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36-차이가 담긴 인생

아빠와 함께 2023. 11. 21. 19:07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6 - 차이가 담긴 인생

23,11,0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66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거기에 네모난 박스에 보면 성경구절이 있는데, 마가복음 7장 5절에서 13절입니다.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막 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막 7: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막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

여기 5절에 보면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그런 구조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죠.

인간이 하나님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들을 우리 인간의 대표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심성이 곧 아담의 심성이기 때문인데, 그게 모두 동일한 심성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성경구절 하나하나가 어떠하다는 겁니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 당시에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예수님을 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을 그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했다는 겁니다. 성경구절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질문을 해준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나중에 보면 주님이라고 하는데, 그 주님이 바로 구약의 여호와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스스로 있는 자',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모세도 역시 묻는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하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 라는 것인데, 그 이름 안에 모든 본질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인간은 스스로 있을 수 없는 존재 !!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 즉 "홀로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이 홀로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여기 인간 쪽은 무엇이냐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과연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교회에 와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누구를 만날 때나 잠을 잘 때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친구들이나 부부끼리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있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6장 26절을 보겠습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차이남 !!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있을 수 없는데, 그런데 스스로 계신 분이 친히 가르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기르실 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너는 스스로 있을 수 없는 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 차이,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에서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낸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나는 스스로 있을 수 없다" 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것을 익히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70년을 살던 80년을 살던 간에, "나는 나 스스로 살아온 게 아니다" 라는 것을, 마치 하나님이 새를 친히 기르시는 것처럼 우리는 기르신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나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신다" 라는 것을 증거한다는 말이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전혀 어렵지가 않은데, 어려운 것이 있다면 '차이남' 이라는 것인데,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차이인데, 이것은 어느 정도의 격차 정도가 아니고 완전한 차이라는 말이죠. 이러한 차이남을 평소에 우리가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있지요?

* 그런데 차이가 없다고 여긴다면?

이런 차이남, 그런데 이러한 차이가 없다고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쉽지 않은 질문인데, 만약에 평소에 자기가 이런 하나님과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나오는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과 자기가 차이가 없다고 하면, 그러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힘으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자기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수까지 되었다는 것인데, 그리고 자기가 착해서 자식을 잘 키웠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 가서 어떻게 나올까요? "내가 스스로 잘 한 것에 대한 주님의 선물은 무엇인가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교회가 모두 그렇다고 보면 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를 하니 말이죠.

이런 차이남으로 인해서 인간은 스스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그래서 인간은 이런 차이를 없앰으로서 인간은 스스로 자립한 독립적인 존재로서 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배후에서 누군가가 부추긴 것인데, 그게 누구일까요? 그게 바로 마귀라는 것이죠.

* 그 누구도 나를 끝까지 책임질 자는 없다 !!

이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해보면, "그 누구도 나를 끝까지 책임질 자는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의식이 바로 마귀의 의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를 빼면, 이게 평생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서 마치 바윗돌처럼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나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내가 나를 지켜주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라는 것을 실감나게 경험해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성경말씀을 가까이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그런데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내가 책임을 진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귀가 춤추는 의식이라는 말이죠.

* 날마다 증가하는 분노 !!

오늘 아침뉴스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어린아이들의 분노가 날마다 증거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이들을 흔히 천사라고 하는데, 그렇지요? 여기서 천사라는 것은 "분노하지 않는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마치 분홍색의 솜사탕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아이들은 그런 이미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아직까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즉 분노로부터 차단된 따뜻하고도 다정한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계속해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아직까지 분노가 있지를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사랑의 보금자리를 뚫고 유투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말이죠. 이 유투브는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조회수가 많아야 광고도 붙고 돈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분노를 유발시킬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들은 순간 순간이 분노와 분노로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에 말이죠.

* 왕짜증 !!

이 분노를 달리 짜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짜증과 짜증으로 매일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분노는 풀어야 하는데, 그렇게 풀면서 짜증을 더욱 더 많이 키운다는 말이죠. 감사와 고마움, 그런 없고, 오로지 분노로 집결된 자아상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은 '김길수' 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특수강도죄로 복역을 하다가 이번에 그만 탈옥을 했는데, 아프다고 하면서 병원에 있다가 말이죠. 그 사람이 범죄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방금 한 이야기에 의하면 그 이유는 하나인데, 즉 분노라는 겁니다. 화가 난다는 것이죠.

여러분, 범죄자들 치고 화가 나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요? 아이들은 빼고 말이죠. 그런 경우는 없는데, 그러면 왜 화가 나느냐는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한 이야기인데, 이 세상이 자기의 자립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 말이죠.

* 하나님을 모방한 마귀, 그리고 인간 !!

하나님은 자기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는데, 그러면 마귀는 누구를 모방하는고 하니, 신을 모방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 당신만 스스로 있는 자인가요? 나도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라고 나왔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심성이 그대로 아담과 하와에게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립하려고 하면, 자기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알면 된다는 말이죠.

다시 해보면, 인간은 왜 화가 나는고 하니, "나는 나 홀로 살고 싶은데, 그런데 이 세상이 그런 나의 취지에 부응해주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 속에 욕망이 있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욕망이 아니고 분노가 있다는 말이죠.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서 오는 분노인데, 자기 존재를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방금 '존재' 라는 말을 했는데, 이 존재는 스스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 스스로 있음, 그게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은 스스로 계신 분에 의해서 종속이 된다는 것이죠. 그것을 성경에서는 "친히 가르시나니" 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길러주신다는 겁니다.

* 길러주심과 길러주심을 받음의 차이 !!

그러면 그렇게 길러주심을 받은 새나 백합화가 제대로 있는 겁니까? 길러주시는 분이 제대로 있는 겁니까? 하나님만이 제대로 계시고, 그 하나님만이 '나' 라는 존재보다 앞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길러주심과 길러주심을 받음의 차이, 바로 그 차이점이 유지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유지가 되려고 하면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말씀이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 즉 "하나님은 의인인데 인간은 죄인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 차이, 그 차이점에 대해서 우리가 섭섭하게 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 지금 너를 죽일 게 !!

왜냐하면 섭섭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분노가 있다는 것인데, 여러분은 "너는 나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섭섭하게 들립니까? 여기 칠판에 좀 적어보겠는데, 주님께서 "너는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라고 하면, 여러분은 속에서 짜증이 올라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러면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옮겨보면, 즉 "지금 너를 죽일 게" 라고 한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섭섭합니까? 섭섭하지 않습니까? 짜증이 납니까? 나지 않습니까? 이게 똑같은 문장이라는 말이죠. "너는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라는 것과, "지금 너를 죽일 게" 라고 하는 것이 똑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길을 가는데 갑자기 트럭이 와서 박아서 죽었다고 하면, 그 가족들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원망을 늘어놓겠느냐는 말이죠. 광주 5.18이나 세월호 사건,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 그 가족들은 그야말로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인간들이 위로를 해준다고 하면서 돈을 퍼붓고 했는데, 그러면 그 분노가 사라지는 겁니까?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 소가 있을 때 외양간을 고치자 !!

근본적으로 무엇인가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면 무엇이 바뀌어야 합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세계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세계와의 차이점, 그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소가 있을 때 외양간을 고치자" 라는 것인데, 그래서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후회한다는 말이죠. 그런 바보와 같은 짓은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세계의 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외"양간을 잃게 하고 소가 들어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소와 주님이 생각하는 소가 차이가 나는데, 인간의 소는 자기 소유가 되지만 주님이 주시는 소는 주님이 친히 기르시는 소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평소에 "내 인생은 내가 살았다" 라고 여기는데, 그것을 방금 이야기한 소에 비유한다면, "나는 평생을 내가 알아서 잘 살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자기에 대해서 방어할 것은 방어하고, 또한 확장시킬 것은 확장을 시키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준비한 것은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즉 주님은 "자기 힘으로 살아온 인간은 천국에서 받지 않겠다" 라고 나오신다는 말이죠. 아무리 교회에 잘 다니면서 말씀을 공부하고, 그리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해도, 그런데 그런 행동이 계속해서 누적이 되면 자기를 잃어버리겠습니까? 자기가 자랑스럽겠습니까?

* 신에게 보상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 !!

사람들이 왜 교회에 봉사하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고 하니, 인간 내부에는 분노가 있는데, 그래서 신에게 보상을 받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분노를 누그러뜨리려고 한다는 말이죠.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생기는데, 그래서 교회에 가서 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게 해주시는 것이 고마운 것이 아니고, "내 뜻대로 약간은 보상이 되는 신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 이라고 하는데, 즉 "내가 행한 대로 보상해주는 멋진 하나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하면 그대로 응답해주시고, 그리고 헌금을 만원하면 30만원, 60만원, 100만원으로 돌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했더니만 창고가 차고 넘치게 해주실 때, 그러면 우리 인간은 "야호, 나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정말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라고 하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 잃어버린 외양간과 새로운 소 !!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외양간을 잃게 하시는고 하니, 그것은 '나' 라는 소를 지키기 위해서 있던 외양간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철거를 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곧 사달인데, 그렇게 주님은 자기를 자기답게 했던 삶의 환경 그 자체를 뜯어버리고, 그렇게 외양간을 잃게 만들어놓고는 새로운 소를 주신다는 말이죠.

그 새로운 소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지금까지 행한 것이 전혀 아니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과의 '차이' !!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목숨과 맞바꾸어서 예수님의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인데, 우리를 외양간으로 여기고 여기에 새로운 소가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그게 바로 '차이' 라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라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과의 차이,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평소에 생각한 하나님은 순수한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이익과 자기 보상, 그리고 자기 짜증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욕망자체를 밟아버리시는데,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떤 존재라는 겁니까? 복습 차원에서 다시 해보면,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있지 않다는 것인데,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우리 인간이 스스로 있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있는 것, 인간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는 것, 그것을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는 분노와 짜증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그러면 분노와 짜증에서 벗어나게 되는 양상이 어떠할까요? "분노하지 않는다. 혹은 짜증내지 않는다" 라는 것이 맞을까요? 그렇지가 않은데,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죽을 때까지 분노와 짜증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분노와 짜증, 그리고 감사 !!

그게 순환을 하는데, 즉 분노와 짜증을 느끼면 주님은 은혜를 주셔서 그게 감사로 바뀌면서 차이를 느끼게 된다는 말이죠. 분노와 짜증을 내는 자기 모습,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서 그것이 얼마나 시시한 일이었던가를 깨닫게 되면서 감사와 기쁨이 주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느 정도 가다가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집을 나갔던 분노와 짜증이 다시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무저갱에서 마귀를 풀어놓았다는 겁니다. 가서 성도를 좀 건드리라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다시 "이 세상이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왕짜증을 낸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그냥 곱게 흘러가 주면 참 좋은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왜 자꾸만 사단이 나느냐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이렇게 종이가 있는데, 이것을 손으로 꾸기면 어떻게 됩니까? 이 손 안에는 공간이 생기는데, 그러면 이 공간 안에 자기 것이 담기게 된다는 겁니다.

성도가 감사를 하다가 그런데 집에 가서 짜증이 몰려오면,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준비한 상황이 있는데, 그 상황을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왜 열대식물 중에서 탁 건드리면 바로 오므려드는 것이 있는데, 즉 감사를 하다가 건드리면 본능적으로 그만 자기 안으로 쑤그린다는 말이죠.

* '쑤그리' 인생 !!

'쑤그리'가 무슨 말인지 알지요? 이제는 표준말이 수준이 되어서 다 알지 싶은데(ㅋㅋ), 그렇게 되면 편평한 사면체가 동그랗게 된다는 겁니다. 즉 압력이 내부로 집중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결국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한다" 라고, 그렇게 다시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 종이를 다시 펴는 것과, 그리고 처음의 편평한 종이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 한 쪽은 다시 펴도 쭈글쭈글하다는 겁니다. 주님은 항상 편평한데, 즉 반듯하고 깨끗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쑤그리' 인생이 되어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깨끗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되면 여기서 다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쑤그리' 인생이 된 것을 누가 기르신다는 겁니까? 주님이 친히 기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깨끗함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감사인데, 그러니 우리가 죄인이 될 때 비로소 감사가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감사를 없애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것을 자기 손으로 펴면 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성경말씀을 동원해서 펴려고 해도 이게 펴지지가 않는다는 말이죠. 기도를 어떻게 하고, 헌금을 얼마나 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은혜를 받았던 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하지만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또 다시 외양간을 잃고 새로운 소가 들어오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생에 이런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것은 무한대인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주기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모든 준비를 다 해놓으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돌고 도는데, 그러면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계속해서 생산이 된다는 겁니다.

* 보조율법까지 등장 !!

이것을 펴는 인생, 즉 우리 인간이 계속해서 분노하고 짜증을 내는데, 그러한 인생을 산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 교재 166페이지에 보면,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쑤그린 자기 인생을 편평하게 펴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동원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율법을 더욱 잘 지키기 위해서 보조율법까지 만들었다는 것이죠.

여기 교재에 있는 마가복음 7장 5절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쑤그린 자기 인생을 펴기 위해서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에 옮긴다고 하면, 그러면 과연 펴질까요? 펴지지 않는데, 그런데 그들은 노력을 한다는 겁니다. 즉 "율법으로 바르게 살면 서서히 펴져서, 나중에는 깨끗하고 거룩한 종이 된다" 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는 말이죠.

* 율법은, 주님의 발굴용 !!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해서 세칙들을 만들었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너희들이 하는 행세가 딱 들켰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다 예언을 하였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하는 짓이 별 것이 없는데,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가 어느 정도로 위선적이고 거짓인지, 주님은 다 아시는데 인간 자신만 모른다는 겁니다.

(막 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래서 예수님은 발굴을 하시는데, 그 방법이 바로 율법이라는 말이죠. 지켜서 보다 더 착하게 살라고 주신 율법이 아니고, 율법은 주님의 발굴용이라는 겁니다. 자기 속에 있는 미처 자기도 모르는 죄를 모두 다 끄집어내는, 그렇게 발굴하는 진단기가 바로 율법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율법을 어떻게 이용했습니까? "내가 거룩해지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내가 잘 지키면 복이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러니 나는 복을 얻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라고, 그렇게 정리를 했다는 겁니다.

* 그들의 심보가 곧 우리의 심보 !!

제가 강의를 처음 시작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구를 대표한다고 했지요? 인간들을 대표한다고 했는데, 그러니 그들의 심보가 오늘날 우리 안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말이죠. 다시 교재에 나오는 성경말씀을 보겠는데, 7장 14절에서 16절입니다.

(막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즉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발굴하기 위해서 자극을 주는데, 그렇게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는 바르게 살려고 튀어나오는데, 그게 바로 위선이고 거짓이라는 겁니다.

* '법' 이라는 턱걸이 기구 !!

그것을 여기 교재에 보면, "인간은 뭔가 법률화가 되면, 그것으로 자기 악을 가리는 방식으로 재빨리 사용해 버린다는 것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뭔가 규칙과 법을 주게 되면, 그 법을 지키는 순간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법이라는 턱걸이, 그런 운동기구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가 없는데, 계속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법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일상 속의 법, 즉 삶의 패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혹은 '징크스' 라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 나는 무너지잖아 !!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하는 일이 정해져 있는데, 아침운동을 하고 또 오메가3를 먹고 하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 패턴을 벗어나게 되면 뭔가가 찜찜하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예를 들어서, 아내가 "오늘 아이들이 온다고 해요" 라고 하면, 그런데 나이가 들게 되면, 그 말을 듣고 "응, 그래요" 라고 하면서, 그만 자기가 하려고 하던 것을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저만 그런가요? (ㅋㅋ)

그때 우리 속에 분노가 등장하게 되는데,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왜 중간에 끼어 들어? 그러면 나는 무너지잖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나는 무너지잖아" 라고 하는 것, 그런데 왜 무너지면 안 되느냐는 겁니다. 무너지면 안 되는 합당한 이유라도 있느냐는 말이죠. 없는데, 그러니 이게 위선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님이 친히 길러주셨는데, 그러면 그 주님이 무너졌습니까? 주님이 무너지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자기의 무너짐을 걱정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주님 따로, 나 따로",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따로 따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이용만 했을 뿐이지, 주님을 믿은 적도 없고 또한 사랑한 적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무너지면 안 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나는 무너지잖아" 라고 하는 공포심, 그게 바로 분노와 짜증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 하지만 무너지는 경우는 없어 !!

이것을 여기 칠판에 써보겠는데, 즉 "내 인생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것인데, 그 걱정을 우리가 왜 합니까? 그것 때문에 마귀로 인한 시험에 들고 공포가 찾아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잘못된 경우가 지금껏 과연 있었습니까? 그런 경우가 없는 이유는 주님이 친히 기르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관리한다면 잘못될 수 있지만, 돌이켜보면 시험에 들고 짜증을 내고 하는 것도 누가 하셨다는 겁니까? 소를 잃고 외양간을 잃고 하는 모든 작용도 누가 하셨는고 하니, 주님이 하시는데, 그러면 과연 그런 인생에 있어서 잘못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 있었을까요? 그런 순간은 없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는데, 그런데 마귀를 자꾸만 그런 것을 가지고 공포심을 유발시키면서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너의 인생은 망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서 정답이 나가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게 시편 51편의 말씀이라는 말이죠.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인생을 잘못되었다고 여긴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판단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수능시험에 답을 잘못 써서 그런 것이 아니고,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죠. 즉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죠.

*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 !!

이것이 복음이고 기쁜 소식인데, 그래서 여기서 감사가 터져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원인도 모르면서 그동안 괜히 자책만 했는데, 주님이 친히 가르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말이죠.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멋있는 자기 인생을 따로 꾸려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게 위선자이고, 그런 자들의 대표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을 만나서 질문을 던졌던 자들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그들을 엄청 욕을 했는데, 전혀 욕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놈이 그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 자기가 못되었다고 하는 것, 즉 "더 무너지면 안 돼" 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해당사항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동안 살아온 것이 우리 힘으로 꾸역꾸역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주님이 친히 길러주셔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 우리 속의 더러운 것이 재로가 되어서, '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그렇게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이미 해답을 내렸다는 말이죠. 주님이 인간을 왜 만들었습니까?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만들었다" 라는 것인데, 우리 속에는 더러운 것이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이미 속에 들어있는 것이 더럽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 더러운 것을 수집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는데 있어서 그게 필요하다는 말이죠. 인간 속에서 더러운 것을 끄집어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선 자기 인생은 없고, 주님에 의해서 쓰여지는 인생만 있다는 것이죠.

모든 것이 주님이 필요해서 재료가 되고 원료가 되는데, 그렇게 원료를 투입해야 '피' 라는 생산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피조물의 위상인데, 주님이 친히 가르실 때는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죠. 물론 들꽃도 길러주시고 새도 길러주시는데, 우리 인간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길러주신다는 겁니다.

* 그의 나라와 그의 의 !!

그것이 마태복음 6장이 나오는데,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죄만 들어있는 우리 속에서 그 나라와 그 의가 나올 수 있도록, 즉 차이가 나는 것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사울왕과 신접한 여인 !!

어제 설교를 하면서 시간상 빨리 지나간 부분이 있어서 해보겠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사울 왕이 엔돌 지역에 살고 있는 여자 무당을 찾아갔는데, 그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신접한 자' 라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시간에 그 부분을 좀 더 늘여서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그게 '차이' 때문에 그러한데, 즉 스스로 있는 분과, 그분에 의해서 길러주심을 받는 자의 차이인데, 왜 차이를 이야기하는고 하니, 그 차이에 의해서 언약이 나온다는 말이죠. 언약, 언약, 언약, 그러한 언약의 연속 끝에는 새언약이 나오고, 그 새언약의 내용은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즉 창세 전의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에 십자가에 의해서 끝이 났다는 겁니다.

우리는 더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다만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활용을 당하면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냥 주기적으로 순환구조로 돌아갈 뿐이라는 겁니다. 즉 태어나서 감사하게 되고, 그리고 '쑤그리' 라고 해서 난리가 나는데, "나는 무너진다. 내 인생은 여기서 종친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 우리는 왜 걱정이 늘어지는가?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종친 인생인데, 그런데 갑자기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당하면 부끄러워서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죠. '사랑과 전쟁' 이라는 인기 장수 드라마를 보면 그런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것을 보면서 걱정이 늘어진다는 겁니다.

요즘 마약 때문에 난리인데, 그래서 강남에 사는 자기 아들을 보고 "야야, 너는 마약을 하면 안 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단도리를 하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바로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우수한 '나', 바로 그것을 위해서 노심초사 애를 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차이가 없어지는데, 차이가 없어지면 언약이 없고, 언약이 없어지면 새언약도 없고, 또한 새언약이 없으면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라는 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없으면 항상 미완료인데, 그러면 그냥 애씀, 노력해봄, 그런 것만 남는다는 겁니다.

"열심히 하면 무엇인가 되겠지?" 라고 하는데, 그러다가 5톤 트럭에 부딪치면 그냥 다 끝나고 만다는 것이죠. "내일이 되면 좀 더 나아지겠지"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이미 분노로 태어났기 때문에 말이죠. 그게 우리 인간의 속성이라는 겁니다.

*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왜 만났을까?

바로 이런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무엘상 28장에 보면 신접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사울왕이 여자무당, 즉 신접한 여인을 왜 만났느냐는 것인데, 사울왕이 왜 만났을까요? 사람이 누군가를 만날 때는 다 이유가 있는데, 그렇지요?

그것도 사울왕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고 직접 찾아갔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사울왕은 사무엘을 만나고 싶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무엘을 통해서 신의 계시가 주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하지만 사무엘은 이미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착했는데, 사울왕은 살아있으니 '있음' 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사무엘은 어떻습니까? 죽었으니 '없음' 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이미 있는 자가 한 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자를 과연 만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라는 말이죠.

만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이 신접한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죽은 사무엘을 자기가 불러주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자가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고 사울왕이 먼저 이야기한 것인데, 즉 "너는 신과 잘 통하는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 죽은 사무엘을 좀 불러다오. 내가 사무엘에게 할 말도 있고 들을 말도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계시의 차이남 !!

그런데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무당은 살려두어서는 안 될 자라는 말이죠. 여자무당은 죽어야될 자인데, 그러니 '없음'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무당은 현재 목숨이 유지되고 있으니 '있음' 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율법에 의하면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율법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율법이 있으면 여자무당은 필히 없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율법 바깥의 세계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율법과 함께 계시는데, 즉 율법 안의 세계라는 겁니다. 율법 안에 있어야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 율법 바깥의 세계에 속한 신접한 여인 !!

그러면 율법 바깥의 세계는 없는 세계인데, 그런데 사울왕은 지금 율법 바깥의 세계, 즉 죽지 않아도 죽은 자에 불과한 여자 무당을 찾아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신접한 여인의 계시가 율법의 계시와 동일할까요? 차이가 날까요?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울왕은 이미 언약에서 잘린 자인데, 마치 여자 무당과도 동일하다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왜 무당을 찾아가서 점을 치고, 또한 사주팔자를 보고 합니까? 물론 재미로 본다고들 하는데, 그런데 그러기에는 그 태도가 너무나도 진지하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율법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제가 이 여자 무당을 가지고 율법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물어보자는 겁니다. 지금 새언약이 있으니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 맞다는 말이죠. 새언약이 곧 말씀인데, 그렇게 말씀이 자기 안에 있다고 하면서 왜 사주팔자를 보고, 왜 타로점을 치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다리를 어느 쪽에 걸치고 있느냐는 말이죠.

지금은 박수무당이라고 하지만, 초대교회 때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고 하니, 사람들이 미래가 궁금할 때는 죽은 조상에게 물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보편화가 되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명절이 되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죠. 물론 요즘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말이죠.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조상들에게 잘해주면 그 복이 나와 나의 후손에게 주어질 것이다" 라고 하는, 일종의 계시형식이라는 겁니다. 즉 신의 계시를 인간들이 그렇게 만들어낸다는 말이죠. 그것이 누구 중심인고 하니, 하나님의 스스로 존재하심이 아니고,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의 존재함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는 무엇만 증거하면 됩니까? 당연히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말씀 바깥으로 나가면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다" 라는 것까지 증거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말씀 안과 바깥, 그 둘을 다 증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이용하는데, 자기는 말씀 바깥에 있으면서 말씀을 이용한다는 말이죠. Q.T와 같은 것을 해서 자기 신세를 펴려고 한다는 겁니다.

* 나의 죄를 들추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러니까 "내가 말씀 안에 산다" 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고, 그 조건 아래에서만 나는 살아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내가 사는데 말씀이 어떻게 필요한가?" 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는 것과 자기가 살아있는 것, 그게 차이가 나야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은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살리고자 하신다는 말이죠. 엉망진창인 '나', 죄밖에 지을 줄 모르는 '나', 그래도 말씀이 있음으로서 죄밖에 지은 것이 없지만, 그런 '나'에게서 무엇이 나온다는 겁니까? 감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나의 죄를 들추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말씀이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나를 죄인이 되게 해준 그 친절함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고마움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죄인이 될 용의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 이미 죽은 사무엘인가? 살아있는 다윗인가?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이 사무엘상 28장을 보면서, "죽은 사무엘이 나타나지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여기서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울왕이 사무엘을 찾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다윗을 찾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라진 사무엘을 대신해서 나타난 자가 다윗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 시대에 다윗이 살아있었는데, 그런데 사울왕은 다윗을 찾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찾으려고 하기도 했는데, 죽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다윗은 십자가를 진 예수님과도 같은데, 미움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것이 답변을 해보세요.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인데, 그것이 로마서 9장에도 나오는데,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세 전부터 사랑과 미움, 이 두 가지가 있었다는 말이죠.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어느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미움이 있어주어야지 사랑이 사랑답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미움이 없는 사랑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에게서 찾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미움이 있어주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천국의 경우에도, 지옥이 있어야 천국의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 사랑과 미움, 그리고 두려움 !!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차원이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사랑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자기를 사랑하는데, 그런 자기에게 누군가가 해꼬질을 한다고 하면, 여기서 미움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밉다' 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지요? "생각만 해도 그야말로 짜증이 나네"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잊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미움이 시간이 지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무서움으로 숙성이 된다는 말이죠. 즉 "이제는 너와 같이 사는 것이 무섭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잊혀진 존재 !!

그러니 미워할 때까지는 아직 미련과도 같은 것이 남아있는데, 그런데 무서워지면 미련조차도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인간이 죽었다든지 해서 사라지고 없다고 하면, 그러면 아무런 감정도 없는 잊혀진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거리가 먼 것이 잊혀진 존재라는 말이죠.

"언제 그런 사람이 있었나?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아" 라고 하게 되는데, 이것을 잘 이야기한 노래가 있는데,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 이라고, 여러분도 아시죠?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라고 하는데, 이게 전부 다 자기 중심이라는 겁니다.

-------------------------------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1987)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면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

* '차이'를 잃어버린 사울왕 !!

사울왕은 다윗을 그렇게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를 했는데, 그런데 다윗은 뭐라고 합니까? "임금님이 저를 그렇게 죽이려고 하지만, 저는 임금님에게 감정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울왕에게 이 다윗이 전에는 무서움의 존재가 되었는데, 자기 것을 언제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겁니다. 꾸겨진 자기 인생을 말이죠.

그런데 다윗이 도망을 가서 나중에 "우리 싸우지 맙시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잊혀진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사울왕은 율법 앞에서 그만 '차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적을 해소했으니 말이죠. "그렇지, 조그마한 다윗 네가 무슨 이스라엘의 왕이야?" 라고 나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차이를 잃어버리는 순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계시, 언약, 혹은 율법 안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여호와를 잃어버렸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즉 하나님은 다윗을 보냈는데, 그런데 사울왕은 그 다윗을 그만 차버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것은 곧 사울왕 자신이라는 말이죠. 이스라엘을 통치해야 하는데, 그래서 그동안 사무엘에게 준 계시를 이용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이 그만 죽고 나니, 아쉬워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는 말이죠.

* 사울 집안이 잘렸다 !!

그렇게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내어 달라고 하는데, 그러자 그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주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진작에 잘렸어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당을 찾아간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사울왕은 자기 남은 인생을 계속해서 잘린 그 결과를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사울이 잘렸다" 라고 해도 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울 집안이 잘렸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울 집안을 대신해서 어떤 집안이 등장하게 됩니까? 그것은 이새의 아들인 다윗 집안이 바꿔치기를 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 한 일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울 집안을 잘라내고 다윗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무엘은 죽어도 되는데, 이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겁니다. 다만 사무엘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확인사살인데, "사울 집안은 잘렸다" 라는 것을 말이죠.

그러면 사울 집안이 잘렸습니까? 잘리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사울 집안은 잘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는데, 그 사울 집안에서 요나단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요나단은 사울 집안인데도 왜 잘리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다윗은 요나단과 그 앞에 이미 언약을 맺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무엘상 18장에 나오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삼상 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삼상 18: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삼상 18: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삼상 18:4)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여기 1절에 보면,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 생명을 네가 가지고 가라" 라는 것인데, 즉 "네가 마음대로 해도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게 사랑이라는 말이죠. 요나단이 왜 이렇게 나오는고 하니, 골라앗을 아버지 사울이 이긴 게 아니고 소년 다윗이 이겼다는 겁니다. 그게 17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요나단을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누구 안에서 말인가요? 다윗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요나단의 입장에서는 횡재를 한 것인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그냥 보낼 수가 없는데, 그래서 계약을 맺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것과 똑같은데,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나는 저분을 놓치면 끝난다" 라는 것인데,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생명이 있다" 라고 하는 계약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죠.

* 요나단의 죽음 !!

그렇게 되니 요나단은 다윗에게서 자기 목숨을 챙기지 않는데, 그게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언약이란 겁니다. 그 언약대로 요나단은 죽는데, 즉 다윗이 왕이 되는 순간 요나단은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에 의해서 제거가 되는데, 자기 아버지처럼 죽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도 참으로 너무 하신다. 못된 아버지는 죽여도 되지만, 이렇게 다윗과 언약까지 맺은 요나단은 좀 살려주시지"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일종의 드라마로 보면 그렇게 여겨질지 몰라도,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나단은 죽이 전에 이미 살았는데, 왜냐하면 다윗언약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무엘상 20장을 보겠는데, 17절과 42절입니다.

(삼상 20:17)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삼상 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 나와 너 '사이에' !!

여기 42절에 보면 "나와 너 사이에" 라고 하는데, 즉 '사이에' 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이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서로 인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라고 하면, 말씀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지 아는 친분으로 만나고 사업상 만나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물론 다윗도 하나님이 아니고 요나단도 하나님이 아닌데, 여기에 제3의 존재를 집어넣는데, 그게 바로 여호와의 이름, 즉 "나와 너 사이에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인데, 그분에 의해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언약이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 즉 스스로 계신 분의 언약 사이에 너도 끼어들고 나고 끼어들어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이 이루어질 때, 너와 나도 그 일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 너 사이에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온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사울왕이 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을까요? 사울왕에 왜 엔돌의 그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사이에' 라는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 생명을 대신할 것이 없는데, 즉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교인으로서 교회에 평생 봉사하면서, 3대, 4대, 그렇게 기독교 가정이라고 자랑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집안 역사 자리에 주의 복음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즉 "이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었다" 라는 것인데, 즉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 장애자, 므비보셋 !!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요나단이 죽었는데, 그래서 "다윗도 별 수가 없네. 요나단을 지켜주지 못했잖아"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사무엘하 4장에 보면 '므비보셋'이 등장하는데, 그게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유모가 그만 잘못해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말이죠.

(삼하 4: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다리를 저니 장애자인데, 이 장애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스스로 자기 인생을 어떻게 관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원천적으로 봉쇄된 자인데, 즉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를 스스로 지킬 수가 없는데, 그러니 주님이 친히 길러주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므비보셋을 다윗이 자기 아들로 삼았는데, 즉 "내가 네 아버지와 맺은 약속이 있다. 그 약속으로 인해서 너도 이제 내 아들이다. 그러니 왕자들이 식사를 하는데, 너도 같이 가서 해라"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몰락한 집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자기 집안에 넣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므비보셋의 입장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었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잃어버렸기 때문에 얻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므비보셋이 사는 것이 아니고, 다윗과 요나단이 맺은 언약이 산다는 겁니다. 즉 말씀이 살기 위해서 자기는 아버지를 잃어버려야했고, 또한 절뚝발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할아버지 사울은 다윗을 그렇게 죽이려고 쫓아다녀야 했다는 겁니다.

* 이제 정리하면 !!

이제 정리를 해보면, "내 인생은 서서히 사라져 가는 중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지만 말이죠. 저는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느끼는 게 있는데, 이 낙엽의 특징은 빳빳하다는 겁니다. 그게 참 보기 좋은데, 주님이 친히 기르시는 것 같은데, 아니 친히 기르신다는 말이죠.

낙엽은 움츠리지 않는데, 펴진 채로 떨어져서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우리 인생도 그러했으면 좋겠는데, 움츠리는 것이 아니고 빳빳하게 펴졌으면 좋겠다는 말이죠. 주께서 친히 기르시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는 겁니다. 우리네 인생은 서서히 사라져 가는데, 마치 낙엽처럼 말이죠.

여기에는 자기의 모든 서사나 역사가 아니고, 복음을 복음답게 드러내는 일에 우리가 동참해서 끼어 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일같이 "나는 나와 이별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가을이 되면 이별에 관련된 노래가 많이 불려지는데, 패티킴의 '이별'도 있고 말이죠.

아무튼 우리가 너무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집착을 해도 주님이 집착을 하셔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주님에게 있는 자기를 마치 빼앗아오듯이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펼쳤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하면서 움켜쥔다는 것이죠. 남들에게 자랑질을 하려고 말이죠.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외양간은 매일매일 잃어버리고 새로운 소가 주어지는, 그런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는데, 왜냐하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 라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성도에게 허락되어진 삶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기 인생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자기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어리석기가 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님의 은혜인 줄 아오니, 앞으로도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11,16 오전 11시에 마침.

매일 매일 이별하며 살게 하소서 !!

=======================================

(삼상 28:1)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삼상 28:2)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삼상 28: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내었었더라
(삼상 28:4)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삼상 28:5)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삼상 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삼상 28: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삼상 28:8)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삼상 28:9)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삼상 28:10) 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삼상 28:11)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삼상 28:1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삼상 28:13)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삼상 28:14)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 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삼상 28: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삼상 28:16)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삼상 28:17)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삼상 28: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삼상 28: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28:20)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삼상 28:21)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삼상 28:22)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삼상 28:23)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삼상 28:24)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삼상 28:25)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옥 하나님38-송장의 할 일  (0) 2023.12.11
지옥하나님-원위치  (0) 2023.11.30
지옥하나님35-난간의 기능  (1) 2023.10.26
지옥하나님34-분리  (3) 2023.10.14
지옥하나님33-부분과 전체  (0) 2023.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