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2 - 주님이 주인공
23,09,03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5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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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하나님이 제공하는 새로움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죽음'이다.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건이다. 이런 황당한 내용의 새로움이 인간세계 한 복판에 터져 버린 것이다.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죽음'의 입각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해석해야하는 요구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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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죽음에 입각한, 천국과 지옥 !!
여기에 보면,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죽음'의 입각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해석해야 하는 요구를 받게 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죽었는데 인간은 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갈라짐이 생긴다는 말이죠.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모인 곳인데, 그 천국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목숨을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살려고 하니, 그런 인간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는 말이죠. 즉 "내 것을 지키면 지옥, 주님의 것을 지키면 천국",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압축하면 이것인데, 그런데 이렇게 천국이 천국답게 되고 또한 지옥이 지옥답게 되도록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은,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죠. 즉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지옥이 되도록,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만들어내셨습니까?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서,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이 된다는 말이죠. 죽임을 당한 쪽은 천국이 되고, 죽였던 쪽은 지옥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 내 것 지키기 !!
이것을 "인간은 태어나면서 내 것을 지키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존재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인간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살았다는 말이죠. 여러분의 뒤를 한번 돌아보세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과연 무엇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하는 것은 다 좋은데, 그런데 과연 그 목적이 과연 무엇이냐는 말이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면, 그것은 지옥에 가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것밖에 되지 않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렇지요?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아파서 엄마를 돌보는데, 그런데 그 엄마는 남의 엄마가 아니고 자기 엄마라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것이 '내 것'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자식도 남의 자식이 아니고 자기 자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레미야서 17장 9절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부패하고 썩어버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모두 다 보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지 않으면 부패하게 되는데, 그 부패한 것이 무엇이 좋다고 평생을 지키고 하느냐는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그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 설교시간의 기도제목이 "내 목숨을 지키는 것 외에 정말 달리 지킬 것이 없습니까?" 라는 것이었는데,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진정으로 없느냐는 말이죠. 그렇다면 육신의 쇄락과 후패, 이것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몸이 아픈 것은 어떻게 감당을 하겠느냐는 것이죠.
*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
사람은 몸과 마음이 이렇게 부패했는데, 그런데 해와 달과 별은 우리 주님을 지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시편 19편에 나오는데, 이 세상 만물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게 아니고, 창조주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4절에서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라고 하는데, 자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만드신 그분과의 관계를 지킨다는 말이죠.
(시 19: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시 19: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시 19: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렇게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이라고 하면, 그래서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죽음 마음, 이 부패한 마음을 무슨 수로 살려내느냐는 겁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부패로 치닫고 있는 이 마음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느냐는 것이죠.
"내 것을 지킨다" 라는 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나는 나 없이는 살 수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고민과 공포는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그것은 "내 것을 지키는 것에 열중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 두 사람의 누운, 1인용 침대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죽은 '나'를 과연 무슨 수로 살린 것이냐는 겁니다. 어떻게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열왕기상에서 하나님께서 아이디어를 주시는데, 그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1인용 침대인데 두 사람이 누워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인데, 일인용 침대, 즉 "나는 내가 소중하다" 라는 것인데, 평생을 이것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만 눕는 일인용 침대에 누군가가 와서는 "같이 눕자" 라고 하는데, 그것이 열왕기상 17절에 나오는데, 20절에서 22절을 보겠습니다.
(왕상 17: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왕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지금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는데, 즉 '나'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는 더 이상 지키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이것은 "애초부터 나는 없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출현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이 세상은 하늘나라의 쓰레기다 !!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이 세상은 하늘나라의 쓰레기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쓰레기장에서 태어났는데, 그야말로 쓰레기장의 아이들이라는 겁니다. 일종의 폐품인데, 그래서 우리 속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배설물만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녹취 구 - 제가 사는 인천 검단이 서울의 쓰레기 매립장입니다. ㅋㅋ)
그렇다면 이런 폐품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말 것인지, 그것은 누구의 몫이라는 겁니까? "내가 나를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나의 몫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믿고 하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은 이미 버린 몸이기 때문인데, 그런 '나'를 쓰시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문제인데, 자기가 자기를 활용하고 쓰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아무리 하더라도, "내가 나를 건지겠다" 라고 하는, 자기 목적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이 없어지는데, 그러니 자기 목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물론 일시적으론 좋을지 몰라도, 자기가 죽어버리면 그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쓰레기가 되던 폐품이 되던 주님이 활용하실 때, 우리는 넘겨드리면 된다는 것이죠. 주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울 것이 아니고, 그냥 그대로 주님께 넘겨드리면 된다는 말이죠.
* 순진한 척을 하는 인간 VS 내어주는 인간 !!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저 사람은 참 순진하다" 라고 할 경우가 있는데, 하지만 순진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자기가 자기를 챙기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사람들만이 있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는 순진하지도 않으면서 순진한 척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대인관계의 요령이라는 말이죠. 그런 사람은 "나는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라고 하는데, 특히 시장에 가면 할머니들이 주로 그렇게 나오는데, 그게 다 판매전략이라는 겁니다. "나는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만원에 팝니다" 라고 하는데, 마트에 가보면 오천원이라는 말이죠(ㅋㅋ).
이렇게 순진한 척을 하는 인간이 있고, 그리고 어떤 인간이 있는고 하니, 자기를 하나님께 내어주는 인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내어줄 때는 그냥 내어주는 것이 아니고, 그런 내어줄 마음이 들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평생 자기 것만을 챙겼으니 내어줄 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충격이 주어지는데, 하나님께서 "네 것만 붙들고 있으면 네 것도 날아가고 다 날아가. 아무런 소용이 없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얼른 내어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자기가 생각해온 1인용 자리가 아니고 2인용 자리였다는 겁니다. 즉 "아하, 주님이 찾아오시기 위해서 '나' 라는 인간을 만들었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는 1인용침대인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거기에 주님께서 덮쳐서 2인용 침대로 만들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인생이라고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후딱 내어드려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순진한 척을 하는 인간과 내어주는 인간, 그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른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 교회의 야심가들 !!
특히 내어주지 못하는 인간이 어떤 인간들인고 하니, 그게 젊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야심이 있는데, 교회에 보면 이런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신학교에도 가고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발견되는 야심가들인데, 그런데 우리교회에는 이런 분들이 없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서 죄를 끊어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야무진 야심가라는 말이죠. 죄를 끊어내려고 하는 것도 야심인데, 아주 야망이 강렬하다는 것이죠.
도대체 죄를 끊어내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순수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순수한 사람이 되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복을 받겠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그동안 내가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들어있다" 라고 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마저 다 긁어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야, 네 속에는 착한 것만 들어있구나. 내가 복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러면 복을 줄게. 착한 자야, 너의 소원이 무엇이지?" 라고 나오신다는 것인데, 그런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 선악과를 따먹어 생긴 병 !!
우리 인간이 무슨 과일을 따먹어서 이런 병이 생긴 겁니까? 선악과, 즉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이미 확보했기 때문에 이런 야심과 야망이 발동하게 된다는 말이죠.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착한 일, 헌금도 착한 일, 봉사도 착한 일, 그렇게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복이 오지 않을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간증집회인데, 거기서 뭐라고 합니까? "제가 하는 일마다 모두 꼬였는데, 그런데 말씀으로 그 죄를 끊어버리게 되니, 그때부터는 하는 일마다 잘 풀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면, 하는 일마다 다 소원대로 될 것입니다. 믿씁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설교를 하라고 하면 하루종일이라도 할 수 있는데, 그 중간 중간에 '믿씁니까?', '할렐루야!' 라는 용어를 집어넣으면서 말이죠. 그런 설교는 피곤하지도 않는데, 원래 사기를 칠 때는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인들도 중간에 '아멘!' 이라고 하면서 추임새를 넣어주고 하는데, 신이 난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교회는 가끔 나오는데 말이죠(ㅋㅋ).
이 모든 것이 순진한 척을 하는 것인데, 이미 만물보다 후패한 것이 인간이라고 하면,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손을 대서 회생 가능한 것이 아닌데, 우리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성경말씀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닌데,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 긁고 긁어서 !!
"그동안 인생이 꼬인 것이 나의 죄 때문이다. 그래서 깨끗하게 긁어내면 복을 받을 수가 있다" 라고 하는데, 감히 어떻게 죄를 긁어낸다는 겁니까? 호박의 속을 긁는 것도 아니고, 그게 숟가락으로 긁어지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지키겠다" 라고 하는 고집스러움인데,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자기 속에는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기 속에 주님이 없기 때문에, 오직 자기 것을 지키는 것, 그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지 못했기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내가 나를 깨끗하게 유지하면 복을 주시겠지" 라고 하는데, 그것 이외에는 자기가 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 발우공양 !!
그런 것은 절에 가면 많이 하는데, 절에 가서 밥을 먹는 것도 도를 닦는 것으로 여겨서 '발우공양'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밥그릇까지 아주 깨끗하게 하는 것인데, 마지막 남은 것은 김치와 같은 것으로 다 닦아서 먹는다는 말이죠. 즉 "나의 속마음이 이 그릇과 같이 깨끗하게 되기를 바립니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기분상 복이 저절로 올 것 같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자기 속에 들어있던 나쁜 것들이 깔끔하게 완전히 소독이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소독이 되었다" 라는 표현도 괜찮지만, 그것을 '박멸한다' 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즉 "내 속의 죄를 박멸한다" 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1년을 다닌 것보다는 2년을 다닌 것이 더 죄가 많이 박멸되었고, 그리고 10년을 다니게 되면 죄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보고, "나는 너를 보고 교회에 가겠다" 라고 나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너를 보니까 나는 교회에 더 가기가 싫어" 라고 할 수도 있는데(ㅋㅋ), 교회를 10년을 다녀도 그 사람이 보기에 그야말로 엉망이라는 말이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그렇지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자기가 도를 닦고 싶어서 오는 것인데, 그러면서 그 따위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 두뇌 VS 마음
이런 야심가는 모든 말씀을 어디에 집어넣는고 하니, 자기 두뇌 속에 넣는다는 말이죠. 마음이 아니고 두뇌라는 겁니다. 특히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더 그러한데, 이게 다 지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이게 마음 속에 들어가면, 예레미야서 17장 9절의 말씀이 매일같이 확인이 된다는 겁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자기 마음이라는 것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속에는 더 이상 자기가 기대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올수록 더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속에는 더러운 것만 있다고 확인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즉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를 지킬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는 겁니다.
자기를 지킬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그렇지요? 그것이 바로 '자유' 라는 말이죠. 그러면 마귀는 재미가 없어서 더 이상 찾아오지를 않는데, "이제부터 나는 나를 지키지 않겠다" 라고 하는데, 거기에 마귀가 왜 끼어드냐는 겁니다. 모든 두려움과 분노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겠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마귀가 찾아와서 준다는 말이죠.
* 나의 일 VS 주의 일
지금까지 잘 들었다고 치고, 이것을 공식으로 만들어보면, 우리 인간은 모든 시작을 '나'로부터 하는데, 그런데 후패하게 되고 스스로 살리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놀랍게도 그 부패한 '나의 일'이 어디에 편입이 되는고 하니, '주의 일'에 편입이 된다는 말이죠. 무엇이 투입되면 그렇게 됩니까? 주의 말씀이 들어오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만의 일을 위해서 주의 말씀을 자기의 두뇌 속에 집어넣는데, 그런데 주의 말씀에 성령이 따라오게 되면, 그게 우리의 두뇌가 아니라 마음 속까지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어제 한 낮 설교의 내용인데, 예레미야 31장 33절과 34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즉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내가 직접 너에게 들어가겠다 !!
그것이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드디어 완성이 되는데, 즉 "다시는 너는 너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지마. 내가 직접 너에게 들어가겠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을 일이 한다고 벌이지마"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직접 들어오신다는 말이죠.
(히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예,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
그런 인간의 두뇌에 집어넣은 대표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유대교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이죠. 마태복음 2장에 보면 헤롯이 동방박사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묻는데,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느냐?" 라고 말이죠. 그러자 그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마 2: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믿지 않았습니까? 믿지를 않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지식을 자기들의 머릿속에, 즉 두뇌에 담아두고서 헤롯시대에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지식을 끌어 모았던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요즘 유투브에 보면 차고 넘치는데, 그것을 보면서 다음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되는데, 즉 "그것을 해서 자기 몸을 지키려고 하는가? 포기하려고 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부패했어" 라는 것인지, 아니면 "나는 순수해" 라는 것인지, 그것만 구분하면 된다는 것이죠. 개척교회 성공하는 법, 바른 목자의 상, 존경받는 목사의 10가지 품격 등등, 온갖 것들이 다 있다는 겁니다.
* 1인용에서 2인용으로 !!
아무튼 '나의 일'이 '주의 일'이 되면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주의 말씀의 결과가 죄인을, 그것이 1인용 침대인데, 즉 1인용 죄인에게 의인이 덮친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덮치게 되면, 그 사람도 역시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말이죠. 여러분도 이것을 다 아시죠? 물론 두뇌로는 모두 다 알지 싶은데(ㅋㅋ), 그게 가슴속까지, 즉 마음속까지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두뇌에서 마음속까지 들어왔는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겠는데,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다" 라는 것은, 우리가 한 것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그렇게 없으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자기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시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된 것인데, 그래서 성도는 매일같이 자기를 지키지 않는 쪽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일을 지우고, 무엇으로 바꾼다는 겁니까? 자기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모든 것이 자기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인고 하니, 그게 2인용인데, 즉 "함께 계신 주님이 나를 깨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을 밥을 먹게 하셨다는 것이죠. 함께 계신 주님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나의 일이 주님의 일이 된다" 라는 것에 대해서 감은 잡는데, 진짜로 과연 그러한지,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면 주의 말씀으로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가서 "아하, 이게 맞네" 라고 확인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감사라는 겁니다.
* 여기서 교재 12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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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하나님의 죽음'을 못 본 척한다든지 우회해 버리면, 결국 인간에게 남게 되는 의식이란, 자신의 발전적 창조력이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신념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창조의 파트너로서 협조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인간은 방해자가 아니라는 본연의 존재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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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결국 인간에게 남게 되는 의식이란, 자신의 발전적 창조력이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신념뿐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 의식을 설명하는데도 시간이 좀 걸리는데 말이죠. 의식에는 무의식과 의식이 있는데, 오늘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념이 나오는데, 신앙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자기를 믿는 것이 신념이고, 주님을 믿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죠.
* 원어는 없다 !!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이방인들은 감독이고 유대인들은 장로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어라는 것은 일어난 일을 구분짓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래서 원어는 없다는 말이죠. 각자 나라의 각자 말이 원어라는 겁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그 당시에 그들이 사용한 언어라는 말이죠.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말이 우리에게는 원어라는 겁니다. 그러니 원어에 기죽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기호학을 공부해보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원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다 드러난다는 말이죠. 언어라는 것은, "이 경우와 저 경우를 구분짓는다" 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죠.
이왕 시작한 것이니까 어려워도 잠깐만 해보면, 이렇게 성경이 있으면 이 성경은 언어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언어는 "이런 경우는 이렇고, 그리고 저런 경우 저렇다" 라고, 그렇게 구별을 하기 위해서 단어를 붙인다는 말이죠. 그것이 언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고, 싫어하는 것은 미움이다"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좋아하는 것도 사랑이고, 싫어하는 것도 사랑이다" 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구분이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네가 좋아", 혹은 "나는 네가 싫어" 라고 하면 구분이 되는데 말이죠. 바로 그것이 언어라는 것이죠.
그러니 성경의 경우에는, 구약시대에는 히브리어,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헬라어, 그렇게 구분하는 용도로서 그 시대의 문화였다는 겁니다. 이 성경이 그 뒤에 점점 더 확산이 되는데, 즉 스캔이 된다는 말이죠. BC 2세기, AD 3세기, AD7세기, AD 9세기, 그렇게 왔다갔다하면서 성경의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진다는 겁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보면, 12살 때 알았던 성경, 20살 때 알았던 성경, 30살 때 알았던 성경, 50살 때 알았던 성경, 70살 때 알았던 성경, 여기서 80살은 하지 않겠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면 "나는 30살 때 성경을 보았다" 라고 하면, 그것은 그때의 언어라는 겁니다. 그런데 40살에 보면 성경이 달리 보이는데, 그 깊이 보인다는 것이죠. 물론 60살에서도 또 다르고 말이죠.
이게 왔다갔다하면서 스캔이 되는데, 그래서 "나는 50살에 성경을 백독했다. 이제 안 봐도 다 안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늘 새롭게 보여지는 것이 또 있다는 겁니다. 전에는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다가, 이제는 더욱 더 세밀하게 나누어서 보게 되어진다는 말이죠.
* 아하, 그렇구나 !!
예를 들어서, "아이가 아프다" 라는 사건이 주어지면, 그러면 성경을 다시 접촉해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하, 그 말씀이 그런 뜻이었구나. 내가 성경을 안다는 것이 참으로 시건방진 일이었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어떤 사건이 터져서 성경을 보면, 그 성경말씀이 달리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야말로 나는 지킬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후패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로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어떻게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더러운 마음을, 주님께서 고맙게도 가지고 가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 인데, 그렇게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면 후패하고도 썩었던, 즉 죽었던 마음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인데, 말씀으로 말이죠. 말씀을 집어넣어서 우리가 알아서 생명을 얻는 게 전혀 아니고, 이미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을 보게 되면, "아하, 말씀이 나에게 작용해서 생명을 얻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말씀을 보면서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말씀을 보면,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가슴 깊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평소에 하던 육신의 더러운 버릇이라는 말이죠.
"모든 일은 주의 일이다" 라는 것에 한 가지를 더 보태게 되면, 같은 의미로 "현실은 내 마음대로 옮겨지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현실에 주눅이 들어서 가는 것이지, 자기가 현실을 이리 저리로 옮기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나는 현실을 바꿀 거야" 라고,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말이죠.
* 단일 현실 속의 다수의 생각들 !!
이렇게 현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좀 어렵게 말하면, "단일 현실 속의 다수의 생각들"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현실은 하나인데 그 현실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백이면 백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웃기는 일이라는 말이죠.
그 단일현실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 대드는, 하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래서 각자가 자기 것을 지키겠다고 하는 현실, 이것을 한꺼번에 묶어서 '지옥'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지옥에 있는 인간들이 "너 다르고 나 다르다"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둘 다 틀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22장을 보겠는데, 1절부터 보겠습니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천국 VS 지옥 !!
여기 2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천국은 ( ) 어떤 임금 같으니" 라고 해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은 임금의 자기 생각을 하나로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묶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10명의 인간이 있다고 하면, 그 10명이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는 겁니다. 부부간에도 생각이 다르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다르다는 말이죠. 전혀 하나로 묶어낼 수가 없는데, 그래서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임금이 되신 분의 생각, 그 하나의 생각으로 통합된 것인데, 그렇다면 지옥은 무엇일까요? 각자 자기 생각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죠. 다수가 다수로 있는 것, 그것이 지옥이라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다수를 또 하나로 묶어버리는데, "이 저주를 받을 자들아!"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 지옥은 자기 행세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곳 !!
그렇게 저주를 받을 자들끼리는 의견이 통합되지가 않는데, 이 세상에서 자기밖에 모르면서 까불던 것이 지옥에 가도 여전히 자기 주장한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거지 나사로의 앞집에 살던 부자가 잘 보여주는데, 지옥에 가도 여전히 세상에서 하던 자기 행세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겁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자기에게 물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한다든지, 그리고 나사로를 세상으로 돌려보내서 자기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든지 한다는 말이죠. 그 사고방식이 여전히 "나는 나다" 라는 것인데, 자기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돈을 번 것이 잘못이 아니고,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죠. "내가 나로 남은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믿으면 안 되는데, 각자가 자기 팔을 흔들고 있다는 말이죠. 통합이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성령으로 하나된, 즉 성령으로 꽁꽁 묶어버렸다는 말이죠. 그것을 사도바울은 "사랑으로 묶여져 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물론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라는 대중가요도 있기는 있는데(ㅋㅋ), 만약 교회에서 그런 상대가 나타나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복이라는 겁니다. 부부도 하나가 되는 것이 피곤한데 말이죠. 그러면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 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하는데, 그러니 얼마나 위선적이냐는 겁니다.
* 어디에 묶일 것인가?
그러면 "어디에 묶일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데, 그게 사도바울에 의하면서 사랑이고, 그리고 마태복음 22장에 의하면, 임금님에 의해서 다수의 뜻이 묵살되고 하나로 묶인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성경에 중요한 구절이 많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여기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라고 되어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자기 아들을 두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지, 그것을 아는 방법은 무엇이냐는 말이죠.
이 땅에 오신 누구만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됩니까? 아들만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하는데, 그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아는 방법 외에는 달리 아버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죠.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이 땅에 용서받지 못할 분으로 오신 예수님 !!
그렇게 되면 그 아들이 없는 모든 신은 전부가 다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셨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그 아들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가 직접 하나님을 알겠다고 하면서 나설 때, 그것은 전부 다 우상이고 가짜라는 말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 "그렇다면 내가 아들을 믿고, 그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그 아들과 도저히 같이 만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때문인데, 인간에게 싫어버린 바가 된 분, 바로 그분이 유일한 아들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 인간이 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참 좋겠는데, 우리 인간은 그 마음이 심히 부패했기 때문에, 그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죽이든지 배척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드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예수님은 이 땅에 용서받지 못할 분으로 오셨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아무리 동정심과 자비심을 가지고 있어도, 주님은 기어이 그것을 건드려서, 그 자비심을 증오심으로 만드는 말씀만 하셨다는 말이죠. 아무리 인간들이 "내가 너를 봐줄게" 라도 해도, 예수님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씀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 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 그런 예수님은 싫어요 !!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좋아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과는 헤어지기 싫어요" 라고 해도, 그렇게 우리 인간 쪽에서 아무리 예수님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비심과 배려심을 기어이 찢어버리는 말씀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나도 참을 만큼 참았는데, 더 이상은 예수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이것을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예수님과만 사귀지, 나를 싫어하는 예수님과는 만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결심이라는 말이죠.
달리 말해서, "나는 오직 나만 믿고 싶은데, 거기에 대해서 협조가 되는 예수님이라면 믿을 것이고, 반면에 나를 지키는 것에 있어서 훼방을 놓는다고 하면, 나는 그런 예수는 버리겠다" 라고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바로 우리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도대체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는 말이죠. 물론 마귀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시면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대장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교재 12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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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 다니엘에 보면 참으로 특이한 일이 적혀있다. 꿈을 꾼 당사자도 잊어버린 꿈의 내용을 타인에게 찾아내라고 닦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꿈이 하도 요상스러워서 그 꿈을 다시 음미하고 그 꿈을 통해서 미래를 알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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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본인에게 들이닥친 꿈을 외부인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 당시에 자칭 신과 교류한다고 장담했던 술사들에게 꿈의 내용을 재현해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술사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감당 못할 억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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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2:1)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단 2:2)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단 2: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단 2:4) 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방언으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은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단 2:5)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단 2:6)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단 2:7)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단 2:8)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
(단 2:9)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니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단 2:10) 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크고 권력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단 2:11)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이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 신하들을 협박하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러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하들이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닌데, 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여기 11절에 보면,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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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인간은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인간은 더 나갈 수 없다. 인간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는 있다. 없었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유가 된 무(無), 그 자체를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은 유의 입장에서 무를 이야기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 입장에서 유를 설명해낼 수는 없다. 이것은 곧 자신의 근본을 모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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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근본을 신하들에게 묻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근본은 유의 유됨으로 인해서 늘 은닉(隱匿)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문제가 뭔지도 모른다는 그 자체로서 문제 있는 인간들로 몰리게 되었고, 답이 뭔지도 모르는 채 생명을 담보로 답변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것이 계시가 지상에 긁고 간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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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근본을 몰라 !!
인간은 자기의 근본을 모르는데,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답답해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은닉' 이라고 되어있는데, 자기 안에 숨겨진 게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느부갓네살은 감 잡고 신하들을 보고 알아내라고 닦달을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신하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채 문제를 알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것을 여기 교재에서 "생명을 담보로 답변을 요구받게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지금 우리가 신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꾼 꿈을 너희가 알아내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분위기가 "너희가 알아내면 내가 상을 주겠다" 라는 것이면, "그것은 하나님이 알지 우리는 모릅니다.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지금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임금님이 "내가 꾼 꿈을 너희가 알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을 죽이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겁니다. 왕이 신하의 목숨을 가볍게 여겨서 그런 겁니까? 그것이 아니고, 느부갓네살 왕 속에 있는 근본된 분이 신하들의 근본된 것을 건드리고 공격을 한다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둘 다 무식한데, 양쪽이 다 자기 것을 지키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물러서면 그만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는 모르지? - 예, 모릅니다. - 그러면 죽어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느부갓네살이 기겁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왕이 신하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신하들도 목숨을 위협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꿈 하나 때문에 말이죠.
여기 마지막에 보면 "이것이 계시가 지상에 긁고 간 흔적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셨다" 라고 하면, 인간들은 "참 좋은 일을 하셨네요" 라고 하면서 자기 머릿속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느부갓네살의 꿈 이야기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라는 것과 엮어져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모르고 넘어갔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모른다고 해서 얼렁뚱땅 같이 넘어가 주는 게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문제로 삼으시고 시비를 건다는 말이죠. "너는 너의 근본을 모르지? - 예, 모릅니다. - 그러면 지옥에 가야지" 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예레미야서 51장을 보겠는데, 20절에서 23절입니다.
(렘 51: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의 철퇴 곧 병기라 내가 너로 열방을 파하며 너로 국가들을 멸하며
(렘 51:21) 내가 너로 말과 그 탄 자를 부수며 너로 병거와 그 탄 자를 부수며
(렘 51:22) 너로 남자와 여자를 부수며 너로 노년과 유년을 부수며 너로 청년과 처녀를 부수며
(렘 51:23) 너로 목자와 그 양떼를 부수며 너로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부수며 너로 방백들과 두령들을 부수리로다
* 너는 나의 철퇴 곧 병기라 !!
여기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의 철퇴 곧 병기라" 라고 하는데, 병기, 즉 무기라는 말이죠. "나의 일에 말씀이 성령과 더불어 주어졌을 때 주의 일이 된다" 라고 했는데, 그게 여기 예레미야서 51장 20절 말씀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주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죠.
이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네가 이제 쓸모가 있는 인간이 되었는데, 이제 너는 나의 병기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손에 잡힌 무기가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쥐고 있는 분은 주님이고, 우리는 주님의 손에 잡혀있는 권총, 혹은 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건드리면 주님의 무기를 건드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철퇴를 가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은닉된 것, 즉 근본이 된 것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근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죽으심이 담겨있는 자가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근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 나오면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 달아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른데,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천국은 무엇과 같다고 했습니까?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각자의 생각이 다 달라도, 즉 어떤 사람은 소를 키워야하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 날에는 어느 자리에 모여야 한다는 겁니까?
임금님의 아들 혼인잔치에 다 와야하는데, 즉 하나로 묶어버린다는 겁니다. 각자의 인생길이 어떠하든지 간에, 즉 직장 일로 바쁘든 백수든 간에, 공부를 많이 했던 덜 했던 간에, 주님께선 그것을 하나로 묶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묶이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도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에 와서 성도끼리는 자기도 몰랐던 그 근본을 내어놓을 때 비로소 대화가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내가 심히 부패한 마음인 것을 몰랐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나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고 썩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말이죠.
* 심히 부패한 마음이 곧 무기 !!
그러면 그 심히 부패한 마음이 무엇이 된다는 겁니까? 그게 주님의 무기가 된다는 겁니다. 그 고백이 말이죠. 자기는 죄인이 맞는데, 그런데 그것을 주님이 쓰시면 마귀를 척결하는 무기가 된다는 겁니다. 다윗이 약돌을 날렸는데, 즉 다윗과 골리앗 사이에 돌맹이가 이동했는데, 그 돌맹이가 다윗에게는 병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병기가 된다는 것이죠.
아까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다고 했는데, 순진한 척을 하는 인간이 있고,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님께로 이동시켜버리는 인간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것은 전혀 지킬만한 가치가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 반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 김 폐품, 박 폐품, 최 폐품 !!
1인용 침대에 주님이 덮치니, 자기에게서 주님에게로 그 마음이 이동된다는 것이죠. 더러워서 쓸모가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얼른 가지고 와라. 나는 그것이 좋아. 나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려고 왔어. 나는 폐품이 좋아"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 폐품, 박 폐품, 최 폐품,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될 때, "신앙인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덕이 많고 배움이 많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신앙인은 굉장히 단순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을 두고 '신앙인' 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쉽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고백이 나오려면, 그 이전에 무엇이 날아가야 합니까? 자기가 하는 일들은 모두 다 날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재산은 어느 정도이고, 학벌은 어떻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말이죠. 그렇게 자기의 행한 일들은 다 날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 머리가 참 잘나왔네. 어디서 했노?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까,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누구를 만나고 할 때, 사람들은 근본을 가지고 만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자기의 행한 것을 가지고 비교한다는 것이죠. "머리가 참 잘나왔네. 어디서 했노? 그리고 그 옷은 어디서 샀노?"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고 하니, 다수라는 말이죠. 하나로 묶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순진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순진하고 단순한 사람은, 자기의 근본은 자기 자신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아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의 기준에 기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몸이 좀 아프고 해도, 물론 몸이 많이 아프고 조금 덜 아플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몸이 아픈 것이 다수라는 말이죠. 그것은 하나로 묶인 것이 아닌데, 그러니 우리가 그런 것에는 개의치 말아야 하는데, 그런 것에 너무 신경을 쓰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 중국에서 걸려온 귀한 전화 한 통 !!
어제 중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너무나 귀한 전화가 왔다는 말이죠. 어제 처음 알았는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겁니다. 질문의 내용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으면 되는데, 왜 물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라는 것인데, 답변은 여러분이 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라고 하는데, 이분은 그게 궁금하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 바로 오는데, 그러면 그렇게 성령세례로 바로 구원을 받으면 되는데, 왜 물세례가 필요하냐는 것이죠. 저의 질문의 특징은 바로 답변이 나온다는 것인데, 여러분에게 부담을 드리는 것이 너무나 죄송해서 말이죠(ㅋㅋ).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분은 글을 쓰는 것이 서툴러서 말로 했는데, 저는 글로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겁니다. 먼저 이분의 질문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아야 하는데, 저는 답변을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질문의 내용을 보면, 바로 성령세례를 받으면 되는데 왜 물세례를 받아야 하느냐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
제가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라고 해놓고는,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음으로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라고 했는데,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줄 때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우리가 이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주인공이 세례요한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마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마 3: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그러니 "내가 물세례를 받았다. 성령세례를 받았다" 라는 게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물세례를 받으신,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으신 주님의 그 코스를, 주님께서 주의 일로서 우리로 하여금 겪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제 해결이 되었습니까? 그러니 주인공이 우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 아들은 다수가 아닌, 하나 !!
지금 표정들이 영 이상해서 다시 설명을 해야만 하겠는데(ㅋㅋ),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라고 했는데, 이게 누구에게 한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그렇다면 다윗이 하나님의 독생자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닌데, 그렇지요? 물론 솔로몬도 아니고, 그러면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이죠. 아들은 다수가 아니고 하나, 즉 독생자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물론 그 말씀을 받기는 우리가 받아도, 주인공은 누구인고 하니, 말씀 안에 주인공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받을 때, "아하, 예수님이 또 찾아오셨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1인용 침대가 2인용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몸이 아픈 것이 아니고, 주님의 아픔이 우리에게 포개져서, 우리가 그 아픔을 같이 겪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이제 아파서 어떻게 해? 이제 다 살았다" 라고 하지 마시고, 그것은 끝까지 자기를 지키려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부패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왜 그렇게 붙잡으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 그분은 과연 어디에서 속았는가?
그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동안 자기가 중국에서 교회에 다니면서 어떻게 배웠는고 하니까, "먼저 물세례를 받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착하게 살면 그 다음에 성령세례가 온다" 라고, 그렇게 배웠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기는 알았는데, 그런데 정작 어느 부분에서 속았는지를 몰랐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 속았을까요?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마귀, 2번) 목사, 3번) 자기 자신" 이라고 하면, 여기서 몇 번입니까? 3번이라는 겁니다. 자기에게 속은 것인데, 자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죠.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마음이 아니고 머릿속에 들어왔다는 말이죠.
* 다윗언약 !!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만든다는 겁니까? '다윗언약'으로 만드신다는 것이죠. 다윗언약에 의해서, 하늘에 계신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들이 되신다는 겁니다. 혹은 "아들로서 오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같은 의미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독생자가 오셨는데, 그분은 다윗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들 안에 다윗언약, 즉 약속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즉 다윗의 약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 아들을 다수 속에, 즉 사람들 속에 그 아들의 영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제판이 된다는 말이죠.
* 양자란, 예수님의 복제판 !!
그 복제판을 성경에서는 '양자'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양자라는 것은, 진짜 아들이 따로 있고, 그와 동일한 내용물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져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다시는 율법이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껏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른 이름은 안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성경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처음에는 "안다, 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중국 분이 질문한, 즉 자기를 위해서 성경을 본 시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공이 된 성경해석이 되어버리면, 그 "안다, 안다" 라고 하던 것이 "모른다, 모른다" 라는 것으로 바뀌면서, "진짜 안다" 라는 것으로 넘어와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오른편에서 왜 성령을 주시는가?
맏이가 모델이 되어서 그 맏이에게 성령이 오셨고, 십자가를 지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는 분이 되었다는 말이죠. 십자가를 지기 이전까지는 성령이 예수님을 다루었는데, 십자가를 지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오른손, 즉 오른편에서 성령을 주시는 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른편에서 성령을 왜 주십니까? 그것을 자기 사람을 복제하기 위함인데, 즉 맏이가 영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 아들이 자기의 영을 우리에게 나누어주면,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즉 다수가 하나로 묶이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까지 들어왔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쫓아내고 우리 속을 차지하게 된다는 겁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장악해서 "나는 심히 부패하다" 라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나는 죄를 짓는 것말고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라는 것에 대해서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그렇게 감사가 나오면 성령의 일이고, 분노가 나오면 악마의 일이라는 말이죠. 분노는 자기가 버티기 때문에 나오는 것인데, "더 이상은 안 돼. 더 이상은 들어오지마. 이제 내가 알아서 하게" 라는 것인데, 그래서 분노가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다시 해보면,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게 되면, 그렇게 되면 맏이가 양자를 양산하게 되고, 그 양자들은 다윗언약을 충족시키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충족시키는 것을 '의' 라고 한다는 겁니다. 혹은 '거룩' 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거룩을 우리가 알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거룩이 쑥 들어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고 하니까, 자기 모델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죠.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면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에, 그가 왜 자기 신하들을 죽이려고 합니까? "너희들은 껍데기뿐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죽어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마" 라는 것인데, 자기는 근본을 알고 싶은데, 그런 근본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면서 그동안 월급을 받아먹었다는 겁니다. 즉 "근본이 없는 너희들은 쭉정이야. 그러니 죽어도 억울할 것이 없어. 원래 쭉정이잖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껍데기 인간 VS 알맹이 다니엘 !!
그래서 지금 느부갓네살 왕이 찾는 것은 쭉정이가 아니고 알맹이인데, 즉 "하늘과 땅이 통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겁니다. 느부갓네살 시대에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다니엘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다니엘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처음도 알고 끝도 안다는 말이죠.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어디서 교통사고가 났는지, 그런 것을 다 안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중심을 안다는 것인데, 그 중심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것을 아니까 유일하게 뿌리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즉 하늘과 연결이 가능한 사람으로서 다니엘이 있다는 말이죠.
그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인자(人子)' 라고 불렀는데,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게 바로 인자인데, 즉 "내가 다윗언약, 하나님의 중심을 담고, 창세의 비밀을 안고 이 땅에 왔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재 127페이지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여기서 잠시 교재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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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부갓네살은 그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과 소유를 총동원해도 그것으로 자신의 근본을 아는데 무용지물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동시에 절망적이다.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다. 구원이 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은, 현재 본인이 알고 있는 본인은 중량이 전혀 들어있지 않는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신하들은 왕의 이러한 심정을 알아야 한다. 실체는 없고 이미지만 안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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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은 꿈 하나를 통해서 그야말로 절망감을 느끼게 되는데,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중량은 무게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런 무게는 없고, 즉 실체는 없고 이미지만 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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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내리시는 계시가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하다. 왕은 신하를 모조리 죽이고자 한다.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자율 의지이기도 하다. 실체 없이 허구뿐이라면 죽여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허구의 집합체는 허물어져야 하는 것이 허구에 대한 당연한 처사가 된다. 여기에 다니엘이 나선다. 허구와 이미지뿐인 현실에 실체로서 다가서는 것이다. 왕의 꿈은 단지 꿈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진정한 실체이다. 그 실체가 미래를 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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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 현실이라고 여긴 것을 허구로 돌리고, 허구처럼 간주되는 것이 현실로 교체시키는 작업이 구원 과정이다. 꿈과 해석이 다니엘의 입을 통해서 바벨론 국가에 연착륙을 한다. 신하들은 비로소 생명을 얻고 한숨을 돌린다. 왕도 한숨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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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아하, 내가 허구구나. 이 세상이 허구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구원과정에 돌입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12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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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 죽음은 모든 것을 역전시키는 꼭지점이었다. 왜 역전이 되어야 하는가? '없음'이 진정한 인간 됨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없음'에서 인간성이 도출되어야 정상이다. 거지 나사로는 이미 지상에 있을 때부터 천국의 사람이었다. 그의 천국행은 그의 고정된 운명을 재확인한 결과이다. 그 인생 안에 천국은 그동안 고정적으로 은닉되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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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인데, 거지 나사로 안에, 즉 성도 안에 이미 천국이 은닉되어있었다는 말이죠. 어떻게 말인가요?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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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한 허구로 인하여 이러한 실체를 찾아낼 수 없었다. 본인들을 다시 '없음'으로 파악하기 전까지는. 십자가는 인간을 '없음'의 입장에서 보여준 사건이다. 예수님은 끝까지 없으신 분으로 퇴장하셨다. 한 사람의 강도와 대동하고. 그 강도에게는 '자기 의(義)'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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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살아간다고 너무 바쁜데, 그래서 자기가 허구인 것을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 "예수님은 끝까지 없으신 분으로 퇴장하셨다"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한 사람의 강도와 대동하고"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 강도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1인용 침대가 아니고 2인용 침대가 된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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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예수님은 '없음'의 정신 안에서만 교류하신다. '있음'의 자리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떠나버린 자리다. 이런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요 믿음이다. 예수님은 '없음' 속에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쳤다. 아무리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해주어도, 만약 자신들의 '있음'을 지켜주는 예수라고 여기고 있는 한 예수님은 계속 주무시고 계실 뿐이다. 인간의 소유성을 지켜주는 예수라고 여긴다면 차라리 그들에게 불필요한 자로 남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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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무시는 예수님 !!
여기에 "예수님은 '없음' 속에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쳤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아무리 가르쳐도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말이죠. 아무리 함께 먹고 자도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지키는 것에 급급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 "예수님은 계속 주무시고 계실 뿐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주무시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강제로 예수님을 깨우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를 나무랐습니까? 먼저 제자들을 꾸짖었다는 말이죠.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다시 말해서, "왜 너희는 너희의 있음만 생각하느냐? 왜 나의 여기 있음은 생각하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있음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죠. "내가 있고 없고, 내가 아프고 건강하고" 라고 하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있음이 나의 있음을 대체한다" 라는 사실인데, 그것을 몰랐기에 제자들이 책망을 받았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내 소유를 지켜주시옵소서"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를 떠날게" 라는 것인데, 그래서 기존교회에는 예수님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고 하면, 그런 자들은 갓바위나 무당을 찾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 우리는 모두 가짜 !!
이제 끝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어떤 용한 무당이 점을 치기 위해서 무당을 찾아갔다는 말이죠. 신내림을 제대로 받았다고 하는 무당을 찾아갔다는 겁니다. 그렇게 찾아가서 "제가 문제가 좀 있어서 왔습니다" 라고 하니까, "취직할 생각은 접고 장사를 해라" 라고 하는데, 무당 특유의 반말로 말이죠. 그러자 찾아간 무당이 "제가 무당을 하면 어떨까요?" 라고 하니, "너는 무당을 하면 안 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둘 다 모두 가짜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다 가짜인데, 진짜는 자기가 안다는 것이죠. 남을 바라볼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동안 자기가 지켜왔다고 한다면, 이제는 주님이 지켜주시는데, 그것을 감사히 받으시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을 우리는 머릿속에만 집어넣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침범하셔서 말씀으로 채워서, 이재는 자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병기로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9,13 오전 10시에 마침.
전화는 역시 국제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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