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 하나님38-송장의 할 일

아빠와 함께 2023. 12. 11. 21:15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8 - 송장의 할 일

23,12,04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4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네모상자 속에 성경말씀이 하나 나오는데, 고린도후서 13장 4절의 말씀입니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 약하신 예수님 !!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약하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약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하는 자들은 강해지는 것이 목표일까요? 약해지는 것이 목표일까요? 강해지는 게 아니고 약해지는 게 목표라는 말이죠. 즉 "약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주님을 믿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강해지는 것이 목표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래서 "여자여, 여자여, 약해지면 안 돼" 라는 노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과연 있을까요? 그런 자들은 없다는 말이죠.

* 예수님만이 '길' !!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기 위한 길을 가셨는데, 그 길은 예수님이 단독으로 가시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길'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미리 개척한 길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들이 찾아갈 수가 없는 길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고, 약해지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길이 된다는 것이죠.

이에 반해서 인간들은 강해지는 길을 가는데, 그렇게 인간들은 강해지면서 노리고 있는 목표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립하기'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 인생을 자기가 처분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처분' 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즉 자기가 자기 인생의 처분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는 말이죠.

* 자승 스님의 자살 !!

얼마 전에 이것을 시험으로 보인 자가 있는데, 불교 조계종 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던 '자승' 이라는 양반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처분할 수 있다고 여기고는, 그것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만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는데, 자기는 그렇게 함으로서 강한 자아성을 갖추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 이것을 한 마디로 집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혼자 가버린 것이 문제점일까요? 자기 인생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점도 아니라는 겁니다.

* 영적전쟁이 없는 인생 !!

그 자승이 죽으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모든 인연, 즉 인간과의 관계도 사라진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영적전쟁을 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자기 인생 안에 폐쇄적으로 갇혀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악마라는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즉 예수님과 악마의 대결이 이미 약속으로서 정해져있는데, 거기에서부터 기나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면 하나의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영적전쟁을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자살을 했다고 하는 자승의 경우에는 자기 자존심과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 가치의 전쟁인데, 그런 것은 전혀 영적전쟁이 아니라는 말이죠.

교회에서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셨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다" 라고 하는, 그 적을 나타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지만,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면 다 된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싸움을 하는 군사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 성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온 몸으로 떠앉는다 !!

어제 오후시간에 "성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온 몸으로 떠앉는다" 라고 했는데, 그게 성도이고 이스라엘 역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름 차제가 싸운다는 의미인데, 그렇지요? 그러니 야곱의 자기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야곱의 경우에는 그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데, 야곱일 때는 자기 인생만 챙기면 그만이었지만,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주신 것은, 예수님이 벌이시는 악마와 전쟁에 참여하라고 주셨다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죠.

그렇다면 이 영적전쟁에서 적이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뱀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인데, 그 반대편에는 뱀의 후손인 악마가 있다는 말이죠. 그 악마는 이미 인간의 마음을 접수했는데, 그렇게 인간을 장악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악마의 하수인이기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 약한 예수님 VS 강한 악마 !!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반대편에 있는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그것을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조금 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약한 예수님'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약한 예수님으로서 적과 싸운다고 하는 것은, 그 적은 어떤 것을 추구한다는 겁니까? 적은 강해지는 것을 추구하는데, 그렇게 답이 딱 나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약한 분, 그리고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강해진다는 것은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자립한다는 것은 "내 인생은 내가 처분할 수 있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 인생이고 자기 소유라는 겁니다.

* 존재는 소유를 지향한다 !!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라는 것을 간단하게 달리 표현하면, "존재는 소유를 지향한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있는가? 없는가? 라는, 그것을 가지고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소유가 없으면 존재감도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소유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돈인데, 그리고 혈연적 소유인 자식, 그리고 돈보다도 자식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자기 의로움인데, 즉 자기 인생의 의미와 가치라는 말이죠.

이런 것을 하나로 묶게 되면 '나' 라는 것이 되는데, 이 '나' 라는 것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돈을 한 달에 20만원 이상은 벌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야 적금이라도 하나 들 수가 있다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자식은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야 한다는 말이죠.

* 내가 여태껏 무엇이 잘못되었는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자기 의' 라고 하는데, 즉 "내가 여태껏 무엇이 잘못되었는데?" 라고 하는 반문, 즉 "내가 왜 죄인인가?"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언제나 악한 편이 아니었고, 태어날 때부터 좋은 것을 추구하는 의로운 쪽에 속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소유인데, 즉 자기가 사는 이유와 의미, 그리고 자기가 지금껏 살아온 모든 가치, 그런 소유를 묶으면 '나'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런 것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적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금전, 자식, 의로움, 가치, 이런 것들을 모두 다 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고 하니, 예수님에게서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까? 금전, 자식, 의로움, 가치와 같은 것을 다 날아가게 만드는데, 그러한 것을 축복으로 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축복이 받고 싶습니까?

이것을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자 제자들의 반응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175페이지에 보면 누가복음 18장 말씀이 나오는데, 24절에서 27절입니다.

(눅 18:24)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눅 18: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 18:26)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소유와 존재 !!

여기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재산이 있는 자는" 라고 하시는데, 재산이 있는, 즉 '소유' 라는 겁니다. 인간은 소유가 없으면 존재성이 없다는 말이죠. 존재라는 것은 하나의 보따리와도 같은데, 그 보따리를 풀면 소유할 것이 가득히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유할 것이 들어있을 때,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소유이고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 그것을 고대하고 희망하는 목적을 가질 때 비로소 그게 사는 이유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소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더 가지지 위해서, 더 소유하기 위해서, 그것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이죠. 거기서 살아있는 이유가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비단 어떤 나쁜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소유를 추구하는 특정한 나쁜 인간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누구야?" 라고 하면, "나는 한 달 수입이 얼마이고, 자식이 어떻고, 파출소에도 간 적이 없어" 라고, 그렇게 자기의 소유를 다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그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께서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 없는데, 그러니 부자가 아무리 낑낑거려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자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26절에 보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소유에 미쳐있는 인간이 무엇까지도 탐을 내는고 하니, 천국까지도 소유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천국은 사람의 나라가 아닌데, 골로새서 1장 13절에 의하면 천국은 '아들의 나라' 라는 겁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런데 정작 그 아들이 오자 사람들이 그 아들, 즉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예수님은 약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더 강해지지 못해서 난리인 인간들인데, 일부러 약한 쪽으로 방향을 잡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예수님에게서 돌아섰다는 것인데, 즉 "내 인생을 처분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 라고 우기면서 예수님과의 결별을 선언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어서 예수님이 떨어져 나와서 예수님 홀로 이루신 나라가 곧 천국이라는 겁니다. 천국이 그런 나라라는 것이죠.

* 천국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들 !!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천국에서 등을 돌리고, 천국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천국은 방향이 중요한데, 그런데 인간들은 천국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데? 내가 뭐가 잘못이야?"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내 인생에 충실했다" 라는 것인데, 즉 충실한 남편, 충실한 아내, 충실한 엄마로서 살았다는 겁니다. 시장바닥에서 찬바람을 맞아가면서 장사를 했는데, 그러니 그 얼마나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누가 봐도 장한 어머니 상을 받아야 하는데, 따라서 자기의 무엇이 잘못인지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것은 방향성인데, 그러면 인간들이 갔던 방향이 무슨 방향이라는 겁니까? 길로 간 것이 아니라, 길이 아닌 곳으로 갔다는 말이죠. 그렇게 길이 아닌 곳으로 가면서 열심히 살았다는 겁니다. 물론 쉬지 않고 밤낮으로 말이죠.

KBS에서 아침 7시 50분에 하는 '인간극장'을 보면, 전국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모두 다 나온다는 겁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가정의 웃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말이죠. 방송국에서는 그것을 아주 감동적으로 만들어서 방영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몸도 많이 아픈데, 암 4기의 남편을 위해서 온갖 종류의 밑반찬을 다 만들어서 정성을 다해서 돌봐주는 아내가 등장하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자들은 그것을 보고서 "우리 집사람도 좀 본 받아야 하는데" 라고 하면서, 험담 아닌 험담을 한다는 겁니다(ㅋㅋ).

* 영적 전쟁 VS 나의 전쟁

그러면 이게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영적전쟁' 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슨 전쟁만 있습니까? 자기 인생만 건사하는, 즉 자기가 남들에게 꿀리지 않는, 그런 '나의 전쟁'만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전체를 설계했다고 하는 영적전쟁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그냥 무탈하게 물이 흘러가듯이 흘러가고 있다고 하면, 무엇인가를 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지금 전쟁 중인데 이렇게 아무런 일이 없어도 되는가?" 라고 하는, 그 문제를 말이죠.

인간은 자기 소유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모든 일에 매진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과는 반대쪽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는 악마가 있는데, 이 악마는 영적 실체가 되어서 보이지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쪽에는 악마와 모든 인간들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아담이 악마의 마음에 들어갔는데, 우리는 그 아담의 자손이라는 말이죠.

*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왜?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했는고 하니,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이 인간 속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귀신인데, 따라서 "인간은 곧 귀신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어떤 인간도 자기가 귀신이라는 것을 간파할 능력은 전혀 없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과 자기가 분리가 되어야 비로소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즉 성령을 받아서 자기에게서 귀신이 떠났다는 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귀신에서 분리가 된 성도는 어떤 안목을 가지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의 안목으로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영적전쟁의 감이 오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면, 이 세상은 온통 귀신들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자기 소유만 생각하고, 자기 존재만 생각하는데, 그러면서 자기는 잘 살았다고 우긴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성도가 된 자는 이 세상이 그러하다는 감을 잡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사람, 즉 성도가 되는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는데, 제자들도 없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바뀌면 된다는 말이죠. 바로 그 환경을 두고,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소유가 아닌 환경 !!

지식이 아닌 환경인데, 왜냐하면 지식은 자기 소유라는 말이죠. 그러면 환경이 더 큽니까? 자기가 더 큽니까? 환경이 더 큰데, 자기는 자기 소유를 가지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 소유보다도 더 큰 범주인 환경이 자기 소유마저 다 삼켜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귀신이 큽니까? 예수님의 영이 큽니까? 예수님의 영이 더 큰데, 그렇다면 성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 즉 성령에 삼킴을 당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여기서 두 가지의 질문이 나오게 되는데, 즉 "우리가 성도가 된다는 것은, 성령을 소유해서 그렇습니까? 성령에게 삼킴을 당해서 그렇습니까?" 라는 겁니다.

성령에게 삼킴을 당하면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작은 환경, 그게 바로 귀신인데, 그 환경보다 더 큰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환경이 바뀌는 것인데, 그런데 그 환경은 자기 힘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찾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누구의 일이 되는고 하니, 자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가 삼켜버립니까?

"주님의 일이 나의 일을 삼켜버린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영적전쟁의 군인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군인이 되면 무엇이 보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 즉 영적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게 다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 !!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그것은 "A B, A B, A B, …",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의 환경이 똑같이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음 중에서 어느 것이 시계소리입니까? "똑, 똑, 똑"과 "똑딱, 똑딱, 똑딱" 중에서 어느 것입니까? 우리는 "똑딱, 똑딱, 똑딱"으로 표현을 하는데, 여기서 'A'를 '똑', 그리고 'B'를 '딱',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정서가, 그것을 어려운 말로 유기체라고 하는데, 유기체는 스스로 자연에 적응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본능이 있다는 말이죠. 아메바부터 개구리까지, 그렇게 모든 동물은 외부의 자극이 왔을 때는 생체 시스템으로 그것이 자기 생존에 유리한지 불리한지, 그것부터 따진다는 겁니다.

* 파충류의 뇌와 인간의 뇌 !!

인간의 두뇌 아랫부분에는 파충류의 뇌가 있는데, 이것을 과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데, 물론 거짓말인데 말이죠. 처음에는 인간에게 파충류의 뇌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진화가 되어서 지금은 바깥 부분에 피질까지 있는데, 그게 두꺼우면 지능이 더 발달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파충류에 가깝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두뇌는 이 파충류의 뇌에 가깝다는 것이죠.

여기에 이렇게 머리가 있다고 하면 앞부분, 즉 이마 부분인데, 학습과 교육을, 즉 양육을 받으면 이 부분이 발달하게 되고, 점점 더 지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파충류의 뇌에 가깝다는 것인데, 즉 충동과 본능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는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냅다 운다는 겁니다. 왜 전쟁영화와 같은 것을 보면 아이가 우는 바람에 적군에게 그만 들키는 장면이 나오곤 하는데, 아이는 자기 본능에 충실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이에게는 우는 것이 곧 말이라는 겁니다.

* 오은영 박사의 가정심리학 !!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발달하면 언어표현이 되는데, 이렇게 언어로 표현할 때는 외부에서 관여해서 질서를 잡아준다는 말이죠. 즉 배가 고프면 밥을 달라고 하고, 오줌이 마려우면 화장실에 가자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을 시킴으로서 정리정돈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정심리학에서는 어디에 주목하는고 하니, 오은영 박사가 그런 경우인데, 그 가정에서 제대로 정리를 시킨 아이인지, 그렇지 않은 아이인지, 그것을 살펴본다는 겁니다. 만약에 정리를 시키지 않았다고 하면 부부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원인을 탐색해서 부모부터 먼저 질서를 잡고, 아이에게 다시 교육을 시킨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부모가 알고 있는 질서를 아이에게 전수하게 되면, 그러면 그 아이는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규격화가 된 질서에 합세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게 왜 문제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하면 영적전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기가 자립해서 세상 사람들과 섞이기 위한 것인데, 즉 "너만 인간이냐? 나도 인간이다" 라고 하면서, 인간조직에 접속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영적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 말씀은 경계선까지 가서 !!

말씀은 무엇을 노리는고 하니, 말씀은 경계선까지 가는데, 그것이 무슨 경계선이고 하니, 어디까지가 인간세계이며, 어디까지가 말씀의 세계인지, 그 경계선까지 성경말씀이 헤집고 간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갇혀있는 것이 아니고, "너는 말씀에 속한 자인가? 아니면 그냥 인간인가?" 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경계지점까지 말씀이 계속해서 활동해서 간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극점, 즉 최고점은 어디인가요? 그것은 이미 바리새인들이 보여주었는데, 신을 향한 의지와 열정이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인간은 거기까지만 !!

우리 인간들이 노력하면 천국의 밑에까지는 갈 수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데, 하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세리와 창기와는 같지 않습니다" 라는 것인데, 즉 "죄를 지은 자들과는 달리 나는 천국에 갑니다" 라는 의미인데, 요즘 말로 하면 그게 '종교' 라는 것이죠.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종교는 거룩을 표방하고 만들어내는데, 그래서 그 거룩을 자기가 소유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 라는 존재는 나중에 어디에 간다는 겁니까? 죽으면 천국에 가도록 생산을 해주는 것이 바로 종교단체라는 말이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가 종교인데,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이런 것들이 모두 종교라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에 심취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영적세계를 뚫어보겠다" 라는 시도인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자기는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열정까지도 다 소유를 했으니, 그러면 자기가 약해졌습니까? 강해졌습니까? 자기는 강해졌다는 말이죠.

* 베트남의 독립투사, 틱꽝득 !!

베트남에 '틱꽝득' 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가 분신을 함으로서 그게 계기가 되어서 베트남이 독재에서 벗어나서 공산화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가 추구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는 종교인인데, 그래서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살아갈 만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려고 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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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꽝득(釋廣德, 석광덕, 1897~1963,6,11) 베트남의 승려. 남베트남 정부의 불교 탄압에 항의해 소신공양으로 분신자살을 하였으며, 이것이 남베트남 사회의 공분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종식을 불러와서 베트남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 참고로, 틱낫한(1926,10,11~2022,1,22)과는 다른 분인데, 그도 베트남의 종교 지도자였음. - 네이버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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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게 영적전쟁입니까? 마귀전쟁입니까? 마귀가 추구하는 것이 이것이라는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가시는 길에 제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종교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데, 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을 신으로 올려보내기 위해서 신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이고, 바로 거기서 가장 악마적인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거기에 말씀이 찾아간다는 겁니다. 이 틱꽝득이라는 분은 마지막에 자기 몸을 자기가 알아서 처분을 했는데, 인간의 고통 가운데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불에 타는 것이고, 바로 거기에 도전장을 내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얻은 자기 의로움, 자기 희생,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거부하시는데,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틱꽝득이라는 분은 베트남의 독립투사인데, 어느 나라를 가든 다 독립투사들이 있다는 겁니다.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유럽이든 남미든 간에 말이죠. 주요도시에 가면 광장이 있고, 거기에 독립투사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 말이죠.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가장 악마적인 모습이 곧 가장 선한 모습 !!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안중근, 이순신, 세종대왕과 같은 분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가장 악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곧 독립투사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악랄하다는 의미가 전혀 아닌데, 오히려 가장 악마적인 모습인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선한 모습이고, 가장 희생적인 모습이라는 말이죠.

방금 제가 "가장 선하고, 가장 희생적이다" 라고 했는데, 이게 어떤 논리에서 나오는고 하니, A와 B에 있어서, 인간은 A를 지나면 B를 상상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B를 지나면 다시 A를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똑딱, 똑딱" 이라는 것이죠.

물론 시간은 '똑딱'이 아닌데, 그런데 그 시간을 대하는 인간은 언어적 구성으로, 즉 '똑딱'으로 인식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은 무심한 자연에 대해서 질서를 부여해서 내부에 체제를 이룬다는 것이죠. 바깥의 무심한 자연이 내부에서 체제를 이룬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체제를 이루면 'A(똑)'는 'B(딱)'를 지향한다는 겁니다. 첫 번째 'AB'를 '1' 이라고 하고, 두 번째 'AB'를 '2' 라고 한다면, B1은 A2를 소망하고, 그리고 B2는 A3를 소망한다는 겁니다. 상상계에 규칙성을 부여하는 것인데, 그 규칙이 질서가 되고 그 질서가 법이 된다는 말이죠.

* 습관(Habit)은, 나에게 장착된 루틴(Routine) !!

그리고 이것이 몸에 새겨지면, 그게 '습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습관이란, 유기체인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몸에 장착된 루틴(Routine)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자연의 반복성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자기 몸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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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관과 루틴의 - 습관과 루틴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자주 듣는 단어다. 두 용어의 차이가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을까? 신경과학을 전공한 'Anne-Laure Le Cunff'는 그가 만든 플랫폼 'Ness labs'에서 습관과 루틴, 우리에겐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의식까지 세 가지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언뜻 보면 두 용어는 비슷한 느낌을 주기는 한다. 둘 다 정기적이고 반복하는 행동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습관과 루틴의 가장 큰 차이는 얼마나 의도적으로 인지하고 했는가에 있다.
습관은 보통 특정 신호에 촉발되는 자동화된 욕구이다. 회의를 하기 전 커피를 내린다던지, 출근을 할 때 눈에 보여서 들어가는 편의점, 가방을 챙길 때 자연스럽게 챙기는 에어팟 등등 사소한 것부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과 환경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도록 하는 신호가 된다. 사실 신호는 복합적이고 습관은 아주 작은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내 습관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해빗>에서 웬디 우드는 우리 행동에서 이렇게 신호에 의해 자동으로 촉발되는 습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3%라고 말했다.
반면 루틴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아침에 침대를 정리하는 것,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 글을 쓰는 것, 명상, 홈 트레이닝을 하는 것 모두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뇌는 자동적으로 우리가 요가 영상을 켜고 홈트레이닝을 하도록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습관은 거의 의식하지 않고 일어나고 루틴은 더 높은 의도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박현주Jun 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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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하면 이것이 왜 악마 편에 속했는고 하니, 그 이유는 간단하다는 말이죠. 모두들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그 습관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 라는 것인데, 자기를 위한 습관이라는 말이죠. 즉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 습관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강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강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래서 인간이 습관 안에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어떤 것도 당연하고 마땅하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그렇다는 겁니까? 즉 "나에게 일어난 그 어떤 것도 당연하고 마땅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오직 '나를 위한' 전쟁만 있을 뿐 !!

아침에 일어나면 해가 떠오르는데,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고도 마땅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내부에 있는 습관에 이미 포섭이 되어있어서, 즉 자기가 생존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우리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프지 않고 방글방글 웃어야한다" 라고, 그게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여기는데,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겁니까?

자기를 위한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인간은 자기 전쟁 외에는 다른 전쟁을 전혀 할 줄 모르는데, 출생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즉 자기를 위한 전쟁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는 말이죠.

한국에서 사기를 치던 사고를 치던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상상력이 동원된다는 겁니다. "내 아이가 미국에 가면 영어는 유창하게 할 것이고, 거기에서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왕따를 당하는 일은 없으니 숨겨진 잠재력을 잘 발휘할 것이고, 그리고 미국 시민권을 얻어서 자유롭게 잘 살 것이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미국과 같은 큰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까요? 예를 들어서, "네 아이는 어디에 다니노?" 라고 해서,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에 다닌다" 라고 하는 것과, "콩고의 콩고디아 대학에 다닌다" 라고 하는 것과는 과연 어떤 차이가 나겠느냐는 겁니다.

콩고의 대학은 왜 알아주지를 않고, 미국의 대학은 알아주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나라가 작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네 자식놈은 어디에 가는데?" 라고 해서, "러시아에 간다" 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가지 못하게 해라. 지금 푸틴이 제 정신이 아닌데, 어떻게 하려고?"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 이미 몸에 장착이 되어있는 '습관' !!

그러니 왜 인간의 모든 상상은 자기 소유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것을 '잘된다' 라고 하는데, 왜 상상력이 그쪽으로 가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이미 자기 몸 속에 자기를 강화시키는 습관이 장착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For Me", 즉 "나를 위하여" 라는 것이란 말이죠.

이것은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아닌데, 몸에 스며들어있는 습관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과연 고쳐질 수 있을까요?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누구를 위한 열심이냐는 말이죠. 누구를 위한 성공이고, 누구를 위한 목적달성이냐는 겁니다.

* 이제 해결책을 !!

그렇다고 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하겠는데, 인간은 자기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데, 그것 외에는 없다는 말이죠. 그게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습관화가 되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셨고, 그러자 제자들은 벌벌 떨면서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누가복음 18장 27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이게 바로 경계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눅 18: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힘이 들어도 베트남의 틱꽝득이 한 그 정도는 어떻게 할 수가 있는데, 여러분도 그 정도는 할 수가 있지요? 아닌가요? 남을 위해서 희생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때려죽여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죄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그런데 낯선 환경이 덮치게 되면 !!

다시 말해서, 자기를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 즉 "나는 태어나면서 귀신이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귀신이라고 하는, 즉 이미 악마에 속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그것은 낯선 환경이 덮쳐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낯선 환경이 덮치게 되면 인간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이 결국에는 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낯선 환경, 그것이 곧 주님의 환경인데, 그 환경에서 우리 인간은 이미 죽은 자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 우리는 모두가 다 '송장' !!

이렇게 죽은 자를 '송장' 이라고 하는데, 그렇지요? 이 세상에서는 어린아이가 있고 젊은 사람이 있고 나이든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의 환경에서는 어린 송장이 있고 젊은 송장이 있고 나이든 송장이 있다는 겁니다. 모두가 송장인데, 송장들뿐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 송장들 속에 자기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봐야하는고 하니, "나는 하지 못하나, 주님은 해내신다" 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주님은 해내신다" 라는 것이 부각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미 죽은 송장이라고 하면, 그러면 자기가 물을 마신다든지, 밥을 먹는다든지 하는 모든 일은 누구의 일이 된다는 겁니까? 자기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된다는 말이죠.

죽은 자, 즉 송장은 할 수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인간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안에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송장에게 하나님의 일이 덮치게 되면, 그러면 놀랍게도 영적전쟁의 군사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창세기 32장을 보겠는데, 24절에서 28절입니다.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창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 낯선 사나이를 이긴 야곱 !!

야곱이 낮이 아닌 한 밤 중에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는데, 그 사람과 친하게 지닌 것이 아니고 결사적인 항쟁을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야곱을 이겼습니까? 이기지를 못했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를 공격하는 낯선 사나이를 이겼는데, 이것이 야곱과 하나님 사이의 경계선이라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포기할 마음이 없는데, 바로 그 점을 야곱이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야곱은 죽기 살기로 자기를 지켰는데, 그게 숨어있던 야곱의 본성이고 오늘날 우리의 본성이라는 말이죠.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이 없는데, 감히 자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낸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습관' 이라는 것인데, 즉 우리 몸에 장착되어있는 본능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것은 본능이라는 겁니다. 부부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오늘 강의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 습관을 건드리면 일이 터진다는 말이죠. 그 자기 습관이 바로 자기 잘남인데, 그 잘남을 건드리면 분노가 폭발한다는 겁니다.

* 범사에 감사하라 !!

그런데 성경말씀은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하는데, 그렇지요? 그러니 성경말씀이 우리의 경계선을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모든 일에 감사하라" 라는 것과, "때로는 성질을 내라" 라는 것이 같습니까? 인간들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만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분노가 날 경우를 알아서 조절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러분, 분노가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자기 소유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뺨을 때렸을 때 예수님이 화를 내었습니까? 아닌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약하게 가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약하게 하라" 라는 것이 창세 전의 아버지의 지시였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 말씀은 우리를 경계선으로 !!

오늘 강의의 결론을 내리라고 하면, "지시에 따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 속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주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저는 약하게 살겠습니다. 분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나오면 곤란한데,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제가 주님처럼 약하게 살아서 주님의 나라에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은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라고 하라는 것이 아니고, '경계' 라는 말이죠. 우리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휴전선까지 데리고 가신다는 겁니다. 즉 "너의 막장은 이렇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지금 야곱이 웃으면서 싸웠습니까? "아저씨, 이렇게 할까요?" 라고 하면서 씨름을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야곱은 지금 온갖 신경을 다 쓰고 있는데, 자칫하면 자기가 죽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왜 송장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송장이라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송장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환경 속에 익숙해졌다는 것인데, 즉 습관화가 되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에게 다른 낯선 환경은 없는데, 즉 자기 전쟁 외에 다른 전쟁은 없다는 겁니다. 자기 것을 자기가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전쟁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야곱이 대표해서 보여주는데,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꾸미셨다는 겁니다.

* 드러나는 야곱의 본색 !!

드디어 야곱은 자기 기질과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낯선 사나이를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 낯선 사나이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겁니다. 그 낯선 사나이가 뭐라고 합니까? 낮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노동을 하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이지만, 밤에는 잠을 자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옛날부터 인간들은, "우리가 밤에 잠을 자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산천초목이 계속해서 가동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보았는데, 뉴턴의 만류인력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말이죠. 낮은 인간들이 노동하는 활동기간이고, 밤은 하나님에게 속한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 천사와의 만남 !!

그런데 그러한 밤이 지나고 낮이 다가오니, 낯선 사나이가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낯선 사나이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경계선에 누가 마중을 나왔는고 하니, 천사가 나와서 야곱을 만났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까? 인간의 마지막 극단점, 즉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오로지 누구를 지키기 위함인고 하니, "나를 지키기 위함이다" 라는 것을 까발려서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는데, 그게 낯선 사나이, 즉 천사와의 만남이라는 말이죠.

* 경계선에 선 야곱 !!

그렇다고 하면 지금 우리는 누구를 만납니까? 저와 여러분은 누구를 만납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정작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 아닌데, 아직은 준비단계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낯선 사나이가 떠나가 버렸을 때 야곱은 비로소 감을 잡았는데, 인간들의 세계, 인간들의 환경, 그 너머의 존재가 찾아왔음을 말이죠. 그러니까 야곱은 어디까지 끌려왔다는 겁니까? 인간들이 만든 환경의 마지막 경계선까지 왔다는 겁니다. 물론 바깥에 있는 미지의 환경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인간들의 환경에서의 마지막 끝 지점까지 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경계선, 그 낯선 환경에서 야곱은 누구를 만났습니까? 천사를 만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천사는 그냥 야곱을 찾아온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에게 익숙한 인간의 환경이 아닌 그야말로 생소하고도 낯선 환경을 몰고 왔다는 것이죠. 야곱은 그런 낯선 환경과 더불어서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야곱이 그 이전에 언약을 받기는 했지만, 야곱은 그 언약에 대해서 "내가 이 땅에 잘 먹고 잘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 주셨다" 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즉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시면, 나도 하나님을 인정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 야곱이 천사와 함께 경계선까지 갔는데, 그 경계선에서 씨름을 했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싸움인데, 즉 "내가 죽지 않으면 네가 죽고,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야곱에 천사에게 달려들었는데, 그러면 결과적으로 누가 죽었습니까? 야곱이 죽었습니까? 천사가 죽었습니까?

그게 창세기 32장 30절에 나오는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야곱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 이라고 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의미인데, 부산에 가면 실제로 브니엘 고등학교도 있다는 말이죠.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 나는 송장이다 !!

그런데 여기서 야곱이 굳이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라고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생명이 보존되고 있었는데, 그래서 숨을 쉬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아하,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구나" 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말이죠.

바꾸어서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알던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에 접했을 때, 나는 송장이다" 라는 것인데, 오늘의 강의제목은 '송장의 할 일'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는 송장인데, 그러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게 자기를 위한 일입니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그러니 야곱은 그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을 해왔던 것인데, 그런데 야곱은 그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자기 자존심을 챙기기 위한 자기 인생이라고 여겨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겁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 생명이 보존된 야곱, 그 이유는?

야곱은 천사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분한다" 라고 여겼는데, 그리고 그러한 야곱의 본능, 그런 습관이 천사를 만나서도 그야말로 유감 없이 발휘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야곱은 그만 죽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생명은 보존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무엇이 개입이 되었을까요? 낯선 환경에 주님의 할 일을 압축해놓은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는데, 그 야곱의 새로운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겁니다. 즉 싸워야할 군사,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에서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얍복 강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겁니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러니 야곱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라는 것을 끝까지 보았고, 또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라는 것을 처음으로 겪었다는 말이죠. 물론 야곱은 아직 멀었는데, 요셉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 송장이 할 일은, 새로움으로 지옥을 반복하는 것 !!

그렇다면 송장이 할 일이 무엇인고 하니, 죽은 자도 바쁘다는 말이죠. "송장이 할 일은, 새로움으로 지옥을 반복하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새로움' 이란 것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의 일이 송장과 결합되면서 이 세상의 귀신의 세상이라는 것을, 그게 지옥인데, 그 지옥을 관통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현대건설의 터널을 뚫는 직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길이 없는데 길을 뚫고 나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힘은 새로운 힘이기 때문에, 여기서 감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새롭지 않으면 감사가 나오지 않는데, 새롭지 않으면 분노가 아니면 그것을 참는, 즉 감내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이 성이 좋은 내가 참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감사가 아닌 분노는 억지인데, 즉 인생을 억지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유도 모르고, 해답도 모르고, 방향성도 모르고, 그냥 "내 한 몸 잘 간수하면 하나님께서 순수한 인간으로 봐주겠지" 라고 하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은 누구의 나라인고 하니, 아들의 나라인데, 여기서 아들의 나라라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짜라는 겁니다. 이 세상와 와서 인간들에게 배척을 받은 아들, 그 아들의 나라가 진짜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아하, 내가 배척한 나라가 천국이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죠.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VS '나도 약해져야지' !!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라고 했는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나도 같이 약해지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 끼어 들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데, 자기가 약해지려고 하는 것은 '똑' 다음에 나오는 '딱' 이라는 말이죠.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인간은 습관상 지금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면 '딱'이 나오는데, 즉 어떤 새로운 것을 고대한다는 겁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자기를 강화시켜주는 그 무엇, 그것을 고대한다는 말이죠. 인간은 기대하고 고대하는 것이 없으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자, 즉 송장이라고 하면, 그런 송장이 무엇인가를 고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송장이 기대하는 것을 거부해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그것을 지금부터 질문형식으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말이죠.

* 세상만사가 내 뜻으로 되지 않는다면, 누가?

여기서 먼저 질문을 해보면, "세상만사가 내 뜻으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라는 겁니다. 여기서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마귀", "2번, 주님" 이라고 하면, 여기서 몇 번입니까? 1번은 교인이고, 2번은 성도라는 말이죠. 세상만사가 자기 뜻으로 되지 않는 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분노를 거쳐야, 즉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새로운 감사가 나온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저도 주님을 따라서 약해지고 싶습니다" 라는 것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저도 이제 분노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나오더라도, 똑과 딱, 즉 자기가 예상한 것에서 나오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렇게 이렇게 해서 감사해야지" 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일이라는 겁니다.

* 감사는, 자기 죽음을 경유해야 !!

그러니 감사라고 하는 것은 새로움인데, 이 새로움을 반드시 무엇을 경유하는고 하니까, "하하, 나는 이미 송장이잖아" 라고 하는, 즉 자기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경유해야 나오는 것, 그게 감사라는 겁니다. 송장인데 햇빛을 주시니, 그래서 감사가 나오고, 그리고 밤에는 달빛까지 주시니 감사가 나온다는 말이죠. 겨울이 되면 "추운 날씨를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 저것은 마귀의 짓이야 !!

이번에 독일의 뮌헨에서는 눈이 40센티나 왔다고 하는데,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공항에 발이 묶여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강의에 적용시켜보면, 한국에 오려고 하는데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한국에서는 애가 탄다는 겁니다. 자식이 독일에 유학을 갔다가 오랜만에 온다고 해서 같이 놀러가려고 예약을 다 해놓았는데, 그것을 다 취소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뮌헨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은 왜 타려고 합니까? 그것은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기대를 한다는 것은 자기를 약화시키는 겁니까? 강화시키는 겁니까? 강화시키는 것인데, 그게 기대감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그런 기대감이 있는데, 그런데 비행기가 뜨지 못해서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니, 그것을 두고 "저것은 마귀의 짓이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마귀 짓을 경유해야만, 그 마귀 짓에서 주님의 일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일로 바뀌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뮌헨에 내린 눈도 영적전쟁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칼을 들고 총을 들고 설치는 게 전쟁이 아닌데,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누가복은 9장을 보겠는데, 62절입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뒤돌아보는 습관을 가진 롯의 아내 !!

뒤를 돌아다보는 전형적인 예가 소돔과 고모라 사건인데, 롯의 가정에서 4명이 집을 나왔다는 겁니다. 나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천사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나오다 시피해서 말이죠. 그 중에서 한 사람은 탈락하게 되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치밀하게 구원을 준비하셨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이 네 사람에게 모두 다 적용이 되는 겁니까? 한 사람에게만 적용이 되는 겁니까? 한 사람인데, 즉 끼어들지 말아야 할 자가 끼어든 것에 대해서 빼어내는 원칙, 그것이 바로 뒤를 돌아다보는 것이란 말이죠.

만약에 롯의 처가 등을 자주 긁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등을 긁지 말라" 라고 하셨지 싶은데,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이 아닌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데, 그래서 조건을 걸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정확하게 날아가서 그만 그 사람을 빼내어 버린다는 말이죠.

롯의 부인에게 뒤돌아다보는 것은 습관화가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에 자기 과거가 모두 다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롯의 부인은 주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지, 그게 아니면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겁니다.

* 분노가 아닌 감사 !!

롯의 부인은 그동안 자기 인생을 자기가 처분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남편이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닌지, 자기가 어디에 홀린 것은 아닌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물론 다른 사람들도 뒤를 돌아다볼 수 있었지만, 주님은 단 한 사람만을 지목해서 끄집어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세 명은 왜 뒤돌아보지 않았는고 하니,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조치를 하셨다는 말이죠. 정신을 바짝 차려서 뒤를 돌아다보는 게 아니고,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는, 인간은 송장이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하나님의 일, 즉 성도인지 아닌지, 그것을 분류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은 거기에 적합한 환경을 각자에게 따로 제공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롯은 자기 아내가 되를 돌아다봐서 소금기둥에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그렇게 죽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롯은 감사해야 합니까? 화를 내야 합니까? 분노를 그치고,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 아내가 죽은 것을 좋다고 하면서 춤을 추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속한 환경이 내가 알아서 처분해야할 환경이 아니고, 그야말로 낯선 환경이구나" 라는 것인데, 즉 전혀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환경, 그런 환경이 바로 주님과 악마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 성령의 오심 !!

그렇다면 주님과 악마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예수님이 이겼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이겼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이 오려고 하면 예수님이 이기고 난 다음에 오게 되는데,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이라는 겁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죄에 대해서, 저주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이긴 결과물이 바로 성령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는, 죄를 이기고, 지옥을 이기고, 심판을 이겼다는 겁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 날마다 업그레이드가 되는, '다 이루었다' !!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는, 그 어떤 경우라도 다시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바로, "다 이루었다" 라는 내용이 늘 새롭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을 업그레이드라고 합니까? 새로운 버전으로, 새로운 판으로 교체가 되면서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제 다 이룬 것과 오늘 다 이룬 것이 다른데, 하지만 한결같은 것은 그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건강검진을 하면서 병원에서 장내시경을 하는데, 용정이 마치 씨 뿌리는 비유처럼 여기 저기 골고루 뿌려져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걱정이 될 수밖에 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야곱이 그만 죽게 되었으니 당연히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장내시경을 통해서 불안과 분노를 감사로 이어지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장내시경을 왜 합니까? 죽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살려고 했다가, 새로움에 의해서 "아하, 장내경도 죽으려고 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권사님은 보약을 드시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러면 그 보약을 왜 먹지요? 시간이 없는데, 빨리 대답해보세요. (예, 죽으려고 먹습니다.) 정답인데, 죽으려고 먹는다는 겁니다(ㅋㅋ). 자기가 강화되어서 죽으려고 말이죠. 그것이 우리가 먹는 보약의 의미라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그동안 주님의 안목에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같은 인간들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그것만 듣고 자기를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줄 압니다. 그러니 분노를 지나서 감사가 이어지는, 전혀 새로운 환경이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12,11 오후 2시에 마침.

장사가 너무 안 되어서, 건설현장으로 출동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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