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29_1에서 0으로

아빠와 함께 2023. 7. 3. 15:50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9 - 1에서 0으로

23,06,19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이는 너희가 죽었고 !!

오늘은 교재 11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제목이 '성경이해를 봉쇄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되어있는데, 지금 우리가 신약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작은 제목으로 '십자가를 중심으로 벌이시는 주의 전쟁' 이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교재 120페이지에 가면,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가 인식해야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이기에 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점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서 성경말씀이 그 앞에 나와있는데, 그것이 골로새서 3장 2절과 3절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3절에 '이는' 라고 하는 것은 '왜냐하면' 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에 분명히 "너희가 죽었고"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또한 죽이려고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 김 사부가 죽었다 !!

우리나라에서 명의로 불리던 서울아산병원의 흉부외과 김석중 교수라는 분이 있는데, 어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그만 횡단보도에서 우회전을 하던 트럭에 부딪쳐서 그만 죽었다는 겁니다. 심장 대동맥 수술의 권위자라고 하는데, 만약에 죽지 않았다고 하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가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것을 "매우 유능한 흉부외과 교수가 죽었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성경적으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 그 사람은 왜 죽지 않고 살아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인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분명히 "너희가 죽었고" 라고 하니 말이죠.

* 그동안 왜 살아있었지?

그러니까 "그 뛰어난 교수가 왜 죽었는가?" 라고 묻는 게 아니라, "그동안 왜 살아있었지?" 라는 것을 묻는데, "그 아까운 사람이 왜 죽었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살아있었던 것이 마치 반칙과도 같다" 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죠. 성경에서는 분명히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살아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라고 하면,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이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하는 성경말씀에 위배가 된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어제로 끝나야 하는데 왜 아직도 살아있는가? 도대체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이렇게 살아있는가?"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겁니다. 진작에 죽어야만 하는데, 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말이죠. 즉 인간은 죄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있다고 하는, 그런 반칙을 범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이 왜 반칙일까요? 의사라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심장외과 전문의가 그만 죽었으니, 사람들은 이것을 '아깝다' 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이 바로 죄가 된다는 말이죠. 성경에서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하면, "이제 성경대로 되었네" 라고 하면서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참 아깝다. 하나님은 왜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죽일 놈들이 그야말로 널려 있는데, 그런데 그런 놈들은 죽이지 않고 왜 이런 분을 죽이시느냐는 말이죠. 연쇄 살인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도, 교도소에서 국가 세금으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놈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모두 반칙인데, 성경말씀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살아있다" 라고 할 때는, 반드시 여기서 감당해야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라고 한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살아있는 자에 대한 주님의 추궁 !!

그러니 살아있는 사람은 주님이 요청하는 말씀에 대해서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차라리 죽었으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 살아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추궁을 당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지금 너는 살아있지? - 예, 저는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 그러면 나의 요청을 좀 들어주어야 하겠다. - 그게 무엇입니까? 말씀하십시오.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알겠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성경의 내용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 의사가 그동안 심장수술을 하기 위해서 살아있었던 게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심장수술을 잘 하던지, 그만 실수를 해서 사람을 죽여서 기소를 당하든지, 주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 사람의 형편에 대해서 주님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성경말씀인데, 즉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 그것이라는 겁니다. 자식이 5명이든 6명이든 간에,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데, 주님께서는 그 자식 하나 하나에게 모두 다 요청을 하시고 추궁을 하신다는 말이죠.

* 이는 너희가 죽었고 !!

그러면 인간들은 어떻게 나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면, 그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라고 나올 수 있는데, 그래서 여기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이미 죽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눈에 보이는 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서로 서로가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렇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말씀이 살아있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실제상황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청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떻게 대처를 하면서 나옵니까?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첫 번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가 있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겁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들은 1번과 2번 중에서 어느 것에 과연 더 관심이 있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이라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죽으리라' 라는 것일까요? 1번이라는 겁니다. '죽으리라'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인간들이 그만 개무시를 하고 만다는 것이죠.

* 나는 살아있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주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살아있음', 그것은 분명 하자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그냥 있는 것은 괜찮은데, 그런데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니,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엄청난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있다' 라는 것과 '살아있다' 라는 것을 구별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인데, 그런데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앞에 반드시 '나' 라는 것을 상정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앞에 반드시 '나' 라는 것이 있어주어야만 '살아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있다' 라는 것은 '나' 라는 게 의식되지 않지만, 그런데 '살아있다' 라고 했을 경우에는 '나'를 끌어당겨서, "내 몸이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과 "내 몸이 살아있다" 라는 것을 또 다시 구별하게 된다는 것이죠.

* 새로 다시 !!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새로 하겠는데, 성경말씀 골로새서 3장을 보면, 분명히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말씀하시면서 '죽으리라' 라고 하셨고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왜 이러한 성경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는데,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말씀이 오기 이전까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래서 동창들끼리 모여서 동창회를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 성경말씀이 그만 등장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문제가 생기고 만다는 것이죠.

여기서 다니엘서 5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5절입니다.

(단 5:1)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단 5:2)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단 5:3)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단 5:4)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단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벨사살은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인데, 그가 무슨 짓을 했는고 하니,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가지고 온 하나님의 기구들을 가지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이 살아있습니까? 죽어있습니까?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파티를 열고 했는데, 서로가 서로를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가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의 촛대 맞은편에 있는 분벽에 글자를 썼다는 말이죠. 얼마나 구체적인지 모르는데, 그렇지요?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썼는데,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손가락은 보이는데 정작 그 몸체는 없다는 겁니다.

* 0과 1의 차이점 !!

제가 오늘 아침에 십자가마을에 댓글을 하나 달았는데, 0과 1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숫자를 셀 때는 1부터 하는 것이 맞는데, 즉 사과가 하나가 있으면 1이고, 두 개가 있으면 2고, 세 개가 있으면 3이라는 겁니다. 사과가 없으면 숫자를 붙이면 안 되는데, 그러면 반칙이라는 말이죠.

사람의 경우에도 1명, 2명, 그렇게 할 때는 있을 때 숫자를 붙인다는 겁니다.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숫자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즉 물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숫자가 붙는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당신은 나이가 몇 살이지?" 라고 했을 때, "나는 40살이야" 라고 했다면, '나' 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카운트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0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반칙인데, 왜냐하면 없는데 왜 숫자를 붙이느냐는 말이죠.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왜 출생신고를 하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한다고 하면, 그것은 아직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0' 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현재 나타난, 그 원천을 표시한다는 겁니다. 있는 것을 있게 하고 나타난 것을 나타나게 하는 그 무엇,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있는 세계, 이 나타난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무엇은 분명히 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0으로 표시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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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마을 댓글 - 주님의 택한 백성의 자기 부인이 시작될 지점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기 백성 구출방법입니다. 0에서 시작하는 사람과 1에서 시작하는 사람의 차이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합니다. 0은 없음이며 1은 최초의 있음입니다. 주님은 1(=있음)을 0(=없음)으로 가져오셔서 0을 담아 다시 1이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매일같이 머뭇대지 말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와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언제 봤다고?"(마 8:29) 그러니 1이 0을 의식하고 반응을 보일 때, 비로소 그 사람 속에 말씀이 살아있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그저 말씀이 왕래함을 현장에서 생중계하고 있는 신호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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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어떤 분에 관한 이야기 !!

그러면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을 때, 그러면 모든 성경말씀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인간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그분인데, 성경말씀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의 일이 아니고, 우리를 완전히 개무시해도 괜찮은 어떤 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0인데, 이 0은 없음이라는 말이죠. 사과가 하나가 있으면 1이고, 두 개가 있으면 2이고, 세 개가 있으면 3인데, 그러니 1은 그냥 "사과가 있다" 라는 게 아니고, 그것은 최초의 있음이 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있음은 2가 되고, 세 번째 있음은 3이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0은 없음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골로새서 3장에서 우리를 보고 "이미 죽었고"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것이 자기가 자기를 거울을 보고 관찰해서 내린 결론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보이지 않는 그분이 내린 결론입니까? 보이지 않는 그분이 내린 결론이라는 겁니다.

* 그래, 인간은 없어져야 마땅하지 !!

그런데 인간은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기 자신이, "너희는 죽었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보이지 않는 분을 경유하지 아니하면 그 성경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있어. 나는 죽지 않았어. 심장수술을 잘해서 흉부외과의 명의라고 추앙을 받고 있어"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그만 죽고 말았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참으로 아깝다" 라고 할 것이 아니고, 뭐라고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원래 그 사람에게 규정한 말씀대로, 그 사람은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갔다는 말이죠. 인간은 죽게 되어있는데, 그게 트럭에 부딪치던 건물이 무너지던 간에,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인간이 없어진다는 것은 1이 무엇으로 바뀐다는 겁니까? 1이 0으로 다시 회수가 되는데, 이것을 모르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회수되지 않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을 죄라고 하는데,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즉 원천자인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죠.

* 너희가 0이 될 수 있어?

그것을 이미 '있다' 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주님이 요구하고 요청하는 사항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내 말씀대로 제대로 살고 있어?" 라고, 즉 "1, 2, 3아, 너희가 0이 될 수 있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너희가 여기에 있어도 죽었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은 바로 너희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는데, 즉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는데, 그러면 그동안 우리는 어디에 속고 있었느냐는 겁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것은 바로 같은 인간들의 말에 속은 것인데, 성경말씀을 완전히 도외시해버리고 같은 인간들끼리 하는 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규정하려고 시도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처음부터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1이 있으면, 주님께서 그 1을 보고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말씀이 와서 그 1을 0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말이죠. 즉 "너는 없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말씀자체를 성취하기 위해서, 너는 아담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독자적으로 사람이 될 가치는 인간에게 찾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에게는 없는데, 반드시 주님의 말씀과 만나야만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 드러난다는 말이죠. 반드시 말씀과 만나야만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성도란, '1 → 0 → 1' !!

그래서 성도는 1에서 0으로 회수되었다가, 다시 0으로부터 1로 나타난 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그렇다면 처음에 1로서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는 자가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죽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라고 하셨는데, 또한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살아있다고 여기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보지 않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 눈을 빼버려라 !!

우리에게 이렇게 눈이 있는데, 이것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 0이 1이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눈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고,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빠져야할 눈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빼버려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죄를 지었으면 없애야 한다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미쳤습니까? 제 눈을 빼버리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눈이 없어서 장님이 되면 우리는 불편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자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죄를 짓는 그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들어간다. 그러니 그 지옥불에 가는 것보다는 눈이 없는 것이 낫지 않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아산대학병원의 교수처럼 죽으면 되는데, 그런데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마태복음 18장의 이 말씀이 우리를 고문하듯이 계속해서 추궁을 한다는 말이죠. "빼어버려라. 잘라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살아있어도 이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했을 때, 마귀가 인간 편에 서서 뭐라고 합니까? "차라리 없애버려라" 라고, 그렇게 속삭인다는 말이죠. 이게 악마의 멋진 아이디어인데, "차라리 성경을 보지 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교회에 가지마. 차라리 절에 가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 갓바위 교회 !!

절에 가면 어떻게 구원을 받는고 하니, 빡시게 갓바위에 기어올라가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구원인데, 즉 자기가 빡시게 노력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노력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나 딱 맞다는 것이죠.

우리의 타고난 악마의 마음과 불교가 어떻게 그렇게 찰떡궁합인지 모르는데, 그래서 교회에서도 복음을 빼고 불교요소를 집어넣어서 교회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교인들은 그것이 불교의 요소인 줄도 모르는데, "바르게 살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이 불교라는 것은 모른다는 말이죠.

성경은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데 교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살아있나? 살아있으면 천국에 가야지. 또한 너 혼자 천국에 가려고 하지말고 부모와 자식들도 다 데리고 가야지. 그러니 중보기도를 해라. 악바리로 해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은 없는데, 물론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도 없고 말이죠.

그것이 아니고, "네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면, 그것을 가상히 여겨서 천국에 넣어준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인간의 노력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이죠. 즉 "게으르면 저주이고, 열심히 하면 복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기독교로 불리는 불교라는 것이죠.

* 성경이해를 봉쇄하신 하나님 !!

여기 교재제목에 보면 '성경이해를 봉쇄하신 하나님' 라고 되어있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이 곧 우상이 되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주어도 이해를 할 수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 봉쇄를 하셨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스스로 자기가 알아서 살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구조로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마귀가 제시한 방법은 "선악과를 아예 없애버려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선악과를 없애버리게 되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도 같이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유' 라고 하는데, 주님은 '죄' 라고 하시는데 말이죠. 자유, 혹은 자율인데, 즉 스스로 법칙을 세운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자유가 아니고 죄인데, 그래서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자가 있는 것을 만들어놓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셨을까요?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하, 오류가 있네. 내가 잘못 만들었구나" 라고 하시지 않고 말이죠.

* 예수님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그 형상은 곧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고 하는, 그것이 시간의 끝, 역사의 끝인 종말에 분명히 다 드러날 때, 비로소 인간이 죄를 짓는 것조차도 주님의 완벽한 일이 된다는 겁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하나님은 그 시점이 아닌 전체를 모두 다 보시는데,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형상 속에서 죄를 짓고 마귀에게 속아넘어가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하신 일이 된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말이죠. 즉 십자가 죽으심의 완벽함을 제대로 증거하기 위한 재료가 되는 것이 인간의 타락이고 범죄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1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이것은 최초의 있음인데, 여기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2로 보는 것이 아니라 1로 본다는 말이죠. 1은 나타나 있으니, 즉 손으로 만져지니 1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것을 '나'로부터 출발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로 출발해서 '나'에게 도달하는데, 즉 1에서 출발해서 계속해서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1로 다시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1에서 0으로 돌아갈 재주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방법은 없는데, 그렇게 0에 대해서 막혀있다는 것은, 인간은 계속해서 죄만 짓는다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끝까지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사랑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0에 도달할,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전혀 0으로 돌아갈 길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죠.

* 아싸, 호랑나비 ♬

1에서 1로 다시 돌아가는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아싸, 호랑나비 한 마리가 꽃밭에 앉았는데" 라고 하는 노래가 있다는 겁니다. 김흥국이 불렀는데, 그런데 그가 가수가 되지 않고 일개 회사원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수가 되어서 히트곡을 하나 내니까, 사람들이 다 안다는 겁니다. 즉 "아싸, 호랑나비는 김흥국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김흥국이 불렀던 그 노래가 다시 김흥국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은 자기 자신에게서 멈춘다는 말이죠. 만약 김흥국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하면 여러 명의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일뿐이고,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그도 결국 죽는다는 말이죠. 아무리 건강해도 죽게 되어있는데, 송해도 93세에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김흥국은 갔지만 노래는 남아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호랑나비가 그 정도 수준의 노래가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김흥국이 죽었으면 호랑나비라는 노래도 같이 없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왜 없어지지 않느냐는 말이죠. 이것이 참 무서운 것인데, 인간이 죽으면 자기가 행한 것을 회수할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회수를 합니까? 행위 책으로 주님이 회수하신다는 말이죠.

"김흥국이 너 이리와. - 예,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 호랑나비를 누가 불렀지? - 저는 모릅니다.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우길 수 없다는 겁니다. 즉 "내가 행했지만, 그 행한 나는 비록 죽었지만, 내가 행한 것은 죽은 내가 다시 회수할 수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행한 대로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김흥국은 "괜히 태어났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정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욥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라고 했다는 말이죠.

(욥 3: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욥 3: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가롯유다의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너 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가롯유다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고,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는, 그런 죄를 짓는 기능인으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게 가롯유다라는 말이죠.

*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태어난 자들 !!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요? 시간을 5초나 드리겠는데(ㅋㅋ),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 속에서 태어났는데, 그리고 그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결과로서 우리는 죽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를 죽이신 주님에게 우리를 박수를 아낌없이 쳐야하는데, "주님은 정말로 정확하게 일을 하시는군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자기가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일을 완벽하고 정확하게 하신다고 하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자기 자신인 1에게 관심이 있고 그 1로 마감을 하는데, 그러나 주님은 0에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전에 네가 운전을 하면서 골목길에서 아이를 치였지? 왼쪽으로 가면 문제가 없는데, 그만 오른쪽으로 가서 사고가 났는데, 그것은 내가 한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성도는, 그 행위까지도 주님이 다 회수를 !!

성도의 경우라고 하면, 이 땅에 태어났으면 히트곡까지는 없을지라도 행한 일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성도 자체를 죄인으로 회수를 하심으로서, 성도가 평소에 행한 일까지도 모두 다 회수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성도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네가 37살 때 사기를 친 적이 있지? 그것은 내가 했어"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성도가 면류관을 머리에 쓰겠습니까? 주님께 반납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때 네가 사기를 쳐서 그 집안이 완전히 박살났어" 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면류관을 쓰고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합격!" 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뭐라고 합니까? 멀리 서서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하는데, 다만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합격이라는 겁니다. 구원은 그렇게 받는다는 말이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예수의 증인 !!

우리는 1의 상태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강제조치를 당해서 1에서 0으로 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0으로 와서 주님과 함께 죽고 난 뒤에 다시 1이 되는데, 즉 주님이 보내신 1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의 1이 되어서 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런 사람을 '주의 증인'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두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한 것은 주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3개의 십자가 !!

어제 설교시간에 중요한 것은 했는데, 잠시 다시 해보면, 빼빼 마른 예수님이, 즉 폭이 없는 예수님이 폭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하나가 아니고 3개가 된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강도가 둘 다 예수님을 놀렸는데, 그렇지요? "남을 구원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나 구원을 시켜보시지"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다는 겁니다.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쪽 강도는 천국에 갔는데, 즉 한 쪽은 무조건 천국이고 다른 한 쪽은 무조건 지옥이라는 말이죠. 둘 다 이미 예수님을 조롱한 입장에서 한 쪽은 천국에 가고 다른 한 쪽은 지옥에 간다는 것은, 이것은 누구의 일방적인 능력인고 하니까, 주님의 권한의 완벽성이라는 겁니다. 오직 주님의 공로로만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지옥에 간 쪽은 주님의 공로에 관심이 없는데, 하지만 천국에 간 강도는 자기가 강도인 것과 주님의 공로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우리는 모르지만, 나중에 강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피에 대해서, 그 피가 자기 죄 때문에 흘렸다는 것을, 즉 그 피가 자기 죄를 씻어주신, 대신 죽어주신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비로소 1이 0을 이해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없음이 그냥 없는 게 아니고, 그 없음의 일이 있음의 일을 완전히 능가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없음이 있음을 주도하고 있는데, 그 주도권이 있음이 아니고 없음에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성도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하면, 그러면 눈에 2가 보이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1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최초의 1이고, 그 다음이 2가 되고 3이 된다는 말이죠. 어떤 집사님이 저에게 "전에는 정치가 1순위였는데 이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게 1순위가 되었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1순위가 아니고 0순위로 해주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ㅋㅋ).

왜냐하면 1순위와 0순위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1순위는 카운트를 자기가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0은 주님이 카운트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 두 사람이 만난다고 하면, 그러면 1과 2가 만나는 것인데, 그래서 서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냥 그렇게 만나면 안 되고, 여기에는 0순위가 되시는 주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 복음으로의 만남 !!

그러니까 "복음으로 만난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눈이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그분의 주선에 의해서 만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때 주님이 다른 성도를 치는데, 그러면 주님에 의해서 매를 맞게 되는 이 성도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는 없다는 말이죠.

복음을 안다고 큰소리를 치는 자가 무서운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맞는 자가 정말로 무섭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2가 되던 3이 되던 간에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보이지 않는 주님을 증거하기 때문인데, 그러니 보통 무시무시한 자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누구든지 주의 성령이 있는 자를 건드리면 내가 너희를 심판하겠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이 사람을 때렸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자기를 때릴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서로를 때리는 분을 모시고 만나게 될 때, 이것이 복음으로의 만남이라는 겁니다

(갈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 주 안에서 순종하라 !!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겠지요? 제가 이런 말은 잘 하지 않는데, 이렇게 반문을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6장 1절에 나오는 말씀, 즉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여러분에게 맡기고 싶은데 말이죠. 괜찮지요?

(엡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맡겨도 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하겠는데(ㅋㅋ), 자녀들이 이렇게 있고 그리고 부모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러면 성경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전화를 자주 해드려라. 용돈을 많이 드려라" 라고 합니까? "효도를 해라" 라고 합니까?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1과 1이 만난다고 하면, 누구를 모셔야 합니까? '주 안에서' 라고 했으니, 0순위가 되시는 주님을 모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부모를 어떻게 했습니까? 때렸다는 말이죠. 즉 부모가 하는 일마다 주님이 간섭을 하신다는 겁니다. 부모는 주님이 주님이 보내신 모기에게 얻어맞아서 온 몸이 엉망이라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여기서 자녀는 부모에게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부모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는 주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을, 즉 주님과 함께 있는 부모를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바로 주 안에서의 섬김이고 순종이라는 말이죠.

* 나는 이만큼 얻어맞았다 !!

그러니 부모는 자식을 보고 "나에게 잘해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만큼 얻어맞았다. 나는 주님에게 박살이 났다" 라고 하는, 이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다는 겁니다. "나는 주님에게 죄인이었어. 오른 눈을 빼라고 해도 빼지 않고, 또한 오른 손을 자르라고 해도 자르지를 않았어. 그 정도로 나는 독종이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나는 주님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의미의 마감이 되기 위해서, 나는 주님의 가치를 배척했어" 라는 것인데, 물론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말씀을 멀리하고 복음을 듣지 않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기면 주님에게 닦달내면서 기도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왜 내가 남에게 지고 살아야지? 그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아" 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마지막 남은 씽씽카를 20번이 아닌 21번에 왜 가지고 가느냐는 말이죠(?). 이것은 비단 씽씽카만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먹지 못했다고 하면 너도 먹지 말아라"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남들에게 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데, 그래서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지 않은 것은 좋은데, 그런데 어떻게 윤석열 같은 인간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김건희와 같이 찍은 사진을 걸어놓고는 저주의 화살을 쏜다는 겁니다. 마치 장희빈이 했던 것처럼 말이죠.

* 너에게만 100만원을 보너스로 주겠다 !!

어떤 사람이 회사를 다니는데, 사장이 직원을 불러놓고 "이번에 너에게만 100만원을 보너스로 주겠다" 라고 하면, 그 직원은 기분이 좋아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직원들은 150만을 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회사에 사표를 낸다는 겁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그런데 왜 자기 가치는 묵살하고 저쪽 가치는 높여주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것들이 모두 '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주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겁니다. 0이 없다는 것인데, 분명히 없음이 활동했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1인 자기가 했다고 여기는데, 그동안 세상을 살아온 자기가 열심히 노력을 해서 했다는 겁니다. 주님이 하셨다고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를 못한다는 것이죠.

오죽 했으면서 성경에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같은 자들이 등장하느냐는 겁니다. 장애자들도 줄줄이 나오고 말이죠. 주님께서는 왜 죽어 마땅한 자들을 자꾸만 엮어서 복음을 전하시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잘났다고 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 0으로 넘겨버리는 솔로몬의 재판 !!

지금부터 어려운 것을 해보겠습니다. 두 가지를 해보겠는데, 하나는 솔로몬 재판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두 창기가 아이를 같은 날 낳았는데, 같은 방에서 기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만 한 여자가 잘못해서 자기 아이를 죽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여자의 아이와 그만 바꿔치기를 했고, 그래서 죽은 아이의 엄마가 왕에게 재판을 요구했다는 말이죠.

솔로몬의 재판에서 원칙은 "솔로몬은 아무 것도 모른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솔로몬은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요즘처럼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내린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무차별' 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판결이라는 겁니다. 솔로몬 자체가 무지한데, 보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무차별이라는 것이죠.

솔로몬이 두 여자를 데리고 오라고 하는데, 둘 다 0이 아니고 1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는 1에게 붙어있는 2분의 1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솔로몬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 1로서 모든 의미가 돌아오는 것을 0으로 데리고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0으로 가버리면 모든 1들은 차별이 없어지는데, 즉 "이것은 내 것이다" 라는 것이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이가 하나 있는 것을 아주 공평하게 둘로 나누는데, 즉 팔도 하나씩 가지고 다리도 하나씩 가진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아이의 엄마가 어떻게 나옵니까? 자기 아이라고 한다면 1인데, 그런데 그것을 0으로 넘겨버린다는 말이죠. 즉 "나는 아이가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 0과 하나님의 지혜인 0이 일치가 되기 때문에, 그 아이는 그 여자의 아이가 맞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솔로몬의 재판인데, 여기에 대해서 "요즘도 재판을 그렇게 해야합니까?" 라고 물으신다고 하면, 교회에서 성도끼리는 이렇게 재판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고린도전서 6장 7절을 보겠는데, 누가 큰 목소리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전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차라리 당하는 것이 낫다 !!

그런데 재판을 신청한 사람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 하는 대목을 읽으면 화가 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것이 재판에서 승소한 것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겠는데, 분명히 고린도전서 6장 7절에서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두환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가 광주에서 사람들을 많이 학살한 게 문제가 아니라, 주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죠. 물론 학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데, 그런 것은 너무 종교 편향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성경에 분명히 이런 말씀이 있는데, 그런데 교회 자체가 이 말씀을 위반한다는 겁니다. 뒷집의 불교신자가 땅을 팔지 않는다고 소송을 걸고 말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런 소송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런 소송에 휘말리게 하신다는 겁니다.

* 꽉 취고 있다가 주님에게 빼앗기세요 !!

어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남들에게 그냥 주지 말고, 꽉 취고 있다가 주님에게 빼앗기세요" 라고 말이죠. 빼앗기는 식이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남들에게 그냥 동정하는 식으로 주게 되면, 그것은 자기가 선을 베풀어서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는 속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남들을 동정해서 나누어주는 게 아니고, 꼭 쥐고 있다가 강제로 빼앗겨야 한다는 말이죠. 그럴 때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데, 그러면 감사로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괜히 소송을 걸어서 소송비도 날리고 판결에서도 패하지 말고 말이죠.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속는 것이 낫다" 라는 것을 굳이 일부러 체험하지 않아도 되는데, 주님이 다 알아서 체험케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도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하면 도박판에 가면 되는데, 거기서 어떻게 하든 돈을 잃는 방법을 연구한다는 말이죠. 남들은 광땡이와 장땡이를 붙들고 있는데, 자기는 한 껏을 가지고 계속해서 밀어붙이게 되면 다 잃어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죄를 지어서 오른 눈을 뽑는 것과도 같고 오른 팔을 자르는 것과도 같은데, 그러니까 말씀을 자기가 지키고 싶어도, 자기 속에 있는 마귀가 지키지 못하고 끝까지 버티게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버텨도 주님이 더 세기 때문에, 왜냐하면 주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 능력으로 기어이 고린도전서 6장 7절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체험케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듣게 되면 벌벌 떨게 되는데, "또 소송이 걸리면 안 되지. 뒷집에서 측량을 다시 하지고 하면 안 되지. 30년 동안이나 잘 살았는데, "당신이 내 땅을 무단 점유했으니, 살고 있는 집도 부수고 점유비용 2,700만원을 내봐라' 라고 나오면 안 되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그렇게 한 것이 다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위로가 될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하시고 나에게는 하지 마세요" 라고 나올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솔로몬 재판이 보여주는 것은, "잃는 자가 행복한 자이고, 주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천국의 백성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이제 두 번째로 할 것은, 여기서 레위기 11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레 11:20)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여기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라고 한다는 말이죠. 날개라는 것은 하늘을 나는 용도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날개가 있으면서도 날지를 못하고 땅에 기어다닌다고 하면, 그것은 가증하다는 겁니다.

* 너희에게 가증하되 !!

지금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이런 메뚜기와 같은 것에 대해서, 메뚜기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한다는 말이죠. 메뚜기가 하늘을 납니까? 조금은 애매하기도 한데, 아무튼 그런 것에 대해서 왜 가증하다고 하느냐는 말이죠. 새의 다리를 보면 약한데, 기어다니는 용도라기보다는 착지라는 겁니다. 주된 에너지는 날개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곤충의 입장에서는 날 수도 있고 기어다닐 수도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증하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속되다, 더럽다, 추악하다, 저주스럽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날개가 있는데도 기어다녔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평가를 과연 우리 인간들이 내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레위기 11장 3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레 11: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레 11: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레 11:5)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레 11:6)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레 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레 11:8)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 너희에게 부정하고 !!

여기에 보면 "너희에게 부정하고" 라는 것이 반복되는데, 7절에서는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아니 돼지가 굽이 갈라지고 쪽발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동물이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 굽이 갈라졌구나. 아, 쪽발이구나. 끝!",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뭐라고 하십니까? 부정하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 돼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그야말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또한 비슷한 예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옆을 지나가시는데 아직까지 철이 아니라서 그 나무에 열매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에게 저주를 해버리시는데, 그래서 그만 말라버렸다는 것이죠. 그러자 제자들이 그만 놀라고 말았는데, "저 나무가 무엇이 잘못되었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철이 되었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하면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피조물이 되어서 주님이 배가 고픈데 왜 열매를 맺지 못했는가?"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 철이 되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주를 하심으로서 희망을 완전히 잘라버렸다는 말이죠.

이것은마치 5살 아이에게 삼각함수를 풀게 하는 것과도 같은데,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물론 요즘 대치동의 아이들은 모르겠는데 말이죠. 삼각함수를 풀지 못했다고 해서 저주를 해서 죽인다면, 그러면 그 아이의 부모입장에서는 어떠하겠느냐는 겁니다.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일찍 죽이십니까?"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 성경이해를 봉쇄하신 하나님 !!

여기 교재 제목이 '성경이해를 봉쇄하신 하나님' 이라고 되어있는데, 도대체 성경말씀 안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한 말씀 한 말씀이 우리 인간의 이해를 봉쇄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귀한 것이 들어있기에 그렇게 하시느냐는 말이죠. 왜 1이 0을 찾아가지 못하게 하고, 0이 강제로 1을 자기 세계로 끌어들일 경우에만, 그것이 왜 구원이 되고 영생이 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창세기 7장을 보겠는데, 1절과 2절입니다.

(창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 7: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라고 되어있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아, 노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이 보시에 더 착하게 살았고 참으로 훌륭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즉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했다. 그래서 노아는 구원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버렸다" 라고 하는, 그런 감이 온다는 말이죠.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렇다면 짐승과 짐승 사이에서는 그런 감이 옵니까? 어떤 것은 정결하고 어떤 것은 부정하고, 과연 무슨 기준으로 그렇게 하느냐는 겁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착하고 말씀대로 살면 된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다면 짐승은 어떠하냐는 말이죠. 아니 똑같은 짐승인데,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고 하냐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여기 교재 121페이지에 보면,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 25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심판주이신 예수님의 임의의 뜻 !!

여기 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하는데, 우리 인간이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들만이 심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심판을 한 사람에게 다 몰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심판을 통해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고 하는 것은 누구의 의지이고 누구의 뜻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심판주이신 예수님의 임의의 뜻이란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어떤 짐승은 정결하고 어떤 짐승은 부정하다" 라고 하는 것은 누가 평가하는 겁니까?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 평가를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레위기 11장에서, 그 음식을 먹는 당사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 7장에 나오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누구와 함께 동승을 하는고 하니, 당대의 의인인 노아와 같이 방주 안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정결한 짐승들과 부정한 짐승들이 다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는, 정결한 것은 잡고 부정한 것은 잡지 않는다는 말이죠.

* 아, 나는 부정한 짐승이야 !!

그렇다고 하면 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정결하다, 부정하다" 라고 하는 것은, 짐승이 선악적으로 착한 짓을 많이 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런 겁니까? "입으로 나무를 찍고 할 때는 3번만 해야하는데, 나는 그만 5번이나 했어. 그래서 나는 부정한 짐승이야" 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뱀이라고 하면, "똑바로 가야하는데 그만 너무 흔들면서 갔어. 나는 부정한 짐승이야" 라고 하는 것이 있느냐는 말이죠. 메뚜기가 부정하고 뱀이 부정하고, 그리고 낙타와 돼지와 같은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음식의 상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어디 짐승들의 책임입니까? 그 짐승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소는 먹을 수가 있는데 말이죠.

* 이스라엘은,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규정된 '거룩한 나라' !!

여기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그 음식을 먹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거룩한 나라' 라고 규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렇게 규정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은 원천은 있다는 말이죠.

이 이스라엘의 원천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1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인 이삭은 1이 아닌 0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이삭은 육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약속으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삭에게 종속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0과 1, 즉 없음과 있음인데, 0이 확장되어서 야곱이 되고 또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거룩하다는 말이죠. 이것은 그들의 행실이 다른 이방민족들보다 올바르다고 해서 거룩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0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신명기 9장을 보겠는데, 5절입니다.

(신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라고 하는데, 그리고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둘 다 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승리하고 이방민족은 패배를 하는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언약은 무엇의 나타남이라고 할 수 있는고 하니, 0이 1들의 세계에 나타나는 것인데, 즉 전부 다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는 세계에 없음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언약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 무조건 의롭지 않고 무조건 정직하지 않고, 무조건 악하다 !!

그렇게 되려고 하면, 믿음이란 것은 자기가 보는 것 느끼는 것이 다 삭제를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 이것은 착한 것, 이것은 의로운 것이다" 라는 것을 다 삭제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무조건 의롭지 않고 무조건 정직하지 않고, 무조건 악하다는 겁니다.

아직도 우리가 살아갈 날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은 심도가 있게 우리가 경험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주는 오직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심판하시는 정당성과, 그런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죠.

주님은 일방적으로 양과 염소를 나누시는데, 그런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한 모든 일이 자기가 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우리가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는데, 그 모든 것을 누가 기획하고 누가 연출한 것인고 하니, 즉 누가 이끌고 누가 인도하셨느냐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혹시나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정말 그러합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는 말이죠.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를 들어서, 2,000만원을 사기를 당하고도 그렇게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방금 사기를 당해서 집에 고개를 푹 숙이고 힘이 다 빠져서 들어왔는데, 그런데 옆 눈으로 현관에 보니 시편 23편 1절의 이 말씀이 액자로 걸려있다는 말이죠.

* 나는 내가 너무 아까워 !!

우리는 늘 잊어버리는데, 자기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들을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이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죽으면 안 돼. 내가 너무 아까워"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1에서 0으로 가야하는데, 그런데 자꾸만 1에서 멈춘다는 겁니다. 앞으로 가야하는데,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께서는 복음으로 반대로 뒤집어버리는데, 그래서 이제는 0의 세계,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너는 많이 가졌네" 라고 하면, "아니야, 나는 없어" 라고 하면서 없음의 세계를 드러내고 반복하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주님이 이해가 되도록 해주시는 것이 진정한 주님의 사랑이고 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제는 자기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주님은 지금도 힘차게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6,30 오후 9시에 마침.

무조건, 무조건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