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7 - 원위치
23,11,20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67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에스겔서 16장 6절에서 8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면 상당히 생소하게 느끼지 싶은데,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는가?" 라고 할 정도로 말이죠.
(겔 16:6)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겔 16:7)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겔 16: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너는 '제로(0)살' !!
이것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어진 계시인데, 여기 1절에 보면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람을 현재에 있는 나이대로 보는 게 아니고, 나이가 제로, 즉 처음 태어났을 때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50년, 60년을 살아도 다 무시하고 "처음 태어났을 때 너는 어떤 존재인가?"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거기에 주목하면서 계시가 도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시는 따지고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닌데, 우리가 그런 발상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제로(0)살', 즉 처음 태어날 때의 갓난아이로 규정하시고 말씀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삭제가 됩니까?
* 자아가 무르익었다 !!
예를 들어서, 자기가 50년을 살았다고 한다면, 0살에서 50살까지 되는,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무엇이 무르익는고 하니, 그것을 자아가 무르익었다고 본다는 말이죠. 즉 '나' 라는 것이 무르익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자아' 라는 것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살아가는 동안의 외부환경, 즉 사회적 환경에서 왔다고 본다는 겁니다. 이런 환경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자연환경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는 해와 달과 별, 그리고 공기와 같은 것들이 해당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인공적인 환경인데, 거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나는 것이 바로 가정이라는 겁니다. 이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회로 나아가는데, 여기에는 학교, 군대, 교회, 직장, 국가 등등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가정에서 사회로 나아가면서 환경 속을 통과하도록 되어있고, 그 환경 속에서 '나' 라는 자아가 생겨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자아와 주체로 나눌 수가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 라는 것이 생겼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나' 라는 것은 과연 어디에 필요할까요? 그 용도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자기 혼자 있을 때는 '나' 라는 것이 필요한가요? 필요가 없는데, "나는 이러한 자입니다" 라는 것이 어디에 필요한고 하니,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남이 사회적 환경이라는 것인데, 남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이러한 자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자아 안에 죄가 뭉텅이로 !!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 이 모든 것을 그만 삭제를 시키는데, 즉 묵살로 만들어버리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바로 그 자아 안에 죄가 뭉텅이로 들어와 있다는 것인데, 즉 세상의 죄가 자아 속에 뭉쳐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모르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마냥 아이로 있을 순 없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어른이 되는 게 자기가 살아가는데 유리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자연 속에서 뛰놀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배우기도 하고, 또한 부모의 말도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서서히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인데, 그렇게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의 때보다도 어떤 점이 유리한고 하니, '홀로 서기'에 유리하다는 말이죠. 자기가 스스로 자기답게, 그렇게 되는 것에 유리하다는 겁니다. 즉 남들의 힘을 빌어서 자기 스스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축적, 그렇게 해서 힘을 모으는 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에스겔서 16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너를 피투성이로 보았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 아이를 낳으면 피가 묻어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러한 상태라는 말이죠. 그런 피투성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스스로 챙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내던져진 존재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렇게 간주하신다는 말이죠.
* 인간은 살 수록 죄가 뚜렷해진다 !!
* 죄가 인간을 통해서 구체화가 된다 !!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인간은 살아가면 살아갈 수록 죄가 더욱 더 뚜렷해진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죄가 풍성해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장은 틀렸는데, 바르게 고쳐보면, "죄가 인간을 통해서, 혹은 인간을 사용해서 구체화가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이 두 문장을 차이점을 살펴보면, 먼저 "인간은 살아갈 수록 죄가 더욱 더 풍성해진다" 라고 했을 때,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주어가 인간인데, 그래서 틀린 문장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든 것은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게 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 자아로부터의 초월 !!
그 다음에 두 번째 문장을 보게 되면, 즉 "죄가 인간을 통해서 구체화가 된다" 라고 했을 때는, 죄가 주인공이 되고, 인간은 수단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정답인데,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인간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두 번째 문장에서 기분이 나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첫 번째 문장에선 자기가 주인공이지만 두 번째는 죄가 주인공인데,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자아로부터 초월이 가능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것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악마로 하여금 활동케 하셔서, 자기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말이죠. "나는 어차피 죄인이야" 라고 하는, 그게 바로 벗어난 모습이라는 겁니다.
* 개척교회, 대형교회 !!
"교회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라고 하면 맞는 말인데, 그렇지요? 그렇게 성경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서 그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는 게 교회라고 하면, 그러면 그 교회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게 바로 자아로부터 초월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교회에 와서도 개인적인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교회는 그만 하나의 친목모임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각자 자기의 이익을 최대화시는 집단이고, 그런 단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 이익을 챙기고 싶어도 강제로 챙기지 못하게 하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교회를 무슨 교회라고 할까요? 그게 바로 개척교회인데(ㅋㅋ), 그러면 자기의 이익을 챙겨도 알 수가 없는 교회는 무슨 교회일까요? 그것은 바로 대형교회라는 겁니다. 자기 하나가 어떻게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반면에 개척교회는 강제로 자기 이익을 챙기지 못하게 하는데, 예를 들어서, "이번에 목사님에 그만 허리를 다쳤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일도 나가지 못하고 돌보고 계십니다" 라고 하면,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교인수가 얼마 되지 않으니 모른 척을 할 수가 없는데, 자기 이익을 챙기고 싶어도 챙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형교회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원래 사모님이 특별히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니 목사님을 잘 간호하시면 되잖아요? 그게 사모의 할 일이 아닙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굳이 자기가 특별히 손해를 보고 말고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은 대형교회 !!
그렇다면 에스겔 당시에 이스라엘이 개척교회였을까요? 대형교회였을까요? 대형교회였는데, 그래서 그들은 어떤 생각이었는고 하니, "하나님이 이만큼 우리 이스라엘을 키워주셨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과연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우리가 이만큼 잘 되었다" 라는 것, 즉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인간은 살아갈수록 죄가 증가하는데, 그래서 "나는, 혹은 우리는 이만큼 컸다. 혹은 잘 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이 하나님이라면 여기에 무엇이라고 계시를 주겠습니까?
그래서 주께서는 '피투성이' 이야기를 끄집어내신다는 겁니다. "네가 원래 자리, 원위치를 잊어버렸다" 라는 것인데, 즉 처음 위치를 그만 잊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래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주겠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피투성이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섭섭하게 들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혹시 여러분은 섭섭하십니까? 피투성이의 의미는 "내가 원래의 자리로 돌려주겠다. 원위치를 시켜주겠다" 라는 것인데, 그 원래의 자리에 가게 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에스겔서 16장을 다시 보겠는데, 6절에서 8절입니다.
(겔 16:6)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겔 16:7)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겔 16: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너는 내게 속한 여자, 나의 신부야 !!
여기 7절에서 "유방이 뚜렷하고" 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자기 신부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즉 여성으로 본다는 말이죠. 남편은 이미 확정이 되어있는데, 에스겔 시대에는 여호와가 남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남편이고 예루살렘은 아내가 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언약관계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은 신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주어서 결혼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부에게서 받는 패물은 무엇일까요? 신랑이 신부에게 "이런 것을 해와"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피투성이를 친히 키운 자가 남편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랑의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자기가 멋있게 잘 살고 하는 것이 과연 사랑의 조건이 되겠느냐는 말이죠.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그 자리, 즉 원래 자리, 혹은 원위치, 그 자리에 있으면 그게 최고의 신부감이라는 겁니다. 오늘강의 제목은 '원위치'가 좋겠는데, 우리는 갓난아이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들에게 해줄 것이 없다는 말이죠. 갓난아이를 자아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벌거벗고 있었다는 말이죠.
* 피투성이로 원위치 !!
그래서 8절에서 보면,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너는 나의 신부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너는 나의 여자야. 너는 다른 것에 속한 게 아니고, 내게 속했어" 라고 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고 약속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자기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취하시는 조치이고 행동인데, 그것이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을 주신 분은 인간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물론 하나님인데,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하는 이유가 다 있다는 말이죠.
* 언약을 주신 분은 하나님, 그러면 일은 누가 하십니까?
"언약을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일은 누가 하십니까?" 라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한번 답변을 해보시라는 말이죠. 언약을 주신 분은 하나님인데, 그러면 일은 누가 하느냐는 겁니다.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자기가 하는 일에 관심이 있느냐는 말이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루종일 생각하는 것이 누구의 일이고, 또한 누구의 스케줄이냐는 겁니다. 바로 자기의 일인데, "김장은 언제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무엇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전혀 하자가 없는데, 즉 모든 것이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일은 어떻습니까? 우리 인간은 자기의 일이 항상 미완료가 될까봐서, 거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즉 "내일 놀러 가는데 비가 오면 안 되지. 그러면 안 돼" 라고 하는 두려움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일을 하면서도 항상 미흡함과 두려움과 초조를 감출 길이 없다는 겁니다. 무심코 이야기를 해도 다 맞는데, 예를 들어서, "자녀가 몇 분입니까? - 하나입니다. - 잘 크고 있습니까? - 고2인데,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키우는 것은 다 날아가 버리고, 자기가 키우는 것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데, 즉 미완료가 뒤에 따라붙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자아는 항상 걱정이 떠날 날이 없는데, 그렇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그만 날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무엇입니까? 언약에 대한 방해인데, 하나님의 일을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죠.
* 이미 그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 !!
"하나님이 일하신다" 라는 것을 가장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문장으로 고친다고 한다면, 즉 "언약을 주신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고 계신다" 라는 것을 제대로 고친다고 하면, 그것은 곧 "이미 그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축복인데,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가 염려를 하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전혀 하자가 없이 잘 진행이 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아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일을 해서 그런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우리가 끼어들지 않기 때문에 일이 잘 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끼어들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자아가 설치게 되면,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염려와 걱정이 떠날 날이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전도를 하면서도 그렇게 나오는데, 그렇지요?
전도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인데, 그런데 교회에서 전도를 하라고 하면, 그게 갑자기 자기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목사가 "집사가 되어서 일년에 한 사람도 전도를 하지 못합니까? 성경에는 '내 집을 채워라' 라고 했는데, 지금 옆에 빈자리가 있지요? 그 빈자리를 누가 채워야 합니까? 목사가 나서서 채울까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빈자리도 주의 일입니다 !!
그러면 복음을 안다고 하면 어떻게 나와주어야 합니까? "빈자리도 주의 일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전혀 어렵지 않는데,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몇 주전에 동서에게 점심을 사주고 해서 겨우 교회에 데리고 와서 옆자리에 앉혀놓았는데, 그런데 그 다음주부터 나오지 않아서 그만 빈자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빈자리를 누가 만드신 겁니까? 주님이 열심히 일해서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주님이 일을 하셔서 그 동서를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했는데, 그러니 그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물론 거기에 자기 돈이 5만원이나 날아갔지만 말이죠.
* 우리는 암세포 !!
누가 주의 일을 방해합니까? 우리가 피투성이가 되면 방해를 하지 않는데, 그런데 문제는 자아가 커져간다는 겁니다. 그게 마치 주님의 몸 안에서 암세포처럼 점점 커져 간다는 말이죠. 우리가 주님의 몸 안의 암세포와도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주의 일을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야말로 방해만 한다는 말이죠.
목사가 그렇게 닦달을 내니 상투적인 방법을 동원하는데,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나의 옆자리를 채워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묻는데, "그 자리를 채우면 누구의 체면이 높아지지?" 라고 말이죠. 당연히 자기의 체면이 높아지는데, 그러니 그것이 주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자기 자아의 흠집을 지울 수 있는 일들만 벌이게 되는데, 그래서 타인이 보기에 그럴싸한 것들에만 우리는 매진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일방적이고 횡포인지 모르는데, 피투성이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져간다는 겁니다.
* 야, 누가 키웠는데?
여기서 에스겔서 16장 6절에서 8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말하면, "누가 키웠는데?"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그땐 너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피투성이였어. 그러면 그런 너에게 음식을 주고 옷을 입히고, 도대체 누가 너를 그렇게 키워주었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바로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문제는 자아 때문인데,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주체 때문에 발생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자아를 초월해야 하는데, 자아를 놓아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 자아 속에는 죄가 가득한데, 그러니 그것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이죠.
*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
자아를 초월할 것을 주님이 요구하시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기분이 나빠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복이기 때문에 말이죠. 복이란 것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는데,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김장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죄인인 주제에 김장을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자기 입으로 들어갈 것인데, 장갑을 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ㅋㅋ).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에스겔서 16장의 말씀은 사실 시작인데, 시작이면서도 전체적인 그림을 우리에게 그려주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에스겔서 16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도대체 이 피투성이 인간이 어디서 자랐는가?" 라는 것인데, 그게 인간사회에서는 가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가정부터 하나님의 율법이 투입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인 신명기서 21장을 보겠는데,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취지로 가정에 율법을 투입하시느냐는 겁니다. 18절부터 21절까지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 21: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신 21:19)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신 21: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아멘'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자식 속에 악이 커졌다는 것인데, 피투성이를 가정에서 자기 자식이기에 키웠는데, 그런데 그게 자식을 키운 것이 아니고 죄를 키웠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가정이 다 그러한데, 왜냐하면 주체가 인간이 아니고 죄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율법은 어떻게 나옵니까? "그래, 키워라" 라고 하면서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고, 부모 자체에서 율법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곧 율법을 거부한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십계명의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것인데, 그것은 부모로부터 계속해서 전수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모세율법, 즉 말씀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가정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언약에 의해서 다루어진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언약을 주셨다" 라는 것에 여러분이 동의를 했는데, 그리고 "하나님은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신다" 라는 것에도 동의를 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율법을 주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이기는 것은 율법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겁니다.
* 율법이 가지는 심판의 우위성 !!
그러니 율법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죄를 먼저 유포시켜놓고, 그렇게 유포된 죄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는지, 즉 율법이 가지는 심판의 시행과 적용을 통해서 "죄보다 심판이 더 위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이 율법이 보여준다는 말이죠.
바로 그러한 소재가 율법인데, 그러니 우리가 율법인 성경말씀을 보면서, 무엇이 죄이고, 그리고 어떤 말씀이 이 죄를 심판하는지, 즉 심판의 우위성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부모에게서 율법이 나온다고 했는데, 즉 십계명이 부모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식이 머리가 좀 컸다고 그만 거부하게 되는데, 즉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부모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때려죽여라 !!
이것은 보기가 있는데, "1번, 아직 자식은 나처럼 성령을 받기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2번, 때려죽인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몇 번이냐는 말이죠. 3번과 4번은 없는데, 둘 중에서 하나라는 겁니다. 특히 이 신명기 21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마을의 장로가 와서 그 자식을 잡아가는 것이 아니고, 직접 부모가 자기 자식을 잡아서 데리고 간다는 말이죠.
70이 넘은 노모가 공공근로를 해서 돈을 조금 모아놓았는데, 그런데 그만 자식이 와서는 그 모아놓은 돈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 어머니를 때려서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자기의 술값을 주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게 오늘아침 뉴스시간에 나왔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또 보기가 들어가는데, "1번, 자식 잘못이다", "2번, 부모 잘못이다" 라는 것 중에서, 과연 몇 번이냐는 겁니다. 2번인데, 그놈이 전과7범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처음에 자식이 잘못했을 때 죽이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게 문제라는 말이죠.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곧 자식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다" 라고 엮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피투성이는 단독 존재이기 때문인데, 즉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마치 개인과외를 하듯이 일대 일로 관여를 하신다는 겁니다.
* 자식을 율법이 낳았다 !!
그러니까 부모가 나서서 "주여, 이렇게 하지 마세요" 라고 할 수가 없는데, 부모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는 말이죠. 더 쉽게 말하면, 자식을 부모가 낳은 것이 아닌데, 율법이 낳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더 어려운가요? 말씀이 자식을 낳았는데, 그런데 부모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항상 떠나지 않는 것이 "내 새끼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 패악한 자식을 어떻게 하십니까? 부모 손으로 잡아서 오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경찰관에게 맡기지 말고, 부모가 데리고 오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식을 때려 죽을 때, 부모가 보는 앞에서 돌로 쳐죽인다는 말이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부모의 도리인데,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채찍질을 하지 못하는 부모는 부모의 자격이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부모는 자식을 때리기 위해서 있는데, 왜냐하면 그게 자기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자식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부모의 죄가 대물림이 되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잠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경에서 그런 말씀은 처음 봅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을 많이 읽었어도 말이죠. 성경이 무슨 골라먹는 아이스크림인가요? 여호와의 증인도 아니고, 무슨 신천지인가요? 자기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사용하는, 성경말씀이 그런 용도냐는 겁니다.
* 나의 구원이 아닌, 말씀의 구원 !!
성경을 읽는 원칙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읽어도 전혀 모르지만 말이죠. 그 원칙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죄가 주인공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죄를 주의 말씀이 어떻게 심판을 하고 패는지, 그 내용이 성경에 나와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이 아니고, 자기를 팼던 회초리의 구원인데, 즉 '말씀의 구원' 이라는 말이죠.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성령을 받기 전에는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었지만,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아하,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이용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일은 하자가 없는데, 그대로 잘 진행이 되고 있다는 말이죠. 다만 우리가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신명기를 보겠는데, 부모가 자식교육이 힘들어서 남들에게 맡긴 것이 아닌데, 그래도 교육을 했다는 말이죠. "이놈아,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자식은 그때마다 "다음 죄는 소속의 문제에 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죄는 소속의 문제 !!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죄가 늘어나는데, 인간은 그 점에서 변함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죄는 내가 지으면 짓고, 짓지 않으면 짓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고, 왜냐하면 죄는 소속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죄에 속해있기 때문에, 다만 "죄가 그 사람을 활성화를 시키느냐? 덜 활성화를 시키느냐?" 라고 하는, 그 차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느 한 순간도 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죄이고,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죄 중에서 태어났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다윗이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리고 그 남편까지도 죽이고 하는, 그런 간음죄와 살인죄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는 처음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한 두 번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었고, 그러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란 말이죠.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부모는 자식이 있어야 인간이 된다 !!
그러면 여기서 또 문제가 나가는데, 하나님도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식을 왜 주셨을까요? 이것도 보기가 있는데, "1번, 하나님이 대신 키우기 위해서", "2번, 하나님이 부모를 키우기 위해서" 라는 것인데, 여기서 몇 번일까요? 2번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부모는 자식이 있어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도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말을 듣지 않는 손자가 있어야, 그리고 수능을 친 손자가 있어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인간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 다시 원위치 !!
이 세상은 주님의 언약대로 진행이 되는데, 주님께서는 인간을 피투성이로 보시고 사랑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나는 어른이다" 라고 하는, 즉 어린아이보다 이 세상을 더욱 많이 산 쪽이 주의 일을 노골적으로 훼방을 놓고 있다는 말이죠.
남의 자식은 시험에 떨어지고 회사에 취직을 못해도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자기 자식은 어떻다는 겁니까? "하나님, 제 자식만은 안 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도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식을 통해서 부모를 더 괴롭게 하는데, 즉 "네가 애지중지하는 자식, 그게 너에게 얼마나 우상덩어리이며, 복음을 훼방하는 빌미가 된다는 것을, 너는 너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혹독하게 경험해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자식을 주셨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자식보다는 오래 산 부모가 죄가 더욱 더 많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신명기를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다시 원위치!"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2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복음을 들어도 기쁘지 않을 때 !!
여기 1절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라고 하는데, 그런데 3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처음 사랑을 버리고 제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죠.
우리가 복음을 들어도 기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평온할 때라는 겁니다. (아멘!)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잘 돌아갈 때, 즉 고민거리가 없을 때는 말씀도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말씀은 죄를 겨냥하는데, 그래서 찔리면 찌릿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자기는 하는 일마다 잘 되고 평온하면, 그것은 자기에게 하자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찔리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자식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김장도 다 해놓고,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돈도 좀 벌어놓았고, 그게 무슨 잘못이냐는 말이죠.
그렇게 만사가 평온하다고 여겨질 때, 말씀은 와닿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이 와닿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놓친 것인고 하니, 자기의 본래 위치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본래의 위치를 놓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도 놓치게 되고, 그러면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고마워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었을 때로 돌려서, 그 사랑을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들추어내시는데, 즉 사랑을 회복시키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데, 그래서 우리를 원위치로 다시 돌리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 작업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자가 없고 부지런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원래의 위치가 과연 어떤 위치일까요? 여기서 에스겔서 13장 8절에서 10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에스겔서 16장을 하기 위해서 지금 그 앞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겔 13:8)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또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3:9)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3:10)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 언약의 하나님 !!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우리가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여호와는 어떤 하나님인고 하니까,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소개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서 뭔가 삐쳐서 나온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하나님은 그야말로 가짜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이고, 그런 언약의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 주시는 기능, 빼앗는 기능 !!
그게 바로 출애굽기 3장 14절의 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언약을 주시는고 하니, 주시는 기능과 빼앗는 기능을 통해서 언약을 실현시키신다는 말이죠. 즉 주어놓고 빼앗는 기능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등장시키신다는 겁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욥의 고백 !!
그게 욥기에 잘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욥에게 무한정 주셨다는 말이죠. 욥은 신이 났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은 욥이 그렇게 고백한 것인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신다" 라는 것은, "주신 분이 와서 빼앗기도 하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욥이 인정했다는 말이죠. 이것이 참 놀라운 고백이라는 겁니다.
(욥 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그게 한나의 찬송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고, 그리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아코디언 연주라고 하면, 우리 인간은 아코디언이라는 겁니다. 슬픈 노래든 기쁜 노래든, 연주자의 의도에 따라서 다 흘러나온다는 말이죠.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욥이 그러한 고백을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나도 그 정도는 하겠다" 라고 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나온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어느 새 "주시는 하나님, 주시는 하나님, 주시는 하나님" 이라는 것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죠. 즉 '내 것 만들기' 라는 것인데, 그런 하나님으로 말이죠.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라고 했을 때, "예, 하나님은 빼앗는 하나님, 빼앗는 하나님, 다 빼앗는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라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게 어린아이의 고백인데, 여기서 '빼앗는다' 라고 하는 것은, 주신 분이기 때문에 빼앗아 갈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는 분이라는 말이죠.
* 언약 안에는, 복과 저주가 같이 들어있어 !!
여러분, 자식을 누가 낳고 누가 키운다는 겁니까? 결코 부모가 낳고 부모가 키우는 것이 전혀 아닌데, 하나님의 언약이 낳고 언약이 키운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빼앗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게 곧 언약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언약 안에는 주시는 것(복)과 빼앗는 것(저주)도 같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복과 저주를 함께 주시는 하나님인데, 즉 주시고 빼앗고, 빼앗고 또 주시고,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백성들은 마치 아코디언, 즉 악기처럼 다루신다는 겁니다. 악기가 소리는 낸다는 것은, 그것은 악기가 내고 싶은 소리가 아니고, 연주하는 사람의 뜻대로 소리가 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4박자가 되던 무엇이 되던, 연주자의 의도대로 소리가 나게 된다는 겁니다. 프레임이 "나를 연주해 달라" 라는 것인데, 얼마 전에 광주에서 그런 것이 있었는데 말이죠. 그게 바로 욥의 신앙이었는데, 여러분은 부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간 자체의 어떤 희망과 기대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주신다, 빼앗는다" 라는 것을 달리 표현하게 되면, "보여줄 자와 가리울 자를 구분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이사야서에도 나오고, 요한복음에도 나오고, 사도행전 끝에도 나온다는 겁니다. 즉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행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 영과 육 !!
그러면 이것을 무엇으로 구분하는고 하니, 성령을 통해서 구분한다는 겁니다. 성령이 없는 자에게는 아무리 말해도, 그 사람에게는 가리워진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이렇게 가리워지는 것을 '육' 이라고 하고, 은혜로 알게 된 것을 '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가 알리요? 너희들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너희들이 영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은 설득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작용, 즉 "주신다, 빼앗는다" 라는 것과 동일한 작업으로서, 보여줄 자와 가리울 자를 구분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렇다고 하면 에스겔서 13장, 14장, 15장, 16장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피투성이인 너희들을 광야에서 먹이고 입히고 키워서 신부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가리울 자가 있다. 내 백성이 아닌 자가 있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닌 자가 있어주어야 언약활동이 원활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언약활동은 복만 있으면 안 되고 저주도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주를 받는 자가 있어주어야 약속이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빼앗는 자, 즉 자기 것을 도로 빼앗는 자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가리운 자, 즉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 자, 그런 자들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 율법의 저주기능 !!
아까 신명기 21장에서 율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을 부모가 직접 장로에게로 데리고 가면, 장로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그 자식을 돌로 쳐서 죽여버리게 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기능인고 하니, 자기 자식은 율법을 거부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기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을 때, 그런 기능, 즉 하나님의 아코디언이라는 기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너도 하나님의 악기가 맞아?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는, 너 같은 악기는 이제 필요가 없어" 라고 하면서 발로 차고 부수어 버리는, 그런 일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 여러분이 제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인데, 지금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피투성이는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다루시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좀 크면 영악해져서 군중 속에 숨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율법으로 하여금 군중 속에서 그 숨은 인간들을 다 뽑아내 버린다는 말이죠.
자금 우리에게 이 이야기가 먹혀들지 않는다고 한다면,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군중 속에 숨어버리는 것으로 현실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 나만 그래? 남들도 다 그렇잖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에 남들이 등장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에스겔서 14장을 보겠는데, 14절과 20절입니다.
(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4: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오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 '우리끼리' VS '우리로' !!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군중 속에서 아무리 '우리끼리' 라고 해도, 주께서는 그 '우리끼리' 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 나와, 너도 나와" 라는 식인데,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끼리' 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성령은 '우리로' 오시는데, 오순절에 한꺼번에 오셨다는 겁니다. 개인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성령께서 오시면 기존의 인간들의 존재하는 생리, 습성, 즉 "내 힘으로 안 되면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집단의 힘을 빌리겠다" 라는 것인데,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이미 전제로 한다는 겁니다. "내가 안 되면 옆집에서 돈을 좀 빌리면 되지" 라는 것인데, 그렇게 우리는 항상 타인에게 의존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그게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 다른 선지자를 찾는 백성들 !!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게 '가리웠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아는 부류, 즉 노아, 다니엘, 욥과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부류도, 즉 가리워진 사람들도 역시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가리워진 사람들이 "나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겠다" 라고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신을 섬기겠습니까? 다른 선지자를 찾고, 다른 신을 섬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다른 선지자, 다른 신이 어떤 신인고 하니, 그것이 교재 168페이지에 나온다는 겁니다.
거기에 미가서 3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5절과 11절입니다.
(미 3: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미 3: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 백성들을 협박하는 선지자 !!
여기 3절에 보면, 백성들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어떤 선지자라고 합니까? 뇌물을 주면 평강을 외치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과 같은 것으로 백성들을 협박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그런 선지자는 돈을 위해서 점을 치고, 그리고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겐 재앙이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백성들이 그런 선지자를 찾지 않으면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 선지자를 찾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이 가리워진 자들이 '가리웠구나' 라고 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선지자,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선지자를 찾아간다는 것이죠.
다시 에스겔서 13장을 보겠는데, 10절과 11절입니다.
(겔 13:10)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겔 13:11)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여기 10절에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라고 하는데, 거짓 선지자들, 즉 다른 선지자들이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나와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예쁘장하게 회칠한 그 담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겔 13:17)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겔 13:18)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그리고 17절에 보면, 부녀들이 예언을 하는데, 쉽게 말해서 여자 권사들도 그런 일을 한다는 말이죠. 여자 기도원 원장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신앙상담을 해준다고 하면서 돈벌이에 나선다는 겁니다. 그들이 제공해주겠다는 상품이 무엇인고 하니, 두 글자로 '평강'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쉽게 말해서 "복을 받게 해주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교회를 키우려고 하면 이런 식으로 해야하는데, 즉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고,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아쉬운 것을 달래주어서, "당신은 잘 될 겁니다" 라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놓고,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십일조나 헌금을 받아 챙기면서 목사는 밥을 먹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16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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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볼 때, 종교란 결코 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신화적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화적 요구란, 온갖 역경과 고난을 대신해서 이겨내는 영웅을 기다리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특출한 재능, 신이 함께 함으로 불가능한 난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신적 능력자를 사람들은 고대한다. 자신들의 부족함과 무능을 보상할 위대한 신의 중매자를 찾고 그런 자를 위해 신화적 세계를 현실화해 보라고 그들이 애써 모은 돈 중에서 일부를 비용으로 각출하여 아낌없이 투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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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가 성경에 이미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강의의 제목이기도 한데, 즉 '원위치'가 되지를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마치 자기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은 살아온 만큼 죄를 지었다는 말이죠. 자식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오냐, 내 새끼!" 라고 하면서 받아주었다는 겁니다. 자식을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는 것, 그런 것을 전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에스겔서 15장을 보겠는데, 6절입니다.
(겔 15:6)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민들도 어떻게 하겠다고 하십니까?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 라고 하시는데, 즉 그들도 불에 던지는 화목처럼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불태워버리겠다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해서 봐주고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에스겔서 16장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겔 16: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6: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겔 16: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 너희의 근본은 가나안이다 !!
여기 3절에 보면,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라고 하는데, 성경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왜 에스겔은 그 이스라엘을 향해서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라고 하느냐는 말이죠.
여기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너희들은 근본문제, 너희 뿌리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다" 라고 하는데, 즉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야. 누가 너희들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더 이상 하지 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우리가 그냥 모른 척을 하면 안 되고 해결하고 지나가야 하는데, 그렇지요? 이스라엘은 알다시피 애굽에서 살았던 히브리 민족인데, 그 조상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말이죠. 그들이 애굽에 노예로 잡혀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기에 홍해가 있고, 또한 광야가 있고, 그리고 이렇게 요단강이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이 요단강을 건너면, 아모리 족속의 땅이고, 헷 족속의 땅인데, 즉 가나안 원주민들의 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살던 이들을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통과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고, 거기에 살던 자들을 물리치고 정복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은 자기들의 근본을 철석같이 언약의 민족이라고 믿었다는 말이죠. 자기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비언약의 아모리 족속이고 헷 족속이라고, 즉 가나안 족속이라고는 상상도 하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에스겔서 16장에는 선지자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겉으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너희의 뿌리는 바로, 너희가 정복했다고 여기는 아모리 족속이고, 헷 족속이고, 가나안 족속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너희들은 왜 우상을 좋아하는가?
그러니 족보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우리의 출신이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질문할 수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은 왜 우상을 좋아하는가?" 라고, 즉 그들이 왜 가나안 땅의 우상을 그렇게 좋아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들도 몰랐던 자기의 감추어두었던 그 본성이, 이제 드디어 제대로 같은 뿌리를 만났다는 것이죠. 정복을 당했던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의 뿌리와 정복했던 이스라엘의 뿌리가 똑같았다는 겁니다. "우상을 섬긴다" 라는 공통점을 통해서 그게 드러났는데, 즉 이스라엘의 뿌리는 이방민족에 불과했다는 말이죠.
* 하나님께서는 왜 우상을 제거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다음의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왜 이방나라의 우상을 제거하지 않았는가?" 라는 겁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왜 하나님께서 조성하셨느냐는 말이죠. 왜 우리를 이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나야,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우리가 죄를 지은 아담으로 후손으로 태어나야,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같이 까불고 촐랑거려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마귀를 허용하십니까? 그것은 마귀가 있음으로서, 마귀의 주장과 자기의 주장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마귀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 내가 뭐가 잘못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닌데,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드렸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형식이고, 그들의 본심은 극히 세상적이라는 겁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본심이기고 하고 말이죠.
"내가 뭐가 잘못인데?" 라고 하는 그 한 마디,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았는데, 그것도 죄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게?"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서 또 다시 군중 속으로 숨어버린다는 겁니다. 해답이 없을 때는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서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것을 듣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 바알이 곧 사랑의 하나님 !!
그게 바로 우상을 따르는 것인데, 그 우상의 특징이 '바알' 이라는 겁니다. 이 바알 신은 너무나 친근해서 사람들이 '나의 남편', 혹은 '나의 주인' 이라고 불렀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바알 신에게는 과연 언약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언약이 없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는 말이죠.
이 바알 신은 우리가 이 땅에서 빌면, 모두 다 퍼주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팔공산의 갓바위에 가서 빌면 모두 다 주는데, 하지만 빌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악을 쓰고 금식기도를 하면 복을 퍼주는 하나님, 그게 바알 신이라는 말이죠. 바알 신은 자기 뜻이 없는데, 그래서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빌면 그대로 다 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종교가 없어도 정안수를 떠놓고 새벽4시에 일어나서 빌면 되는데, 그래서 우리 할머니들이 손바닥을 이렇게 해서 비비면서 빌고 빌었다는 것이죠.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새끼들이 남산 위의 노루 새끼들처럼 잘 뛰놀게 해주소서" 라고 하면서 말이죠. 종이를 태우면서 빌기도 했는데, 그러면 종이가 신기하게도 중력을 이기면서 위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주로 정월 초하루나 추석 전에 그렇게 비는데, 가족들이 다 잠을 잘 때 말이죠. 아들과 손자의 이름을 일일이 다 부르면서 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들과 손자를 돌로 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가정이 하나의 집단인데, 그 집단을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 바알 신이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데, 우리가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그 신이 "어머, 무서워라" 라고 하면서 떠나갈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의 잠재된 층에서는 '비나이다' 라는 신이 있고, 그 위의 층에서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마태복음이 어떠니? 구속사가 어떠니?"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서 에스겔서 14장을 보겠는데, 10절입니다.
(겔 14:10)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 같은즉 !!
여기에 보면,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합니까? '같은즉'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놈이나 묻는 놈이나 똑같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인들이 목사에게 욕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똑같은 놈들인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라고 하는데, 즉 집단적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14절에 보면,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다고 하면 이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한 개인을 따로 내세웠다는 겁니다. 그분이 곧 예수님인데,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고 예수 이름으로, 즉 그 이름 속에 우리가 놓여있게 된다는 말이죠.
* 오직 예수 이름으로 !!
그러니 우리의 육신은 예수님의 육신에 들어갔다가 나왔던, 그래서 '함께 있는', 즉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 의식을 우리에게 심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개인이 아니고 주님의 개인이 대신하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노아, 다니엘, 욥과 같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의 의로 우리가 복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피투성이는 스스로 의롭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아담의 육신, 즉 죄가 주체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그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을 욕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 평소에 자기 중심으로 살아왔는지,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돌아보게 해주시고, 이것저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님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고 이긴다는 것을, 그 십자가의 능력을 잊지 않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11,29 오후 1시에 마침.
오늘이 둘째 놈 생일인데, 케익이냐 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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