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17강) 신6:10(추가 요인) 20231127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6장 10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라고 되어 있죠. 여기 보게 되면, 5장부터 6장까지 하나님의 법도, 십계명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경쟁이 됩니다. 경쟁 되는 것을 제가 한 번 적어 보면, 어느 쪽인지 대번에 알아맞힐 거예요. 하나님의 십계명이니까 율법이죠. 율법. 율법을 받는 것이 누구냐 하면 인간이죠. 둘 중에 하나님은 누구를 살리려고 하죠? 1번 율법, 2번 인간. 어느 쪽을 살리려고 하죠? 1번이죠. 율법을 살리는 거예요.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인간을 이미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죽은 것을 율법이 살 때, 그 율법이 사는 효과로 죽은 인간이 율법 살 때 같이 살게 하시는 거예요. 굉장히 쉽죠? 들으면 굉장히 쉬워요. 말씀이 삶으로써 덩달아 같이 사는 거예요. 내 살기 위해서 말씀 지키는 것은 있기? 없기? 그런 것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율법을 살리기 위해서 같이 결과로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데 나 살기 쪽으로 나가면 율법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고 뭐하냐 하면, 탈락을 시켜버립니다. 나가이~ 나가리 돼버립니다. “나가, 율법 살리는데 지장 있으니까 너 같은 장애 요소는 나가!”이렇게 됩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단호합니다.
로마서 11장 24절에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으로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이렇게 되어 있죠? 감람나무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감람나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하면, 감람나무였는데 어떻게 되었다? 찍혀서 날라 가는 게 있고, 또는 감람나무 바깥에 있었는데 접붙임을 당하는 장소가 어디냐 하면, 바로 찍힌 자리에 접붙임을 받는다는 거예요.
유대인이 날라 간 그 자리에 이방인이 들어가요. 지금 로마서 11장 사도바울의 설명이 그거예요. 나갈 것은 나가고 들어올 것은 들어온다는 게 아니고, 반드시 나가면서 남긴 게 있어야 돼요. 왜 찍혔는가? 왜 하나님의 구원 궤도에서 나가리 되었는가? 그걸 아는 이방인만이 거기서 도킹이 되는 거예요. 우주정거장에서 만남이 돼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찍혔습니까?
유대인들이 찍힌 이유가 로마서 9장 10장 11장 계속 나와요. 뭐냐 하면, 자기의 행함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의 행함. 자기의 행함 때문에 찍혔다는 이야기, 이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무엇의 재현이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과의 만남에서 늘 티격태격했던 그 주제예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 늘 유대인들의 불만이었고, 공격을 했던 이유는 ‘예수 당신이 하는 행위가 율법에 위반 된다‘는 겁니다.
안식일에 왜 노동 하냐? 이런 식이죠. 문자적으로 보면, 안식일에는 노동하지 마라 했는데 왜 너와 너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노동하느냐? 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느냐? 요한복음 5장에 38년 된 병자 이야기 있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안식일로 봤습니다. 거기에 대해 유대인들은 “세상에 그런 해석이 어디 있느냐? 왜 멀쩡한 우리 놔두고 네가 왜 안식일의 완성이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뭐라 하시냐면, “너희는 좀 이따 알아. 내가 하는 말을 내가 나중에 십자가 지고 부활하면 알아. 너희들은 이미 죽었고, 너희가 죽는 이유는 네 아비는 더러운 귀신이기 때문에, 네 아비는 악마이기 때문에 나한테 그렇게 닦달내고 덤벼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를 믿지 않는 것은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고,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가 시켜서 나를 못 믿게 만들었다.. 죄가 시켜서 나를 못 믿게 만들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신이 복음을 못 받아들이도록 강제로 인간들의 심령을 혼동하게 만들었다.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복음이 안 들어오면 어떻게 되죠? 중요한 질문입니다. 복음이 안 들어오면, 율법이 안 들어오면, 율법의 완성이 복음이니까 복음이 안 들어오면 어떻게 되죠? 복음이 안 들어올 경우에는? 지금 율법을 살리고, 인간은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잖아요. (인간은)살아 있은 적이 없다.
그런데 만약 복음이 안 들어오면 인간들은 자기를 어떤 존재로 봅니까? 그렇지요.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살아있다는 말은 더 나아가서 나는 나로부터 의로운 행위가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행위가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말씀이든 예수님의 말씀이든 어디를 봐도 죽은 인간이 행해봤자 가만 있으면 되는데, 괜히 행해가지고 뭐만 남발해요? 복음만 훼방할 뿐이에요. 왜? 자기는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방금 제 말에 대해서 동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이 없을 때는 혹은 복음이 없으면 죽어있다’하지만 이 성경공부 끝나고 집에 가서 생각해보세요.
집에 가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은 ’아, 나 힘들어. 나 믿을 게 나밖에 없잖아.“ 믿을 게 나밖에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건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일어나는 이야기예요. ”믿을 게 나밖에 없다“ 자식이고 친구고 다 소용없고 믿을 것은 누구밖에 없다? 부모도 믿을 거 없고, 친구도 믿을 거 없고, 믿을 건 나밖에 없다 할 때, 이 말에 어떤 공식이 있냐 하면, 그 믿음의 내용을 들킨 거예요.
아무리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는다고 해도 역시 사는 게 힘들고 어렵고 특히 몸 아플 때, ‘자식도 남편도 이거 뭐 짜증내고, 아픈 사람이 짜증내야지 왜 지가 짜증내고 있어? 나를 위로해줘야지?’ 이런 식으로 결국 나오는 푸념이 무슨 푸념입니까? ”아이고, 이 세상에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할 때에 평소에 뭘 믿고 왔다는 거예요? 나만 믿고 왔다는 거예요. 나만 믿고..
교회나 모임에 나와서 믿는다 하면 ‘예수 믿죠!’ 라고 큰 소리 쳤는데, 막상 일상으로 돌아 왔을 때 늘 우리의 마음 제일 바닥 층에 안 죽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은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그러면 예수 믿는 건 뭐냐? 내가 예수 믿어주니까 믿는 거다. 내가. ”내가 예수 믿어주니까 믿는 거다.“ 이러니 믿음이 선물이 아니고, 믿음 시작을 내가 했으니까 믿은 보상은 내가 챙겨야 당연하지..이런 생각이 계속해서 없어지지 않고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은 소위 살아있다고 우기는 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합이 돼요. 결합이 되면서 그들을 죽입니다. 죽어 마땅해서 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을 죽이지 아니하면 뭐가 죽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이 살지를 않아요. 언약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광야 길을 통해서 모조리 다 죽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오늘 신명기 6장 10절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 이라고 되어 있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맹세해서 땅을 준다 했거든요. 그렇다면, 땅 주겠다는 제안을 이스라엘 쪽에서 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쪽에서 제안한 거예요? 하나님이 제안한 거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제안한 그 땅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서 살았죠? 자기 땅이 있었죠. 비록 노예였지만, 애굽 땅이 있잖아요. 애굽 땅에서 그냥 살면 돼요. 여기서 나가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거기서 사는 히브리인들의 뜻이 아니었어요. 강제 이주 정책이었죠. 강제 이주.
간도나 만주에 살던 조선 사람을 러시아가 들어와 가지고 어디로 이주시켰습니까? 중앙아시아 쪽으로, 무슨 무슨 스탄 이름 붙는 쪽으로 강제 이주시켰잖아요. 거기 가서 많이 죽었죠? 사는 게 힘들어서. 오면서도 죽고 살면서도 많이 죽었어요. 본인 뜻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뭐냐.. 이번에도 질문을 할게요. 땅이 있다? 땅이 없다? 애굽에 사는 히브리인들에게 땅이 있다? 없다? 땅이 없는 거예요.
땅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땅이 필요치 않아요. 약속의 땅이 필요치 않단 말이죠. 그게 인간입니다. 이런 말은 어려워 보이지만 쉽게 하면 쉽게 표현할 수가 있어요.
바람 비 별 땅 // 성읍 성벽 도시 도로 도자기 식기 대장간의 쟁기
차이점은 대번에 아시겠죠? 둘 사이의 차이점이 뭘까요? 왼쪽은 자연물이고, 오른 쪽은 인공물이죠. 사람이 만든 거잖아요. 사람 사는 게 뭡니까? 자연 안에서 인간들이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서 같이 더불어 사는 것, 이게 인간의 삶이예요. 하나님이 주신 바람과 비와 별과 그리고 땅 위에서, 인간이 그냥 못사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지혜와 열성으로 땀으로 만들어낸 도자기 식기나 여러 가지 그릇, 옷 그리고 가마 이러한 인공물을 통해서 사는 것, 이게 인간 사는 거 아니에요? 이게 뭐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맞는 이야기죠.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에다가 무리한 것을 요구해요. 뭐냐 하면, 이렇게 살겠다는 여기에다 뭐라 하냐 하면, 이게 인간의 요소예요. 인간은 ‘이렇게 살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게 인간의 요소.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 율법을 통해서 뭘 요구하느냐 하면, ‘인간에게 나오는 요소 + 그 무엇’을 요구해요. 그 무엇을. 자연에 준 것하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기 위해 아등바등 살기 위해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 도구 요새 같으면 철학 과학 다 포함하고, 자동차 열차 로케트, 컴퓨터 이것 말고 추가적인 걸 요구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약을 줄 때, 여기에 바람 비 별 땅이 있죠. 히브리인들에게는 애굽 땅도 땅입니까? 아닙니까? 땅이죠.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추가적인 그 무엇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애굽 땅은 너희들이 거할 땅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땅인데 거기 살면 안돼. 거기 살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굽 땅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추가적인 물음표, 미지의 X 에 대해서 그들이 내놓을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놓을 능력이 없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약속의 땅은 누구 제안이냐 하면, 누구 아이디어냐 하면, 이건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아, 살기 힘들다. 어떤 땅 없을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어요. 모세와 아론 둘이 애굽 땅에 가서 자기 백성 보고 나가자고 하니까 나가지 않겠다고 한 게 그들의 중론이었어요. 합의된 여론이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힘들지만, 우리가 살 곳은 이 애굽 땅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 아론하고 모세하고 좀 하나님이 알아서 좀 죽여 달라.’ 왜냐하면 계속 들쑤셔가지고 그동안 애굽에 사는데 불편함이 없었는데 괜히 모세 아론이 차고 들어와서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인지 차고 들어와 가지고 단체로 이 히브리인들이 바로 왕 눈에 미운 털이 박힌 거예요. 밉상이 된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미운데 더 궁지에 몰린 거예요.
이민자가 사건 일으키면 어떻게 됩니까? 사회 여론이 비등해가지고 살기가 힘들겠죠? 본 나라 국민은 얻어맞으면 경찰이 와서 체포해 가는데 이민자가 얻어맞으면 체포도 안 해요. 해방 후에 조선 사람이 일본에 많이 살고 있었잖아요. 재일교포들 그들 일본사람한테 얻어맞으면 일본 경찰이 더 때리라고 있습니다. 보호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 원인을 찾겠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밉상이 되었는가? 그러니까 모세 아론이죠. 모세 아론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여호와죠. 여호와가 벌써부터 밉상거리가 된 거예요. 오늘 강의의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골치 아픈 논리보다도 결론부터. 결론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구원한다.> 같은 말인데요. <모든 것은, 또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자기 구원이다.>그래서 주의 이름만 구원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기 구원이에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자기구원. 인간은 들러리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묻습니다. “왜, 내 구원하는데 네가 띠꺼워? 기분 나빠?” 피조물 주제에 내가 내 영광 위해서 내 구원하겠다는데 그게 싫어? 싫으면 나가!“ 싫으면 돌감람나무에서 찍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싫은 게 아니고, 성도는 뭐냐? 뭐,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는 이것도 탈락이에요. 그럼 뭐라 합니까? “영광입니다.” 이게 주의 구원에 참여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거예요.
피조물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거예요. 지금 그 영광을 누가 아느냐? 하늘나라 천사들이 알고 있어요. 마귀 빼놓고. 천사들은 날개 여섯 개 가지고 너무나 그것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차마 얼굴은 보지 못하고 자기 몸을 가리면서까지 찬양을 멈추지 않아요. 김정은이 앞에서 찬양하는 것보다 더 심하죠. 멈추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그걸 봤잖아요. 그걸 보고 이사야가 하는 말이 그 현장에서 자기 자신을 ‘화로다 내가 망하는 백성 중에 하나로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 영광을 본 것도 참 진짜 행운이고 복이고 영광입니다. 자기가 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겠어요? 누가 가르쳐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만을 구원하는데 뭘 사용하는가? 인간을 사용하죠. 아까 +X는 +a(플러스 알파)라고 해도 괜찮아요. 인간의 요소 플러스 알파. 이걸 주께서는 우리한테 줍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신명기 6장 10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향한 맹세에요, 맹세.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했던 너희들을 내가 어떻게 한다? 내가 맹세해서 기어이 너희에게 또는 너희 후손에게 약속의 땅이라는 게 분명하게 있다는 사실을 너희 특별한 사랑을 받은 너희 민족에게만 내가 허락할게. 허락하는 거예요. 6장 12절 봅시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라고 되어 있죠. 종 죄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누가 요구한 적 있어요? 없어요! 그럼 뭐냐? 일방적인 하나님의 자기 생각이에요.
보통 물건 팔 때 안 사려고 하는데 억지로 사라고 하는 걸 강매라고 하죠. 우리는 강매당한 거예요.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데 우리 속에 복음 집어넣고.. 복음을 우리에게 강매하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복음 안 믿으면 너 죽어.” 이러는 거예요. 인간 말고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요소로써 우리 인간들을 질질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끼리 끌려가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곱게 간다? 원망한다? 어느 쪽입니까?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들은 살았다고 여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 인도하는데 ’우리가 이렇게 하면 살 수 있다.‘의 모든 아이디어를 전부다 없애는 쪽으로 인도해요. 그것을 들추어내고 지적하고 없애는 쪽으로. 그걸 ’새로운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새로운 환경이란, 언약이 이끄는 환경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두 가지 요소가 항상 둘 다를 보여줘요. 하나는, 네가 지금 살아가는 것이 너를 위한 환경이냐? 나 하나님을 위한 환경이냐?를 늘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물어요. 정답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에게 준 환경은 나를 위한 환경이 아니죠. 그런데 나를 위한 환경으로 가는데 여기서 원망이 일어나죠.
원망이 일어난다는 것은 끌려가면서 인간은 무엇에 고집을 부리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인생 환경이 100% 뭐냐? 나 잘되기 위해서 내가 행복하고 속편하게 살기 위해서 몸도 건강하고 마음 편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내 하루하루가 하나님 믿음으로 말미암아 잘 풀리는 그런 환경이기를 원하잖아요. 이게 있으니까 주님이 주신 환경에 대해서 뭐가 튀어나온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과 불만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원망과 불평과 불만이 튀어나오는 이것,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소위 성도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대처방법은 뭐냐?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대처방법은 뭐냐 이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가 미워. 하나님을 미워하는 그런 내가 미워.’ 이런 식이에요. 주님은 뭐라 하시냐 하면, ’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어요. 나를 좋아하라.
여러분 1번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가 미워.’ 2번 ‘하나님을 좋아해.’ 1번과 2번 같은 겁니까, 다른 겁니까? 다르죠. 1번은 뭡니까? 1번엔 뭐가 가미되어 있어요? 이상하게 억지스럽죠. 억지스러운 거예요.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참는다. 이렇게 되죠. 내가 워낙 믿음이 좋아서 참는다.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가 미워.‘하는 이 행동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종교적 활동이 나와요.
뭘 하느냐 하면, 기도를 하고, 금식 나오고 헌금 나오고 순종 나오고 선교 나오고 봉사 나오고 이런 게 나와요. 왜? 하나님을 원망하는 나를 내가 착한 행위로서 이걸 커버를 해야 되니까, 억지로 눌러야 되니까. ’주여, 잘못했습니다. 내가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내가 부족합니다.‘ 가슴 치면서..’우리 애가 이번에 수능 보니까 아무래도 신학교 보낼까요? 어쩌고 저쩌고 내가 이 정도로 헌신합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들이 뭐예요?
하나님을 좋아하지는 않고, 안좋아하면 짤린다는 것은 알고, 그 사이에서 제가 갈등을 느끼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뿐만이 아니에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죠?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했죠.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존중 안했습니까?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죠. 그래도 제사장인데요. 그저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런 식으로 평소에 살아왔잖아요. 그렇게 했지요. 그렇게 했는데 왜 이런 말씀이 있느냐? 2장 29절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그 다음에 큰소리로 같이 읽어보죠.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스톱! 스톱해야 돼요.
너 자식을, 딸도 아니고 아들이에요. 네 아들을 누구보다 중히 여겼다? 나보다 중히 여겼다.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아버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나쁜 짓해도 내 자식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죠. 자식은 나보다 더 소중해요. 자식을 위해서 목숨 바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 게 부모예요. 정상적인 부모의 마음이거든요.
하나님은 자식을 왜 줬습니까? 어떤 인간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플러스 알파를 내놓을 수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내 자식이에요. 내 자식은 나보다 더 소중해요. 자식이 없으면 우리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비교대상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엎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식이 나와 보세요. 하나님은 멀어지고 가까운 것은 자식이 더 가깝고.. 어느 게 더 소중합니까? 자식이 더 소중하죠. 이거는 인간의 육신의 본능이에요. 육신의 본능을 누가 탓해요? 아무도 탓 못하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식을 준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너는 인간 안 된다는 뜻이에요.
주님의 손가락이 여러분 이마에 도달했다고 생각해보세요. 미는 거예요. “너 말이야, 너, 너. 네가 나를 존중히 여겨? 어디서 거짓말을? 너, 자식이 좋아? 내가 좋아?” ’하나님‘ 그럴 땐 귀때기 날려야 돼요. “어디서,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 했지? 너 한 대 맞고 솔직하게 이야기할래? 솔직하게 이야기해. 자식이 좋아, 하나님이 좋아? 그렇게 하나님이 좋으면 교회 예배 마치고 후딱 자식 있는 네 집으로 가기 바빠? 김장도 안하고?”
왜 인간은 자식을 못 버리느냐? 아비 안에 자식은 떠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외부인이지만 자식은 내부인이에요. 마누라? 외부에서 온 거예요. 남편? 당연히 외부에서 왔죠. 그러나 자식은 어떻게, 어쩔 수가 없어요. 자식이 교도소 유치장에 가도 몰래 돈 넣어주고 욕하면서 찾아가는 거예요. 이게 부모 마음입니다. 자식 앞에서 자식을 나무라지 않아요. 너를 낳은 내가 못난 탓이다. 이러고 있다고요. 킹콩처럼 가슴 치면서..
그래 놓고 우리가 교회 와서 ’주님 사랑합니다.‘ 아, 이 거짓말 정말.. 주께서 이 거짓말 들어주신다고 애 많이 먹었어요. 50년 다니면 50년 동안 거짓말 하고요, 20년 다니면 20년 동안 거짓말 하는 거예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자식을 주시고 인간은 어떤 인간도 자식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과 자식 중에서 자식을 먼저 챙기는 것이 이론이 아니고 이성이 아니라 본능과 충동으로 이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 그게 인간의 한계예요.
애굽에서 나올 때, 히브리인들의 자식을 하나님이 살렸어요? 아니면 인간들이 살렸습니까? “야, 자식아 같이 우리 애굽에서 나가자.” 아버지가 한 거예요? 하나님이 살린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하나님이 살린 거죠. 왜? 어린 양이 들어갔으니까. 어린 양이 들어갔으니까.. 이제부터 약간 어려운 이야기 하겠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제가 질문 형식으로 하겠습니다. 짐승이 먼저 만들어졌습니까? 인간이 먼저 만들어졌습니까? 짐승이 먼저 만들어졌죠. 6일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짐승이 먼저 만들어졌어요. 먼저 만들어진 짐승에 누가 이름을 부여했죠? 인간이 부여하죠. 인간이 짐승에게 이름을 지음으로서 짐승은 인간이 시작되는 인간의 시간, 인간이 개시된 시간 속에 짐승이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지배해야 될 게 있기 때문에. 자기는 지배자의 위치에서 통치해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시간과 역사와 더불어서 하나의 인간 세계가 형성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짐승에게 이름을 부여했지만 인간 아담의 이름은 누가 부여했습니까?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은 거예요? 하나님이 지었죠.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버리면, 짐승을 지배하는 인간의 시간을 갖고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 안에 지배를 당하는 구조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의를 요했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마라.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인간에게 뭐가 있느냐하면 하나님과 소통하는 장소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은 하나님 하고만 대화가 되니까. 인간하고 대화가 돼요. 왜? 인간 속에 대화할 수 있는 창구를 집어넣었으니까.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대화가 되었어요, 대화가.
그런데 짐승에게는 이 형상이 있어요, 없어요? 형상이 없죠. 그럼 인간하고 짐승이 대화를 하면 돼요, 안돼요? 대화를 하면 안돼죠. 그런데 뱀이 뭐라고 합니까? 여자한테 대화를 건 거예요, 뱀이. 여자는 이 이야기가, 이 제안이 어디서 왔는지를 파악을 했어야 돼요. 하나님께로서 온 게 아니고, 자기가 다스려야 될 뱀에게, 짐승한테, 피조물에게서 왔다는 것을 감을 잡아야 되는데, 뱀이 지혜로운지라, 왜 뱀이 지혜롭냐? 안에 마귀 들었으니까 지혜롭죠.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악마가 알고 있잖아요. 악마는 천사니까요. 천사가 알고 있는 것이 인간 속에 들어오니까 인간은 하늘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난 줄을 몰랐죠. 천사와 천사 사이에서 한바탕 붙은 줄을 몰랐어요. 모르고, 인간이 모르는 요소를 이야기하게 되면, 이게 어떤 하늘나라의 하나님끼리만 알고 있는 어떤 비밀스러운 뉴스인줄 알고,
’이 회사에 대해 우리끼리만 아는데 이 회사 이번에 상장됩니다. 상장되면 100배 남습니다.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비밀 정보다.‘ 여자는 그렇게 생각한 거죠. 왜? 자기가 못들은 이야기가 나오니까. 하늘나라에서만 통하는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네가 따먹는 날에는 우리 편에 넣어줄게. 네가 이제 피조물이 아니고 신처럼 되게 해줄게.’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여기 인간의 시간 있죠? 인간 시간이 짐승을 온전히 지배할 수 없도록 사단나버린 거예요. 났으니까 여기다가 하나님께서 인간시간에 뛰어들어요. 뭘로 뛰어드냐 하면, 짐승에는 짐승으로 뛰어들어요. 뱀에 대해서 양으로 뛰어들어요.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그러면 인간의 시간은 이 양과 뱀의 시간으로 대체되어야 되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삭 대신에 모리아 산에서 바쳐진 제물이 뭐죠? 수풀에 있는 양을 바칩니다. 짐승 안에서 새로운 정보가 하늘나라의 내란 정보가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정보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의 짐승,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고 난 후에 제일 먼저 한 게 뭐죠? 정결한 새들을, 또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경배한 거죠.
사실은 누가 죽어야 돼요? 인간이 죽는 대신 짐승이 대체되어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부터 생긴 법이 뭐냐 하면, 짐승을 먹되 피까지 먹지 말라는 거예요. 새로운 짐승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이 우리 인간에게 식인용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음식용으로 들어서게 돼있어요. 그러면 인간은 음식을 먹는 행위 없이는 못살잖아요. 이게 인간의 조건이니까요. 인간의 생존의 조건은 음식 먹는 거잖아요. 제일 필수적인 음식에다가 하나님께서는 법이 들어가요.
음식에 법이 들어가요. 그러면 인간은 먹는 것조차도 누구의 지배를 받게 돼있어요? 하나님의 감시를 받게 돼있어요. 그렇게 되면 특히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레위기에 보면 오징어 먹지 말라, 돼지고기 먹지 말라 하는 곳 있죠? 레위기 11장에 보면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 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3절)“ 짐승 중에서 너희가 먹어라, 인간은 짐승을 지배하는 권한이 있으니 먹기는 먹는데 다는 못 먹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
무엇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규정받는 거예요, 인간이. 그럼 뭡니까?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짐승을 지배해서 사는 그 시절은 끝나고 법이 법대로 등장함으로써 그 법에 의해서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그러한 운명이 된 겁니다. 법에 의해서.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맹세, 그리고 약속의 땅, 그 약속의 땅에 가면서 계속 추가적으로 뭐가 등장합니까? 이스라엘의 의식주 속에 계속해서 율법이 증가되고 계속 스며드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 옷 입지 말고, 여자는 남자 옷 입지 마라. 옷 입는 것까지 전부 다 관여되어 있죠. 특히 관여하는 게 뭐냐 하면, 타인에 대한 관여. 이웃을 돌로 쳐 죽이지 마라. 피 흘리지 마라는 거예요. 타인. 이건 정말 강력한 법이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인간이 사는 환경은 나를 위한 환경이라고 했지요. 나와 내 자식을 위한 환경입니다.
남 안 만나고 살 수 있습니까?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될 거 아닙니까? 아프면 의사, 옷 지을 때는 제단사, 머리 깎을 때는 이발사, 혼자 못살지요. 약초를 살 때는 자연인, 다 필요하잖아요. 타인을 할 때, 나를 위한 환경 같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빵집에 가고 싶으면 갈 수도 있는데, 이 환경이 누굴 위한 환경이냐 하면, 율법과 말씀을 위한 환경 속에서 타인을 만나버리면, 그 타인과의 만남 속에 뭐가 삽입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법이 거기서 작용을 하는 거예요.
사람의 본심은 이거예요. ‘제발 내 마음을 다치게 하지 마세요. 흑흑흑’ 질질 울면서 흑흑흑. 제발 내 마음을 다치게 하지 마세요. 나이 60넘으면 전부다 이 마음이 되고, 이게 심하면 치매됩니다. 항상 이 마음이 제일 하중이 나가는 무게 중심에 자리 잡고 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땅에 뭘 준다? 법을 주시죠.
나를 위한 환경인데 법이 와버리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겠어요, 안하겠어요? 하지요. 왜? 소중하디 소중한 내 마음을 다치기 때문에. 심지어 내 마음보다 더 아픈 마음이 뭐냐? 내 자식의 마음이 아프게 될 때, 내 마음이 더 아파요. 내 마음이 더 아프다고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법은 어떻게 마중 나옵니까? ”네가 아파? 너를 위해서 죽었던 어린 양의 마음이 더 아픈데.“ 이런 식으로 다가와요. ”네가 지금 불평해? 나는 너 때문에 불평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 다가온다고요.
인간의 시간 속에 어린 양의 모습을 한 주님이 같이 거기에 합세한 여행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있지도 않은, 인간에겐 없는 땅이에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겁니다. 뭐로 바뀌면서? 나를 위한 환경이 말씀, 주님을 위한 환경으로 바뀌어가는 과정. 억지죠, 불편해요. 우리의 본성과 너무 달라요. 나는 내 자식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편하게 살고 싶어 해요. 더 욕심도 없어요. 그저 몸 편하고 마음 편하고, 그게 전부예요. 그게 어려워서 문제지요.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게 어디 있어요?
사람들은 왜 타인을 만납니까? 아파서 만나요, 아파서. 위로해달라고. 교회에 왜 가요? 하나님 나를 좀 위로해 달라고 교회에 오는 거예요. 십일조 드릴테니까 돈 받고 나를 좀 위로 해달라. 잘~될 거야~ 이런 긍정적 마인드 좀 주시고.. 소망 갖게.. 내가 내 환경 몰고 남은 생애 내 환경 안에서 나도 잘 되고 내 자식도 잘 되는 것, 그런 복 달라고 교회 가잖아요, 사람들은. 여러분들은 아니겠지만. 여러분들은 교회 간 적도 없지.
그러니까 구원은 반드시 어디서 해야 되냐? 이스라엘을 통해서, 짤린 이스라엘을 통해서 참 감람나무를 붙여야 되듯이 교회를 다녀서 교회에서 구원 받아야 돼요. 왜? 교회 하는 모습이 자기 모습하고 딱 맞으니까. 내 본심을 교회 교인들이 그대로 다 보여주니까.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해. 어려웠는데 금식기도 하고 나니까 사정이 나아졌다. 뭐 그런 이야기. 감사헌금, 십일조 안했는데 하고 난 뒤에는 갑자기 자식이 잘 됐다, 그런 이야기.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줘요.
결국 이건 뭡니까? 내가 죽을 생각은 안하고 계속 무슨 생각? 내가 살 생각을 멈추지 않아요. 나는 살아야 돼. 그 다음에? 행복해야 돼. 그 다음에? 잘 살아야 돼, 그 다음에 ?최고가 되어야 돼. 난 힘들면 안 돼. 내 마음 다치면 안 돼. 우리의 본심은 이거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너는 인간도 아니야. 넌 홍해에서 벌써 죽었어.“ 죽은 자인 너를 내가 질질 끌고 다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바로 신명기 이야기입니다. 계속해서 그 죄를 신명기 6장 7장 8장 가게 되면서 주께서 인간이 어떻게 율법에 대드는지를 미리 아시고 계속해서 미리 경고, 경고 조치를 계속 보내요. 7장 7절 보면, ”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지요?
신명기 9장도 마찬가지입니다. 9장 4,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4)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5)“
그 이유가 뭐냐? 너희 마음이 그들과 똑같이 악하기 때문에 그들은 쫓아내고 너희는 그 땅에 들이는 이유가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희생, 맹세 때문에 그렇다. 이게 바로 말씀은 살리고, 우리는 죽이면서도 말씀만 사는 게 하나님의 자기 구원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