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19강) 신9:4(율법의 시간) 20240226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8장 17절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사람들만 있으면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재물을 얻었다 하는 것이 하등 허물이 아닙니다, 사람들만 있다면. 그런데 이 ‘신명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함께 있죠. 그래서 이 율법이 함께 있다는 것과 인간들만 있다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여기 있다면, 인간들만 있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사실 인간들만 있는 게 아니고 인간 뒤편에 뭐가 있느냐 하면, 시간이 있어요. 시간이 흘러갑니다. 인간들은 시간과 더불어 함께 가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은 인간에게 영향을 줘요.
그래서 시간이 가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늙는다’ 늙어가요. 시간이 인간 몸에 침투한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또는 시간이 인간의 몸을 허물어뜨린다, 해체시킨다, 가루로 만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죽어서 주위 사람들이 죽은 인간을 화장터에 넣을 수도 있는데, 그건 상당히 시간을 빠르게 해서 그렇게 되는 거고, 그냥 놔둬버리면 시간이 알아서 인간을 분해시킵니다. 여기에 박테리아가 얼씨구나 하고 좋다고 달려들어서 인간을 분해시키죠. 그래서 여기서 시간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분해되는 대상>모든 것이 가루가 되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가루니까 그냥 ‘흙’, 흙으로 돌아간다.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럼 그 중간에 있었던 인간의 형상은 뭐냐? 흙인데, 흙으로 돌아간다면 그 가운데 어떤 신체를 가지고 등장하는 이건 뭐냐? 애초부터 가루니까, 가루로 시작해서 가루로 끝나면 되는데, 뭔가 사람의 형체를 지닌다는 것은 왜 가루가 형체를 지니죠? 진흙이 왜 형체를 지닙니까?
이것을 성경에서는 인간 좋으라고 형체가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을 만드신 분이 인간의 형상으로 온다는 것을 예시하고 알리기 위해서 인간은 죽기 전에 인간이 만들어질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 좋으라고 사람 된 게 아니란 뜻이죠.
하나님이 사람 형상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창세 전에 이미 계획 잡은 게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약속한 게 있어요. 그것을 위해서 사람은 잠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었고, 처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뭐 있는 것처럼, 거울 보면 비치는 것처럼 돼있죠.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그렇게 인간은 잠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에덴동산에서 깨어져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다면, 인간은 도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지면 인간도 없어지는 거죠.
‘그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너를 사람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볼 일 다 봤다.’ 그렇게 해서 이제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다른 민족들은 알 길이 없고요. 다른 민족은 뭐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왔다가,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게 인간이고.
이스라엘 민족한테는 뭐가 있느냐하면, 여기 ‘인간+시간’ 있다고 했죠. 그러니까 소실되죠. 여기다가 뭘 또 플러스 하냐 하면 율법을 플러스 하는 겁니다. 율법을 넣어버리니까 시간이 인간과 상대하다가 율법이 시간 보고 “야, 너 인간 하고 상대하는 너, 이제부터 나하고 상대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율법과 시간이 상대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시간’ 이것은, 그 존재 의미는 율법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 있었다고 이렇게 연결이 돼요. 그리고 율법을 통해서 누가 오느냐 하면, 메시아가 옵니다. 하나님이 옵니다. 율법 안에서 하나님께서 짠~!하고 등장해요. 율법이 완성이 되면, 짠~하고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입장에서의 인간의 사건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허락한 사건은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관계없이 주신 사건은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사건만 줬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특혜를 입어서 율법과 결합이 되니까 어떤 사건이 되느냐 하면, ‘율법에서 어떻게 메시아가 나오느냐’와 관련된 연이은 사건들의 행렬이 시작됩니다, 행렬.
율법이 뭘 만든다?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장차 오실 하나님의 모습을 그 사건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 이 이스라엘은 땡 잡았죠, 이스라엘은. 몰라야 되는데, 다른 인간들은 모르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이 주어지면서 율법이 자체적으로 형성하는 사건이 있고 ,그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은 ‘어머나’하고 이스라엘이 깜짝깜짝 놀랄 만한 일들이 자꾸 율법과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거예요.
어디 여러분들은 일상에서 그런 일 없습니까? 깜짝깜짝 놀랄만한 일 없습니까? 오늘날 성도도 똑같아요. 성도 안에 이스라엘이 꽉꽉 들어가 있으니까. 오늘날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깜짝깜짝 놀랄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날 때에, 불신자 같으면 “이거 웬일이야? 이게 왜 일어났지?” 뭐, 좋은 일도 마찬가지고, 나쁜 일도 마찬가지고요.
좋은 일 같으면 대학원 장학금 다 받는 거, “이거 웬일이야, 이거?” 박수칠 일, 이런 거요. 대학원에서 장학금 받았는데 신명기 8장 17절에 보니까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네 능과 네 손의 힘으로 네가 이 장학금을 얻었다 하지마라.” 왜 이 신명기 8장 17절이 장학금 받는 그 현장에서 상기되고 생각이 나냐 이 말이죠. 왜 이게 율법과 연관이 되느냐 이 말이죠, 율법과.
그런 거 자꾸 생각나더라도 돈 좀 생기는 일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일 있더라도. 뭔가 “그래서는 안 돼. 너는 그러면 큰일 나는 거야. 그럼 너 율법과 반대되는 거야.” 라는 사건이 뭐냐? 갑자기 돈 생기는 사건이에요. 갑자기 재물이 늘어나는 사건,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특이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특이성, 오늘날 성도의 특이성. 성도에게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에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역시 내가 노력하길 잘했어.”라는 것으로 귀결이 되지만 이것은 뭐냐 하면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불신자 같으면 자기하고 뭐만 있다? 시간만 있겠죠. 나와 시간이 있죠.
내가 만약에 재물을 얻었다면, 과거 내 시간 동안 “이 재물을 얻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힘들게 살았던 결과가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왔네.” 라고 하면, 이 사건은 누구 사건입니까? 본인의 존재 사건이죠. “그러니까 난 허물어지면 안 돼. 그러니까 나는 남보다 더 대우 받아야 돼. 난 칭찬 받아 마땅해.” 이렇게 되는데, 이스라엘은 여기에 추가적으로 뭐가 붙습니까?
율법이 추가되는 거예요, 율법. 신명기 8장 17절, 네가 뭔가 얻었을 때에 네 힘으로 얻었다 하지마라. 인간 +시간 탓으로 돌리지 말고, ‘이걸 부정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어요. 내가 이만큼 되기 위해서 고생 많이 했는데 바로 이 자체가 자만이고, 오만이 된다는 겁니다.
8장 14절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잊을까 두려워함이라.(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8:14) 누가 언약 달라 했습니까? 누가 율법을 달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 붙여놓고 그 다음부터는 네가 한 것이 아니고 율법에 등장할 하나님의 이름, 장차 오실 메시아, 하나님께서 그 힘과 능을 줬다는 거예요.
그러면 받는 입장에서는 ‘누가 주든 받아 챙기면 되지’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벌이게 되면 모든 재산과 능력을 줬다는 이 말은 결국 궁극적으로 뭘 말하느냐 하면, 율법을 줬다는 말이고요, 율법은 뭘 만들어 낸다?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은 진짜 하나님의 형상의 주인공의 등장과 관련된 사건이에요. 나 말고 또 누구 있다는 거예요, 나 말고.
한번 보세요. 여기 종이가 몇 장입니까? (한 장이요) 한 장인 줄 알았죠? 준비 좀 했어요~ 이렇게 종이가 딱 붙어 있으면 한 장인 줄 아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뒤에 있는 율법을 들추어내요.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앞에 있는 건 뭐냐, 내 힘으로 얻은 것만 기억해요. 이건 내 거다. 왜? 내가 노력했으니까.
그런데 노력치 아니했음에도 주어지는 게 뭐냐 하면 율법,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은 존재하지 않고, 배후에 딱 받치고 오는 이 율법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이 율법과 미리 만나게 해줬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율법은 인간과 상대하는데, 인간만 상대하는 게 아니고, 인간 뒤에 받치고 있는 시간과 율법이 서로 관련돼 있다.’ 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율법이 시간을 이용해서 인간에게서 시간을 떼 내어서 율법 안으로 인수인계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 안에서 인간은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율법 안에서 인간은 시간이 없습니다. 호수 안에 백조는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호수 안의 백조가 시계 쳐다보고 이런 거 없지요. 그냥 호수 안에 있으면 돼요. 그래서 제가 쓰레기통 뒤져 가지고 여기 빈병을 하나 가지고 왔어요. 인간은 그냥 빈 병이에요. 빈 병이 되어야 돼요.
전에 인간은 빈 병이 아니고, 내가 뭔가 시간 따라서 더 나은 방법으로 변신된다, 달라진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런데 율법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안에 아무 것도 없어요. 빈병이라서 아무 것도 없다고요. 왜냐? 주님이 시간을, 내 시간이었던 것을 주님의 자기 시간으로 강탈해, 빼앗아 가 버렸어요. 빼앗아 갔다고요.
빼앗아 갔으니까 이 율법 안에 시간이 없다는 말은 ‘내 안은 항상 빈 병이다, 텅텅 비어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텅텅 비어있을 때, 여기에 뭐가 담기느냐? 율법이 유발하는 사건이 딱 담기게 되어버리면 껍데기는 나인데,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거예요. 껍질만 나고 내 안엔 그리스도가 차 있는 거예요.
불신자들은 이걸 모르죠. 불신자들은 어떤 식이냐? 여섯 자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불신자들은 어떻게 사는가? ‘내일은 발명왕’ 한 번 보여주세요. 이태가 보는 책이에요. 보세요. ‘내일’ 있죠? 내일은 시간이죠. 그리고 자기 걸 뭘 채웁니까? 계속 뭘 만들어야 돼. 발명왕, 계속 뭐를 만들어야 이 지구가 조금씩 앞으로 가요.
화성 정복하고, 달에 착륙하고, 목성까지 가면, 천왕성, 명왕성까지 나아가야 돼요, 지금? 자꾸 뭘 해야 돼요. 그런데 ‘내일’은 시간이잖아요. 시간이 하는데 뭐 호강했다 싶으면 늙어 죽었어요. 한 때 검사 출신이고, 대전 시내에서 날렸던 국회의원, 지금 대선 나올까? 하는데 벌써 나이가 80 가까이 됐어요.
뒤에서 말리죠. “할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내가 말이야 민주주의를 위해서 말이야..“ ”아는데요, 이미 한 물 갔습니다. 그냥 후배한테 맡겨 놓으시지요.“ 있어요, 검사출신인 그 사람. 그러니까 항상 인간은 ‘내일은 발명왕’이에요. 시간 속에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가요.
자, 그러면 우리가 살펴야 될 것은 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라고 되어 있죠. 그러면 아까 한 이야기 그대로 당겨 오겠습니다. 율법은 뭘 당긴다? 시간을 쥐고 있다.
율법 안에 시간이 절기로 되어 있어요, 절기. 이스라엘의 시간의 특징은 농사짓잖아요, 농업을 하잖아요. 농업은 씨 뿌린다, 추수한다, 추수 끝난다, 씨 뿌리고 난 뒤에 첫 이삭이 폈다, 그 다음에 추수 시작, 추수 끝났다. 첫 이삭이 폈다, 유월절. 그 다음에 추수 한 번 시작해볼까? 맥추절, 칠칠절이라고도 해요. 그 다음에 추수 다 끝났다, 수장절. 수장절 돼요. 여기 입장에서.
그런데 농업 하는 서클, 순환구조, 순환사슬구조로 뺑뺑이 반복해서 가는데, 그 수레를 돌리게 되면 이 시간에 뭐가 섞이느냐 하면, 출애굽 했다, 유월절. 시내산에서 율법 받았다, 맥추절. 그리고 광야에 들어갔다, 천막 생활한다, 초막절=수장절 같은 거예요. 시간을 누가 접수하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시간을 접수하고 그걸 다시 되돌려줘요. 접수하고 되돌려줍니다.
그러면 이건 결국 시간의 흐름으로 인식되지만,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어디 안으로 들어 오냐 하면, 말씀의 자체적인 순환회로에 들어오죠. 순환회로. 말씀의 흐름, 말씀의 흐름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말씀의 흐름 안에서 인간은 빈 병처럼 거기서 호수 안에 있는 백조처럼 그냥 있으면 돼요. 그냥 있으면 된다고요.
나를 위한 시간, 우리를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동행 하는 하나님을 위한 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럼 신약엔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 그 다음에 성령 오심, 그 다음에 재림, 이 스케줄 누가 짠 거예요? 이 세 가지의 일, 십자가는 부활과 같이 있다고 보고, ‘십자가, 부활, 성령 오심, 재림’ 이 시간 스케줄은 예수님이 하셨던 것이 계속해서 주어진 거잖아요. 예수님 하신 일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여기 오늘날 성도가 이 회로에 들어간다는 말은 일단은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속에 들어가면 성도는 이미 죽은 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 성도는 죽은 게 돼요. 제가 한 번 물어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할 때, 무슨 피를 발랐어요?
양의 피,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랐잖아요. 그게 신약에 올 때까지 유월절 양의 피는 드디어 요한복음 1장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에서 그 양이 누구라고 되어 있죠? 예수님이라고 되어 있죠.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내 살과 내 피를 유월절 할 때 먹으라 했죠?
그 다음에 어린 양이 누구죠? 그 다음 어린 양은 누가 되어야 되냐 하면, 이게 자리가 바뀌게 돼요. 뭐냐 하면,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했던 그 말씀 완성과 결합된 하나님의 완성된 형상이 성도에게 주어지게 되면, 성도는 자기 시간 속에 주님의 시간의 완성을 되풀이하는 그러한 코스로 이끄심을 받습니다.
이끄심을 받아요. 성도가 제물이에요, 성도가. 그럼 성도는 무슨 의지로? 의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죠.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이 땅의 제2의, 제3의 유월절 어린 양이 되게 하는 그러한 인생을 살게 하는 겁니다. 그 인생을 살 때에, 호수 안에 있는 백조처럼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성도만이 보여줘요.
그러니까 성도는 남 보기에 우리가 똑같이 늙어간다 하지만, 사실은 성도가 보여주는 것은 말씀의 흐름, 말씀의 흐름이라 하는 것은 신약에서 ‘십자가, 부활, 성령오심, 그리고 재림’을 성도의 존재를 통해서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무슨 흐름이라 했어요? 이게 바로 말씀의 흐름이죠.
자, 우리가 이제 왜 재물을 내 힘과 내 능으로 하지 않았다 하는 것,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이 전제만 생각한다면 쉬워요. <이스라엘에게는 적이 있다> 이스라엘에게 적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은 ‘하나님에게는 적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적은 마귀죠. 하나님의 적은 누구의 적입니까? 하나님의 적이죠.
하나님의 적에 누구를 집어놓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적이 곧 이스라엘 적이 되게 하는 거예요. 신명기 9장 1~2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1) 그 백성은 네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그에게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왜 사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가 건전한 관계,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왜 여기서 멈추지를 못하느냐 이 말이죠. 여러분 그런 의문점 없어요? 하나님 믿고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왜 적들을 만나게 합니까? 내 적입니까? 하나님 적이지! 하나님 적을 우리가 왜 만나야 되는데요? 그리고 적들이 어떤가? 만만한 적들이 아닙니다.
9장 1절에 강대하다고 했죠. 2절에 보면 장대하다, 크고 길다는 뜻입니다. 팔다리가 긴지..아낙 자손, 거인들이죠. 그리고 1절에 보면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나지막하다? 아니요, 하늘에 닿을 정도에요. 도대체 왜 싸워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이 점이 어려운 거예요. 우리는 적을 두기 싫어해요. 왜? 피곤하니까. 그냥 혼자 살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의 뜻은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원수를 우리한테 나타나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알아서 하나님 믿고, 구원은 나 혼자 구원 받으면 된다’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적이에요. 누구냐 하면, 바로 아낙 자손이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이스라엘 속에서 이 아낙 자손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적은 아낙 자손에 대해서 ‘겁나고 무섭다, 누가 이걸 이길 수 있느냐?’라고 하는 아낙 자손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그 두려움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적이 있다는 것을 낌새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점을 다시 한 번 봅시다.
17절, 18절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라고 할 때, 연관성을 보세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우리가 부자 되면,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이 주신 능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바르게 살겠습니다.
그런데 왜 아낙 자손을 붙입니까?“ 하는 거예요. 이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너 재물 얻을 때는 고맙게 여겨라.“ ”네, 고맙게 여기죠. 주시기만 하면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일단 챙기는 게 중요하지 그 다음에 고맙다고 하는 것은 이건 뭐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재물을 줄 때 챙기는 것은 할 수 있는데, ”아낙 자손에게 네가 붙어서 싸워라.“ 이것은 선뜻 나서지를 못하는 거예요. 줄 때는 확 받는데, 나서지는 못하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 자체에 하나님이 하는 일과 빗나가는 요소가 있어서 그래요. 이 재물과 관련해서 제가 음악을 하나 틀어드리겠습니다.
“박을 딱 벌어져 놓으니, 박 속은 횡 비고 오~ 흥부가 좋아라고 행시오~ 흥부가 좋아라고 궤 두 짝을 한번 떨어 비어 보는디 흥부가 좋아라고 흥부가 좋아라고 궤 두 짝을 떨어 붓고 나면 도로 수북 툭툭 털고 돌아섰다 돌아보니 도로 하나 가득하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쌀도 도로 하나 가득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아이고 좋아 죽겄네~일년 삼백육십일을 그저 꾸역~꾸역~ 나오너라~”(흥부가 中)
1년 365일 계속 퍼내도 돌아서면 또 생기고, 돌아서면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판소리 하는 사람이 ‘부어내고’는 한번에 16번을 숨 쉬지 말고 해야 된다는 거예요. 좋아 죽겠다는 거예요. 흥부가 환장할 만하지요. 여기에 아낙 자손이 어디 있어요? 예? 나만 챙기면 되잖아요, 나만. 계속 썼는데 또 보면 있고, 썼는데 또 보면 있고.. 화수분처럼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걸 감당을 못해서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아이고, 우리나라 판소리 흥부전은 노골적이에요. 너무 노골적이에요. 사람의 본심을 ‘우리는 이걸 원했었어.’라는 걸 그대로 판소리로 다 드러내는 거예요. 가난하다고 해서 심령까지 가난한 게 아니에요. 환장한 거예요. 부자 못돼서 환장한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 속에 재물에 대한 욕구, 탐욕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낙 자손으로 하여금 3절에 보면 불로 태워져야 될 재물과 권력으로 쌓아올린 성벽과 민족이 바로 현재 약속의 땅에 있는 이방 민족이라는 겁니다. 지난번 강의할 때, 율법은 어디에서 나왔다 했습니까? 불에서 나왔죠. 그러면 출처를 한번 비교해 봅시다.
율법은 어디서 나왔다? 출처가, 근원이 뭡니까? 불에서 나왔죠. 그것도 진노의 불에서 나왔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애굽에서 나왔죠. 애굽에서 나왔다고요. 아까 설명한 것처럼 애굽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이 완성되게 한, 율법을 완성하는 시간과 더불어 나왔죠. 그걸 뭐라고 했죠? 절기.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이것을 보여줘야 될 빈 병. 빈 병이 왜 필요한지 알죠? 꽉꽉 율법을 담는 빈 병, 왜 빈 병이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돼있고, 하나님의 진짜 형상이 오기 전에 예비적으로 구약 때 장차 오실 참된 인자의 모습으로 인간이 만들어졌고, 그 인간으로 절기를 시작하는 거예요.
제일 먼저 시작하는 절기가 유월절이잖아요. 유월절부터 시작할 때, 이 유월절은 뭐로 했느냐 하면 ‘너희들이 죽어 마땅한데 어린 양의 죽음으로, 유월절 양으로 그들은 구사일생 살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뭐냐 하면, 불이 나왔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거고, 여기 이스라엘은 뭐냐? 죽어야 했는데 뭐 때문에? 어린 양 때문에 살았다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할 일은 자기들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되고, 목적이 어린 양의 취지가 계속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이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마지막 절기가 초막절이란 말이죠, 초막절. 초막절의 특징은 뭐냐 하면, 땅이 없어요. 역대상 29장 다윗이 성전과 관련해서 기도하는 그 대목, 얼마 전에 했기 때문에 상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15절만 보면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머무름이 없다’는 취지가 초막절 취지예요. 빨리 텐트 치고 주님 따라 가려면 빨리 서둘러야죠. 주님 따라 가려면 텐트 친 거 빨리 해체해서 짊어지고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야돼요, 말씀이.
신명기 9장 다시 오게 되면, 요단강을 건너가면 강대한 나라들이 있고, 그 다음에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누가 능히 당하리요?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절기를 지키게 하면서 이끌어가는 목적은 이겁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세계로 집어넣기> 강제로 집어넣는 거. 성도 여러분들은 주께서 지금 강제로 천국에 데려가는 거예요, 강제로. 왜냐 하면, 우리는 자꾸 머무르려고 하니까요. 머무르고 싶은 거예요. 이 땅에서 성공해서 머물고 싶은데, 그 머물고 싶은 충동은 우리 속에서 뭐가 날아갈 때냐 하면, 율법이 날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날아가 버리면 우리는 남들처럼 멋있는 인생으로 자기 인생을 마감하고 싶은 겁니다.
멋있고 부러움 살만한 그런 성공적인 인생이 내 인생이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되면 유월절 취지 날아가고요, 그 다음에 맥추절 취지 날아가고, 맥추절 취지는 뭐라고 했습니까?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취지 날아가 버리고, 초막절 취지, 이건 텐트 빨리 치고 나그네처럼 살아야 되는 거. 이 취지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농사짓는, 이삭을 피게 하고, 그 다음에 추수하고, 추수를 마지막에 마무리 짓는 농업 취지의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취지도 같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추수꾼이에요. 하나님은 농사짓는 분입니다. 하나님 자기 농사를 짓는 거예요.
나로 인하여 내 백성이라는 수확물이 이만큼 얻어져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일은 기쁘게 마무리가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이제 감 잡을 거예요. 아, 이게 율법이 이스라엘과 싸워야 되는 요소로서 들어왔다는 거예요. 적들과 싸우기 전에 율법의 취지, 유월절의 취지와 이스라엘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져야 돼요.
싸움이 벌어지는데 거기에서 율법의 취지를 모르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제거되고, 도태돼요. 남은 자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본선 붙기 전에 예선부터 먼저 치르죠. 하나님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여러분 성도님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복음과 우리 자신과 싸우기 위해서 복음을 준 거예요.
왜 하나님은 세상을 사는데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관절도 안 좋고, 뭐, 이빨도 안 좋고, 왜 그리 뜻대로 안됩니까? 라고 하면, “네가 적이거든!” 네가 하나님의 적으로, 대표자로 네가 샘플로 뽑혀왔다 이 말이죠. 하나의 시료죠. 실험실의 시료처럼 뽑혀 온 거예요. 뽑혀 와가지고 율법과 만나게 하는 겁니다.
“이 불에서 나온 율법을 너희가 감당할 수 있겠어?” 하는 겁니다. 적들과 마주하기 전에 우선 네 자신부터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 빈병 말고 이번에는 휴지심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활용해 보겠습니다. 동그랗게 되어 있죠. 위에서 보면 가운데 뚫린 원 모양이죠. 가운데 빈 곳이 인간이 접근하지 못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빈 곳.
율법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휴지 가장 자리 부분을 출발점으로 해서 가운데 빈곳의 경계점 까지 오게 하는 겁니다. 빈 곳까지.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내부 환경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마음 환경입니다. 성도의 마음 환경의 빈 곳인데, 빈 곳에서 율법이 나왔잖아요. 불 속에서 나왔죠. 인간이 율법을 만들었습니까? 모세가 막 소설 썼습니까? 아니죠.
난데없이 주어진 거예요, 난데없이. 성경의 신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성령이 아니고서야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 나와요.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하나님의 가장 모든 깊은 것은 성령이 와야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변화산 이야기 인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저의 말을 들으라 했어요. 산상설교도 마찬가지고, 왜 사람을 가만 두지를 않고 자꾸 들으래요. 세상 말 듣지 말고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잖아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으란 말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빈 곳, 여기서 들려오는 소리를 너희들이 어디까지? 네 내부까지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내부까지. 그러면 인간의 내부 환경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육신적 요소가 있어서 자꾸 하나님 나라에 천국에 가려고 시도하겠죠.
그런데 빈 곳에서 뭐가 마중을 나옵니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깊은 것은 성령이 아신다.” 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에 근거한 성령의 일이 오는 거예요. 그러면 빈 곳의 경계선에서 드디어 만나게 되겠죠. 그래서 휴지심이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위에서 본 모습, 그 자체를 성도의 마음 구조, 내부 구조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들은 부모로부터 다들 유산 받았어요. 얼마인지를 묻는 게 아니고요, 죄를 받은 거예요. 죄를 물려받은 거예요. 아빠가 오류를 범하고, 엄마가 실수 한 것을 우리는 그대로 반복하게 되어 있어요. 반복하게 되어 있다고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자기 내부에 시간이 있다 했죠. 인간이 살아가면서 뭐를 기대합니까? 바깥 공간이 있어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걸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존재의 살갗, 존재의 피부> 왜 이런 표현을 하냐 하면, 타인을 통해 내가 정립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내가 정립돼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모아보면 그게 나예요. 이건 사람마다 다 달라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알고 사귀는데 처음에 알 땐 인상 굉장히 좋았어요. 그런데 한 6개월 지난 뒤엔 “아, 이건 아니야.” 막 발 빼려고 하고 “이쯤에서 관계 끊자, 뭐, 혼수? 줄게, 반 나누자. 나도 너 때문에 고생했으니까 반은 내가 갖고.” 이런 식으로 “더 줘! 재판 걸까? 골치 아프다. 그냥 반반 하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 바깥세상이 자기의 살갗이 있는 곳이에요, 피부가. 존재의 살갗이고, 신체의 살갗이에요. 이게 전부예요. 그래서 인간은 살갗으로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걸 일컬어서 몸이라 하지 않고 ‘자아’라 합니다. 인간은 자아 안에 갇혀 있어요.
그리고 이 자아를 바깥에서 오는 타인의 평가, 거기에 대한 공격 또는 그런 공격을 받으면서도 도움을 얻으려 하는 이것, 이 살갗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투, 투쟁 이 투쟁 때문에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자아는 이렇게 반경 5킬로로 되어 있는데 바깥에서 밀려오니까 쪼그라 들어가지고 5킬로가 나중엔 1킬로 되고, 나중엔 10미터밖에 안될 때는 사람은 진짜 이건 죽을 맛이죠.
그런데 갑자기 뭐 행운이 찾아 와서 장학금 받아가지고 한 10킬로 돼서 “내가 이 정도였어? 아빠, 내가 이 정도야. 아빠도 이제부터 나 무시하지 마. 아빠 나 시시하게 봤지? 나 안 시시해.” “그래, 대우해줄게. 단술이나 더 먹고, 상다리 부러지게 해줄게.” 갑자기 우쭐대지요. 이게 바로 신명기 8장 14절에 나오는 교만이에요.
인간은 자기를 부풀렸다가 쪼그라졌다가 부풀렸다가 쪼그라졌다가 맨날 하는 일이 이 일이에요. 내가 잘났지? 아니 너무 못났어, 잘났어, 못났어, 그것도 안 되면 ‘복수할거야!’ 어제 오후 설교에서 했잖아요. 세상은 나의 원한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세상은 내 원한을 갚으라고 존재하는 세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내 복수를 갚아줄 세상으로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리죠.
내 분노와 내 억울함과 내 괴로움을 해소시킬 세상이라는 관점이 팍 내 안에 박혀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고슴도치들이에요. 바늘, 가시가 슝슝슝슝 가시들이 쫘악 늘 돋아 있어가지고 가만히 있다가 말 한번 잘못하면 유튜브에 막 올려버리고, “내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하여간 분노를 못 풀어서 환장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이 세상은.
이게 바로 자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와 똑같은 인간,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요. 인간은 똑같아요. 인간은 타인에 의해서 내가 정립되는 것은 이방인이고, 성도고 관계없이 똑같기 때문에 똑같은 인간과 싸운다 할 때는 먼저 이 요소부터가 이게 하나님의 절기라는 사실을 이스라엘부터 먼저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그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향하든 관계없이 그냥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밀어붙여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추수를 하는 겁니다. 자, 추수를 할 때에 9장 5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라고 되어 있죠.
그러면 광야 생활, 나그네 생활, 초막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뭐를 습득해야 돼요? “나에게는 일체의 의로움도 없고, 내 마음에 일체 정직한 것도 없다.” 이게 장착 되지 아니하면요, 약속의 땅에 있는 적들에 대해서 본인들이 적과 싸우려고 해요. 이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죄인끼리 뭘 누가 이기고 지고 할 게 있어요, 똑같은 인간인데?
그게 시합이 되겠어요? 다 같은 편인데. 안되지요. 이 세상은 인간들이 같은 편끼리 패 가름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먼저 뭘 경유해야 하냐 하면,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그 원리원칙에 대해서 미리 그들 이스라엘은 경험해야 돼요.
원칙을 하려면 ‘내가 정직하지 않고, 나는 의롭지 않고, 어떤 재물을 얻어도 내 힘으로 얻었다 하는 이것이 몽땅 다 하나님의 율법에 위반되는 원수다.’ 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이 다룰 수 있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시켜요. 성도의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 매일같이 느껴져야 세상 성공에 그렇게 마음 땡기지가 않습니다. 세상 출세와 영광 얻는 것, 누가 잘 됐다 소리 듣는 것, 누가 또 발명 했다는 이런 것, ‘발명 많이 해라, 많이 해~’그것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내부에 찾아와서 율법을 집어넣어서 이들로 하여금 <내가 율법 앞에 시체>가 되게 만들어요. 시체가 되면 그 안은 나의 세계가 아니고,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의 세계, ‘아들의 말을 들으라’ 하는 말씀의 세계가 돼요.
말씀의 세계가 되면서 너끈하게 우리에게 먼저 오신 말씀의 등불로 너끈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왜? 여기 들어오신 분이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이 와서 우리를 ‘꼼짝 마라’ 하고 우리를 완전 조져 놔버릴 때,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천국에 가는 겁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 천국 가는 것이 이렇게 복잡해요. 이렇게 복잡하다고요. ‘천국은 기다리다가 내가 갈게.’ 아니, 그런 거 없어요. 말씀의 완성 앞에서 우리는 어떤 정직함도, 어떤 의로움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매 이 시간 속에서 나+시간+율법(신약이니까 율법 보다 복음, 십자가 복음) 이렇게 결합되면서 ‘나+시간’이 율법 앞, 십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그러한 나로 주께서 드러내셨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니까 성도한테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부러울 게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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