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20231127 주일오전 설교 요약-이 근호 목사
질문) 어제 낮 설교에서 셔벗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주님께서 보시는 나의 새로운 모습인지요?
셔벗은 냉장고 냉동실에 넣고 여름에 시원하게 과일즙 등을 얼려먹는 거죠. 그럼 과일즙은 하나의 소재가 되고 재료가 되고 주변에 얼음 덩어리로 동결되죠. 동결되는 겁니다. 사건을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사건을. 사건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건 자체가 인간세계에 없는 새로운 실체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우리 몸이라든지 흙으로 만들어진 게 있어야 실체가 되거든요. 인간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깎아서 탁자를 만들든지 이래야 실체가 되잖아요. 인간은 있는 데서 있는 것을 실체로 만들죠. 그러나 하나님은 없는 것을 가지고 실체를 만들어버려요. 사건.
우리는 사건이라 하면 벌어졌다가 그 시간 지나면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없어지는 그 사건 중심으로 일해버리거든요. 그럼 사건을 동결시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사건이 함입된, 스며들어간, 사건에 의해서 새로 발생된 그것을 주님께서는 실체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 최초의 사건이 뭐냐 하면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분. 어제 낮 설교의 핵심은 ‘아버지의 이름’이에요.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도는 주의 이름으로. 특징은 아버지도 주님도 인간세계에서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실체가 아닌데 실체가 올 때는 사건으로 오게 되어 있고, 우리는 사건의 소재가 되고 사건이 동결되어버리면,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동결되어버리면, 예수님 몸의 모든 활동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되죠. 아버지의 이름으로.
요한복음 5장 43절(“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는 가짜다,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어요.
너희들은 전부다 여호와 이름으로 사는데, 정작 여호와 이름으로 오신 나는 영접치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너희들이 아는 여호와와 내가 아는 여호와가 같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버지 이름으로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그럼 그 사건이 실체화된 예수님의 육신이 하나님의 사건이 실체가 된 거거든요. 그럼 왜 왔는가? 기존의 모든 인간의 실체를 심판하기 위해서 온 거죠. 심판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셔벗이라는 과자로 제가 표현한 것은 ‘동결’, 얼려버리는 거예요, 단단하게. 특징은 시간의 흐름이 없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해요. 없는 거예요. 한편 인간의 시간을 찾는 것은…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만 인간들은 알거든요.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만 있다. 변화되는 것만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끝났다. 이미 확정된 거예요. 동결된 거니까 확정된 거예요. 인간은 계속 변화를 추구하는데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십자가 사건이 되어버렸어요. 창세전이나 십자가 사건은 동일화된 거죠.
그러면 인간은 주님의 사건에 대해서 십자가 사건이 인간들로부터 배제된 사건이거든요. 배제되었다는 것은 서로 갈 길이 같지 않다는 게 돼요. 같지 않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다. ‘인간 구원은 없다’가 분명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생명책 예를 든 거예요. 창세기 3장 24절에서, 생명나무에서 내어 쫓아버렸어요. 24절에 나와요.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나무에서 쫓아냈어요. 단순히 낙원이 아니고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쫓아냈잖아요.
그럼 쫓겨난 인간은 생명 쪽으로 올 수가 없죠. 주께서 쫓아내니까. 쫓겨난 인간 가운데 내가 있잖아요. 그럼 나는 생명과 관련 없어요.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 생명책 나오니까, 야 이거 좋다,하고 덥석 생명책 믿는 거예요.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도 성경의 모든 개념을 인간끼리 통하는 개념으로 성경 개념을 받아들이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전부다 이건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가 인간에게 배제 당했던 예수님 사건을 위해서 성경이 수렴(收斂)되고, 거기에 응집이 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생명이 없는 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성경보고 구원받으려고 시도한 거예요. 벌써 이거는 잘못되었죠.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겁니다.
인간치고는 아무도 생명책에 갈 수 없습니다. 갈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이 나다나엘보고 너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요 1:47) 그럴 때 그 이스라엘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되는 경우에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나다나엘을 초빙한 거예요, 자기 세계에. 자기 공간에.
“네가 무화과나무 있을 때 난 알았다.”(요 1:48) 이것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모른 것은 나다나엘 쪽에서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먼저 “너 무화과나무 있을 때 내가 보았다.” 그것은, 내가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절단 나야 돼요. 이게 끊어져야 돼요. 예수님을 요모조모 따져서 내가 믿을 사람인지 아닌지 따지겠다는 자체가 이렇게 되어버리면 계속해서 나의 구원을 시도하는 바가 돼요. 이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어요.
그런데 이미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한다는 것은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이잖아요. 사건이 동결된 거예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분 안에서 모든 사건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다 예수님 안에 담겨있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책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만든 책이 생명책이에요. 생명이 있는 자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생명에 들어가신 분이 주의 이름인데 주의 이름의 책에 나다나엘을 거기다가 초청하고 데려오는 식으로 생명책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제 주일 낮 설교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 같으면 정말 제가 존경스러워요. 왜 그러냐 하면 중간에 아가 이야기하면서 봉한 샘 이야기하면서 후딱 지나가듯이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남편의 이름이 있으면 아내는 자기 이름이 필요치 않다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의 이름이 있으면 그 안에 생명책에 있는 자기 이름은 떼고 가실게요.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내 이름이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내가 장차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발전하느냐 이런 변화의 소지는 없는 거예요. 생명책은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걸 어제 낮 설교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존재를 구원시키는 게 아니고 존재를 사건화 시키면서 구원한다는 말을 했어요. 변화하는 것을 사건으로 동결시킴으로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런 것은 오 목사님이 녹취를 했기 때문에 녹취보시면 다 나와 있어요. 녹취 보면 쭉 순서대로 나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인간의 의미밖에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그 인간이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는 그냥 주고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 행함에서 얻은 것들을 자랑질하려고 주고받아요.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말은 안에 자기가 행했던 그 결과물이 자랑스러워서 내뱉어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 보기에 인간들은 그게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딱 오셔가지고 인간부터 만나질 않았어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누구부터 만나게 했느냐 하면 광야에서 악마부터 만나게 했어요. 마가복음에서는 그걸 더러운 귀신이라 했어요. 더럽다는 표현을 했어요. 더러운 귀신. 더러운 귀신이 나가면서 예수님이 누군지 더러운 귀신은 알아요. 마가복음 1장 24절에 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죠?” “조용히 해! 난 너 구원하러 온 게 아니야.”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광야를 시작으로 더러운 귀신의 대장부터 만나서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어떤 체험을 하게 하시느냐 하면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 귀신과 더불어 동거하고 있는가를 쭉 보여주면서 결국 십자가로 가시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이름이 하신 일이에요.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나중에 성령을 받은 우리도 예수님 갔던 코스를 똑같이 경험해요.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더러운 귀신과 함께 살고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아까 집사님 누구하고 통화했죠? 그분과 알아듣는 이야기했죠. 그럼 더러운 귀신이에요.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더러운 귀신들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은 배타적이거든요. 못 알아들어요. 듣기는 들어도 못 알아듣는데 알아듣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더러운 귀신이 만들어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알아듣는 거예요.
집사님이 더러운 귀신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더러운 귀신을 경유했기 때문에 알아듣는단 말이죠. 내가 살던 고향이고 내가 그 동네에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듣는 이야기와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구분되는데 그쪽은 자기가 열심히 행해서 그 결과로서 자랑질하려고 누굴 만나는 이게 뭐가 문제냐 하는 거죠.
그렇게 전제를 깔고 있어야 돼요. 존재가 사건화 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존재가 사건화 되는 방법은, 성령께서 오신다는 말은, 주님께서 더러운 귀신과 함께했던 경험을 가지고 결국은 더러운 귀신들의 주동 하에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서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사건이.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이야기를 한 겁니다. 21절, 22절.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은 것처럼 두 번째 아담을 통해서 살게 될 것이다. 죽음이 온 것은 첫 번째 아담 때문이라면 사는 것은 부활은 두 번째 아담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산다는 말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해야 되느냐 하면, 첫 번째 아담에서 두 번째 아담으로 이동이 되어야 돼요.
무슨 수로 이동됩니까?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예수님 말을 못 알아들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더러운 귀신들렸다 해서 죽였잖아요. 기분 확 나쁘죠. 인간은 왜 남한테 욕 얻어먹으면 기분 나쁘냐 하면 자기가 노동한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디도서에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말을 한 거예요.(딛 3:5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인간은 행함을 떠나서는 자기 어떤 생각도 못해요. 누굴 만날 때, 너는 어느 정도 행하고 나는 어느 정도 행하고, 행함과 행함의 견주기로 대화를 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 그럼 나는 뭐 사는 게 사는 것도 아니냐, 인격모독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질문) 구약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악한 왕들에게 므낫세 왕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다 망한다 계속 그런 얘기가 나왔었는데, 구약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첫 사람 아담에 대한 심판이 이어져서 결국 예수님 때까지 도달되었다는 내용이겠네요. 거기에 우리도 포함이 되겠고요.
그렇죠. 시범조죠. 이스라엘이 시범조로 망하는 나라에요. 그래서 왜 교회가 이단이냐? 이단인 증거는 딱 하나에요. 전에는 내가 죄를 지었는데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었다, 이게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전에도 내 이름 중심이었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도 내 이름이니까 예수 믿는 것이 나의 행함이 되어버렸어요.
이젠 죄인의 시대는 끝나고 부활의 새 생명 시대를 누리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생이 사건화되질 않은 거예요. 이제 옛 것은 떼어버리고 새 사람 되었으니까 단선이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은 자기 발전을 중지하지 않아요. 내가 못났는데 교회 가서 얼마나 새 인간 될까? 이런 욕망으로 교회를 와서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었다고 우기니 이게 바로 더러운 귀신들린 거예요, 이게.
과거가 떨어져나가면 안돼요. 전후가 다 있어서 동결화 되어야 돼요.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내 행함이 아니고 주님이 하는 일로 인하여 이게 사건화 되어야 돼요. 내 행함은 사건화 되지 않아요. 내 행함은 내가 살아있어야 되니까. 내가 죽으면 안 되잖아요. 내가 행할 때 죽은 자가 행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님만이 살아있어요.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애초부터 우리는 생명나무와 생명과 연결이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어제 낮 설교하면서 예화를 들려하다가 그만둔 게 있어요. 짜장면 있잖아요. 면은 짜장과 묻혀야지, 짬뽕과 묻히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인간이 면발이라면 생명과 묻히질 않아요. 무엇과 묻힙니까? 저주와 심판과 죽음이 딱딱 들어맞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디도서에 보면 중생, 거듭났다는 말에서 거듭남을 사건화 시키지 않으면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지난 건 날아갔다,가 되잖아요. 이 거듭남 자체, 어제 했어요, 주님의 작업이 사건화 된다. 그럼 주님이 사건화 되려면 전(前)도 사건 안에서 살아있어야 되고 후(後)도 사건 안에서 살아있어야 되죠. 그걸 제가 뭐로 표현했습니까? 햄버거의 두 빵이라고 설명했죠. 햄버거 안에 중첩된 거예요. 햄버거 두 빵 사이에 패티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그 디도서보면 “중생의” 그다음 나온 단어가 “씻음”이에요.(딛 3:5) 씻으심이라는 것은 반드시 피가 나와야 가능해요.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피 없이는 씻으심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세계에 초대한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이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자기 이름이 사건화 된 속에서 우리도 동일하게 사건화 되게 하는 거예요.
햄버거의 위쪽과 아래쪽 빵이 시간의 흐름에서 탈피해서 중지가 되어 있어야 돼요. 과거와 현재가 같이 중첩되어 있다면 그 안에서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가 돼요. 왜냐하면 존재가 사건 되려면 존재는 죽어야 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유일한 존재는 신랑의 이름이 있으면 신랑만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신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들어감으로써 우리가 사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제가 로마서 10장을 이야기한 거예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0:13).
구원을 얻는데 그것을 어디 가서 발견하느냐? 발견하는 게 아니고 듣는 거라 했어요. 듣는다는 것은 말로 되는 거예요, 말. 왜냐하면 인간세계가 언어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언어의 세계에 들어와서 언어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지 않고 듣는 데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물론 보냄을 받은 자가 들려줘야 돼요.
그렇게 되려면 (전과 후) 둘 사이에서 나의 것이 빠져야 되죠. 내 이름이 빠져야 되니까 내 안이 공기주머니가 되는 겁니다. 내 안이. 그걸 신랑은 아가서의 신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포근히 담고 있는 봉한 spring, 봉한 fountain, 봉한 샘이라고 이야기했어요.(아 4:12) 봉한 샘이거든요. 샘인데 봉해졌어요. 이게 안 봉해져버리면 나는 주님의 사랑받았다고 까불기 때문에 입을 막아버려야 돼요.
그렇게 말 많던 욥이 직접 하나님 만났을 때 죽은 자처럼 됐거든요. 욥이 죽은 자 되었다는 말은 욥 자기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stop이 된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입을 막고 다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그러면 봉한 샘이 되는 거예요.
봉한 샘이 되니까 신랑이 보기에 신부 안에 그게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신부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신부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공백의 주머니. 공백의 주머니가 새로 생긴 거죠. 신랑은 그걸 보고 감사하면서, “너는 내게 속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게 속했다.” 우리는 주님 이름에 속한 거예요.
그게 사랑이 사건화 되는 겁니다. 사건이라는 말은 세월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행동을 어떻게 개차반처럼 한다 해도 내 안에 있는 공기주머니가 쭈그러들고 이런 일은 없다 이 말이죠. 확정난 거예요. 확정일자 있죠. 확정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럼 샘이니까 거기서 날마다 중생의 씻으심이 나오니까 패티 육즙에서 피가 계속 나오는 거죠. 예수님의 용서의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건화된 것처럼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사건화 되어버렸어요.
성도가 사건화 되니까 예수님이 하는 모든 말을 그 당시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는 것처럼 성도가 하는 말도 성도 외에는 알아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단어는 전부다 인간들이 쓰는 단어와 용어들로 이어지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취지인지 그 의미가 뭔지 불신자인 성령 없는 사람들은 들어도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그게 사도행전 마지막에 나오죠.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설교해도 너희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28:26) 이 말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썼고(13:15) 이것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6:9) 이 세상을 심판할 때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 마지막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성도가 하는 말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단어는 뭐냐? 감사하다는 거예요. 불신자들이 보면 “감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사는 꼴을 보니까 감사할 게 어디 있다고 감사가 되느냐?” 그런데 범사에 감사해요.
이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5:18) 이것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 이해되는 통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예요.
이제 사건의 동결 의미 아시겠죠?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준 구원의 작업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미 동결된 주머니 안에 있는 행동으로 셔벗 얼음과자로 만든 그것이 바로 셔벗, 동결입니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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