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하나님 자체 시험

아빠와 함께 2023. 12. 27. 08:26

대전-신명기(18강) 신8:16(하나님 자체 시험) 20231226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8장 16절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6.  "In the wilderness He fed you manna which your fathers did not know, that He might humble you and that He might test you, to do good for you in the end.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 중요한 단어 하나, 둘, 셋, 네 개가 나옵니다. 첫째 단어는 ‘만나’. 이 세상에서, 공장에서 못 만들어 내는 거예요.

공장에서 못 만들어낸다는 말은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 그 무엇, 사람들이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때는 자기들이 필요해서 만드는 거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공장에서 만나라는 것을 안 만들었다는 말은 사람들이 이 만나를 필요로 한다?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전혀 필요 없는 거예요.

필요 없는데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만나라는 음식을 하나님이 줬다는 것은 이게 누구한테 필요하다는 말이죠? 사람에게 필요하다? 아니죠. 누구한테 필요합니까? 하나님에게 필요하다. 하나님에게 필요해서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만나를 주신 분은 하나님, 만나를 받아먹는 쪽은 누구? 인간, 이스라엘 쪽이죠.

그러니까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게 필요하지 않은데,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필요해서 만나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면, 그 만나를 먹고 마실 때마다 사람들은 만나에다가 “이게 뭐지?”하고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예상 안한 거니까, 기대 안한 거니까. 그래서 이름이 뭐냐? 만나예요. 만나의 뜻이 뭐냐 하면,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뜻이에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딱 줄이면 만나가 돼요. 영어로 하면 더 줄여져요. What? 뭐야? 쉽게 말해서 ‘뭐야 이거?’ 이거 왜 주지? 현재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만나 먹었습니까? 아니면 다른 음식 먹었어요? 애굽에서는 사람들이 필요한 음식을 먹어왔는데 광야에서는 사람들이 원하고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이 완전히 차단되었어요.

차단되고 뭔가 먹을 거 같은데 생전 보지도 못한 음식을 인간에게 주는 거예요. 자, 그러면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빈 통이라 봅시다. 빈 통인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뭘 내렸습니까? 하늘에서 새벽에 가면 만나라는 게 하나의 과자 종류 이것이 지면에 떨어져 있어요. 광야에.

이것을 인간들이 먹는다는 말은 인간의 내부에 만나를 쑤셔 넣는다, 채운다, 빈 통에 뭐가 들어오죠. 들어오게 되면, 만나가 계속해서 들어오겠죠. 자, 여러분들이 이야기 해보세요. 인간 이스라엘 사람 속에 만나를 집어넣고자 하는 하나님이 기대하는 효과가 뭐겠습니까? 어떤 효과를 노립니까? 1번, 배부르냐? 2번 맛있냐? 뭐 어떤 거예요?

어떤 효과를 노리고 만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6절에 나오죠.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 그 다음에 무슨 효과입니까? 거기 글자 나와 있죠. 뭐라고 되어있죠? “너를 낮추시며” 마음을 낮추시는 거예요. ‘마음을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사’ 그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테스트, 시험이라는 것은 테스트 하는 거예요. 마음을 낮췄는지 안 낮췄는지 테스트하는 용도로서 뭐가 들어온다? 하나님께는 필요하고, 인간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한평생 살아온 걸 뒤돌아보세요.

우리의 한평생 살아온 생각과 모든 것들이 우리 내부에 남아있을까요, 떠났을까요? 완전히 그대로 다 남아있죠. 그걸 가지고 ‘기억’이라 합니다. 인간 속에 평생 살아왔던 것을 다 기억해요. 그래서 과거 이야기가 입에서 줄줄 나와요. 속에 있는 생각이 바깥에 나올 때는 말을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의사들이 진단할 때, 환자를 만날 때 특히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뭘 들어요? 환자가 말하는 말을 들어요. 말을 들으면서 병을 진단합니다. 일반 사람이 볼 때는 횡설수설하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정신과 의사는 횡설수설하는 가운데서 이 사람이 무슨 병에 걸렸는가를 파악해내요.

연세 많아서 치매 걸리면 치매 걸렸다는 것을 자식들이 언제 제일 빨리 눈치를 챕니까? 말이 앞뒤가 안맞죠. 횡설수설하죠. 이건 뭐냐 말 따로, 자기의 말을 관리하는 정신력 따로. 정신력이 헐거워진 겁니다. 정신력이 헐거워졌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기억된 단어와 문장들은 정신력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제 맘대로 날개 치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날개 치면서.

그래 놓고 하는 말이 “내가 언제 그런 말 했냐?”는 거예요. 내가 언제 그런 말 했는데? 다시 말해서 전에는 자아가 무슨 권한을 가졌다? 언어 통제권을 가졌다. 그런데, 이 자아 자체가 허무적이거든요. 내 머릿속의 정신, 두뇌 속에 담겨있는 이 기억과 자아가 예전에는 일치,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자아가 헐거워진 거예요. 통제 불가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사람이 행동하는 것은 누구의 지시를 받습니까? 두뇌의 기억의 지시를 받아요. 어린 애들은 하나하나 가르쳐야 되지만, 어른들은 쉽게 배우는 이유가 그만큼 해왔기 때문이에요. 해온 패턴이 우리 속에 기억으로 딱 고정되어 있거든요. 무심코 행동하잖아요, 무심코.

젊을 때는 무심코 행동해도 자아가 내가 했다, 내가 했다, 통제가 되는데 연세 많으면 무심코 행동해놓고 “내가 언제 그랬지? 내가 언제? 너 나 모함하지마. 난 그런 일 없어.” “결과 나오잖아요, 결과가. 엄마 보세요. 엄마가 헸잖아요.” “야야, 정신도 없다, 야야, 내가 우짜겠노 이래가? 내가 이래가 살면 머하노? 내 같은 거.”

갑자기 그걸 보고 자아가 거두어들이는 거예요. “나 빨리 죽는 게 낫겠지, 그치?” 갑자기 겸손모드로 하면서 마음을 낮춰요. 마음을 낮춘다고요. 마음을 낮추는 이유가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천국에 못가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는데요,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 자체가 내가 살던 인간에서 이게 바뀌어져야 돼요. 어느 쪽에 적합하도록?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게 어디에 적합하냐하면, 땅에 적합한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단 말이에요. 그러면 천국 갈 때는 그냥 방치할 수가 없어요. 이걸 뭐로 바꿔야 돼요? 천국에 살 만한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되거든요.

뭘로 바뀌어 진다? 마음을 낮추는 인간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러면 마음을 낮출 때 누구 앞에서 낮춥니까? 1번 대통령, 2번 어른, 3번 타인, 4번 하나님. 누구 앞에 마음을 낮춰야 돼요?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마음 낮추는 것은 이 땅에서의 원칙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돈 주는 사람, 대단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한 체 하는 것, 나를 부양해주고, 나를 돌보는 자식들한테는 갑자기 잘 해주다가 없으면 다른 사람 오게 되면 막 욕하고 하는 이게 인간이 그동안 하나의 처세술이었고, 내가 내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기 위해서 터득한 하나의 테크닉이에요.

현재 나한테 도움 주는 사람한테는 아무 소리 못하고 있다가 나한테 더 도움 준다는 사람 있으면 돌변해서 그 사람한테 아부함으로써 난 당신 편이지, 저 쪽은 이미 난 배신했다는 자기의 과도한 의사표현, 이런 것들이 이 땅의 삶이에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한테는 통하겠어요, 안 통하겠어요? 안통하게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는 것은 그동안 네가 너무 사람하고만 살았다. 그래가지고 천국 가겠어? 안되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하고 같이 동행하는 법, 사는 법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는가를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것을 사람이 못하고 누가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테스트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셔서 마음을 낮추는 겁니다. 자, 그 다음 문제, 그러면 만나를 줬다고 해서 마음이 낮아질까요? “예, 고맙습니다. 아, 대단히 고맙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는데 잘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면 이게 마음 낮추는 거예요? 그건 하나의 예의죠.

누구나 예상 못한 선물 주면 ‘고맙습니다.’ 할 수 있어요.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한테 마음 뺏기고 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우리의 마음이 아니죠. 자,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뭐가 장착돼있다 했어요? 자아죠, 나죠, 나. 자아란 말은 쉽게 말해서 나예요. 인간은 나한테 매여 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나한테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그걸 누구한테 함부로 빼앗긴다고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그 사람 앞에서 내가 갖고 있는 나, 내가 나를 쉽게 포기한다? 아니. 인간은 그렇게 마음이 낮아지지 않아요.

인간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나는 나를 붙들고 가요. 양보 못합니다. 자식이고, 부모고, 형제고 뭐고 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온리 나, 나뿐입니다.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없어요.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가 가사는 그 가사가 아니지만, 우리는 평소에 노는 부류가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예요.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다?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네? 그런데 마음을 낮춰요? 이건 어림도 없죠. 이미 귀한 것은 나로서 이미 꽉 차있는데 이걸 어떻게 파쇄해요? 이걸 어떻게 부숩니까? 누가 잘 해준다고? 아이고, 우리 마음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잘 해준다고 예의상 표현은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죠.

주께서는 이래가지고는 어디 못 간다? 천국에 탈락입니다. 천국에 못가고 이건 어디 합격이냐? 딱 지옥이에요. 딱 지옥에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그냥 두고 보고 있지 않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사랑이란,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너, 간섭하는 건 좋은데 여기까지 선은 지켜줘. 더 들어오면 나 가만 안 있을 거야.” 이게 인간들이 자아를 지키는 방식입니다. “내가 많이 양보해 준거야. 그래, 가족이니까 이 정도 해주는 건데 더 들어오면 나 가만 안 있어. 가족 아니라 뭐라도 그건 내가 차버릴 거야 하나님이라도 차버릴 거야.”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합니까?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이니까, 인간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한테 어떤 방어선을 치고, 더 들어오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더 들어오면 화낼 거야, 가만 두지 않아.” 그래서 젊을 때는 참 좋은 엄마아빠였어요. 그런데 나이 들게 되면 자식들이 나이 든 엄마아빠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뭐냐 하면, “지금 엄마 모습 보니까 내가 알던 엄마 아니야. 엄마는 그렇게 이기적이지 않았고, 자식이라면 무조건 퍼줬던 엄만데 엄마가 왜 그리 달라졌어? 엄마는 지금 엄마밖에 몰라. 짐승 같아, 엄마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만, 엄마 괴물 같아. 엄마가 왜 이리 됐어?” 그 엄마가 하는 소리는 “네가 나이 들어봐라. 너는 내 욕할 생각만 하지, 네 자신이 그렇게 되가는 걸 몰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사랑하는 척은 있는데 뭐가 없어요? 사랑이 없어요. 누가 방해해요? 누가 방해합니까? 자아가 방해해요. 이미 내 사랑은 굳어졌어요. 나는 누구만 사랑한다? 꽂힌다? 궁극적으로. 나만 사랑하기로 이미 확정되고 굳어진 입장에서 베풀어줄 수 있고, 동정할 수 있고, 눈물 흘려줄 수는 있지만 나까지 포기할 마음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걸 누가 아시는가? 이걸 하나님께서 아셔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사랑이란, 뭐라 했습니까?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거예요. 이걸 사랑, 성경에서 다른 말로 긍휼이라고 해요, 긍휼. 어려운 말이죠. 쉽게 풀이하면 ‘불쌍히 보시는 것’, “아이고 이 짜슥아.” 이런 식으로.

“아이고 네 형편 네가 어쩔 수가 없지. 너도 네 마음대로 안 되지? 아이고 이 가련한 존재야, 내가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찾아와 줄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함으로써 사랑의 표적지를 만든 거예요. 표적지를. 마음 같으면 여러분한테 티셔츠를 하나씩 나눠주고 싶어요.

티셔츠 가슴에 어떤 디자인을 넣느냐 하면, 올림픽 양궁 표적지가 있는 티셔츠, 동심원의 정 가운데가 10점, 밖으로 가면서 9점, 8점, 7점 이렇게 나와 있죠. 이 티셔츠를 여러분이 하나씩 입고, 10점 정중앙이 주님의 사랑의 표적이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어디에 가도, 청주를 가든, 서산을 가든, 서울을 가든, 대구에 살든 관계없이 주님께서 사랑을 할 때 표적지를 우리에게 걸어두고 사랑의 화살로 쏴버린다고 해봅시다.

사랑의 화살 하면 생각나는 유명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죠. 큐피트 신화. 제우스의 아들이 아폴론인데 큐피트가 조그마한 활을 갖고 노니까 아폴론이 놀렸어요. 놀리니까 큐피트가 약이 올라서 아폴론에게 화살을 쏘았어요. 사랑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금화살을 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아폴론이 다프네라는 강의 신의 딸을 사랑하는데, 완전 스토커처럼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큐피트가 굉장히 재밌어하면서 거기다가 심술을 더했어요. 아폴론의 사랑의 대상인 다프네에게 납화살을 쏘아버렸어요. 황금은 사랑에 빠지게 하는 화살인데, 납화살은 사랑 받으면 받을수록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게 하는 거예요. 막 도망치는 거예요. 그러니 둘 사이에 사랑이 맺어질 수가 없죠. 한 쪽은 미치도록 사랑하고, 한 쪽은 미치도록 싫어지고.

그러면서 다프네의 소원이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월계수가 되게 해달라’ 그래서 월계수가 나왔다고 합니다. 차라리 인간이 되지 말고 하나의 나무, 꽃이 되면 좋겠다. 신화이야기입니다. 성경이야기 아니에요. 신화 이야기는 인간들끼리의 세계에서 인간들의 사랑을, 사랑의 원천을 나름대로 어딘지를 궁금해 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신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두고 보지 않습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시험’을 이야기할 때 이제부터 좀 어려워도 참으세요.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랑은 뭐라고요? 그냥 두고 보지 않죠. 그런데 인간 대 인간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한다 할 때, 남자가 보기에 여자가 좋긴 좋은데, 자기 기억과 여자가 살아온 기억이 다르게 때문에 자꾸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들죠.

사람이 말을 할 때,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기억에서 나오죠. 기억에서 나오는데, 상대방에게 축적된 기억과 내 기억이 다르니까 고치고 싶은 거예요. 사랑하는데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자꾸 눈에 띄는 겁니다. 이건 여자 쪽에서도 마찬가지고, 남자 쪽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좋아서 하는 게 결혼이죠. 부부가 되죠.

부부가 되면 그 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연애할 때는 상대방을 놓칠까 싶어서 약간의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부부가 되고 나서는 법적으로 한 호적이 되면, 갈라서려면 돈 문제가 생겨요. 돈이 아까워서..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상대에 대해서 험담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좀 배운 집안, 교육 수준이 좀 되는, 자칭 교양으로 무장돼 있다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조언은 하되 상대방의 기분은 안 다치게 하는 쪽으로 하지요. 안 다치는 쪽으로 말을 조심해서 하지요. 조심한다고요. 자, 제가 묻습니다. 그게 사랑입니까? 그게 사랑이에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사랑입니까?

상대방 배려하는 겁니까, 자기 배려하는 겁니까? 도대체 어느 쪽이에요? 자기 배려죠. “아, 입이 근질거린다. 고치라고 말하고 싶은데..아..” 근데 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너나 잘하세요.” 이렇게 나올 게 뻔하니까 조심하죠. “그래, 내가 멈춰야지.” 이렇게 되지요. 사랑이란,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왜? 말을 해버리면 상처를 입으니까.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을 안하죠.)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두고 보지 않는데,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냥 어느 선에서 두고 봐요. 그게 뭐냐 하면, 주저하는 거예요. 주저하는 거. “아, 참아야지.” 이런 거 있잖아요. “아, 미치겠네. 내가 참아야지.” 이런 게 주저하는 거죠. 주저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주저하는 것. 이게 인간으로서 소위 교양 있다, 배웠다 할수록 점점 더 힘들어요.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게 힘들어요. “아이, 난 몰라 그냥 있을래.” 이러면서 자기 조정에 들어가는 거죠. “내가 나쁘나? 지가 나쁘지.” 이런 식으로요. 다시 말해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들 가운데서 사랑 있다, 없다? 어떤 사랑도 없어요.

주저하는 것도 누구를 위함이다? 천하의 사랑의 대상인 나를, 나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몸짓이죠. 몸짓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해답에 도달했어요. 하나님이 시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시험한다, 테스트한다. 시험이라 하는 것은 내가 타인을 테스트 하는 거예요.

목적은 뭐냐? 목적은 내 생각과 일치되기 위해서 테스트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니까 어디 갑니까? 지옥 가지요. 지옥 가는 인간을 지금 뭐로 바꿔야 돼요? 천국에서 살만한 사람으로 바꿔야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지옥에 가야 되는데 천국 가려면 필히 뭐가 투입되어야 됩니까? 하나님의 테스트가 들어와야 되지요.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인간이 천국 가려면 마음을 낮추어야 되는데, 낮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과 합치되는 마음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고요, 들어가도 못 살아요. 마음이 안 맞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같이 살아요? 나는 내 위주인데 하나님은 누구 위주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위주잖아요. 맞을 리가 있어요?

맞을 리가 없는데 뭐 장례식에 가면 교회 다니고, 성당 다녔다 해서 이 분 천국 갈 거라고..누구 마음대로 천국 가요? 못가요. 마음이 다른데 어떻게 가요? 여러분 마음 안 맞는 사람 집에 갈 생각이 들어요? 마음이 안 맞으면 내가 불편해서 못가잖아요. 명절날 시갓집이든 친정이든 가는 것은 우리 이렇게 재미나게 산다고 자랑질 하러 가는 거예요.

인간은 자랑할 게 없으면 어떤 모임이든 안갑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자기 자아가 우상인데, 자아에 흠집 나는 짓을 지가 알아서 왜 합니까? 근사하게 보이려는 게 인간의 버릇인데 지가 스스로 흠집 내는 그런 바보 짓은 안하지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 단도리에 철두철미합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지금 틀리잖아요.

그러니 그 틀리다는 말을 전제로 해서 인간의 생각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달라요. 다른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걸 그냥 지켜보는 게 아니고 주제넘게 드디어 우리 인간 속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침투해 들어와서 애굽에서 먹던 양식을 찾는 그들에게 그거 치우고, 그 이스라엘 몸통에다가 뭐를 쑤셔 넣습니까? 만나를 쑤셔 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먹게 되니까 이름을 뭐라 지었어요? 이게 뭐야? 이게 왜 들어오지? 만나를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뭐라 하셨냐 하면, 만나를 예수님 자신의 몸이라 했어요. “광야에서 만나 먹어도 죽었잖아. 이제는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는 네가 살리라.”

산다는 말은 생명나무 있는 곳에 네가 들어갈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천국 가려면

주님 주신 만나를 먹어야 되겠죠.

그 만나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주님의 테스트가 들어있는 거예요. 만나 먹을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테스트해주는 거예요.

그 테스트 내용이 뭐냐? 네 현재 형편과 천국에서 요구하는 인간상과 지금 맞지가 않다.

지금 완전히 벌어져있다. 그러니까 내 테스트를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테스트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냥 두기에 너무 가련해서 그냥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주저하지 않고 그냥 들어오시는 거예요. 우리는 자기 체면 차린다고 주저하지만 주께서는 가련한 것, 불쌍한 것, 지옥 가는 게 불쌍해서 그냥 치고 들어오는 게 사랑입니다.

테스트를 하시는데, 이 테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겠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빨간 걸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이 하나님 테스트. 두 번째, 하나님이 인간 테스트. 이 둘 다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광야입니다. 성도가 천국 가는 이유는 아버지께 받은 예수님의 테스트가 아버지께 수용이 됐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테스트를 했는데 예수님이 합격, 아들이신 예수님이 합격하신 그 여파로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테스트에 통과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시험 치는데 성적 좋아서, 내가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 빼놓고, 나 빼놓고요. 내 대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납득이 되면, 그 사실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통과하셨구나.’라는 새로운 내용이 만나처럼, 나 말고, 새로운 내용이 나에게 들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만나가 뭐라 했습니까? 만나 뜻이 뭐라 했어요? ‘무엇’이죠. 만나는 내가 했습니까, 아니면 내가 안한 거예요? 내가 안했죠. 내가 안한 것이 내 속에 쑤시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안했는데 천국 간다. 그럼 누가 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하셨잖아요. 예수님이 하시면 뭐합니까? 아버지한테 거부당하면 끝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죠. 이 세상에 부활한 사람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은 합격시켜 준 거죠.

합격됐다는 소식이 우리한테 “이것이 무엇이냐?” 새롭게 우리 속에 쑤시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 자체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전에는 우리한테 뭐가 있었다? 나는 누굴 사랑했다? 나는 나를 사랑했죠. 내 사랑에 뭐가 섞여 들어오게 된 거예요?

내가 내 사랑 하든 말든 그 보다 더 센 사랑, 하나님이 나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내 속에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서 아들 보내기만 한 게 아니고, 아들 하신 일이 합격이 된 거예요. 통과가 된 거예요. 이미 다 이루었다, 통과가 된 소식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것이 다 시덥지 않은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일로 느껴지는 것, 이걸 오늘 본문에서 ‘복’이라 하는 거예요. 이런 상태를.

전에는 내 안에 나만 있었잖아요. 나만 있었는데 복을 받고 보니까 내 안에 누가 있어요? 하나님의 소식이, 다 이루었다는 소식이 내가 있던 자리를 대신 빼앗아서 차지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주께서 표적에 화살을 정중앙 10점에다 사랑의 화살을 쏘아버리는 거예요. 쏠 때 나는 소리가 뭐예요? 슈슈슉~슈슈슉~ 매일 같이 슈슈슉 쏘는 거예요.

나는 내 허접함과 어설픔이 노출되면서 “진짜 내가 나로 말미암아 내가 망할 뻔 했구나, 내가 나를 지옥으로 보냈구나.”라는 사실, 그걸 전라도 말로 “우째쓰까?” 내가 왜 그렇게 살았나? 내가 성당 다니고, 교회 다니고 그래서 천당 가는 줄 알았지. 이거 우째쓰까, 우째쓰까. 그게 다 내 자랑인데..내 기억 속에 있잖아요. 나 이만큼 훌륭하다는 거 다 기억 속에 있잖아요.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하나님을 테스트 한 것이 출애굽기 17장에 나옵니다. 17장 7절 “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아멘. 맛사라는 뜻은 테스트하다 라는 뜻이고, 므리바라 하는 것은 충돌했다, 다투었다, 싸웠다는 뜻이에요. 같은 지명인데 이름이 두 개예요.

두 개인데, 그 지명이 ‘하나님 뜻과 내 뜻이 같지 않다’가 티가 나버린 사건이에요. 므리바라, 싸웠다 다투었다. 같이 광야 길을 가면서 마음이 안 맞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들추어내는 장소가 바로 맛사, 같은 말로 므리바. 왜 충돌이 일어났던가? 그것을 맛사,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테스트한 거예요. 시험한 거예요. 하나님이 내 편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버렸는지 그걸 테스트하는 문제지를 인간 쪽에서 만들어낸 겁니다, 인간 쪽에서. 출제자가 인간이었어요. 테스트한 게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테스트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테스트하는 그 대상, 그게 누구냐, 제일 먼저 테스트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테스트를 했어요. 그 테스트의 문제가 뭐냐 하면, “너에게 아들이 있지?” “네, 아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냐?” ”사랑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냐?“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그래? 누구보다?“ ”나보다 내 아들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말을 네가 듣는지 한번 너를 테스트 해보겠다. 너보다 사랑하는 네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제단 위에다가 그걸 제물로 나한테 불에다가 홀라당 태워서 나한테 바쳐라. 그러기 위해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해서 가지요.

아브라함이 길을 나섭니다. 참, 아브라함도 대단한 아버지예요. 왜냐 하면, ‘이건 환상이야, 환청일 거야. 내가 이비인후과를 가 봐야돼. 이건 말이 안돼. 설마 하나님이 주셨는데 하나님이 빼앗아갈 리는 없어. 이건 뭔가 마귀가 나한테 시험한 모양이야. 어어어, 나 안들었다.” 라고 무시해도 되는데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해요.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리고 장작을 준비해요. 그 장작이 무거우니까 죽어야 될 아들의 등짝에 얹어서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아들이 자꾸 물어요. “ 아버지, 우리 지금 번제, 불태워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거 맞지요? 근데 불쏘시개는 갖고 가는데 제물은 왜 안가져 가십니까?” 아버지가 “현장에서 주실 거야, 현장에서” 여러분 이게 창세기 22장이죠.

왜 이 이야기가 테스트가 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테스트를 합니까? 테스트를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인간의 한계 바깥에 무엇이 있느냐?> 강의 처음에 얘기했죠. 만나라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다 했어요? 하나님께 필요하다 했어요? 하나님께 필요하죠.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은 자기가 착실하게 얻어내요. 심지어 인간이 하나님을 테스트한다는 말은 인간에게 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예요. 인간에게는 뭐가 필요하다? 아는 사람은 빨리 이야기하세요. 인간에게는 뭐가 필요합니까?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한 거예요.

왜? 인간은 죽고 난 뒤에 어디 가느냐? 좋은 데 가야지요. 인간에게는 종교가 필요한 거예요. 기독교, 천주교 이런 게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간들은 이것이 내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 이게 하나님의 마음과 합치될까요, 다를까요? 이게 다른 거예요.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마귀죠. 마귀에요.

중요한 건, 천국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사랑의 화살을 슈슈슉 마음 속에 표적지로 삼아서 꽂은 사람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테스트의 대상자가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너! 왜냐하면 너가 있어야 내가 너한테 테스트 했다는 게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테스트 대상이 되는 자기 아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신약에 아들이 오시기 전에 구약에 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은 누구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인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테스트한 것을 지금 누구에게 그대로 반복시킨다? 이스라엘에게 반복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험하는 사람은 자기 아들밖에 없어요. 그 아들이 통과되게 되면, 그 아들에 속한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은 구원 받습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인간이 보기에는 굉장히 자기가 종교심이 많고, 하나님까지 챙겨주니까, 이건 뭐 시아버지 시어머니 챙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챙겨주니까 자기가 얼마나 의젓해 보이고, 실제로 하나님이 있다 할지라도 평소에 하나님을 챙긴 내 선한 모습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시비도 안 걸거라는 자신감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전체가 뭐라고요? 하나님과 합치되지 않는 엉터리 지옥 가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게 그 마음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시험했어요. “하나님, 나와 함께 가지요?”지금 모세가 선지자잖아요. 모세와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뜻이죠?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이제부터 과연 있는지 없는지 제가 테스트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먹을 게 없는데 먹을 것을 주시고, 물이 없는데 마실 생수를 주세요. 이거 주시면 진짜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제가 감사히 여기면서 하나님이 동행함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먼저 제사 드렸습니까? 가인이 먼저 제사 드렸습니까? 가인이 먼저 제사 드렸죠. 자, 가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죠. 가인에게는 하나님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먼저 제사를 드렸잖아요. 아벨에게도 하나님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벨도 제사 드렸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가인은 자기 살아있음이 하나님 살아있음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먼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이 누굽니까? 하나님입니까, 나입니까? 가인은 어느 쪽을 더 사랑해요? 하나님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지만 사랑의 대상은 자기에요.

그래서 가인이 질투를 한 겁니다. 왜 내 것을 안 받습니까? 그래서 누굴 죽여요? 동생 아벨을 죽이죠.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벨에게는 하나님이 살아있음을 합치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천국에 가서 같이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나‘라는 존재는 있어도 죽어야 될 존재인 것을 아벨이 인정하죠.

그게 바로 이 땅에 오셔서 죽었던 예수님이 아벨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테스트하고 난 뒤에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게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하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쳐들어와서 그 결과로 생긴 것이 사랑이니까,

그 사랑은 요한일서에 보면 그 사랑은 누구를 사랑하냐? 그 사랑은 누굴 사랑하는 게 아니고, 뭐가 사랑이냐? 사랑은 예수님이 사랑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주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주셨으니, 사랑은 여기 있으니, 뭐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 그게 사랑이에요.

(요일4: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죽었고, 부활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시험이 이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오게 되면 순서가 어떻게 돼요? 내 사랑이 우선이었던 것이 내 사랑은 뒤로 밀리고 어느 사랑이 우선이 됩니까? 하나님의 쳐들어온 사랑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우선이 될 때, 이걸 마음을 낮추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마음을 낮추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아무리 헌금하고,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아무리 뭘 해도 하나님은 그걸 안 받는다는 거예요. 안 받으면 너무 감격하는 거예요. 내가 주님께 드린 것을 안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한 거예요. 너무 감사한 거예요. 엄마가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줬는데, 선물 받은 애가 가만있을 수 없다 해서 어린 애가 제 용돈 벌어서 선물 사서 엄마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도로 갚아버리면 엄마 기분 더럽지요.

로마서 11장 보세요. 거기 복음 아는 사람만 아는 핵심이 나와요. 복음 아는 사람만 나와요. 11장 33절에서 35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34)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세상에, 주님께 뭘 갚아요? 주님 기분 더럽게.. 왜 갚아요, 그걸 주님께? 예? 인간은 자꾸 자기 자존심, 자기 의, ’나 아직 그렇게 안 망가졌습니다.‘라고 티를 내요. 인간은 자기 사랑 지키는 재미로 살아가요. ’제가 얼마나 대단하며, 훌륭하며, 내가 인생 어떻게 반듯하게 살았는가‘ 이거 안 놓치려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지만 사실은 타인에게 들어가는 걸 주저해요. 안 망가지려고. ’역시 나는 점잖은 사람이야‘ 이거 유지하려고. 참, 날마다 우리는 슈슈슉 주님 앞에 테스트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주님에 대한 생각보다 내 생각이 앞서냐? 내가 자꾸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벨은 살아도 죽은 자라는 사실을 오히려 반갑게 여깁니다.

왜냐 하면 내가 굳이 안살아도 주님이 살았으면 그걸로 오케이거든요. 바로 그렇게 마음을 ’살아서 뭐 착하게 하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나를 아예 없는 걸로 쳐주시는 것을 ’고맙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마음과 주님의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합치된 거예요. 일치된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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