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헌금의 순환구조

아빠와 함께 2024. 2. 27. 09:32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5강) 삼상15:22(헌금의 순환구조) 20240226b(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입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책에 p.81【십자가와 헌금】. 헌금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 좀 오래 한 사람들은, 헌금은 인간이 만들어내기 나름이다. 교회 당회나 교회 목사가 헌금에 대해서 계속해서 분류를 하기 나름대로 헌금이 계속 만들어지죠. 그러니 교회에서는 헌금을 부어내고 헌금을 부어내고 헌금을 부어내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문제점이 뭐냐? 뭘 모르느냐 하면 ‘인간은 계약서에 실린 존재’라는 거예요. 계약서는 서류에요. 하늘나라에서 통하는 서류.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서류 내밀거든요. 이 서류에 맞는지 인상착의가 맞는지 서류에 부합되는 사람인지 살펴서 천국에 들여보내줍니다. 인간 존재를 서류에 기재된 존재로 보는 거예요.

서류는 알다시피 언약입니다. 언약. 헌금과 언약의 만남. 서류에서 나온 헌금. 언약에서 나온 헌금. 헌금의 출처가 하늘에서 시작해서 땅으로 내려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땅을 경유해서 올라가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헌금이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줄 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무사히 돌아오길’

우크라이나 전쟁 보냈던 아들이 전쟁 치르고 나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늘 부모는 기도하잖아요. 우리 처남이 월남전에 가고 난 뒤에 우리 장모님이 월남전 가고부터 밤에 단 하루도 집에서 잔 일이 없어요. 교회에서 철야하면서 ‘무사히 돌아오길’ 철야 기도한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처음 네가 내 옆에 있던 그 자리를 상실해버리면 이것은 나에 대한 상실이에요. 자식 잃은 어미는 자기의 자아를 상실해버려요. 자아라 하는 것은 타인을 통해서 자아가 정립되니까 나에게 자식 있었는데 월남전에서 전사했다, 이러면 내가 못 견뎌요. 자식 없는 나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나 되기 위해서는 자식이 무사히 내 곁으로 돌아와 줘야 돼요. 내 욕망대로 내 기대대로.

그러니까 아이고, 믿음 좋다 하지 마세요.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거예요. 믿음 좋은 문제가 아니고 집에서 편히 잘 수가 없어서, 어디가 좋을까? 교회 예배당에서 조는 듯 잠자는 듯 하면서 밤새도록 있는 게 좋은 거예요. 그게 마음이 편해요. 뭐 한나의 기도입니까? 예배당에서 끄떡끄떡하면서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 헌금이라는 계명을 주실 때는, 헌금 계명 잘 아시죠, 대표적인 것이 구약의 십일조죠, 그 계명을 주실 때는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다시 하늘나라로 내 아들이 귀환할 때까지 하나님의 계명은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활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헌금만 그렇겠어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어요? 기도도 마찬가지고 전도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시작해서 무사히 돌아오길, 무사히 임무 마치고 다시 하늘나라로 귀환되기를 아버지는 원했던 겁니다. 요한복음에 나오고 요한복음 5장, 6장, 8장 다 나와요. 너희는 땅에 속하고 나는 하늘에 속했다. 나는 이제 아버지께로 간다. 드디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 옆에 사람들은 우뢰가 쳤다 하는데, 요한복음 12장에 나와요(12:29), 그 말은 예수님만 알아듣는 언어였어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무사히 귀환하는 방법은 뭐냐? 여러분 아시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언약적 내용이 지상에서 무사히 완료됐다, 안됐다를 결정하는… 완료되었을 경우에는 어떤 경우를 가지고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무슨 사건이 있어야 돼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한테 그런 계시를 받은 거예요. 네(예수님)가 십자가의 그 쓴잔을 마시면 이 잔을 마시면 드디어 너(예수님)의 모든 언약은 완성된 채로 아버지께로 갈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헌금, 기도, 전도, 제사, 제물, 성전, 율법 완성, 새 하늘과 새 땅 이 모든 것도 완성된 채 귀환하는 데에 드디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죠. 성공한 거예요.

우리는 지금 그중에서 어떤 노선만 살피면 됩니까? 헌금이 어떻게 하늘에서 시작해서 지상을 거쳐서 무사히 하나님께로 헌금의 취지가 귀환했는가, 그걸 살피면 되죠. 간단하죠. 살피는데 어떻게 살피느냐? 계약서 가지고 들이미는 겁니다. 계약서가지고.

자, 구약의 헌금부터 설명하는 게 도리인 것 같습니다. 구약의 헌금 요구의 취지는 어디서부터인가? 구약의 ‘헌금을 해라’라는 말씀을 할 수 있는 그 바탕이 뭐냐? 성전입니다. 성전. 성전 이전에는 하나님의 이름 계신 곳을 성막이라고 했어요. 성막. 그러면 성막 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성막에 관한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헌물과 헌금을 하라고 했죠.

그 헌물과 헌금을 내라고 하는데 그 헌물과 헌금은 어디서 가져온 거죠? 이스라엘이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어느 나라에서 가져온 겁니까? 애굽에서 가져온 거죠. 몇 년 동안? 430년 동안 모아놓은 자산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기금이었죠. 자산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것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 것을 받지 않는데 이 애굽에 있었던 그 패물들이 없었으면 성막 하나 못 만들고 언약궤 못 만들고 제사장의 복장 하나, 복식, 옷 하나 디자인 못하고 아무것도 못해요. 제사 자체가 안돼요. 뭐 가축이 있어야 바칠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죠.

그러면 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430년이면 엄청난 세월입니다. 1440년 조선시대 세종 때에 430년 더하면 1870년, 이건 구한말이에요. 고종 때에요. 그 시절까지 착실하게 재물이 늘어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것도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 땅은 좋은 땅이니까 기금마련 조성이 수월했던 겁니다. 좋은 땅에 잉여생산물이 누적되니까 자본이 형성되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를 보내서 히브리 백성을 올라오라 할 때 하나님이 올라오게 한 목적이 있어요. 내가 지정한 곳에서 나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불러낸다고 했습니다(출 7:16). 여기서부터 ‘헌금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재물로서 투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재물은 애굽에 있던 재물이잖아요. 그렇죠? 패물이 없으면 성막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만드니까요. 재물은 적들로부터 강탈한 거죠. 빼앗은 거죠, 하나님께서. 적들로부터 빼앗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성사됩니까, 안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다윗이 성전 지을 때 준비한 모든 재물들은, 다윗은 자기 것이 없어요, 전쟁하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른 이방민족의 것을 빼앗아온 거예요. 그 빼앗아온 것을 누구한테 바칩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전쟁하는 만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일단 정리해봅시다. ‘헌금의 내용은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 내 힘과 내 능으로 드리는 것은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이면서 획득된 것을 드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시내산에서 율법을 줬는데요. 율법의 모든 목적은 성막(성전), 성전은 나중에 다윗 언약 때니까, 성막중심으로 율법이 모아지게 돼요. 왜냐하면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이 지상에 애굽과 광야에 와서 마지막 성막 만드는 쪽으로 최종 귀환이 되게 되면 성막에 누가 찾아옵니까? 하늘에서 하나님이 성막에 찾아와서 성막에서 백성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내용을 또 추가해보자는 거예요.

첫 번째는 헌금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
두 번째 헌금의 내용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처소 또는 장소, 만남의 공간 마련용. 공간을 마련한다.

성막 지었으면 성막 잘 만들고 관람객 모아 구경이나 하면 됩니까, 아니면 그것이 계속해서 매일같이 가동되어야 되겠어요? 계속해서 가동돼야 되겠죠. 차를 사고 기름 안 넣으면 안가잖아요. 그러면 성막은 광야에 만드는 거잖아요. 광야에 만들었으면 가만있으면 안돼요. 계속 어디로 가야 되느냐? 약속의 땅으로 가야돼요. 이게 어려워요. 약속의 땅은 저 북쪽이고 애굽에서 나온 중간에 사막지역이 광야이기 때문에 성막 만들어서 그냥 약속에 땅에 성막 만들고 거기 들어가면 된다, 우리 보기에는 굉장히 쉽죠.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이 첫 번째, 두 번째 내용이 꽉 차있어야 돼요. 첫 번째 내용이 뭡니까?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이 되어야 돼요. 재물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하나님의 전쟁의 전리품이 되어야 돼요. 인간 자체가. 전리품이 되지 않는 자가 바치는 것은 안 받습니다.

하여튼 복잡해요. 이게. 천국 가는 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되게 복잡해요. 갈 수 없는 세계, 생각도 못한 세계기 때문에. 어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오지도 않는 낙원을 기다린다고요. 인간이 기대하는 낙원은요, 그 낙원은 없어요. 왜? 내가 기대하기 때문에. 내가. 내가 기대하기 때문에 천국이 아니에요.

그리고 아무리 성막을 그럴싸하게 만들어도 하나님이 더럽다고 한다면 그 처소에 방문을 안 합니다. 이것도 집이야? 내 집이야, 이것도? 안 간다! 하고 삐지죠. 여호와 전쟁의 온전한 전리품이 될 때만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 번째 내용이 뭐냐? 헌금은 첫 번째, 전리품. 두 번째 만남의 장소. 세 번째 여기에 추가되는 것은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 재편성. 재편성이라는 말이 좀 어렵죠? 그러면 내부 구조조정이 되어야 돼요.

하나님의 전쟁은 애굽에서 약속의 땅까지. 만남의 장소는 시내산에서 율법. 세 번째 내부조정은 어디까지냐? 이것은 바로 출애굽부터 시작해서 다윗시대까지. 출애굽부터 다윗시대까지 성경에 보면 뭐가 나옵니까? 사무엘상 사무엘하 또 사사기가 나오죠. 여호수아, 그다음에 사사기 나오잖아요. 성전은 열왕기상에 나와요. 그전에 사무엘상, 사무엘하는 내부조정이에요, 내부조정. 내부조정이라고요.

이건 말로해서는 실감이 잘 안 나니까 사무엘상 13장 8절,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7일)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절,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지 드리기를 필하자(끝내자) 사무엘이 온지라” 타이밍이 아주 이상하죠.

적들은 지금 가까이 와있어요. 블레셋 적들은 가까이 와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전쟁을 할 때는 반드시 언약궤 중심으로 해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어요. 그 언약궤가 그 당시에 길갈에 있었거든요. 제사를 드리고 난 뒤에 민수기에 보면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승리하고 적들이 전리품을 가지고 이스라엘 쪽으로 항복하면서 몰려오게 되어있다’ 이런 시나리오가 있는 거예요. 율법 시나리오가, 민수기에. 그러니까 사울 입장에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그 매뉴얼대로 하면 돼요, 전쟁을. 이건 어렵지 않아요.

전쟁할 때 뭐하면 된다? 제사 드리면 돼요. 요새말로 하면 전쟁할 때 예배드리면 되죠. 자, 교회끼리 친목 체육대회 한다. 우리 교회 노회끼리 친목 체육대회 한다. 그럼 각 노회가 배구선수 뽑아서 나가기 전에 전도사나 부목사나 또는 당회장 목사가 선수들 앞에 두고 뭐합니까? 안수기도 하죠. 그러면 적들은 뭐합니까? 저 교회 중에서 교회 안다니는 부정선수가 몇 명인가 그거 찾아내죠. 눈앞에 트로피가 번쩍번쩍 보이니까. 상금도 50만 원짜리 탁 있으니까. 성가대 회식해도 될 돈이거든요. 그냥 ‘하나님이여, 배구대회에서 우리 교회를 도와주소서.’ 이런 마음이잖아요.

왜 구조조정이 필요한지 아시겠죠. 왜, 왜 구조조정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는 절묘하게 사울을 왕으로 삼아버려요. 왜냐하면 사울 왕 안에는 뭐가 집결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된다는 백성들의 일념이 그 사울 왕 존재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구조조정 할 필요에 의해서 사울 왕을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들 필요가 있는 겁니다. 왕으로 만들어놓고 완전히 왕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꼴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요. 그래야 내부 구조조정이 되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말려들지 않는 사람, 단 한사람 누굽니까? 사무엘이 말려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사무엘상 13장 12절, 부득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선지자는 안 오죠. 백성들은 떠나죠. 군기 내지는 전쟁을 치를 때 집중력이 필요한 거예요, 마음도 단결해야 되지만 집중력, 집중력이 흩어지면 전쟁 하나마나 아닙니까. 그럴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13절에,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해놓고 뒤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그래서 14절에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사무엘상 15장 봅시다. 15장 22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되어있죠.

자, 여러분 묻습니다. 사울이 뭐 잘못한 게 있습니까? 사울이 잘못한 건 없어요. 사울이 어떤 잘못도 안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잘못했어요. 왕을 달라는 자체가,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를 하든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께 글러먹은 거예요. 벌써 속내를 드러낸 겁니다. 사사시대를 거쳐 오면서. 사사들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이 원한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 결과가 뭐냐?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거 지적하려고 사무엘이 선지자 된 겁니다. 왕이 있잖아. 백성들은, 아니야! 그런 왕 말고. 우리가 원하는 왕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첫 번째 강의에서 해왔듯이 하나님의 적은 누구에요? 이스라엘이 적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 왕이 있다는 말은 자기가 방어대책을 세우는 거예요. ‘적들이 우리를 공격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좋게 여겨서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진행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행되면서 서류상에 기록된 천국 오는 인간상, 천국 백성상하고 이스라엘이 갈수록 점점 멀어져가는 거예요. 갈수록 멀어져가요. 그건 다윗도 마찬가지고 계속해서 마찬가지입니다. 허물어진다 이 말이죠.

그래서 구약 사무엘상하를 보면서 우리가 해석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은 누가 잘못해서 벌 받는다고 해석하면 안 되고, 도대체 이스라엘 내부에 아직 들추어지지 않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죄가 사울 왕을 통해서 하나둘씩 그게 발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물어볼게요. 사울 왕, 제사 드렸다/ 안 드렸다. 어느 게 맞습니까? 제사 드렸죠. 제사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안 받으셨잖아요. 그러면 이 제사를 헌금으로 바꿔봅시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헌금 했다/ 안 했다. 했다. 함으로써 나(하나님)는 네 마음을 내가 안 받는다. 헌금을 함으로써 네 헌금을 안 받는다는 거예요.

어디까지 가야겠습니까? 결국 신약까지 가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이 주는 것을 일체 안 받는다. 욥은 이방인이지만 벌써 그걸 눈치 챘죠.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요(욥 1:21). 다윗은 노골적으로 이야기했고요. 이게 다 주께로부터 온 걸 주께 도로 드릴 뿐이지(대상 29:14). 그러니까 다윗이 바로 성전을 준비할 마음자세가 되어있는 거예요. 드리는 창구. 하늘에서 와서 땅으로, 땅에 있다가 땅에서 하늘로 돌아가는 그 통로, 통로가 성전이에요.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이 뭐냐? 헌금의 취지입니다.

그러면 사울 왕은 삑사리 났죠. 아니죠. 그러면 그다음에 누가 나옵니까? 다윗이 나오죠. 그럼 사울은 안 되는데(X) 다윗은 되느냐(O)? 여기 중간에 사무엘이 들어가요. 사울과 싸웠던 자가 누굽니까? 다윗 이전에 누가 싸웠죠? 사무엘이 하나님 편에서 싸웠잖아요. 그러면 사울이 이스라엘을 대변해요. 이스라엘 대표자 사울, 하나님 대표자 사무엘. 사울과 사무엘 싸움의 그 취지가 고스란히 소년 다윗에게 녹아들어간 거예요. 녹아들어간 겁니다. 소년 다윗에게.

아까 사무엘상 15장 다시 봅시다. 15장 22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제사 안 받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했잖아요. 그럼 순종은 어디 있죠? 제사 드리지 말고 순종하라 했는데 그럼 순종은 어디 있죠? 순종하라면 순종했죠. 아니, 사울이 순종하라하면 순종해요. 문제는, 순종은 없다는 거예요!

순종은 뭐냐 하면 내가 드린 헌금과 재물을 받지 않음에 대한 순종이에요, 이게. 아 참 미친다, 정말. 나는 아니고 나는 엉터리라는 것을 내가 되돌려 받아야 돼요. 내가 드린 건 어떤 것도 안 받는다는 그런 존재를 내가 되돌려 받는데 우리가 순종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뭐냐? 사울 아니요, 다윗이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아, 순종해라. 그게 뭐냐? 사울에게 순종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울에게 순종하지 않는 방법이 뭐냐? 16장에 사무엘이 몰래 그것도 몰래 누구한테 기름 붓습니까? 소년 다윗. 그것도 다윗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새의 아들들 집에 가서 왕에게 기름 붓는 그 중요한 현장에 다윗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몰랐어요. 사무엘은 어떻게 하느냐? 순종하는 거예요. 사무엘도 순종의 원칙에 복종해야 돼요. 순종에 순종해야 돼요. 자기는 ‘아니다, 아니다’는 이야기만 했지, 그다음 계획은 누구 소관입니까? 하나님 소관이에요.

순종의 원칙은, 순종할 것을 우리가 덥석 취득하는 게 아니에요. 매일같이 우리는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의 연속이에요. 성도의 일상은 매일 아니에요. 나 아니에요. 나 아니에요. ‘아니다’를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아니다’만 계속 부어내는 일상이에요. 장학금 아니다, 내일은 발명왕 아니야, 아니야, 내 아들 발명왕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1등 아니야. 1등은 소용없어. 계속 아니다, 아니다의 연속이 그게 순종하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신약에 오면 뭡니까?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라. 부인하라. 날마다 나를 부인하라. 그게 만남의 장소에요. 그게 반복되는 제사, 어린 양이 죽는, 반복되는 제사의 원리원칙이 그렇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완성된 하나님의 전쟁이 반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사울이 뭘 했느냐 하면요. 아각 왕을 살려줬어요. 그러니까 사무엘상 15장에서 사무엘이, 아각 왕 데리고 와. 15장에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15장 32절에,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오라” 하고 그다음에 칼로 아각을 찍어 쪼개죠. 뭐 겨울대비 나무장작 패는 것도 아니고.

사울이 살려준 아각을 사무엘이 팼다는 것은 사무엘이 사울 머리를 팼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각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나는 아직도 이 나라의 왕의 존재로 유효하다는 것을 지금 아각 존재로 증명하고 있는 거예요. 나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뭐냐? 증좌(證左. 참고가 될 만한 증거)가 뭐냐? 바로 사무엘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는 나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를 부어내기 위해서 매일같이 십자가가 있는데, 그 앞에서 나는 이렇다 나는 이렇다 나는 이렇다,를 하는 것은 날마다 우리가 아각 왕 돼서 십자가로 진짜… 성령으로 말씀으로 정수리가 쪼개져 마땅한 그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내부 구조조정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망했어요. 사울 왕한테 망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주셨잖아요. 사무엘을 주실 때 사무엘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순종이라는 취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 당시에 제사장이 엘리 제사장이죠. 엘리 제사장이 한 전공분야가 뭐죠? 제사죠. 이게 또 재미있어요. 나 혼자 지금 재미있나. 재미있어요.

얼마나 재미있는지 사무엘상 2장 14절 한번 보세요.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뿐 아니라” 이게 누구 짓이냐 하면 엘리의 아들들 짓입니다.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에 갈고리를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이 제사장 것인데 그 아들들이 와서 그 제사에 본인이 관여하는 거예요. 16절에,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지금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이것이 왜 죄인지를, 죄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어요. 우리는. 아니 이런 못된 자식이 뭐 어느 집에나 있지, 어느 집에나 이런 못된 자식 없는 집이 없는데 그건 충분히 우리가 어미의 마음으로 아비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잖아요. 애한테 더 좋은 걸 못 입히고 못 줘가지고 그렇게 안달인데 아니 우리 애가 하겠다잖아, 우리 애가. 그놈의 제사 이게 뭔데? 아니, 하나님이 뭔데 내 아이가 더 중요하지.

그래서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이랬어요. 엘리 제사장 너희들은 잘렸는데 이유가 뭐냐? 하나님보다 네 자식을 더 존중했다는 겁니다(2:29). 그런데 그 이야기가 아무리 성경에 나와도 우리한테 먹히지 않는 거예요. 이건 타고났으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보다 내 자식이 최고에요. 최고에요~!

하나님은 너무나 추상적이에요. 모호해. 그러나 자식은 실제적이에요, 실제적. 그걸 역전 못한다고요. 순서를, 자식 앞에 하나님을 못 둬요. 자식을 먼저 두고 자식 잘되게 하는 조건 하에 하나님 섬기겠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뭐 자식을 바치든 말든 그건 난 모르겠고. 여호와 이레도 모르겠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만 하나님 앞에 제시할 뿐이다. 그걸 인간 쪽에서 하는 헌금이라 하는 거예요. 그걸 제사라 하는 겁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게 없어요. 이 땅에 있는 가인의 제사처럼 내 노력과 내 능력으로 하나님께 바치면 ‘아이고 가상하다. 훌륭하다. 그만큼 네 노고가 대단하구나. 내가 받아서 복 줄게.’ 인간이 생각하는 한계가 그 한계에요.

인간 자체가 인간은 죄에 대해서 감각이 없습니다. 인간은 계약서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어요. 내가 계약서에 실렸다는 걸 모르고 계약서에 실린 걸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그 여정, 그 노정에 대해서 아는 바 없어요. 죄를 죄라 완전히 까발리고 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들은 하나님과 거래할 생각하는 거예요. 좋은 것 정성스럽게 제사 드리면 사울처럼 다 멸하지 않고 좋은 걸 가려 드리면 하나님께서 내가 속한 이스라엘을 복 줄거라 생각하는 숨어있는 인간의 본심을 고맙게도 사울 왕이 우리를 대신해서 다 까발려주었습니다.

사울 왕이 이상한 게 아니고 사무엘이 이상하고요. 엘리 제사장 아들이 이상한 게 아니고 한나가 이상해요. 자기가 낳은 자식을 덜렁 하나님께 바친 것이 누구냐? 한나이고 그 자식이 사무엘이잖아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 노선과 그 당시 엘리 노선과 대비를 시키면서 이스라엘 내부 구조조정에 나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 사무엘 노선. 엘리 아들들이 불량자라 했죠.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 관점이고 다른 인간들은, 그럴 수도 있지, 뭐. 다음번에 제사 제대로 드리면 되지. 이번엔 봐줘라. 고기 그렇게 먹고 싶다는데. 애들 고기 안 먹였구나, 평소에. 그렇게 먹고 싶다는데 좀 주고 다음에 한번 또 제사 드리면 되지. 얼마든지 유도리, 융통성이 우리 내부에서 마구마구 솟아오르는 거예요.

이 말은 제대로 제사 드려라, 제대로 자식교육 시키란 말이 아닙니다. 고마운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쉴 새 없이 우리 내부에 내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이건 죄 아니야. 이것까지 죄라면 말도 안돼.’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끄집어내는데 고마운 줄 아세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 다시 사무엘상 16장 돌아와서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한테 기름 부어서 왕 될 때 현장에 부재했어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부재했어요. 이 부재는 뭐냐?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무엘+아버지 이새+아들 7명이죠. 이들을 없는 존재로 부재하는 존재로 만드는 낯선 새로운 인물의 등장, 이것이 누구냐? 다윗의 존재입니다. 다윗의 존재에요.

처음에 사울 왕이 왕 될 때는 모든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삼고자 했어요. 사울 왕이 있다는 말은, 그들도 왕과 더불어 자기가 함께 ‘있음’이 돼요. 그런데 다윗이 없을 때 이 가정에 왕이 될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다윗 빼고 모든 인간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분명히 규정하기 위한 소년 다윗의 등장을 말합니다.

우리를 없애는 거예요. 우리를 부재케 하는 거예요. 우리가 부재한다는 것을 기분 나쁘게 여기지 마시고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우리가 없으면 우리에 대한 나의 책임감도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내가 죄지었다 하는 것도.

우리는 죄 못 짓습니다. 죄가 우리를 이용할 뿐이죠. 죄지은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뭐가 죄냐 하면 아직도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스스로 마귀의 시험에 올무를 옴팍 뒤집어쓴 거예요. 아휴, 그때 내가 잘할 건데. 바르게 할 건데. 그때 내가 엄마한테 효도할 건데. 되도 않는 소리하고 있네. 이게 아직까지 네 죄를 몰라서 그런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게 필요한 인물들을 꽃다발처럼 모아서 이게 바로 나의 세계라고 구성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새의 집안에 사무엘이 오니까 ‘야, 이제 우리 집안 땡잡았다. 우리 집안에서 왕이 나오는구나.’ 신났죠. 그런데 왕이 없어요. 사무엘도 몰랐습니다. 그 대목 한번 봅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내가 당부합니다만 이새가 자녀교육 잘 시켰다,가 됩니까, 안 됩니까? 삑- 안 됩니다. 이새가 다윗교육을 잘 시킨 게 아니에요. 다윗은 특이한 존재입니다. 제발 특이한 존재가 되어라. 특이한,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특이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여기 보게 되면 16장 6절에,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사무엘도 단정지었죠. 왜냐하면 사무엘이 아는 정보는 이겁니다. ‘어느 집에 가면 다음 왕이 될 아들이 있다. 그렇게 했고 이새 집에 가서 아들 다 모아놓으라 하니까 다 모았다.’ 자기가 아는 정보가 이 정도니까 분명히 이 중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단정했죠.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기름부음을 주는 사무엘 존재조차도 순종해야 돼요. 사무엘은 자기한테 순종하면 돼요, 안돼요? 자기한테 순종하면 안돼요. 그러면 자기한테 순종 안할 인간은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는데 사무엘도 자기한테 순종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러면 사무엘에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뭐냐? ‘나 아니네. 나 잘못 생각했네.’ 나 아니야, 아니야,를 다시 한번 사무엘에게도 그 원칙을 적용시킵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장학금 받는 거, 적그리스도죠. 아니야,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좀 적그리스도 되더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아비나답을 부른 건 누구 의견입니까? 아버지 의견이죠. 이제 사무엘이 정신 차린 거예요. 자기가 계시 받았으니까. 사람들의 신장과 외모를 보지 않는다니까. 이에 삼마도 지나가게 하고 아들 일곱을 다 지나가게 했어요. 내린 결론은 뭐냐? 이 집에 없다. 현재 이 집에 없다.

그래서 11절에 “이게 다냐?” 물으니까 아버지가 가로되 “말째가 있는데 걔는 어리고 시건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서 ‘이 중요한 자리에 너는 오지 마. 양은 쳐야 되니까 너는 저기서 양이나 치고 있거라.’하고 양을 지키나이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데려오라 했어요.

자, 데려오라 할 때에 사무엘 입장에서는 하나의 도박이었어요. 걔마저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여기서 이 점을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어제 오후 예배 때 제가 예를 든 것처럼 어떤 절에 다닌 시어머니한테 교회 가는 며느리가 들어와서 전도하니까 시어머니가 ‘이 좋은 거 왜 이제 이야기했느냐’라고 했죠. 그런데 우리가 말을 한번 바꿔봅시다. 엄마, 아빠 다 교회 장로, 권사고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 받고 다 했던 아들이 있는데 이 아들을 친구가 와서 세상으로 불러낼 때 아들이 하는 말이, ‘이 좋은 세상 왜 이제 불러냈느냐.’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 있죠. 하여튼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러나 두 가지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자기는 신세계를 보았다는 거예요. 뭐 이런 세계가 다 있느냐.

따라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음이란 뜻은 뭐냐? 새로운 환경, 환경이 중요해요, 새로운 신세계 환경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내부 구조조정에 나선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환경은 뭡니까? 기존의 환경은 사울이 상식에 입각한, 율법대로 제사하고 상식에 입각한 이 세상에, 부재했던 다윗의 부재 존재처럼 진짜 이스라엘은 부재한 채 다윗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미 존재하는 이스라엘에 서서히, 인간들에게는 없다고 여긴 이스라엘의 새로운 성격이 이 안에 침투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16장 이후에 다윗이 하나 딱 챙기는 것이 있어요. 기존의 이스라엘은 망해도 괜찮아요. 망해도 괜찮은데 단 한 사람, 기름부음이라는 위치, 그 직분은 자기가 기름부음 받았으니까,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이거 안 끊어지면 이스라엘은 어떤 경우를 당해도 이스라엘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소년 다윗은 알아요. 다윗은 아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새로운 환경에 다윗이 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끌어야 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환경조성은 새로운 왕인 내가 나댄다고 되는 게 아니고 기존의 환경, 이스라엘 망하는, 사울 왕 망하는 것도 기존의 환경이 그렇게 했다면 새로운 환경도 기름부음을 직접 실시한 사무엘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주최하고 이끌고 갈 것이다.’라는 것을 다윗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주제인 헌금과 관련해서 헌금은 그럼 누가 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시죠.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 헌금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헌금의 완성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와서 헌금을 완성하시고 무사히 귀환에 성공했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의 일이 무사히 완성됐죠.

그럼 남은 성도는 왜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복제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자가 주님이 어떤 식으로 돌아갔는가를, 어떤 때는 기도 형식으로 어떤 때는 전도 형식으로 어떤 때는 헌금 형식으로 어떤 때는 말씀공부 형식으로 어떤 때는 예배 형식으로 어떤 때는 찬양 형식으로 어떤 때는 애 키우는 형식으로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그걸 경유하는 거예요.

하면서 그동안 내가 몰랐던,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다면, 순종이 헌금보다 낫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 이제는 나한테 생생하게 실감나는 그러한 실습을 우리 속에 시키는 거예요. 돈 한 10만원 교회 헌금했는데 하고 난 뒤에 돌아서서 30만원 날아갔어요, 사기 당해서. 그러면 이거 뭡니까? 멋진 실습이죠. 멋진 실습이에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런데 만약에 헌금을 10만원 할까 하다가 ‘아이고 뭐, 헌금 하나 안하나 구원받았는데.’ 하고 있는데 30만원 나갔어요. 그러면 어떤 죄가 나올까요? ‘다음에는 해야지.’ 요 죄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사울이에요. 숨어있던 사울이에요.

어디까지나 내 몸은 누구 것이다? 나는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든 천국에 올려 들여보내는 막중할 할 일이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는데 아직도 구원 트라우마가 남아있어가지고 어떻게 하면 내가 무사히 천국 들어가느냐, 지금 이 짓하고 있을 때, 사울 악마, 이 세상에 악마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가룟 유다 악마부터 해서 전부다 마구잡이로 나오는 거예요. 정말 굿판 한번 벌여야 되죠.

어제 낮 설교하고 난 뒤에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셔서 얼마나 기뻤는지요. 인간 속에 있던 귀신이 돼지 속에 들어간다 했잖아요, 설교시간에. 요즘은 돼지 속에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왜? 사람이 돼지보다 더 더러우니까. 그냥 돼지한테 안 들어가고 사람 속에 있을래. 그래서 최 돼지, 박 돼지가 되는 거예요.

바로 이런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돼요. 말씀에 나오니까 마태복음 8장에 귀신 나오니까 이걸 ‘무서워라. 이젠 바르게 해서 귀신 나가게 하는 방법은 뭐냐?’ 그러면 안돼요. 그게 바로 숨어있던 죄에요.

이미 하늘에 앉히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으면 도대체 나란 인간이 얼마나 엉망진창인가를 구약 말씀을 통해서복음을 통해서 모든 일어난 일을 통해서 다시 한번 주께서 다녀가셔서 다 이루었단 사실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 과정에서 우리 육신이 남아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자꾸 이런 일들이 터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헌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헌금하면서도 어떤 이득을 챙기고 이익을 챙기고 내가 더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바로 헌금을 통한 우리 죄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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