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7 - 짐승이냐? 사람이냐?
23,05,22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사람 VS 사람'의 전쟁 !!
오늘은 교재 111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 제목이 '요한계시록에서의 주의 전쟁' 이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계속해서 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누구와 누구의 전쟁인고 하니, 그것은 다음 3가지 중에서 하나인데, 즉 "(1) 하나님 VS 악마, (2) 하나님 VS 사람, (3) 사람 VS 사람" 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과 악마의 경우에는, 우리 인간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간으로서는 현상적으로 도저히 밝혀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으로서 보게 되면, 이것은 세 번째의 경우인 '사람 VS 사람'의 전쟁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람과 사람의 전쟁을 하면서 양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지금 이 전쟁은 너와 하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너 배후에 있는 악마와의 전쟁이다" 라고 우기고 있다는 겁니다. 양쪽에서 다들 그렇게 나오는데, "나는 악마 편이고 너는 하나님 편이다" 라고 하는 경우는 없는데, 그 어떤 나라라도, 동남아나 아프리카 부족간의 전쟁도 말이죠.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과 이방나라가 벌인 전쟁의 경우에도, 자기 전쟁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들이 믿는 신을 대리해서 전쟁을 한다는 겁니다. 즉 신을 앞장세워서, 신을 거론하면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죠. 하지만 현상학적으로 보면 신은 나타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의 전쟁만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좀 더 확산을 시켜보면, 이렇게 교회가 있고 성당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교회와 성당의 전쟁은 무슨 전쟁일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교회와 요즘 시끄러운 경북대학교 근처에 있는 이슬람교의 기도처가 싸운다고 하면, 그 기도처는 북구청에서 이미 허락을 해주었다는 겁니다.
* '자존심 VS 자존심'의 전쟁 !!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알라신의 전쟁이 되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과 사람의 전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 VS 사람'의 전쟁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존심 VS 자존심'의 전쟁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이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는데, 러시아의 종교는 러시아정교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종교도 러시아정교인데, 같은 기독교 교파끼리 싸운다는 말이죠. 그러면 전쟁을 하면서 기도를 하겠습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하는데, 러시아정교에서는 목사라고 하지 않고 신부라고 하는데, 자기 나라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이 러시아정교는 특히 삼위일체를 강조하는데, 그래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데, 적군을 이기게 해달라고 말이죠. 그러면 상대는 그만 여호와 이름을 가장한 악마가 되는 것인데, 그러니 이런 것은 '자존심 VS 자존심'의 전쟁으로, 그런 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여호와 편이다. 그러니 너희는 악마 편이다. - 아니야, 우리가 여호와 편이고, 너희가 악마 편이다" 라고 하게 되는데,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이죠. 또한 구약의 경우에는 "우리는 참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너희는 거짓 신 마르둑을 믿는다. 암몬을 믿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가 결판이 나지 않는데, 즉 전쟁의 명분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전쟁은 분명히 일어났는데, 그런데 그 전쟁의 주체와 객체가 누구인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 요한계시록을 보면 계속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요한계시록을 성당에서도 보고 교회에서도 본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각자 어떻게 나옵니까? 주님의 편에 서있는 자들이 서로 자기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겁니다. 즉 "우리 성당이 주님 쪽이다" 라고, 혹은 "우리 교회가 주님 쪽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 솔로몬의 지혜 !!
그러면 이럴 때 우리는 판정을 어떻게 내리면 될까요?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솔로몬의 재판인 경우에는, 살아난 아이가 있고 죽은 아이가 있고, 그리고 아줌마 둘이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살아난 아이가 과연 누구의 아이인가?" 라고 했을 때, 그러면 솔로몬은 어떻게 재판을 했습니까? "그만 둘로 쪼개라" 라고 했는데, 그러면 과연 이게 제대로 된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를 살리기 위한 재판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만 아이를 죽이라고, 그것도 판사가 부추기고 있다는 겁니다. 즉 "공평하게 아이를 둘로 쪼개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재판을 두고 뭐라고 합니까? '솔로몬의 지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들어갈 때, 우리 인간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그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솔로몬의 재판방식은 '무지함'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데, 즉 "솔로몬은 아무 것도 몰랐다" 라는 겁니다.
* '무지함'으로 하는 재판 !!
이것은 두 사람의 다툼, 즉 전쟁이었는데, 그 다툼을 지혜롭게 재판하는 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솔로몬은 무지함으로서, 그 현장에서 자기가 빠져나오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재판은 솔로몬의 재판이 아니라, 솔로몬과 함께 계시는 주님의 재판으로 전환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인고 하니, 솔로몬이 그 현장에서 "나는 무지하다" 라고 하면서 빠질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지옥에 가고 싶습니까? 권사님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면 천국과 지옥은 재판을 통해서 결정이 되는데, 그게 솔로몬의 재판인데, 즉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엄청 간단한데, 그 현장에서 "나는 어디에 가고 싶습니다" 라는 것을 철회하면 된다는 말이죠.
철회한다는 것은 주님께 맡긴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주님께 맡긴 상태를 두고 '천국'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로마서에서는 그것을 '믿음'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의 의사가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기 의사는 자기 인생에서 빼버리는 것인데,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버린다는 말이죠.
* 나는 모른다 !!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그 근처에 베드로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먼저 베드로를 보고서 뭐라고 합니까? "당신도 저기 잡혀있는 자와 같은 편이지?"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모른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진실인데, 즉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이죠.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있었지만, 주님께선 베드로가 "나는 모른다" 라고 하는 말이 튀어나오도록, 그런 상황으로 밀어붙였다는 겁니다. 자기가 안다고 하면 베드로는 구원받지 못하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어디로 몰려야 하는고 하니, "나는 예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라고,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도록 주님이 유도하셨다는 것이죠.
(마 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평소에 모든 것을 자기가 판단해서 결정하는데, 그렇게 자기 판단으로 결정을 하면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나는 안다" 라는 것인데, 자기가 일일이 따지고 따져서, 즉 자기가 믿을 만해서 믿게 되면 그것은 행함이 되는데, 믿음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말이죠.
자기가 따져서 "이것은 괜찮구나. 나의 장래를 보장해주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놓치면 안 되지" 라고 해서 결정하게 되면, 그것을 두고 천국이 아닌 '지옥'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면서 의심을 한번 해봐야 하는데, "내가 반대로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또한 그렇게 반대로 하는 것을 자기가 싫어하지 않는 것은 아니냐는 겁니다.
* 당신은 실속을 챙겼습니까?
방금 이야기한 이런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여기에 복음을 듣기 위해서 왔다가 간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 분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저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는 겁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당신은 실속을 챙겼습니까?"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실속을 챙기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데, 그러니 그들은 복음을 들으면서 자기 실속을 더 이상 챙길 것이 없다고 여기고 떠났다는 겁니다. 복음을 듣고서 그렇게 나왔다는 말이죠. 그들을 공통점은 다음 하나인데, 즉 "나는 실속을 챙기는 일이 아니라면 절대로 가담하지를 않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누구를 위한 실속입니까?" 라는 것인데, 과연 누구를 위한 실속이냐는 말이죠. 바꾸어 말하면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삽니까?" 라는 것인데,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라고 할 때는 반드시 자기 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나를 잊어버린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과연 복음을 떠날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복음을 떠난 사람은, "여기에 내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살펴서 결정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해석은 항상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성경공부를 하려고 온 사람의 실속을, 또한 자기 실속을 채워주면 안 된다는 겁니다.
* 자기 실속 챙기기 !!
그렇게 해서 아무리 감추고 감추려고 해도, "인간은 끝까지 나를 위해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이 폭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데, 거지 나사로는 어디에 갔습니까? 낙원에 갔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양쪽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가 왜 지옥에 갔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지옥에 간 부자의 태도를 보게 되면, "이런 자는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자기 실속 챙기기' 라는 겁니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눅 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 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 16: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교회를 아담하게 지어놓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을 때, 그러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 어떠할까요?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실속을 얼마나 챙겼습니까?" 라고 물어보았을 때, "나는 내 실속을 챙기기 위해서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자들이 과연 몇 명이냐 있겠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했는데, 그야말로 생뚱맞게 예수님이 저주를 해버렸다는 말이죠. 아직은 열매를 맺을 때도 아닌데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왜냐하면 아직 열매를 맺을 때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죠.
*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 저주를 하니 그만 무화과나무가 비쩍 말라서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있는 제자들은 공포스러웠다는 말이죠. 주님이 하시는 일의 원칙에 대해서 전혀 간파를 하지 못하니, 거기에 대해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마 21: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그러면 여러분은 간파가 됩니까? 주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느냐는 말이죠. 어제 주일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최초의 시간과 최후의 시간이 찾아오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께 사로잡힘 바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너는 저주를 받아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까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에 의해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까지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알고 있는 때와 예수님의 때가 다른데, 주님이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이 최후의 때라는 것을 제자들은 몰랐다는 것이죠.
* 주님의 말씀선포가 곧 천국이 침노하는 순간 !!
그러니 주님의 말씀선포 그 자체가 곧 천국이 침노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했는데, 즉 "내가 아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최후의 순간이다. 바로 그 최후의 심판주가 이제 오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맞아들였다" 라고 하는 것은, "복음은 없는 이 세상에서 그것은 재앙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의 마지막 날에 부어질 재앙을 마땅히 받겠습니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이어야 하는데, 그게 교회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선악체계에 무장이 되어있는데, 하지만 주님의 심판은 선악체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데, 그러니 "하나님, 제가 바르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았습니다" 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다 신을 섬기는데, 그리고 그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현상적으로 나타날 때는 신은 보이지 않으니, 인간들끼리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충성을 하든 말든 그것은 모르겠고, 내가 보낸 자, 내 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아들 자리, 즉 주님 자리에 교회를 집어넣으면 안 되는데, 자기 가정을 집어넣지 말라는 겁니다. 그 자리에 "나는 착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라는 것을 집어넣지 말라는 것이죠. 그것을 빼야하는데, 그것이 자기 부정인데, 자기를 제외시키고, "그 자리에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
왜냐하면 최후의 주님 앞에서 우리는 솔로몬처럼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라고, 그리고 베드로처럼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는,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붙잡혀있고 베드로는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행여나 자기 인생이 꼬일까 싶어서, 자기 인생이 종칠까 싶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는 실속을 챙기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그만 예수님을 안다고 설치다가 감옥이라도 가게 되면, 자기 실속을 전혀 챙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베드로가 자기 실속을 챙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저 사람은 모른다" 라는 것인데, 더 나아가서는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실속 챙기기, 그 경우라도 이것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챙길 것은 다 챙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물어보겠는데, "이것은 누구와 누구의 전쟁인가?" 라는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제가 다음과 같은 보기를 드렸는데, "(1) 하나님 VS 악마, (2) 하나님 VS 사람, (3) 사람 VS 사람" 이라고 말이죠.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과 악마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 예수님 VS 모든 것 !!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닌 악마의 대리자로서,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악마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은 홀로 계시고,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과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경우에는 '850 VS 1'로 붙었다는 말이죠. 조윤성이란 배우는 고등학교 때 17대 1로 붙었다고 하는데, 물론 영화에서 말이죠(ㅋㅋ).
그런데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 한 분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어떻다는 겁니까? 심지어 베드로도 저쪽에 가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교재 111페이지에서 '요한계시록에서의 주의 전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고, 주님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홀로 하시는 전쟁인데, 그게 요한계시록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 홀로 계신다고 하면, 그렇다면 천국은 텅텅 비어있고 아무도 가지 못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홀로 전쟁을 했기 때문에, "여기는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라고 하면서 천국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 천국에는 예수님이 혼자 계시느냐는 겁니다.
* 성도는, 주님 혼자만의 전리품 !!
그렇다고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에 가는 사람이 없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분명히 144,000명이 나온다는 말이죠. 많은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을 따르는데, 그들은 다 어디서 나왔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문제라는 말이죠.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천국백성은, 주님 혼자만의 전리품이라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14장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자기의 사병 318명을 데리고 가서 자기 동맹군들과 함께 다섯 부족을 이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붙잡혀간 자기 조카인 롯을 구해왔는데, 그리고 많은 전리품도 가지고 왔다는 겁니다.
*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 !!
그런데 그때 누가 마중을 나오는고 하니, 살렘 왕이 나온다는 말이죠. 현상적으로 보면 어떤 토지를 가지고 있는 지역의 왕인데, 살렘이니 이게 나중에는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왕의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란 말이죠.
(창 14: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왕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그러면 제사장은 무엇인고 하니, 그 전쟁의 승리를 하기 위한 희생을 담당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의 희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고 하니, 제사장은 죽음을 다루는데, 그렇게 죽음을 다루어서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이루어내는 것, 그것이 제사장이 하는 작업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어린양을 바쳤던 자로 하여금 더 이상 죄로 인한 죽음이 남아있지 않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제사장이 하는 역할이라는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로 인한 죽음이 없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 여러분이 초등학교 학생이라면 제가 다음과 같이 묻고 싶은데, "여러분은 우리 제사장이 좋아요? 싫어요?" 라고 말이죠(ㅋㅋ). 그러면 아이들은 "우리 제사장이 좋아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니 말이죠.
여러분에게 차마 그렇게 물을 수는 없고, 다음 질문으로 대체하겠는데, "제사장이 좋아요? 싫어요?" 라는 것은 똑같은데, 그러면 여러분은 "우리 제사장이 좋아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 다음의 질문이 기다리고 있는데, "여러분의 실속은 무엇입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여러분의 실속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곤란한 질문이죠? 제사장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그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싶다는 겁니다. 이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하면, "우리 예수님이 좋아요? 싫어요?" 라고 하면, "조금은 좋아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조금 좋은 것이 사랑인가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나를 대신했다고 하면 나도 주님을 대신하겠습니다. 내 몸을 주님 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은 대신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자기는 주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러면 주고받는 것이 전혀 균형이 맞지 않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이 '균형'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러면 이게 과연 균형에 관한 것이 맞는지 살펴보자는 말이죠. 41절에서 43절입니다.
(눅 7: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 감사함, 그게 동일할까요? 차이가 날까요?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 그리고 또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그런데 둘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서 곤란한 지경에 놓이게 되자 주인이 빚을 다 탕감을 해주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500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준 사람과, 50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준 사람의 고마움, 그게 과연 동일할까요? 차이가 날까요?" 라는 것인데,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이라는 말이죠.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그렇지요? 도저히 같을 수가 없는데, 바로 그 사이에서 전쟁을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그 뒤에 계속해서 나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47절에 보면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라고 하시고 나서,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라고 부정적으로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죠. 주님과 나머지 모든 인간들이 전쟁 중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탕감을 해주어도 안 된다는 말이죠.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렇게 주님의 전쟁의 주님의 전리품으로서, 주님의 전쟁의 노획물로서 획득이 되어서 나온 자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이고,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는 자들인데, 그러면 그런 자들로 산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만이 아니고 다른 성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예수님만이 살아야하는 천국에 같이 들어가게 된 자들이 도대체 어떤 자들이고, 또한 그러한 자들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확인이 되느냐는 겁니다.
* 예수님의 안목, 곧 성령의 인치심 !!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세상이 달린 보인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보는 안목으로 이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안목, 그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성령의 인치심'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안목이 곧 성령인데, 왜냐하면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은 이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자기의 실속을 챙기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의 실속을 챙기는 식으로,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고, 이 세상이 진행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성령을 받기 전의 사고방식은?
이렇게 달리 보인다고 하면, 그러면 성령을 받기 이전의 사고방식과 성령을 받고 난 이후의 사고방식이 차이가 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첫째로 성령을 받기 전의 사고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내 인생에서 주님의 지시를 따르겠다" 라고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실속을 챙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챙길 것은 챙기겠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 그것은 이 '나' 라는 것이 있는 이상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회의 모든 분쟁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내가 이 교회에 얼마나 충성을 다하고 돈을 바쳤는데?"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 국수그릇 치우기 !!
강의를 시작하기 이전에 권사님이 여기에 놓인 국수그릇을 치우셨는데, 그것을 보면서 제가 잠시동안 무슨 생각에 잠겼는고 하니, 우리교회의 초창기 때 권사님이 모든 교회의 살림을 혼자서 다 감당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권사님을 떨어질 경우를 전혀 대비하지 않고 너무 높이 띄우고 있습니까? (ㅋㅋ)
권사님이 국수그릇을 치우는 것은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과거부터 그렇게 해오던 것이 몸에 배여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릇을 치우면서 "내 평생에 주님의 지시를 따라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교회봉사를 했는데, 그러면 자기 의가 챙겨진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 성령을 받고 난 이후의 사고방식은?
그러니 이것은 탈락인데,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지시로 인해서 나의 수명이 연장된다" 라는 것인데, 이게 성령을 받은 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삶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내 인생에서 주님에게 무엇을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도행전 17장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내가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뭔가 꿍꿍이 속셈이 따로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주님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것은 오늘도 주님의 지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목숨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창세기 14장의 제사장 직분이라는 겁니다.
* 이미 주인이 확정된 상태 !!
그러니 "국수그릇을 치워라" 라고 하는 주님의 지시로 인해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시킨 분이 주인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이미 주인이 확정된 입장에서,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기는 주인일 수 없는데, 자기는 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일을 그만 하고 나에게도 와라" 라고 하든 말든 그것은 누구의 소관인고 하니,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참 중요한데, 우리가 이것을 혼돈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살았으니 주님께 충성할게요" 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인간이고, 그러니 그게 아니고, 주님의 지시가 있어서, 즉 뭔가 할 일이 있어서 계속해서 지금 수명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인생이라는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실속을 챙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나'가 아니고 주님께 포함된 '나' 라는 말이죠. 그런데 '나' 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주님의 지시를 받는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종교생활이지 성령을 받은 자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죠.
* 나는 아닙니다 !!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달리 봐야하는데, "아하, 주님의 지시가 있구나" 라는 겁니다. 손자를 돌보는 것도 주님의 지시일 수 있는데, "어디 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손자라도 키워야지"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나는 선생이 아닙니다. 나는 가장이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나는 아닙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데, 8절에서 10절입니다.
(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 자기 실속의 포기하지 않는 인간들 !!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이 먼저 있고 내가 있고" 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그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가 있는 것이지, 자기 실속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고 메시야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복음인데, 그런데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떠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 어떤 경우라도 나의 실속을 포기할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 주인됨, 자기 우선권을 포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말을 더 이상 듣기 싫습니다" 라고 하면서 떠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아부를 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사람들을 붕붕 띄워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평소에도 자기가 돗대가 되어서 잘난 척을 하는데, 교회에서도 그렇게 해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목사님, 고마워요.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교회에 나와서 가정이 잘 되고 자식들이 잘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실속을 챙겼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 전쟁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서, 또한 교회에서 왜 다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는데, 사도바울의 편지에도 보면 "다투지 말라" 라고 얼마나 많이 이야기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하면서 육의 열매부터 먼저 하는데, 거기에 다툼이 들어간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지 않는 것의 열매가 다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 전체가 몽땅 전쟁터인데, 유일한 왕이시고 제사장이신 주님의 공로와, 그리고 죽어도 자기 공로를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인데, 물론 인간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가 그렇게 부추겼다는 말이죠.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주의 전쟁' 이라는 겁니다.
* 내어버려두사 !!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주님의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지를 알아보겠는데, 즉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방식을 알아보자는 말이죠. 주님께서 악마와 그 졸개들에게 사용하시는 필살기, 그런 무기가 있는데, 그게 바로 6글자로 '내어버려두사' 라는 겁니다.
징계라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적에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을 세상적으로 표현하면, "등을 돌리고 가도록 방치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1장 24절에 나오는데, 즉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주님의 전쟁방식이 '내어버려두사' 라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도가 불신자와 싸울 때의 방법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도 역시 '내어버려두는' 것이라는 말이죠. 등을 돌리고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것을 용납함으로서 성도에게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찾아오게 된다는 겁니다.
*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 !!
무슨 말인고 하면, 복음에 대해서 자기 실속을 차릴 수가 없다고 하면서 등을 돌리면서 가는 자들의 마음가짐과, 그리고 우리의 마음가짐이 과연 다를까요? 같을까요?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우리를 저들처럼 저렇게 등을 돌리고 가도록, 즉 십자가를 외면하도록 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850명이 아니라 한 명의 엘리야를 뽑듯이, 마치 아브라함 한 명을 뽑듯이,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태어나도 전에 말이죠. 우리도 등짝을 돌리고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돌아가는 우리의 등짝을 잡아당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복권당첨인데, 즉 "1등, 45억입니다" 라고 하고 있는데,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말할 수 없는 기쁨이고 희열이라는 겁니다. "내가 저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저 사람을 따라가야 합니다. 나도 나의 실속을 챙기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데, 주님은 "네버, 안 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복이 많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내어버려둔 자들과 같이 가지 아니하고, "너는 이쪽이야" 라고 하는 그 놀라운 선택적 사랑에 대해서, 그것을 '탕감을 많은 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용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되 많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 아하, 사랑이구나 !!
그러면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는 말씀, 그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의 유일한 기준임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하, 사랑이구나. 교회에서의 충성과 봉사, 그런 행함이 아닌 오직 사랑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런데 그 사랑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고, "나의 죄를 처리해주신 분이 따로 있구나" 라고 하는 감각,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에게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창세 전에 영생을 얻기로 작정이 된 자들에게만 용서가 주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등을 돌리고 가는 자들을 따라가고 싶은데, 그것을 주님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는 이쪽이야" 라고 하면서 주님이 잡아당긴다는 말이죠. 우리가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귀를 잡아당기는데, 그러면 우리는 좀 아프다는 겁니다. 주님이 강제로 구인조치를 해버리는데, 그러면 우리는 "아야!" 라고 하면서 비명을 지른다는 말이죠.
* 주님의 자기 숙제 !!
그때는 주님이 질질 끌고 가시는데, 왜냐하면 그게 주님의 자기 숙제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숙제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죠. 즉 "네가 구원되는 것이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숙제이니까, 좀 고통스러워도 참아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가는 쪽을 예수님은 '넓은 길' 이라고 하시는데, 반면에 강제로 견인이 되는 쪽은 '좁은 길' 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을까요?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을까요? 전혀 어렵지 않은 문제인데, 당연히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라고 하시면서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좁은 문으로, 즉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찾는 이가 적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쪽은 거의 없다는 것이죠.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러면 주님에게 질질 끌려가는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등을 돌리고 가는 자들은 여전히 자기 실속을 챙기는 자들인데, 물론 이쪽도 실속을 챙기기는 챙기는데, 그런데 그럴 때마다 주님에게 얻어터진다는 겁니다. 그게 천국에 가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 부르르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우리는 알곡이기 때문에, 이제 남아있는 것은 우리의 쭉정이 됨을 털어내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치 물에 젖은 개가 온 몸을 부르르 털 듯이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을 '부르르' 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털면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선악체제, 즉 윤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우리가 원한 게 아니고 악마가 뒤집어씌운 것인데, 즉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 식이라는 말이죠. 물에 빠진 개를 보면 참 불쌍한데, 그렇게 선악체제가 우리를 뒤덮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남들에게 흠을 집히지 않고 욕을 듣지 않으면서 살란다" 라고 하는 윤리와 도덕, 그게 우리의 온 몸을 감싸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매사에 "나는 정당해. 나는 오늘도 착하게 살았어" 라고 하는데, 그런 정신상태로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오늘도 내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그것을 나의 라이벌인 김 집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런데 복음을 알면 어떻게 됩니까? '부르르'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는 쭉정이다" 라고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알곡이 되었으니 마음껏 까불어도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털려 나오는 것은, 자기 위신, 대단함, 완벽함, 철저함 등등, 그런 것들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나의 인생을 잘 살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내어버려두사', 그것은 방향성 !!
이 '내어버려두사' 라는 것에 굉장히 어려운 대목이 있는데, 일일이 설명하면 더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진도를 빼겠는데, 이 '내어버려두사' 라는 것은 방향성이라는 말이죠. 즉 "너는 저쪽이다" 라는 것인데, 바꾸어서 말하면, "나는 너희들과 가는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가겠다" 라는 겁니다.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렇게 해서 주님이 가신 쪽이 곧 천국인데, 주님이 반대편으로 갔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곧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이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가고, 주님은 그 반대편으로 가신다는 말이죠.
넓은 길의 반대편이 좁은 길인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이런 식이란 겁니다. 인간들이 가는 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가신다는 말이죠. 심지어 제자들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반대편에 도착해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강제구인을 하신다는 것이죠. 인간들과는 반대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21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가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성령을 받은 자들의 일상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죠. 치과에도 가야하고, 한의원에도 가야한다는 겁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주님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가 실속을 챙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즉 "네 인생은 없다. 모든 것이 내 인생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에, 우리의 이마와 코와 입에 다 빨간딱지를 붙여놓았다는 겁니다.
이 빨간딱지가 무엇입니까? 국세청이 직원을 보낸 것이 아니고(ㅋㅋ), 주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압류를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소유권이 그만 넘어가고 말았는데, 즉 이제는 우리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치심' 인데, 즉 반대편으로 넘어갔다는 말이죠.
* 인간은, 짐승 이하 !!
지금 제가 어려워서 주저주저하고 있는데, 그래도 진도를 나갈 수밖에는 없는데, 그 반대편에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인자(人子)'가 있는데, 이 인자는 사람의 아들인데, 즉 반대편에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죠. 주님 쪽에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사람의 반대말은 짐승인데, 그렇지요? 그러니 주님께선 이 세상을, 즉 인간들은 짐승 이하로 보시는데, 이런 주님의 안목이 너무나도 어렵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인간을 짐승 이하로 보시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법이 유효할 경우에만, 그래야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을 틈으로 여기고, 그 틈 사이로 틀어온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뱀이라는 짐승이라는 말이죠.
여기 교재 112페이지에 보면, 요한계시록 12장 13절에서 17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첫 단어가 '용' 이라는 겁니다. 이 용이 바로 '옛 뱀' 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을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짐승이라는 겁니다.
(계 12: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계 12: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계 12: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계 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교황, 푸틴, 바이든 !!
그리고 교재 113페이지에 요한계시록 13장 1절 이하의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 1절에 보면,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라고 하는데,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짐승이 나오는 게 아니라, 국가 권력자가 나온다는 말이죠. 교황이 나오고 푸틴이 나오고 바이든이 나오고 한다는 것이죠.
(계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계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누가 봐도 사람인데, 물론 푸틴이 불곰이라는 별명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2절에 보면,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과 같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전부 다 짐승에 대한 묘사라는 겁니다.
* 용, 짐승, 인간 !!
그리고 그 뒤에 보면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라고 하는데, 그러니 여기에는 계급이 있는데, 즉 짐승 위에는 용이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인간들은 이 짐승에게 경배하고, 또한 용에게 경배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경배를 하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소위 자기를 인간이라고 여겼던 자들은 짐승과 용에게 경배를 하는데,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을 누가 가로챘는고 하니, 뱀이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물론 뱀에게 유혹을 받은 인간이 그렇게 했지만, 주도권은 뱀에게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뱀은 마약 제조자이고 인간은 그 운반책이라는 말이죠. 물론 둘 다 나쁜데, 하지만 여기서 주범은 제조자라는 겁니다. 다시 하겠는데, 여기서 마약 제조자는 용이고, 운반책은 국가권력이고, 그리고 그것을 흡입하는 자는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것을 계속해서 누구로부터 적용을 받고 있는고 하니, 이 세상의 권력자에게 적용을 받고 있는데, 그런데 그 권력자 위에는 용이, 즉 보이지 않는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악마는 계속해서 인간을 그런 식으로 옭아매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무기는 '내어버려두사'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내어버두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기 몸을 욕되게 하고, 그 완성이 곧 지옥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이죠. 완전자동인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면 그냥 지옥행이라는 겁니다. 지옥에 가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은데, 그냥 살면 된다는 것이죠. 자기 실속을 챙기면서 말이죠.
지금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살펴보고 있으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렇지 않으면 뉴스를 보면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사람으로 보기 때문인데, 하지만 성경은 짐승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말이죠.
* 인간의 조건, '언약 안에서' !!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목사님, 모든 인간이 다 짐승이라는 겁니까?" 라고 하면서 삐치지 싶은데, 그런 사람이 분명히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구약 이스라엘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약 안에서' 라는 것인데, 그래야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구약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노아홍수 때 짐승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다 죽었다는 말이죠. 아니 죄를 지은 것은 사람이고, 그래서 사람만 죽이면 되는데, 그런데 짐승은 왜 죽이는 겁니까? 그것은 곧 짐승과 인간이 한 통속임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하나의 운명체라는 것이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여기에 건방지게 피조물인 뱀이 개입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피조물의 대표자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빠지고 뱀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 여자의 후손 VS 뱀의 후손
그러면 이 전쟁에서 있어서 하나님 쪽에서의 대표자는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인간 쪽에는 없는 존재인데, 즉 '여자의 후손' 이라는 겁니다. 후손이라는 것은 남자가 있어야만 생기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쪽에서는 인간은 빠지고 뱀의 후손이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뱀이 인간을 대표하게 된다는 것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언약 속을 살펴보면, 인간을 잡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잡습니까? 어린양을 잡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인데, 즉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로 바치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을 태워서 구원받는 방법은 없기 때문인데, 그래서 인간을 대신해서 짐승인 어린양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렇게 짐승인 어린양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인간은 이미 뱀이라는 짐승에게 예속된 상태임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물론 제가 아무리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지금 여러분이 믿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ㅋㅋ), 그렇지요? 여기서 출애굽기 33장을 보겠는데, 19절에서 23절입니다.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출 33: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출 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 산 채로 내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아까 좁은 길을 이야기할 때 이미 했다는 겁니다. 자기는 아무리 등을 돌리고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데, 창세 전에 은혜를 주기로 된 자들, 즉 긍휼을 베풀어주기로 된 자들은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작업을 어떻게 이루시는고 하니,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시면서도, 그 자기 백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과 자기 백성 사이에 죽음이라는 막을 깔아버리는데, 즉 "산 채로 내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 모세의 중보자 기능 !!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됩니까? 모세는 언약 속에 있는데, 즉 언약 속에 있을 때만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다루어지는데, 그래서 인간의 조건은 언약 속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람으로 다루어질 때, 그것은 중보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보자'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원래 이런 상태였는데, 그런데 언약이 투입된 이후에는 저렇게 달라졌다" 라고 하는, 그렇게 양쪽 면을 다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라고 하시는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로 모세를 덮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즉 하나님을 만나면 살아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보기는 보아도 만남이 없어 !!
오늘날 현대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과거에도 그러했는데, 보기는 보아도 만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즉 알기는 알지만 만남은 없다는 겁니다. 억지 만남의 관계에 있는 것이 가정인데, 그래서 아이들을 키워보면 어릴 때는 그냥 있지만 크면 밖으로 튀어나갈 생각만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서로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기를 하지만, 만남의 관계는 아니라는 겁니다. 갈수록 그러한데, 그래서 지금은 동거는 하지만 결혼은 잘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친구라고 하는데, 과연 친구가 있느냐는 겁니다. 아는 사이는 맞는데, 하지만 만나고 싶은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신처럼 되어서 그러한데, 즉 악마에 의해서 그렇게 길들여졌다는 겁니다. 악마가 최고인데, 악마가 "신처럼 되리라" 라고 하는 것은, "네가 나 악마처럼 될 수 있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악마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은 다 거부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나는 나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악마는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그런 낮짝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는데, 죽음을 넘어서야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이죠.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하나님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모세 !!
그래서 여기 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의 뒷모습만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은 무엇일까요? 언약은 우리에게 죽음을 유발시키는, 그런 사건의 근거가 되는 것이 언약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모세야, 너도 죽고 다 죽어야 한다. 짐승과 같은 너는 들어오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언약에는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흘 뒤에 부활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부활이 되면, 이제 과거의 자기 몸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몸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이 있는데, 그런데 다시 살게 되면 자기 몸이 죽은 몸이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는 행세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 하게 되는데, 그래서 로마서 10장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지체가 머리가 되신 분을 부른다는 말이죠.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요나서를 보겠는데, 3장 7절과 8절입니다.
(욘 3: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욘 3: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 짐승들도 같이 회개를 !!
삐쳐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요나인데, 그런 요나의 말을 니느웨 왕이 듣고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키우던 짐승들에게도 그렇게 동일하게 실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짐승들도 졸지에 금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짐승을 같은 운명체로 보신다는 겁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짐승의 일부로서 보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노아홍수 때 짐승도 모두 다 죽었고, 그리고 여기 요나서에도 왕과 백성들과 짐승들이 더불어서 같이 회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니느웨 왕이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은데, 그렇지요? 자기들끼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들은 짐승들과 동일한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짐승들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도 일체 사료를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레위기 11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레 11: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레 1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레 11: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레 11: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 이스라엘의 음식 !!
여기 3절과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라고 하시는데, 그런 먹을 수 있는 조건이 어떻다는 겁니까?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하는 것은 먹을 수 있는데, 둘 중에 하나라도 해당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게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그러면 음식이란 무엇입니까? 먹으면 자기와 하나가 되는 것인데, 즉 일체감을 가지는 것이 음식이라는 겁니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한다는 것은 구별이 된다는 것인데, 즉 거룩이라는 말이죠. 갈라짐이 곧 거룩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애굽과 갈라졌다고 하는 표징을 음식을 통해서, 그것을 이스라엘 속에 새기는 방법을 율법을 통해서 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음식이 짐승인데, 식물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갈라짐이고 새김질이라는 말이죠. 인간이 생존하는 방식에 근접한 것이 짐승인데, 특히 가축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 언약작전 !!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짐승의 아류로 보셔서, 그 짐승들을 언약과 함께, 즉 어린양의 죽음과 함께, 그러니 이미 죽은 것인데, 그렇게 죽고 나서, 그 다음에 "너희가 율법을 지킬 경우에는 생명을 주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살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작전' 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이 택한 백성들의 경우에는 언약작전이고, 반면에 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언약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내어버려두사' 라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이야기를 하면, "그들에게는 복음이 들리지 않도록 하셨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들에게 복음을 주지 않은 게 아니라,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지옥에 가게 하시는 전쟁,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는 전쟁, 그렇게 방치하시는 전쟁, 반면에 성도에게는 강제로 깨닫게 하시는 전쟁,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주의 전쟁' 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자신을 멋지고 근사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람으로 행세하면 할수록 십자가와는 멀어지고 복음을 배척하는 속성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셔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자기가 사람인냥 으스대는 자세를 부정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6,3 오전 11시에 마침.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옥29_1에서 0으로 (0) | 2023.07.03 |
---|---|
지옥하나님28-녹 벗겨내기 (0) | 2023.06.20 |
지옥하나님26-사라지는 인생 (0) | 2023.05.22 |
지옥하나님25-언어의 연출 (1) | 2023.05.08 |
지옥하나님24-비극과 공포의 차이 (1) | 2023.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