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방식
2023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3:12-15
(3: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3:13)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3: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가 사랑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 중심으로 모이게 된 자들입니다. 사도는, 하늘로 올라간 예수님과 지상의 인간들 사이의 접점을 이루는 존재입니다. 하늘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기획했는지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전달받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즉 세상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 말도 듣고 겸하여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은 괜찮을까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이 세상과 만나면서 슬픔과 고통이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마 11:16-18)
하늘의 사랑이 지상에서는 통곡이 되는 겁니다. 아기 예수님의 출생은 배들레헴에 거주한 두 살 아래의 아이의 어미에게 자식 잃는 애곡을 낳게 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8)
어미가 자식을 잃었다고 애곡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인간들의 자기 삶의 방식이, 자신이 원인이 되는 방식을 유지시켜 왔다는 말이 됩니다. 즉 우연에 불과한 자기 인생을 마치 필연이요 꼭 살아남아야 한다는 고집으로 그동안 살아온 겁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이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마 19:27-30) 하지만 요한복음 13:36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예수님 사랑은 ‘동지-애’ 같은 겁니다. 즉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목숨을 한결같이 예수님께 바치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늘이 원하시는 사랑은 아닙니다. 투쟁은 오로지 예수님 홀로 하셔야 합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자기 판단에서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사랑이 가득 찬 자에게는 자아 말고 최종적으로 남을 사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자는 더는 자신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하는 겁니다.
차라리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끝까지 의심해야만 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믿을 만한 자인지를 갈 때까지 따져 보는 겁니다. 그렇게 내려질 결과는 뻔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지 결코 남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최초의 원인자로 잡아놓고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마구 하나님에게 명령합니다. 자신이 초월하는데 있어 하나님은 아뭇 소리 말고 협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가 힘들면 힘들수록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병행해서 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으로 어떻게 사랑의 결과물을 낳을까요?
그것을 사랑이란 죽음 안에 헤집고 다니는 방식으로 자기 사람에게 사랑이 찾아갑니다. 베드로전서 3:19-20에 보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이 이미 물 속에 다 잠겨있는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저 풍문, 이 풍문에 따라 흔들리고 있습니다. 마치 산호초 같습니다. 이러한 죽음이 위세를 발하는 세계 속에서까지 예수님의 사랑은 찾아오십니다. 이 세상이 주장하는 초기설정은 가족입니다.
가족애에 있어 살기 힘들면 사람들은 지독한 자기 사랑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국가 이념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니 다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살 생각이 최우선입니다. 이런 본색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유발된 죽음의 상황에서나 실감나게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니 부활이니 해도 가난이라는 현실에서 뒷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쪽으로 오게 하십니다. 엘리야나 모세나 그들의 죽음은 이 땅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마감됩니다. 그렇게 마감된 자들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마 17:3) 엘리사 시대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 군대로 하여금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성을 완전 포위하게 했습니다. 보급이 끊어져 먹을 게 없어 자기 자식까지 먹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사태를 유발한 것이 하나님인 것을 여호람 왕은 하나님 대신 엘리사 선지자를 죽일려고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계시가 엘리사에게 임합니다.
내일 이쯤에 양식이 풍족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듣은 한 장관은 노골적으로 엘리사 말을 비웃습니다. 그날 저녁 때, 사마리아 성 안에 있는 문동병자 네 명이 성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여기 있어 죽으나 나가는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고 나가보니 거기에 엄청한 양식을 아람 군대가 남기고 철수해 나간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기쁜 소식을 자기들만 알아서는 안된다는 뜻에서 성 안에서 굶어주어가는 일반인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다같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과연 엘리사와 이 네명의 문둥병자는 사전에 연락을 한 사이일까요? 아닙니다. 둘 다 죽음에 처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의 위세보다 더 센 힘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겁니다.
성도는 본인이 본인의 일을 하지 않음을 압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일임을 압니다. 즉 성도마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의 세계가 유일한 실재 세계임을 알리게 합니다. 사랑이 원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에 대한 철저한 의심 속에서는 자신이 불신자에 불과함을 아는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디도서 3장 12-15절(사랑의 방식)231217-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3장 12-15절입니다.
디도서 3:12-15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도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에 안부까지 곁들입니다. 이 안부를 곁들이면서 사도 바울이 사랑하고 또 사도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들, 여기에 몇몇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언급하는데 지리적으로 한곳에 정착되어 있는 사람들만 언급한 것이 아니고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고 하고 있습니다.
그레데 섬은 남쪽에 있고 니고볼리는 지금 그리스의 제일 서쪽 해안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은 빌립보라 해서 현재 그리스의 북쪽에 있습니다. 니고볼리에서 합류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레데 섬에 있는 디도를 인사이동 시켜서 달마디아로 옮기려고 합니다. 달마디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태리를 마주보고 있는 그 해변의 나라, 현재 아르메니아지요, 그곳으로 인사이동 시키기 위해서 옮기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두기고’라는 사람은 터키, 튀르키예 사람인데 에베소나 골로새 등지에 사도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편지전달이라는 것은 위에서 사도에게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수평적으로, 옆으로 확장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았던 이 계시는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선택된 사도 바울에게 지시를 했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전달할 책임이 있어서 전달하는 겁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세계가 같이 중첩되어있는 거지요. 하나는 뭐냐 하면, 사람들만 있는 세계, 사람들로 가득 찬 눈에 보이는 그 세계, 현재 있는 현실 세계와, 그리고 일체 사람이 없는 천사 내지는 천사 같은 모습을 한 존재들만 있는 세계, 하늘나라, 거기에 접촉점, 접속지역에 사도 바울이 있고 그 사도 바울의 편지를 우리가 이 아침에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양쪽 세계 둘 다를 같이 겸해서 이해하는 순간이 되는 거예요. 어떤 것을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 둘 다를 우리가 아울러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그 둘 다를 아울러 파악하는 방법이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이라 할 때 방금 했던 그 원리를 여기에 적용시켜 봅시다. 사랑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천사 같은 분들만 사는 동네에서 통하는 사랑, 그리고 인간들끼리 살고 있는 이 인간 세상에서 알아먹는 사랑, 그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그 차이를 우리가 발견하고 알아야 돼요.
인간 사랑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이 뭐냐 하면, 오랫동안 함께 살던 부부인데 자기의 남편이 먼저 죽고 난 뒤에 장례식장에서 나이 든 아내가 죽은 남편보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걸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웬수야!” 갑자기 인간의 사랑의 한계가 나옵니다.
“네가 내 허락도 없이 왜 빨리 죽어? 내가 널 간호했으면 네가 보란 듯이 벌떡 일어나야지. 나의 간호, 그 모든 노력을 네가 감히 헛수고로 만들어? 왜 허락도 없이 네가 먼저 죽는 거야? 내 남은 세월은 우짜 살라고? 이 웬수야!” 하고 막 울어요. 그걸 보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가 가능합니다. ‘아, 원수하고 살았구나. 내 뜻대로 안 한다는 조건은 원수가 되는 것,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구나, 사랑.’
사랑은 상대가 내 뜻대로 안 하면 무조건 원수가 되는 관계가 이 땅에서의 인간 사랑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방식에 네가 무조건 따라야 된다는 거지요, 내 방식에. 인간세계에서. 사랑이란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인데 이 사랑은 나를 중추에 놓고 내 방식에 대해서 네가 적극 협조해야 된다는 거예요, 협조해야 된다. ‘그럴 때 나는 그걸 사랑이라 불러줄게. 너는 내 콩고물 사랑 받을 자격 있다.’
이게 인간관계 속의, 이 현실 관계 속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사랑 외의 다른 사랑이 뭐 있어? 없잖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없어.” 그런데 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인간세계에 없는 사랑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사는 방식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알려진 그 삶의 방식, 그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바로 요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하늘이 갈라지면서 비둘기같이 성령이 오시면서 동반해서 하늘에서 주어지는 음성이 있었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안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사랑만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서 변화산에 예수님이 있었을 때 하늘에서 아버지가 응원을 합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여기에 하나를 더 덧붙이지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사랑이니 네 사랑 버리고 주의 말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라.”’ 이런 뜻이거든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듣지요, 뭐. 그 좋은 사랑 우리가 받으면 되지 않느냐. 하늘에서 사랑한다는데 못받을 이유가 없다. 감사히 받겠습니다.’라고 생각할 텐데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그 사랑이 아, 참혹한 내용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니까 우리가 거부할 수밖에 없지요.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뭐라고 비유를 하느냐? 16-19절에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인간 사랑에 하나님 사랑이 쉽게 결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서로 배격하고 서로 튕겨 나가는 사랑으로써 주님께서 오신 거예요. 제가 이 사랑이 어느 정도 참혹한가를 성경에 나오는 내용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16절의 이야기는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18절에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했다.
지금 마리아는 자기 아들 챙겼어요. 마리아는 아기 예수라는 자기 아들을 챙겼는데 마리아가 자기 아들 챙기는 그 대가로 지불해야 될 것이 베들레헴에서 동기생으로 태어난 2살 밑의 그 동네 애들 다 죽었어요. 한쪽 아기 예수 살리겠다고 저쪽 두 살 밑의 아기들 다 죽여버렸어요. 그리고 이게 사랑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자기 자식은 자식이고 내 자식은 자식 아니에요? 이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한계, 우리의 극단의 한계까지 다 거덜 내는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사랑이. 자기 자식 죽었는데 왜 우느냐?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됐지요? 자식 죽었는데 울어야지요.
그러나 위에서 주신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들은 자기 자식 죽었는데 왜 울어야 되는가? 그것은 인간들은 자기를 원인으로 생각해서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물이 자식인 거예요. 자식이 죽었다는 그 말이 뭐냐? 내 원인 자체가 부정당했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도 이제는 살 이유가 없고, 살 맛도 안 나고, 살 필요도 없게 된 거예요. 나의 근원 자체가 제거되어 버렸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나는 우연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연. 나는 우연. 우연이라 하는 것은 원인이 내 쪽에 있지 않은 상태를 우연이라고 해요, 우연. 해프닝이라 하지요, 우연. 반대로 원인이 나한테 있을 때 고집하는 게 필연이에요. 내가 열심히 자식을 키웠기 때문에 이 자식은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그 고집이 드디어 베들레헴에서 같이 살던 중에 작살난 겁니다.
내 자식, 애써서 2살까지 키울 때 얼마나 조마조마하면서 키워왔습니까? 얼마나 애살 많게 키워왔습니까? 그것이 작살났다는 말은, 내가 원인인 결과가 다른 원인에 의해서 작살났으면 내 원인은 내 원인을 포기하고 다른 원인으로 옮길 필요가 있어요. 뭐냐? 아기 예수가 새로운 나의 존재의 원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참 이걸 보면 사랑은 무시무시한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인간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늘나라에는 인간 같은 인간은 하나도 없고 천사 같은 인간만 있어요. 모든 인간이라고 여겼던 것은 우연으로 해서 안개,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버려야 돼요. 원인도 모르고 사라지고, 결과도 모르고 사라지고, 무조건 사라져야 됩니다, 이 땅에서.
그 일에 충실한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방금 말한 그 사랑이 오기 전에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사랑이 있었어요. 자기가 필연이기 때문에 세상은 다 무너져도 나만 잘되어야 돼요. 이게 필연이에요. 그 필연이 우리의 본성을 차지하고 있다가 어떤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만날 때 거기에 대처하고 투쟁하면서 그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면서 뭘 추구하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기 위해서 …… 그걸 초월이라 하거든요.
성화, 초월, 그걸 밀어붙이기 위해서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하면서 아울러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신에 대한 폭력성도 같이 나옵니다. 내 계획에 신 당신은 무조건 나에게 협조해야 된다는 것. 어느새 인간은 신과 라이벌이 되고 말았어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 가고자 하는 길에 신이라 해도 방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당신이 내 일에 협조하게끔 내가 교회 나가서 내 할 도리 다 할 테니 내 중심, 내 사랑 중심을 당신은 흠집 내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날마다 하나님께 날리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더러운 행동을 하느냐?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이 나 중심이기 때문에 평소에 남들에게도 그런 음흉한 짓들을 해 왔어요. 그런 짓들이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과 인간 사랑,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처럼, 자기가 아는 사랑처럼 바꾸려고 합니다. 바꾸는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 속까지 찾아가요. 죽음의 힘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서 죽음으로 들어가요.
“우리 둘이 죽음에서 만나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는 자기가 나름대로 예수님께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보여주는 그 자신감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해요. 27절에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여기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이의 걸 수 없어요. 맞아요.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럴 때 요한복음 13장 36절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베드로가 모든 것을 걸었으니까, 사실은 걸었다는 게 투자한 거지요, 그렇게 걸었으니까 주님이 어디 간다고 하니 “저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하는 말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해서 너는 내가 가는 곳에 못 온다는 거예요.
이건 뭐냐? 베드로는 자기가 죽지 않고 천국 가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그동안 세뇌를 해온 거예요. 그게 베드로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반대가 인간들의 자기 신앙이라는 사실, 사랑의 반대가 인간의 자기 신앙이에요. 베드로로 하여금 오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베드로 속에 어떤 의식이 있느냐 하면, 일종의 동지애, ‘동지+사랑’ 인간의 동지애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으니까, 이제는 내가 줄 것 다 줬으니까 이제는 당신이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차례요.’ 이런 식으로 온 거예요. 그럴 때 그것은 바로 천국에 합당하지 못한, 인간세계에서 인간들끼리 통하는 믿음이에요. 사랑이고 믿음이고 그런 겁니다. 일종의 동지애니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방법은 뭐냐?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 극한의 지점까지 몰아세워야 되지요. 예수님을 의심할 거냐, 말 거냐의 그 갈라지는 지점까지, 끝까지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몰고 가십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의심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은 안될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면서, 그 의심을 내부로 감추면서 그걸 감추는 방법이 뭐냐? “믿습니다”에요. 그것도 ‘시옷’이 아니라 “쌍시옷”이 들어가요.
“믿쑵니까?” “믿쑵니다.” “그러므로 믿쑵니까?” “믿쑵니다.” 이것은 바르게 해석해야 돼요. ‘믿습니까?’ ‘두고 보고요.’ ‘믿습니까?’ ‘못 믿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못 믿겠습니다. 예수여, 확실하게 내가 믿을 수 있도록 나를 설득해보세요.’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가는 것은 끝까지 의심한 거예요, 예수님을.
그 베드로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아무리 예수님이 뭘 해줘도 자신과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동지애거든요. 그 확실한 증거중의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26장에 나옵니다. 경찰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51절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게 베드로에요. 그리고 52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베드로가 순식간에 본심을 확 드러냈어요. ‘어딜 귀한 우리 예수님을 해코지해?’ 칼을 빼서는 대제사장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어요. 베드로는 자신에게 칭찬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 행동, 행위가 책망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투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네 목숨 나한테 바치지 말라.” 이게 복음입니다. “네 헌신과 네 눈물과 네 모든 기도와 네 헌금을 나한테 바치지 말라. 나는 그런 방식으로 천국을 만든 적이 없다.” 그것은 네가 아직도 너에 대해서 믿고 있다는 증거거든요. 이게 사랑의 반대말이에요.
이 인간세계, 이 인간들이 국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깨지면, 국가 관계로서 깨지게 되면 단박에 인간은 개인 대 개인 관계로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그게 가정입니다. 가정이라는 유닛, 가정이라는 최소단위가 모여서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불완전하다면 내 집안이라도 살자, 해서 애 들쳐메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가 봤자 어디로 가느냐? 다른 국가 속으로 들어가요. 다른 국가 속으로. 그러니 끝까지 인간들은 자기의 육신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 외에는 달리 없어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오는 어떤 결과,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생겼다는 이 자식에 대한 애착, 여기서 인간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하고 있잖아요. 전쟁을 하는데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뭐냐 하면, 알라신과 유대교 여호와의 싸움이다,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잘 몰라서 그래요. 세계에서 가장 무신론자가 많은 나라, 무신론자의 비율이 가장 많아서 득실거리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을 믿지 않아요. 그 특징이.
신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은 양심도 안 믿어요. 도덕도 안 믿습니다. 동성애 집회가 가장 많이 열리고 제일 크게 열리는 동네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니까 하마스와의 전쟁은 뭐냐? 신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나라 이스라엘과 신을 인정하는 나라 하마스와의 전쟁에서 하마스가 완전히 깨지는 거예요. 신을 믿는 게 깨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믿는 것은 신이 아니고 기술력에 의한 돈입니다. 금융이에요. 돈을 믿어요, 그 나라는. 철저하게.
그 나라의 18퍼센트, 독실한 여호와 정통주의가 있긴 하지만 나머지는 신을 안 믿어요. 힘을 믿어요. 돈의 힘을 믿어요. 자본의 힘, 축적된 기술의 힘을 믿는 나라에요, 그 나라가. 그런데 그 알라 믿는 하마스가 다 깨지잖아요. 이 전쟁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진리를 전하는지 몰라요. 인간이 믿는 신은 모조리 사실은 신을 믿는 게 아니고 끝까지 자기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을 신이라는 말로, 신의 일로 대변해 줬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신이 도와주겠지.’ 안 도와줍니다. 신이 왜 도와줘요? 신이 왜 안 도와주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돕기 때문에 신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인간이 자기 포기가 안 되는 데 하나님이 왜 도와줘요?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요? 지옥은 혼자 사는 게 그게 지옥 가는 길이에요.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 태어났고 중간도 혼자고 끝까지 혼자 살아갑니다. 신은 구색에 불과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은!
튀르키예 국회의원이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을 보고 탄식을 하면서 국회에 나와서 외칩니다. “저 이스라엘에게 알라의 저주가 임하기를!” 그 말 하고 난 뒤에 알라신의 저주가 임해서 뒤로 넘어졌어요. 지금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 거의 즉사 수준이었어요. “알라의 저주가 있기를!” 그 알라의 저주를 자기가 받은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왜 안 받느냐?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안 받아요. 이 땅에 살아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만 살아 있고 다른 것은 우연한 죽음의 존재로만 살아 있어요. 그뿐이에요. 사랑은 어디에 있느냐? 사랑은 “죽은 자리에서 만나자” 그렇게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21절에 노아 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이런 것이 나옵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죽어서 음부에, 죽음의 세계에 갔습니다. 그걸 옥에 갇혔다, 음부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요, 거기까지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노아 홍수라는 이 언약이요,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파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었더라도 그 죽음의, 음부의 집결소까지 끝까지 따라가서 하나님의 그 심판의 정당성, 그러니까 사랑을 전파한 거예요.
그때 인간은 마치 산호초 같아요. 모든 인간은 바닷물에 갇혀 있습니다. 물결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산호초처럼. 이게 인간 세상이에요. 그래서 인간 세상은 지금 이미 물아래 있어요. 죽음 아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우연한 존재고 인간 가운데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았습니까? 곧 죽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이 되면 다 죽어요. 여기는 오직 죽음밖에 없습니다.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때 죽음 속에서 사랑을 전하는 방식으로 사랑이 전달돼요. 아가 8장 6절,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물에 잠겼던 언약이 새언약 이후에는 이제 물이 불로 변해서 모든 것이 불에 잠기게 되는 겁니다. 그게 지옥 불이에요.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빠져나감 없이 지옥불에 갇히게 됩니다. 거기에서 뭘 전하느냐? 주님께서는 그 기세가 대단한, 그 기세가 불같이 등등한 그 죽음의 기세 속에 누가 들어오느냐? 하늘에서 사랑이 들어옵니다.
사랑이 들어와서 죽음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산호초 같이 흔들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인간 가운데 자기 백성을 만나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우리 주님이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 올 때 우리에게는 마지막 죽음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와야 되지요. 사랑이 올 때.
그 마지막 죽음을 우리가 뭐 어떻게 체험하느냐? 일단 간단한 체험은 번지점프로 하면 되지요. 번지 점프할 때 점프대에 올라간 그 사람의 직업이 판사든, 의사든, 교사든, 농부든, 백수든, 집사든, 장로든 관계없어요. 일단 점프대 담당 직원은 그 사람 직업이 무엇이냐, 권력이 어떠하냐, 돈이 얼마 있느냐, 국가의 고급 행정직이냐, 그런 것은 일체 묻지 않고 오직 하나만 주목해요. 그 사람 몸과 발목에 묶여 있는 그 끈만 주목한다고요. 그 끈만 주목하고 거기서 “뛰어내리세요!”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뛰어내리는 그 사람이, 내가 얼마나 재산이 많고, 내가 얼마나 고위직이고, 내가 국회의원이고, 내가 장관급이고……, “나는 그런 것은 모르겠고 그냥 죽으세요! 그냥 죽으라고!” 아주 융통성이 하나도 없는 담당직원의 말을 들어야 돼요. 내가 번지점프 하는 그때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내 말을 일체 다 끊어버려야 돼요. 담당직원의 말만 듣고 그냥 뛰어내려야 돼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나이 90 되어서 죽든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래서 담당직원의 말은 딱 그거에요.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끈이 함께 있어요, 끈이. 끈이 당신을 살려줄 겁니다. 끈이 묶여 있으면 살 것이고 끈이 풀려 있으면 당신 끝난 것이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대단한 인물이고…, 그것은 대인관계에서 자기 자랑할 때나 하시고 여기서 뛰어내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전혀 안통해요.
날마다 우리 성도의 삶은 뛰어내리는 삶이에요. 그래서 혼자 사는 게 아님이 확인되는 하루하루를 주께서 주시는 겁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의 판단을 다 동원해서 여러분을 판단해서 여러분이 할 일은 뭐냐? 예수님을 의심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의심하는 거예요. 목사가 되었든, 신앙생활 50년을 했든 관계없어요. 매일같이 예수님을 의심하는 겁니다.
‘믿어도 되나? 못 믿겠다. 믿어도 되나?’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부활했대’ 예수님이 부활해서 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예수님 부활 믿는다고 살림살이가 나아졌어요? 돈 생겼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의 이 세상 삶은요,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예수님을 의심해야만 되는 그런 상황이 매일같이 우리 일상 속에 터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일한 노동의 대가를 연말에 못 받을 때 예수님의 부활이 내 임금을 제대로 받도록 하지는 못하잖아요. 내 일상을 위협받지 않으려면 제때 월급이 들어와야 돼요. 제때 월급이 안 들어오는데 예수의 그 십자가 부활,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럴 때 이렇게 해야 돼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교회 다녀도 소용없는 것 내가 진즉에 알았지.’ 그렇게 되어야 돼요.
그리고 예수와 내가 날마다 갈라서는 지점에 내가 서 있어야 돼요. 예수 믿어도 소용없다는 것의 확신에 차야 됩니다. 2024년도 우리교회 목표는 정해졌어요. “힘써 망하자.”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망하지 말고 힘써 망하고, 힘써 의심합시다! 끝까지 의심하세요. 어디까지 의심해야 되는가? 내가 의심될 때까지.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는게 아닌가?’ 내가 의심될 때까지 가야 돼요.
왜냐하면 나도 믿고 주님도 좋은 분이라면 이것은 아직도 제대로 주님을 의심하지 않는 거예요. ‘나를 의심할래, 아니면 주님을 의심할래?’ 그 지점까지 주께서 몰아세웁니다. 내가 양심대로 바르게 살고 싶어도 일을 힘들게 하는 환경이 뭐냐? 세상 환경이에요. 세상은 나를 착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를 않아요. 착한 나를 아주 더럽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입니다. 세상이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들었어요. 나쁜 존재로 만들었어요.
그러면 거기에 대처방법은 뭐냐? 같이 힘을 합쳐서 이 경제구조를 뒤집어야 되지요. 엎어 버려야 되지요. 노동의 정당한 값이 나오도록 이걸 엎어버려야 되지요. 그게 뭐냐? 나를 의심하지 않는 유일한 방식, 삶의 방식,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그걸 하기 위해서는 이 억울함을 토로해야 되고 서로 연락해야 되니까 서로 같은 동지로 묶어야 되지요. 동지로 묶으려면 여기에 언어가 필요하지요.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의 피 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의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용어가 얼마나 과격합니까?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진 뜨거운 흙이여】
문대현이 작사작곡한 <광야에서>라는 민중가요입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김종률 작곡, 백기완 작사.
왜 이렇게 절박해요? 누굴 위한 절박함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나의 두 살 애가 죽어버렸는데, 내가 죽었는데 눈에 뵈는 게 있습니까? 없지요. 아기 예수 출생 자체가, 사랑의 등장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극단적인 나의 본모습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나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드러내는 그게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위력입니다.
우리는 이 앞에서 선을 넘어야 돼요. 성도는 선을 넘어야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과의 싸움이 아니고 마귀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는 신자 노릇 하라 하세요. 우리는 불신자 노릇 하면 돼요. 그래서 다시 한번 다지고 또 다지고 바탕을 다지세요. 내가 과연 내 구원에 바탕으로 적합한지 나 자신을 보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랑한다, 그 사랑이 위에서 준 사랑이에요. 은사로 준 사랑입니다. 인간이 그걸 소지할 수는 없어요. 사랑은 우리 자신을 빼앗기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얻은 것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얻은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무지함으로써 얻어진 거예요.
사람이 잃어버리게 되면 약이 올라서 자기에 대한 집착과 미련은 아주 여전합니다. 여전히 남아 있어요. 그래서 방법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에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아직도 생겨나고 있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뭘 계획하고 기대하고 뭘 하지도 않았는데 생겨난 것, 그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둘 중 하나입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는 것은 악령이 임해서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이러지?’ 하는 경우와 또 하나는 성령이 임해서 ‘내가 왜 이러지?’ 하는 경우가 있어요.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기 때문에.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내가 왜 이러지?’
그러나 악령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내가 왜 이러지? 앞으로는 잘할게’라고 우리에게 요청할 때 그게 악령의 전형적인 우리를 다루는 방식이에요.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 그런 실수 또 안하면 되잖아.’ 이게 악령이 다루는 방법이라면 성령이 다루는 방법은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이런 인간이 아닌데’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근원적으로, 원천적으로 우리를 새로 시작하게 만듭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할 때 모세하고 예수님과 엘리야가 같이 있는 대목이 나와요. 그런데 모세하고 엘리야 두 선지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시체가 없어요. 둘 다 시체가 없습니다. 신명기 33장 5, 6절에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아는 자가 없다. 모세, 그의 죽음에 대해서 그 뒤에는 인간들이 숭상하거나 숭배하거나 모실 어떤 것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없애버렸어요. 열왕기하 2장 17절에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뭘 발견 못 했느냐 하면, 엘리야가 없어졌는데 그 시신이 없는 거예요. 엘리야의 제자들이 많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중에 50명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는데 사흘동안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시신이 없어요. 엘리사가 이야기했지요. “그분은 죽지 않고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엘리야 제자들, 선지자 될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자기 믿음을 포기를 안 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은 죽으면 반드시 시신을 남긴다는 이 믿음에 대해서 내가 그전에 자기가 자기를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바로 이토록 인간은 끝까지 마지막 남기는 것은 자기에 대한 자기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 선을 못 넘어요. 그 선을 못 넘기 때문에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고, 천국도 없어요.
내가 확실히 아는 것부터 해서 어떤 필연과 필연, 필연에서 필연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왔기 때문에 그래요. 공장에서 일하는데 돈을 못 받았다. 그러면 뭘 할 수 있느냐? 노동법에 호소하라. 호소했는데 그 노동법으로부터 돈을 못 받는다.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집회지요, 집회. 시위하는 거예요. 밤새. 혼자 하면 안 알아주니 여럿이서 하는 거예요.
“움켜진 뜨거운 흙이여.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안 믿어도 나는 가난은 참을 수 없다, 이거잖아요. ‘내가 예수 안 믿을지언정 내가 가난한 건 내가 용서가 안 돼. 내게 내가 용서가 안 돼. 내가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돈 없어 죽는다는 것은 내게 용서가 안 돼. 정 돈 없다면 나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릴 거야. 죽을 거야.’ 아파트 있다는 것은 돈 좀 있다는 건데?
인간들은 자기에게 믿음이 있어요. 이 땅에 태어나서 믿음이 뭐냐 하면, 세상에 ‘정의’라는 것은 내 노동한 대로 제값을 받는 게 ‘정의’라고 본 거예요. 왜냐면 아무리 국가가 뭐 어떻게 해도 국가가 깨어지면 마지막 인간관계, 마지막 관계는 뭐냐?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다시 그 단위로 내려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나부터 살자’는 그거로 내려오게 되어있다고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그 가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시간과 공간의 주님의 처리방법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가난한 자에게 받을 돈을 전하는 게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에요. “너 돈 못 받았어?” “예.” “그래서굶어 죽겠어?” “예.” “잘됐네, 잘됐네! 네 힘으로, 네 손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을 내가 제거해 줬잖아, 봐라.” 이게 주의 방식이에요. “이게 어찌 기쁘지 아니하냐? 기쁘지? 기쁘지?!” 이러고 있다고요. 주님 쪽에서 선을 넘어버렸어요. 주님 쪽에서! 사랑보다 더 센 건 없으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힘든 것은 것은요, 자꾸 자기를 의식해서 힘들어요. 그걸 마귀가 유도하고 있는데. “돈 줄게. 네가 예전처럼 돌아가. 네가 우수한 존재잖아.”라고 자꾸 마귀가 부추깁니다.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풍경>이라는 노래에요.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그런데 인간은 그 제자리가 어딘데요, 제자리가? 어디 뭐 돈 없는 노동자가 욕심을 냈어요? ‘내가 일한 품삯을, 약속대로 받겠다는데 그걸 못 받았으니 약속대로 받으면 내가 제자리로 돌아갈게.’
주의 뜻은 뭐냐? 네 자리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거예요. “돌아갈 자리가 없는데 어디로 돌아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변화산에서 해같이 빛났을 때, 엘리야도 예수님과 함께 있고 모세도 함께 있어요. 제자리가 뭐가 제자리냐 하면, 예수님 자리가 제자리예요. 예수님 자리가.
예수님 빼놓고 제자리 없습니다. 그 제자리가 구약에서 얼마나 놀랍게 나타났는지를 열왕기하 7장에 보면 나옵니다. 7장 말씀드리기 전에 다시 말씀드리면, 주께서 하늘에 있는 사랑의 자리까지 끌어당기는데, 이것은 인간들로부터, 인간들의 목숨 바치고 하는 이런 것은 베드로가 했잖아요, 인간들의 동지애에서 나온 동지 사랑,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인간의 목숨은 안 받습니다.
이것은 왜냐? 인간들의 투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홀로 투쟁해서 얻어지는 것이니까요. 우리 것은 일체 안받아요. 왜냐? 우리가 주 앞에 돌아가게 되면, 돌아가는 ‘나’는 계속 ‘나’를 포기를 못 해요. 내가 알아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러면 구약에서 나온 예를 보게 되면 ‘아람’ 나라가, 지금 시리아거든요, 그 아람 나라가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포위를 했어요. 포위해서 굶겨 죽여서 전쟁을 끝내는 방식, 그 방식을 사용할 때 ‘여호람’이라는 그 왕이, 북쪽 왕인데 백성들 꼴을 보니까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그 화풀이를 하나님께 합니다.
“하나님이 뭔데 나를, 우리 이스라엘을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왜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폭력적입니까?” 그 분노를 뭐라고 하냐면 “내가 엘리사를 만나면 내가 내 손으로 죽여버린다.” 열왕기하 6장 3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열왕기하 6장 32절에, “그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7절에 들어가면 “엘리사가 가로되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너무 넘치도록 양식이 아주 풍족하게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한 장관이 듣고 비웃습니다. 뭐라고 비웃냐면,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오.”
왜 이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 귀하게 들려야 하느냐면요, 우리가 밥이나 먹고 뭔가 생활이 되니까 하나님 믿는 것이지, 정말 생활이 진짜 막장까지 갔을 때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나올까요? 과연 나올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날 믿지 마. 이 하나님을 네가 믿지 마” 왜? 너는 믿을 인간이 아니라는, 그 정체를 들추어내는 그 극한이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이에요, 그게! 믿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교회에 나오냐는 거예요. 믿지도 않으면서! 아직 지금 배부르니까 나온 거예요, 먹고 살 만하니까. “거짓말을 해도 마귀한테 해라, 나한테 거짓말하지 말고.”
그러니까 성경에 장관이란 사람이, 그게 한동훈 장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관이 이런 소리 한 것은 진짜 고마운 거예요. 우리의 속마음을 그대로 해준 거예요. 그런데 그다음 날, 문둥병자가 네 명이예요. 네 명이니까 한 밴드죠. 한 조직이에요. 드럼, 기타, 보컬….
그런데 이런 얘기 해요. “여기 있어도 굶어 죽고, 밖에 나가도 굶어 죽고,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죽기 마련인데 일단 죽어도 나가서 맞아 죽자.” 하고 나갔거든요. 나갔는데 밤중에 그 많던 아람 군대가 다 가버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전리품, 양식이 엄청나게 가득 차 있었어요. 그들은 실컷 먹었죠, 실컷. 죽으려고 나갔는데 살아서 실컷 먹었지요. 실컷 먹고 난 뒤에 그다음에 9절에 보면 여기 ‘아름다운 소식’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소식, 여섯 자. 두 자로 줄이면 복음. 여기 복음이 나와요. 이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만 이렇게 즐길 것이 아니고 저기 굶어 죽어가고 있는 성중의 사람들에게 이걸 “전파하자.”는 거예요. 전파하자.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왕하 7:9)
이 문둥병자 네 명이 알고 있는 현실과 그 성 중에서 굶어 죽고 있는 현실 사이에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가를 하나님께서 대비해서 보여준 거예요. 인간들이 살고자 하는 이 현실이 사실은 비현실이예요. 이게 비현실이라고. 이 비현실 속에 우연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말 들어보니까 과연 성 밖에 양식이 가득했거든요.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거침없이 성문 밖으로 나오다가 성문 지키는 장관은 밟혀 죽었어요.
그랬을 때 이제 제가 묻는 것은 이거예요. 엘리사하고 문둥병자 네 명하고 사전에 연락이 있었느냐, 하는 거예요. 사전에 연락이 있었는가? 없었죠. 전혀 없었죠. 없는데 어떻게 동일한 혜택을 입게 되었는가? 상황, 똑같은 상황을 허락하신 거예요.
엘리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맞아 죽게 되어 있고, 문둥병자들은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죽기 마련이고 둘 다 죽음이라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 죽음이라는 동일한 상황에서 비로소 그들은 사랑을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은 영어를 잘 아니까 영어로 하겠습니다. “What are you doing now?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정답은 “I am doing lord’s work now. 나는 지금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 네 명,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선을 넘으면 인간이 아는 현실, 내가 아는 상식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그 선을 넘어버릴 때, 이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조차도, 내가 굶어 죽고 돈 못 받는 것 조차도 이게 주의 일이 된다는 것에 눈이 활짝 열려버린 거예요. 눈이 뜨인 거예요.
‘아,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구나. 주님께서 함께 하셨구나. 이 죽음의 환경을 만들고 이 죽음의 공간, 그 음부의 공간까지 사랑이 헤집고 들어와서 나를 만났구나.’ “너는 벌써 죽었어, 인간아! 이 사랑 아니면, 이끈 아니면, 너는 이래 죽고 저래 죽어. 이 사랑이 너를 살리는 거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육신이 되셨잖아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육신이 되세요. 우리 육신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뭐 믿는다? 아니. 내가 뭐 소망한다? 아닙니다. 믿음, 소망,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원천은 오직 사랑에 있습니다. 그 사랑 가지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나도 알고 주님도 아는 지루한 거짓말은 그만하게 하옵소서.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하는 그 노릇,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손을 떼야 될 이유인 것을 기쁘게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는 사랑 안에서 뭘 해도 되는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그것이 주의 일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