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크리스마스의 압박

아빠와 함께 2023. 12. 24. 19:22

크리스마스의 압박
                   

2023년 12월 24일                      본문 말씀: 빌레몬서 1:1-3

(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1: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가 ‘갇힌 자’되는 것은 자기를 위함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갖추기 위함도 아닙니다. 자신이 구원되기 위함도 아닙니다. 모두 다 ‘예수님’을 위함입니다. 즉 자신이 갇혀 있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기에 가능합니다. 자신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갇혀 있음’ 자체가 주를 위한 일이기에 감사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는 ‘내가 죽었다’, 혹은 ‘내가 살았다’ 자체를 물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겁니다. 나의 삶과 죽음보다 더 선행되는 사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겁니다. 그 선행되는 사실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었다’, 혹은 예수님께서 ‘살았다’입니다. 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감옥같은 세상에 자진해서 갇히려 들어오신 이유와 관련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언제까지 세상에 갇혀 있을 겁니까? 디모데후서 4:7-8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가 천국 합격을 자신만만해 하는 이유는, ‘선한 싸움’을 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출생해서 싸우는 모든 싸움은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자기 싸움’입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자신이 이득을 늘 계산하게 되는 싸움입니다. 옥에 갇힌 것을 이익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막상 이 세상에 뛰어들어서 경험하는 바는, 그 어떤 인간도 이 세상을 전적으로 악하게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이 세상을 파괴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이 세상에서 태어나 열심히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파괴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저 야무지게 지켜야 될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아기로 이 세상에서 오셨을 때에, 베들레헴 근처 들판에서 양을 치든 목자들은 하늘의 영광에 압도되는 사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숨막히는 영광의 위세에 철저하게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7-14)

인간들을 정신적으로 꼼짝하지도 못할 위세로서 그동안 악마가 억눌려왔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내부적으로 형성된 믿음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다다” 바로 인간들의 이러한 경향을 반영해서 주님쪽에서 보이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정도로 인간의 정신과 마음은 철저하게 마귀 위세에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기로 오셔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북쪽 갈릴리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성장하셔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십니다. 거기 갈릴리 지방은 어떤 지방입니까? 빛이 아니라 어두움의 지방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 4:15-17) 하잖은 존재라고 알려진 자들에게는 귀신들이 곱게 물러갑니다.

하지만 그동안 법과 도덕과 윤리로서 무장하면서 자아 안에 엄청난 비계층(돼지고기층)을 형성한 자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악마의 자식 그 자체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싸움을 하셨던 겁니다. 즉 이들은 평생토록 자기를 위한 싸움에 전념해 온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선한 싸움을 벌려서 이미 천국에 합격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우선 인간 육신과 혈육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파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파괴의 원인을 인간 마음 중심에서 뽑아내시려고 합니다. 구약 유다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등장에서 세 명의 임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스기아와 므낫세와 요시아 왕입니다. 히스기아왕은 죽을 때에 살려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15년간 수명을 잇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히스기야가 교만했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대하 32:24-25) 그리고 그 수명 연장 기간 동안에 낳은 아들이 있습니다. 유다나라를 멸망하는데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죄를 지은 왕입니다.

그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비록 그 후의 왕 요시아 왕이 하나님 앞에서 참 바르게 살았기에 그 왕마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해서 전쟁에서 죽게 됩니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역대하 34:21-22) 이처럼 인간의 혈육과 육신은 이 세상 권세의 갇힘에서 스스로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임신당하신 방식을 성령을 통해서 자기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무사히 유일하게 악마 권세 갇힘에서 빠져나가서 하나님 우편에서 악마를 짓밟으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게 되면 성령받은 사람들은 마치 마리아처럼 자기 안에 예수님을 임신한 효과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육신과 이 지구 모두가 불탄다 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담는 그릇으로서 성도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싸움이며 이것이 합격된 자의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싸움의 한계와 ‘벌써 다 이루신’ 주님 싸움의 권능에 압도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빌레몬서 1장 1-3절(크리스마스의 압박)231224-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빌레몬서 1장 1-3절입니다.

빌레몬서 1:1-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사도 바울이 편지에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자기를 ‘갇힌 자’라고 이야기하는데 갇히게 된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도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 땅에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을 사는 사람의 특징을 이 ‘갇힌 자’라는 표현으로 잘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갇힌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도 갇힌 자 신세가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코스를 이탈해서는 구원이 없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나 갇혔는데 여러분들도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같이 갇힌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바울의 형제 디모데도 나와 같이 갇혀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죠.

또 여기 같이 갇힌 사람이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로마 제국의 시민이 아니라 종이었어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입니다. 빌레몬은 하나님의 성도로서 복음을 위하여 많은 애를 쓰고 있는 형제가 되고요, 이 빌레몬이 사는 동네가 지금의 튀르키예, 지금의 터키 내륙 지방의 골로새서에 있는 사람인데 오네시모가 어디까지 튀어 오느냐? 로마까지 지금 도망쳐 온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게 하려고 이 편지를 보낸 거예요. “종으로 생각하지 말고 같은 형제로 생각해라.” 이 말은 주인이다, 종이다, 하는 것은 이 어둠의 세계가 규정한 거거든요. 지금 성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하늘나라의 사람으로서 다시 태어난 겁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이 세상에서 인간의 마음과 인격들을 꽁꽁 묶어두고 가두어 두는 이 세상에서 통하는 그런 차이성 이런 것은 좀 무시해 줬으면 좋겠다. 그동안 인간들이 이 어두운 세계 더러운 세계에서 많이 묶였잖아.’ 많이 묶여 있었던 거예요. 갇혀 있었던 겁니다.

어디에 갇혀 있는가를 아는 자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탈출을 했기 때문에. 갇힌 자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심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갇힌 데서 탈출해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현재 내 육신을 어디에 가둬도 소용이 없죠, 그리고 인간들의 모든 마음가짐이 이 세상과 결부해서 어떻게 갇혀 사는, 하루하루 매여 사는 신세가 되었는가를 지금 이 사도 바울의 여러 가지 편지를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 당신은, 육신이 갇혀 있는 신세잖아.”라고 이야기했을 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 지금 거기 몸은 갇혀 있는데 이미 마음은 벌써 벗어났다.”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8절에 보게 되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여기서 “내게만 아니라” 중요해요.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두 자로 생각하면 ‘합격’입니다, 합격. 천국에 합격 된 거예요. 누가? 사도 바울이요. 그 자신감, 당신의 그 자신감, 모든 인간이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합격통지서를 미리 받고 합격이라고 이렇게 떠벌이면서 넉넉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 자신감은 도대체 뭘 근거로 해서 그렇게 나올 수가 있는지 우리는 무척 부럽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저 앞 강단에 사도 바울이 있다면 “나는 믿음을 지키고 날 위해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니 주께서 친히 나에게 주신 것이라, 나뿐만이 아니고 주 나타나실 때 나 같이 생명의 상을 받을 사람들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진다. 그래서 나는 합격이다.” 할 때 ‘나도 합격하고 싶어.’ 하는 생각이 굴뚝같을 겁니다.

누가 “당신 합격!”이라는 소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천사가 오든지 주님이 오시든지 “너는 오늘 때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합격이야.” 뭐 이런 통지서 팍팍 날렸으면 싶어. 대선에서 표 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요.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합격이라는 그 희망에서 탈락되면 이 세상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 다니고 뭐 했다는 게 중요하지 않거든요, 합격이 돼야 되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건 7절에 나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라고 되어 있어요. ‘선한 싸움’을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싸웁니까? 누구하고 싸웁니까? 민주당, 이재명하고 하는 그런 정치 싸움? 지금 누구하고 싸우죠? 선한 싸움을 했다는 거예요. 선한 싸움을 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합격 통지서는 없는 거죠. 싸움인데 어떤 싸움이냐? 선한 싸움이에요. 시시한 싸움이 아닙니다.

자, 이 선한 싸움이 뭐냐? 인간은 선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한 싸움이라는 건 그 내용이 뭐냐? 내가 여기에 살아 있다, 내가 죽어 있다, 라는 그 자체를 내가 나에게 물을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싸움이에요.

“나 살았나? 죽었나?” 하는 질문 자체가 과연 성립되는 대상인가, 성립되지 않는 대상인가? “하나님, 저 살아 있어요, 죽어있어요?”라는 질문을 계속 내뱉는다면 그건 아직도 악하기 짝이 없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지 선한 싸움이 아니에요. 선한 싸움이라는 것은 나에 대한 모든 질문이 시답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어느 구절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쟁터에 나갔다. 군사가 자기 일에 매이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이 말은 뭐냐?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의 가치 챙기는 일이 자기하고 관계가 없어요. 내가 인생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살았는가, 라는 질문 자체가 나에게는 적용되면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의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런 생각까지 하는 거예요. ‘갇혀 있다는 것이 이게 슬픈 이야기가 아니고 아직도 살아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갇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내가 아직 살아 있다, 이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본문 그대로 예수님을 위하여, 갇혀 있는 일을 위하여 보조적으로 내가 살아 있는 것 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살아 있을 이유가 없는데 내가 사는 이유 말고 내가 사는 것보다 더 선행적인 이유가 있음을 위한 싸움, 그게 선한 싸움이에요. 살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 되는 일이 따로 있어서 거기 딸려서 내가 보조적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보조적으로.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자기를 위한 싸움을 하지를 않아요. 무슨 싸움 하느냐? 선한 싸움 합니다. 아까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 자기는 합격했어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 곧 생명의 면류관이죠, 주께서 나에게 친히 수여한다, 이렇게 자신감 있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같이 그렇게 합격했다는 외침을 외치고 싶어요.

외치고 싶은데 이런 선한 싸움에 방해가 있어요. 뭐가 방해냐 하면, 내가 합격을 꼭 해야 된다는 그 탐욕이 방해 거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빙자해서, 복음을 빙자해서 기어이 내가 천국에 합격하고 싶다는 것, 이게 싸움의 질이 엉뚱한 싸움이 되어버려요. 선한 싸움이 되어야 할 텐데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 추한 싸움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매사에 뭐가 나한테 이득이냐를 따지는 계산적인 사람으로 계속 유지 되고 있는 겁니다. 그건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매사가 나밖에 모르고 나 위주로 살아가는 내가, 나의 투쟁밖에 모르는 내가 어떻게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미 천국에 합격한 사람의 외침과 고백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지상에, 세상에 자발적으로 갇히고 어떻게 거기서 탈출했는가, 그 과정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싸움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주님의 생각만 하는 선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중에 하나가 사도 바울이고 그다음에 또 무리들도 거기 해당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힌 자 된 바울 밑 형제 디모데는…”라고 할 때 “바울 밑 형제 디모데…” 다음에 빈칸 하나 만들고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넣을 수 있는지 스스로 한 번 자문해 보세요.

사도 바울 예수님을 위해 갇혔다. 그다음에 디모데 갇혔다. 여기 오네시모도 갇혀 있으니까 같이 갇혔다. 그러면 그다음에 여러분들은 갇힐 겁니까? 이 갇혔다는 이 말, 내 인생 완전히 종 쳤다, 하는 상황을 주님께서 왜 만드시냐 하면요, 인간은 끝까지 죽을 때까지 자기 이익 챙기고, 자기 손해 나는 짓은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갇혔다는 말은 자유에 대한 박탈이잖아요. ‘이건 나만 손해잖아, 나만.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데 나만 손해 봤다, 이건 뭔가 잘 못 믿은 거 아니에요?’ 이런 생각이 막 쑥쑥 들어오는 거예요. 사도 바울 갇혔다, 디모데 갇혔다, 오네시모 갇혔다, 그다음에 같이 갇혀야죠.

여기에 보면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나와요. 1절 끝에 보면 “동역자인 빌레몬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동역자라는 말이 나와요. 여러분들, 저와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사도 바울과 같은 일을 하십니까? 동역자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동역자를 찾는다는 말도 되지만 사도 바울 자체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동역자를 찾는 거예요. 예수님이 동역자를 찾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예수님이 같던 길을 가고자 하는 동역자를 찾고 있는 거예요.

정말 꿈에서라도 동역자 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동역자 될 때 가장 친근성을 보여줄 수 있는 노래, 저와 여러분들 다 해 본 노래가 있어요. <쎄쎄쎄>에요.

【아침바람 찬 바람에
울고가는 저기러기
우리선생님 가실적에
엽서 한장 써주세요
한장 말고 두장이요
두장말고 세장이요
세장말고 네장이요
구리구리구리구리 가위바위보】

이 ‘쎄쎄쎄’ 쎄쎄쎄 손뼉 치고 같이 마주하고 하는 것, 또 “푸른 하늘 은하수~” 내려가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 ‘쎄쎄쎄’ 하는 이게 일본 노래랍니다, 손뼉치기, 그걸 할 때 거리낌 없이 누굴 이렇게 마주 대하는 거예요. 이게 동역자예요. 거리낌 없이요.

이게 어릴 때나 가능하거든요. 나이 40, 50 돼서 직장에서 ‘쎄쎄쎄’ 하는 직원들 봤습니까? 없잖아요. 이게 이미 자기 전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타인과 나 사이에 칸막이가 있기 때문에 ‘쎄쎄쎄’가 안 돼요, 쎄쎄쎄가. 아, 진짜 어른들이라고 하는 것이…, 주님께서 어린아이 같지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는 말씀이 정말 맞습니다.

꾸준하게 살면 살수록 자기 이익만 챙기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자기 전쟁이었어요. 선한 전쟁이 아니고 독하게 이기주의적인 전쟁이었어요, 독하게. 이게 무슨 선한 전쟁이 될 수 있겠어요? 안 되죠. 누가 다가오면 날 잡아먹을 것처럼 다가오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동역자를 뽑을 때 어떻게 뽑는가? 주님의 방법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을 파괴하는 방법입니다. 세상이 파괴되지 아니하면 세상은 창조되지 않은 겁니다. 창조되고 흘러가는 게 아니에요. 세상은 파괴되기 위해서 창조된 겁니다. 누가 창조하느냐? 파괴하신 분이 곧 이 세상의 창조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뭐냐? 이 세상을 파괴하러 온 날이에요. 이 세상을 다 부숴 버리는 겁니다.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킵니다.

시편 75편 3편에 보면,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런 권한이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그런 질문 할 거예요. 왜 손으로 직접 만들어놓고 자기가 만든 것을 손으로 왜 파괴하느냐?

세상, 하늘과 땅을 파괴하는 과정속에서 파괴될 세상에 주님이 거기에 들어오심으로서 껍데기, 껍질 되는 하늘과 땅은 파괴되고 그 안에 들어가시는 주님은 주님의 일이 완성되어서 뽑아내는 방식을 하나님 아버지가 창세 전에 계획하신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뽑아내는 거예요. 껍질 파괴되면서 알맹이가 고스란히 되는데 파괴될 때까지 껍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르익어야 해요, 무르익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은혜를 아직 못 받았는데요.” 은혜를 못 받는 이유가, 아직 지을 죄가 무르익지 않아서 그래요. 아직 덜 파괴돼서 그래요. 파괴되기 위해서 애쓰시기 바랍니다. 파괴되려면 지독한 자기 전쟁에 몰입하고 몰두해야 해요. 나밖에 몰라야 해요. 그래야 깨질 때 와장창 깨져요. 정말 두 번 다시 보기 싫을 정도로 아주 와장창 깨지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파괴할 때 마치 정으로 암석 밑에 있는 광석 하나, 금속 하나 끄집어내듯이 정으로 때려서 쪼개서 끄집어내요. 왜? 거기 들어있는 암석의 무게가 너무나 압력이 심해서 스스로 이 세상의 갇힘에서 조금이라도 틈을 낼 수 없어요.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중력에 눌려서 다른 생각을 일체 못합니다. 이 세상이 시키는 대로, 마귀가, 귀신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돼요. 인간은 ‘꼼짝 마라’에요. 어느 정도인가?

가정주부들이 가을 지나고 겨울쯤 되면 장롱을 정리할 때 이불이 부피가 크잖아요. 그때는 비닐 팩을 사요. 서문시장에서 팝니다. 거기에 이불 꾹꾹 눌러 담아서 뚜껑 닫고 뚜껑 한구석에 청소기를 대서 공기 다 빼내면 압력으로 쪼그라들죠. 비닐 팩과 이불 사이에 어느 틈도 생기지 않도록 꽉 조여지는 거예요. 꽉 조이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의 신 악마에게 다루어져 오고 있습니다. 숨도 막혀요. 숨도 못 쉬어요. 숨도 못 쉬게 조여져 있습니다. 이 세상이 과연 그런 세상인지, 우리에게 숨 쉴 자유도 없는지, ‘여유도 없을 거야’ 그 정도의 세상이냐? 그건 인간이 확인할 수 없고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확인하는 거예요. 친히 오셔서 확인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2장 1절에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로마황제)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천하니까,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하나의 속국으로 있는 시리아 지역, 이 시리아의 총독이 어디까지 관할하느냐? 지금의 이스라엘 땅까지 전부다 관할하는 겁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시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그때의 호적은 남자, 여자 다 같이 호적하기 때문에 요셉이 마리아와 같이 호적하러 갔던 겁니다. 그 본적에 갔던 거예요. 그런데 이 호적하라는 이 지시, 이것은 세상의 압박입니다. 정치적 압박이에요. ‘꼼짝 마라’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 세상의 마귀한테 어떤 내 의견, 의사도 마귀의 권세를 뚫고 나오지 못하는 신세로 인간을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쭉 뽑아냈다니까요, 숨을 못 쉴 정도로 세상 국가 권세가 누르는 상태 안에서 우리는 출생 된 거예요.

그런데 누가복음 2장 7절에 보면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구유’라고 하는 것은 여물통입니다. 짐승들의 먹이통이 구유에요. 짐승들 새끼 받는 그런 통이 아니고 먹이, 요즘은 사료죠, 먹이 주는 그 통에다가 아기 예수를 뉘었습니다. 호적 대상은 안 되지요. 짐승까지 호적 할 이유는 없고요.

예수님이 태어난 거예요.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세상아, 마귀야! 너는 네 할 일을 해. 인간들을 압박할 대로 압박해. 압박하든 말든 나는 내 할 일 할 거야.” 하고 그냥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태어나게 하셨는데 여기 그때 그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숨이 막히는 그러한 새로운 환경에 강압적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13절에 보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게 바로 크리스마스 영광의 압박이에요. 크리스마스의 압박이에요.

숨이 막힐 정도예요. 그 천사의 위세와 위력, 영광과 빛남, 찬란함. 세상의 뭐 가이사 아구스도가 어떻고, 뭐 구레뇨 시리아 총독이 어떻고, 그거 전부 다 시시~한 이야기에요, 시시한 이야기. 하늘의 조명발, 하늘의 영광이 너무 세게 압박을 가하니까 그 영광에 휘둘려 가지고 목자들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정신을 못 차릴 때 자기 말은 없어요. 그냥 위에서 들리는 음성이 자기를 완전히 통제하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 세상의 악한 마귀가 호적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도 말고 나는 내 할 일 다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압박이 목자를 주도한 거예요, 목자를.

목자는 어딜 가느냐? 베들레헴에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봤어요. 거기 보니 16절에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두 자로 ‘합격’이에요, 합격.

내가 나를 주도하고, 내 인생을 내가 지시하고 명령하는 그 세상에서 온, 악마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 내가 나를 지시하는 그것의 압박을 더 센 압박으로 무산시켜버리는 크리스마스의 압박이 아기 예수에서 원천이 된, 아기 예수에게서 방출된 힘의 권능이 나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놨어요. 숨도 못 쉬게 만들어놨어요.

그리고 목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 외에 세상에 무슨 일이 있나? 세상에 무슨 일이 있지? 그것도 일이야, 그게? 우크라이나 전쟁 그것도 일이야? 아무 일도 아니야, 그거. 대학 입시, 그것도 그게 일이야? 무슨 일이야?” 합격입니다. 이 목자는 합격이에요.

목자는 더이상 자기 전쟁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살았나? 죽었나?’ 자기에게 질문할 자격도 없음을 깨닫게 된 거예요. 주를 위하여 살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 주님만 살아 있으면 돼요. 그 보조적인 약간의 티끌로 간당간당 내가 살아 있을 뿐이에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한테 아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그분이 살아서 일을 한다는 게 중요해요.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갇힌 자들을 빼내기 위해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주님이 같이 갇혀버린 거예요. 같이 갇힌 동역자 만들고 ‘쎄쎄쎄’ 하시는 겁니다.

“왜 오셨습니까? 주님, 왜 오셨습니까?” 이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 보면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게 성경책으로 보니까 잠이 오죠. 목자가 있던 그 현장에서 한 번 들어보세요. 잠이 올 문제인지. 내가 여기 살아 있다, 그 권능 앞에서는요, 목자입장에서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기이하고 신기한 일이에요. ‘이 권능 밑에 내가 아직도 왜 굳이 살아 있어야 되지? 아, 나를 위해서 살 필요 없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거구나.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그 이야기 하라고 살아 있구나. 빨리 가서 아기 예수 봐야지.’

사도 바울이 그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거예요, 선한 싸움.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예요. 마태복음 2장에서 아기 예수 태어났을 때,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죠, 거기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아기들 다 죽었다고요. 그래서 두 살 난 아기 엄마들이 울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아기 예수 태어났을 때 맛보기로 보여준 파괴에요. 그 파괴는 아직까지 멀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이 가까워요. 8킬로미터밖에 안 돼요, 지금은 장벽이 있지만. 8킬로밖에 안 되지만 바로 가지를 않고 여기 23절에 보면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왜 나사렛 동네에 가시는가? 나사렛 동네에 가시는 이유가, 마태복음 4장 14절 이하에 나옵니다. 거기가 어둡기 때문에 그래요. 나사렛 동네는요, 유다 지파 동네가 아니에요. 거기에는 혼혈,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앗수르 바빌론 포로 잡히고 난 뒤에 이주 정책에 의해 다른 민족들의 피가 섞인, 정통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닌 잡다한 혈통들이 있던 추잡하고 더러운 동네라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규정했던 동네가 스불론 납달리 땅이에요.

유다 땅 아니에요. 스불론, 납달리 땅, 요단강 저편에 있는 그 땅, 그걸 “이방의 갈릴리” 땅이라고 했는데 그게 16절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에요, 어둠. 유대인들이 자부하기를 자신은 메시아의 유대 지파에요. 저쪽은 유다 지파 아니에요. 내놓은 자식들이에요. 그냥 내놓은 자식들이에요.

진짜 정통은 주께서 꼭 집어서 유다 지파 자손으로, 유다의 자손으로 오기 때문에 유다 지파가 하나님이 진짜 택하신 민족이라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은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어느 길로 가셨느냐? 나사렛 동네, 이 갈릴리 동네로 가버려요. 어둠의 땅으로 가버려요.

그것은 이사야 9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인데요, 본문에 나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 천사의 권능에 의해서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잠입했죠. 사실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갇힌 겁니다, 이 세상에서.

왜? 어떤 인간도 이 악마의 권세에 숨을 못 쉴 정도로 눌려 있으니까 어느 정도로 눌려 있는가를 하나님 자신이 체험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인간들은 못 빠져나와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흑암이 그냥 어두운 게 아니고 어둠이 압박감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듣고 보고 배운 모든 것이 다 흑암이에요. 마귀의 정신이고 마귀의 마음이 그대로 우리의 내부까지 스며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구, 이 세상을 불로 태우고 그다음 차례는 그 땅에 거하는 인간들까지 다 죽여버리죠. 다 같이 흑암의 어둠의 자식들이니까 다 죽어 마땅하죠.

그 작업을 하기 위한 바탕 작업을 위해서 먼저 하나님이 이 땅에 비밀리에 침투하신 거예요, 들어오신 거예요, 비밀리에, 아무도 모르게. 천사는 알죠. 천사의 권능을 아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은 아는데 그 외에는 몰라요. 사도 바울도 몰랐어요. 비밀 작전이니까요. 왜 모르냐면 흑암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먹을 이야기나 알아먹을 행위를 주께서는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끝에 보면…, 이제 여러분들이 갇혔다는 의미는 분간하셔야 돼요. 28장 26절에 보면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걸 사도 바울도 경험합니다, 살아가면서. 예수님도 그걸 충분히 경험하고 사도 바울도 경험해요. 다시 말해서 자진해서 이 악마의 권세를 해치고 나올 위인은 아무도 없다, 에요.

왜 인간들은 이렇게 스스로 구원할 수가, 탈출할 수가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에게 가르쳤던 악마의 교육지침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보이는 것이 다다.’에요. 보이는 것이 다라는 것을 극히 실현시킨 종교가 있어요. 그게 천주교입니다. 보이는 게 다예요. 그들은 보이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다고 그걸 이미 믿어요. 마귀의 믿음으로 인간은 보이는 게 다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래? 보이는 것이 다지? 내가 보여줄게. 하나님 보여줄게. 자, 봐라.” 하고 오셨는데, 보이는 것이 다인데 인간이 그냥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마귀의 믿음이죠, 마귀의 믿음으로 보니까 주님이 전혀 메시아 아니에요. 인간들이 악마의 정신으로 점점 더 자아의 껍질이 두꺼워져요. 자아의 껍질이 점점 두꺼워지게 되면 점점 더 악마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 일할 때 저 하층 계급들, 못 배운 계급들은 예수님이 이야기하면 금방 금방 귀신들이 나갔어요. 자아의 두께가 얇아서 그래요. 그런데 이미 법과 윤리와 도덕으로 이만큼, 그 비계의 두께가 3층, 4층의 도덕으로 꽉 차 있고 율법으로 포장이 된 인간들은 아예 주님께서 “너희 아비는 악마다.”라고 놔둬 버렸어요. “독사의 새끼들아.” 바로 그 모습, 도덕과 윤리, 완전히 비계덩어리로 자아층을 구성한 것, 이게 바로 마귀의 본 모습이에요.

‘내가 나로 인해 살고 있는데 내가 착하고 바르게 살면 되지. 다른 거 뭐가 필요있어?’ 이런 식으로 버티는 거예요. 그들의 아이디어에 의해 크리스마스가 만들어진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왜? 눈에 보이는 게 다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크리스마스 하면, 매일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수도원에서 혼자 도 닦는 거 이런 거 하는 거예요.

혼자 도 닦는 거, 그거 수도사들 옛날에 다 했거든요. 요새 누가 하는 줄 알아요? 요새는 젊은 사람들이 다 혼자서 살아요. 그냥 도 닦아요. ‘아이 낳는 것도 싫어. 결혼도 싫어. 나한테 집적거리는 거 다 싫어. 귀찮은 일 일체 안 해. 냅둬. 나 혼자 살게.’ 나 혼자 사는 게 뭔데? 절대적 아닙니까, 절대적. 그거 마귀의 정신 아닙니까?

‘쎄쎄쎄’, 이거 언제 해봤다고, ‘푸른 하늘 은하수’ 이거 언제 해봤어요. 그래가지고 혼자 살면서 또 성경은 연구한다? 복음도 연구해요. 뭐 하려고? 합격하려고? 누구 힘으로? 독학해가지고? 와~, 욕심도 참, 욕심의 끝이 한정도 없어요.

주님께서 오시면서 갈릴리로 해서 드디어 우회로 예루살렘을 공격해 들어갑니다. 차근차근 갈릴리의 세리와 창녀, 그리고 병든자와 가난한 자, 여자와 아무것도 모르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어디로 가느냐? 드디어 예루살렘을 겨냥해요. “너희들이 너희 할 일을 해야지!”

주님께서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창조가 파괴될 수밖에 없는 원인, 이유가 주님이 다녀가기 위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는데 다녀간다고 파괴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녀가면서 뭔가 만나야 되는데 창조세계의 대장질을 하고 있는 것과 직접 마주치면서 다녀가야 돼요.

그래야 떠나고 난 뒤에 이 세상을 불로써 싸지를 수 있는 정당성이 보장이 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뭘 만나느냐 하면, 인간 내부를 파헤쳐서, 말씀으로 파헤쳐서 지구를 쪼개는 거예요. 지구를 쪼개서 도대체 “마귀 어디 있~나? 네 속에 마귀 어디 있지?”하고 찾아내는 작업을 주께서 말씀이라는 정을 통해서 그걸 해주십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얼마나 주님이 이렇게 친절하시고 애살 있습니까? 정을 가지고 쪼개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평생 모아놓은 것 다 쪼개버리는 겁니다. “이 안에 요거 마귀 있는데 아직도 안 나오네! 얼마나 더 쪼개야 요게 나올까?” 하고 쪼개주시는 거예요. 쪼개주셔서 “여기 있네!” 하고 끄집어내면 합격입니다, 그게. 패스에요.

아, 요게 그 인간의 자기의, 이게 뿌리였구나, 뿌리. 이빨 확 뽑듯이, 티눈 뽑듯이 내 잘난척 하면서 살아가는, 내가 교만할 수밖에 없는 그 뿌리, 그 뿌리를 구약에서 이렇게 합니다. 육신, 육신. 그게 바로 내 자식 사랑이에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말씀으로 쪼개서 그 뿌리 있는 데, 멸망의 이유에까지 가는데 역대하 32장 이후에 죽 보면 나옵니다.

역대하 32, 33, 35장, 계속해서 나와요. 거기에 세 명의 왕이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히스기야, 두 번째는 므낫세, 세 번째는 요시아왕이 등장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것은요, 히스기야가 15년 동안 더 살지 않았으면 태어나지 않았을 자식이 있어요. 그게 므낫세라는 자식입니다.

그냥 죽을 병 걸렸을 때 돌아가시면 되었을 것을 괜히 살려달라 해서 15년 더 수명이 연장되면서 그 연장된 가운데서 누가 태어나는가? 천하에 이스라엘을 말아먹은 왕이 태어납니다. 므낫세왕이 태어납니다. 역대하 33장 1절,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이세라.” 참, 히스기야 진즉에 죽어야 되었는데 안죽었으니까 그렇게 된 거지요.

역대하 32장 24, 25절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아, 15년 더 살려놨는데 고맙다고 해야되지 않습니까? 초반에는 고맙다고 기도했지요. “고맙습니다” 했는데 그다음부터는 뭐냐? 우쭐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봐, 하나님이 날 인정해줬다고.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15년 더 살게 해 준 이유는 딱 한 가지예요. 아직까지 히스기야가 지을 죄를 덜 지어서 그래요. 더 지어서 그 히스기야 그 사람의 자식, 새끼, 이스라엘을 말아먹는 자식이 태어날 때까지 계속 주께서 지연시킨 겁니다. 우리의 핵심, 자식이 태어나는데 그 자식이 우리의 뿌리에요. 그 자식이 나를 망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해요. 다시 말해서 나는 나보다 내 죄를 더 사랑해요.

나의 뿌리니까. 나 건드려도 참을 수 있어요. 내 자식 건드리면 못 참아요. ‘선생님, 나와. 너 오늘 죽었어. 고발할 거야.’ 이런 거요.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므낫세가 이렇게 이스라엘을 말아먹었지만 므낫세도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아버지의 죄를 극복할 정도로 바르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역대하 35장 22-23절에 보면, 훌륭한 자식이 태어나요. 요시아왕인데 요시아가 훌륭했는데 죽을 때 끝에는 이렇게 죽어요.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이렇게 해서 전사하고 말아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 느고는 이집트의 왕이에요. 여호와와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왕의 입을 통해서 이번 전쟁에 끼어들지 말라, 했는데 요시아왕이 말을 안 듣고 ‘이 나라 내가 지키겠다’ 하다가 전사해요. 이렇게 착하디 착한 사람이.

아버지가 장려했던 우상 다 뒤집어엎고 바르게 했는데 죽을 때는 어떻게 죽었다? 여호와의 말을 안 듣고 죽었어요. 이스라엘 끝입니다. 인간의 끝이에요. 인간의 한계에요. 인간은 아무리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 지키는 것을 두껍게 가져간다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이 어두움의 권세, 힘에서 합격 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바르게 살아도 소용없어요. 바르게 사는 게 더 골치 아파요. 그러면 어떻게 할거냐. 이 육신이 문제인데. 하나님께서는 멋진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육체는 있지만 하나님 자신의 육신이 하나님 우편으로 가버리면 육신은 하나님 우편에 있더라도 하나님 자신의 영은 하나님의 오른편 자리에서 아버지와의 약속에 의해서 자기 택한 백성 안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을 수 있는 기술,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성령께서 세례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천하의 악마의 권세 안에 누가 잉태하느냐? 예수님 자신이 마리아가 예수님 잉태하듯이 성도가 예수님을 임신해 버려요. 전부 다 임신한 사람들입니다. 전부 다 임신한 사람들. 임신을 해버린다고요, 우리 안에. “누구야 너! 내가 예상치도 못하게 행동하는 너, 누구야 너!” 예수님은 인공지능 정도가 아니라 신공지능이에요.

신데렐라 동화에 보게 되면, 신데렐라도 참 고생 많이 했지요. 노래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 하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샤바샤바 하이샤바】

엄청나게 구박을 받았어요. 그런데 자기는 도저히 예상도 못 했지요. 이 집구석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마귀의 권세처럼 압박을 하기 때문에 내 입장, 내 신세, 그리고 이 환경에서 조성된 나의 자아성을 생각해 볼 때 나의 구출이라 하는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어떤 파티장에 갔다가 12시 땡 치기 전에 돌아오는데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지요.

그 신발 자체를 두고 여러분은 그게 신데렐라 신발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신발 한 짝, 그것도 두 짝이 아니라 한 짝이 왕자와 신데렐라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겁니다. 어떻게 매개체 역할을 하느냐? 신데렐라 언니에게 그 신발이 치수대로 한다면 맞는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빨간 신발 자체가 안 맞게 해버려요, 신발 자체가. 신공지능이라서.

얼추 맞을 수도 있는데 일부러 막 크기를 조인다든지 해서 “안 맞는데? 안 맞아, 안 맞아.” 그런데 정작 신데렐라 발하고 그 신발하고 안 맞을 수가 있는데 그 신발 자체가 발에 딱 맞도록 신발 자체가 스스로 신데렐라 발에 작동해 버려요.

이게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은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한다고 아는 게 아니고 말씀이 맞춤이에요, 맞춤. 너는 내 백성이야, 하고 딱 맞춰서 조여버려요. 우리를 조여요. 아예 내가 살았나, 죽었나, 생각도 못 하게. 말씀만 내 안에 살아 있으면 되도록 그렇게 작동을 하는 거예요, 말씀이.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신데렐라 언니들이 하는 짓이에요. 그 예가, 맞춤 구원받는 예가 마태복음 27장 45-51까지 있는데 두 절만 읽어볼게요. 45절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세상을 이제는 그만 운영할 생각입니다. 영업 종료할 생각이에요. 이 세상을 이제는 버릴 생각이에요.

자기의 동역자 뽑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해가 어두워집니다. 해도 달이고 별이고 이제는 필요 없어요. 천국에는 해와 달과 별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어린양의 광채로 인하여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서서히 징후가 보이는 거예요. 세상철수작업을 하는 거예요. 서서히 이제 파장, 장날 파장분위기 확 나게 만들었어요.

십자가 질 때 해까지 어두워졌어요. 그리고 51절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땅이 진동해요. 땅도 포기했어요, 이제. 땅 보고 “얘야, 우리 이사 가자.” 철거하는 거예요.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까요. 다 이루게 되면, 주께서 다 이루게 되면 주께서 빠져나가는데 유일하게, 유일하게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분, 유일한 인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우편에까지 계속해서 상승해서 위치를 올려야 돼요.

올리고 난 뒤에 올리워가야 그 오른편의 자리가 옛날 여호와께서 하시던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악마를 발 앞에 깔아내리는 자리거든요. 시편 110편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1)

주께서 내 주에게 오른편에서 악마를 발 앞에 깔아 내리면 그다음부터는 악마가 자기 백성을 붙들고 싶어도 더 이상 못 붙들어요. 붙들 수가 없어요. 더 센 천사의 권능이 있으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수동적입니다, 기뻐하심, 본인이 기뻐하는 게 아니고 기뻐하면서 기뻐하라고 집었던 택한 백성을 집는 데 있어서 어떤 악마, 어떤 세상 권세도 이게 맞춤 신데렐라 신발이 되어서 이 신발 못 벗깁니다. 언니가 막 벗기면서 “나도 좀 신자.” 해도 안 돼요. 왕자의 짝은 그 신발이 결정하는 거예요. 스스로 조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해서.

그렇게 해서 다 이루었다 해서 성령으로 이 땅에 오시는, 그 압박되는 절차만이 악마의 이 압박된 세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 땅이 진동하지요. 52절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그다음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54절,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뭐라고 하느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보세요.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를……, 인간들은 보는 것이 다거든요.

“보는 것이 다다.” “그러면 보여줄게.” 보여줬는데 일어난 그 모든 일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와 연결되는 것을 몰라요. 그 연결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왜? 복음의 광채를 악마가 차단시켰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 이야기를 하는 대목인데요, 거기서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어떤 성경책에 보면 “거듭나지 아니하면”여기에 각주를 달아놓고 밑에 설명해 놓았지요. 그 원뜻이 “위에서 나지 아니하면”

땅은 끝났어요. 하늘에서, 위에서 났다는 말은 요한복음 3장 5절에 성령으로, 성령 받아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성령은 누구의 영이냐?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스스로, 자진해서 아기 예수로 임신했다는 뜻이지요. 임신을 당한 거지요, 우리 몸에.

죄인 안에 예수님이 자라나고, 자라나면서 예수님이 이루었던 모든 것을 겪으면서 ‘우리 육신은 갔다.’ 벗기고 안에는 예수님 자신이 만들었던, 같이 ‘쎄쎄쎄’ 했던 자기 동역자는 안에서, 내부에서 끄집어내서 데려가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를,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담는 그릇이 된다는 조건하에 그 그릇과 십자가 정신을 같이 뽑아가게 되면 ‘합격’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싸움이냐? 선한 싸움이에요. 나의 싸움 아닙니다. 나 천당 가는 싸움 아니에요. 주님 자신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살아 있음, 주님의 죽으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 있을 뿐이에요. 이게 크리스마스가 주는 신나는 압박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가 하는 일만 기억하고 내가 살아온 것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자체가 더러운 마귀 짓인 것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진짜 주께서 하시는 것, 세상 끝장날 것을 미리 다 아시고 자기 사람 데려가는 작업에 충실하신 그 주님의 충실하심에 우리가 감동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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