
31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눈에 보이죠. 눈에 보였습니다. 사건이 눈에 보인 거예요. “이 비밀이 크도다” 갑자기 비밀이 나와요.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드디어 사도 바울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해서 ‘혼자 사는 것이 최고에요’ 이것과 연계를 시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혼자 사는 것도 이미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부부관계의 한 일부분으로서 혼자 사는 것도 부부관계라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신랑이 주님이라는 것.
갑자기 여러분들이 뭐가 생각납니까? 수녀. 천국에서는 아무나 고자 되는 게 아니니까. 갑자기 수녀들이 서원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난 이제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남편 주님과 결혼했기 때문에 세상 결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거든요. 물어봅시다.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이 사건적 차원의 고백입니까, 존재적 차원의 고백입니까? (존재적 차원의 고백) 잘 아시네요. 이거 자기 구원받으려고 환장한 거예요. 구원받으려고.
결혼해놓고 수녀처럼 살면 안 됩니까? 이거 멋진 아이디어잖아요. 두 마리 토끼 다 잡았네. 남자한테도 사랑받고 주님한테도 사랑받고. 얼마나 좋아요. 주님한테 사랑받아서 주님께 사랑받았다는 선물로서 비리비리한 남자를 만났다. 감사하면 되죠. 비리비리한 남자 조건이 뭐냐? 일단 키가 180이상 되어야 되고 성격 좋고 인물은 조인성 정도 수준급이어야 되고요. 자기 집 서울에 강남 아파트 하나 있어야 되고 차는 외제차 아니라도 국산 고급차 타야 되고, 금융자산 한 3억 정도 갖고 있고, 집안에 시누이 없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일체 다 돌아가시고, 몸 건강하고, 뭐 고 정도만. 더는 안 바라죠. 고 정도. 솔로에 나옵니다. 나는 당신을 선택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김 아무개입니다. 이건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비리비리한 여자 있잖아요, 비리비리한 여자. 친정 아버지가 SBS 주식 한 20% 갖고 있는 이런 거.
그러니까 인간의 결혼은 육신과 육신의 욕심과 욕심의 만남입니다. 성도의 결혼은 없어요. 성도는 사건화 되어야 돼요. 보이지 않는 주님이 사건화 되어야 성도끼리 결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가 나타나는 모습은 성도가 아니에요. 뭐부터 출발합니까? 육신부터 출발해서 둘다 한바탕 붙어버리면 이 육신에서 둘다 짐승이 돼요. 둘다. 사자냐, 호랑이냐. 둘다 막상막하에요.
육신이 짐승으로 바뀌다가 둘다 갑자기 성령 받아버리면, 아 이건 상당히 멋진 드라마인데요, 둘다 성령을 받아버리면 둘다 붙들고 상대방이 사과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사과하는, 누가 먼저 사과할지 순서정한다고 또 한바탕 싸우고. “내가 미안하다잖아.”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뭐 형님 먼저 아우 먼저에요, 뭐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경우도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과 이미 한몸 되었음’이라는 이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서 비리비리한 존재끼리 만난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혼인하게 된 거예요. 둘다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게. 그 개뿔을 두 자로 하면 이게 ‘비밀’이에요. 개뿔도 아닌 게 자기가 집사라고 목사라고 장로라고. 이게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개뿔 교회.
상대를 만나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걸 알죠. 혼자 도도한 척 인격 다지고 지리산 자연인하면…자연인하면서 나이키는 또 왜 신어요? 나 도대체 이해가 안돼. 혼자 도 닦는 식으로 백날 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고 자기 사랑에 대한 연속, 연장입니다. 희미하게 사라지는 막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계속 계속 나는 나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주님이 이미 대신했잖아요. 불연속성을 계속 유지해야 되죠.
자, 6장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그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무엇 안에서? “주 안에서”. 야, 이게… 주 안에서 부모 공경하는 것. 주 빼고 공경해버리면 바로 내가 효도하는 게 돼요. 내가.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100% 노림수입니다. 옛 사람, 성경에서 흔히 옛 사람이라 하는데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의 만남은 말씀이 우리의 존재를 부정해버리죠.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육신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된 결과가 뭐냐?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마귀에서 탈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려면 일단 시작은 뭐냐? 우리 육신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기 육신의 본색을 드러내줘야 돼요. 멀리서 부모한테 일주일에 세 번씩 전화하고 한 달에 월급타면 다만 몇 푼 되지도 않지만 200만원씩 꼬박꼬박 보내고. 2억 버는데 200만원 보낼 수 있잖아요. 딱딱 보내면서 그렇게 해서 효자 코스프레를 해 볼래요, 아니면 같이 살래요? 어느 쪽 할랍니까? 띄워놓고 잘해줄래요, 같이 살래요?
존재는 같이 살기가 힘들어요. 인간이 부모를 효도하면서 내가 때려죽어도 효자가 될 수 없고 효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를 주님 쪽에서 환경을 만들어내요. 주님의 죄 사함과 사랑, 이것이 우리에게 나오지 않았다는 것, 나의 열심과 말씀 실천에서 이런 악마를 막아주는 방어 돔이 생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사건을 위해서 내 존재가 언제 지워져도 급사해도 나로서는 그걸 너무나 당연히 감수해야 될 처지에 있어요. 그런 육신에 있어요.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떨어져 있든 같이 살든 부모와 만나는 거예요.
2절에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은 십계명 중에 제 오계명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십계명 중에 오계명을 그대로 하게 되면 출애굽에 대한 신약적 재해석이 되는 거예요. 출애굽, 십계명에 대한 신약 십자가 안에서의 재해석을 이렇게 펼치는 겁니다.
자, 일단은 이렇게 물어봅시다. “그렇게 말한 사도 바울 너는 효도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버지, 어머니 챙겼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부모가 늙어서 죽었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과거에 살아있을 때 나는 이렇게 충성했다는 소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볼 때 뭐했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완전히 빠졌죠. 일가친척 가족 다 버리고 주의 복음 전한다고 맨날 싸돌아다녔잖아요. 터키로 그리스로 돌아다녔잖아요. 그럼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너는 네 일만 생각하냐? 다른 사람들은 아주 무시하고? 좋겠다. 너는 주의 일 많이 해서 좋겠다. 생명의 면류관 너 혼자 뒤집어 써. 너 이기주의 맞잖아. 너 이기주의잖아. 너 천당 가려고 지금 그 짓 하고 있잖아.” 라고 이야기할 때, 사도 바울은 뭐라고 대꾸하겠습니까? 주관식이에요. “남한테 이러라고 잔소리하지 말고 네가 실천해보지. 그래, 꼴좋다. 네가 그래서 땅에서 잘~~~~ 됐다, 그래. 40대 매를 세 번씩이나 맞고. 아이고, 호강했다. 호강했어. (그게 호강이냐?)”
사도 바울이 십계명을 거론하는 것은 십계명이 여기서 사건으로 이미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십계명이. 십계명은 주의 뜻이에요. 주의 뜻이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철회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십계명을 이루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십계명을 이루기 위해서 전에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성도 되는 데에 십계명이 여기서 지배적으로 작동을 해요.
그렇다면 여기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했는데 그럼 약속 있는 첫 계명이 에베소서 6:1절에 나왔던 “주 안에서” 약속 있는 계명의 실현을 주님이 포기하지 않는다. 그 포기 않는 공간이 뭐냐? 아까 사랑의 공간이 뭐라고 했습니까? 가정 또는 부모와의 가족, 이게 공간이에요.
거기서 뭘 알면 돼요? 이것은 육신으로서 부모를 섬기는 것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 마음을 자식이 부모한테 보여주면 그게 바로 최고의 이웃 사랑입니다. 십계명에 약속 있는 계명이 있지만 이웃 사랑의 여러 분류 중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아비들아” 나오죠.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만나서 육신이 육신을 만나서 그 환경이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자기 육신으로 봉사하는 일에 성도가 종사하게 만들어요. 성도는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성도가 하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성도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그게 사랑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그런 계획을 주께서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잘되고 땅에서 장수한다는 이것이 주 안으로 이동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구약에 있는 ‘땅에서’라고 할 때는 약속의 땅이에요. 장수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오래 사는 겁니다. 이 약속을 어디로 가져가요? 주님 계신 곳으로 가져가죠. 주님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나라. 하늘나라보다 더 긴 데 있어요? 없죠. 잘 된다. 최고 잘되는 게 뭡니까? 예수님이 잘된 게 뭡니까? 십자가 잔을 피한 것이 잘된 거예요, 마시는 게 잘된 거예요? 마셔야 주님의 나라가 성립되는 겁니다. 주 안에서 뭘 확인하는가?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영생을 얻고 잘되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육신을 가지고 부모와 맞닥뜨리는 이런 환경을 주께서 주신 거예요.
부모도 마찬가지고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부모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요새는 부모가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노여울까봐 ‘아들, 아들, 내 아들’ 이러면서 알아서 시녀 역할, 봉사 역할 다 해요. 아들은 원하지도 않는데 “뭐 해줄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뭘 부탁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부탁한 것, 우리 집안 이야기 같으면 “이 할머니가 뭘 사줄까? 뭐 빵 사줄까?” 하니까 우리 손녀가 하는 말이 “아파트 사 주세요,” 에베소서 말씀대로 아파트 안 사주면 노여워할 거 같아. 에베소서 3장 4절 또 위반했어. “아, 장난감 아파트?”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아파트.” 좀 컸으면 구체적으로 34평짜리 아파트 이야기할 거예요. 그거 안 사주면 노여움을 살 것 같아요, 자식들한테.
아, 더러운 세상입니다. 이 세상. 이게 누굴 닮아서 그런가 하면 내 육신을 그대로 인수받아서 그래요.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환경입니다. 만약에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해주겠습니까? 아파트 사주려고 적금들 거예요. 이게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마귀가 하는 짓. 주 안에서 빼버리면.
우리는 내 전쟁하면 안 됩니다. 이미 주님의 전쟁이에요. 주께서 뭘 다 이루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육신은 활용되고 있습니다. 육신이 그냥 산속에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실생활 현상 속에 사회 속에 하나님께서 맞닥뜨리는 환경을 만들어줘요.
그다음 6:5절 봅시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야, 이거 참 최저시급 이야기 아닙니까. 분명히 알아야 돼요,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은. ‘구두계약은 무효다.’ 지금 내 존재 위주로 나갔을 때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뭐가 들어오는가? 다시 한번 복습해봅시다. 역사란, 혈통+법이죠. 최저시급이 지금 얼마에요? 9800원쯤 되죠. 뭘 지키기 위함이에요? 나라는 육신을 지키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이 법이며 여기서 나의 동질성은 법적으로 보장받겠다는 거예요. 어제 살아있는 내가 오늘도 살아있기 위해서는 사회법이 동원되어야 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뭐를 주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자아를 그리스도가 죽였고 빼앗아갔죠. 주인한테 빼앗기라는 말이에요. 빼앗겨라. “주인님, 3개월 일한 거 퇴직금 왜 안 주십니까?” 3개월 일해놓고. 왜 노동자가 주인한테 퇴직금 달라 뭐 달라, 얼마 일하지도 않고 왜 달라고 하느냐? 나라에서 주는 실업수당을 빼먹기 위해서. 그래서 자기가 필요한 서류를 꾸며서 실업수당도 자꾸 반복해서 받으면 나라에서 안 주거든요. 이걸 또 가짜로 해서 마치 취업을 안한 것처럼 해서 다른 데서 또 타먹으려고.
도대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 존재하는 거예요, 인간은. 존재가 이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냥 너만 혼자 살아. 남 이용하고 남한테 해코지하지 말고. 노동자로 들어가서 주인을 아주 죽여버려요. 노동자 궐기하라. 너나 하세요. 자기 회사도 아닌데 되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편의점에 아르바이트 학생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계약서에 싸인해.” 보니까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빨간 매직으로 줄 그으어서) 하듯 하라’ “너 교회 다니지?” “예.” “그럼 주인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주께 복종하듯이 가스 라이팅 당하듯이 모든 걸 다 빼앗기는 심정으로 너는 나한테 일할 수 있느뇨?” “월급은 얼마 주는데요?” “월급은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분량대로 줄 거야. 내가 10원 주고 싶으면 10원 주고 100원 주고 싶으면 100원 주고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줄 거야. 그럴 때 이건 내가 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주셨다 할 수 있거든 싸인해.”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주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를 뽑는 거죠. 어디 염전 노동자 구하는 거예요? 안되죠. 이래서 사업될 리가 없죠. 사람이 없죠. 자기한테 충성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사회를 보면서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빨리 떠나버리자. 뭐 성경말씀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했는데 날 우습게 생각하니 내가 살 이유가 없어요.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사람만큼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게 또 사람이에요. 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입니까. 사람 없이는 못 살고 사람 때문에 미치겠고, 내가 못 살겠고.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떠나자. 어디로? 제주도로? 아니에요, 아니에요. 떠나요~ 제주도로. 아니에요. 천국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사업하면서 세상을 배우고 내가 얼마나 욕심쟁이며 내 존재로 인하여 남에게 얼마나 피해주는가를 착실하게 익히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게 주께서 거저 주신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더욱더 크게 되는 체험의 날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이런 종 없다. 아주 깔끔하죠. 이런 사람 없습니다.
그다음 봅시다. 그다음은 왜 이렇게 길어요? “눈가림만 하여…” 왜 이렇게 깁니까? 주님이 인간에 대해서 안다는 뜻이죠. 그다음 8절에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자, 사용자에게 회사 사장, 자본가가 이런 본문대로 하게 되면 자본가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사업은 내가 할 테니까 하나님은 내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내가 돈 벌어서 십일조는 해드릴 테니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은 하지 마시고 사업이 어려울 때 도와는 주시되 사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저이고 싶습니다.’라는 생각이 들죠.
이게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사업체는 내 소유고 소유가 있을 때 내 존재감은 비로소 막이 형성돼요. 인간은 소유 없으면 내가 없어요. 소유 없으면 나라는 의미 없어요. 인간은 소유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인데 교인 없다. 이게 무슨 목사에요? 교인 몇 명이고? 250명. 이게 목사죠. 목사라는 위치는 자기의 소유가 결정하는 것이지, 목사가 ‘주의 계시 받았습니다. 주의 사명 받았습니다.’ 그건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거든요. 모든 게 그래요. 뭐 다방에 가면 쥐나 개나 다 사장님이에요. 내가 뭐 사장이에요? 사장님, 사장님. 엽차만 마시지 마시고 쌍화탕에 날계란 타드실래요? 뭐 낭만을 위해서에요, 뭐에요? 실없는 농담하려고? 세상은 후딱 떠나야 된다는 것을 그냥 이렇게 경험하면서 참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 더러운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누구냐?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럼 주님의 해결책을 봐야 되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고린도전서 7장 두 군데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뭐다? “하나이니라”
존재가 아니고. 존재는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주님 몸의 지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화 된 하나의 지체일 뿐이에요. 사건화 된. 그러니까 내가 잘나서 사장이고 못나서 노동자가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요새 들으면 굉장히 과격한 발언을 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7:20절,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누구 마음대로 종이다 자유자다 하래? 바둑돌의 위치는 내가 지정해주고 그 환경도 내가 조성한 거야. 네가 어디 가더라도, 종이라도 내가 보기엔 자유자고 내가 자유자라도 남하고 비교해서 ‘나는 자유다’ 우기지 마. 너는 나의 종일 뿐이야. 상전은 주님이 상전이지, 네가 남한테 상전 짓하지 말라.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님 지체 안에서의 상황이에요.
그러면 그다음에 나오는 생각은 ‘우리가 이대로 지켜야 됩니까?’ 지키는 소관은 우리한테 있지 않고 주께서 지키게 하는 회로를 가동해버려요. 주께서 고난 받던 회로를 가동해버리면 ‘나는 주님을 참 힘들게 하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 계기가 되어서 할 게 뭐 있느냐? 에베소서 6:10절 보기 전에 5장 빠진 부분을 다시 한번 봅시다. 방금 이렇게 실전적으로 경험을 했죠. 그다음 5:6절부터 보시면 됩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는 내가 준 환경 속에 위치로서 내가 존재케 했다는 뜻이거든요.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그러니까 아내 역할, 남편 역할, 주인 역할, 노동자 역할, 아버지 역할, 아들 역할 어떤 역할 하더라도 그 역할을 따지지 말고 탓하지 말고 불순종에 있는 사람과 신자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를 드러내야 된단 말이죠.
그다음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말로 어두움입니까? 육신으로 실습해야죠. 회사를 차리고 또 취직을 하면서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는 거예요. 내가 욕심 없다고 여겼는데 이런 욕심이 있었구나. 그럼 어두움이라는 게 그냥 ‘캄캄하구나’ 그게 아니고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러니까 이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나는 어둡다. 나는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육신 자체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죽은 자가 죽은 자끼리 모이는 이 세상을 그대로 실습시키는 거예요. 아내도 죽은 자고 남편도 죽은 자인데 아내와 남편이 신자든 불신자든 관계없이 만나는 가운데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누가 작동하는가? 우리가 나서서 작동하는 게 아니고 죽은 자와 대비해서 실제로 진짜 살아계신 분이 우리 가운데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막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가정이라는 거예요. 가정.
여러분 가정에서 싸우라는 말입니까? 라고 저한테 묻지 마세요. 안 싸울 때도 우리는 싸우고 있습니다. 안 싸우는 게 이상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중심이잖아요. 어두움이잖아요. 우리 육신 자체가 이미 폐기처분되어야 된다는 요소를 지니고 있잖아요.
5: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은 누가 빛이냐 하면 예수님이 빛이죠. 조건이 뭐냐? 네가 빛을 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빛이 함께 있으면 “내가 이거 안 했는데요. 내가 이거 안 했어요.”가 그게 착함이에요. “이거 제가 한 게 아닌데요.” 이게 의로움이에요. “이게 제가 한 게 아닌데요.” 그게 진실함이에요.
“야, 아침에 네가 그렇게 늦잠 자더니만 갑자기 네가 아내 역할 한다고 일찍 일어나서 새벽밥을 하다니. 네가 다시 보인다. 네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아내가 뭐라고 해야 됩니까? “내가 성도잖아.” 이러면 안돼요. 그럼 또 시험 들어 안돼요. “내가 한 게 아니고. 네 눈에는 내가 한 걸로 보이나? 내 속에 있는 주님께서 하신 거야.”
그러면 불신자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그만 그만 그만! 안 나오나 했지. 또. 제발 그 말 만큼은 그만! 좀 그냥 곱게 ‘내가 너 봐줘서 해줬다’ 그 말이 나는 낯설지 않고 반가워. 왜 주님이 거기서 꼭 끼어드냐? 진짜 지긋지긋해. 그놈의 복음전도. 그렇게 바깥에 나가서 전도해. 남편 상대로 실험 실습하지 말고. 내가 네 실험실 청개구리도 아니고 이게 뭐고.” 그러면 아내 쪽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그래, 한번 해봤다. 오늘로서 아침밥 끝. 콘 후레이크나 마시고 가라. 우유하고. 너 알아서 먹어라. 뭐 해줘도 불만인데. 아휴, 더러운 세상. 주여, 빨리 급사시켜주옵소서.”
10절에 보면 방금 이야기가 다 나오죠.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시험 장소로 이 세상을 주셨으니까요. 부모 만남, 종, 사용자, 노동자 모든 게 시험이거든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책망한다는 것은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어야 가능해요. ‘저것은 불신세계, 저것은 마귀세계인데….’라고 생각이 날 수밖에 없어요. 두 가지의 뚜껑이 있으니까. 이미 이 세상과 천국, 그 사이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모세 지팡이로 우리가 활용되기 때문에 이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똑같은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감추고 있어도 이미 우리가 그걸 경험하고 있고 실제로 살기 때문에 그들의 실체를 그대로 말할 수가 있죠. 예수님의 안목으로 성령의 안목으로 모든 걸 통달했으니까. 창세 전의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이 대목 설명을 안 하고는 끝낼 수가 없어요.
㉮책망이 유발되도록 이 어두운 세상에 지옥 같은 세상에 성도로 하나의 바둑돌로 위치해 있습니다.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위치에서 책망이 일어나게 하고
㉰그 책망을 통해서 나를 책망할 수 있는 더 고차원에 계신 빛의 세계와 매개관계가 계속해서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낼 때
이게 바로 빛의 열매인데, 그 안에 빛이 들어있는 열매를 못난 우리 죄인을 통해서 죄인 중의 괴수를 통해서 드러내면 우리의 행복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에 대한 주의 용도는 성공하신 거예요. 빛의 성공입니다.
이것이 사랑받은 자에게만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입니다. 14절 같은 경우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예수님의 부활을 재현하는 거죠.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그다음 이야기는 뭐냐? 두 가지 안목을 이미 갖추게 하신 거예요. 사랑 안에서. 우리는 죄인인데 사랑 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을 알려면 술을 아예 안 먹는 게 아니고 술 취함이 뭔지를 아는 환경 속이 찾아오는 거예요. 교회 다니고 술을 안 먹은 지 56년째 되더라도 57년째에 옆 사람이 사이다라고 속여서 술을 먹일 수도 있는 문제에요. 먹고 난 뒤에 얼굴 벌개서 취해 있을 때, ‘아, 술 취하는 것이 이렇게 완전히 개가 되는 순간이구나.’ 느낄 때, 또 그게 시와 찬미로 주께 술 취한 채로 찬미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걸 또 이용해서 찬미하고 싶어서 술 한 바가지 잡숫지 마시고요.
결론은 이겁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우리 하나님께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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