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2~3)
“그러나...” 말씀을 보면서 나라는 영물은 늘 듣고 간직할 것과 듣고 버릴 것을 분리수거 한다. 그래서 내가 주를 위해, 주의 영광을 위해, 주의 이름의 공적을 증거하며 수고하고 인내하고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한 것을 주께서 기억하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결론은 “그러나...”를 동반해서 나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그래, 한때 나름의 뜨거움이 있었지. 그 순간만큼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주를 향한, 말씀을 향한 간절함이, 사모함이 있었지’라는 육적 스토리를 잊어버린 것에 주께서 분노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주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십자가를 굳건히 붙들고 있는 나의 손에 분노하시고, 주를 향한 나의 사랑에 분노하고 계신다.
나를 덮친 처음 사랑은 내가 사람이 아니었기에 느낄 수가 없는, 느껴지지 않는 사랑이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십자가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어서 나의 손이 무용하여 팔을 벌리고 자포자기하게 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종잇장에게 사랑을 느낄 폭은 없다. 맑으면 팽팽하고, 슬픔이라는 물에 젖으면 쭈글쭈글하면 되고, 종이 위에 메세지가 써지면 보이는 이에게 전달되면 그만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요8:32~33) 진리가 처음 찾아왔을 때 나는 그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격렬하게 맞서 싸웠다.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고 나의 주인은 나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니, 평온했던 마음속으로 찾아와 아수라장을 만드는 진리를 적으로 간주했고 사정없이 난자했던 투쟁의 현장이었다.
죄의 종에서 해방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복음에 조금도 감사할 수 없는 그 모습이 내 안에서 펼쳐진 처음 사랑이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사랑은 있을 수 없고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만 있음을 비치는 모습이었다. 지금 나는 주를 핍박하는 십자가를 버렸다. 싸움을 피하고 싶고, 철든 어른의 모습으로 주님을 공경하며 사람다우려고 노력한다. 완전히 무가치한 죄인은 아니고 싶어서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하겠소이다’를 마음에 담고 있다.
이렇게 처음 사랑은 버려졌고, 그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뿐이다. 가능한 것들.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착하고 싶은 것들. 그러니 주의 성령이 이를 낱낱이 책망하시며 “너는 주님에게서 끊어지고 버림받아 마땅하다”라고 하실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없는 안도와 감사가 올라온다.
요한계시록 2장의 말씀이 응함이 눈앞에서, 마음속에서 펼쳐질 때, 내가 볼 수 없는 것이 보이기에 나의 시선이 아니고, 내가 없고, 나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잠시 그냥 기뻐진다. 슬픔과 수고가 본분인 안개같은 피조물에게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하시는 것 외에 이 세상에서 무슨 낙이 있을 수 있을까.
육체 주제에 자신이 무슨 말씀을 지키고 어기고, 처음 사랑을 지키고 버릴 권한이나 능력은 없다. 육체는 육체에서 멈춰야 한다. 미리 연출하며 잠잠해지지 말고, 단락지어주시는 그분의 능력 앞에, 처음 사랑을 버리게 만드시면서 말씀을 말씀대로 지켜내시는 주님의 행하심 앞에 비로소 잠잠해지면 된다.
그러나 단순히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내놓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 되심을 알고 잠잠해진 것이 아니라 나의 나 됨을 지키려는 잠잠함인 것을 말씀이 아니고서는 분별할 수가 없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하면서 잠잠했다. 그는 주의 일관된 행적을 심판 속에서 잠잠히 중개할 스피커였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증거가 살고 있음을 전멸의 마땅함 속에서 목격하는 도구였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46:10) ‘봐, 말씀에도 써있네.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잖아’ 나에게 유리한 해석은 자동으로 올라오고, 그것이 나를 다독이며 진정시킨다. ‘괜히 피곤하게 말씀에 시비걸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다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참 고마운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해석하는 관점을 주님 쪽으로 돌려놓지 못하면 율법을 알고, 그리고 말씀을 알고 지옥에 가야 할 더욱 타당한 명분을 한 아름 안고 버려진다. 그러나 해석 관점의 전복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아들에게 율동을 가르칠 때, 미리 짜놓은 안무의 법칙대로 교사가 시범을 보이고 아이들은 그 동작을 보며 따라 한다. 그런데 위치와 방향을 표현하는 상황이 오면 율동 교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규칙을 스스로 깨고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움직여준다. ‘반짝~반짝~작은 별~동쪽 하늘에서도~서쪽 하늘에서도’ 이 부분을 유아들에게 가르쳐 줄 때, 설명서는 ‘오른손을 들어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하늘을 가리킨다’라고 쓰여있지만, 마주 서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오른손을 들게 하려면 교사는 왼손을 들어야 한다.
유아들은 언어와 개념형성이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들이 아이의 편에 서서 대신 생각을 담당해줘야 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사고가 일찍 발달해서 오른쪽 왼쪽을 정확히 알고 있는 똑똑한 아이 있다면, 그 아이는 책상에 놓인 율동설명서를 보고 나서 선생님에게 이렇게 항의할 것이다. ‘선생님은 왼쪽, 오른쪽도 모르세요? 왜 율동 법칙대로 안 하고 잘못 가르쳐주세요? 선생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성의 없이 가르치고 계십니다. 선생님을 믿을 수가 없네요’라고 항의한다면,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너는 오른쪽 왼쪽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있으나 나와 같은 쪽에 있지 않기에 내가 너희들을 향해 보고 느끼는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설명서를 이해한다고 하니 오히려 너는 무지하고 나의 오류가 보인다고 하니 소경이다. 나의 옳고 그름을 보지 못한 아이들은 차라리 내가 지시하는 동작대로 움직여서 나의 작품을 잘 표현해준 의로운 아이들이 되었다. 재롱잔치의 주인을 위한 아름다운 몸짓이 완성되는 것은 똑똑한 지식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와 같은 몸짓이 되어 통일성에 참여했는지가 중요하다’
오른쪽, 왼쪽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몸 중심이고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자연을 배제시켜도 독자적으로 어느 쪽이 오른쪽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서남북의 방위는 밀폐된 공간에 갇힌 채로, 어디가 동쪽이고 서쪽인지 정확히 방위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 세계가 있어야만 방위가 유용하고 인간은 그 방위를 이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방위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져야 하는 자연의 일부이고 객체일 뿐이다. 자연은 늘 한 분을 위해서만 방향을 가리킨다.
그런데 율동을 배우던 아이는 법칙을 오해했다. 법은 그 아이가 지키는 용도가 아니라 자기가 주체라 여긴 자신의 생각이 죽어야만, 진짜 주체가 혼자 지키고 완성하신 작품이 죽은 나를 통해 표현되는, 즉, 주의 이름의 노선을 안내하는 설명서였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다고 착각이 올라오는 순간 홀로 일하고 계신 주인공은 항상 가려지고 도리어 나의 핍박의 표적으로 바뀐다. 사울왕이 창을 들어 다윗을 벽에 꽂아버리고 싶었던 동일한 충동질이 올라온다.
만남이 붙이심으로 바뀌는 사건에서, 가짜가 자신을 가짜로 드러내려는 배출증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목격한 진짜 가짜는 불쾌하다. 상대에 대한 신뢰감이 돈독했던 셀프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기억 속에 쭉 연결된 채,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고통에 내가 괴로워한다. 나는 가짜라고 했던, 나는 이미 죽었고 쓰레기라고 했던 그 말이 고스란히 나에게 회수되면서, 가짜 아니고 싶은 내 마음을, 예수 안에 있다는 나의 확신을 들쑤시는 상대방이 미워지며 속으로 소리친다.
‘네가 믿음 있는 척을 똑바로 해야, 너를 바라보는 내가 계속 나를 속일 수 있단 말이야! 신앙인답게 좀 똑바로 해! 가짜라는 거 들키지 말고! 그래야 나도 보이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계속 믿을 수 있으니까’
하나님의 비웃으시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 말도 우습고, 말씀도 우습다. 예수님이 빠진 창조가 허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준은 고사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밖을 지으신 분이 속도 만드셨다는 것을 정말 믿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정작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버리시고 피조물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셨는데, 나라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등 됨도 시시해서 이제는 하나님보다 위로 가려고 전력투구를 한다. ‘내가 반드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내리라’ 예수님에 대한 사모함이 아니라 살기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같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그분을 알 수 있을 거라 착각했기에, 예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그분을 관찰하려고 뽕나무에까지 올라갔다. 그런 삭개오를 주님은 친히 아래로 끌어내려 주시고 예수님의 낮아지시는 자리에 동참시키셨다. 그의 집으로 침노한 환상이 삭개오를 실체가 아닌 비유로 만들어주셨다. 끌어내려 주시는 손길이 없고서야 인간은 절대 아래로 내려오는 길을 모른다. 사람 안에 끊임없이 위를 갈망하는 악마의 욕망에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으로 내어쫓긴 뒤, 고향을 그리워하듯 천상을 바라는 마귀의 추억. 기름부음을 받은 천사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아들처럼 그 앞에 왕래하고 모든 일에 흠이 없이 완벽했던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를 드러냈다.(에스겔28장 14~15) 하나님의 일하심은 가름의 기준이 될 아들 한 분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이었고, 그 기준의 칼날 앞에 복종과 불의가 갈라지게 허락하셨다. 예수님의 주되심만 기쁘다고 하면서 내 안에 불의가 드러나는 것이 기쁘지 않다면 그것이 바로 주의 처음 사랑을 버리고 나의 사랑을 붙잡은 불복종의 모습이다.
새벽이 당연히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호흡과 생명을 주셨기에 만물을 여전히 베풀어 놓으셨기에 육체가 움직이는 것이고, 그러니 받은 것이 없다고 내뺄 수가 없다.(행17:25) 안으로 들어온 것 중에 내 것이 하나도 없는데 받은 무엇으로든 나를 구성하려고 이용하는 것은 강도요, 사기이다.
이제 다 알았으니 나라는 가짜 실체를 버리고 허구같은 말씀을 진짜 실체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말씀에 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를 실체로 놓고 말씀을 환상으로 밀치면서 나를 조작하고, 보호하고, 죄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투를 멈추지 못한다. 누가 감히 흉악한 마귀를 대적한단 말인가. 사람은 못 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19:26)
내가 환상이고 비유임을 알게 되는 자는 안에 말씀만 오롯이 실체로 드러낼 것이요, 아직도 내가 있고, 내가 실체라는 것을 버리지 못했다면, 주의 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육신에 싸서 감춰놓았기에 결국 있는 것도 빼앗기고 악한 마귀의 종이라는 죄목으로 밖으로 내어 쫓기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는 장가갈 남자도 없고 시집갈 여자도 없다고 하셨다.(마22:30) 천국에 없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 보일 때, 인간은 자신을 여자라고 또는 남자라고 또는 사람답다고 규정할 주체에서 이미 비켜있다. 천국과 지옥이 실체라고 믿는다면, 모호한 것이 실상보다 더 진짜라고 믿어진다면, 이 세상은 모형들의 움직임을 주관하시는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의 뜻을 표현하는 영역이라는 것이 더욱 믿어져야 한다.
정말 믿는다면 반드시 내가 내용 없는 텅 빈 껍데기이고, 그림자임을 의심치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을 향해 죽음의 폭격을 가하시는 주님께 도리어 ‘이미 악마의 인질은 죽었습니다. 마음껏 저라는 허상을 공격하시고 악마의 궤계를 무너뜨려 주세요’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러나 내 신념 말고 나를 뭉개는 그 믿음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표출되는가. 인간의 완악함으로 쪼개지는 바위의 틈에서 생명의 피가 흘러나오듯, 환상이 쳐들어 와서 실질적인 육체를 이미지로 바꾸고 환상이 실체로 뚫고 나와 주셔야 한다.
실체는 따로 있고 우리가 허상이고 비유임을 드러내는 단절의 사건은 하늘에 계셔야 할 그리스도의 요소가 기름 부음처럼 부어진 구약의 인물들을 통해서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 아담에서 아담이 분리되게 하는 외부적 요소는 하나님이 지으신 여자였다.(창2:18) 아담의 내부가 밖으로 빠져 나와 아담을 선악과로 안내하면서 죽음의 개입으로 진짜 아담과 아담은 단절되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표상인 것을 알게 된 아담은 여자를 ‘생명’이라고 불렀다.(창 3:20)
아브라함은 약속의 요소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서 아브라함으로 분리되었다.(창22:10, 13) 아들을 잡아야 하는 사명은 하나님의 멈추라는 지시 앞에서 아브라함과 어긋났다. 그는 자신이 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선이 예수님 자신을 보고 있음을, 일하시는 주체는 따로 계심을 알게 된다.(요8:56, 58)
에서의 아버지인 이삭이 야곱의 아버지 이삭으로 어긋나는 것 또한 말씀의 개입이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창25:23)라는 계시가 이삭을 이삭에서 분리시켰고, 야곱 또한 환상이 찾아오셔서 야곱을 야곱에서 분리시켜 참이스라엘을 비치는 비유로 만들었다.
요셉의 아들들에게 야곱이 손을 어긋맞겨 얹은 것을 보고 요셉이 기뻐하지 않은 것처럼(창48:17), 택함을 입은 자들은 자신들의 눈에 기이하고 기뻐하지 않는 외부의 요소에 침공을 받게 된다. 말씀의 이끄심은 하나같이 나와 내가 어긋남을 겪으며,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 몸에 주어진 모든 것을 행해야 하는 분리현상을 겪는다. 야곱처럼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48:19)라고 하며,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주체가 내가 아님을 안다는,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고백을 내놓게 된다.
분명히 행하는 육체가 보이는데 행함의 주체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말씀이 말씀대로 움직였고, 그들은 그 말씀의 응함을 표출해 냈다. 자신은 가짜 아버지이고, 자기의 뜻함이 거짓이고, 자신이 축복의 주인공이 아니며, 자신은 구원자의 표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맹세였다. 약속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은 하나님의 믿음이 홀로 이루어내실 때 그 노선에 참여된 자들을 성경은 믿음으로 행한 자들이라고 부른다.(히11:4~38)
마태복음 21장 28~32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비유를 보자. 명령 앞에서 ‘하겠소이다’나 ‘싫소이다’라는 대답은 무용하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마음속에 돌이킴이 어느 쪽으로 향했는지가 중요하다. 31절에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라는 말씀이 그 방향을 정한다. 아버지의 뜻이 있는 방향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자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쪽이 아니라 32절에 말씀처럼 누가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 이미 마음에 새겨진 믿음이 방향을 돌이키게 한다.
요나가 물고기 배에 갇혀서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그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이용해서 성전의 위치를 파악한 후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물고기가 움직이는 방향성에 함께 휩쓸려, 자신의 몸이 향하고 있는 그 방향을 향해 기도했을 것이다. 사명이 있는 곳에 나의 사명은 잘려나가고 어린양의 사명만 남겨지는 십자가 사건이 생성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발산되는 성전이 있는 곳이다. 성전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고 내부로 침투하신 전체성이 드러나는 곳이 성전이다.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며, 주의 이름을 위해 당하는 미움을 견디고, 누구의 말씀이 참 복음인지를 정확히 분별하는 ‘하겠소이다’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싫소이다’라는 말이 일반이고, 단지 쓰시는 분의 불쌍함을 입는 것과 내버려 둠을 당하는 것이 자석의 끌림처럼 어느 쪽으로 붙고 갈라지는지 흐름에 놀아난다. 환상에 휘둘리며 놀아나는 육체가 자신을 실체로 착각하며 멈춰서 상대를 판단하는 허다한 말들은 결국 허공으로 흩어지는 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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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그의 집으로 침노한 환상이 삭개오를 실체가 아닌 비유로 만들어주셨다.”
자아가 살아있는 한 모든 것이 쇼이다. 코메디언으로 살다가 육신의 해체와 소실과 더불어 자신의 거짓말도 그만두게 된다.
경박스러운 매일의 삶.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기주머니였다. 예수님의 껍질로 전환되어 보이지 않는 주님 움직임의 징후(그림자)로 사는 자가 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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