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31-주님 안의 지옥

아빠와 함께 2023. 9. 10. 08:43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1 - 주님 안의 지옥

23,07,1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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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은 인간들만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인간들의 손에서 결정되는 세상도 아니요, 그렇게 움직여지는 세상도 아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주님만이 아니라 지옥에서도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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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과 지옥, 끝 !!

지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동네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이 지옥을 무시무시하다고만 하지말고, '끝' 이라고 보자는 말이죠. 즉 "모든 것이 다 결론이 내려졌다" 라는 것인데, "드디어 알아야 할 것은 다 알려졌다" 라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마지막 끝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천국과 지옥이다. 그렇게 둘로 구분된다. 끝!",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것은 천국과 지옥으로 마감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에 의미를 조금 더 추가해서, 천국을 천국이라는 환경, 그리고 지옥을 지옥이라는 환경이라고 보자는 겁니다. 여기서 환경이란 것은 '둘러싸였다" 라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인간보다 환경이 더 우선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보다 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 (1)나를 둘러싼 환경은 어떠한가? (2)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인간 < 환경" 이라고 표시할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하면 여러분의 환경은 과연 어떠하냐는 겁니다. 여기서 첫 질문은 "나를 둘러싼 환경은 어떠한가?" 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이게 같은 질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1번에 대해서 답변하기를, "나를 둘러싼 환경은 이러이러하다" 라고 하겠지만, 2번의 경우엔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왔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 답변이 다른데, 2번의 경우에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2번을 조금 더 심도 있게 들어가면, 만약에 "나는 어릴 때부터 유복한 가정이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과연 1번에 대한 답변일까요? 2번에 대한 답변일까요?

2번인데, 왜냐하면 "나는 어릴 때부터 유복한 가정이었다" 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나는 어릴 때부터 잘나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가정이 유복했다는 것은 1번인 환경이지만, 하지만 결론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1번에서 시작해서 결론은 2번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잘 나갔다" 라고 하는, 그것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1번은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이렇게 했지만, 환경이 나를 바꾸었다" 라고 했을 경우인데, 그러니 "나로 시작해서 환경으로 끝맺음을 한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이런 인간이었는데, 그런데 그 환경이 나를 그만 지워버렸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의 아이큐가 얼마이고, 자기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그런 것들은 모두 무시되고,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지옥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끝 이야기인데, 그 끝은 천국과 지옥으로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천국과 지옥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천국은 천국을 둘러싼 환경이고, 또 지옥은 지옥을 둘러싼 환경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대목을 말씀하시자 듣는 사람들이 제일 어려워했는데, 지금도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이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교인들은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는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나왔는데,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천국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라고 하니, 그야말로 어리둥절해진다는 말이죠.

교인들의 생각은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바른 결정을 내리면 천국이고, 그렇지 못하면 지옥이다" 라는 것인데, 즉 환경 이야기가 아닌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결정이고 자기의 선택이라는 말이죠. "구원을 받고 말고 하는 것은 내 손에 달려있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믿으면 천국이고, 내가 믿지 않으면 지옥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예수 천당, 불신 지옥 !!

우리나라 기독교 초창기에 성결교 계통의 부흥사가 있었는데, 그분이 전도를 하면서 내세운 문구가 무엇인고 하니, 상당히 복음적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 천당" 이란 것은 맞는데, 즉 "예수라는 환경이 나를 천국에 보낸다" 라는 것은 맞다는 말이죠.

그런데 "불신 지옥" 이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아서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 천국은 환경이 알아서 !!

이 마태복음 13장 11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즉 "천국은 그 환경이 환경대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알아서 선택해서 천국백성을 만든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백성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알아서 결정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온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내가 천국에 오려고 이러이러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것에 의해서 천국에 왔다" 라고 하는 소리를 전혀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게 참으로 쉬운 내용인데, 그렇지요? 참으로 쉽다는 겁니다. 이게 쉬워야 하는데, 만약 이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좀 곤란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 자기가 할 수 있는 의지가 모두 다 차단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게 천국백성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의 상식은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 반면에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간다" 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물론 자기도 그런 줄 알았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 그러면 어떤 것이 지옥인가?

여기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것이 지옥인가?" 라는 겁니다. 방금 천국을 환경이라는 조건으로 설명했는데 말이죠. 사람들은 "내가 하기 나름으로 천국에 가고, 내가 하기 나름으로 지옥에 간다" 라고 하는데, 즉 "내 앞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는데, 내가 천국을 선택하면 천국에 가고, 내가 지옥을 선택하면 지옥에 간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환경이고, 그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환경이라는 말이죠. 천국에 가려고 교회에 왔는데, 그런데 그 교회자체가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단체로 지옥이라는 말이죠. 자기는 천국에 가려고 제대로 선택을 잘 한다고 해서 절로 가지 않고 교회로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택 자체가 어떠한고 하니, 인간은 지옥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 인간의 선택은 오직 지옥 !!

그래서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선택은 오직 지옥이다" 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그 무엇을 선택해도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강의를 하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그 환경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 아이가 한 살, 두 살, 세 살,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관찰해보라는 겁니다. 저도 외손자와 외손녀와 같이 있어서 열심히 관찰을 하는데, 물론 설교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이죠(ㅋㅋ).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짙어지는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만의 세계라는 것이죠.

* 들어오지마 !!

물론 우리도 다들 이렇게 자라왔는데, 그렇지요? 이 자기만의 세계를 바꾸어서 말하면, 그것이 자기만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환경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간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나이가 든다고 하는 것은, 즉 나이가 10살이 되고 20살이 되고 30살이 된다는 의미는 "들어오지마!" 라는 겁니다.

아무도 자기의 허락이 없이는 자기만의 환경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인데, 그래서 사춘기가 되면 노골적으로 자기 방의 방문을 잠근다는 말이죠. 이럴 때가 되면 엄마는 그야말로 화가 치밀어 올라오는데, "똑똑! - 들어오지마. - 제발 말을 좀 하자. - 안 돼. 찰깍!",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청소년 때는 그렇게 자기 방문을 잠그면 되는데, 그런데 나이가 30살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 선을 본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내 허락이 없이는 내 안에 들어오지마. 들이대지마" 라는,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만의 환경을 만드는데, 그러면 그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나' 라는 자아가 무엇을 쳐다보는고 하니, 자기를 둘러싼, 이것을 저는 어느 강의에서 '돔(Dome)' 이라고 표현했는데 말이죠. 그렇게 돔을 만들어놓고서는, 그 돔에서 튕겨나오는, 이것을 어려운 말로 '반향' 이라고 하는데, 혹은 '메아리'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나만의 돔 구장을 짓고 !!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저지른 행동과 자기 마음에 있는 소리를 자기가 구축한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것이 영화 '트루먼 쇼'의 세트장과도 같은 것인데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구축한 돔과 같은 것에서 튕겨져 나오는 것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살아가는 보람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철저하게 폐쇄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정상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되지 않으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남들에게 마구 퍼주고 하면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것을 가져야 그게 정상이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것은 이번 수련회에서 하겠는데 말이죠.

그러니 정상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폐쇄구조를 가지고, 거기에 남들이 왔을 때 자기 환경을 보다 더 멋있게 만들고 도움이 되는지, 그것을 판단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저쪽에서 노크를 하면 자기에게 실익이 되는지 아니면 손해가 되는지, 그것을 철저하게 판단을 해서 문을 열어줄지 말지를 결정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때의 문은 마음의 문인데, 청소년 시기에는 그게 방문으로 표현이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대화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저 사람과 말을 섞을까? 말까?" 라는 것인데,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것을 따지게 된다는 말이죠. 만약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데, 즉 "나는 당신과 대화하기가 싫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점점 더 넓어지는 나의 세계 !!

그러면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확정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만의 세계가 점점 더 넓혀진다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마당이 넓은 집과 좁은 집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 살고 싶습니까? 당연히 마당이 넓은 집인데, 물론 요즘은 대부분이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살고 있지만 말이죠.

이렇게 마당이 좁은 집에서 넓은 집으로, 즉 저택으로 옮기려면 무엇을 필요할까요? 그것은 돈인데, 그러면 결론은 났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다. 손해다" 라고 하는 것은, 돈이 들어오면 문을 열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문을 닫아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친구도 다 잘라버린다는 것이죠.

* 인간이 교회에 가게 되면?

그러면 이러한 인간이 교회에 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에 이렇게 자기만의 폐쇄된 돔 구조가 있는데, 교회에서 목사가 "이제 다같이 통성기도를 합시다" 라고 하면 자기 문을 조금은 열어주는데, 그러면 기도를 주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버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인데, 그래서 빼꼼이 문을 열어준다는 겁니다. 그게 "주여, 주여, 주여!"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죠. 그렇게 문을 열었으면 이제 내용물을 채워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 새끼가 저 남산 위의 노루처럼 잘 뛰어 놀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기도내용이죠? (ㅋㅋ) 그렇게 남산 위의 노루처럼 뛰어 놀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은 병원비가 들어가지 않아서 좋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성이 있어서 물 좋은 친구들이 '우리 가정' 이라는 폐쇄된 돔 구조에 들어올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찌질한 놈들은 쫓아내면 되고 말이죠.

그러니 기도내용이 이미 매뉴얼화가 되어있는데,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남북통일도 들어가고, 그리고 수출도 잘 되어야 하고, 요즘 같으면 수해도 지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동네는 어떻게 되든 간에, 아무튼 우리동네에는 수해가 오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장마가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지금 다른 동네는 엉망인데도 말이죠.

* 이것이 '정상인' !!

이것이 곧 자기 애, 자기 사랑, 자기 집착, 즉 자기만의 구조인데, 이것을 두고 이 세상에서는 '정상인'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선택한 지옥인데,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그야말로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은 몽땅 다 어디로 끝나는고 하니, 지옥으로 끝난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러면 천국은요?" 라고 할 수 있는데, 당연히 그런 질문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아무튼 자기의 모든 결정은 지옥인데, 이것은 우리가 확실하게 하고 가자는 겁니다. 물론 정신병자들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도 지옥인데, 전혀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천국은 예수님 !!

그렇다면 천국은 어떻게 갑니까? 천국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내부가 갈라진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없다는 말이죠. 천국은 예수님 안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인간이 속한 환경은 지옥인데, 그리고 주님이 가지고 오신 지옥이 있는데, 이 둘의 구분을 주님은 아신다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지옥, 그게 바로 인간이 속해있는 환경인데, 물론 인간은 그게 지옥인 줄 모른다는 말이죠. 오히려 천국에 가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강의 처음에 지옥은 끝이라고 했는데, 끝은 시작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확정이 되어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을 펼쳐낸 것이 역사의 마지막 끝에 등장하는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은 이미 창세 전에 기획이 되어있었다는 말이죠. 허둥지둥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머리 속에 구상이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현실 속에 실제화를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이죠. 인간이 모르고 있던 지옥은 이미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지옥을 바깥으로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계시면, 이 예수님 안에 창세 전에 기획한 지옥도 있고, 또한 천국도 있다는 말이죠. 물론 예수님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인간은 모르는데, 자기만의 세계를 확장하고 지키는데 정신이 팔려서, 즉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놀아난다고 예수님의 세계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저 자기 세계에 이익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데, 그래서 기도를 해도 자기 몸이 아프지 않고 돈도 잘 벌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는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고, 그리고 예수님은 그만 그것을 바깥으로 내어버린다는 겁니다.

* 잉태치 못한 분의 잉태 !!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게 바로 '잉태치 못한 분의 잉태' 라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분류가 되고 있는데, 그것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창세 전 하나님의 약속인데, 이 약속을 예수님이 자기 안에 담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약속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것이 바깥으로 잉태가 되니, 형인 에서는 미움을 받고 동생은 야곱은 사랑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9장에 나오는데,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기 이전에 이미,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그렇게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에서가 천국에 가는 일은 결단코 없다는 겁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것이 불신자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말이고, 반면에 신자에게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한 것이 없는데, 오히려 자기 이익만 챙겼을 뿐인데, 그런데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당연히 지옥에 가야 하는데, 하지만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교재 123페이지를 보면 고린도후서 2장 말씀이 나오는데, 14절에서 17절입니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 구원을 얻는 자들 vs 망하는 자들 !!

여기 15절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창세 전에 하나님의 구분이라는 말이죠. 남자와 여자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성격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분류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구원을 얻는 자들과 망하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이미, 하나는 구원을 받는 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망하는 자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신 분류라는 것이죠.

*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식으로 임신을 하셨고 잉태를 하셨는가?

그래서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나는 남자로 태어났어. 여자로 태어났어" 라고, 혹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 부잣집에서 태어났어" 라고 하는 인식을 넘어서, 창세 이전에 무슨 계획이 있었는지, 즉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식으로 임신을 하셨고 잉태를 하셨는가?" 라고 하는 선까지 나아가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전지적 관점' 이라고 했는데, 즉 처음과 끝을 몽땅 다 알아버렸다는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에는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면, 오늘은 끝에 대해서, 즉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시작과 끝을 알았다고 하면, 그러면 모두 다 알아버린 것이 된다는 말이죠.

* 나는 늘 삭제를 당한다 !!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고 복음을 들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나는 늘 삭제를 당한다" 라고 하는 사실이 즐거워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무슨 행동을 하든, 그 무슨 사고를 치든, 그 무슨 죄를 짓든 간에, 주님께서는 항상 삭제를 시켜주신다는 말이죠.

오히려 그렇게 삭제가 되기 위해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데, 일은 자기가 저질러놓았지만 그것마저 삭제가 된다는 겁니다. 즉 주님께서 일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것마저도 주님께서 삭제를 시키신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환경이 천국의 환경이라는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마태복음 13장에서는 그것을 '허락된 환경' 이라고 하는데, 즉 주님이 허락하신 환경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런 환경을 허락하신 겁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무엇을 했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을 아는 환경 속으로 우리가 허락이 되었다는 말이죠.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 허락된 환경 !!

그러니 설교나 강의시간에는 자기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오직 예수님 이야기만 해야하는데, 그것은 허락을 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점점 떨어져 간다는 것인데, 말씀에서 멀어진다는 것이죠. "나도 복음을 알았어.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어" 라고 하면서, 점점 더 말씀자체에 관심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물론 이유는 다 있는데,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바쁘다고 하면서 핑계를 댄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애초에 말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다만 자기에게 이익에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교회에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니고 누구에게 관심이 있었는고 하니, 자기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 자신이 삭제를 당하는 경험을 하지 못해서 그러한데, 그래서 자꾸만 지식과 정보를 확보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지식과 정보를 확보해도 주님께서는 깔끔하게 제거를 하시는데, 물론 우리 인간들은 그런 것은 감히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지만 말이죠.

* 인간이 못한 일을 주님이 해내셨다 !!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인간이 못한 일을 주님이 해내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내가 못한 일을 주님이 해내셨다" 라는 겁니다. 주님의 품속에는 천국과 지옥이 다 있는데, 주님은 착하고 훌륭하신 분이니 천국만 있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의도적으로 지옥을 만들기로 계획을 하시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을 하시면서,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천국과 지옥을 갈라지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죠. 영원히 갈라지도록 말이죠. 그렇게 하시면서 주님은 천국에 갈 사람들도 모집하고, 특히 지옥에 갈 사람들도 모집을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모르는 게 아닌데,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왜 이런 것이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느냐는 말이죠.

여기에서 마태복음 22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 천국은 갈라짐을 통해서 !!

여기 3절에 마지막에 보면 "오기를 싫어하거늘" 라고 되어있는데, 임금님이 종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그들이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현재 지옥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로 하여금 오기 싫어하도록, 먼저 주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던졌다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들은 자기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는 겁니다. 한 살, 두 살, 그렇게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져온 것이 자기 세계인데, 그것이 무너지면 곧 자기가 무너지는 것이고, 그러면 살아갈 의미가 사라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임금님이 혼인잔치에 초대를 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자기의 개인적인 일, 즉 자기만의 세계의 일과 충돌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죠.

이게 천국비유인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일은, 예수님의 세계에서 보면 이 세상은 전부 비유라는 겁니다. 실제가 아닌 가상세계라는 것인데, 가상세계니 비유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시작은 천국인데,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갈라짐이라는 겁니다. 즉 "천국은 갈라짐을 통해서 나타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12절과 13절을 보겠습니다.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 수족을 결박하라 !!

여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있는데, 임금이 그들을 어떻게 합니까? "여기에서 나가주세요" 라고 하는 게 아니고, 13절을 보면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저기 칠성시장에 가면 족발요리가 있는데, 그 족발을 볼 때마다 수족을 결박당했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죠. 그것은 결박이 아니고 잘린 것인가요?

그런데 사람의 수족을 결박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사람의 지혜와 의지와 결단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인데, 그렇지요? 우리가 복음 앞에서 수족을 결박당하는 체험을 해야하는데, 그래야 자기가 누구인지를 예수님의 관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손에 수갑을 채운 정도가 아니고, 그야말로 꼼짝도 하지 못하게 손과 발을 한꺼번에 다 묶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12절에서 '유구무언(有口無言)' 이라고 하는데, 즉 입이 있으나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 사람들 같으면 "아니 우리보고 그냥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이렇게 막 대하면 되나? 참석해준 것만으로 고마워해야지" 라고 나오지 싶은데, 할 말이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상대가 임금님인데, 즉 일방적이라는 겁니다. 임금님 앞에서 나라는 각 개인의 나라가 아니고 임금님의 나라인데, 그러니 거기에서 누구를 쫓아내고 하는 것은 순전히 임금님 소관이라는 말이죠. 백성들이 할 말이 있어도 자기들끼리 하는 것이지, 임금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유구무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할 말을 삭제를 당해야 하는데, 그게 복음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 십자가 뒤편을 주목하라 !!

십자가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주님은 그 십자가 앞에 사람들을 모은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뒤를 놓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 십자가 뒤쪽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험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마구 희롱하고 놀리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 그때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험담을 했는데, "남을 구원한다고 사기를 치지 말고 너나 잘해" 라고 했다는 겁니다. "눈을 감아봐라. 우리 둘 중에서 누가 당신의 옷을 빼앗아갔지? 알아맞히면 선지자라고 해줄게" 라고, 그렇게 나왔다는 말이죠.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눅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눅 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 예수여,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달라 !!

이런 것이 조금 어려운데, 우리 인간들은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하는데, 그것은 "인간들 세계에는 인간들이 결정할 수 없는 우연적인 것이 있다" 라고 하는, 그게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인간들이 이런 것을 약간이나마 짐작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로마군인들이 하는 말이, "당신이 선지자라고 하면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달라.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인식 바깥에 있는 것까지도 알려 달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이 선지자라고 인정을 해줄게"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유한한 것만 알지만, 거기에 더해서 무한한 것까지도 챙기려고 하는 지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한과 무한, 그 전체를 다 알려주는 자에게는 선지자라고 인정해줄 용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과연 선지자인가요? 유한과 무한을 모두 다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옥의 환경이라는 겁니다.

* 인간은 아는 것이 전혀 없어 !!

인간은 지혜를 넓혀나가는데, 그러면서 "미지의 것은 남겨두고 아는 것만 열심히 하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우주를 탐사하는데 있어서 "지금 달까지는 가지만 화성까지는 아직 곤란한데, 그러니 그것은 후손에게 남겨두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연 겸손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것도 오만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실상인데, 즉 인간은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른다는 말이죠. 특히 인간은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예수님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르면서도 믿는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간증집회에 참석을 하곤 하는데, 즉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 나도 열심히 믿으면 병을 고치겠지"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 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결국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죠.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요즘 비가 많이 오는데, 그러면 누가 꼬질러서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느냐는 겁니다. 장마철이 되어서 비가 많이 오는데, 그 이유를 우리 인간이 압니까? 모른다는 말이죠. 물론 오고 난 뒤에 "얼마나 왔다" 라고 하는 것은 되는데, 하지만 정작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 이유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것을 모르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도 악마의 부추김에 그만 넘어가서 어떻게 나옵니까? "내가 아니면 그 누가 나를 지키리. 내가 지켜야지" 라고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 천국은, 바깥 어두운 곳이 있어야 !!

마태복음 22장 이야기를 계속해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잔치에 참석했는데, 그런데 임금님이 어떻게 나옵니까? 그들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의 어두운 곳으로 쫓아내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을 이루려고 하면 무엇이 주님에게서 빠져나가는고 하니까, 바깥 어두운 곳, 그렇게 지옥에 갈 사람들을 분리시킴으로서 천국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작업을 인간이 합니까? 주님이 하시는데, 즉 주님의 뜻에 의해서 믿는 자들은 천국에 가고, 또한 주님의 뜻에 의해서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믿지 않는다' 라는 것은 무슨 뜻이고, 동시에 '믿는다' 라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바퀴 역설(Aristotle's wheel paradox) !!

여기서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는데, 이렇게 동그란 바퀴가 있는데, 여기 중앙에 동그란 축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바퀴가 이렇게 굴러가서 여기에 도착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작은 바퀴와 큰 바퀴가 두 개가 생기게 되는데, 그렇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 작은 동그라미의 사이의 거리를 'A' 라고 하고, 그리고 바깥의 큰 바퀴의 동그라미의 거리를 'B' 라고 하자는 말이죠.

그러면 A와 B 사이의 거리길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길이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습니까? 바퀴가 굴러감으로서 생겼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작은 원의 둘레와 큰 원의 둘레는 서로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다는 겁니다. 원의 크기는 분명히 다른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 원이 굴러온 길이는 왜 똑같으냐는 말이죠.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 이라고 하는데, 항상 같은 거리를 움직이는 그야말로 이상한 바퀴라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가 이렇게 눈으로 보기에 원의 크기가 다른데, 그런데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거리에 도달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차이가 날 것이 없다는 겁니다.

* 품에 안긴 아이 !!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은 간단한데, 원으로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말이죠. 이렇게 삼각형 안에 삼각형을 집어넣게 되면, 그리고 이것을 굴린다는 겁니다. 물론 매우 심하게 덜커덩거리겠지만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어른이 아이를 안고 달린다고 하면, 그러면 어른은 힘이 들겠지만 품에 안긴 아이는 기분이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어른에게는 더해졌고 아이에게는 빠져있습니까? '품고 있다' 라는 것인데, 즉 인간은 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하실 때, 그 주님은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주님께서 품고 천국에 가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품에 안겨있는 아이의 일이 아니고, 품은 주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 소를 타고 계곡을 건넌다 !!

옛날에 어른들이 하던 말 가운데 "소를 타고 계곡을 건넌다" 라는 것이 있는데,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소는 힘이 세니까 물살을 이겨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교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고 하니, 소를 먼저 보내고 그 뒤를 따라갈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밖에 모른다는 겁니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인간은 자기 판단, 자기 지혜에 의해서 포기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라고 하면, "나도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건너볼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닌데, 전형적인 불신앙이라는 말이죠. 앞에 있는 모델을 보고 그 모델을 따라하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예복을 입지 않아서 창세 전부터 거절을 당한 존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 노크를 하고 들어와 !!

인간들은 괜찮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꾸만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자기가 지워질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죠. "야,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을 하셨다고 하네. 아버지를 믿고 말이야. 그러면 나도 아버지를 믿어야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앞서 갔던 분의 행위를 자기가 그대로 하게 되면, 똑같은 결과가 자기에게 주어진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이것은 "어느 누구든지 내 환경 속으로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고 들어와" 라는 것과 똑같은 소리인데, 즉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내 허락이 없이는 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사고방식이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육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괜찮은 사람을 믿듯이, 마치 이순신 장군을 믿듯이 믿으려고 하는데, 즉 "괜찮은 분이 나에게 들어오면 나는 효과를 봐서 내가 원하는 결과, 즉 천국에 가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닌데, 교회가 친목단체이고, 교회에 놀러 다닌다는 겁니다. 성경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다", 혹은 "주님과 사귄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을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는 겁니다. 이 삼각형을 보게 되면, 주님이 굴러가는데 그 안에 있는 삼각형을 덤으로 같이 굴러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작은 삼각형에게 "너는 어떻게 해서 굴러갔어?" 라고 하면, "큰 삼각형이 굴러가서 굴러가게 되었습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제가 큰 삼각형 안에 시키는 대로 잘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열심히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런 자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지옥이 있다는 겁니다.

* 나 홀로 !!

그러니 소를 먼저 보내고, 소와 물살의 역학관계를 보면서, "소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니 저리로 가는 것은 좀 위험해. 그렇지, 저리고 가면 되겠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소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인데, 즉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 혼자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인데, 누구와 함께 사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는데, "나를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하지만 제자들은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망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 그것이 둘 다 예수님에게 있는데, 그러니 "똑바로 해!" 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 안에 에서도 들어있고 야곱도 들어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언약의 존재성'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존재성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의 존재성은 악마가 이미 들어와서, "너의 인생은 네가 알아서 지켜라. 아무도 너를 대신해서 지켜줄 수가 없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악마와 하나님의 '자연스러움' !!

여기서 악마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면, 악마를 알아야 악마를 이기든 말든 상대를 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악마 왈 "너의 인생은 네가 결정하고 선택하기 나름이다. 따라서 결정을 할 때는 후회가 없도록 신중에 신중을 거하면서 해라" 라고, 그렇게 악마가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 속에 들어있는 악마가 그렇게 속삭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악마에 대해서 무엇을 대결하시는고 하니, '자연스러움'으로 대결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자연스럽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곧 자연인데, 그런데 이 환경은 우리 인간이 전혀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서 장마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데, 그러면 그 자식이 아들인지 딸인지, 그 결정을 부모가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과 딸을 어떻게 낳습니까? 자연스럽게 낳는다는 것이죠. 물론 과거에는 미리 성별을 확인해서 딸은 지우기도 했지만 말이죠.

하나님은 이렇게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악마와 대결을 하시는데, 이것은 "네 속에 있는 것은 너보다 더 세다" 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알고 있는 자가 곧 언약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마치 신앙인의 전시장과도 같은데, 마치 미술전람회에 가면 입구부터 그림이 걸려있듯이, 그런 회랑의 복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말이죠.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언약이 잉태한 자들 !!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처음에 아벨부터 나오는데, 그런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뜻대로 된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같이 오직 언약의 뜻대로 된 자들인데, 그러면서 마지막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이들은 언약이 잉태한 자들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잉태한 자들이 아니고 주님이 잉태한, 즉 주님 속에 들어있는 자들인데, 이것을 바깥으로 내놓으면 그게 신앙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모는 하늘에 있고, 지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그게 어제 설교한 마태복음 23장의 내용인데, 이것이 주님의 아들들인데, 사람으로서는 태어나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육신의 형태를 통해서 태어나지만 말이죠.

(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여기서 마태복음 1장을 보겠는데, 족보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그만 성경을 덮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고, 저렇게 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것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지루하기가 짝이 없는 족보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 1: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마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 인간은 언약을 낳는 껍데기 !!

여기 16절에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표현이 아니고, 주객이 그만 바뀌었는데,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셨는데, 즉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낳았다는 말이죠.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한데, 즉 인간은 언약을 낳는 껍데기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에 일군으로서 참여하게 되었다면, 이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다, 없다" 라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가 성경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런 아이디어조차도 없는데, 즉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고, 저것은 우리가 못하니 하나님께서 하시겠지" 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애초부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으로 삭제를 시키는, 그런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이 모든 것들은 지옥에 갈 자들을 지옥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고, 또한 천국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일어날 일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일으킨 일들이라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기서 "그러면 내가 천국에 갈 자로서 잉태가 되었는지 아니 되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제 아무리 궁금하지 않은 척을 해도, 사실은 다들 궁금해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ㅋㅋ)

* 천국에 가는 자들은,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 !!

그러면 천국에 가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나의 한계를 접하는 것을 크게 즐거워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자기 한계, 거기에 대해서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고,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아하,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엉터리였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불신자는 어떠합니까? "나의 한계를 접하는 것을 크게 실망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나는 이제 그만 살래. 이런 식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어. 도대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러니 무슨 재미로 살아?"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100퍼센트인데, 그동안 인간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보람으로 살아왔다는 말이죠. 역경이 닥치면, "이 역경은 내가 넘어서라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 내가 애를 쓰고 수고해서 일어서야지. 그러니 힘내자. 파이팅!"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를 격려하면서 말이죠. 그런 식으로 사람을 위로해주는 게 사자머리를 하고 있는 오은영 박사라는 겁니다(ㅋㅋ).

인간은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실망하는데, 하지만 천국에 가는 사람은 자기 한계를 접할 때마다 크게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한계에서 자기가 삭제를 당한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인데, 자기의 모든 의미가 제거되는 순간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죠.

* 아부지, 용기를 주시옵소서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홧김에 사표를 내고, 그리고 이력서를 250통이나 내면서 7년 동안 백수로 있다가, 마지막에는 자영업을 한답시고 가게를 차려서 다 털어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한강에 가기 전에, 아버지 산소에 가서 소주를 들이켜면서 "아부지,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드라마에도 이런 내용이 많이 나오지만, 실제로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인데, 그렇지요?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산소에 갔던 마음을 가지고 어디로 갑니까? 교회로 가는데, 그래서 새벽마다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때 산소에서 만나는 아버지나 교회에서 만나는 아버지나 동일한 아버지라는 말이죠.

물론 성도도 그럴 수 있는데, 성도는 그런 한계에 부딪치면서 무엇을 아는고 하니, "이것이 바로 주님이 품으셨던 지옥에 가는 모습이구나"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자신을 통해서 그런 모습을 들추어내게 된 것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아하, 나는 삭제가 되어야 하는구나. 죄인 중에 괴수임이 당연하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과거에는 십자가 뒤에서, 그 그림자 속에서 숨어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제 성령을 받고는 즐겨 십자가 앞으로 나오게 되는데, 즉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앞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다들 십자가를 외면하지만, 즉 죽음의 십자가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피해서,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새 생명이라는 긍정적인 면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삭제되는 즐거움이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오기, 가오 등등, 이런 것들을 붙잡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를 포기해버리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데, 그런데 결코 자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잉태한 언약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즉 예수님이 품고 있는 것에는 두 가지가 대립이 된다는 겁니다. 즉 가는 길이 두 개라는 말이죠. 이 언약을 전개하는 역사가 곧 이스라엘 역사인데, 이 이스라엘 역사에 언약에 주어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잠시 성경을 보면, 열왕기하 6장 14절과 15절입니다.

(왕하 6: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왕하 6: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지금 아람나라의 왕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는데,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가 나가서 보니 그들이 성을 에워쌌다는 말이죠. 저쪽의 많은 숫자의 군사가 엘리사가 있는 이쪽으로 쳐들어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안다고 치고, 그런데 그런 일이 닥치게 되면 그게 현실로 보입니까? 가상으로 보입니까? 현실로 보인다는 말이죠.

* 주님, 이것은 꿈이지요?

예를 들어서, 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처박게 되면, 그러면 그게 현실입니까? 가상입니까? 현실인데, 차가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야 한다는 말이죠. 아무리 "주님, 이렇게 차가 박살이 난 것은 꿈이지요?" 라도 해도,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차가 고장이 난 것이 환상이 아니고 실제인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차가 고장이 났다고 걱정하는 자기 자신이 환상이라는 말이죠. 환상은 환상 속에서 환상이 아니고 실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상황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 안에 천국과 지옥이 들어있는데,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는 실제라기보다는 하나의 이론이나 가설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실제로 사건화를 시켰는데,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역사이고, 그 중에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엘리사 시대의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이죠.

열왕기하 6장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왕하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왕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 환경이 지옥으로 보내고, 환경이 천국으로 보낸다 !!

여기 16절에 엘리사가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게하시가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게 실제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니 말이죠.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지옥과 천국은 인간 탓이 아니고 환경 탓이라는 겁니다. 즉 환경이 지옥으로 보내고, 환경이 천국으로 보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환경을 설명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바깥 환경을 나름대로 자기 중심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실제인데, 그래서 자기가 이해하는 현실로 자기처럼 실제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죠. 마치 처박은 자동차 사고처럼, 그리고 쳐들어온 아람 나라의 군사들처럼 말이죠. 엄연한 실제상황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 환경이 천국이라고 하면 왜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기에게 천국과 지옥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그 인간자체가 환상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천국은 몰래 주님의 품안에서 온다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도 지옥의 일부인데, 인간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 천국은, 허락된 자들에게만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천국은 허락되지 아니하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비유라는 겁니다. 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주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모르는데, 그냥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 그러니 착하고 바르게 살아라" 라고 하시면 얼마나 좋으냐는 겁니다. 물론 자기를 건드리는 것은 좀 빼놓고 말이죠.

그런 식으로 성경말씀을 알려주시면, 자기가 알아서 잘 믿겠다는 겁니다. 복음과 같은 도무지 이해도 되지 않는 말씀은 하지도 마시고,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셨는데, 유대인들에게 말이죠.

로마군인들이 바보가 아닌데,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감이라도 잡을 수가 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로마군인들에게 문제가 있는데,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 정상적이고 똑똑하게 !!

아무도 자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자들이 없는데, 만약에 문제가 있으면, 중대장이 그런 병사들에게 예수님을 찌르라고 시키겠느냐는 말이죠. 정상적이고 똑똑하니 예수님을 창으로 찌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똑똑하게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이죠.

강도들의 경우에도 둘 다 예수님을 조롱했는데, "우리를 구원해주면 당신을 믿어주겠다" 라고 나왔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면 모두 다 예수님을 조롱할 술밖에 없는 똑똑한 자들인데,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 벽을 무슨 수로 허물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자기는 누가 뭐래도 똑똑하다는 말이죠.

* 차고 넘치는 불 말과 불 병거 !!

그런데 그만 사건이 터져서, 이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겁니다. 여기 16절에 보면 엘리사가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했는데, 그러면 이것을 게하시가 믿었습니까? 믿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자 엘리사가 하나님께 게하시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눈을 열어주셨는데, 그래서 17절에 보면,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불 말과 불 병거가 그야말로 넘치고 넘쳐났는데, 성도를 지키는 천사들이 그러하다는 말이죠.

지금 그게 여러분의 눈에도 보이죠? 물론 보여도 함부로 남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ㅋㅋ).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더욱 그러하다는 말이죠. 복음을 아는 자들은 예수님처럼 좁은 길로 갈 수밖에 없고, 욕을 먹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내가 미쳤어 !!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이상하게 여기는데, "미쳤어,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다하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나도 남들 못지 않게 똑똑한데 말이야" 라고, 그렇게 된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도는 이런 고백을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문학이나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자기가 그야말로 똑똑하다고 여기는데, 바보가 되려고 하는 자들은 없다는 말이죠. 소를 타고 계곡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앞에서 어떻게 가는지, 그것을 팔짱을 끼고 쳐다보다가, 그 코스를 잘 활용해서 자기도 그렇게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아이라고 하면 "엄마, 안아 줘" 라고 할 텐데, 그런 아이의 마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일을 만들어주셨기에, 그것은 주님의 상황이라는 말이죠. 감겼던 눈이 열리도록, 주님이 그런 상황을 주셨다는 겁니다.

* 완전히 다른 세계 !!

그래서 게하시가 눈이 열려서 보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데, 이 세계를 그동안 악마가 숨겨왔다는 겁니다. 이 거짓말쟁이 악마가 감추어왔다는 말이죠. 목사를 통해서, 장로를 통해서, 집사를 통해서, 교인들을 통해서 숨겨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시면 부자가 됩니다. 자식이 잘 되고, 가정이 잘 됩니다" 라고, 그렇게 사기를 쳐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게 좋은데, 그렇지요? 하지만 성도라고 하면, 자기 가정이 잘 되던 말든, 자기 몸이 아프든 말든, 그런 것은 시답지 않은 문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날마다 자기를 삭제시키니 그러하다는 말이죠.

말씀의 바다에 자기를 던져야 하는데, 그 물결에 자기를 날려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전혀 걱정할 것이 없도록 말이죠. 거기에는 속도가 있는데, 그게 하루치라는 겁니다. 그게 그날 하루만 그렇게 되어도 대단한 것인데, 내일은 또 내일치의 상황이 또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매일 매일이 천국이어야 하는데, 그게 매일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이라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죠.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을 품고 오셔서 이 세상에 그만 내어 뱉어버리는데, 그러면 천국과 지옥이 갈라진다는 겁니다.

* 지옥에 갈 뻔한 나, 천국에 이미 도착한 나 !!

이제 결론을 내어보면, "나는 예수님처럼 둘로 갈라져야 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은 '지옥에 갈 뻔한 나'와, '천국에 이미 도착한 나' 라는 것인데,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차이점을 바라보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을 두고 '언약의 사람'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완벽한 사람이 전혀 아닌데,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나가고,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대로 움직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안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갈라진다' 라는 겁니다. 이삭이 좋아했던 자식은 야곱이 아닌 에서인데, 그런데 야곱에게 복이 돌아간다는 것이죠. 이것을 이삭이 알게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그렇게 했음을 말이죠.

그렇게 에서와 야곱이 갈라설 때, 그때 누구의 마음이 찢어지겠습니까? 그게 아버지 이삭의 마음인데, 그러니 지옥에 갈 뻔한 그것을 우리는 매일같이 경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의 세계를 굳건히 지키면서 천국으로 가겠다" 라고 하는, 그게 바로 지옥으로 가는 아이디어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묵사발로 만들면서 이미 주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즉 자기 일이 아닌 주의 일이 합류한 것 자체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게 바로 천국임을 아는 '나' 라는 것인데, 우리는 바로 그러한 둘 사이의 차이를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누구 좋아라고 살아왔습니까?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환경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그 모든 것을 자기 환경으로 삼아서, 그것을 자랑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매일같이 삭제를 당함으로서, "주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8,1 오후 5시에 마침.

불 말과 불 병거 때문인지 몰라도, 너무 덥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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