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24강-시공간 장악

아빠와 함께 2023. 12. 27. 08:28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4강) 갈2:20(시공간 장악) 20231226b(강의: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p.77 중간에 보면【갈라디아서 2장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그 대목 있죠.【“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그렇게 되어 있고【곧 과거에 발생된 십자가 사건…】이런 표현 나와 있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이 내용이 과연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냐 하는 그것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다는 것은 지금은 이미 지나갔다는 뜻으로 사용하잖아요. 과거라 하는 것은 ‘과거는 사라졌다. 없어졌다. 지금은 그 때 아니야.’ 이럴 때 우리는 현재를 느끼는 거예요. ‘옛날에, 왕년에, 과거에’ 이런 뜻인데.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사도 바울은 그때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 현장에 없었어요. 다른 동네, 터키 쪽에 살았기 때문에 이 동네에 없었어요. 사도 바울은 다소(타르수스, Tarsus) 사람이기 때문에 저 멀리 사람이고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했거든요. 한번 적어볼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할 때 이게 과거에 속할까요, 안 그러면 현재에 속할까요, 아니면 미래에 속할까요? 이 상태가 과거, 현재, 미래 어느 쪽에 속하는 이야기입니까? 과거, 현재, 미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 본인의 자리, 본인의 위치는 과거, 현재, 미래가 적용되지 않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걸 ‘성령 안, 예수 안’이라고 사도 바울은 표현하고 있어요. 성령 안, 예수 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거기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는가? 잠시 그림을 그려보면 여러분들이 이해될 거라 기대해보고 그림을 한번 그려보겠어요.

인간이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가 전혀 적용 안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는가? 인간 세상은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시간이 계속 흘러갑니다.

과거 →→→→→ 현재 ⇢⇢⇢⇢⇢ 미래
⼈ ⼈ ⼈ ⼈ ⼈ ⼈ ⼈
여기에 인간들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있는데 이걸 한꺼번에 한번 뒤집어씌워보자는 거예요. 고급 호텔에서 음식 나올 때 음식 쟁반에 큰 뚜껑 덮는 거 있죠. 음식에 먼지 들어가지 말라고, 음식의 맛과 향기가 유지되라고, 온도 유지되라고 덮죠. 음식 접시 덮는 뚜껑 있잖아요. 뚜껑으로 한번 이 전체를 뒤집어씌워보잔 말이죠.

뚜껑 씌워버리면 이 전체는 사건이 되는 거예요. 사건이 되고 이 밑에 인간들이 있다는 건 존재라 할 수 있어요. 존재란 우리말로 ‘여기 있다’. ‘여기 뭔가가 있다’가 터져버린 사건 아래쪽에 있는 거예요.

참… 우리 인간의 말로서는 설명하기가 좀 버거운데… 이런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광주 사태 일어났을 때 시민군들이 총 들고 군인하고 총싸움하면서 총알에 맞았다 칩시다. 그러면 5‧18 광주 사건은 지나갔죠. 지나갔는데 자기 뺨에 총알 맞은 자국은 계속 있어요, 없어요? 있으니까 그 자국이 남아있는 한 광주 사건은 본인에게 지나간 게 아니에요. 현재에요, 현재. 아픔이 계속 있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광주 사태의 그 흔적을 자기 손으로 뽑아낼 수 없어요.

사건을 드러내기 위한 내 존재(있음). 나의 있음은 사건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라 하죠. 성경적으로 증인인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그 사건의 ‘증상’이다 또는 ‘징후’다. 애들 수두 걸리면 빨갛게 수포 올라오죠. 발열 현상에 대한 증상이 수포, 피부 발진으로 올라오는 거죠.

사도 바울은 본인을 십자가 사건의 증상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의 증상. “너 전에 예수님 굉장히 싫어했잖아. 예수님 믿는 사람들 막 잡아 죽였잖아. 너 스데반 집사 돌로 쳐 죽일 때 거기 책임자로 그 현장에 있었지?” “있었어.” “그렇게 싫어하면서 예수가 이단이라고 이야기했잖아.” “했지.” “그런데 지금은 네가 예수님의 복음을 왜 전하는데?” 예수님의 존재, 내 존재를 정하는 게 아니고 지금 예수님에게 있던 그 사건 안에 내가 쑥 들어가고 만 거예요. 이 사건이 덮친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덮쳐버린 거예요.

십여 년 전 일본 해변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원자력 발전소를 덮쳤죠. 쓰나미가 덮쳤잖아요. 십자가 사건이 쓰나미처럼 밀려와서 내 인생을 그냥 덮친 거예요. 그렇게 덮쳐지니까 뭐가 느껴지느냐 하면, 그동안 나는 내 구원받기 위해서 몸부림쳤다는 사실이 십자가와 비교되면서 그 허점이 드디어 들통나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에게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 사적인 죄로 예수님이 사형당하는 현장이 십자가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십자가 달린 당사자가 살아서 자기 십자가 사건의 지진을 일으킨 그 여파가 사도 바울에게 덮치니까,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죄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게 아니고 바로 오늘날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 달렸다고 그렇게 바꾸어서 해석이 되어버린 거예요, 사도 바울에게.

그러면 그 십자가 사건에 사도 바울 개인이 관여된 거예요, 관여 안 된 겁니까? 관여되어버렸죠. 관여된 거예요. 관여가 되게 되면 예수님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뭐냐?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 시공간을 예수님 마음대로 다루거든요. 시공간이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이것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공간은 뭐냐? 네가 어디 있든지 네가 미국에 있든지 캐나다 있든지 어디 있든지 관계없이 나의 성령은 찾아가는 거예요.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아요. 러시아에 있든 핀란드에 있든 미국에 있든 그날 밤 온 전체 지구상에 있는 울지 않는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다 줘버려요. 그렇게 되기 위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속도를 계산해봤어요. 계산해보니까 1초에 10억km를 날아가야 돼요. 빛의 속도보다 더 빨라요.

우리 손녀가 있는데 어제 25일 아침에 물었어요. 어젯밤에 산타클로스 다녀갔나? 나 잘 때 왔다 갔다는 거예요. 뭐 주고 갔더냐 물었더니, 선물을 줬는데 독일 선물을 주고 갔다는 거예요. 애는 산타가 독일에서 왔다는 거예요. 독일에서 선물 갖고 나한테 왔다는 거예요. 왜 자기가 자야 되는가? 자야 선물을 주니까. 눈뜨면 선물 안 주니까 잤다는 겁니다.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내 행함, 내가 얼마나 교회 다니고 성경공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선물 안줘요. 내가 자식들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고생 키웠는데… 선물 없습니다. 선물 끝났어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오직 한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만을 위해서 일합니다. 십자가 복음만을 위해서 일해요. 그거 아니면 그거 아닌 세계가 귀신의 세계기 때문이에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방금 결론내기를 내가 왜 같이 죽어야 되는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같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란 죄인을 대표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었고, 너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 소식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줬다는 거예요.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하는 거 있잖아요.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제 고백하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그래서 예수님이 죽을 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뭐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거예요. 십자가 못 박혀 죽어버리면 더 이상 나에게 청구할 처벌은 없습니다. 야, 이거 진짜 멋진 구출방법이에요!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옆에 사탄이 자꾸 꼬셔가지고 “쟤가 일곱 살 때, 열 살 때, 스물, 사십, 칠십, 팔십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다 압니다.” 하고 계속 고소, 정죄하는 자 마귀가 옆에서 계속 꼬지르는(고자질하는) 거예요. “하나님, 저 인간 저런 인간입니다. 율법에 이렇게 어긋나고 하나님 말씀도 안 지키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고….” 꼬지를 때,

로마서 8장에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야? 누가 꼬질러? 그래. 내가 그 죄인을 위해서 내 아들 내줬잖아.” 마귀 너는 저 사람의 죄를 위해서 내 아들을 내어주었다는 것을 마귀 네가 자꾸 애써 감추려고 그걸 빼돌리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서 ‘너 죄인이지? 너 나쁜 짓했지?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하느냐?’ 이런 식으로 우리 양심에 계속 호소하는 거예요. 누가? 마귀가요.

마귀가 선악체계에 근거해서 우리를 계속 지적하고 고발하는 거예요. ‘남편이 되어가지고 평생 돈도 안 벌고 그렇게 애를 먹이고 도박하고 맨날 바람피우고. 봐라, 네 마누라는 애 키우고 그렇게 고생하는데 넌 양심도 없냐?’ 계속 고발하는 거예요.

‘돈 없다고 피아노 집 애 유괴해서, 그것도 유괴한 거 고발할까봐 돈 받고 네가 사람을 죽여? 네가 인간이야?’ <밀양>에 있는 어떤 사람보고 이야기하죠. 유괴당해 죽었던 애, 피아노 레슨하던 그 애 엄마가 뒤늦게 예수 믿고 회개한다고 교도소 가서 누구를 만났는가? 자기 애 납치해서 죽인 그 아저씨를 만난 거예요. 자기가 전도 성과 내려고 “아저씨, 내 말 한번 들어보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나 교도소 와서 그거 다 믿었는데요.”

그 순간, <밀양>의 여자 주인공 전 도연은 돌아버린 거예요.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를 용서해줘야 용서지, 왜 피해자 허락도 없이 네가 뭔데 십자가 용서를 받아?” 하고 악을 쓸 때, 그게 바로 마귀의 모습이었죠. 그게 바로 귀신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아무리 교회 다녀도 내가 그동안 나한테 마귀로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줘야 돼요.

우리가 ‘내가 지은 죄가 뭐 있느냐?’ 이렇게 자꾸 주장하는데요. 하나님 보시기에 십자가에다 못을 박을 정도로 죽을 죄를 지어왔어요.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도 우리 죄를 대신 가져가신 분인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단 말이죠.

그 말은, 우리는 할 말 없는 인간이고 더더구나 할 말 없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돌아올 어떤 처벌이 일체 뾰로롱~ 없어졌어요! 뾰로롱 다 없어져버린 거예요. 성경 전체가 율법이거든요. 성경 전체로 우리에게 십계명 지켰냐고 고발 고소하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의문(儀文)에 쓴 증서, 글자에 있는 모든 죄는 주께서 다 없애버렸다는 거예요.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되어 있단 말이죠.(2:14-15)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냐 하면, 아이스크림을 갖고 있는 아이가 친구랑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어서 아껴 먹는 거예요. 이야기하고 조금 빨아먹고 이야기 조금 하고 빨아먹고 하는데 다른 친구가 도저히 참다 못해 자기가 홀랑 다 먹었어요. 이야기 끝나고 난 뒤에 아이스크림 먹으려고 보니까 아이스크림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말이야, 이런 죄를 지었는데… 내가 착하게 살아서 내 죄를 알고…” 하다 (죄를 돌아)보니까 지은 죄가 없어요. 지은 죄가. 아무리 봐도 지은 죄가 없어요. 누가 가져갔어? 십자가가 가져갔어요. 십자가 예수님 피가 가져갔어요. 진짜 이거는 우주 최고의 황당한 이야기에요. 이 복음이. 황당한 이야기에요.

지금도 교회 가보세요. 뭐라고 합니까, 목사들이? ‘죄 씻음 받았으면 십일조는 내줘야 기본 아니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갚기를 요청하죠. ‘봉사해야지. 너만 천당 가면 되나? 다른 사람도 천당 가도록 전도를 하고 전도를 하려면 돈 필요하니 돈 내라.’ 맨날 이런 소리 하죠.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떤 기분으로 헌금하고 봉사합니까? 어떤 마음으로? 1번-죄 사함 받은 기분으로 한다, 2번-죄 사함을 받았던 나의 떳떳함으로 한다. 몇 번입니까? 자신의 잘남과 떳떳함. 아직도 인간은 육신이 남아있는 한 그 귀신을 못 버립니다. 그걸 버릴 수가 없어요.

누가복음 8장 30절, 31절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여기서 본문 딱 보니 어렵죠.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개인적 이름을 물었는데 답변이 개인적 이름이 나온 게 아니고 집합적 개념, 집단 이름이 나오죠. 인간은 개인을 갖고 있지만 귀신은 개인이라는 경계를 완전히 넘나듭니다. 개인이 아니에요. 집단적으로 하는데 그다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그 집단이 어디서부터 나왔던 집단입니까? 31절에 “무저갱”이에요. 무저갱.

얼마 전 이것에 대해서 대구 강의인가 언급했던 기억이 나요. 요한계시록 9장 1절에 보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엇의 열쇠를 받았습니까?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모든 귀신은…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깨부수죠.

악마의 권세를 부숴버렸다 하는 것은 악마는 이제 제 마음대로 못한다는 거예요. 제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은 악마가 활동을 안 한다, 귀신이 활동을 안 한다 그 말이 아니고 이제는 지시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지시에 따라. 왜? 누구 승리로 끝났습니까?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이 승자로 끝났죠.

자, 오늘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할 때 십자가는 인간은 못 빠져나오고 예수님은 빠져나온 것, 그 사건이거든요. 인간은 때려죽여도 못 빠져나와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4장에도 나오고 누가복음 4장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했죠. 3절에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한번 적어볼게요.

[마귀의 시험은 모든 인간이 못 빠져나오는 시험(test)]이에요. 유혹(temptation)이라 해도 되는데 test, 시험 치는 거라 합시다. 악마의 테스트는 모든 인간이 못 빠져나오는 항목입니다. 빠져나올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은 악마의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못 빠져나오기 때문에 인간들 중 그동안 악마로부터 빠져나온 위인이 있었다, 없었다? 없죠.

악마는 이미 이 세상 신이에요. 이 세상 신으로부터 빠져나오면 이 세상 신을 이긴 게 되니까 그런 일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악마의 통제 하에 있어요. 마귀의 지시 아래 있습니다. 마귀의 지시가 일곱 귀신처럼 우리 마음에 귀신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귀신이 들어와서 그동안 인간 마음을 장악한 거예요.

장악할 때 원칙이 뭐냐? 선악원리로 장악한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이게 양심이에요. 선악원리로 장악한 거예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인간은 이렇게 삽니다. ‘내가 이런 짓하면 안 되지. 이건 짐승 같은 짓이야. 사람인 이상 이런 짓하는 게 아니야.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선악지식에 준해서 인간은 자기 관리를 해왔던 겁니다.

이걸 인간다운 인간, 훌륭한 인간, 인격적인 인간, 품위 있는 인간, 선비 같은 인간, 존경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사람들 전부 다 이야기하는데 이게 성경에서는 군대 귀신이 들어간 거예요. 귀신이 들어간 거예요, 그거는.

그 귀신 중에 귀신의 최고 고수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누굽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아닙니까. 율법으로 마음관리에 가장 철저에 철저를 기했던 자들이고, 그걸로 내가 천국 갈 수 있을 때를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준비해놓은 거예요. 의를 많이 저축한 거예요. 의의 펀드를 넣어놓은 거예요. 착한 일 한 거 다 더하고 나쁜 일은 줄이고.

바리새인 마음을 두 쪽으로 해부해보면 한쪽에 착한 마음이 이만큼 많이 있고 나쁜 마음은 요만큼 쪼금 있고. 그걸 주님이 인정했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천국에 못 간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 탈락하면 모든 인간 다 탈락이에요.

그런데 주님께 그 바리새인의 의가 탈락이에요. 그러니까 그동안 인간들은 천국에 탈락되는 쪽으로 계속해서 자기 단련을 시킨 겁니다. 경건훈련을 한 거예요. 경건훈련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지옥 쪽에 가까이 가는 거예요. 지옥 쪽에. 점잖으니까. 잘났으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다들 나보고 훌륭하다고 해주니까. 그게 귀신들린 거예요. 그것도 한둘이 아닙니다. 군대 귀신이에요. 군대 귀신.

그만큼 선악원리는 빼도 박도 못 합니다. 선악원리를 이 세상 학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두 자로? 개인적으로는 도덕. 그리고 사회 속에서는 윤리. 합쳐서 도덕 윤리. 인간이 짐승이 아니고 사람다운 이유는 인간에게 도덕과 윤리가 마음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성선설(性善說)이라 합니다. 맹자의 성선설. 날 때부터 인간은 선하다. 동양철학의 성선설이에요. 도덕과 윤리.

인간을 교육해야 될 이유는 그 사람 속에 마지막 남은 약하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착함이 있기 때문에 거기다 교육하면 착함이 점점 더 풍선처럼 커진다고 본 거예요. 이게 천주교 교리죠. 동양철학이에요. 이거 귀신들린 거예요.

모든 인간은 못 빠져나갑니다. 시험을 이렇게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금식 중입니다. 사람은 힘이 있어야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잖아요. 그러니 인간에게는 떡이 필요하다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기도해라. 떡 필요하다고. 주변에 있는 돌이 떡이 되도록 기도하라.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마귀가 예수님한테 이야기했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마귀가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에게만 이런 테스트한 게 아니고 줄곧 모든 인간에게 이 테스트를 해온 겁니다. 떡이 있으면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떡이 있어야 ‘살리라’. 인간은 귀신들린 어떤 인간도 자기가 살고 싶지, 죽기 싫어하는 거예요.

살려면 뭐가 필요해요? 떡이 필요하고 요즘 말로 하면 뭐가 필요하다? 떡 대신 돈이 필요한 거예요. 교회고 뭐고 간에 가정이고 아무리 좋은 일도 돈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이 이게 마귀가 모든 인간에게 집어넣은 이야기입니다. 이 테스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그러니까 마귀가 예수님께 이런 테스트를 한 것은 모든 인간을 다 이겼기 때문에 너도 나한테는 진다고 한 거예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배후에 누가 그렇게 하게 하셨습니까? 성령에 의해서. 성령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굶겨놓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귀한테 시험받도록 한 거예요.

왜 그런 무대를 허락했느냐 하면 마귀한테 지배받는 것이 모든 인간의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많은 마귀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무저갱에서 나왔어요. 무저갱은 감옥이에요. 마귀를 영원히 가두는 감옥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어떤 천사한테 허락해서 열쇠를 열고 그 갇혀있는 귀신들을 다 풀어냈어요. 지시에 의해서 이 땅에 다시 활개 치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왜 귀신들을 활개 치도록 했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율법을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라는 것이 구약에 나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중간에 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 사람은 양이 되고 예수님이 하는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염소가 되어서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천국 지옥이 인간에게 달린 게 아니고 누구로 변경되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율법으로 갈렸던 천국 지옥의 결정판이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제는 예수님 하신 일을 인정하는 자, 다 이루었음을 인정하는 자는 양이 되고 인정치 못하는 자는 염소가 되는 거예요.

또 거짓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기준이에요. 예수님이 기준. 그럼 그 기준점 세우기 위해서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귀와 만나게 해줬죠. 마귀는 놀랍게도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에요. 천사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한 마귀가 시공간을 초월하지 못한 인간을 얼마든지 다스리고 통치하고 갖고 놀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마가복음 같은 경우에 1장 이것도 얼마 전에 한 느낌이 드는데요. 마가복음 1장 23절,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게 누구 이야기에요? 귀신이 이야기하죠. 귀신은 천사니까 시공간을 다 알고 있어요. 인간만 모르죠. 인간은 자기의 미래를 몰라요. 자기의 미래를 모르니까 자기가 잘 될까 싶어서 애써 교회 다니고 노력하는 거예요. 바르게 살고. 바르게 살면 언젠가 알아줄 날이 오겠지.

그러나 귀신도 알고 주님도 아는 게 뭐냐? 인간의 끝을 알아요. 네가 오른쪽에 있을 사람인지 왼쪽에 있을 사람인지. 그래서 인간은 판판이 마귀한테 져요. 미래가 두려워서. 내가 이 짓하다가 지금 망하는 게 아닌가. 자기 끝을 모르니까 지금은 최선의 노력을 다 해볼 수밖에 없어요. 끝을 모르니까.

그런데 성도는 뭡니까? 아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성도는 이미 시공간을 초월한 예수님이 다 이루시매 자기 미래를 알아요. 나의 모든 죄는 완전히 delete, 완전히 삭제되었음을 알잖아요. 알죠. 그러니까 성도한테는 악마가 판판이 깨지는 거예요. 판판이 깨지죠. 집사님 글 댓글에 해놨어요. 판판이 깨지는 거예요.

“너 그런 짓하다 망한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알아, 알아.” “너 그러면 못 산다.” “안다니까!” “너 교도소 가는 거야.” “알아.” “너 집구석 완전 망해.” “안다니까.” 그게 뭐냐? 이미 죄 용서받은 자에게 우리의 육신은 그냥 후딱 털어버려야 될 구멍 나고 헐은 옛날 유니폼이에요. 이거 세탁기에 넣지도 않아요. 너무 더러워서 못 넣어요. 세탁기 버려요. 입고 있는 내 양심과 내 육신은 갖다 버릴 거예요. 이건 노숙자도 안 입을 거예요. 진짜 더럽고 더러운 옷이에요. 더럽고 더럽죠.

그러니까 조각하는 사람이 안에 완성품 넣어놓고 바깥에 뭘 깹니까? 망치가지고 안을 입혀놓은 바깥 프레임 외형 같은 걸 톡톡 깨야 그 안에 깔끔한 동상 나오잖아요. 석고 프레임 되어 있는 걸 치잖아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인생은 뭐냐? 망치가지고 톡톡 깨는 거예요.

깨는 장소가 어디냐? 요양병원에 가야 깨져요. 이걸 깬다고요. 그럼 비로소 속에 바람이 통하죠. 성령의 바람이 불면서 속이 시원하죠. 그런데 마귀가 테스트하잖아요. “너 그러면 망해.” “듣고 싶은 이야기야.” “너 죽어.” “이거 웬 기쁜 소식!” “너 집구석이 네 집안이 원수인데? 네 원수는 집안 식구라 했는데? 너 남들이 욕한다고.” “아, 주님 가신 길…. 그래서 좁은 길을 아무나 못가지.”

그럼 마지막에 마귀가 뭐라 합니까? “네가 미쳤구나.” 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그래. 사랑에 미쳤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사랑에 미쳤다. 이게 내 마음대로 하는 내 뜻이 아니야. 사도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으니 남아있는 것은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이 있다.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 해놓고 자기는 의의 면류관 받는대요.

예수님 중심으로 양과 염소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심판은 누가 내리는가? 로마서 12장, 심판은 내게 맡겨라. 네가 심판하지 말고. 저 인간 내 돈 떼먹고 도망친 거, 내 인생 망친 거 자꾸 저주하고 심판하지 말고 심판은 우리 주님께 맡겨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이 남 탓하기 전에 먼저 나를 심판했기 때문에. 심판받은 자가 뭘 남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 받을 대상자가. 안되죠.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뭐냐? 무저갱에서 잠시 탈출했던 수많은 귀신들. 귀신들의 특징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필리핀이든 미국이든 관계없이 귀신은 다 있어요. 귀신은 다 있다고요.

그런데 자기가 경찰 근무 끝나고 사복 입고 있는데 돈 찾는 데서 우연히 본 어떤 할아버지가 보이스 피싱 걸린 거 같아요. 전화 받으면서 하고 있더란 말이죠. 스피커폰으로 크게 해서 다 들렸단 말이죠. 그래서 ‘할아버지, 그거 보이스 피싱입니다.’ 그만 두라 하니까 할아버지 하는 말이 지금 나한테 전화한 사람이 경찰이라는 거예요. 경찰. 보이스 피싱이 누굴 사칭하고 있죠? 경찰을 사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귀신, 다시 말해 마귀입니다, 마귀가 누굴 사칭하겠어요? 마귀가 바로 귀신을 사칭한다니까요. 마귀가 예수님을 사칭하는 게 아니고 귀신을 사칭해요. 귀신. 마귀가 이게 귀신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귀신인 것을 감추는 방법으로 이게 귀신이라는 거예요. 볼펜 들고 사바사바사바 이게 귀신이고 무당들이 굿하는 게 귀신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정치꾼들은 귀신 아닙니까.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귀신들의 특징은 모든 인간 속을 다 지배하고 있죠. 어떤 원칙으로? 선악원리로 다 지배하고 있죠. 누가 그 짓 했어요? 귀신이 그 짓 한 거예요. 귀신들린 자와 귀신 안 들린 자를 귀신이 구별했다고요. 아, 진짜 귀신답죠. 귀신이 지혜로워요. 자기가 귀신 아닌 걸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귀신을 따로 만들어요. 모가지 확 돌아가고요. 게거품 물고.

진짜 귀신은 바리새인, 사두개인인데. 마귀 자식은 거기 있는데. 심지어 세례 요한도 알았어요.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회개해? 너희들이 회개하면 돌멩이가 회개하겠다. 어디 너희들이 와서…” 그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중 단 한 명도 세례 요한한테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어요. 받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이 이런 이야기했다고요.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본인도 예수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혹시 메시아가 당신 맞습니까?” 이런다고요. 분명히 세례 줄 때 같이 물에 들어가 놓고, ‘오히려 내가 당신한테 세례 받아야 됩니다.’ 큰소리 쳐놓고, 자기가 옥에 갇히고 난 뒤에 예수님이 있다 하는데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지, 자기는 유황불 떨어진다고 알고 있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니까 “혹시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됩니까?” 라고 이야기했다고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세례 요한은 구약 사람입니다.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시공간을 넘나들지 못해요. 시공간성이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이걸 과도기라 합니다. 시공간성을 통해서 성령이 와버리면 시공간성을 통해서 그다음 ‘예수 안’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그 중간 단계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이 있었던 거예요.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됩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이렇게 물어요. 아직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이기 때문에 시공간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몰라요. 십자가 사건이 전체를 이미 다 덮어버렸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사건 되기 위해서 귀신들을 하나님이 풀어놨다는 사실도 몰라요. 무저갱 열쇠 열어서. 그래야 나쁜 고기, 염소, 지옥 갈 사람들이 많이 생성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가짜 있잖아요, 가짜 성도들. 귀신이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서 가짜 성도들로 하여금 그 가짜를 다 티내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을 아주 철저하게 완벽하게 해요. 하나라도 천국 오지 못할 사람들을 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 그렇다면 귀신들린 우리가 어떻게 이겨내는가? 성경은 누가복음 2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되죠. 귀신을 우리가 이긴다? 말 돼요, 안 돼요? 안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죠. 그러면 이 사람이 마귀를 이깁니까? 아닙니다. 그 뒤에 뭐가 와야 돼요?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이 그 위에 계셔요. 성령이. 성령이 주선을 해줘야 돼요. 이건 세례 요한 아버지도 마찬가지고요. 사가랴도 마찬가지로 성령이 있어야 돼요.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에요. 세례 요한의 엄마 엘리사벳도 성령이 임해서 출산을 해요. 세례 요한은 성령으로 출생한 게 아니지만 세례 요한 나올 때 성령이 와서 알려줬어요.

성령이 왔잖아요. 성령을 받게 되어버리면 드디어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28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리고 34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 예수님 중심으로 양은 양대로 지옥은 지옥 갈 사람들, 예수님 오셔서 주님에 의해서 그게 분류가 되는 일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므온이 이런 얘기할 때 시므온은 지금 시공간을 초월한 거예요. 예수님의 할 일을 시공간 초월해서 끝을 본 겁니다. 시작과 끝을 성령이 임해서 시므온은 알아버린 거예요. 시작과 끝을. 그러니까 세상을 더 안 살아도 되는 거예요. 이제는.

시작과 끝은 뭐다? ‘시작도 주님이 하셨고 끝도 주님이 하셨고 구원 받을 사람, 천국 갈 사람을 예수님이 다 정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이 사실이 성령을 통해서 시므온 내부 속에 빈 통속에 들어가 버리니까 시므온 자체가 자기가 구원의 징조가 되는 겁니다. 증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35절에 봅시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전에 귀신이 들어왔던 그 귀신의 장소에 주님의 영이 들어와서 주의 생각, 주의 마음이 들어와서 쪼개는 거예요, 이제는. 내 속에 이런 게 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이, 예수님이 주신 다 이루심이 내재되어 있고 포함되어 있는, 다 이루심이라는 내용으로 꽉 차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거예요. 어떤 성경말씀이든. 들어오게 되면 인간들은 그 내막이 다 노출되고 파헤쳐지는 겁니다.

그다음에 37절 보면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그다음에 나온 이야기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모든 인간이 율법을 행해야할 것을 아기 예수 혼자서 그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실 분이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 아셀 지파 안나라는 선지자에게 이걸 알게 해준 겁니다.

그러니까 시므온과 안나가 오늘날 성령을 받은 우리한테 해당되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에게도 같이 해당되는 겁니다. ‘시공간이 성령에 의해 새롭게 다루어짐을 이제는 파악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미 시간과 공간 초월했죠. 십자가 못 박힌 곳은 골고다 언덕이잖아요. 그때 사도 바울은 어디 가있었습니까? 다른 데 엉뚱한 데 있었어요. 공간을 초월한 거예요. 그때 그 십자가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 속에 귀신이 들어온 것처럼 다 이루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p.77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곧 과거에 발생된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성도 안에서 현재화하여 계속되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님과 만나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가능하다. 다른 만남의 장소는 전혀 없다.】성도가 예수님과 만나는 것은 십자가 일어난 사건의 현장에 의하여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목사님, 내가 진짜 성도인지 성도 아닌지, 구원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십자가 사건이 우리 안에 연속되면 됩니다. 그럼 십자가 사건이 뭡니까? 방금 설명해드렸듯이 십자가 사건이란, 시+공간, 시공간을 전부다 초월한 안목을 갖는 거예요. 이게 더 어렵네요.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예수 믿어라’가 안 되는 이유가, 예수 믿으면 내가 믿잖아요. 그러면 내 존재 따로 예수님 존재가 따로 되어버리면 결국 내가 예수 믿어줘서 내가 구원받으니까 주인공은 내가 되어버려요. 내가 잘난 사람 된다고요. 주님보고 잘났다고 아무리 해줘도 그 잘난 걸 믿어줬으니까 내가 예수님보다 더 잘난 사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사건이 아니고 존재에요.

사건은 뭐냐? 내 이 존재가 죽는 사건이에요. 무슨 사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혼자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 존재를 여기 십자가 사건에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으면 십자가 사건은 나만 죽는 것도 아니고 주님만 죽는 것도 아니고 주님과 내가 함께 죽은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게 율법의 완성인데 죽은 사건이 되어버리면 나는 그다음부터는 죽음 사건이라는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거예요. 사건이 있는 공간에 새로 함께 있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이걸 어떻게 확인하느냐? 확인방법도 주님이 알아서 해요. 인간들이 있잖아요, 시공간 밑에. 전체를 덮고 있는 큰 뚜껑은 있지만. 여기 풀어놓은 귀신이 들어오죠. 귀신은 그냥 집단으로 움직여요. 그냥 들락날락 자기 집이에요. 귀신 들어오죠.

자, 여러분 공부한 것 한번 해봅시다. 귀신 들어온다. 귀신 들어오면 무슨 원리가 들어온다 했어요? 선악원리.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선악지식이 같이 들어오죠. 같이 들어오면 네가 악을 버리고 선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죠. 아주 강력한 압박이에요. 이거는 이민가고 도망쳐도 안돼요. 강력한 압박이 들어와요.

인간은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니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본다고요. 미래의 내가 잘 살아남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과거에 내가 아는 원리가 내 안에 축적되어야 돼요. 내가 선과 악 중에서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한 성과로 내가 채우겠죠.

그럼 이 자아가 드디어 단단해지겠죠. 이걸 자기 의라 하는데 자기 의가 다져졌잖아요. 이게 있으면 나중에 하나님이 심판오더라도 하나님은 할 말이 없을 거야. 왜? 내가 워낙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교회에 충성을 했는데, 이게 있겠죠. 내가 자식들 얼마나 잘 키웠는데, 이게 있겠죠. 이웃 간에 나한테 싫은 소리한 사람 못 봤다, 이런 거요. 지금은 몸이 늙어서 그렇지만 나름대로 얼마나 훌륭했는데, 이런 게 있단 말이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뭐가 들어와서 그렇습니까? 귀신. 그것도 한 마리에요, 두 마리에요? 아예 군대 귀신이 들어왔던 거예요, 군대 귀신. 이게 딱 장착되고 난 뒤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 흘렸죠. 그럼 피와 죄의 만남에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게 지금 바로 현재가 십자가 사건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몰고 다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일이 주님의 허락 안에서 주께서 원하는 자 천국, 주께서 원하지 않는 자 지옥 보내는 그 작업에 저희들이 가담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의 일이 이제는 우리의 일이 된 것을 더더구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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