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0 - 주인과 종
23,07,03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하늘, 땅, 그리고 땅 아래까지 '주'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12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의 성경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지옥에 있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지옥, 혹은 음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도 예수님은 주가 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도 주가 되시고, 땅에서도 주가 되시고, 그리고 땅 아래로 내려가서도 주가 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의 주되심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을 믿으면 되는데, 받아들이면 된다는 겁니다.
*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번에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질문을 먼저 하겠는데, 그 답변을 여러분이 각자 마음속으로 한번 만들어보시라는 말이죠. 그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모두들 믿음이 좋아서 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자기에게는 해본 적이 없지 싶은데(ㅋㅋ),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앞에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섬깁니다" 라고 해놓고는, 뒤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그 일상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방식을 궁리하는 식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그런 우리의 속마음을 드러내서 모두 털어 버려야 하는데, 미리 다 말이죠. 그래야 우리가 악마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악마에게 약점을 잡히는 것인데, 이렇게 누구에게든 약점을 잡히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둘 둥에 하나는 죽어야 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가 죽어주어야지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는 겁니다.
* 라디오 드라마 '하숙생' !!
옛날에 '하숙생' 이라는 라디오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는 말이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귀었는데, 그런데 여자가 남자를 그만 차버리고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는 겁니다. 이게 1960년대의 이야기인데, 그때는 부자의 기준이 2층 양옥집이라는 말이죠. 지금도 저기 대구의 삼복동에 가면 그런 흔적이 남아있는데, 마당에는 나무가 심겨져있고, 일종의 저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잣집의 맞은 편에 하숙생이 하나 오는데, 그가 누구인고 하니, 과거에 자기가 사귀었던 남자라는 말이죠.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 앞집에 하숙생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그런 내용이라는 겁니다. 인기가 있어서 그 뒤에 이 드라마가 신성일과 김지미 주연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 인생은 나그네 길 ♬
여자가 그 남자에게 잡힌 약점이 무엇인고 하니, 남자가 "나는 너의 과거를 모두 안다.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남편에게 알려줄까?"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가 복수에 나서는데, 그 드라마에서 나온 노래가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최희준의 '하숙생' 이라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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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하숙생'(1966) - 1970년 16회 자카르타 아태영화제 여우주연상(김지미) 수상, 제27회 베니스 영화제 출품. 그가 얼굴에 화상을 입자 그녀는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그 이후에 그는 얼굴을 성형수술을 하고 그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하여 바로 옆집에 하숙을 하고 추억의 아코디언 멜로디로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는 마침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뉘우친다. 그러자 그도 옹졸했던 자신의 마음을 나무라며 사랑도 미움도 다 저버리고 그녀 곁을 떠나간다.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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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출애굽 !!
아무튼 악마는 인간의 약점을 쥐고 있는데, 그리고 그 약점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두고 '자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라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전혀 곱게 나온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그들은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담보로 맡기고 나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의 장자를 담보로 잡고, 즉 "너희들의 장자는 이미 죽었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그 피와 맞바꾼 것이다. 너희들이 죽어야 하는데, 어린양이 대신 죽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진작에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그 존재를 어린양으로 맞바꾸어 치기를 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손에 쥐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양이 있는데, 그 양을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죠.
* 새로 다시 !!
방금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여기 빌립보서 2장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라고 하는데, 하늘에 있는 자들, 즉 천사들이고, 땅에 있는 자들, 즉 인간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땅 아래에 있는 자들, 이미 죽었던 자들인데, 지옥에 간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고, 그리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을 한다는 겁니다. 하늘과 땅뿐만이 아니라, 지옥에 있는 자들도 말이죠.
* 주와 종 !!
오늘은 할 내용이 좀 많은데, 그 중에 하나를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무엇을 풀어내어야 하는고 하니, 이렇게 '주'가 있다는 것은, 여기에는 '종'이 생성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주와 종,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빌립보서 2장을 보겠는데, 5절에서 8절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 7절에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은 먼저 종이 되었고, 그리고 주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냥 주가 되는 게 아니고, 먼저 전제가 되는 것이 있는데,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사람들의 종이 된 자만이 주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인데, 사람들의 종으로 오신 분만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말이죠. 코스가 그러한데, 바로 주가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라고 되어있는데, 즉 종으로 와서 주가 되는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어떻게 하면 종이 되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종은 어떻게 하면 되는가?" 라는 겁니다. 섬긴다고 해서 종이 되는 게 아닌데, 그것은 일종의 거래라는 말이죠. "내가 해준 만큼 너는 내놔라" 라는 것인데, 이것은 거래라는 겁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즉 아담의 후손들 치고 종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물론 누구에게 굽신거리고 복종을 당하는 순간은 있을 수 있어도, 마음으로 누구의 종이 된다고 하는, 그런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굽신거렸는데도 상대방이 자기에게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그러면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 무엇이 있을 때만 종이 되는데, 아무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성경에 보면 '서로 섬겨라' 라고 했으니, 그렇게 서로 서로 섬기면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렇게 해서 종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종은 어느 정도까지를 의미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17장을 보겠는데, 7절에서 10절입니다.
(눅 17: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눅 17: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눅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
여기에 보면 어떤 것을 종이라고 하는고 하니, 1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라고 하는데, 즉 "명령대로 다 한다고 해서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그런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주인의 지시대로 했다고 해서,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그 어떤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지 않는 자, 그런 자가 곧 종이라는 겁니다. 그냥 자기는 당연히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는 종이라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로마서 9장 3절을 이야기했는데, 즉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종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한국교회에서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자" 라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죠.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자기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종의 자세가 아니고, 오히려 주님을 종으로 부리고 있다는 말이죠. "내가 구원을 받는데 어디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아, 예수님이 적당하구나" 라고 해서, 그래서 예수님에게 "내가 예수님을 믿어줄 테니 천국에 보내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종의 모습이냐는 겁니다.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이죠.
저는 복음을 듣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단이 무엇입니까?" 라는 겁니다. 복음을 들었으면 이단이 무엇인지를 알지 싶은데, 과연 무엇이 이단이냐는 것이죠. "당신의 구원을 챙겨주겠다" 라고 하는 것이 이단인데, 물론 성경에서는 그렇게 사람을 기쁘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말이죠.
* 인간구원을 도와주는 것이 이단 !!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구원을 받겠다" 라는 것이 대해서, 그것을 도와주는 게 이단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권한과 자격이 없다는 말이죠. 제가 목회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것인데, 이런 마음으로 목회를 해보시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인이 얼마나 붙어있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말씀을 듣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야지" 라고, 그렇게 나오는 심보가 무엇인고 하니, "훌륭하신 목사님,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는, 그것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냥 교회에 나오는 게 아니고,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목사는 "옳지, 잘 다독거리면 내 사람이 되겠네. 내 추종자가 되겠네. 교회가 부흥이 되겠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나옵니까? "이렇게 하시면 구원이 됩니다" 라고, 그렇게 수법을 알려준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노골적으로 가장 잘 이루어진 동네가 성당인데, 즉 천주교라는 겁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그것을 전혀 모르는데, 물론 교회도 그러하고 말이죠. 신부와 수녀들은 사람을 섬기지 못해서 환장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 편에 서고, 또한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한다는 말이죠. 사람들 편에 서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데, 그래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여기 교재 122페이지를 보면 성경말씀이 두 군데 나오는데, 그것이 이사야서 6장 9절과 10절, 그리고 마태복음 13장 10절에서 17절인데, 일단 찾아보겠습니다.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 예수님의 코스 그대로 !!
여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제가 감히 시건방지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지금 천국의 백성을 무엇으로 만드시는고 하니, 예수님의 코스, 그것을 그대로 밟아 가는 사람을 천국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코스가 과연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종이 되어야 하는데, 종은 주인을 드러내면 되는 것이지, 자기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겠지" 라고 하는, 그런 종은 없다는 말이죠. 주인이 알아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가 종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어떤 종이 있는데, 그 종이 밭에 가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또한 양을 돌보고 말이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주인이 식사를 하는데 그 모든 수발을 다 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충성을 다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예수님이 "종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느냐?" 라고 제자들에게 묻는데, 여기에 대해서 제자들은 묵묵부답이라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답변을 하시는데, 그래서 제자들이 구원을 받고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는데, 예수님의 답변내용이 어떠할지, 그게 궁금하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하시는데, 아마 제자들이 실망을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요? 종으로서 주인에게 보상을 기대할 그 어떤 권한도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유익한 종이 아니고 무익한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 다시,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하겠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묵묵부답입니까? (ㅋㅋ)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노시고, 나는 나대로 놀랍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주인과 종의 관계가 과연 성립이 되겠느냐는 말이죠.
서로 따로 따로 노는데, 이게 우리 인간의 본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혹시 자기를 천국에 보내줄까 싶어서, 그러한 이익 때문에 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따로 놀겠다고 하는 마음가짐, 그것이 우리 인간은 변한 적이 없다는 것이죠.
물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노시고, 나는 나대로 놀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심이라는 겁니다. "저에게 적당히 복을 주시면,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둘려드리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과 협상을 하려는 태도인데, 종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은 교회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종이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모두들 자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종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누가복음 17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5절에서 9절입니다.
(눅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 17: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눅 17: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눅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
여러분도 나이가 있어서 뽕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는 알지 싶은데, 그런데 여러분은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리고 바닷물은 짜기 때문에 뽕나무가 자랄 수도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뽕나무가 땅에서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지는데, 그것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큰 믿음이 아니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등장하는 뽕나무의 경우에, 그 뽕나무가 땅에서 뽑혀서 바다에 심겨진다고 하면, 그 뽕나무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냐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해서 뽕나무가 땅에서 뽑혀서 바다에 심겨졌다고 하면, 그 뽕나무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반항할 자격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나는 그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가?" 라는 것을 알게 된 자, 그런 자가 믿음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관계인고 하니, 예수님이 자기를 뽕나무로 간주해서 자기를 뽑아서 바다에 심겨지게 해도 순종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것이 바로 믿음의 관계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고 난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종이란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와서는 주인의 식사를 다 수종을 들고, 그리고 난 다음에 자기가 밥을 먹지 않겠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라고 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고 있다는 말이죠.
(눅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종에게는 사례를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례를 하게 되면 이것은 겨자씨 만한 믿음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인의 주다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물론 이게 고함을 지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ㅋㅋ), 피조물의 목적은 주님의 주되심에 있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인데, 거기에 "제가 주님을 섬겼으니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좀 없습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만약에 "야, 수고했다" 라고 하면서 주인이 종에게 수고비를 주게 되면, 주인의 주인됨의 가치가 그만 떨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왔습니까? 그 어떤 보상이라도 바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언제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 또 다시,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앞에 했던 질문을 또 다시 해보겠는데, 벌써 3번째이지 싶은데,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고 하니, 우리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여기서 꼼수를 부리려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잔소리는 이제 그만 듣고 싶어. 나는 내 방식대로 좀 살고 싶어" 라고 하는 반항심, 혹은 대항심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우리 육신이 살아있는 이상 계속해서 그것이 꿈틀거리는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나는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 라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성경말씀을 보고 설교를 듣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일단 해줄 것은 해주고,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숨기면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 본심을 예수님께서 캐치를 하셨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꿀 재주가 없는데, 우리는 죄를 짓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 죄 때문에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잡았다는 말이죠.
* 예수님은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
그러면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잡았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그야말로 말을 듣지 않는 동생이 있는데, 그래서 형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 동생의 영혼을 담보로 잡고 자기가 대신 죽어서 동생을 구원한다" 라고, 그렇게 여기면 되지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동생이 그 형의 마음을 알고 받아들였다고 하면, 그 동생은 어떤 마음을 가지겠느냐는 말이죠. 즉 "형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 라는 것을 알게 된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해보면, 마귀에게 약점을 잡힌 것은 조금 있다가 하겠는데 말이죠.
동생은 이미 새 사람이 된 상태인데, 즉 "형이 망나니와 같은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 라는 것을 아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동생의 마음가짐이 어떠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의 마음가짐과 한번 비교를 해보자는 말이죠.
그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해보면, "내가 형을 위해서 아무리 일하고 죽도록 일해도 밥값조차도 할 수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하고, 그야말로 죽도록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형이 자기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그 밥값조차도 갚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엄살부리지마 !!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바로 그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여섯 글자로 압축을 시켜보면, '엄살부리지마'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괴리현상이 일어나는데, 짜증과 분노와 반발심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도 일체 양보가 없는데, 기어이 종으로 만들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면 종의 자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주인이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루 두끼의 식사도, 세끼는 너무 과하고 그 두끼조차도 나에게는 너무 과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에는 하루에 두끼만 먹는 간헐적 단식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말이죠(ㅋㅋ).
* 매사에 찡찡이 !!
그렇게 되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엄살을 부리지 않게 되는데, 반면에 엄살만 부리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을 두고 고급용어로 '찡찡댄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만나면 좋은 친구가 아니고, 만나면 그야말로 짜증을 낸다는 것이죠.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런 자들은 매사에 찡찡이인데, "나는 누구 때문에 망했고, 나는 누구 때문에 힘들다" 라는 식으로, 그야말로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라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러한데, 영원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말이죠.
* 할아버지, 벌레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
오늘 아침에 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는데, 그 아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할아버지, 벌레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벌레가 자꾸만 나를 따라다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래서 제가 손녀를 보고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으면 살지 못하게 되어있단다" 라고 했는데, 물론 마음 속으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악마가 인간의 약점을 잡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의 허한 곳을 메우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랑을 받는 자기를 어떻게 보는고 하니, 자기는 자기 혼자 살고 싶다는 겁니다.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다 귀찮은데, 그냥 자기 혼자서 살아가고 싶다는 말이죠.
* 내가 너를 평생 혼자 살도록 도와줄게 !!
그런데 이것이 누구에게 배운 성깔일까요? 인간은 자기 혼자서 살고 싶은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호응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마귀가 다가와서 "내가 너를 평생 혼자 살도록 도와줄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잡은 약점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악마에게 잡힌 약점을 알았으니 거기서 떨어져 나오면 되는데, 그러면 어떤 마음가짐이 될 때 악마에게서 떨어져 나왔다고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의 전부인데, 즉 "나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종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구에게 사례를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지금까지 먹은 밥값만 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아니 햇빛과 공기와 단비만으로도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기에게는 과분하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이 종의 자세라는 겁니다.
* 주의 이름은 종의 자리에서 바라봐야 !!
제가 왜 자꾸만 종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그것은 처음에 했는데, 종은 주님과, 즉 종의 자리가 주의 이름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게 빌립보서 2장 10절인데, 즉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늘에서, 땅에서, 그리고 땅에 아래에서, 즉 지옥에서, 그렇게 모두 다 예수님을 주로 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 주의 이름 때문에 우리 피조물이 있는 것인데, 그래서 주의 이름은 종의 자리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죠. 종의 자리, 그것이 바로 피조물의 자리라는 겁니다.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어디까지 내려오셨는고 하니, 종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종의 자리에서 주님을 주로 섬길 때, 즉 주님이 가신 그 코스, 그 종의 자리에서 주님을 섬길 때, 비로소 주님을 주로 제대로 섬기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으로부터 혜택을 입었기 때문인데, 즉 종이 될 수 없는데 종으로 삼아주셨다는 말이죠. 도저히 주님을 주라고 부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감히 주님을 주라고 부를 수 있게 된 혜택,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종과 주인의 노선에서 탈퇴하면 된다는 말이죠.
다시 해보겠는데, 악마가 우리 인간의 약점을 잡았는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기 혼자 살려고 하는 의지가 강할 때, 악마는 그것을 약점으로 잡고 찾아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혼자서 살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악마가 찾아와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너 혼자 살고 싶지? 그렇게 하면 혼자 살아갈 수 없어.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싫지?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너는 혼자 자립을 할 수 있어" 라고 하는데, 그것이 악마가 약점을 잡고 회유를 하면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 노는 종은 없어 !!
그러면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면, 그렇다면 종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종은 일을 한다는 말이죠. 노는 종은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사람의 종으로 사셨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쉬지 않으셨는데,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일을 할 때 악마에게 잡힌 약점에서 떨어질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놀게 되면 자기가 그만 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자리라는 말이죠.
교재 122페이지에 보면 마태복음 13장 말씀이 나오는데, 10절에서 17절입니다.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 '저희'와 '너희' !!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비유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저희'와 '너희'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저희', 즉 지옥에 가는 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너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깨달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을 주셨다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가 이해를 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 바깥에 있던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할 수가 없고,
■우리 안에 말씀이 작동하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아닌 '너희'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너희' 라는 것은 이미 예수님과 하나가 된 집단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저희'와 '너희'가 구별이 된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질문이 들어가는데,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가?" 라는 겁니다. 주님이 강제로 말씀을 깨닫게 하셨다고 하는데, 무엇을 깨달았느냐는 말이죠. 깨달았다고 하는데 '모릅니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종과 관련해서, 즉 믿음과 관련해서 살펴보자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25장을 보겠는데, 14절에서 30절입니다.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게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것인데, 아마 이 말씀이 성경에서 제일 유명하지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이 달란트 비유를 왜 그렇게 많이 설교를 했을까요? 그것은 "일을 한다" 라는 것과 관련이 되어있고, 그리고 "일을 한만큼 보상이 주어진다" 라고, 그렇게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 일을 하되, 불평 없이 한다 !!
다시 말해서, "게으르고 악한 자들은 지옥에 가고, 반면에 부지런하고 착한 자들은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인데, 교회에서 그런 교리를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이 달란트 비유만큼 성경에서 적절한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게 교회를 키우고 하는 교회행정에 써먹기가 매우 좋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돈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일체 불평도 없이 일을 했다는 말이죠. 그것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은 종의 특징인데, 즉 "일을 하되 불평이 없이 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주인과 함께 있다 !!
그 이유에 대해서는 강의 초반부부터 이야기를 했는데, 돈이 있어도 그 돈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고, 자기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주인의 마음을 받은 것이고, 그것은 "나는 항상 주인과 함께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종이다" 라고 하는 것은, 비록 주인이 멀리 타국에 출장을 나가있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주인이 자기와 같이 있든 말든, 주인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말이죠. 그래서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준 돈이 있다고 하면, 그 돈은 주인의 소유이지 자기의 소유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의 목숨을 비롯해서 내 인생과 내 삶의 환경이 전부가 다, 물론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주인이 준 목숨이고 인생이고 삶의 환경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을 떼어내면 말이죠.
그렇게 자기 것이 없으면 불평이 없어지고, 또한 불평이 사라지고 없으면 악마에게 약점을 잡힐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자기 것이 없으면, 악마가 제 아무리 "그렇게 살면 너는 네 인생을 조져. 완전히 망하는 수가 있어" 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협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 너는 그냥 노래나 불러라 !!
하숙생이 아무리 여자를 찾아와서 협박을 해도, 즉 "나는 너의 과거를 모두 다 알고 있어. 너의 남편에게 이르겠어" 라고 하더라도, 자기 인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협박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는 그냥 하숙생이라는 노래나 불러라" 라고 해버리면 된다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자기 인생이 아닌데 왜 자기가 약점이 잡히느냐는 겁니다. 더욱이 수능을 앞둔 집이라고 하면, 부모만이 아니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도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데, 혹시 자기가 나쁜 짓이라도 하면 자식의 수능점수가 내려갈까 싶어서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게 어떤 태도인고 하니, 마귀에게 약점이 잡혀서 그렇다는 말이죠.
* 자립해야지, 그것이 구원이야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마귀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네가 번듯하게 살아야지, 자립해야지. 그것이 너의 구원이고 행복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평생 우리 외부와 내부에서 들었던 말이 바로 이것인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줄 알았고, 그래서 거기에 친근하고 친숙했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왜 찡찡거리고 불평불만이 많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자립을 하지 못해서 그러한데, 즉 자기를 돋보이게 하지 못해서 그야말로 환장을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에게 약점이 잡혔기 때문인데, 마귀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데, 아니 떠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마귀가 피우는 독가스 !!
제가 어릴 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연탄가스였다는 겁니다. 그게 일산화탄소인데, 일종의 독가스라는 말이죠. 그렇게 마귀라는 독가스가 계속해서 피어올라와서 우리를 죽인다는 겁니다. "너는 누구의 종이 되면 안 돼. 너는 네 인생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혹시 여러분은 아직도 이런 독가스를 흡입하고 계신가요?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게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즉 "나를 지우지 아니하면 나에게서 독가스가 피어오른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마귀가 쥐고 있는 우리 인간의 약점이라는 말이죠. 매일같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우지 아니하면 독가스가 올라오는데, 이 독가스를 성경에서는 '자기 의' 라고 한다는 것이죠.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십자가 사건의 현장화 !!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현장에 책임자로서 누가 있었는고 하니, 사울이 있었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죽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지나갔지만 말이죠.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계속해서 현장화가 되는데, 자꾸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현장에 사울이 있었는데, 그러면 이제 분석에 들어가겠는데, "사울은 왜 그 현장에 있었을까?" 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더욱 섬기기 위한 방식의 하나로서, 그래서 예수를 믿는 이단들을 마땅히 처단을 해야한다는 것, 그것을 자신감이 있는 진리로서 자기가 인정을 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했던 사울이, 그런데 드디어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사울이 자기가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고 미리 예상을 했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왜냐하면 예수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말이죠.
* 죽었던 예수님 !!
여기서 질문에 들어가겠는데, "그 예수님은 살아있는 예수님인가? 죽었던 예수님인가?" 라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해서 살아있지만, 이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인식에 의하면 예수님은 죽었다는 것이죠. 마치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처럼, 물론 이순신을 섬기는 무당에게는 살아있겠지만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인데, 그렇지요? 그렇게 "예수님은 죽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게 사울에게는 "예수님은 죽었고, 나는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이상 나는 여호와를 섬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살았고, 나는 죽었다 !!
사울은 이런 체계에 놓여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그만 무엇이 '쑥' 들어오는고 하니, "예수님은 죽었고, 나는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 라는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 그 죽은 예수님이 그만 자기를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자 그 다음에 사울이, 즉 바울이 편지를 어떻게 쓰는고 하니, "예수님은 살았고, 나는 죽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죽은 것이 맞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라고 하는 설교를 수천 번을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살아있는 채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죽은 채로 믿으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산 채로 믿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나' 라는 것이 지워지면 독가스, 즉 자기 의가 지워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게 되는데, 그런데 '나' 라는 것이 지워지지 않으면, "너는 잘 살아야해" 라고 마귀가 부추긴다는 말이죠. 우리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마귀가 찾아와서, "그 따위로 행동하면 네 인생은 실패야. 그렇게 살래?" 라고, 그렇게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물고 흔든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마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자기 의' 라는 것인데, 즉 "자기 의를 훼손하면 안 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식으로 마귀가 우리에게 접근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인데, 즉 자기 의가 훼손이 되어서 자살을 한다는 말이죠.
먹을 것이 없어서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럴 경우에는 주민센터에서 와서 컵 라면이라도 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자살을 합니까? 컵 라면을 주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인간을 키워왔다는 것이죠. "너는 잘 될 놈이야. 얼마든지 혼자서 독립할 수 있어" 라고 말이죠. 부모의 교훈 속에서,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서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 죽어서라도 나를 살리고 싶어 !!
그런데 그만 모든 것이 파탄이 나고 말았는데, 그러면 무엇이 파탄이 난 것입니까? 자기 의가 없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자기가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데, 즉 죽어서라도 자기를 살리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지옥에 가는 자들에도 주가 되시고, 천국에 가는 자들에도 주가 되시고,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자들에도 주가 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우리를 먹여 살려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잘남이 아닌데, 즉 자기 의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과연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인데, 그분께서 우리의 끼니때마다 우리에게 밥을 챙겨서 해주셨다는 말이죠. 그런 주님 앞에서 "내 인생은 어떻고, 네 인생은 어떻고" 라고 하면서 찡찡거리고 비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걱정과 근심은 접어두시라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이제 교재 12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먼저 122페이지를 정리하면, 주님께서는 분류를 시키는데, 주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쪽, 그리고 기어이 말씀을 알아듣는 쪽으로 분류를 시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을 알아듣는 순간 독립을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종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종이 된 상태가 곧 주의 백성이 된 상태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저에게 아무런 대가를 치러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5달란트, 2달란트, 그리고 저의 인생, 그것은 결코 저의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제가 한 평생을 일한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이 먹여 살려주시는 밥값에도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고마워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제가 받은 보수에 비하면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라고 하면서 찡찡거리고 불평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이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일이고, 그게 주의 백성이라는 말이죠.
* 종은 되기 싫지만, 천국에는 가고 싶은 자들 !!
그 다음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지만, 주의 종으로 사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런데 천국에는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골라내는가?" 라는 겁니다. 즉 가라지인데, 이런 자들을 어떻게 뽑아내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을 섬기기는 것은 정말 싫은데, 그런데 지옥은 싫고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솎아내느냐는 말이죠. 이런 자들이 천국에 가려고 성경을 들고 오는데, 성경을 보고 해석하고 성경공부에도 참석하는데,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린다는 겁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기가 싫은데, 그런데 천국에는 가고 싶어서 온갖 몸부림을 다 친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어제 주일 낮 시간에 약간 언급을 했는데, 즉 "지식이 벗겨져야 진리가 보인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이런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열심히 공부해서 터득한 성경지식이 자기를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도저히 그 지식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
그러면 여기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그것을 지금부터 살펴보자는 말이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라는 소설이 있는데, 아주 오래된 작품인데, 1605년에 출판된 유명한 작품이라는 겁니다. 돈키호테는 과대망상증 환자인데, 자기는 편력 기사가 되고 싶었다는 말이죠.
여기서 편력이라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경력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경력 기사가 되고 싶었다는 겁니다. 기사는 알다시피 싸움을 하는 자인데, 그러니 그냥 집에서 이름만 가진 기사가 아니고 실제로 실전의 경력을 쌓은 기사, 돈키호테는 그런 기사가 되고 싶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스스로 유인책을 만드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앞에 무릎을 꿇고 적에 대한 승리를 이야기하면, 그 여인이 "나는 당신을 나의 기사로 인정을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럴 때 제일 보람을 느낀다는 겁니다. 이것을 소위 '기사도'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성주는 성문을 열어라 !!
이 돈키호테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어떤 조그마한 성이 있고 성주가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주가 성질이 아주 괴팍하다는 말이죠. 이 성에 들어오려고 하면, 여기에 이렇게 강이 있고 그 강을 통과해서 성에 들어오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해야하는데, 즉 "만약 제가 이 성에 들어오는 이유를 거짓으로 말한다고 하면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맹세를 할 경우에만 방문을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조사를 해서 방문목적을 거짓으로 말했다고 것이 드러나면 죽임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성주는 나와라. 나는 당신에게 교수형을 당하기 위해서 이 성을 찾아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이 성주는 과연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 소설에 빗대어서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인간지식의 모순인데, 조금 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 지식으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지식의 모순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 죽음을 경유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그 논리자체에 모순이 발생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열심히 지식을 쌓는데, 그 지식을 가지고 죽기를 싫어한다는 말이죠. 이 성주는 그런 인간의 한계를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너희들이 우리 성에 관광을 오고 싶어? 그러면 와. 그런데 그 목적을 거짓으로 말하면 죽어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런 법 속에 인간은 들어있고 살고 있는데, 그게 지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법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어떤 사람이 성을 찾아와서 "성주는 나와라. 나는 당신의 법에 의해서 교수형을 당하기 위해서 이 성을 찾아왔다. 그러니 성문을 열어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 성주는 문을 열까? 말까?
그러면 여러분이 성주라고 하면 과연 성문을 열어주겠느냐는 말이죠.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겁니다. 성주는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의 요구대로 하면 성문을 열어주고 그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성주는 반칙을 한 것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인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죽이면 안 되는데, 하지만 죽이지 않게 되면 자기가 평소에 죽였던 게 엉터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법을 성주 자신이 만들었는데, 그런데 죽이지 않게 되면 법을 만든 주인공이 성주 자신이 아니고 방금 찾아온 그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 방문객이 성주의 법보다 더 위에 있는 법을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성주는 그만 그 법에 종속이 되고, 자기는 법이 작용하는 그 성의 주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 방문객의 종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면 성주가 아닌 것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그동안 그 성에서 사람들을 죽인 것이 그만 범죄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나이가 드신 여러분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ㅋㅋ), 우리가 이런 모순점에 대해서 논리적으로는 몰라도 감각적으로는 어느 정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즉 죽지 않고 천국에 가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복음을 지식으로 다루려고 하는데, 주님은 이 말씀 때문에 죽었는데, 그런데 자기는 죽지 않고 행복을 다 챙기면서, 거기에 추가해서 천국까지 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데,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노닥거리면서 친목을 도모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삭제시키는데, 그런데 우리는 삭제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에 있어서 자기가 주인이고 싶고, 자기 집에서는 성주이고 싶고, 또한 왕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모순점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해드리겠는데, 인간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자기를 없앨 생각을 하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각인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우리는 모두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자기가 절대자가 되고 싶은데, 그것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겁니다.
* 다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않는 방식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 했던 질문을 또 다시 해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방식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말이죠. 여기서 사무엘상 8장 7절을 보겠습니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 !!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 라고 했는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왕되심을 기피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왕되심을 기피하게 되면, 그러면 백성들에게는 섬길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섬길 왕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섬길 왕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섬길 왕을 누구의 손으로 뽑는고 하니, 자기 손으로 뽑겠다는 겁니다. 그게 민주주의 제도인데, 그러면 누가 왕입니까? 그 뽑힌 왕이 왕입니까? 뽑은 백성들이 왕입니까? 백성들이라는 집단이 왕인데, 즉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그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이죠. 이게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 나온다는 것이죠.
* 민주주의 제도와 왕 !!
그러니 이것이 진리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른 소리라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가 그만 익숙해져있는데, 즉 "나는 왕이고, 국가가 나를 왕처럼 섬겨준다면 나는 행복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개인을 위한 나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나라는 없는데, 만약에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마귀에 속았다는 겁니다.
이번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터졌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요트를 타고 외국으로 로 도망을 쳤는데, 일부는 포항까지 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왕을 지켜주는 국가는 있어도, 개인을 지켜주는 국가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곧 짐승이기 때문인데, 즉 국가가 악마의 몸체라는 말이죠. 우리는 평생 속고 살아왔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가인의 후예라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를 섬기기를 싫어하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인간은 국가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가 왕 제도에서 민주주의 제도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는 돈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즉 자본이 없는 국가는 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달러가 최고야 !!
이렇게 아프리카라는 대륙이 있다고 하면, 여기 위쪽이 이집트이고, 그리고 알제리가 이렇게 있으면, 여기 중앙에 있는 14개의 국가가 아직도 프랑스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경제적으로 프랑스에 종속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물론 명목상으로는 독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종속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나라는 어느 나라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남미의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를 가더라도 달러보다도 더 센 화폐는 없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북한에서 핵을 개발하고 좀 심각하게 나오면 집에 있는 돈을 무엇으로 바꾸어야 합니까? 여러분은 집에 쌓아놓은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습니까? (ㅋㅋ)
* 산다는 것 자체가 약점 !!
전쟁이 터지면 외국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데, 심지어 대한항공을 타더라도 달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망하는 나라의 화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이죠. 그것이 곧 악마가 쥐고 있는 인간의 약점인데, 즉 우리 인간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약점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처럼 "나는 죽고, 주님의 종으로 살겠다" 라고 나오면 되는데, 주님이 찾아오심으로서, "나는 이제부터 나로 인해 살지 않고,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이 땅에 잠시 산다" 라고, 그렇게 나오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을 이용해서 "나는? 나는 행복해야 돼" 라고 하니, 그래서 교회라는 단체가 "우리가 도와드릴게요. 구원받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예수님이 먼저 죽으심으로 !!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떼어내야 하는데, 그럴 때 주의 이름이 왕으로 오셔서, 그 왕이 먼저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왕이 먼저 죽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논리가 다음과 같은데, 즉 왕이 먼저 죽고,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인데, 그 예수님이 누구에게 죽는고 하니, "인간들 + 인간들이 만든 왕", 그들에게 예수님이 죽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짐승인데, 그렇게 인간들이 세운 왕, 그것이 곧 권력이고, 그 권력이 예수님을 죽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나라와 인간들의 나라 사이에는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어떻게 됩니까? 모두 다 끊어져버렸는데,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인간들이 이렇게 국가를 만들어놓고서, 그 다음에는 그것을 자기를 위한 국가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국가에는 각자의 '나'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나' 라는 것이 다 다르다는 말이죠. 그래서 각자의 이름이 모두 다 따로 있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 모든 이름을 한 통속으로 !!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이름을 한 통속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끼리는 분명히 다른데, 농사를 지어도 다 다르다는 말이죠. 어떤 사람은 콩을 심고, 어떤 사람은 채소를 심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대규모 집단으로 같이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고 하니, "각자의 자기 이름이 있다" 라고 보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각자 자기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에서 발을 빼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각자 자기 이름이 있는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퉁' 쳐버린다는 겁니다.
그 이름이 바로 아담의 이름인데, 즉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을 쳐주는 것이 아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최초의 부모인 아담의 이름으로 쳐주신다는 말이죠. 이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렇게 해놓고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너희 잘못이 아니고,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죄를 범했고 그 죄가 너희를 덮쳤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 죄가 바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한 것인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죄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죽여버린 것이 곧 죄가 되는데, 즉 "죄는 예수님의 사건으로 규정이 되고 확정이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지은 죄는 죄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사형의 판결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그런 판결을 한 판사는 어떻게 됩니까? 판사도 역시 죄인인데, 그래서 죄인이 죄인을 판결하지 못한다는 원리에 그만 어긋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짓으로 맹세하면 죽여버린다" 라고 했던 성주의 경우에, 그것을 '성주의 딜레마' 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성주의 법 체계는 모순이라는 말이죠.
* 동일한 이름, 동일한 기능 !!
그렇다고 하면 자기 이름으로 구원이 되는 경우는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이번에 '장미란' 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체육부 차관이 되었는데,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장미란은 누구입니까? 역도선수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분을 보고 "이번에 체육부 차관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아무리 이름이 똑같아도 과거에 살아온 기능이 다르다는 겁니다.
이제 정답에 접근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기능이 동일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에 기능이 동일하다고 하면, 동일한 운명, 똑같은 운명을 제공받게 된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각자의 이름이 있더라도, 그 이름을 '아담' 이라는 동일한 이름의 기능에서 파생된 결과물로서 삼으신다는 겁니다.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
주님께서 모두 다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찾아오실 때, 그때 누구의 이름으로 찾아오시는고 하니, 그때 우리 각자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그 주의 이름 안에는 주께서 하신 일, 즉 기능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에 모두 다 살리는 것인데, 그 결과물로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셨다는 겁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성령은 기능인데, 그 기능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고집이 센데, 각자 다들 자기 혼자 살고싶어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가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날마다 삭제시키고 기어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데, 그 고집과 놀라운 능력이 어디서 오는고 하니, 그게 성령으로부터 오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은 죽고, 하지만 그 죽은 자기 이름 안에서 주의 이름은 살아있는데,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과 우리의 몸 전체가 주님의 것인데, 그런 고백이 우리에게서 날마다 터져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께서 하신 일인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육으로 태어나서 자기밖에 모르고, 악마에게 약점을 잡혀서 질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저희들인데, 그런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어린양의 능력이 임해서 이기게 해주시니, 그런 주의 이름을 증거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7,14 오후 5시에 마침.
밥을 먹을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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