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5 - 난간의 기능
23,10,1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37페이지에서 168페이지 하겠는데, 먼저 13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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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수 교인들은 참된 목사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목사의 '자기 부인'은 곧 자신들의 '자기 부인'을 강요하는 압박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라리 자신을 더욱 더 자랑하는 그런 건방진 목사가 좋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그 목사를 본받아 같이 건방지게 자아를 마음껏 내세울 수 있는 경쟁체제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기분 좋은 것이다. 자신을 천국에 들어갈 당당한 자격자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행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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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과 악, 그 균형감각 !!
교인들은 너무 특별한 사람이 심적으로 부담스럽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 속에는 심리적인 균형감각이 설정되어있다는 겁니다. 이 균형감각이라는 것은, 너무 선하지도 않고 너무 악하지도 않고 적당하게, 그 중간지점에 자기가 살려고 하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선과 악의 중간지점을 어떻게 구하는고 하니, 그것이 보편적 상식이라는 것인데,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모여서 살면, 그러면 인간의 시선은 어디까지일까요? 모여서 산다면, 그 인간이 아침에 일어나서 바라보는 그 일상이 어디까지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동네에 3,000명이 산다고 하면, 아침에 매일같이 보는 시선은 어디까지 바라보겠느냐는 말이죠. 그 마을의 3,000명에까지 시선이 닿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앞에 보이는 지평선까지가 자기 세계라는 겁니다. 그게 심리적 균형감각, 즉 선과 악의 중간에 위치할 수 있는 보편성 상식의 자리가 그 마을의 3,000명 선인데, 그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5만명이 사는 동네로 이사를 갔다고 하면, 자기가 바라보는 그 지평선이 3천명에서 5만명이 되니, 더 넓어진다는 겁니다. 인간은 코앞에 있는 지평선이 자기 세계인데, 그런데 그게 천명에서 5만명으로 넓어지니까, 인간은 자기의 선과 악에 대한 균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5만명짜리의 상식이 여기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죠.
흔히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철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이들의 세계가 자기들 눈에 보이는 지평선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 또래끼리 살면서 나오는 단어, 관심사, 유행하는 것, 그것밖에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너희들은 코앞의 지평선까지밖에 모른다" 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들끼리 살면서 심리적인 균형감각은 잘 맞추고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아이가 친구들에게서 "너희 집의 차는 좋은 차가 아니야" 라는 소리를 듣고 운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는 "그것은 울 일도 아니야"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나옵니까? 엄마가 투입한 보편적인 상식은 500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평선에 입각한 것인데, 그러니 겨우 몇 백명의 지평선을 가지고 있는 자기 딸은 철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죠.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같은 동네에서 아침에 눈만 뜨면 서로가 보고 사귀고, 그렇게 하면서 그 안에서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안도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코앞에 있는 자기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다른 동네에 이사를 가던지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동네의 보편적인 상식에 의해서 그만 튕겨 나오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따돌림을 당한다"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혹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텃세를 당한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너무 야하다 !!
서울의 강남과 같은 곳에서는 나이가 들어도 핑크염색에 쫄바지를 입고 돌아다녀도 전혀 험담거리가 되지 않는데, 그런데 저기 청송의 평균 나이가 80이 가까운 곳에 전원생활을 한답시고, 거기에 가서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면 동네 사람들이 험담을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세계와는 맞지 않다는 것인데, 즉 튕긴다는 겁니다.
보편적 상식으로 균형감각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니까, 그것을 뭐라고 규정하는고 하니, 그렇게 머리나 옷차림을 함부로 하는 것을 두고 '악'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야, 너무 튄다. 저런 것은 서울에서나 통하지 우리 동네에선 아니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불편하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악' 이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기들은 무엇이 되는고 하니까, '선'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감각을 맞추는 것, 그것을 심리적인 균형감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쉽게 말하면 "마음이 편하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제가 묻겠는데, "마음이 편한 것이 과연 진리인가?" 라는 겁니다. 물론 진리는 아닌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기가 사는데 있어서 불편함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기 마음의 안정감을 지켜주니 말이죠.
* 교인들은 참된 목사를 원치 않는다 !!
시작하면서 살펴본 교재에서 "상당수 교인들은 참된 목사를 원치 않는다" 라고 했는데,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교회가 참된 목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새 교회가 친목단체가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되면 교회라고 이야기를 해도 예배시간에는 누가 눈에 보이는고 하니, 사람들이 보인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평소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3천명, 혹은 5만명,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기 마음에 생기는 균형감각이라는 것, 그것은 과연 누가 제공을 했느냐는 겁니다.
* 보편적인 상식 !!
그것은 자기 주변을 둘러싼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상식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공통적 인식, 즉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안에 자기가 들어있으면 포근함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 안에서는 자기가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해서 10년을 같은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들끼리는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게 닮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선과 악의 중간에서 보편적인 상식이 생기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은 악이 아닌 선으로 본다는 겁니다. 즉 보편적인 상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에는 불편하고 튕기지 않으려고 노력도 하고, 기존 교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노력도 했는데, 그런데 10년 정도를 같이 다니게 되면 생각들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평준화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 편한 것이 된다는 것이죠. 의견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데, 그런 사람들은 나가고 없다는 겁니다.
* 그런데 목사로 인해서 안정감이 깨어지면 !!
그런데 여기에 참된 목사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참된 교인이 오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왜냐하면 얼마나 있지 못하면 나가버린다는 말이죠. 그런데 참된 목사가 오게 되면, 그러면 매주 지시나 명령이 받게 되는데, 그러면 무엇이 깨어집니까? 보편적인 상식이 깨어지는데, 왜냐하면 목사가 보편적인 상식보다 더 많은 선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참된 목사가 하는 말이 "성경말씀대로 삽시다.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그러니 서로 희생합시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문자 그대로 옮겨야 참된 성도인데,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라고 했을 때, 교인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하겠느냐는 말이죠.
교인들은 매주 교회에 나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기가 힘들어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목사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이 없는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목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왜 대놓고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압박감이 되어서 심리적으로 불편하다는 겁니다.
* 교인들의 억지스러움 !!
그래서 교인들은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이게 일종의 시소니까, 자기는 선과 악의 균형지점에서 보편적인 상식으로 살았는데, 그런데 목사가 자꾸만 강요를 하면서, 그런데 그 말이 맞다는 것이죠. 그래서 중간지점을 선한 쪽으로 약간 당기는데, 즉 "그래, 목사가 틀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니,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하는 의미에서 좀 당겨보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 자리를 맞추었던 것에서 옮겨지게 되는데, 그래서 이 사이에서는 '억지스러움'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억지니까 얼마 가지를 못하는데, 몇 달을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목사의 개인적인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게 된다는 말이죠.
* 목사님, 올해까지만 !!
예를 들어서, 목사가 설교시간에 복음을 이야기하다가 그만 "사택이 비가 새고 그 환경이 너무 좋지 않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러면 교인들이 그것을 가지고 단체로 나서서 뭐라고 합니까? "목사가 설교시간에 하는 이야기와 자기의 행동이 서로 맞지 않다" 라고 하면서, 장로들에게 그만 입력을 가하게 된는 겁니다.
그러면 당회시간에 장로들이 종용히 목사에게 뭐라고 합니까? "목사님의 설교가 틀렸다는 게 아니고, 집사님들이 목사님의 설교와 행동이 괴리가 있다고 하네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헌금도 제일 많이 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집사가 주동이 되어서 그렇게 나오니, 장로는 목사에게 "위임은 좀 곤란하고, 올해까지만 계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제가 좀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보편적인 상식이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런데 그게 과연 진리이냐는 겁니다.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오늘 제가 교재 137페이지에서 168페이지 한다고 했는데, 그 중간에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라는 겁니다.
모두들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그것이 교회다" 라고 말들은 그렇게 하지만, 그러나 정작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눈에 보이는 지평선인데, 거기서 웅크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 세계에 함몰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 하나님의 친히 기르심 !!
그러면 성경에서 이게 왜 잘못인고 하니,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보면, 여러분 들국화를 아시죠? 그러면 길섶에 있는 들국화를 누가 키웠느냐는 말이죠. 그게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들국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르신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 바로 그 특정지점을 형성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의 경우에, 자기가 어떻게 사는 것이 편안한지, 그런 것을 생각할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 지점으로서, 그런 장소로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마치 들에 피어있는 청초한 들국화처럼 말이죠. 들국화가 지금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의 기르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바람이 불면 들국화는 흔들리는데, 그리고 비가 오면 그 비를 다 맞아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친히 기르심, 거기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공중에 나는 새로 그러하고 말이죠. 주님이 친히 길러주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 길러주심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이죠.
* 특정 지점 !!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들국화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자기 솜씨가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의 존재는 누구의 솜씨이냐는 말이죠. 여기 마태복음 6장에서 인간과 들국화, 혹은 새의 차이점을 어떻게 두느냐 하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특정 지점을 드러내는 우리",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들국화를 기르시고 새를 먹이시는데, 그리고 자기 백성도 친히 기르시고 먹이시는데,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나라와 그 의가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데, 즉 그 나라와 그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특정 포인트, 즉 특정 지점을 형성케 한다는 말이죠.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성도의 시선은 그 너머까지 !!
그러면 조금 전에 한 강의와 연관을 시켜보면, 성도의 시선은 몇 명일까요? 삼천명인가요? 오만명인가요? 아니면 오천만명인가요? 그게 아니고, 성도의 시선은 그 너머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 세계의 심리적 안정감, 거기에 만족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살아가는데 불편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런 것에 머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너머로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자기 세계를 깨고 그 너머의 세계로 어떻게 갈 수 있느냐는 말이죠. 작은 마을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그야말로 소박한 마을 사람들,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항상 하는 그들끼리의 대화, 그게 삼천명의 한계인데, 즉 지평선이라는 겁니다.
인간 자기 눈에 보이는 지평선까지인데, 이것을 '타자', 혹은 '타인'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나' 라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타인의 영향을 받아서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면서, 거기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심리적인 안정감과 정서적인 만족감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인데, 자기 세계의 한계라는 말이죠.
* 성령이 오시게 되면 !!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성령이 오셨다고 하는데, 즉 주님이 성령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시선을 우리가 한꺼번에 다 부여받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성령은 고린도후서 3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겁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이 세상을 다녀가신 분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시선과 인식 안에는 이 세상에 대한 경험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백살을 넘지를 못하고, 만나는 사람도 제한되어있다는 겁니다. 세상 전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를 하다가 의자를 건드려서 물을 쏟았다고 하면, 그것은 의자에 물 컵이 있었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 그 나라의 그 의 !!
인간에게는 선악체제가 있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손해가 되면 악이라는 말이죠. 그러면서 그 중간에서 자기 세계를 형성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선악자체를 능가하시는데, 그러니 선악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죠. 선악에 얽매이게 되면,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생명체제인데, 즉 선악나무가 아닌 생명나무, 그 나무가 있는 것을 두고 '그 나라의 그 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살다가보니까, 이 선악체제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또한 벗어날 마음도 없다는 말이죠. 자기 마음만 편하면 그만인데, 그래서 성경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자기 마음이 불편하면 그만 거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아무리 좋은 소리라도 나에게 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 알고 있으세요"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반발을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마음 편한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즉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 불편하게는 살기 싫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선악체제에서 타인을 만났는데, 결국 그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나의 나다움, 즉 나는 나로 살겠다" 라는 것으로 무장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선악체제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새로운 타인의 투입 !!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길러주신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길러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들국화와 참새와는 달리 인간은 '그 나라와 그 의' 라는 말이죠. 그러면 생명나무에 계시는 분이, 인간은 타인을 만난다고 했는데, 이제는 '새로운 타인'이 투입이 된다는 겁니다. 전혀 자기가 예상치 못한, 전혀 자기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로운 타인으로서 '쓱' 들어와 버린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세상 전부를 다 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냥 자기 마음이 편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세상 전부를 다 알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정서적인 안정감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말이죠. 오로지 자기 세계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동안 내가 너를 길러왔다" 라고 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길라왔다는 겁니까? 우리 자기 세계를 알라고 길러주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세계, 즉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친히 길러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들어올 때 우리는 과연 곱게 받아들일까요? 당연히 거부를 한다는 말이죠.
* 예수님을 밀어내는 교회 !!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게 '나의 세계' 라는 것인데, 이게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이런 자기 세계에서 웅크리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이익인지 손해인지, 그것만을 따지면서 벙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이런 세계에 주님이 찾아오시면, 부담이 된다고 하면서 밀쳐낸다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예수님을 밀어낸다는 말이죠.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하나님을 도입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정말로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우리는 불편해서 다 헤어지게 된다" 라고 하면서, 그래서 예수님은 빼고 추상적인 하나님을 섬기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의 만나는 모임의 장소, 그게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는데 인간들이 튕겼다고 하면,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즉 "인간들이 원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 증거가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죠. 십자가는 살인사건인데, 그야말로 비극이라는 겁니다. 그냥 하늘나라로 돌려보낸 것이 아니고, 죽여서 보내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은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인데, 그런데 그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죽였다" 라고 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세계와 생명나무의 세계는 십자가 사건으로 가로막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지독하게 싫어해서 죽였는데,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그러니 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인간들은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음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는 무엇일까요? 갈 수 없는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고안해낸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 기적을 제공해주는 적그리스도 !!
그렇게 인간들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와는 반대되는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죠. 이 적그리스도는 기적을 제공하는 그리스도인데, 반면에 진짜 그리스도는 인간에 의해서 피해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 편하기 살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그 대상자였다는 말이죠.
하지만 교회가 원하는 그리스도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들에게 기적을 제공해주는, 그런 준비가 되어있는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인간들은 섬기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그게 마음이 편하니 말이죠. 기도하면 응답해주고, 헌금을 하면 복을 주는, 그리고 남들에게 봉사하고 섬기면 그것이 자기 의로움과 성숙과 거룩으로 보장이 된다는 겁니다. 교회가 그런 그리스도를 원했다는 말이죠.
* 지옥의 하나님 !!
우리가 사용하는 교재 제목이 '지옥의 하나님' 인데, 자기 의로움과 자기 성숙과 자기 고상함, 그런 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교회가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나라와 그 의와 인간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의는 서로 반대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중에서 사람들이 어느 것을 원할까요? 당연히 적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게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나오는데,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살후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살후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살후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것을 보면 멸망을 당하는 자들이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를 아니하고 웅크리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에게는 믿고 싶은 그리스도가 바로 적그리스도라는 말이죠. 자기 가정을 지키고 자기 교회를 지키고, 왜 교회를 지키려고 하는고 하니, 그게 부동산이기 때문인데, 즉 자기가 투자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자기 돈과 청춘과 열정을 다 바쳤는데, 그런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집대성이 되어있는, 그것이 교회가 되었던 회사가 되었던 가정이 되었던 자식이 되었던 간에, 그 모든 것을 자기가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누군가가 시비를 걸면 가만히 두지를 않는데, 그래서 그냥 밀쳐버리는 본성을 우리 인간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그리스도이신 주님에게는 비극이 되는데, 인간들이 자기 의로움에 미쳐서 환장을 한다는 말이죠. 이 자기 잘남은 어떻게 구성이 되는고 하니, 타인의 의로움과 비교해서 자기가 우열에 있다고 확인을 하면서 의로움을 챙긴다는 겁니다. "니가 기도를 2시간 한다고? 나는 3시간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렇게 되면 천국에서는 계속해서 끊어진 상태가 유지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끊어진 상태가 어떤 식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이어지기 위해선 우리의 마음가짐이 "나는 적그리스도를 더 좋아한다" 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나의 현재 지점은 어디인가?", 혹은 "나의 소속은 어디인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과 "나는 기분이 좋아" 라는 것과는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겁니다. "과연 어느 쪽에서 나를 길러주시는가?", 혹은 "어떤 분이 나를 길러주시는가?" 라고 하면, 교인들은 당연히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길러주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 때문에 길러주시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 나라의 그 의' 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그 나라의 그 의가 전혀 아니고, '나의 세계와 나의 의' 라는 것인데, 그러니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죠.
이렇게 결과물이 전혀 다른데, 즉 소속이 전혀 다른데,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나의 잘남과 나의 의로움을 도와주셨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 성경말씀과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것이죠.
*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말씀으로 다가갈 게 !!
그렇다고 하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이미 십자가로 인해서 다 끊어졌는데, 그러니 천국에 전혀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타인이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다" 라는 내용을 포함하는 해석으로서 말씀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말씀이 주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해결책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너희에게 말씀으로 다가갈 게"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까, "너희가 이미 일을 저질렀다" 라는 것을 포함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말이죠.
논리적으로 어려운 것이 없는데, 이미 일을 저질렀는데,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오심은 죽은 귀신이 온다고 보면 되는데, 즉 "너희가 나에게 이런 짓을 했잖아" 라고 하면서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말씀으로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70대 할아버지가 타이어가 터져서 그만 거기에 맞아서 죽었는데, 70대니 할 일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길에서 타이어 빵구를 고치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그게 복부를 때려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겁니다. 주인이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는데도 말이죠.
* '난간'을 만들어라 !!
그럴 때는 '주의하라' 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을 신명기 22장에 보면 '난관'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명기 22장 8절을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 22:8)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지금의 이 말씀이 신명기에 속해있는데, 이 신명기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전체가 율법을 위반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들은 이미 그것을 경험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이전에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런데 주셔도 소용이 없는데,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율법을 위반한 상태이기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 가두어서 몰살을 시켰는데, 누가 말인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온 자들을 다 죽이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율법을 주셨는데 지키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원칙대로 다 죽이시는데, 그 기한이 40년이었다는 말이죠.
* 다시 주어진 율법, '신명기(Deuteronomy)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죽이시는 것이 아니고, "네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라고 하면서 율법을 다시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주어지는 율법, 즉 '신명기(Deuteronomy)' 라는 말이죠. '두 번째 율법', 혹은 '반복되는 율법' 이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신명기가 30장까지 되면 어디까지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너희들은 결국 나를 버릴 것이다" 라는 내용까지 나온다는 겁니다. 즉 "너희들은 나를 버리고 필히 다른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케줄대로 된다" 라는 것인데, 그게 신명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신학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다. 모세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그것을 알고 기록한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믿음이 없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신명기를 기록할 때 자기 생각으로 했을까요? 그것이 아니면 모세도 선지자이니, 모세 속에 하나님의 신이 들어있어서 그분이 기록을 했을까요? 하나님이 신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게 바로 기르시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모세를 기르시는데, 그것은 모세의 잘남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세는 주님의 계획을 위한 하나의 지점이라는 겁니다. 지점은 그 자체에 권한이 없는데, 그냥 하나의 포인트인데, 그래서 거기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남자가 되고 싶어서 남자가 된 것도 아니고, 여자가 되고 싶어서 여자가 된 것도 아닌데, 하나의 지점이라는 겁니다.
* 과연 소속이 어디인가?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소속이 어디인가?" 라는 것인데, 지점은 맞는데 그 소속이 어디이냐는 말이죠. 즉 "천국 소속이냐? 지옥 소속이냐?" 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안인가? 예수 밖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묻고 싶다는 말이죠. 또 달리 말하면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사는가? 아니면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서 사는가?" 라는 겁니다.
신명기의 경우에는 마찬가지인데, 신명기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내가 준 율법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게 신명기라는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준 말씀 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를 버려도 말씀은 버리지 않는데, 그것이 지평선 전체의 안목으로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인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생각이 그대로 우리의 생각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그 소속이 하나님과 같은 소속이 된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의 지점도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함께 하게 되고 말이죠.
*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버려도 말씀은 버리지 않는데, 그래서 이사야서 40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모든 육체는 풀이고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은데, 그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은 기어이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하신다는 것이죠.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 신명기의 모든 말씀은, '경계' !!
그렇다고 하면 신명기 22장에서 난간 이야기는 왜 나오는고 하니, 8절에 보면 "집을 지을 때 난간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라" 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 집을 지을 때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해버리면, 그런 일종의 건축 교과서 정도로 여기면, 그러면 신명기의 취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그 포지션이 말씀 안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하는 해석이라는 겁니다. 신명기의 모든 말씀은 경계인데, 물론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죠. 그게 무슨 경계인고 하니, 이미 인간들은 실패했기 때문에, 신약적으로 말하면 지옥과 천국의 경계선이라는 겁니다.
일종의 철조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말씀 안에서 포지션을, 즉 자리를 잡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너희들은 망한다" 라는 것인데, "난간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난간과도 같은 기능, 즉 "너희는 하나의 난간이 되어서, 너희로 인해서 이쪽으로 가면 천국이고, 저쪽으로 가면 지옥이다. 그러니 그것을 모르면 너희들은 망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미 실패한 이스라엘은 이런 경계기능, 즉 경계선 기능자라는 말이죠.
* 성도는 철조망 !!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하나님이여, 왜 저를 성도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철조망의 기능을 하라고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무슨 철조망인가요? 성령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을 모른다고 하면, 제 아무리 마음 편하게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지옥행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조금 전에 설명을 했지만 또 잊어버렸지 싶은데, 성도가 예수 안에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것은 전부를 안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전부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누구를 죽였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인간을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인간은 어떤 그리스도를 원하는고 하니, 적그리스도를 찾을 뿐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의 철조망 기능을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인간의 좁은 시선과 3,000명 이야기를 했고, 그리고 인간은 선악체제에서 자기 마음 편한 것이 최고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거기에서 웅크리고 살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속닥하게 하나님을 도입해서 "우리 죽으면 천국에 가자" 라고 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듣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렇지요? 바로 이 난간, 즉 철조망 기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길게 했다는 말이죠. 우리가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한 것이 문제가 되는데, 하지만 경계는 소유가 아니고, 그 소유를 중간으로 가르면서 지나간다는 겁니다.
* 자기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
벨기에의 어떤 마을은 국경선이 무려 34군데나 된다고 하는데, 5미터를 가면 벨기에, 또 5미터를 가면 독일, 그리고 또 5미터를 가면 네덜란드라는 말이죠. 저도 그와 비슷한 동네를 가본 적이 있었는데 말이죠. 왜 그렇게 되었는고 하니, 옛날에 귀족들이 땅을 사서 모으다가 보니 그런 국경선이 그만 생겼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주님이 우리 인간을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은 우리 인간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너는 얼마나 모았느냐? 너는 얼마나 착했느냐?" 라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은 그런 것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 좁은 시선이 하나님을 죽였기 때문에, 인간은 이미 끝장이 났다는 말이죠. 이미 생명나무와는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신명기의 경우에는 무엇인고 하니, "너희는 이미 끝났지만 내가 너희를 사용하고 싶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인간의 것을 사용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면서 일어난 사건을 증언해 줄, 그 사실을 들추어내어 줄, 그런 말씀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는 자기 세계였다가, 이제는 말씀의 세계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신명기 22장의 다른 구절을 보겠는데, 5절입니다.
(신 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자기 포지션을 지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준 것이라는 말이죠. 계속해서 9절에서 11절까지 보겠습니다.
(신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신 22: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신 22:11)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이것은 둘을 제시하면서 "그 둘을 유지하라" 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 10절에서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라고 하는 것은, 소와 나귀는 보폭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끌게 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만 해석해버리면 그것은 다른 이방 민족들도 할 수 있는 해석인데, 하나님의 율법이 없어도 상식적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의 지붕은 편평한데, 그래서 난간을 쳐서 떨어지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과거 우리나라의 슬라브 구조로 된 집을 생각하면 되는데, 그런 집의 옥상에 올라가면 반드시 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율법이 없어도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선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 강력하게 차이가 나게 하라 !!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지고 율법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차이가 나는 것은 강력하게 차이가 나게 하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 일이 없는 노인네가 남의 일하는 위험한 곳에 와서 구경을 한다든지 하면, 주인은 강력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는 엄청나게 위험한 곳인데, 만약에 타이어가 터지면 죽습니다" 라고 해야하는데, 주인이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고, 그냥 "얼른 가소" 라고, 그렇게만 했다는 말이죠. 할 일이 없다는 것도 문제인데, 자기 자리가 아닌 남의 포지션을 기웃거리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 저것은 하지 말라 !!
아무튼 신명기 전체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 "너희는 애굽과 같은 이방인들의 풍습은 본받아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율법은 "이것을 하라" 라는 것이 아니고, "저것은 하지 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주님이 "이것을 하라" 라고 하시는 것도, 평소에 인간들이 이것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신 것은, 평소에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자기 사랑이 영순위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에게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너는 결국 하나님을 밀치게 되어있다" 라는 것을 기정사실화를 시켜서, "나는 하나님을 밀칠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라는 것을 하나의 보초로, 경계선으로 박아놓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말씀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기까지는 천국이고, 여기까지는 지옥이다' 라고 하는 기능을 감당할 수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선, 즉 천국과 지옥을 아는 시선으로 무장이 되어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밀어 부치는 타인 !!
그러니 우리가 감사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따로 할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냥 살아가는 것이 포지션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하라' 라고 해도 할 수 없는데, 그러면 '하라' 라고 누가 지시를 하는고 하니, 이 세상 전부를 다 아는 타인, 즉 예수님인데 말이죠.
그 예수님이 자기 말씀을 가지고 이미 무능하다고 확정된 우리에게 밀어 부친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신명기를 비롯한 모든 말씀을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고 밀치게 되는데, 그런데 성령은 악마의 힘을 이겼다는 겁니다. 저주의 힘, 율법의 힘, 즉 율법의 저주를 이겼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죽음을 이긴, 사탄을 이긴, 그 힘이 바로 성령의 힘이라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누구든지 이긴 자의 종이 된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죽음을 이긴 그 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데, 즉 성령께서 말씀을 앞장세우면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겁니다.
(벧후 2: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여기서 디모데후서 3장을 보겠습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 돈을 사랑하는 인간 !!
이렇게 말씀으로 오시면, 이것이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말씀으로 밀어 부친다는 겁니다. 여기 2절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다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사랑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물론 처음에는 "하나님도 필요하고, 그리고 돈도 필요합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겸하여 같이 섬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보다도 돈이 더욱 필요하다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고 하시면, 우리는 자기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 예수님을 밀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목사가 설교시간에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물질도 다 채워주십니다" 라고 하면 전혀 부담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디모데후서 3장을 모르십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합니까?"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교인들은 '계약연장취소' 라는 카드를 들고 나오는데, 물론 요즘은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도 없지만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계약직이라서 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자기가 그만 잘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말씀에 대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는데, "지금까지 제가 십일조를 열심히 다 내어드렸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은퇴를 해서 연금을 받고 사는데, 거기에 십일조까지 하면 도저히 생활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웅크린다는 겁니다.
* 모두 토해내라 !!
그런데 주님의 뜻은 우리를 보고 '하라' 라고 하시는 게 아니고, 그런데 주님이 계속해서 '하라' 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로 하여금 토해내게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자기 안에 있었다는 것인데, 우리 안에 적그리스도를 더욱 더 선호하는 요소가 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한 기적을 항상 요청하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을 들통나게, 즉 토하게 만드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말씀의 기능은, 일단 우리에게 와서 우리로 하여금 토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함축해서 말하면, 성경에서는 '자기 의로움'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에게서 토해내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 생존보다 우선인, 자기 잘남 !!
우리 인간에게 생존이 우선이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이 되는 것이 바로 자기 잘남이라는 겁니다. 굶어죽어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잘남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라면을 주면 욕을 듣는데, 우리 인간이 굶어죽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나됨' 이라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고 하니, 우리 인간이 닮은 악마가 흉내를 낸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즉 "나는 나다" 라는 것인데, 그 악마의 마음에 그대로 우리 인간에게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나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있는 마귀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까 예수님은 누구를 이겼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마귀를 이겼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을 우리의 등짝을 두드리는데, 그러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악마성, 그것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것을 우리는 토해낸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인데, 즉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겁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나는 죽기가 싫어요 !!
우리의 번지르르한 말솜씨가 아니고, 우리의 본래 마음, 그것을 토해내도록 하시는데, "나는 주님이 싫어요" 라고 하는 마음이 나올 때까지 말이죠. "나는 죽기가 싫어요. 하나님은 죽어도 아는 죽으면 안 되요. 나는 지옥에 가기 싫어요. 나는 천국에 가고 싶어요" 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집을 피워서 천국에 간다면, 그 천국은 누구의 세계가 될까요? 그러면 자기 세계가 되고 마는데,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고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내가 천사도 아니고 인간인데, 그러면 그런 실수를 할 수도 있지. 그런 일로 지옥에 보내면 하나님이 너무 심하신 것이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해라" 라고 하시는데,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토해내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의 내부를 왕창 다 노출시켜버리는 작업, 바로 그것이 성령께서 말씀으로 하시는 작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토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고 하니, 그렇게 토하면서 자기가 보았던 이 세상에 대한 시선, 자기의 그 한계가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 주님이 보시는 시선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일종의 난간역할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 말씀이 주인공이 되는 세계 !!
그래서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나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바뀐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자기 세계는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런데 말씀의 세계에서는 자기를 지적해주는 말씀이 주인공이 되는 세계라는 겁니다. 바로 그런 세계로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능력인데, 우리가 원하는 능력이나 기적을 주시는 게 아니고, 진짜 기적은 무엇인고 하니, 말씀 안에 자기의 자리가 마련되어있음을 발견이라는 것이 진짜 기적이라는 겁니다. 즉 "내 소속은 내가 아니고, 말씀 안에 나의 소속이 있구나" 라는 것, 그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 응용문제(1) !!
여러분이 이해를 잘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질문을 해보겠는데, 문제는 간단하다는 겁니다. 어떤 목사가 와서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는 교회성장에 열중을 했다고 하면, 그래서 자기는 그것을 알고 "저런 목사는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쫓아내어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거기에 앞장섰다는 말이죠. 그러면 문제는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라는 것인데, 둘 중에 하나라는 겁니다.
오늘 공부한 것의 응용문제인데, 목사가 와서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설교를 해도 "마귀를 이겨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교회성장에만 치중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교회를 키운다고 하는 것은 돈을 내라는 의미인데, 왜냐하면 돈이 없이 되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개서와 스가랴서를 들먹이는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집만 잘 짓고 교회는 엉망으로 해놓으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집과 자식까지도 다 패가망신을 시킬 겁니다" 라고, 그렇게 협박조로 나오면서 돈을 긁어모은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저놈은 적그리스도다" 라고 해서 자기가 총대를 매고 쫓아내는데 선두에 섰다는 말이죠.
이게 나쁜 일인데,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이 빠트리기 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세계에서 건전한 교회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의 세계가 아닌 말씀의 세계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세계에서 무엇을 그리워하는고 하니, 괜찮은 교회를 그리워한다는 겁니다.
* 말씀대로 움직이는 교회는 없어 !!
멋진 교회, 말씀대로 움직이는 괜찮은 교회, 하지만 이것은 친목단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정서적인 안정을 주니 말이죠. 우리의 씨름은 괜찮은 교회 만들기가 아니고, 말씀과 이 세상의 싸움에 우리가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하나의 파수꾼으로, 철조망으로 말이죠.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들국화는 그 자리에 있는데, 자기가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친히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이 기르시는데, 즉 어떤 포지션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이죠. 친히 주님이 자기를 길러주셨기 때문에, 비와 바람이 어떻게 하기 전에 주님이 마르게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들국화의 비나 바람정도가 아니고 '그 나라의 그 의'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나라와 그 의는 자기가 핍박했던 분이 만들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속에 들어있는 악마에 의해서 살해를 당한 분이 만든 세계가 곧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 세계의 범주를 떠나서 진짜 범주 속에서, 무엇이 천국이고 무엇이 지옥인지,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자기의 실패를 통해서 말이죠. 즉 "내가 나의 세계를 고집한다는 것이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모습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기는 주님의 성전의 문지기가 된다는 겁니다.
* 내 하나님의 문지기 !!
그게 시편 84편에 나오는데, 아직 자기 육신이 죽지 않았으니, 이 세상에서 천국의 문지기로서 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서 버티게 하시는데, 그러면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다" 라는 게 아니고, "천하의 괴수가 바로 나 자신이구나" 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지키게 된다는 겁니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러니 목사가 와서 교회성장을 부르짖으면서 돈을 내라고 할 때, 그 목사를 내쫓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나도 그것을 많이 했다. 그렇게 해서 멋진 교회를 만들면 하나님이 받는 줄로 착각했었지"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날마다 말씀에 얻어맞아서 토해내고 책망을 받으면 되는데, 그 세계가 바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그 나라와 그 의' 라는 겁니다.
* 성도는 난간으로서 !!
우리가 현장에서 실제로 어떤 문제와 부딪치게 되면, 남들을 보고 "그것도 모르나?" 라고 하면서 비난하고 싶다가도, 그런데 성령과 결합된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즉 십자가에 죽었던 그분의 힘에 의해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도 나의 뜻이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의 파수꾼 역할을 하라고, 즉 경계선, 난간 역할을 하라고 있는 것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난간이 난간으로 버티고 있어주어야 다른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난간이 자기 자존심을 챙기고 하면 부실 난간인데, 난간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옥을 천국으로 알고 몰려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로 세운다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즉 존재자체가 막중한 임무의 응집이라는 말이죠.
"나는 말씀도 잘 모르고 내가 무엇을 하겠노?"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소속이 어디야?" 라고 한다면, 우리의 소속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늘나라라는 말이죠.
그것이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데, 3절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 20절에도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나는 복음의 훼방꾼 !!
이렇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데,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우리를 보고 "구원을 받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구원은 자기가 받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 구원은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의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기 위한 나라는 천국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자기에게 늘 불편해야 하는데, 즉 "내가 복음의 훼방꾼이구나" 라는 것인데, 그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훼방꾼이 맞는데, 그런데 무엇이 지옥이고 무엇이 천국인지, 그것을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 응용문제(2) !!
여기서 응용문제가 또 하나 더 나가는데, 여러분이 성도라고 하면, 그러면 성도는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포지션, 즉 자리가 있다고 했는데, 쉽게 말해서 천국의 직원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천국에 자리가 있는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말고 전하지 말라" 라고, 그렇게 협박과 공갈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이겨내겠느냐는 겁니다. 그런 많은 사람들 중에는 가족과 친지, 또한 친구들도 있는데, 그리고 자기에게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죠. "네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그런데 십자가는 왜 믿지? 왜 믿어?" 라고 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느냐는 겁니다.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받아들인다. 2번, 배척한다" 라고 하면, 여기에서 과연 몇 번이냐는 말이죠. 이것도 쉬운데, 둘 중에서 하나라는 겁니다. 정답은 1번인데,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게 타인인데, 큰 타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예수님과 비교를 해야 경계선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너와는 달라. 나는 주님만을 믿는다" 라고 해서는 안 되고,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왜 보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자꾸만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잊지 않도록 이런 잔챙이 타자들을 보내어주신다는 말이죠.
* 고마운 잔챙이들 !!
그게 성경에 나오는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잔챙이들을 보내신다는 겁니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그러니 고마운 잔챙이들이 참 많은데, 자기를 길러준 부모도 있고 형제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 축의금을 많이 해준 이모도 있고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자. 이제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재미나게 살자. 그런데 지금은 왜 십자가 복음에 꽂혀서 이상한 소리를 하노?"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주어야 하는데, "형님, 저리 가세요. 이모님, 저리 가세요" 라고 하지 말고 말이죠. 그렇게 받아주면서 "나도 그것을 잘 압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겁니다. "엄마가 나를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지, 나도 그것을 잘 압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 나는 들에 핀 들국화입니다 !!
그러면서 뭐라고 하면 됩니까? "하지만 지금 나의 소속이 그냥 타인이 아니고 큰 타자, 즉 말씀의 소속이기 때문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소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들에 핀 들국화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어쩔 수가 없는데, 자기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특별히 엄청난 일을 합니까?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매일같이 죄를 토해내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 그런 난간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성령과 말씀을 주신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사명과 자리가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냥 밥이나 잘 먹고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되는 줄로 알았는데, 그러면 천국에 가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이미 그 나라와 그 의로 옮겼음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10,26 오후 3시에 마침.
별나라의 공주님이 된 하루, 이제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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