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23강-큰 범주

아빠와 함께 2023. 11. 28. 18:03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3강) 민22:31(큰 범주) 20231127b (강의:이근호 목사)


p.73 중간쯤부터 시작하겠습니다.【이미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 안에 있는데 무슨 천국이 이 지상에 필요한가? 미완성과 완성 사이에 십자가가 끼어 있다.】이 대목이요.【성도 편에서 보면 세상은 무가치한 것이고, 세상은 십자가 안에 있는 완성체가 무가치하게 보인다.(갈 6:14)】

자, 왜 이 대목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미완성과 완성 사이에 끼어 있다’ 할 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완성이 무엇이며 미완성이 무엇인가 그 두 개를 동시에 알게 된다는 뜻이에요.

보통 완성이 되면 미완성이 없어지고 미완성되면 완성이 없어지잖아요. 성도한테는 희한하게 어떤 것은 미완성이고 어떤 것은 완성인가를 따로따로 알게 되는 그러한 인식이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한 느낌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한테는 세상살이가 어떤 의미에서 재밌죠. 완성된 자가 미완성 세계 속에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은 하나의 오락입니다. 오락이고 장난이고 시답잖은 것이고 무의미한 것들이죠.

서울대 합격하고 난 뒤에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 다시 고향에 있는 고3때 다녔던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고등학교에 있는 시간표 있잖아요, 복도에 적힌 시간표, 그리고 막 고함지르는 선생님, 그리고 무서운 훈육 선생님부터 해서 축구장에서 하는 이 모든 것을 볼 때 그 자체가 지나간 것을 뒤돌아보는 여유 같은 것이 발생되죠, 여유. ‘참 나 애 많이 썼다. 혼났지.’ 이런 걸로. 여유만만하게 세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가 사실 완벽한 예는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갔으니까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볼 때 여유 있는데, 성도는 그게 아니고 아직 시간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시간에 관해서도 여유만만해요. 내가 바이바이할 세상을 아직도 내가 주의 뜻에 의해서 계속 기거하니까 가볍게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자식들이 와서 “아버님,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화장을 할까요, 매장을 할까요?” 이렇게 물으면 불신자는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죠. 그런데 성도는 “네가 화장을 하든 뭘 하든 길가에 집어던지든 너희 돈 되는대로 해라. 모든 게 돈이니까. 형편대로 해라. 너희끼리 싸우지 말고. 안 싸우면 되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파도치는 바다가 있습니다. 바다가 있고 앞에 해변이 있죠. 모래해변이 있고 파도가 막 밀려오죠. 자, 바다에 갔을 때 바다는 아무 죄가 없어요. 바다는 그냥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파도치고 모래 쓸어가고 모래 모으고 이렇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인생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바다를 찾는 거하고, 자기가 성공했을 때 바다 찾는 거하고 기분이 어떻습니까? 완전히 달라요. 실패했을 때는 바다에 막 뛰어들어 죽고 싶어. 성공했을 때는 바다를 향하여 막 자랑질하고 싶어요. 내가 말이야, 응? 이 일을 이루어냈어.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이미 완성된 성도의 입장에서 미완성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여유만만하게 바라본다는 말은, 이미 성공한 입장으로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성과 미완성의 그 틈을 발견하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면 안 되니까 장래에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되어야 되니까 여기서 바짝 긴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긴장을 바짝 하게 돼요. 바짝 긴장하면서 동원되는 것이 바로 도덕법이에요. 도덕법을 흔히 양심법이라 하죠. 왜 도덕법으로 바짝 긴장을 하느냐? 만약에 내가 희망사항이 있는데 여기서 내가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신이 나에게 벌을 내려버리면 지금 신이 벌을 내리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꿈꾸는 나의 미래가 아작 나버리죠. 박살나버리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태도는 무슨 뜻이냐? 여전히 세상도 미완성이고 나도 미완성이에요.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어요.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거예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되게 좋아했던 노래라는데 좋아할 노래가 따로 있지.

이렇게 세상은 알고 있는데 이걸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이 불안성을 ‘방어기제’라 해요. 아주 적절하게 잘 표현했어요. 방어기제. 인간은 타인을 만날 때에 경계하면서 만나요. 내가 꿈꾸는 이상에 보탬이 되는 존재인지 아니면 나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인지를 가려가면서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나려 합니다. 그러니까 혼자 있다가 집에 누가 들어오면 바짝 긴장이 되는 이유가 자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상도 못한,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상황보다 더 월등하게 넘치는 어떤 대상이 와버리면 순간적으로 이 방어기제가 해체돼요. 그걸 옛날 말로 버선발로 나갔다 하죠. 반가움에 못 이겨서 버선발로 뛰어나가 당신 이제 오냐 하고 반기는 거 있죠. 또 애가 예상 못하게 휴가 나오게 되면 엄마가 반가워서, 옛날에는 그랬어요,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버선발로 왜 뛰어나오죠? 뭐가 풀려서 그래요? 방어기제가 여기선 작동을 안 하니까 기쁨이 넘쳐나는 표현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바리새인보고 이런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어떤 포도원에 아들 둘이 있는데 일하러 가자 할 때, 큰 아들은 가겠다 하고 안 가고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 하고 나중에 갔다. 둘 중 누가 실제적으로 포도원에 기여했느냐?”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을 때 세리와 창기가 너희 바리새인보다 하늘나라 먼저 간다는 거예요. (마 21:28-32)

자, 세리와 창기의 특징은 무엇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들에게는 방어기제가 없는 거예요. 방어기제가. 워낙 없으니까. 뭐 남한테 그럴싸하게 내놓을 게 있어야 방어기제가 되지, 자기를 지킬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눈 좋았다고 자랑하다가 눈 찔려서 장님 되고, 귀 좋다고 하다가 공에 맞아 귀먹어버리면 점점 더 하나 둘씩 자랑할 게 없으니까 방어기제가 허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완전한 세계에서 완성된 세계로 이끄실 때 모든 것을 허물어버리면서 완성된 세계로 합격시켜줘요. 허물어버리는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그래서 완성과 미완성 사이에는 십자가 사건이 끼어있는 겁니다.

완성된 세계에 있다 하니까 일단 기분은 좋았는데 가만 듣고 보니까 겁날 이야기죠. 겁나죠. 그래서 우리가 원해서 완성된 세계에 갈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방어기제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복음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하면 “예수님 먼저 조건 주세요. 내가 믿을만하면 나한테 이익이 되면 천국 간다면 내가 믿어주고 천국 갈까 말까하면 안 믿습니다.” 하는 이 말 자체가 이런 태도 자체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전부다 나 하나 내가 살리겠다는 방어기제에서 나온 거예요. 그건 신앙도 아니죠.

따라서 우리의 방어기제가 허물어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나를 방어하는 방어기제가 평생 갑니다. 그런데 주께서 복음으로 올 때 그냥 복음이 오지 않고 어디를 뚫고 오느냐? 이 방어기제에 구멍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들어왔던 복음은 우리의 말도 듣지 않고 주님의 그다음 작업으로 주저 없이 진척해나가 버려요.

예를 들어봅시다. 길 잃은 개가 길 가다가 여러분 집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개가 좀 예뻐요. 작고 예쁘고 위협이 안돼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걸 보고 “가던 길 가세요, 개.”하고 보내고 싶은데 그걸 마침 어린 딸이 봤다. “엄마, 주인 없으면 키우자. 나도 개 키우고 싶었어.”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키울 수밖에 없죠.

그러니 복음이 들어온 것도 그냥 흘러들어온 거예요. 들어왔는데 일단은 개를 우리 집에서 키우면 개 소유주, 소지자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복음을 들을 때 우리 방어기제가 있는 상태에서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소유자로 행세해요.

아, 이거 참 진짜 나쁜 건데, 복음의 소유자에요. 복음을 듣기 전에도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되고 복음을 듣는 것도 내가 알아서 들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오든 말든 상관없이 여전히 내 인생의 지배권은 내가 갖고 있고. 그리고 나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가리는 방어기제(장치)는 여전히 아주 맹렬하게 작동하죠.

그런데 그 말 잘 듣는 개가 어느 날 바깥에서 뭘 보다가 놀라서 울타리를 벗어나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주인이 부르는 것도 관계없이 자기가 본 곳으로 마구 질주한다면 그 개는 평소에 주인 휘하에 있었습니까, 아니면 따로 놀았습니까? 따로 놀았죠.

그게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이 들어옴으로써 내가 복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이 복음 덕분에 나는 천국 갈수 있다고 자부해서 집에다 복음을 잘 보관해놓으려고 생각했는데 복음이 혼자 날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흔히 말씀 보는 사람들의 오해 중 하나가 이겁니다. 복음은 그냥 내가 잘 찾으면 복음이 빛을 발하고 내가 안 찾으면 구석에서 힝- 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복음 자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안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복음에게 잘해주면 복음은 나에게 혜택을 주고 내가 복음을 무시할 경우에는 복음이 싫어한다는 그 정도 선에서 우리는 복음을 대합니다.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요.

그런데 복음 안에 이게 들어있어요. 복음 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금지, 또 하나는 허락이에요. 금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에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금지. 이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에요. 내가 따먹지 마라 했지? 율법도 마찬가지고요. 그러지 마라했지? 금지가 있어요. 복음 안에 금지. 이 복음 안에 금지가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살아서 행동하는 것을 금지해요.

그러면 우리는 행동 안하고 가만있으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겠죠. 요한복음 3장 봅시다. 요한복음 3장 20절, 21절 찾아보세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하나님 안에서 누가 행했다고요? 우리 안에서 누가 행했단 말입니까? 우리는 껍데기고 누가 행했어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 우리의 행동으로 나온 것인 줄을 믿는 자가 신자가 되는 거예요. 밥을 짓든 뭐 모기약을 뿌리든 어디 놀러를 가든 성경 모임에 참석을 하든 그 모든 것이 주께서 시킨 일이고 또는 주께서 허락하신 일이죠. 주께서 허락하신 일이에요. 주도권은 주님한테 있지,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도 살았다. 내가 열심히 살았다, 아닙니다. 주께서 살도록 허락해주신 거예요. “오늘 하루 더 살아.”하고 허락을 해주신 거예요. 여러분, 사는 것이 정상입니까, 죽는 것이 정상입니까? (죽는 것.) 하여튼 정답은 그렇게 잘 이야기해요. 본심은 엉뚱하면서도… 우리가 산다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야 되고 우리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어야 돼요. 언제 죽어도. 왜냐하면 옛날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방식이 어려운 말이지만 이렇게 보시면 돼요. ‘무형(無形)의 실체’. 형(形)은 없는데 실제로 뭐는 있다 이 말이에요. 참 어렵죠. 이게 어렵지만 아까 쉬운 말로 제가 했어요. 인간 요소+α. 더한 무엇.

성도한테는 복음이 들어오면 인간 요소 말고 인간이 제조한 것 말고 내가 행해서 만들어진 것 말고 다른 요소가 있어요. 다른 요소가 주님과 접촉하는 접촉점이 되는 거예요. 만남의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주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그게 복음일 수도 있고 또 성령일 수도 있고. 어떤 걸 해도 괜찮아요.

여기 요한복음 3장 21절만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라고 나오는 게 아니고 성경 전체, 특히 신약 성경에 그런 게 굉장히 많이 퍼져 있어요. 내가 행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행하셨다.

사도행전 3장에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잖아요. 사람들 보고 “야, 왜 자꾸 우리를 쳐다보는데?” 사람들이 “너희들이 했잖아. 너희들이 한 거 우리가 방금 다 봤는데.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네가 일어나 걸으라.’ 우리가 다 들었어. 딴 소리하지 마. 우리가 다 들었다고.” 베드로와 요한이 있다가 “그거 내가 한 거 아니야!” “방금 네가 했잖아.”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내가 한 게 아니고” “네가 한 게 아니면 누가 했어?” “저 앉은뱅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이 친히 앉은뱅이를 낫게 해버렸다.” 그럼 앉은뱅이는 무형을 보여주는 실체, 형태가 없는 예수님이 안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이고, 그럼 베드로와 요한은 뭐냐? 그걸 구경꾼, 목격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는 목격자에요. 주께서 부지런히 일하는 목격자로서 주의 증인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예요. [너를 통해서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α를 찾아라] 이 말이죠. 미완성 속에서 활동하시는 완성. ‘다 이루었다’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를 보란 말이죠.

그러면 완성과 미완성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이제 구분을 해야겠죠. 그게 울타리 뛰어넘어간 개와 같은 겁니다. 외부에서 들어와서 잠시 있다가 울타리 뛰어넘어 달아난 개.

방어체제 또는 방어장치, 또는 방어기제, 기제를 메커니즘(mechanism)이라 하는데 영어로, 방어기제를 뛰어넘어서 나오는 말과 행위를 타인들을 통해서 발견하고 또 나를 통해서 발견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의 모임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럼 예를 들어야 설명이 되겠죠. 그냥 말하면 모르겠죠. “우리 오늘 오후예배 마치고 김장합니다.” 했죠. 자, ‘김장합니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죠. 김장합니다, 했는데 멀리서 온 집사님부터 해서 손 걷고 김장할 때, “아이고, 집사님. 혼자서 수고 다 하네.” “뭐라 합니까? 죄인이 하는 겁니다.” 이거. 이거는 성도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말이죠. 더러운 귀신과 잠시 헤어졌나. 아니, 지금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현장에 없었어요. 지어낸 이야기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감사가 나오면서, 감사는 어디를 경유하느냐 하면 “방어기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복음을 거스르는 죄인이었더랬습니다.”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나는 나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던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 외에는 나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것만 잘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완성이 아니요, 아직 내 안에 남아있는 미완성인 것을 아주 웃으면서 기쁘고 즐겁게 그걸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감사와 그런 주의 은혜에 대한 고백, 이것이 바로 완성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시면 돼요. 그럼 이스라엘 역사가 늘 미완성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완성과 미완성이 늘 병행해서 같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여러분들이 구약 성경 보면서 흔히 “놀랍다. 기적이다.” 하는 그런 게 있죠. 사람들이 기적이라 할 때 제가 묻고 싶어요. “무엇을 기적이라 합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이 행하지 못한 것을 나타낼 때 기적입니다.” 이렇게 하죠.

그런데 우리는 공부를 했잖아요. 공부를 했으니까 달리 표현하면 되겠죠. “뭐가 기적입니까?” “인간이 자기 주도권을 자진해서 포기하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내 인생에 대한 내 주도권, 내가 알아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이 주도권이 박탈당하고 완전히 와장창 깨지는 게 기적이죠.

구약에도 예가 있습니다만 구약 예 들기 전에 신약의 예를 하나 들면, 바로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결혼식 주최 측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거기 손님이 많이 와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어요. 마리아가 예수님한테 뭐라고 했느냐 하면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마리아 입장입니다.

여러분들이 마리아 입장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자, 묻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뭘 기대했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포도주가 채워지기를 어떤 식으로 기대했겠어요? 어떤 식으로 했겠어요?

마리아는 알았죠. 차마 설명을 못하지만 뭔가는 해내실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 옆에 있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했어요. “저 분이 하라 하는 대로 해라.”라는 말을 마리아가 한 걸로 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인간이 아니라 +α, 다른 걸 내놓는 분으로 인정했습니다.

마리아의 자세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돼요? 나는 방어기제에 충실하고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는 내가 주인공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에 내가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은 뭡니까? 스스로 내가 구원받을 수 없는 게 명확하거든요. 명확한데 주께서는 뭐 해내시겠지, 가 되겠죠. 이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과의 연관성입니다. 주께서 우리 집에 들어온 개와 같은 존재죠. 내가 키우지 않은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실 분이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마리아가 섭섭해 하는 것이 아니고 딱 내 마음이 그 마음이라고 받아들여야 돼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내 구원이 주님하고 상관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거 답변 잘해야 돼요. 내 구원이 주님과 상관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는 걸 기뻐할 수 있어야 돼요. 아, 이거 너무 어려운 이야기다. 정말.

내가 구원받는 것, 이건 내 소원이지 주님 소원이 아님을 흔쾌히 인정하면서 주를 믿어야 돼요. “나 꼭 구원받고 천당 가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예수 믿습니다.” 하는 것은 십자가 밑에 지옥 가는 강도의 주장이에요. “당신이 나를 구원해주면 당신이 믿지 말래도 내가 믿어줄게.” 이게 지옥 간 강도에요.

문제는 천국 간 강도인데 천국 간 강도에게 이미 일은 벌어졌다는 거예요. 크게 써야겠다. 가만 보니 기쁜 소식이네요. [이미 일은 벌어졌다.] 무슨 일? 죽은 자가 살아나버린 일은 벌어져 버렸어요, 이제.

전에는 우리가 하나의 외부인이었어요. 아웃사이더였어요. 그런데 언제부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건이 나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서, 길 잃은 개처럼 내 마음에 들어와버린 거예요. 그때부터는 이 일어난 사건 앞에 내 욕심을 십자가 이용해서 채우려는 생각을 우리가 자진해서 그만둔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할 때마다 늘 비난받는 게 뭐냐 하면, “그럼 기도하지 말란 이야기냐?”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또 덧붙여 이야기하면 “당신은 기도 어떻게 하는데?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기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감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집사님 개가 안 아프고 일찍 죽어서 감사합니다. 개 일찍 죽어서 감사합니다. 모든 일 범사에 감사거리만 끄집어내도 30분 훅 갑니다. 육십 넘어서 슬슬 흰머리가 드디어 나오는 것을 감사합니다. 모든 게 감사하죠.

왜 그러느냐 하면 내 방어기제를 뚫고 들락날락하는 다른 +α가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그걸 기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기도의 대상 분이 왔다갔다하면서 기도할 거리를 물어다주시고 다시 빼내고 물어다 주시고를 반복해가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주님이 들락날락하셨잖아요. 주님이 다 하고 계셨잖아요. 내가 지금 사는 것도 주의 힘으로 살잖아요. 내 안에서 주께서 일하시잖아요. 기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걸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조목조목 쪼개서 그게 기도의 내용으로 계속 채워지는 겁니다. 뭘 해서 감사합니다. 뭘 해서 감사합니다. ~을 해서 감사한다는 말은 기도 자체가 결과성이죠. 내가 지금 기도하게 된 것도, 이런 결과 자체가 나한테 기도의 감사 내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맡겨줬다 이 말이죠. 맡겨줬을 때, 자 문제 나갑니다. 마리아가 요청한 대로 가나의 혼인잔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하셨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자신 또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셨습니까? 아버지를 위해서죠.

물이 포도주 될 때, 사람들은 “아, 저 마리아하고 아는 친척인가? 아니면 마리아 저 사람 아들이 혼인잔치에서 큰 성과를 이뤘네.” 손님들이 포도주 없다고 불평했었다가 고만 입을 싹 다시면서 하는 말이 “먼저 나온 포도주보다 훨씬 맛있는 것을 내놨다. 이건 뭐냐? 뒤에 온 손님이 더 귀한 손님이란 뜻 아니겠어?” 이래가지고 자기들끼리 기분 좋아서 갔을 때 분위기 확 살죠. 그러면 마리아가 요청한 것은 이 혼인잔치의 분위기 살려달라고 요청하잖아요, 예수님보고. 포도주 지금 떨어져서 분위기 싸하다고.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말에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그걸 어디에 포함시키느냐 하면, 내가 포도주 같은 피를 흘려서 이 세상의 불완성을 없애버리는, 완성케 하는 죄 씻어주는 일을 미리 앞당겨서 가나안 혼인잔치에다 일으키신 거예요. 그걸 표적이라 합니다. 표적. 표시를 내는 기적.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증거하는 식의 기적을 표적이라 해요.

그럼 오늘날 성도의 살아가는 모든 삶이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표적으로 살아가니 이게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란 말입니까? 이 일이 바로 주의 일이잖아요. 기도를 해도 주의 일, 헌금을 해도 주의 일, 다 주의 일이잖아요. 자식이 애 먹이는 것도 주의 일이고, 애 먹이는 것보고 짜증내는 것도 주의 일이고. 카메라 전원 지금 잘 돌아가는 것도 주의 일이고. 이 세상에 주의 일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을 듣지 아니하면, 복음을 한 주일에 한 번씩 참석하는 사람들은 하는데, 듣지 아니하면 하루 24시간부터 6일 동안 늘 짜증나요. 왜? 방어기제 때문에. 아, 내가 내 것 지키는 것도 이렇게 힘드냐? 내가 이렇게 마음 상하면서까지 굳이 이 세상을 꼭 더 살아야 돼? 정말 짜증나. 짜증나.

여러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타인을 왜 만납니까? 이것은 내가 허락한 거예요, 내가. 내가 금지하고 내가 허락한다는 이 말은 타인을 만나는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이 들어오면 네가 누굴 만나든 그건 누구 뜻이냐 하면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한 주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어렵게 이야기하면 주님의 뜻은 어디에 묻힌다? 결사적으로 내가 내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거기에 복음의 뜻이 거기 같이 섞여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짜증냈다가 감사하다가 짜증냈다가 감사하다가. 완전히 미친 사람이죠. 복음으로 기뻐하다가 교회 문 열면서부터 짜증내기 시작하고. 말씀 듣고 감사합니다, 했다가 돌아서면 뭐 또 짜증내고.

옛날 대구에서 유명한 여자가 한 명 있었어요. 이름이 금달래에요. 1960년도를 살았던 대구 시민들은 다 아는 사람이에요. 이거 알고 나이 많아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금달래인데 이 사람이 대구의 서문시장과 중앙통을 누비던 미친 여자에요. 머리에 꽃 꽂고. 이 사람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대구 시내, 그 당시 시내가 좁았어요, 왔다갔다하면서 계속 하고 싶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늘 성격이 화들짝 같아요. 물이 불이 되고 불은 물 되고.

금달래가 따로 없어요. 오늘날 우리 사는 게. 미완성-완성, 완성-미완성, 사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찬물에 들어갔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가 찬물에 들어갔다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를 줄 때 이틀 치를 안줬어요. 금달래니까. 하루치만 계속 준 거예요. 아침 되면 감사하다가 오후 되면 짜증내고. 아니, 주의 은혜로 살잖아, 하다가 그다음 날 되면 다 잊어버리고.

기적에 대해 사람들은 고맙다고 하는데 이게 누굴 위한 고마움이냐? 날 위한 고마움인데요. 기적은 그게 아니란 사실을 여러분 아셔야 돼요. 그럼 기도는 뭐냐? 정기적인 기도에 이게 빠져요. ‘주께서 이거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누굴 위한 환경이죠? 날 위한 환경이죠. 그러나 진짜 제대로 왔다 가버리면 감사의 내용이, ‘나의 본색을 드러내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바뀌게 되죠. 짜증낼 것도 아닌데 짜증 낸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게 해주셔서 또 감사합니다.

민수기 22장 한번 봅시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면서 완성과 미완성이 번갈아가며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완성이에요. 우리가 봐도 좀 답답할 정도인데 본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 참 어지간히 애 먹인다. 어떻게 광야에서 10번이나 하나님께 원망하냐?” 이렇게 탓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한번 살아볼래?”

그 사람들은 애굽에서 자기 행함으로 살던 사람들이에요. 자기 방어기제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 방어기제를 쓸 데가 없어요. 사방에 먹을 게 없으니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사막을 통과하고 있는데. 화 안 나겠어요? 하나님 믿으라고 모세는 윽박지르지만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무형이에요. 형태가 없어요. 애굽에 있을 때는 타인을 붙들고 살았어요. 유력한 삼촌, 유력한 고모, 유력한 일가친척과 잘 나가는 내 자식, 뭔가 눈에 보이는 타인이 있어서 그 타인 붙들고 개기면 살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그들은 살았던 사람입니다. 권세 있는 자는 애굽 사람이잖아요. 애굽이든 뭐든 권세 있으면 그냥 빌고 아부하면서 그럭저럭 그래도 밥 먹고 살았다 이 말이죠.

그런 방식으로 살아온 것밖에 없는데. 그 방식이 강한 자에게 엎드리고 없는 자는 차버리고 그런 식으로 살아온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어요. 그렇게 하는데 방어기제 다 없애라 하니까 이건 말도 안 되죠.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각도 못한 기적을 베풀죠. 민수기 22장 26절부터 보게 되면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 지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봤어요. 무형의 실체지만 실체는 실체거든요. 안 보이지만. 그러나 발람 눈에는 안 보이죠. 벌써 인간의 한계성이 드러나죠. 인간은 당나귀가 보는 것도 인간들은 못 보면서 자기가 만물의 영장이라 주장하고 있어요. 물론 나귀가 늘 보는 건 아니니까.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때렸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는 내 소유인데 왜 소유물이 소유자의 말을 안 듣느냐고 때린 거예요. 그럼 여기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소유자입니까, 소유물입니까? 우리들 자신이요. 아, 중요한 질문이네. 질문하고 보니까. 소유자도 되고 소유물도 되죠.

그러니까 내가 소유자가 되려면 내 소유물이 없어지면 안 되겠죠. 그러니까 내 몸이 아프다든지 내 재산 날아가면 자살해버리는 이유가 소유자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소유자가 못 되니까 대안이 자살이에요. 자살해서라도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발람이에요. 우리가 발람하고 똑같은 존재에요. 내 소유물이 왜 내 말을 안 들어? 내가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내 소유물인 내가 말씀대로 안 살 때 우리는 내가 미워지잖아요. 그런데 내가 미워진다고 주님을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괜히 자기 완전함에 내가 흠 잡힌 짓을 하니까 그래서 내가 미운 거예요. 똑바로 못하니까 내가 미운 거예요. 그래서 맨날 가슴 치면서,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그게 자기 사랑이지, 주님 사랑 아니에요. 주님 사랑은 기적입니다. +α에요. 내가 망가지는 것이 마땅함을 알 때, 알면서 동반해서 등장하는 기쁨. 아,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기쁨. 그게 +α가 돼요. 인간을 초월하는 다른 영적 요소가 그런 요소죠.

그래서 때리니까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왜 때립니까?” 이렇게 된 거죠. 저 왜 때립니까? 발람이 나귀가 말하면 놀라야 되는데 놀란 것보다 자기 분노가 더 심했던 모양이죠. “내 손에 칼 있었으면 넌 나한테 죽었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나귀가 하는 말이, “나 아니었으면 당신이 죽었어!” 왜? 앞에 천사가 있으니까.

인간의 범위, 좁죠. 인간의 범위가 좁고… 자, 기적이 뭐냐? 기적은 범주 위에 범주에요. 내가 아는 게 작은 동그라미라면 기적은 이 나(작은 동그라미)를 둘러싼 큰 범주(큰 동그라미)의 일이 나한테는 기적으로 다가오죠.

나귀는 발람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았고 보았던 겁니다. 그래서 나귀가 주인을 살려냈어요. 계속 가면 죽으니까. 왜냐하면 칼을 누가 갖고 있었어요? 31절에,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그러면 여기서 물어봅니다. 이 기적은 발람의 기적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기적이에요? 이스라엘의 기적이죠. 자, 이스라엘의 기적은 이스라엘의 기적입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한 기적이에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기적이죠.

 

모든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자기 구원이에요. 우리가 거기에 같이 합류하여 영광스럽게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 복음이 들어와서 맡게 되었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게 바로 주의 이름으로 일하시는 범주. ‘나’가 있다면 나는 방어기제죠. 나라는 나의 범주를 둘러싸는 더 넓은 범주가 복음의 범주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날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복음을 위해서 있는 게 맞죠. 나(내 작은 범주)와 복음(복음의 큰 범주) 사이에서 복음의 활동이 왔다갔다 하면서 여기서 나오는 것이 바로 기도에요.

그럼 나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은 나의 이름, 나의 이름을 지배하는 것은 주의 이름. 우리는 주의 이름 안에서 나의 이름이 갖고 있는 미완성이 어떤 것인가가 낱낱이 밝혀지는 즐거움으로 우리 남은 인생을 살아요. 그것이 계속해서 살게 하는 이유입니다.

네가 이렇게 못났잖아. 내 못남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 참 겸손하다.” 이렇게 하죠. 그게 성령의 열매에요.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 이게 겸손이거든요. 겸손한 이유가 자기가 못났으니까. 양선 안할 수 없고 자비 안할 수 없어요. 못난 주제에. 내세울 게 뭐가 있다고요.

자, p.75 봅시다. 주님의 기도란 인간의 기도에서 이탈된 기도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에서 이탈된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왜 이탈하느냐? 이탈해야 외부에서 우리에게 줄 게 있기 때문에. 그걸 은혜라고 해요. 은혜.【은혜의 반대말은 공적 사상이다.】

공적 사상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데 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때 일어난 일이에요.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공격한 일 여러분들 아시죠. 여리고성 공격할 때 뭐를 불었는가? 양(각)나팔을 불었어요. 양(각)나팔은 개인, 사적인 공간인 것을 부수고 이걸 공적 공간으로 일원화시킬 때 나팔을 불어요. 전쟁하기 위해서 소집할 때 공동체를 향하여 붑니다.

공동체는 하나에요, 둘이에요? 공동체는 하나에요. 그런데 하나 가운데 각자 개인이 하나로 있잖아요. 그러니까 개인이 갖고 있는 하나의 경계를 풀고 전체 공동체 하나에 모조리 연합이 될 때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겁니다. 전쟁을 하는 거예요. 이거는 여러분들 이해 되시죠. 이해는 되실 거예요. 문제는 나팔소리가 안 들리는 게 문제가 되는데.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마지막 예수님 재림하실 때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나팔소리가 들리죠.(4:16) 이것은 뭐냐 하면 너 잘났다, 나 잘났다는 주님 앞에 있을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니까.

그러면 나팔소리를 듣고 죽은 성도들이 거기서 깨어나요. 그럼 이 말을 이렇게 통역하면 되죠. ‘사적 범주에서 벗어나 주님이 하신 일에 들어올 때 여기서 복음의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설명해도 돼요. 복음은 나를 위한 환경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일을 위해서 너 소집 통보받았다는 뜻이에요. 이게 영적 전쟁이다 이 말입니다.

그럼 여러분들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기적이 뭡니까? 기적은 사적인 나에 대한 관심사에서 내가 그런 건 없다고 손을 떼는 게 기적이죠. 내가 집에서 애들한테 밥해주는 것도 기적에 속하려면 이게 주를 위한, 애들에게 밥 주라고 주께서 시킨 일이 되어야 되죠.

무슨 얘기냐 하면 사적이란 것은 내가 나에게 지시하는 것을 사적이라 해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실체인 주님이 나에게 일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 돼요. 주님의 일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공적인 일로 봤죠. 공적인 일이라 하는 건 잘못이에요.

공적인 게 아니고 신약에서는 이걸 ‘은혜’라 해요. [은혜는 일 시킴]이에요. 무슨 일 시킴입니까? 주의 일에 같이 합세하도록 시키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선물이죠. 선물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크리스마스 선물, 일 안해도 공짜로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죠. 일하는 선물은 생각해본 적 없잖아요. 그러나 실제적으로서는 사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뭐냐? 그들로 하여금 일하게 한 거예요. 사도 바울의 은혜는 뭡니까? 복이 뭡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나에게 상급이다.(고전 9:18)

주일 낮 설교 때 했는데 그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한번 봅시다. 그걸 제가 자세히 하고 싶었는데 시간관계상 설교에서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어요. 3장 6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보세요. 그리고 8절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주께서 시키는 대로 맡은 역할이 다를 뿐이지, 너는 왜 여자고 나는 왜 남자냐 그런 거 따지지 마세요. 그러니까 사적인 것은 내가 나한테 지시하는 것이고 그래왔는데,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네가 너한테 명령하는 일 말고 너를 둘러싼 더 큰 범주, 주의 일에, 이미 완성된 일을, 주님의 완성됨을 완성된 일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결과물로 이 땅에서 주님의 빨대로 사용하는 거예요. 주님의 외피로.

어제 그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 안 납니다만, 신부는 신랑의 옷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까? (했어요.) 다행이다. 신랑은 신부에게 자기를 위해서 옷을 해 입히는 거예요. 우리는 옷이에요. 이 옷을 벗어버리고 영광된 주님의 부활의 옷을 입게 되어 있어요.

옷 노릇 잘했다고 칭찬과 더불어서. 수고했다. 살아있으면서 허름한 옷, 죄 많은 죄 있는 육신의 옷으로서 옷 노릇 잘했다. 진짜 옷을 입혀줄게. 해보다 더 빛나는 광채 나는 옷, 영광된 부활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십니다. 그게 우리를 맞이하는 두 번째 육신이고 요한계시록에서 그걸 두 번째 부활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좋은 이야기, 근거 있습니까?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복음이 바로 유일한 근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인데 왜 우리는 자꾸 내 일에만 몰입하고 거기다가 방어기제까지 동원시켜서 내가 내 안에 가두어 사는지. 이 철없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어떤 것도 주님의 뜻이 아닌 게 없고 어떤 것도 주님이 주신 힘이 아닌 것이 없음을 알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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