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갈라디아서 강해: 악마포착
(강의:이근호 목사)
저희들을 말씀 앞으로 말씀 속으로 주님 앞에 불러주셔서 그 취지와 그 뜻을 우리가 충분히 느끼고 발견하는 귀한 시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째 시간의 주체는 마귀를 포착해봅시다. 마귀. 마귀를 어떤 식으로 포착하는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이 일을 어떻게 캐치해내는가? 여러 가지 전제가 있는데 첫 번째가 인간은 ‘사라지는 육신’을 지니고 있다. 육신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팔십, 구십 살아도 사라져버리죠, 없어집니다. 오늘 첫째 제목은 ‘마귀포착’ 마귀를 어떻게 포착하는가, 마귀를 찾아내자, 에요.
그 전제가 저 시작이 우리 육신은 사라진다는 거예요. 사라지는 육신을 성경을 통해서 왜 사라지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배제 당했어요. 배제 당했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은 사라지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은 흙이 돼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정 못하지요. 누가 부정합니까? 아무도 부정 못합니다.
육신이 사라진다, 육신이 사라지는 걸 통해서 무엇을 포착할 수 있느냐? 마귀를 포착할 수 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배제 당한, 사라지는 이유가 하나님으로부터 배제 당했다면, 하나님께서 ‘너, 나가’라고 했다 하면 인간 쪽에선 하나님 쪽으로 끈질기게 ‘나중에 좀 봅시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기어이 하나님께 합류하려고 시도하게 되겠죠. 배제 당했으니까.
왜 신을 찾느냐 하면 본인의 육신이 점점 더 사라지니까, 없어지니까 내가 나를 더 이상 신뢰를 못해요. 없어지니까, 늙어가니까. 애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아이스크림이 점점 닳아져요. 아이스크림의 길이가 짧아질 때에 아이들은 누굴 바라보게 됩니까? ‘엄마 사줘’ 이러겠죠. 아이스크림이 처음에 있을 때는 엄마 찾지 않다가 없어지게 되면 찾지요.
나라는 것이 점점 더 사라지게 되면 사라지는 내가 찾고 싶어요.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나를 만들었다는 어떤 분을 상정하게 돼요. 신이죠. 나를 만들었다는 어떤 분,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봅시다, 이런 식이죠. 이렇게 사라져가면서 여기서 뭐냐 하면 사라지는 육신과 또 하나는 온전해진 온전한 멋진 나 사이에서 균열이 발생됩니다.
균열이 발생된다는 말은 같지 않다,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똑같지가 않아요. 한쪽은 없어지고 한쪽은 없어진 만큼 더욱 더 절실해지는 겁니다. 없어져가는 나 자신에 대해서 없어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충분히 보상이 되는 보상책을, 대안 책을 하나님께서 좀 마련해주셨으면 참 고맙겠습니다, 라는 절박함이 있어요. 돈 좀 있고, 배웠다는 이것이 나 사라지는 속도를 감속 못하잖아요. 어떤 위기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온전하게 멋진 나, 누가 만든 겁니까? 하나님께서 보장해 달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라지는 육신, 이 두 개가 사라지는 육신을 통해서 온전한 육신으로 건너오고자 하는 거예요. 건너왔는데 인간의 육신은 뭐냐 하면 이거는 고기입니다. 단백질 덩어리죠. 고기가 이런 생각할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라지는 고깃덩어리에서 온전한 멋진 나에서 중간에 옮겨줄 수 있는 그러한 다리 역할, 매개 역할, 중간의 역할을 정신이 하게되죠.
육신은 보입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천국에서 멋지게 생명나무 풀장에서 놀고 있는 나 자신, 멋지게 보입니다, 보입니다. 정신은 안 보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집어넣어서 썩어져가는 한탄스럽고 낙담되는 실제 현실, 넘어가니까요. 실제 현실과 기대 또는 희망이란 말을 하면서 온전해진 나 사이를 건너올 수 있는, 엮을 수 있는 정신에다 인간은 집중합니다.
그러면 정신 파트가 두 개로 나눠져요. 1번에서 2번으로 건너가려니까 양쪽 다를 연결해야 되니까 1과 2를 연결하면 정신도 거기에 1에 붙어있는 정신, 2에 붙어있는 정신이 두 개 다 있어야 되니까요. 그래서 1과2 붙어있는데 이 붙어있는 정신, 양쪽 다 붙어있는 정신은, 현재 멋진 나는 보이지 않거든요. 죽고 난 뒤에 얻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요.
정신도 첫째는 뭐냐? 보이는 것 설명, 그다음에 두 번째 안 보이니까 안 보이는 것을 설명, 안 보이는 걸 설명하는 두 개가 걸쳐있는 겁니다. 지금 제목은 지금으로선 마귀포착인데 시작은 사라지는 육신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보이는 것을 설명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 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정신이니까 정신 자체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둘 다를 포함할 수 있는 방식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원숭이도 없고요 개미한테도 없는데 인간에겐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입니다. 말(언어)로 표현해요. 그럼 언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두 개가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어떻게 담겨있는지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내용의 주인공, 말하는 행위의 주인공. 말하는 행위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내가 말하기 때문에 이건 나라고 합니다.
나의 특징은 이게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육신이 보이지 말하는 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실제로 있다는 것을 뭘 통해서 알 수 있느냐 하면 말하고 있다는 걸 통해서.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정신이 말을 하면서 그 안에 말하는 주인공이 나라는 것이 거기에 당연히 포함돼 있다는 식으로 나를 여기다 나타나는 겁니다. 나, 다른 말로 하면 ‘자아’ 되겠지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주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는 말하는 내용의 주인공은 뭐냐 하면 내가 말을 하면 내용이 되는 거예요. 벌써 어렵지요. 대단히 어렵습니다. 행여나 그런 분이 없겠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의미에서 제가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람이 누구한테 말을 할 때는 그 사람은 나를 보는 게 아니고 어떤 사라지는 육신이 입을 벌리는 게 보인다고요. 입을 벌리면서 그 사람이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는지를 귀담아 듣지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이야기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그때 내가 이야기했잖아, 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나를 툭 내세우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방이, “아아 그때 네가 이야기한 것, 세 시까지 카페에서 만나자, 그 이야기 말이지?” “그래. 그 이야기 내가 했다니까, 내가.” “그래. 네가 보이지 않지만 너라고 인정해줄게.” 하면, “내가 왜 안 보여? 여기 있잖아.” “너는 내 보기에 육신으로 보이지 나라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네가 그렇게 우기니까 너라고 이야기해줄게.”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사람 없어요. 이거는 따지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 복잡하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아니거든요.
여기서 주인공이니까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말하는 주인공의 특징은 뭐냐? 이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사람들은 말하는 육신이 말을 했다는 이거는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말하는 내용이니까 말하는 내용을 뭐라 하느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눕니다. 계속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왜 자꾸 정신은 이렇게 나누는 거예요?
이야기했지요. 거울에 비친 육신은 사라지고 사라지는 내가, ‘그래 사라져버려라’ 이럴 수 없어요. 뭘 시도하는 거예요? 사라지는 육신을 대체해서 영원히 안 사라지는 육신을 확보하고 싶은 겁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 말하는 내용을 남들에게 이야기하다가 또 자신에게 이야기할 때 이 말하는 내용이 둘로 나눠집니다. 보이는 것을 ‘기호형식’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기호의미(내용)’으로 이야기합니다. 기호의미, 기호내용 보이지 않는 거예요.
보이는 형식 따라가게 되면 기호의미가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가방, 형식이죠. 의미는 사람이 들고 다니는 것. 가방 하지만 가방 해봐야 미국사람들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거는 bag이라고 해야 미국사람들 알아들어요. 기호형식과 기호의미로 나누고, 보이는 것은 이렇게 나누는 겁니다. 지금까지 잘 따라오셨습니다. 계속 따라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중간에 놓쳤다 싶으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니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건 기호형식, 이건 기호의미에요. 그러면 그다음에 기호형식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붙습니다. 보이는 기호형식은 이거는 누가 정했는가 하는 거예요. 이거는 기성질서에서 기성사회에서 정한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태어난 곳에서 시작해서 태어날 때 어린아이의 기성사회, 그의 삶의 공간은 어디지요? 가정이죠, 가정.
그러면 가정으로 돌아가 보면, 아빠, 엄마 결혼해서 애 낳을 때 ‘엇 고깃덩어리 낳았네’ 이러지 않지요. 사람이 ‘예쁜 사람이 태어났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깃덩어리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당사자는 본인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그 구분 자체를 본인이 구분하지를 못한 것 때문에 나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때가 뭐냐?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외부에서 볼 때 엄마와 그 애가 몸은 떨어졌지만 같이 붙어 다니는 거예요. 몸은 떨어졌지만 배에서 나왔지만 당분간은 항상 엄마 곁을 떠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있고 여기 어머니가 있다면 제삼자가 볼 때는 두 고깃덩어리, 두 육신이 떨어져있지만 아이는 어머니와 떨어져있다는 생각을 못해요.
그런데 6개월에서 1년6개월 지나버리면 엄마를 가로막는 이 중간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애가 거울을 봐요. 아이는 엄마와 안 떨어졌어요. 엄마와 붙어있습니다. 붙어있으니까 이걸 점선으로 할게요. 아이는 자기는 있고 없고가 없어요. 엄마가 있으면 자기는 있고, 엄마가 장에 가면 자기는 없는 거예요. 아주 어릴 때니까 여러분 잘 기억 안 나지요. 너무 옛날이야기라서. 인간은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을 보게 됩니다. 거울을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거울상에 자기가 비친 걸 보는 거예요. 비친 걸 봤을 때에 엄마가 비치지 않고 본인의 육신이 비칠 때 저게 바로 나라는 생각, ‘나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가 발생돼버리면 엄마가 뭐가 됩니까? 더 이상 나가 아니고 뭐가 됩니까? ‘너’가 되는 거예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어머니는 나는 나로 분리되고 엄마는 타인으로 분리됩니다. 타인으로 분류가 돼요.
타인으로 분류하면서 그때부터 아이는 점선이 아니고 아이는 실선이 되는 거죠. 이게 바로 나니까. 나가 이제는 타인이 누굽니까? 어머니로부터 자기의 신체적으로 나오는 욕구에 대해서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때 젖을 달라하든지 우유를 달라하든지 사탕을 달라하든지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 요구에 대해서 엄마가 그 요구에 부응합니다. 뭐라 하냐? 사탕 먹어라. 이게 젖이야, 하고 이야기를 해주지요.
그럼 애는 ‘사탕’이라는 기호형식에 드디어 감각이 오게 돼 있습니다. 애가 사탕공장 아이라도 지가 만든 게 아니에요, 사탕이란 게. 사탕 주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사탕’이라고 발언을 할 때 애는 거기서 먹으니까 달콤하잖아요. 자기의 욕구가 충족되는 거예요. 그럼 엄마 보면, 사탕 달라고 하는 거예요. 애 입에서 뭐가 나오는 하면 어른들이 썼던 기호형식이 드디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언어에 대한 종속이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제가 가정에 있는 아빠, 엄마 이 사회에 대해서 언어체계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 그것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수련회에 우리가 대해야 될 게 뭐냐? 갈라디아서에요. 갈라디아서는 언어로 돼 있습니다. 그 갈라디아서 언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거예요. 어디서 나왔는지도 중요하지만 도대체 갈라디아서라는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언어는 무엇을 발췌하기 위해서 무엇을 포착하기 위해서 그 갈라디아서가 복음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었느냐, 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리고 그 복음이란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 받아들이는 성경 자체에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실 때 있는 그 취지가 나라는 것이 이미 구성돼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나에게 왔을 때에 트위스트, 다시 말해서 ㉮왜곡되고 오인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그걸 아셔야 되고요, ㉯누가 배후에서 본래에 성령께서 주신 성경말씀을 내가 있다는 존재를 앞장세워서 오인되게 만들었는가를 밝혀내야 돼요. 괜히 은혜 받았다 하면 곤란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건 자기 착각일 가능성이 거의 백 프로입니다.
왜 그러냐? 제가 강의 처음부터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인간 속에 사라져가는 육신이 뭔가 아쉬움이 있어서 영원한 천국에서 온전한 육신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이미 전제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그 욕망이 전제돼 있는 이상 성경말씀이든 어떤 말씀도 성경말씀 말고 신문이나 어떤 책이나 방송에 어떤 말이 들려도 이거는 전부 다 내 안에서 왜곡되게 돼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엄마가 이야기하는 그 사탕의 의미는 ‘그만 먹어 인간아’ 이런 의미가 있는데 아이는 엄마가 쓰는 그 단어, 기호형식의 본래 의도는 모르고 참 맛있다는 일방적 자기의 주장을 가지고 사탕을 받아들이거든요. 또 그래야 마땅하고요. 왜냐하면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에요. 이미 나와 남 사이에는 합체가 되지 않습니다. 합체는 내가 없을 때 합체했지요. 내가 있을 때는 합체라는 성립 안 돼요. 따로 놀아요. 서로 이용하는 거예요.
애가 시끄러워서 안 되겠네. 사탕 하나 주자. 그래서 조용하니까 ‘그래 그렇게 조용해야지’ 하고 자기 할 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 칭얼대’ 애한테 커서는 그런 이야기하지만 갓난애는 그런 이야기 못하잖아요. “이것 먹고 그만 칭얼대.” 똑똑한 애들은 이야기해요. “엄마 사탕 주면서 방금 무슨 이야기했는데?” “너 몰라도 돼.” 이런 것. 똑똑한 애들한테만 해당되는 거예요.
이 기호형식과 기호의미에서 나라는 것은 누구한테? 타자, 타자란 남이란 뜻입니다. 일단 엄마지요. 엄마한테 내가 필요한 욕구를 요구하게 되는 겁니다. 이 요구하는 것, 여기서 사탕 주세요, 라고 요구하게 되면 엄마는 나에게 사탕을 줍니다. ‘사탕 주세요’, ‘사탕 먹어’ 이렇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애가 하는 말이, “엄마 그 사탕 말고 다른 사탕, 이것 말고 전에 먹던 사탕 줘”라고 하니까 엄마가, “말 그러니까 똑바로 하란 말이야, 똑바로. 사탕도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어린애가 하는 말이, “왜 사탕이란 언어가 그렇게 많이 분화되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탕이란 단어가 사탕이 한 종류가 아니고 여러 종류가 왜 그렇게 분화되었어요? 엄마가 하는 말이, “네가 학교 안 가서 교육이 덜 돼서 그런 거야.” 이렇게 된 거예요. 옛날 가부장적 남편이, “여보, 티비 틀어봐.” 아내가 틀어줬어요. “왜 프로그램이 그것밖에 안 나와?” 아내가, “세상 많이 달라졌어. 티비조선도 있지만 딴 것도 많이 있어.”
그때부터 아이는 욕망이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전에 사탕 먹고 만족한 게 만족의 한도가 아니었구나, 라고 나서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그때 달콤했던 플러스알파, 미지의 사탕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내가 눈에 보이는 주체, 아까 기호형식,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까? 기호형식과 의미가 합체되어서 나왔던 주체, 주체하면 어려우니까 주인공, 내가 사탕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주인공 여기에서 내가 아는 사탕 말고 내가 모르는 사탕으로 내 주인공이 업그레이드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옛날 사탕 주면 만족도가 확 떨어져요. 엄마 이것 말고 엄마가 몰래 먹는 것, 나한테 주는 용도의 사탕 말고 엄마가 혼자 숨어서 먹는 그 사탕, 이건 애들 먹는 게 아니고 어른들 먹는 거야. 그 어른들 먹는 것 먹고 싶어, 라고 할 때 여기서 기존의 주체와 또 다른 더 큰 플러스알파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균열이 일어나지요. 갈라짐이 성립되는 겁니다.
갈라짐이 성립되면서 엄마가 말합니다. “그래 엄마 먹는 사탕, 어른들 먹는 사탕 줄까?” 물론 마약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마약 아닙니다. “그것 줄까? 그러면 네가 이번에 숙제는 산수 1학년 2학기까지는 떼야지. 구구셈 우승을 해야지.”라고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구구셈 외우면 엄마가 몰래 먹던 케이크와 사탕 주는 거야?” “그래 주는 거야.” 그러면 아이는 말려들었어요. 말려들었다고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아이가 있고 엄마가 있는데 엄마와 처음으로 떨어져있지만 처음부터 격리되지 않고 의존하지요. 의존하면서 여기 엄마가, “그 사탕은 엄마만 먹는 게 아니고 아빠도 같이 먹어.” 하고 아빠한테 권위를 슬쩍 넘기면서 애는 엄마만 의존하다가 아빠한테 가게 되면 이 각도만큼 결여, 빈자리가 생깁니다. 빈자리가.
지금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여러분을 이끌고자 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지금 악마포착에서 악마를 어디서 포착하는가? 악마포착은 낙원에서 인간이 배제되었어요. 생명나무에서 배제되었어요. 인간이 악마가 부추겨서 따먹지 말아야 될 선악과는 건드렸지만 그 건드린 것 때문에 생명나무, 선악과가 딸랑딸랑 연결된 것을 생각 못했어요.
두 개의 나무인줄 알았어요. 밑으로 지하로 연결된 걸 모르고. 한쪽 먹으면 한쪽은 따먹을 게 남아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었냐?” “예.” “그러면 생명나무 못 따먹어.” 나무가 두 개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도 마저 따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를 따먹으니까 하나는 못 따먹도록 차단시켜놓은 거예요.
그러면 인간 입장에서 마귀 입장에서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진즉에 이야기하지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돼 있지 생명나무 그건 따먹지 말라고 왜 사전에 추가조항을 설명을 안 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도 몰랐고 심지어 마귀도 몰랐지요. 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고 따먹지 말라가 아니라 아예 생명나무 근처도 오지 말라고 추방시키고 행여나 올까봐 불타는 천사를 에덴 동쪽에다 파수꾼을 세워서 근처도 못 오게 만들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인간 제거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든 인간을 해버렸어요. 제거 당한, 그러면 처음 만든 인간은 제거라는 것을 몰랐던 존재였습니다. 제거를 몰랐던 인간이 하나님의 협의 없는 일방적 조치에 의해서 몰랐던 제거라는 걸 당했을 때 본능은 어디를 추구하게 돼 있습니까? 그 제거의 폭을 덮어버리고 감춰보려고 시도하겠지요. 하나님 우리와 좋은 사이였잖아요, 이런 식으로 시도를 하겠지요. 그 시도하는 배후에 누가 있겠어요? 악마가 시키겠지요. 그게 악마가 포착됐잖아요.
지금 우리가 찾는 것은 뭐냐 하면 끊임없이 인간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계속 배제 당하고 삭제 당하는 현상들이 가득하게 인간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그것이 방출되고 있더란 말이죠. 계속 그게 나오는 거예요. 끊임없이 나와요.
엄마한테 하던 것이 엄마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빠가 있는데, 여기서 아빠란 의미는 물론 엄마 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아빠의 의미는 아이에게 엄마 혼자 단성 생식한 게 아니잖아요. 어디 아메바입니까. 아빠, 엄마에 의해서 아이가 생겼으니까 엄마는 엄마 따로 아빠는 아빠 따로에요. 하나가 둘 사이를 두고 둘을 통합해야 될 심리적 정신적 부담을 갖게 되는 겁니다, 아이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맨날 이런 질문이 올 것 같아.
그러면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존재인데 두 존재가 아이한테는 하나의 존재로 받아내야 될 심리적 부담이 생기면서 여기서 아이는 뭐냐 하면 억지스러움이 발생되는 겁니다. 억지 미소, 억지 귀여운 척하는 그런 것 있잖아요. 억지스러움이 발생되는 거예요. 양쪽 다 비유를 다 맞추어야 되니까. 다 헤헤거려야 되니까.
이 억지스러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주체를 뭐로 하느냐 하면 통합이 되지 않는, 억지스러우니까 통합될 수 없어요. 통합될 수 없는 내부의 주체를 억압시키는 거예요. 억압하면서 마치 엄마, 아빠 마음을 다 알아주는 것처럼 여기는 가상적 주체를 가상적 나를 표상할, 표현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 억압된 것이 눈에 보이는 아빠한테 알랑거리는 의식적 행위에 의해서 눌려버리는 이익주체를 정신분석학에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의식이라 하는 거예요. 이게 무의식이라는 겁니다.
아이는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요. 헤어지기 싫다가 실제로 헤어졌어요. 내 몸 따로, 내 육신 따로 엄마 육신 따로구나. 따로 됐다면 엄마가 갖고 있던 사탕이라든지 누리고 있는 모든 자유가 애한텐 부러움이 되겠지요. 부러운 상태가 되겠지요. 그러면 애들은 여기서 뭘 하느냐 하면 억지를 부리지요. 뭐냐 하면 엄마 것이 내 것이라는 ‘동일시’현상이 보이는 겁니다.
엄마 가는 곳에 내가 간다. 엄마 것이 내 것이다. 엄마를 나를 영원히 사랑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엄마는 나를 사랑하게 돼 있어. 왜? 엄마가 어떤 짓을 해도 엄마 본인은 엄마를 사랑하니까. 똑같이 나도 엄마 거니까 엄마가 본인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할 거야, 라고 하는 마더스 니즈(많은 이미지?)가 발생되는 겁니다. 엄마 생각은 달라요. 그거는 너 혼자 상상한 거고, 그건 착각한 겁니다.
그런데 일부러 아빠, 엄마 구분했는데요. 이게 엄마 같은 아빠가 있고, 아빠 같은 엄마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꼭 굳이 누가 엄마, 아빠라고 지칭하지 마시고 서로 다른 요소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애가 가정을 떠나서 학교 또는 교회, 더 커서 사회라는 일반사회,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사회에 등장하게 되면 그냥 엄마의 보호를 받던 나 같은 존재가 한두 명이 아니에요. 다에요, 다.
나 보호받고 싶어, 나 사랑받고 싶어. 나는 어떤 짓을 해도 위로받고 싶어. 누군가 배후에서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우리 엄마야, 라고 하는 가정에서 형성된 자아 동일성이에요. 상상한 거죠. 자기 혼자 일방적 상상인데 자아 동일성이에요. 어떻게 모든 육신들, 모든 육체들이 똑같이 나처럼 그들도 행동하는 겁니다.
그럴 때 여기서 문제가 생기지요. 문제가 생기니까 더 사회에서 법과 질서가 필요한 거예요. 질서, 서열화, 계급화, 몇 등, 몇 등 등수, 이걸 seriality라 하는가? 계열화, 서열화, [타인의 마을]이란 책에 보면 그걸 계열화, 교재에도 나오는 같아요. 지난번에 했지요. 꼬물꼬물 올챙이, 점점 더 관계가 멀어지면서 계열체, 계열화. 여기에서 뭘 하느냐 하면 이 개인적인 주체를 억압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의식적인 것 따로 있고, 무의식적인 것은 “가만있어, 가만있어. 무의식적인 건 나타나면 안 돼.” 의식적인 것은 “나 당당해. 나 자립했어.” 무의식은 뭡니까? “나 엄마 없이는 못 살아.” 이거거든요. 무의식은 엄마 없이는 못 살아요. 어른 돼서 애 되면 안 되잖아요. 늘 징징대지 않잖아요.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이제는 설거지나 빨래 니가 알아서 해라. 네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엄마한테 니 양말 빨아주고 해야 되느냐. 엄마, 아빠 바빠. 네가 해.”
뭐가 주어졌습니까? 뭐든지 나한테 일방적으로 내 소원대로 요구를 다 들어주던 엄마, 아빠가 어떻게 됐어요? 하나의 냉혹한 타인으로 변하면서 엄마, 아빠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면서 의식은 점점 더 왜곡되고 내가 엄마, 아빠 사랑하는 무의식은 점점 더 깊어지고, 이 간격이 어떻게 된다고요? 이 간격이 점점 더 분열되는 거예요.
자, 분열된다 했지요. 여기까지 여러분 오셨어요. 분열되는데 마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하나님 앞에서 제거되고 추방된 사실을 빨리 그것을 하나님은 온전하니까 우리는 온전하지 못하니까 온전치 못한 내가 온전함을 따라잡으려고 그 간격을 빨리 메워줘야 돼요. 메우는 방법이 뭐냐 하면, 분열을 좁히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법대로 하는 거예요. 시킨 대로 하는 거예요.
시킨 대로 한다면 타인으로부터 어른들로부터 사회 나가서 사랑을 받을 것이고 그 사랑받는, 사랑이다, 이거는 사랑받은 거야, 그런 것을 확정하고 긍정하는 것은 어릴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칭찬하고 나를 감싸줬던 무의식 속에 있던 엄마의 요소와 점점 더 친근해지고 가까워지는 거예요. 법대로 하게 됩니다.
법대로 하면서 뭘 하느냐 하면 법에 대해서 요구를 하게 돼 있어요. 뭘 요구하느냐? 저 영웅적인 형님이나 어른이라든지 내가 사모하고 싶은 나의 이상형, 내가 어릴 때부터 이상적으로 기대했던 형님, 이상적 자아성, 이런 이야기 치우고요.
그냥 내가 본받고 싶은 형님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형님, 내가 형님 쫓아다니는 것도 피곤하니까 완전하고 최종적인 법은 무엇입니까?” 묻지요. 그럼 그 형님이 이야기하기를 “나도 그것 찾는 중이다.” “도대체 형님을 언제까지 따라다녀야 됩니까?” “나, 너 따라다니는 것 신경 못써. 나도 더 큰 형님 따라다니는 중이야. 네가 애야? 언제까지. 스스로 결정해야지. 칭얼대며 따라다녀.”
“목사님, 성경의 완전한 뜻은 뭡니까?” “나도 그것 찾는 중이야?” “그러면 완전한 성경 가르치는 목사님 어디 계십니까?” “몰라. 너도 네가 알아서 찾아봐. 니가 찾아보라고.” “그럼 형님은 왜 그걸 모릅니까?” “나도 제거됐어. 나도 같은 입장이다, 지금. 내가 신이야? 나도 제거됐어.” “그러면 형님은 진리 찾는 걸 포기했습니까?” “아니. 나는 더 많이 잘 아는 사람 찾아다닐 거야.” “언제까지요?” “글쎄. 완전한 사람 찾을 때까지.” 이게 뭡니까, 이게? 이게 뭐예요, 그래.
따라서 의식적으로 나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찾는 것은 의식적 주체가 아니고 무의식적 주체, 그러니까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 이미 기정세대에 많은 언어가 있고 문자가 있고 아까 기호형식들이 있어요. 기호형식에 내가 원하는 의미를 담아준 기호형식은 없고, 기호형식에서 다른 기호형식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형님,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워하는 건 뭡니까? 가슴이 아리는 것이다. 가슴이 아리는 것이 어딥니까? 그게 사랑이야, 실컷 찾아다녔는데 자꾸 원래대로 되돌아가버려요. 순환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그런데 그 사랑은 사랑₁이고 방금 이야기한 것도 사랑인데 둘이 똑같지 않습니까? 똑같은 게 아니지. 왜요? 사랑은 한 바퀴 돌고 왔기 때문에 똑같은 게 아니야, 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랑이란 단어 자체가 사랑이 아닌 것을 만들어서/생겨나게 해서 그 차이를 나타내면서 인간의 기호형식은 계속해서 생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이 사회란 말이죠.
아이 참 여기서 10분 쉬려니 아깝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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