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4겨울-5강 틈

아빠와 함께 2024. 1. 13. 15:58

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5강-에베소서: 틈
(강의:이근호 목사)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입니다. 이번강의 미리말씀드리지만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떤점에서 어렵냐하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대목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5절을 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 앉혔다는 것,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내용과 관련 있습니다.

그래서 2장 1절을 설명하면서 어디까지 꽉 통해야 하느냐면 거침없이 연결되어야 되느냐. 막힘없이 통해야되는게 2장 6절에 하늘에 앉히시니까지 한꺼번에 확 달려가야돼요. 그렇게 한꺼번에 가는 것.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하는 대목에 왔을 때 “주여 반성하겠습니다. 회개하겠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백날 회개하고 반성해봐야 그거는 하늘에 앉힌상태가 아니에요. 노력하는 상태죠. “열심히 하면 주께서 뭐 좋은자리 주시겠지.” 그거는 아직까지 미래에요. 현재 앉혔다는 말은 완료입니다. 끝난거에요.

그래서 이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렵다는게 다른게 어려운게 아니고 너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이 구절에 대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경쟁해요. 경쟁이 발생됩니다. 경쟁이 발생되어야 영적싸움이라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환경이 조성돼요. 이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하면 싸움하는 판에다가 집어넣는겁니다. 그러면 첫 번째는 뭐냐하면 인간이 끄집어 내는 죄와 허물, 나 또는 너의 죄와 허물.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시는 죄와 허물 이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이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주께선 “아닌데?” “저는 이것을 허물로 인정합니다.” “그거 아니야. 또 끄집어내봐. 그것도 아니야.” 죄와 허물을 끄집어 내면서 이 둘 사이에 뭐를 발견하느냐 하면 틈이생깁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 틈에서 뭐가나오느냐 하면 “하늘에 앉히시니”가 나와요. 예를들면 이렇습니다. “3시 59분에 저한테 59분된다고 이야기해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는데 3시 58분에 딱 하는거에요. 여기서 뭐가 차이나요? 1분의 틈이 생기죠.

주께서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것을 이걸 이미 예상하고 하늘에 앉을려고 구원 받을려고 애쓰는 인간들을 내쳐버리는겁니다. 내쳐야 돼요. 하늘에 앉히는 것을 내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해석했던 그 성경해석 몽땅이 이게 뭐냐하면 무효가 돼요. 효력 상실 뭐 이렇게 표현해도 되고요. 인간이 성경에서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인정을 안해줘버려요.

이것을 실제로, 효력 상실 이게 적당하겠네요. 효력 상실을 이걸 간단히 이야기해서 뭐냐하면 “불법을 행한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는거에요. 불법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너희는 성경 해석권이 없다.” 이 1번을 누가 대표하느냐. 이 1번을 대표하는 민족이 있었으니 그 민족이 여러분 아시죠? 이스라엘. 이스라엘보고 이 일을 시킨거에요. 율법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충실히 해석하면서 그들을 불법하고있는 그러한 민족으로 들추어내는겁니다.

그러면 “하늘에 앉히시며” 이거는 어떻게되는가?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이 내용에 의해서 인간은 근접할 수가 없어요. 아까 세 번째 시간인지 제가 문장을 하나 썼는데 문장을 다시한번 써볼게요. “방에 들어가도 좋습니까?” 제가 밑에 뭐라고 했어요? “안돼요. 안돼” 또는 “안돼요.”라고 했죠.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이에요. “그럼 방에 들어가도 좋습니까?” “들어오지마 못들어와.” 그러면 이사람은 구원 못받습니까? 구원 받아요. 하나님 아는 방에 못들어가는데 구원을 받아요. 그게 두 번째 시간에 했던 것은 뭐냐? 통보.

통보란 뜻은 항상 사후, 또는 다른말로하면 추후 또는 소급해서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통보해주는겁니다. 통보함으로써 인간들로 하여금 무엇을 반추하게 만드느냐하면 내가 성경 말씀에 해석했던 모든 것들이 이게 무효가 되고 효력이 없는 것들이 나에게 나왔다는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이 성경해석을 하고 노력하는 이 모든 것은 주님앞에서의 승리입니까? 패배입니까?

질문자체가 너무 어려웠는가? 이게 승리한거에요 인간은 패배한거에요? 패배지요. 교재에 나옵니다. 교재 한번 3페이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3페이지에 중간에 보면, 위에서 10번째 줄 쯤 되는데요. 전쟁을 통해서 다시한번 정리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뭐하는 민족이다? 온통 전쟁만 하는 민족이다. 전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다 라고 하는데 거룩한 전쟁에 그들이 끌려나온거죠.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패배자이며, 이 패배자를 애써 부정하고 전쟁의 승리자로 기대하는 억지가 유지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전쟁에 들어가야되는 이유가 패배하기위해서, 어떤 승리도 인간에게 돌아올 몫은 없습니다.

근데 그 사실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부지런히 성경을 해석을 하는거에요. 해석하면서 성경을 해석 안한쪽보다 성경해석 하는 쪽이 반드시 우리는 승리 할것이라는 짐작으로 그런 기대감으로 전쟁에 나서게 만들어요. 이게 구약성경에 전쟁의 특징입니다. 뭔가 기대를 잔뜩하고 나서는데 아무도 승자가 없어요. 인간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에 인간이 끼어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쟁을 하면서 그들은 뭘 하느냐하면 허물과 죄에 대해서 금식하면서 반성합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나름대로의 자기 허물과 죄가 있으면 거룩한 하나님과 합세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패배가 돌아온다는 것은 역사적 교훈이다. 이 역사적 교훈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다음 전쟁을 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 가지고 정결하고 순결하게 전쟁해야 우리가 승리한다.” 이게 바로 열왕기상 열왕기하에 나오는 역대상 역대하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들이 했던 이해에요.

근데 그게 바로 패배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당시에는 몰랐어요. 주께서는 인간이 해석을 할 때 그냥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를 가졌다는 것. 하나님이 승리자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승리자 편에 내가 설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들어있었던 거에요. 통보한다는 생각보다도 알아서 우리가 협조한다는 생각을가지고 하나님의 전쟁에 명분으로 삼고 뛰어든겁니다.

그런데 그런 명분을 삼은 이스라엘을 전쟁이 끝나고 난뒤에 분명히 승리는 이스라엘에게 돌아왔는데 그 승리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은 승자가 우리가 아니고 우리는 패배자의 일부다. 적들도 패배자지만 우리도 패배자란 사실을 새겨서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을 때 그게 바로 승리입니다. 그게 승리에요. 인간이 하나님이 협조해서 하늘에 앉히는 그 법은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 우편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 이야기로 그치는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같이 노골적인 구체적인 증거를 남겼지만 여기에 3페이지 계속 보게되면 오늘날 노동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말이죠. 군사적 전시상황도 아니라도 상호패배의 경험은 노동시장에서 일어나요.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는 영적전쟁, 이 전쟁이 하루도 쉴 날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역사고 나 사적인 역사속에서도 전쟁이 멈춘 날이 없습니다. 항상우리는 패배자 되기를 싫어하는거에요.

자본가에 대한 투쟁처럼 믿어지겠지만 싫은 목적도없으며 무미건조한, 여기 중요한게 대자연의 침묵. 대자연은 말이 없습니다. 대자연은 말이 없잖아요. 그러면 누가 말을 겁니까? 인간 쪽에서 어느쪽으로? 대자연쪽으로 말을 걸어요. 말을 거는 방식이 뭐냐하면 노동입니다. 노동. 내가 갖고있는 나의 에너지를 자연에 투자하고 투여하는거에요.

“하나님 저 이번 일에 신경 바짝 썼습니다.” 이게뭐에요? 나의 이름을 걸고 내가 할 수 있는 역량 대로 자연에다가 투자하는겁니다. “이번 시험에 합격하기위해서,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내가 학원다니면서 공부 꽤나 이 사십넘은 나이에 좀 했습니다.” 뭐 이런거. 어디 공인중개사 시험이 공인중개사의 법적인 학문적 발전을 위해서 합니까? 복덕방 할려고 하는거 아니에요?

자꾸 집에서 논다고 하니까 그게 짜증나는거에요. “봐, 나 시험 뭐 하잖아.” “뭐하는데?” “공인중개사” “백수지 뭐” 인간쪽에서 말을 겁니다. 노동으로 말을걸잖아요. 그럼 자연은 말을 해요 안해요? 자연은 여기보면 이 말없는 자연은, 자연은 말이없어요. 말이없으니까 자기가 자연에게 말을 걸면서 그 언어를 누가 되받아요? 말을 건 내가 되받아와요. 되받아오면 이게 뭐라하느냐하면 이게 지독한 자기사랑이죠.

그걸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입니다. 멸망할 때 이스라엘은 무슨 나라로 바뀌었습니까? 유대교로 바뀌어요. 이스라엘이 유대교로 바뀌면서 지독한 자기사랑, 유대교. 그럼 유대교는 뭘로 충만하겠죠? 언어로 충만하지요. 그 언어는 누가 내뱉은 언어? 어떤 누구누구한테 해놓으면 그 해석을 포함해서 누가다시 되받아옵니까? 내가 되받아오는거에요.

그러면 성경말씀은 이렇게 있는데 그 부록으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이 10배 20배 많아지는겁니다. 그게 법적인 효력으로 유대교가 정체성을 강화시켰고 그 안으로 누가 뛰어드느냐? 주님이 뛰어들죠. 그리고 증명하는 것은 뭐냐? “너희들은 이미 패배자다.” “너희들이 성경해석을 하기 때문에 패배자가된거다.”이방민족에 지지 않기 위해서 해석했는데 그게 바로 패배자인겁니다. 그럼 패배자가 될 때 그러면 패배자가 되면 끝이냐?

아니죠. 패배자가 됐다는 그 과정이 추후에 주님이 통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버려요.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보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되어있죠? 여기 주와 그리스도 이 뜻이 뭐냐하면 메시아라는거에요. 현재 메시아를 누가 기다렸습니까? 성경을 해석했던 유대민족이 메시아를 기다렸거든요.

기다렸어요. 과연 그들이 기다릴만한 자격이 됩니까? 안됩니다. 왜? 그들은 과거에 역사적 교훈을 알아서 금식할 때 제대로 금식하고 제대로 회개하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너희 금식할 때 웃었잖아. 금식할 때 가난한 사람을 학대했잖아.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유대인들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회개하고 구제하고 철두철미하게 더 이상 하나님한테 잔소리, 지적질 들을게 없도록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것. 그게 바로 패배자의 모습이에요. 그게 하늘나라 천국 못가는 주님나라에 갈수 없는 자의 극단적인 최후의 모습이에요. 주께서 그렇게 그들로 하여금 종말로 몰아세운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패배자였는데 자꾸 아니라고 여기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면 이거는 어떻게 끄집어 냅니까? 성경 줘가지고, 율법줘가지고 나름 해석하도록 하는 가운데, 언어를 해석하는 가운데 은근히 자기가 노리는 하나님앞에 짤리기 싫다는 본능이 거기서 섞여서 함축해서 같이 우러나오도록 만드는거에요. 그게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실컷 회개했나?” “회개했습니다. 저는 금식까지 알아서 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금식 안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니가 신랑을 죽였다 이말이에요. 너희들이. 그때는 뭘해야된다? 그때는 회개할 것이다. 그러면 앞에 있는 죄를 위해서 금식하는 회계는 본인이 죄허물과 죄를 알아서 하는 자기 반성차원에서 하는 회계라면 뒤에나오는 회개는 울고불고가 아니고 뭐냐하면 통보하는 회개 자체를 통보해줘버려요.

그러면 그 두 개의 회개와 반성을 쥐고 거기서 뭘 발견하는가? 틈을 발견합니다. 천국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구나. 감사와 고마움이 우러나죠. 그게 바로 하늘에 앉힌사람의 특징입니다. 왜? 추후적이니까. 사후적이니까요. 더는 자기를 사랑할 수가 없고 더구나 뭘 사랑할 수 없느냐? 어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시다라는 말을 발견해요. 추후적으로.

왜냐하면 같은 하나님을 두고도 내가 해석한 하나님과 직접 찾아온 하나님과 틈이 있다는 사실. 틈이 있을 때 그 틈이 발생되어버리면 우리는 절망적이잖아요. 근데 그 틈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틈을 우리에게 통보 해줘버리면 “우째 내가 저 틈을 건너왔지”라는 그 신기함. 그 신기함이죠. 놀라워라. 어떻게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니까 똑같은 단어인데 “어떻게 하늘에 앉힐수가 있습니까?” 이 문장과 “어떻게”, 막 찡그리는거에요.“어떻게 하늘나라에 갈수 있습니까?” 하고 같은 단어인데 느낌아니까. 느낌이 완전히 다르죠. “어떻게 내가 그 하늘에 앉았습니까?” 라고 완전히 반전이 일어나는거에요. 반전.

주님몫이죠. 그래서 여기 사도행전 2장 36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진작이야기하지 진작. 진작 그 이야기를 못해요. 그들은 예수님을 살해할 때 신났어요. 아주 신바람 났다니까요. 통계적으로 대다수가 예수님 죽이는쪽에 찬성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수행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시한번 정리합니다. 자연은 말이 없어요. 자연은 말이 없기 때문에 자연에다가 자기 인간의말을 걸어줘야됩니다. 그 말이라는 것은 내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사랑을 절대로 포기못해요. 성경해석을 하나하나 해석하면서 거기에 뭐가 묻어있습니까? 이 성경해석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것이다라는 자기사랑의 지독한 사랑을 하는거에요. 하면서 그 기본에 깔려있는게 뭐냐? “저 하나님 사랑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니가 하나님 사랑한다고 누가 알려주던데?” “주님의 말씀에 그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영적전쟁에서 니가 빠져있냐 아니면 니가 전쟁의 주체자냐?” 이렇게 묻게되면 “주님의 전쟁에 제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이 되느냐?” “그건 뭐 주님과 저의 전쟁이죠.” 그러니까 이게 영적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뭐냐하면 자기의 가치를 지키려는 나의전쟁이 되고마는겁니다.

그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지금 전혀 동의가 안될꺼에요. 그래서 교재 3페이지에. 교재 3페이지가 준비되어있습니다. 교재 3페이지가 밑에서 두 번째줄에, 높은 파도가 해변에 다가올 때 우리는 수면에 가로지르는 실체적 존재를 집약한다. 파도니까. 그런데 그다음에 보세요. 이 파도는 아무런 실체적, 그다음에 뭐라고되어있느냐, 실체적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는거에요.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이미 자기자신을 동일한 대상으로 본인이 그걸 받아들이고있는거에요.

나는 어디장소, 미국가도 나고, 한국와도 나고 나는 어디가도 나라는 동일성은 한결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는겁니다. 굉장히 어려운이야기에요. 파도를 보고서 전체는 파도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그 물방울이 다 다르다는 것은 우리는 파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파도가 나를 볼 때 어떻게 보느냐는 우리는 그거를 의도적으로 막아버려요. 파도는 말을 안하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을했잖아요. 죄와 허물로 너희가 죽었다 할 때 그 죽었다는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서 내가 동일하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면 반성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그렇다면 반성하겠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해석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인간은 죽을 자격도 안되지만요, 인간은 죄와허물을 지을 자격도 없어요. 그이유가 뭐냐? 하늘에 앉은 자리, 이 자리가 누구 자리냐 하면 이게 주의 자리거든요. 근데 인간은 주님이 아니에요. 주님이 아니다 이말이죠. 그런데 에베소서 2장 1절과 7절에 보면, 중간에 어떤 과정이 있는가 다 없애버리고 1절 7절을 보게되면, 죄와 허물로 죽었죠? 근데 마지막에 뭡니까? 우리자리가 아닌 주님이 있을 자리에 우리를 어디에 앉혀요? 하늘에 앉혀졌죠.

그러면 그 가운데서 뭐가 탈락해야돼요? 나의 동일성이 탈락해야됩니까 주님의 동일성이 탈락해야돼요? 나의 동일성이 탈락해야돼요. 그러면 죄와 허물은 뭐냐? 내가 동일하지 않는데 동일하게 만드는 그 배후 세력이 그게 죄와 허물이 되는겁니다. 그거는 우리는 몰라요. 그거는 악마가 그렇게 작동을 한겁니다. 그거는 주님이 알아요. 악마는 동일하니까. 처음부터 악마는 시간에 가두어뒀다 했잖아요. 악마는 어떤 행동을 반성을해도 변함이 없어요. 왜? 악마는 동일해야 되니까.

그래서 이래도 여러분들은 납득 곤란할거라고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5페이지를 봅시다. 그럴줄 알고 교재를 이렇게 복잡하게 쓴거에요. 5페이지를 보면 이렇습니다. 제일 위에. ‘예를 들면 티비 화면에서 티비가 올려져있는 책상을 볼 수 있는데 그 티비속에도 다시 티비가 올려져있는 책상이, 그리고 다시 그 티비 속에서 티비가 올려져있는 자아를 계속 확대 양산할 수있는 것이 주변에 가득하다.’

맞지요. 티비 책상에 해서 치워보면 티비속에 티비가 있잖아요. 이것이 언어를 구성하는 당사자의 자아가 있을 수 있고, 인간이 언어를 대할 때 그 언어가 일찍이 언어가 나의 티비 역할을 하는거에요. 왜? 저쪽에서 나한테 말 안거니까 내쪽에서 어떻게 답답해서 내쪽에서 해석을 하든지 말을 걸든지 하여튼 내쪽에서 뭔가 나오는 것을 내가 되받아서 그걸 내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내가 동일시되니까요.

구원받기 전의 나와 구원 받고 후의 나가 일치 되어야 되니까요. 중간의 내가 불연속 점이 되면 곤란하다 이말입니다. 지금 있는 내가 천국가있는 나와 일치되기를 내가 소원하고 있어요. 누구 마음대로? 내마음대로에요 그거는.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여기있는 나와 천당가는 나가 다른사람 같으면 우리는 곤란하다 하는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말합니다. “그게 왜 곤란한데?” “그거는 묻지말고 그러고 싶어요. 나는 승자가 되고싶으니까. 패배자가 되기 싫으니까.” “그게 마귀야 인간아. 그게 마귀의 생각이야.” 자꾸하나님은 사랑이라는거에요.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자기아들 예수님만 사랑했어요.

그러니 성경해석을 하면서 그해석이 묻어나와야 돼요. “나는 하나님이 자기아들 예수님만 사랑하는데 나는 뭐냐? 훼방자요, 폭행자요, 방해자가 되는거에요.” 그런자에요. 내가 방해자고 폭행자, 주님을 욕보인 자라는 그걸 알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여기있는 내가 지옥가도 할말 없다는 그걸 알기 위해서 성경 해석을 합니까? 원어 해석을 해요? 그런 인간은 없어요. 해석 할때부터 이미 노림수가 다 있는거에요.

그래서 여기보면 뭐냐하면 중요한게 있습니다. ‘그 언어 안에 담겨있는 내용으로 자아가 있을 수 있다고 구분할 수 있다. 어느것이 진짜 자아냐 따질게 아니라’ 그다음에 뭡니까? ‘모두가 자아다.’ 이게 불교의 사상입니다. 모두가 자아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강에 비친 달은 하나의 달이지만 모두가 달이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기껏 인간들이 열심히 종교활동 했는데 교회 다니고 열심히 살았는데 불교 도사가 와서 “그거 불교에 다 있는데? 불교 경전에 있는거야. 맨날 절에가서 점치는것만 봤지” 불교 이론에 의하면 전에는 절에있는 전부다 불타 없어야 돼요. 얼마전에 불탔지만. 전부다 이거는 서로가 사기인 것을 알고서 불교가 유지되는겁니다. 진리가 없다는 것. 내가 곧 진리라는 사실. 내가 곧 신이라는 사실을 불교공부좀 한 사람은 다 알아요. 부처한테 왜 빌어요? 거기서 때론 용감한 사람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하죠. 안죽입니다.

인간은 부처는 죽일 수 있어도 자기자신은 못죽입니다. 자기자신을 죽여버리면 자기 동질성이 깨지는거에요. 그래서 5페이지에 네 번째 큰 단락에 보면 ‘자아의 죽음과 구원, 자아와 관련된 모든 인과(因果)성이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인데’ 자 보세요. 이건 다같이 하고싶은데 시작. ‘이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밖에서 죽는 죽음이다.’ 십자가 밖에서 죽는죽음이에요.

십자가 밖에서 죽는 죽음은 하늘에 앉힐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늘의 그 자리는 누구 자리냐 하면 예수님의 동질성이 동질성으로 확정된 자리에요. 우리가 왜 거기에 끼어들어갑니까? 못 끼어들어가죠. 그렇다면 다시 에베소서 2장 1절로 돌아옵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할 때 이 말은 뭐냐하면 주님쪽에서 자연이 말 하지 않고 주님쪽에서 이스라엘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했어요. 역사를 통해서.

살아볼려고 한 자를 죽여버린겁니다. 하나님께서. 잘해볼려고 하는 인간들 죽여버리는거에요. 잘해보자 하면서 인간은 계속 자기 해석에 대해서 멈추지 않기 때문에 니가 죄에 대해서 허물을 해석할 권한이 없고 내가 죄의 허물을 해석하기 위해서 죄와 허물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발시켰습니다. 불법을 저지르도록 이스라엘을 가지고 시범조로 활용하신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1절에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더하기 위함이고 너희로 하여금 저주 아래에 있음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위해서.”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어떤 성경 해석을 보면 이게 확정된 결과라고 보지않고 노력하면 이 결과가 뒤집을 수 있다는 기대가지고 보는 것은 자기가 패배하기 싫고 자기가 패배했다는 말은 더 이상 나의 동질성은 여기서 멈춰야된다는 그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싫은거에요. 나로 내가 내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이제 스탑, 그만 둬야되는데 그걸 내힘으로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실컷 50년 60년 복음듣고 나이 80이 돼서 밤에 잠을 자게되면 또 떠오르는 것은 이거에요. “그러면 나는요?” 50년 세월지나고 60년 지나도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인간은 그때뭐냐하면 나와 주님사이에 틈을 발견해야 돼요. 나는 하늘에 못 앉히시고, 주님만 하늘에 앉히시는 그사이에 틈. 그사이에 틈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전쟁입니다. 주님은 나를 포함해서 마귀와 나와 우리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신겁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안죽으려고 성경봤는데 주님이 우리가 따라올수 없는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어떤 인간도 닭쫓던 개신세가 되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죠. 죽기까지 따라 오겠습니다. 베드로가 내놓을 카드는 다 내놨어요. 마지막에 조커 내놓고 에이스 내놓고 다내놨어요. 주께서. “쓰레기 갖다 버려라. 이게 다야?” “제 목숨 내놓겠습니다.” “니 목숨이 뭔데? 이미 죽은 목숨. 그게 하늘의 우편에 앉을거라고 니가 생각하냐?” 인간의 노동은 죽기위해서 하는게 아니고 자기 살리기 위해서 하는 노동이잖아요. 그 노동을 멈출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8절까지. 방금 이야기했던, 하늘에 앉혔죠? 8절. 앉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안다고요? 통보해서 아는거에요. 그런데 이가운데서 우리 인간을 배제한 전쟁이죠. 인간을 배제한 전쟁. 배제한 전쟁이 2절에서 7절까지 나오는겁니다. 해석 참 쉽죠잉? 우리 빼고 주께서 싸우시는거에요. 그래서 주님의 별명이 뭐냐하면 주님의 별명이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 이제 뻔하죠. 이스라엘중에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입니까 주님이 이스라엘입니까? 주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한다 천사가.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왕이에요. 어떻게 그래서 어떤 학자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짜 요구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그 요구를 들어줄 순 없어요. 너무 엄청난 거라서. “너가 죽으라”가 아닙니다. “너가 죽으라”가 주의 뜻이 아니고, “너가 마이너스가 돼라”는거에요. 인간에게 죽음이 없으니까.

“사는것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라. 사는것보다.” 그냥 구차한 삶 정도가 아니고 없는것보다 있는것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라는 거에요. 인간에게는 그거는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당신은 우리를 모독하니이다.” 이러죠. 참 이 바리새인들을 박수쳐야돼요. 고마워요.

지난 주일 낮 설교에 그런거 했잖아요. “니가 누구기에 감히 죄를 사하는가.” 이거뭐 성도가 고백해야될 것을 바리새인쪽에서 고백해버리는거에요. “지가 뭔데 남의 죄를 사해?” 그게 바로 예수님이에요. 문제는 인간이 죄를 생각할 때는 자기가 알아서 선악체계 자기가 알아서 죄를 회개할 범주 내에서 죄를 안다는거에요. 인간은. 꼼수를 쓴거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저히 회복 불가한 죄를 죄라고 제시함으로써 해석 차이에서 틈이 발생되는겁니다.

이 틈이 전쟁인데 그틈에서 나온 것은 이미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길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이겼다는겁니다. 이미 이긴거에요. 여러분들은 이제 들으시면 여러분들 아시는 이야기지만 여기서 다시한번 정리하는 입장에서 도표를 한번 그리겠습니다. 아시는분 다아시니까 이거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써 하늘의 앉히심이 됨으로써 지난 과거까지 그리고 앞으로 모든 미래가 쏜살같이 어디로 집결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으로 집결됩니다.

그렇다면 이 사이에 있던 거미망. 수많은 모든 인간간 일어난 모든 관계망이 십자가 사건과 관련되어서 벌어진 일들이에요.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사건들이 일어난거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2024년입니다. 그러면 2025년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정답은 빤히 나왔죠? 십자가와 관련된 일이죠. 2024에서 내가 2025로 건너갈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건너갑니다. 갈수가 없어요. 2024에서 2025로 못갑니다. 우리 권한이 아니에요.

가버리면 2024년의 나와 2025년의 내가 동일성을 유지하게 돼요. 근데 2024에 내가 십자가를 경유해서 와버리면 여기서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비(非)나, 어려운말 써서 죄송합니다. 나가 아닌 나의 부정을 통해서 2025년도에 주님에 의해서 다시 허락받은 나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2024에서 2025년까지에 나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까 했잖아요. 이스라엘의 오류는 뭐냐? 역사를 뭘로봤다? 역사를 계시 대용으로 본게 실수입니다. 역사는 계시 대용이 안돼요. 매개가 안돼요.

자꾸했지만 다 잊어버렸으니까. 매개란 윗집하고 아랫집하고 연결된게 매개입니다. 근데 역사는 시도하는거에요. 노력하는거에요. 열심히 해보는거에요. 역사란. 힘모아서. 그거 하늘나라에 못 앉힙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를 추구하는 인류가 누구를 추방시켰어요? 자기 공동체에서? 하늘에 앉을분을 추방시켰잖아요. 게임끝났어요. 게임오바 끝났어요.

거기에 모든인간이 합세했고 우리는 그들의 자손이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시비거니까 문제를 냈어요. 방금 이 방법을 가지고 문제를 냈습니다. 다윗이 있지? 다윗은 너희조상이지? 그럼 묻는다? 장차 올 메시아는 누구의 자손인가? 아주 친절하게 상냥하게 물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야, 이 문제는 우리가 안다”해서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의 자손. 다윗과 다윗 자손사이에 시간관계로 연결되어있어요.

다윗이 다윗DNA 해서 자손되잖아요. 그럴 때 주님께서 어떻게 다윗의 자손인데 후손인데, 어떻게 후배가 선배가 되느냐를 질문을 한거에요. 바리새인에게. 그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더라 되어있어요. 다시는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지 않더라는거에요. 그질문을 제가 여러분앞에 해봅니다. 어떻게 후손이 후배가 어떻게 선배가 됩니까? 세례요한은 알았어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세례요한은 이게 이야기가 되는 것이 수직선에서 세례요한은 6개월 선배입니다. 출생선배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겁니다. 6개월 선배고 6개월의 세례요한, 그리고 6개월 뒤에 예수님. 그러면 누가 먼저 태어났는가? 세례요한이 앞서고 예수님은 뒤에 태어나지요.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할때에 사이에 앞선 것이 아니고 위로올라가는거에요. 위에. 애초부터 그분은 나보다 앞섰는데 앞섰기 때문에 내 뒤에 와도 상관없다는 거에요. 근데 내 뒤에 오심으로써 나는 어떻게 되느냐? 비로소 나는 망해야되고 그분은 흥해야 된다는 예수님앞에서 나는 어떤 위상이고 존재인 것을 비로소 증거하는 것이 마지막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하늘에서 주지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세례요한이 층을 2층으로 나눴거든요. 이게 골로새서 3장에 나오죠. “우리는 이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앉혔다”라고 되어있죠. 그러면 이땅의 죽은 생명은 생명입니까 생명아닙니까? 그거는 생명이 아니었어요. 자, 그러면 2절에서 6절까지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환경전쟁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어요. 죄도 뭔지도 모르고 반성하고있으니까 그게 먹혀 들어갈 수 있어요? 자기 동일성이죠. 인간 빼고 가실게요 되는거에요. 인간 빼고 전쟁하는겁니다.

그래서 이게 기쁜소식 복음이에요. 자, 우리가운데 다시한번, 인간관계가운데 온 사건이 일어나잖아요. 6.25사건, 보이스피싱 사건 어떤 사건이 일어나잖아요. 보이스 피싱이 왜일어나야됩니까? 사람이 자기는 오직 주님만 사랑한다고 해요. 근데 막상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면 그순간 자기가 해결하려고 해요. 자기가 감당하려고 해요.

왜? 이거는 사건이 오는순간 갑자기 분명히 없어졌다는 이 자아 동일성이 마중을 나가요. 어찌할꼬. 큰일났다. 경찰서에 전화해서 난리죠. 그렇게 한순간 분명히 나는 벌써 나를 부인했다고 여겼는데 나를 부인했다고 여겼던 그 시점에서 벌써 시간이 지났어요. 그러면 그 사이에 뭐가 발생되었습니까? 내가 몰랐던 내 동일성이 자아 동일성이 강화되었고 구축되어 있는 것
을 누가 알아요? 주님께서 아신거에요.

통보 효력이 줄었구나. 감기 걸렸을 때 먹는 약? 판콜. 판콜 먹고 난뒤에 하루 지나고 또 먹어야돼요. 판콜 만나를 늘 먹어야 돼요. 우리는 판콜은 아플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낫게 되게되면 고통이 없어요. 눈아플땐 “눈이 뜨이지 않아요. 이제 나는 끝났구나”하고 있는데 눈 낫고난 뒤에는 “언제아팠어? 이게 정상이잖아. 눈 건강한게 정상이야” 인간에게 무슨 정상이 있습니까? 없는데. 이제는 양쪽다 한번 맛이 가야 정신을 차리지. 이렇게 되는거에요.

여러분들이 세례요한이 주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세례 요한이 여러분 잘 알지요. 고백이 “오실분이 당신입니까?” 벌써 출제 경향이 지났어요. 세례요한이 구약의 출제 경향에서 수능만점 맞았는데 예수님이 새롭게 벌리는 그 수능문제를 풀 재간이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적 인물이라서 하늘에 앉히지를 못했어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숙제가 아니고 문제를 내겠습니다.

그러면 구약 인물들이 언제 하늘에 앉히십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아, 이거 중요한문제 우리하고 관련된 문제죠. 구약의 성도들이 언제 하늘에 앉히십니까? 이게 역사적으로 해답하는지 묵시적으로 해답하는지 한번 들어볼 거에요. 이거는 바로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가 주님하고 이야기 한겁니다. “주님, 언제 죽어요?” 예수님이 죽는 순간 그때 비로소 하늘에 앉히는 거에요.

주님이 먼저 가서 하늘에 앉아 줘야 지금까지 연결돼 있던 미진한 모든 것이 전부다 하늘에 앉게됐다는 것을 통보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에. 성령은 하늘에 앉힌 상태에서 보내는 성령은 이거는 주님 주도적이지만 그렇지않고 예수님이 하늘에 우편에 앉기 전에 성령은 이거는 보조적이에요.

“한번 노력해봐라. 말씀지켜봐라. 주께서 하시겠지.” 이게 보조적이거든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하늘에 앉히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성령의 주체자가 하나님에서 뭐로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으로 바뀌어요. 예수님이 이미 완료된 것을 선물로 우리에게 공급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우리가 하지도 않는 전쟁을 주님 혼자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 효력에 우리는 값없이 참여한 바가 되죠.

그걸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는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여기에 단어를 보세요. 은혜 나오지요. 믿음 나오지요. 구원 나오지요. 이게다, 3종세트 이게 뭐라고요? 이게 내것입니까? 나의 동일성에서 나온거에요? 아니면 주님의 동일성에서 나온겁니까? 주님의 동일성에서 나와야 주님이 앉았던 하나님 우편에 같이 동일하게 우리가 앉을 수가 있는거에요.

내 동일성 포기하고 주님의 동일성에 합류되는겁니다. 이거 뭐 고함지른다고 이게 정답이 되는건 아닌데 그다음 선물이 뭐냐? 뭐가 선물이냐? 9절에 나와요. “이거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 행위에서 나온게 아니라는 사실 조차도 통보, 선물에 해당됩니다. 내 행위에서 나온게 아님을. 이거는 겸손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나의 겸손이 아니라 주님의 겸손입니다. 주님의 겸손도 아울러서 선물을 받아요. 이거 3종세트가 아니고 4종 5종세트가 되는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감사 고마움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런 선물이 가리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뭐가 발생됩니까? 영적 전쟁 중에 우리가 놓여있고 이 전쟁에서 우리가 배제됐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틈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에 충실해야 됩니까?

나의 오해에 충실해야돼요. 내 성경말씀에 대한 오해. 완벽한 성경해석을 하고 있다는 그 착각에 우리가 매진해야됩니다. 그건 모르죠. 이게 착각인지 이것은 정도다, 진리라고 우길거에요. 그러나 성령께서 계속해서 통보를 해주니까 뒤돌아보면 아, 역시 주님의 복음믿는것도 어느새 뭐로 변했어요? 나의 믿는 행위에 결과로 벌써 변질되었다는겁니다. 우리의 동일성 때문에.

진도가 빨리나가서 다시한번 속도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도 조절을 해봅시다. 자연은 침묵한다. 자연은 침묵해요. 그다음에 누구 침묵이냐? 하나님도 침묵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고 하나님의 침묵이 뭐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통보로 바뀔려면 어디부터 움직여야됩니까? 나의 육신이 움직여줘야되죠. 나의 육신이 움직인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한다? 내가 내힘으로 내 행함으로 구원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보여줘야돼요.

시도하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근데 시도하는 움직임을 쭉 보면서 여기서 무엇의 재탕이냐? 이스라엘의 불법의 재탕을 보여주는거에요. 이스라엘은 율법있고 망했잖아요. 그럼 이방인들은 뭡니까? 율법없이 망한거에요. 둘다 결과는 마찬가지에요. 둘다 똑같이 망했다. 합치면 아담의 자손은 애초부터 망한다. 왜? 환경자체가 죄의 왕노릇하는 환경속에 동일하게 있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특별히 나의 동일성에 비중을, 무게를 두면서 “나만큼은 좀 빼주세요. 나만큼은 내가 정당하게 산다는 것을 주께서 통보해주면 좋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뭔가 자기 시도를 하는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교재에 2페이지에 제목보세요. 거기보면 밑에서 6번째 제목이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나를 향한 전쟁이에요. 나를 향한 전쟁.

주께서는 나를 향한 전쟁을 벌이시는 겁니다. 그저 뜻 모를 이야기만 나누어주는거에요. 계속해서 뜻모를 이야기만. 뱅뱅 돌면서. 공백은 못들어가고 그 가장자리를 뜻모를 이야기만 하는거에요. 그 뜻모를 이야기라는 그 노래 가사 나오지요? 낭만을 위해서? 뭐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소용없는 죽음이에요.

하늘에 앉힐 수 없는 죽음입니다. 내가 죽기까지 노력했던 모든 것이 하늘에 절대로 앉혀서는 안되는 죽음을 우리 육신은 그동안 착각하면서 보여줬던거에요. 나는 너를 안반긴다. 반길수가 없어요.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고 하지만 여기서 주님이 여기서 개입을 합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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