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33-부분과 전체

아빠와 함께 2023. 9. 29. 19:08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3 - 부분과 전체

23,09,1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

오늘은 교재 13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제목이 '2,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것은 사람이 창안한 기독교라는 겁니다. 그게 곧 종교인데, 종교라는 것 자체가 사람이 만들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구색을 갖추기 위한 것인데, 즉 만들기는 인간이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와서 집어넣으면 기독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집어넣는고 하니, '사람 대 사람'으로 결속하는데 있어서는 사람들끼리 공통점이 있으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사람은 범죄한 자, 즉 죄인이라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타락한 존재인대, 그 속에 악마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즉 "사람이라고 시작했는데, 그 마지막에는 악마가 들어있는 존재다" 라는 것인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연결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 즉 교회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뭉치, 혹은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구약의 바벨탑을 생각하면 되는데, 즉 사람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어야 결합이 되고 만남이 되고 오래 가고, 그것이 하나의 뭉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들끼리 결속할 때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하나님' 이라는 개념을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왜 그러고 하니, 인간들은 언어로부터 시작을 하는데, 그것이 말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언어가 되면 거기에 실재가 따라온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을 부르면 거기에 하나님이 실제로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언어가 문제인데, 인간은 말을 한다는 것이죠. 바벨탑을 지을 때 인간이 말을 했는데, "우리 이름을 높이자" 라는 의견일치를, 즉 합의를 보았다는 겁니다.

(창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인간들 뭉치 + 하나님 = 우상숭배 !!

그런 인간들의 시도를 계속해서 있어왔는데, 그렇게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만드는 종교, 그것을 두고 구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렇게 인간들이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어서 종교를 만드는 것을 두고 '우상숭배'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집어넣어서 하나의 단체를 만드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 우상의 의미 자체가 곧 엉터리라는 것인데, 즉 "엉터리 신을 믿는다" 라는 것이죠. 그러면 참된 신은 인간과 하나님의 결합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내리시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보고 그냥 방치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슨 일을 벌이겠습니까? 일을 벌이시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요한복음 5장 2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여기 마지막에 보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생명으로 옮겨지려고 하면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먼저 사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논리상 별로 어렵지 않은데, 물론 믿을 수는 없지만 말이죠.

"나는 멀쩡한 것에서 생명으로 갔다" 라고 하면 반칙인데, 그것이 아니고 "나는 사망에 있었는데 생명으로 옮겨졌다" 라는 겁니다. 이 사망을 여기 24절에서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라고 하는데, 즉 "나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인데, 생명으로 옮겨졌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요한복음 5장 24절을 안다고 하면,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심판'에 대해서, 즉 '사망'에 대해서 먼저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과연 내가 심판을 받을 자였는가? 내가 사망에 있었던 자였는가?" 라고 말이죠.

이것부터 분명히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나는 심판이나 사망은 몰라. 나는 생명에 관심이 있어"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심판에 있었던 자만이 생명을 말할 수 있고, 사망에 있었던 자만이 생명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자만이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사망과 생명에 등장하시는 예수님 !!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는데, 그런데 자기 힘으로는 사망이기 때문에 생명으로는 갈 수 없다는 말이죠. 심판을 받는 자가 자기 힘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심판을 받는 자는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는 무엇을 집어넣습니까? 사망과 생명, 심판과 생명 사이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사망으로 생명으로 옮기는데 있어서 왜 예수님이 개입되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인간은 사망과 심판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 사람들은 왜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가?

여기서 질문에 들어가는데, "사람들은 왜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자리가 심판이 아니라고, 사망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자기 자신을 멀쩡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항상 분노 속에서 산다" 라는 것인데, 언제나 분노가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죠.

인간이 분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나를 건드리지마. 나는 멀쩡해"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게 잠복이 되어있는데, 그게 전제로 깔려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당신이 뭔데 나에게 욕해?" 라는 것은 일종의 분노라는 겁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인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라는 것도 그렇고 말이죠.

* 나는 멀쩡하다 !!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본다는 겁니까? "나는 멀쩡하다" 라는 것인데, 물론 자기가 나쁜 짓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대체로 자기는 성실하고 착하다는 겁니다. 즉 "나름대로 나는 건질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이죠.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항상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겁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내려가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을 찾는데, 즉 "하나님도 멀쩡하고 나도 멀쩡하고" 라는 것인데, 또한 "너도 멀쩡하고"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좋게 여기는 사람들끼리 모이자"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는 자기의 멀쩡함을 은근히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니 교인들의 특징은 입꼬리가 늘어나 있다는 겁니다. 예배에 참석할 때부터 기분이 나쁜 표정들이라는 말이죠. 즉 "오늘 누가 나를 건드리기만 해봐라"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놀부처럼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으려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성형외과에 가면 됩니까? (ㅋㅋ) 자기가 멀쩡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사망이고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자리로 갔다가, 예수 그리스도 덕분으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질 때, 여기에서 무엇이 누락되는고 하니, "나는 멀쩡하다" 라는 것에서, "이제 꼴보기 싫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이제 꼴보기 싫다 !!

자기가 꼴보기 싫다는 것인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역겹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를 멀쩡하게 보는 자기 자신이 역겹다는 말이죠. "인간도 아닌 것이, 가짜 주제에 인간 행세를 한다고 고생이 참 많다" 라고, 물론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왜 찾습니까? 자기를 도와달라는 것인데, 멀쩡한 것을 더 멀쩡하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런 단체가 바로 교회인데, 그러니 30년, 50년, 60년을 다니면 무엇을 합니까? 이런 식으로 교회에 다녔다는 겁니다. "누가 누가 멀쩡한가?" 라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일어나고,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죠.

* 굳이 왜 교회가 필요한가?

이러한 인간 세상의 형편, 그게 속에 악마가 들어있어서 그러한데, 자기 속에 악마가 들어있으면 교회를 찾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런 마귀에 들린 교회를 자기가 만든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고 하면, 아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데, 여기에 교회가 왜 필요하냐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렇지요?

성경말씀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면, 예수님의 행하심 속에는 말씀이 있는데, 자기 행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헌금하고 하는 것들은 다 발로 차버린다는 말이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행하심만 있으면 넉넉한데, 그것으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굳이 왜 교회가 필요하냐는 말이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왜 찾느냐는 겁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그만 죽여버리고 말이죠. 인간들이 이런 짓들을 하는데, 그렇게 예수님을 죽여놓고는, 그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겁니다.

* 동일한 아담의 형상 !!

이것을 두고 "유대인들은 미쳤다.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 수가 있어?" 라고 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그 유대인들이나 우리나 역시 동일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아담의 형상' 이라고 하면 또 어려워질 수가 있는데, 아담의 형상, 즉 아담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 아담의 모습이라는 것은, 서로가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 때 서로 의기투합을 하고 통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의 형상이 오니까, 아담의 형상이 그만 예수님의 형상을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너는 왜 우리와 공통점이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 멸망시키는 하나님이 좋아요 !!

그렇다면 이런 인간들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린 조치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의해서 사망에서 옮겼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 반대이니 멸망이라는 겁니다. 즉 멸망시키는 하나님인데, 그런데 그 멸망을 떼어버리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 우상숭배라는 말이죠.

이 멸망시키는 하나님에 대해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나쁜 하나님, 미운 하나님, 즉 "하나님, 싫어요!"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 좋아요!" 라는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만 하나님과의 동행이 성사된다는 말이죠. 즉 "멸망시키는 하나님이 좋아요"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팩트이고 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어떤 이익이 있는가?" 라는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고 무엇이 진실이고 진리이냐는 것인데, 그래서 "진실과 진리만 오면 나는 좋아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오게 되면,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도 하나님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진실과 진리에 해당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서 챙길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고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았다고 하면, 자기가 심판을 받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 진리를 접했다고 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죠.

이 진리는 알파와 오메가인데, 즉 시작과 끝이라는 겁니다. 즉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이것을 처음과 나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거리를 3미터라고 한다면, 이것이 점점 더 압축이 되어서 결국 하나가 되어버리면, 그게 곧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에서 처음과 나중으로 점점 늘어나게 된다는 말이죠.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 때는 처음과 나중이 이렇게 있다가 점점 더 줄어들어서 되어서 십자가로서 하나가 되었다가, 그리고 신약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로 되었던 십자가 사건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 부분 안에 전체가 들어있다 !!

드디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왔는데,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도 하나 자기도 하나라는 말이죠. 제자들은 12명인데, 그러면 각자가 하나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만약에 인구가 35,000명이라고 하면, 각각의 하나 하나가 더해져서 35,000명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오시면 역시 하나, 즉 '1'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35,000명+1명=35,001명",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계산하면 안 되고, 예수님은 전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인간들은 예수님을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보았다는 것이죠. 물론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여러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을 하시니, 그런데 그 예수님이 35,000명이 아니고, 전체 중의 전체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즉 전체가 예수님 안에 들어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을 "부분 안에 전체가 들어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그것은 심판 안에, 같은 말로 언약 안에, 왜냐하면 노아 언약 때 물 심판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물 심판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즉 전체가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물 심판 자체가 언약이고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누구를 말이죠? "나 하나를 도와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전체의 일부로서 들어갈 때만, 비로소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관심이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부분입니까? 전체입니까? 이것은 "나는 전체를 하고 싶어" 라고 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 안에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 다 들어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형상을 본받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부분 안의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는데, 다른 말로는 예수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그 엄청난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엄청나다' 라고 하는 것은 크다는 의미보다는,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으면, 진리가 들어있는 것이고 생명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 송일국 안에 주몽이 들어있다 !!

어제 낮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초등학교 문제를 언급했는데, "고구려의 시조로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라고 말이죠. 그러자 어떤 학생이 "예, 송일국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는 겁니다(ㅋㅋ). 물론 그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이 따지고 보면 굉장히 심오한 답변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송일국 안에 주몽이 들어있다" 라는 겁니다. 마치 우리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을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as if(~인 것처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죽어도 마땅한 자들을 왜 구원하셨느냐는 말이죠.

* as if(~인 것처럼) !!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 것처럼" 살라고, 그래서 구원을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것만 제대로 알아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감사로 넘치게 된다는 겁니다.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29절의 '단축'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의미이고, 그리고 여기에 보면 "~않는 자 같이 하며" 라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응용해서 디도서 1장 5절에서 7절을 보겠는데, 이것은 장로와 감독에 관한 내용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as if(~인 것처럼)"를 집어넣어서 해보자는 것이죠.

(딛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딛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딛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 믿는 자녀를 둔 것처럼 !!

그러면 장로는 같이 되는데,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는 것처럼,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고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믿는 자녀를 둔 것처럼",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믿는 자녀가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그러니 그야말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지금 저만 실감이 나는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그리고 감독의 경우에는,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는 것처럼,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급히 분내지 아니하는 것처럼, 술을 즐기지 아니하는 것처럼, 구타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책망할 것이 줄줄이 널려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자기 고집대로 하고 싶지만 하지 않은 것처럼, 성질이 급해서 심심하면 분을 내고 싶지만 마치 내지 않는 것처럼, 술이 땡기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주먹질을 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돈이 너무나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성도의 경우에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송일국이니까, 그 안에 주몽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송일국이 주몽을 역할을 너무나도 잘 해냈는데, 그래서 그 아이가 감동을 받아서 송일국이 고구려의 시조인 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최수종은 고려를 세운 왕건이고 말이죠(ㅋㅋ).

그러니까 술을 즐기지 않은 것처럼, 돈을 밝히지 않은 것처럼, 믿는 자식이 있는 것처럼 하면 된다는 겁니다. 솔직히 자기 자식이 믿는지 믿지 않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죠. 얼마든지 마지못해 교회에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러니 그럴 때는 믿는 것처럼 하라는 겁니다.

* 살아도 죽은 자처럼, 죽어도 산 자처럼 !!

이것을 전체로 정리해서 이야기해보면, 즉 "술을 즐기지 않은 것처럼, 돈을 밝히지 않은 것처럼, 믿는 자식이 있는 것처럼" 라는 것을 모아서 정리하면, "살아도 죽은 자처럼"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와 반대로 해도 같은 의미가 되는데, 즉 "죽어도 마치 산 자처럼",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미 우리는 죽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지만 주께서 살려주시는 대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산 게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있는 것인데, 즉 "나는 살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마치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 하면 된다는 말이죠. 물론 혼자 밤새도록 온갖 고민을 다 하면서도 말이죠.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 그분은 나의 전부이다 !!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전체를 닮은 부분이기 때문에, 전체가 아니고 부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망에서 벗어낫고 심판에서 벗어났지만, 마치 사망에 놓여있고 심판에 놓여있는 것처럼, 그리고 지옥에 가는 것처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나' 라는 부분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다고 하는,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다고 하는, 그렇게 함으로서 "그분이 나의 전부임이 증거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만이 멸망하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가능한데, 왜냐하면 이미 죽고 살아있는 것처럼 사니까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그 어떤 조치를 내려도, 성도의 경우에는 "~인 것처럼" 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지나간 이야기라는 겁니다.

* 악마가 전부인 불신자 !!

방금 제가 성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불신자는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죠. 불신자의 경우에는 "~인 것처럼" 라는 것이 악마와 결부가 되는데, 왜냐하면 불신자에게는 악마가 전부라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인데, 그리고 성도는 예수님의 부분이라는 말이죠. 즉 하나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죄가 전부이고 악마가 전부인데, 그것을 어제 오후 시간에 아주 짧게 했는데 말이죠. 즉 "예수님이 오시는 형식은, 인간이 악마와 결합된 것을 이용해서 오신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과 악마가 결합된 것이 어떤 방식인고 하니, 인간이 스스로 자기 내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그런 하나의 권력 메커니즘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한다"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악마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그러한데, 악마에게 명령을 받고 있으면서도 악마의 존재도 모르고, 자기가 알아서 자율적으로 살아간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늘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정말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만족해하지를 않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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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라이팅(Gas-lighting) -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가스라이팅은 가정, 학교, 연인 등 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수평적이기보다 비대칭적 권력으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할 때 이뤄지게 된다.
1938년 패트릭 해밀턴 작가가 연출한 스릴러연극 '가스등'에서 유래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용어다. 잭이란 남성이 자기 아내(벨라)를 억압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잭이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의 부인을 살해하면서 시작된다.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가스등을 켜야 했는데, 이렇게 하면 가스를 나눠 쓰던 다른 집의 불이 어두워져서 들킬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잭은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부인인 벨라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몰아간다. 잭이 보석을 찾기 위해 가스등을 켤 때마다 벨라가 있는 아래층은 어두워지고, 벨라가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잭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아내를 탓하는 것은 물론 정신병자로까지 몰아세운다. 이에 아내는 점차 자신의 현실인지능력을 의심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 -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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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물로서 멸망을 시키는 주님인데, 그래서 찾아오실 때도 그 안에는 노아홍수가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전체니까, 언약이니까 말이죠.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고, 전체가 예수님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그 여인을 보고 "나에게서 생수가 나온다" 라고 하시면서 "너의 남편을 데리고 오너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인간의 껍데기를 벗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부가 드러나는데,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살아왔는지, 그것이 다 공개가 된다는 것이죠.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 여인은 남들이 보기에는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러왔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 여인 안에 들어있는 덩어리가 물을 길러왔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렇게 우물이 있다고 하면, 남들이 보기에는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가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만, 그러나 여자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5명의 남편을 제치고 6번째 남편과 어떻게 재미있게 살 것인지, 거기에 필요한 물을 길러 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여인에 있어서는 자기가 전부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여인은 악마가 자기에게 자동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살도록 작동시켰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 야호, 계탔다 !!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목이 마르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이 마르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우물에서 물을 한 번 마시면 3동안 목이 마르지 않습니까? 목이 마르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자를 5명이나 만났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남자가 지긋지긋해요" 라고 할까요? "너무 좋아요" 라고 할까요? 다들 경험이 없어서 몰라요?

그런데 만약에 잘생긴 현빈이나 방탄소년단 중에서 한 명이 와서 "저와 사귀겠습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남자를 5명이나 사위었어요" 라고 하면서 거부하는 게 아니고, "야, 계탔다" 라고 하면서 감격해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계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아무튼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이 여인은 남들이 보기에는 물을 길러왔지만, 주님은 내부를 보신다는 겁니다. 주님은 물로서 심판하시는 분인데, 그리고 앞으로 불로서 심판하실 분이라는 말이죠. 그만 껍데기를 확 벗겨버린다는 겁니다. 여인이 "나는 물을 길러왔습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은 "아니, 거짓말하지마"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 여인은 물을 길러온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악마가 자기 속에 집어넣은 어떤 욕구와도 같은 게 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목이 마르니, 남자들을 갈아치운다는 것이죠. 이제 6번째 남자인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장관리를 하면서 6명을 한꺼번에 사귀지 않는다는 것인데 말이죠.

그러니 이미 불신자들은 악마로부터 세뇌를 당하고 있는데, "내가 주인공이다" 라고 하면서, 즉 "나는 신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 자체가 악마가 집어넣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내가 신이다" 라고 해서, 자율적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면 된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타는 목마름으로 !!

그러면 인간은 과연 어떤 식으로 계속해서 선을 찾아가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목마름' 인데, 즉 어떤 선을 행했는데 그것으로 모자란다는 말이죠. 그래서 갈증을 느끼고 더 극단적인 선을 행하게 되는데, 그러니까 내부에 뭔가 구멍이 단단히 났다는 겁니다. 마귀가 지옥에서부터 뚫어놓은 구멍이 있었다는 말이죠.

주님은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데, 이전에는 악마에게 다루어지던 우리를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직접 다루신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너는 멸망을 받아야하고, 사망에 이르렀어야한다" 라고, 주님은 그렇게 나오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제 아무리 무서운 주님이라고 해도, 멸망으로 가는 주님이라고 해도 동행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미 심판을 받았고, 이미 사망을 했으니 말이죠. 도저히 "나는 멀쩡합니다" 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는데, 그러면 주님이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 수채 구멍 !!

실질적으로 예수님은 말씀을 가지시고 천국을 만드셨는데, 그러면 이 세상에 천국으로 가는 구멍이 있다고 보자는 말이죠. 그것이 곧 십자가인데, 그런데 이 세상에서 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수채 구멍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로는 사람들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물에 빠져서 가기는 가는데, 그런데 사각형의 갈고리와 같은 것을 가지고 그만 이 구멍을 그만 막아버린다는 겁니다. 즉 성경지식은 많아서 이론상으로는 "저는 천국이 좋아요" 라고 하면서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만 '철거덕' 하면서 이 수채 구멍을 막아버리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무리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26장을 보겠는데, 36절에서 41절입니다.

(마 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

지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시는데, 거기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들이 함께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과연 몇 명입니까? 4명이라는 겁니까? "전체 + 3명" 이라는 겁니까? 예수님은 그냥 한 분이 아닌데, 그것은 불신자들이 하는 이야기이고, 예수님은 한 분이 아니고 전체라는 겁니다.

그렇게 전체가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러면 하나님도 전체라는 말이죠. 그렇게 전체와 전체가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전체가 되시는 분이 전체의 안목을 가지고 전체와 관련된 사항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데, 41절에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시험에 들지 않게" 라는 것에 있어서, 이 시험은 유혹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전체가 유혹 덩어리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죠. 즉 "너희도 유혹 속에 놓여있고, 또한 나도 유혹 속에 놓여있고, 그래서 기도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수채 구멍을 통과해서 아버지의 나라로 빠져나가야 하니 말이죠.

*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물론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고 빠져나가시는데,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뿌리치고 빠져나가는데, 그런데 제자들이 잠이 와서 자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수채 구멍으로 빠져나가는데, 뭔가 '덜커덩' 걸렸다는 겁니다. 마음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인데, 그런데 정작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이죠.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육신이 걸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논리에 의하면, 육신이 세상과 악마의 유혹에서 육신이 떨어지지를 못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 것처럼",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인데, 그러나 실제로 육신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말이죠.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는, "물을 길러야 하는데, 어디 가까운 우물이 없을까?"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물어보는데, 즉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도 물을 길러야 하나? - 물론 길러야지. 그렇게 해야 6번째 남편과 재미나게 살아갈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인을 보고, "네 남편을 데리고 오너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자 여자가 수를 쓴다는 겁니다. 자기가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숨겨두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남자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여자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 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런데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는 남편이 5번째이든 6번째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멸망시키려고 오셨다" 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인데, 그게 문제라는 말이죠. 왜 멸망을 모르는고 하니, 자기가 심판 가운데, 사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서 예배를 드리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이 여자는 여전히 자기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는 멀쩡하다는 겁니다. 전체가 되신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하는 이야기가, 그게 이 여인에게는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슬픈 소식이 될 수도 있는데, 사실은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네가 남자를 사귀던 말던, 남편이 몇 번째가 되던, 그런 것을 일체 묻지를 않겠다" 라는 의미인데, 즉 "네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든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든 일체 묻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 심봤다 !!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는 네가 사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사는 방식을 너에게 일방적으로 집어넣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전체가 부분 안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바로 이 소리를 듣고서 여인이 "심봤다!" 라고 하면서 들고 있던 물동이를 그냥 내동댕이를 쳐버렸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6번째 남자가 "물은 어디에 버리고 왔노?" 라고 하면서 따질 수도 있는데, 하지만 지금 이 여인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남자와 사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집어던진 것인데, 씨름에서는 그것을 배지기라고 합니까? 아무튼 그렇게 자기를 날려버렸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전체를 보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여기 요한복음 4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 여인이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자기를 심판하려고 왔는데, 자기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왔다는 말이죠. (녹취 구 - 지금 식당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와서 전도를 하고있는데, 마누라는 인상을 쓰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런데 이 여인의 경우에는, 그렇게 자기를 멸망시킨 주님이 너무나 고맙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인데, 그동안 자기는 늘 갈증을 느끼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끊임없는 갈증은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겁니다.

(요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 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악마의 조종을 받는 '주체(S)' !!

여기서 육신을 분석해보면, 이 육신은 그냥 신체 덩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주체(S)' 라고 하는데, 혹은 '나'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아담의 형상들은 누구의 조종을 받는고 하니, 죄, 저주, 혹은 악마의 조종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인간은 마귀의 지시를 받는다는 말이죠. 그게 마귀의 지시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결핍을 느끼는데, 그렇게 되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를 채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양동이를 들고 물을 기르려고 나오듯이 말이죠.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니 주님이 보시기에 갈증이 있다는 것인데, 즉 멀쩡하지 않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1' 이라는 것인데, 갈증을 느끼니까 뭔가 더 추가적으로 원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조금 더 크진 'S' 가 되고, 거기서 또 다시 갈증을 느끼고, 그러면 두 번째 남편, 세 번째 남편, 계속해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즉 "S1, S2, S3, S4, S5 …",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거울을 보면 몸뚱아리이지만, 거기에는 갈증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마귀가 시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는 신이야. 그러니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아무도 나에게 간섭할 수가 없어" 라고, 그렇게 왕왕거린다는 말이죠.

* 나는 신이다 !!

악마가 있으면 이렇게 "너는 신이야" 라는 것이 성립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그만 악마를 떼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나는 신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나는 대자대비하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종교입니까? 바로 불교인데, 그게 부처라는 말이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무엇인고 하니, "신은 없다. 네가 신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불교의 최종목표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사람들이 충분하게 동의할 수밖에는 없는데, 즉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중을 만나면 중을 죽여라. 네가 부처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는 신이다" 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신이 되고 싶어라. 신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신이 되는데 멈출 수가 없어"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신인데, 그런데 신으로서는 뭔가 미흡한 것이 내부에서 자꾸만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것인데, 인간을 결함이 있는 존재로 말이죠.

* 충동 → 욕구 → 욕망 !!

이 육신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욕구'가 나오는데, 아이들이 태어나서 젖을 달라고 하는데, 그게 욕구라는 겁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즉 자율성 이전의 것이 욕구로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을 충동이라고 하는데, 즉 충동에서 욕구로 나간다는 겁니다.

배가 고프다고 젖을 달라고 하는 생리적인 욕구가 있는데, 그런데 거기에 자기가 신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욕구가 채워져야 한다는 말이죠. 즉 사회에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하게 다듬어진다는 말이죠.

* 너는 내 칼에 죽어라 !!

그렇게 욕구가 다듬어지는 것을 욕망이라고 하는데, 이 욕망이 있어야 사람이 사는 재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그냥 욕구만 있으면 미친 사람이 되는데, 그래서 길을 가는 사람에게 몽둥이를 들고 "돈을 내라" 라고 하면, 교도소에 가게 된다는 말이죠. "나는 네가 미워. 그러니 내 칼에 죽어라" 라고 하면 교도소에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왜 교도소에 가지 않습니까? 적당히 다듬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게 다듬는 것을 가지고 욕망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 욕망 속에는 충동과 욕구가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설치면 사회적 욕구에서 실패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사회라는 것, 자기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다수라고 하는데, 즉 개개인이 모인 다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실제이고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은 다수라는 말이죠. 그래서 현실은 인간에게 전체가 되는데, 그 전체를 일부 보여주는 상징을 두고 '욕망'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전체와 나는 의견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라는 의미인데, 즉 사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그게 이해가 된다는 말이죠. "이재명 대표가 19일을 금식을 해서, 생명이 위험해서 병원에 실려갔다" 라고 하면, 여기서 우리는 '금식', '병원', '생명', 이런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안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체의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인데, 이 전체가 바로 육신이라는 말이죠.

다시 마태복음 26장으로 돌아와서, 지금 예수님은 기도를 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만큼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의 육신에 달라 붙어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죠. 즉 육신 자체가 이미 악마의 노리개감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관심이 없는데, 육신이 약해서 잠이 오기 때문에 말이죠. 오늘따라 여러분의 육신도 약해 보이는데(ㅋㅋ), 아닌가요?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신체가 허약하다" 라는 의미가 아니고, 물론 건강검진을 해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지만 제자들은 다 건강하다는 겁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아시는 그 전체를 그들은 모르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면, 즉 말을 해도 안 되고, 그리고 기도의 현장에 데리고 가도 안 되고, 육신이 연약해서 매일같이 세상만 쫓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을 과연 어떤 식으로 구원하면 되겠느냐는 말이죠.

여기가 하늘나라의 회의장이라고 한다면, 저기 세상에는 아직 택한 백성들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천사들이라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의견을 묻는데, "세상에 푹 빠져있는 그들의 마음에 무엇을 일으키면 천국으로 데리고 올 수 있을 것인지, 여러분이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시해보세요"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자기에 대한 즐거운 의심 !!

물론 질문을 던지면 답변이 곧 바로 제시되는데(ㅋㅋ), 그것은 바로 자기에 대한 의심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에 대한 의심이 들 때, 비로소 인간은 "~인 것처럼" 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죠. "~인 것처럼", 그렇게 되려면 말씀이 와야하는데, 그러면 그 말씀의 활동과 자기 생각에는 큰 격차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격차를 말이죠.

교회에 장로와 감독을 세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데, 즉 "격차를 느껴라" 라는 겁니다. 진짜로 말씀을 말씀대로 다 이루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그러면 육신이 있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고 지킨다고 하는 것이 됩니까?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마귀가 뒤에서 조종을 하기 때문에, "나는 지켰다" 라고 주장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마치 지킨 것처럼", 그렇게 바꾸어버린다는 말이죠. 실제로 지킬 수가 없는데, 아니 지킬 필요도 없는데, 주님은 지킨 것처럼 만들어버리는데, 그렇게 해서 의심을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불신자의 경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의심하면 좌절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말이죠. 신이 신을 의심하게 되면, 신으로서의 자격은 박탈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참으로 곤란해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미 사망과 심판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의해서, 즉 전체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하면, 의심 자체가 즐거운 일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의심이 즐거운 일이라는 말이죠.

* 나는 나를 의심하는 재미로 산다 !!

누군가가 여러분을 보고 "성도가 되어서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사노?" 라고 묻는다면, 그러면 "나는 나를 의심하는 재미로 산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번이고 만번이고 의심해도 괜찮은데,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말이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 괜찮다는 것이죠.

"너는 신자야? - 아니, 불신자야. 나는 신자인 척을 하고 있어" 라는 것인데, 그것을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서 마귀의 사주를 받아서 "나는 신이다" 라고 하면서 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들키면 안 되니, "주여, 믿씁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내려간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분노의 표시인데, 우리 인간은 그 분노를 표정에서 숨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1절에 보면 이런 불신자의 태도가 나오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계 16: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 마귀가 독하기 때문에 !!

여러분, 독하지 않습니까? 이런 독한 것이 인간 속에 다 들어있었다는 말이죠. 인간 자신은 독하고 싶지를 않은데, 그런데 마귀가 독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 라고 하면서, 마귀가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향해서 들어도 좋다는 식으로, 그렇게 외친다는 겁니다.

"하나님, 당신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지? 범사에 감사였어? 그러면 내가 해주지" 라고 하면서 감사를 한다는 말이죠. 얼마나 못되었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감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예배참석을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당신은 이것을 원하잖아? 내가 해줄게" 라는 식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입꼬리가 내려가 있는데, 교인들이 얼마나 못되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렇게 감사를 했으니, 내 기도에 응답해주어야지. 지금 뭐하시노? 얼른 응답을 해주어야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는 겁니다.

"내가 바쁜데도 이렇게 교회에 나와주었으니, 내 아이가 아픈 것을 낫게 해주어야지. 그리고 성적도 좀 올려주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내 딸을 빨리 결혼을 시켜주어야지. 좋은 신랑감을 보내주어야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 인간은, 악마의 대변자 !!

그러니 하나님을 향한 속마음이 무엇인고 하니, "당신이 전체야?" 라고 물으면서 "나도 전체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전체야? - 나도 전체야" 라고 한다는 것은, 누구의 대변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인간은 악마의 대변자인데, 그러니 "당신이 전체야? - 나도 전체야" 라고 하는 말이 맞다는 것이죠. 그렇게 인간은 악마를 대변해주고 있는데,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짝을 이루어서 만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이런 인간의 도발에 대한 주님의 조치는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자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18장 7절을 보겠습니다.

(계 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여기 끝에 보면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 이리와 바. 어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애통해할 줄 알아"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9절과 15절에 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있는데, 울고 애통해한다는 것이죠. 7절에서는 애통해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말이죠. 그야말로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는 겁니다.

(계 18:9)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계 18: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이 애통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죠. 악마의 전체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이 세상은 지옥의 초입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이라는 말이죠. 성경은 악마를 이 세상의 신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세상 신 앞에 모든 인간들을 굴복을 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독교라는 종교는 마귀가 만든 것인데,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서로가 의견이 통한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자" 라는 것에 대해서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바벨탑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죠.

단 여기서 멸망 이야기는 빼자는 것인데, 물론 나쁜 짓을 해서 멸망을 당하는 것은 할 수가 없지만, "애초부터 멸망을 당한다" 라는 것은 빼버리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멸망을 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것은 삭제를 시켜버린다는 말이죠.

악마가 인간을 가만히 두지 않는데, 그래서 "네가 뭐가 못나서 멸망을 받아야 하지? 지금이라도 잘하면 되잖아. 성경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지금이라도 지키면 복을 받을 수 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목사가 이것을 계속해서 설교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교재 130페이지에 나오는데, 이게 끝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조작이고 작당이고, 그리고 환상이라는 말이죠. 진실은 그만 파괴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나는 멀쩡해. 뭐가 못나서 멀쩡하지 않다는 거야?" 라고 하지말고, 그렇게 멀쩡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심해보라는 겁니다. 마귀가 사주하고 있음을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의심을 하면 됩니까? 그것은 말씀과 비교를 해보라는 겁니다.

여기서 디모데후서 3장을 살펴보겠는데, 1절과 2절입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여기 1절의 고통은, 조금 전에 이야기한 애통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본문을 불신자가 보았다고 여기면, 그러면 불신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은 척을 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은 척을 한다는 겁니다. 즉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의심해야 진심이 나오는데, 그런데 자꾸만 자기를 방어하니까 진심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작당이 나오고 조작이 나온다는 말이죠. 거기서 환상이 나오는데, 그래서 인간은 자기 환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겁니다. 자기가 꾸민 환상 속에서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는데, 우리의 진실은 예수님인데, 자기가 최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가 진실이다" 라고 하면서 나서는데, 그러니 그때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나는 진실인 것처럼 살아간다" 라고, 그렇게 즐기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를 보면서, "엉터리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하는데, 내가 봐도 참 가관이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게 바로 감사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성경말씀은 우리를 악마에 속한 자라고 간주하고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악마는 뒤에 숨어서 "쉿, 물어, 물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비겁하게 자기는 뒤에 숨고, 인간이 나서서 대적하게 해서 만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계시록 9장 20절을 보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이 땅에 재앙을 주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땅이 지옥의 입구이기에 말이죠. 그것은 "나는 재앙의 하나님이다. 멸망의 하나님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암시해주셨다는 겁니다.

(계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계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그런데 여기 20절에 보면,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라고 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21절에서도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라고 하고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13장 8절에 보면, 이런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과 같은 것의 반대말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그것이 사랑인데, 즉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이 없는 상태로 성경말씀을 보면, 그게 바로 살인이고 복술이고 음행이고 도적질이라는 말이죠.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율법은 물을 길러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부를 보는데, 즉 "너희 내부에 마귀가 있다. 육신에 마귀가 들어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율법과 말씀이 지적해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을 보면서 껍데기에서 머무르면 안 되고 자기 내부에까지 침투해야 하는데, 그러면 자기 방어막을 단단히 칠 게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말이죠. "아하, 조작한 나를 '나' 라고 우기는구나" 라고 말이죠.

그 조작된 환상을 성경말씀이 뚫고 들어오는데, 왜냐하면 성령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말씀은 죽음에서 이겼기 때문에, 그 어떤 공포나 두려움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마치 수면내시경을 하듯이 우리는 죽여놓고 내부를 해체하는데, 그리고 그 결과를 성경에 기록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너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라는 것인데, 이미 누가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까? 그렇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의 행하심이 우리의 행함보다 월등하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진실로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 예수님, 우리는 멀쩡하지요?

어제 주일학교 시간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소경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두 단계인데, 하나는 육신의 눈을 뜨는 것인데, 여기서 제자들은 자기들은 멀쩡하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경이 지나가니, 예수님에게 "우리는 멀쩡한데, 그런데 왜 저 사람은 소경이 되었습니까? 저주를 받았지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님은 전체고 제자들은 부분인데, 그 부분이 부분을 가지고 "우리는 저주를 받았다. 우리는 복을 받았다" 라고 하니, 예수님은 여기서 두 단계를 밟는다는 겁니다. 먼저 소경을 눈을 뜨게 하시는데, 그렇게 되면 제자들이 더 이상 소경이라는 소리를 할 수 없는데, 자기들과 같은 입장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눈을 뜬 이 전체를 주님은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까, 소경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소경은 눈이 감겼을 때도 소경이고, 눈을 떠서도 소경이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이 소경에게 묻는데, "네가 나를 믿느냐?" 라고, 즉 "내가 했는가? 네가 했는가?" 라는 것을 묻는다는 겁니다.

이 소경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눈에 진흙을 바르고 나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는 소경이 실로암에 가서 씻었으니 자기 행함인데, 그런데 정작 소경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원천이 어디서 왔는고 하니, 전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온 행함을 자기가 대신해서 보여주었다는 말이죠.

* 이 땅에 소경인 것처럼 오신 예수님 !!

그래서 여기서 소경의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것을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안에 들어오셨음을 믿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예수님은 이 땅에 소경인 것처럼 오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소경이 되는 것을 싫어하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소경이라면 죄가 없겠지만, 본다고 하니 죄가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자기가 보지 못한다고 하면 자기에 대해서 의심이 되는데, "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것이 바로 소경이 아닌 자, 즉 보는 자라는 겁니다.

(요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전체 안목에서 다시 다시 자기를 보는 것인데, 그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 구름 같은 교회 !!

끝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그러면 교회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분명히 성경에 보면 교회가 나오는데, 격차가 벌어지는 가짜교회가 아닌 진짜 교회는, 그것은 마치 구름과도 같다는 말이죠. 구름은 수증기가 모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모였다가 흩어질 수도 있고, 또한 흩어졌다가도 다시 모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구름 자체가 아닌데, 외부에서 수증기의 밀도가 증가하면 되기 싫어도 구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게 교회인데, 자기가 교회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도 주님이 계시면 교회인데,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 다 하셨잖아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천하보다 귀한 교회라는 겁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이 부활하셔서 쉬지도 않고 활동한 그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악마를 이기고 또 이긴 열매로서 주님 자신의 교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9,21 오전 11시에 마침.

나는 구름, 구름이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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