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말세 유발자

아빠와 함께 2023. 5. 28. 22:03

말세 유발자 

2023년 5월 28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3:1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마지막 때라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흘러나온 끝자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없다면 말세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타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결국에는 마지막 벽에 부딪혀서 다 부셔져 버렸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만 ‘끝’이라는 것이 알려졌음을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멸망 이후에 이 이스라엘의 끝은 곧 온 우주의 끝으로 확대됩니다. 이런 사태에는 이스라엘 안에 동행하신 하나님의 고통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픔으로 인해 모든 인간들이 다 고통 속으로 덮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하나님을 그들이 박해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 즉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박해하는 방식이 아니면 만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 원인을 먼저 접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박해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은 시내산 밑으로 오게하셨습니다. 모세는 산 위에 언약을 받으려하고 산 아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산 밑에 단체로 모인 자들이 이해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가 제 모습이 나옵니다,

즉 언약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이해하는 여호와는 어떤 여호와일까요? 출애굽기 32:24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라고 아론이 대변자로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된 여호와께서 작용하셔서 가짜 여호와를 끄집어내시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게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온 언약의 기능입니다. 언약은 말세를 유발합니다. 이 역할을 담당한 자들이 레위지파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7-29) 사시기 19장에도 레위지파에 속한 레위이;ㄴ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곧장 내란에 들어간 대목이 나옵니다.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삿 19:29) 고통없이 맞이하는 말세는 없습니다. 이 레위지파의 언약은 예수님 시대에서 완성이 됩니다. 인간은 주변에서 무슨 사태가 일어나면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의 성격을 담아 이해합니다.

즉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인간은 ‘자기 의’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의’에 중독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자기 의가 마약이 되어 자신을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 의라는 것은 곧 자신의 노동하고 애쓴 값을 본인이 포기 못하겠다는 성신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본래적 자리를 모릅니다. 이미 범죄한 이후의 기억만 갖습니다. 인간의 본래적 자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엡 2:3) 그런데 인간들은 이점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들이 미래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태를 이 진노 상태로 만들어 두십니다. 마치 차를 몰다가 다리 교각에 부딪히는 상황이 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만난 다리 교각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에 부딪혀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을 유감없이 드러내었습니다. 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 유발자에 불과함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할 모든 과업을 완성시켰습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일을 위하여 사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8-29)

즉 예수님께서 피값으로 자기 백성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주장하는 자기 자신의 수고와 노동의 값을 무산시키시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피값으로 주의 것이 된 자들은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야 되는데 그 영광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피값’을 ‘피값답게’ 유지하는 일입니다.

곧 피의 전달자, 혹은 포도나무의 가지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미래, 곧 위에서부터 아래로 하강하시듯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으나 이 땅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에게 복종하시고 마지막 가신 자리가 곧 ‘본질상 진노의 자리’입니다. 인간들이 이 십자가 자리가 자신의 본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성도는 “다 이루었음”에 고개숙여 굴복하는 삶이 됩니다. 즉 성도는, 십자가로부터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돌아가는 그 노선과 절차에 합류된 자를 말합니다. 성도는, 자기 의의 수고는 이제 물건너간 것을 후련하게 여깁니다. 남은 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손을 대어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의’라는 노폐물을 폭로시키는 일입니다.

노아의 방주 시절의 끝부분에 노아는 방주 밖으로 비둘기를 날려 보낸 적이 있습니다. 노아의 눈에는 사방이 물천지였습니다. 하지만 비둘기 입에는 감람나무 잎새가 물려 있었습니다. 노아가 모르는 가운데 이미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해 두셨던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비둘기 같은 기능으로 인해 성도는 미래의 구원받은 자로서 감람나무가 됩니다. 이미 생명을 얻은 자로서 죄의 육신을 통해서 거짓된 하나님, 거짓된 의, 거짓된 자아가 매일 튀어나와야 합니다. 마치 치약을 밑에서 눌러 내용이 튀어나오듯이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자되시는 주님에게 참된 인간이 나오듯이 죄된 몸에서 참된 주님의 몸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디모데후서 3장 1절(말세유발자)2305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말세는 이스라엘의 끝자락, 이스라엘 역사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거든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벽에 부딪힌 거예요. 이스라엘에 예언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생긴 것이 이 말세, 마지막 때라면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는 이 마지막 벽이 온 이 지구상에 다 그대로 확산됩니다. 확대되게 되어 있어요.

마치 차를 운전하다가 다리 교각에 박았다, 차에서 내려서 다리 교각 보고 따지고, “우리 보험 처리 하자.” 이렇게 할 수 없잖아요? 무생물이거든요. 차가 벽에 부딪힌 거예요. 마찬가지로 인류는 지금 이 교각같이 말이 통하지 않는 마지막 벽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습니다.

처박기 위해서 그냥 달려가는 거예요. 마치 옛날 이스라엘이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그냥 달려갔더니만 나중에 완전히 박살 나고, 멸망했습니다. 그 말씀의 구조, 이스라엘을 형성했던 그 구조가 그대로 지금 온 인류에 적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는가?’ 이 말은 ’누가 이 인류를 망하게 하는가?’와 같은 말이 됩니다. 여기 1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 말세, 그때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고통하는 때”라고 되어 있어요.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마지막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들의 본색이 다 드러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때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박해당한 주님의 몸이 받는 그 고통이 온 우주에 파급이 될 때 이게 바로 말세에 당하는 고통이 됩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찾아왔던 주님의 그 아픔이 온 우주까지 이렇게 확산이 되게 되면 그 예수님의 몸을 학대했던 그들은 지옥에 가게 되죠.

이것은 뭐냐면, 예수님 몸 자체가 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죄의 몸의 결과가 지옥이 되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된 몸이 되면 그 몸이 가는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오늘 이 “네가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할 때 누가 말세를 의도적으로 일으켰는가를 조사해 보면 모든 것의 내막이 다 드러나겠죠.

인간세계에서는 말세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자연이 옛날부터 있는 것처럼 그냥 영원토록 가는 거예요. 마지막 때, 파탄 지점, 파탄지경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 속에만 담겨 있는 거예요. 다른 나라는 그냥 가는 대로 갈 뿐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만남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율법을 집어넣음으로써 이스라엘 역사에 파탄을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집어넣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본색을 가지고 율법을 맞이해서 지키려고 하면서 여기서 벌어진 괴리 상태가 있는데,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맞지 않는다는 그 괴리 상태가 하나님의 고통으로 이어졌고, 그 고통이 어린양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결국 이스라엘은 함께 하신 하나님에게 아픔을 줌으로써 그 아픔을 되받아와서 자기는 그냥 다리 교각에 부딪히게 되는 거예요. 부딪힌 거예요.

네가 박해하지 말아야 할 자를 박해했다는 거예요. 이건 뭐 안 찾아봐도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사울, 사도행전 9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절) 박해하느냐? 주님의 다가섬은 이렇게 네가 나를 박해한다는 식으로 다가서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죠. 자기도 모르게 그냥 신나게 차 운전하고 있는데 교각과 박아버렸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인과 싸워온 것이 아니고 주님과 싸워왔다는 거예요. ‘왜 우리가 평소에 주님과 싸운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느냐면, 자기 의가 마중 나와서 해석하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현재 속해있는 원칙 가지고 주어진 상태와 사태를 해석하게 되어있습니다.

관절약 그 광고 문구에 이런 게 있어요. ‘콘도르이친은 관절이 먼저 반응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어난 모든 사태에 대해서 자기 의가 먼저 반응하죠. 평소에 모든 사태에 대해서 내 의가 반응한다는 것은 현재 나는 내 의로 가득 찬 공간 속에, 영역 속에 거기 내가 놓여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그만 티가 나버린 거예요.

이 지독한 나의 의에 인간은 중독되어있는 겁니다. 나도 마찬가지고, 너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You, 당신, 나, I, 유아인. 모든 사람이 마약 중독자예요. 자기 의의 마약 중독자예요.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이 독한 자기의. 자기의 껴안고 지옥에나 가버려라.

인간은 몰라요. 율법을 줘야 하는데 그 율법을 줬던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세라는 것이 기다리면 오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율법 안에 들어계신 분이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말세는 가만히 있으면 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유발자가 있어요. 그 이스라엘 속에 유발자 역할을 하는 지파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특수한 체험을 합니다. 그 특수한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이 보통 인간의 시간 체험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에게 특수한 체험을 줍니다. 미래가 과거를 찾아오는 특수한 체험을 해요. 미래가 우리 현재에 미리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에 대해서 기억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인간이 기억하는 것은 과거니까.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미래를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무작정 ‘잘~ 될 거야.’ 하고 그냥 살아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체험은, 미래에 네가 부딪힐 다리 교각 같은것, 어찌할 수 없는 그 미래의 벽을 말씀을 통해서 먼저 주는 역할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시내산 밑으로 모이게 했어요.

지파별로 모였는데 이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없습니다. 단군의 민족에게는 허락한 적 없어요.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직접 하나님과 만나는 기회를 준 겁니다. 그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중에 모세를 자기 있는 산 위까지 끌어올리죠. 약 2000미터 된다는데, 거기에 올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산 밑에서 대기 상태에 있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모세에 대해 고마워해야 할 것이 뭐냐? 자기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과 독대해 미래 청사진을 다 받아오는 그 중요한 기간에, 그들은 금가락지를 내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때 그 우상 이름을 그들은 ‘여호와’라고 지었어요.

출애굽기 32장 24절을 보면, 나중에 산에서 모세가 와 화를 내서 돌판 깨고, 언약판 깨버리고 아론보고 물었죠. “아론아, 왜 그들이 여호와라는 우상을 섬겼느냐?”라고 물으니까 아론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내가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습니다. 이건 뭐냐면, 여호와 속에서 여호와가 나오는 거예요. 여호와 속에서 여호와가 나와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유권이 여호와한테 가 있어요. 여호와께서 나온 것은 뭐냐? 여호와라는 가짜 신, 우상이 나온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가 처음 본래 자리, 자기의 과거를 몰라요. 그러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본래 과거는 최후에 미래에서 비로소 자기의 처음 자리를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걸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준 거예요. 에베소서 2장 3절에 보면, 이 말을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단출하게, 짧게 함축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were by nature the children of wrath, even as others..” 하나님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평소 태도가 뭐냐면, 자기 의라는 마약에 중독돼있는 상태, 그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예요. ‘내가 뭐 죄인이냐?’ 이런 태도죠. ‘내가 인생 살 만큼 살았고 경험했는데 내가 경험한 어떤 경험을 수집해서 정리해도 내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는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나쁜 짓 한 건 인정하겠는데, 내가 실수한 건 인정하겠는데 본질상 오직 하나님의 진노만 유발할 그런 자라는 것은 내 해석에, 나 자신에 대한 인생 해석에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순간을 맞닥뜨려야 비로소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행스럽게 하나님께서 직접 율법을 맞이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믿는 여호와가 이게 본질상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기 의에 기반에서 나오는 여호와라는 것을 알려줬죠. 우리가 믿는 예수라는 것이 내 의가 구성한 예수, 예수 믿고 지옥 가게 만드는 그 예수, 그 십자가, 그 언약을 인간들은 본인이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본질상 진노 받을 짓만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우리의 본질상 계속해서 태어날 때부터 진노, 저주 속에서 태어나서 살아온 우리의 이력입니다. 우리의 이력서에요. 앞으로 여러분 취직할 때 이력서 쓸 때는 ‘누구십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거기다가 에베소서 2장 3절 딱 꽂아 넣으세요.

우리의 이력이에요. 우리가 놓쳐버린, 잊어버린 이력이에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고 하나님께 심판받는데 그 십자가에서 심판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미리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 죄의 몸은 다 같이 이런 처치를 받는다, 하나님께 이런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몸을 우리가 지니고 태어난 거예요. “생일 축하합니다~” 하는 노래 부르는 그 날에.

따라서 주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통해 몇 명을 죽이느냐면, 출애굽기 32장 28절에 보니까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3000명가량을 죽여 버렸어요. 이게 이스라엘 내부에 고통이 온 겁니다.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개역한글) 

29.  모세가 말하였다. "오늘 너희가 저마다 자녀와 형제자매를 희생시켜 너희 자신을 주께 드렸으니, 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표준새번역) 

Then Moses said, "You have been set apart to the LORD today, for you were against your own sons and brothers, and he has blessed you this day."(NIV)     

Then Moses said, "Dedicate yourselves today to the LORD-- for every man has been against his son and against his brother-- in order that He may bestow a blessing upon you today."(NASB)

그리고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로 하여금 헌신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이 또는 레위지파의 존재 자체가 말세 유발자예요. 그냥 조용히 살면 되는데 의도적으로 주께서는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고 너희는 그냥 시속 100km로, 거의 직통으로 처박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 레위 지파의 존재를 통해 알려줍니다.

세상에서 마지막 때라 한다면, 종교에서 뭐 사이비 종교에서 이단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말들 하지만 난 사이비, 이단 말 다 빼겠습니다, 그냥 교회에서, 그냥 종교에서,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마지막 때라 할 때는 사람은 도피처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도피처를 준 게 아니에요. 도피성을 준 거예요.

도피처는, 내가 살고자 환장해서 이리저리 도망하는 그 피신처가 도피처가 돼요.

도피성은 차이점이 뭐냐 하면, 내가 예상 못 한 낯선 추락의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부터 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도피성의 시작입니다.

도피성의 효과, 도피성의 영향력이 도피성 가기 전부터 우리에게 파급돼서 미치는 거예요. 우리에게 도달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도끼질하다가 그냥 본의 아니게 도끼가 날아가서 저 사람을 죽였을 때 졸지에 살인자가 된 거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죽은 자의 가족들이 복수하려고 달려들기 때문에.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도피처? 그런 데는 없습니다. 도피성으로 가야 돼요. 도피성으로 가게 되면 그 살인자, 고의가 없는 살인자가 된 그 사람은 예상 밖에 자신이 몰락하는 체험을 겪게 된 거예요, 예상 밖에. 억울하죠. 주님께서 미래에 구원될 자를 현재 어떤 식으로 체험을 하게 하느냐면, 예상 밖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인생살이를 살게 만들어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 합니다. 제가 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인생이 꼬이게 하십니까?” 몰락하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은 이것은 아니에요. 주께서 말세를 의도적으로 말씀으로 유발하게 되면, 그 말씀 속에서 미래에서 과거로, 우리가 몰랐던 과거로 몰아넣습니다.

과거로 몰아넣는다는 말은 세상을 한 곳으로 구겨 넣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워요. ‘네가 나왔던 곳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 자리에서 나왔어. 그러니까 네가 누리고 있는 이런 것은 다 포기하고 처음의 그 진노의 자리에 들어가야 돼.’ 그 처음 자리에 집어넣어니 우리는 뭐 고통스럽다, 아프다고 난리도 아니죠.

그 집어넣는 그것, 그것을 제가 시간순으로 과거에서 미래가 아니고, 미래에서 과거라 하지만 성경에 특히 요한복음 같은 데 보면 위에서 아래로 몰락입니다. 이 위에서 아래로의 몰락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코스에요. ‘그분은 하나님과 본체 하나였으나 주님께서는 십자가 죽기까지 몰락하셨느니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

추락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타락이라고 하죠. 타락했다, 추락했다, 몰락했다, 형편없이 되었다. 왜? 그게 네 본질이거든. 그게 처음 자리거든요. 주님께서는 그 처음 자리를 십자가 안에 마련하신 거예요.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가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예상 밖의 난처한 지경에, 그것도 난처한 정도 같으면 괜찮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남한테 억울하기 때문에 말로 표현이 안 돼요. 그 상황에서는 그냥 가슴만 칠뿐이죠. ‘아이고 답답해라. 아이고, 답답해라, 답답해라……’ 그냥 답답할 뿐이죠. ‘내 인생 왜 이렇게 됐지?’ 그냥 답답해요.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그냥 무너지는 거예요, 그냥.

그걸 방지해 본다고 착한 일도 해보고 뭐 해 보지만 주께서는 일체 허락하지 않습니다. 본의 아니게 미치광이까지 돼야 될 지경을 사무엘상 21장 13절에서 15절까지, 위대한 다윗이 그 짓까지 했어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수염을 적시면서, 침을 이렇게 삐져내면서 “영구 없다~” 해서 미친 척 해가지고 아기스 왕, 블레셋의 왕 앞에 사울 왕을 피해 도망쳐 살기위해 그 짓까지 하는 거예요.

사람이 정의롭게 살았는데 제일 억울한 게 이거에요. 정의롭게 했는데 불의한 자에게 살살 꿇어앉고 빌어야 하는 상태. 누구는 뭐 자존심 없습니까? 누구는 뭐 자기 의 없어요? 누구는 뭐 진리 모릅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 몰락시키느냐면, 우리가 아는 복음이라든지 지식, 진리, 바르게 사는 걸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드는 지경, 그게 바로 우리 본래 자리에 찾아가는 유일한 통로에요, 그게!

같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자기 아버지인지, 엄마인지가 판사라고 해서 지는 1등 해버리고 자기는 정식으로 성적 반영이 완전히 안 돼서 1등에서 누락 되었어요. 그래서 “너희 엄마 판사니까 빽 썼지?” 이렇게 하니까 둘이 싸웠잖아요. 싸워서 둘 다 경찰서에 와 있다, 이 말이죠. 엄마가 그 소리 듣고 “야야, 빌어라!” “내가 뭘 잘못했는데 빕니까?” “빌어라!” “엄마는 나쁜 엄마야!” 그 드라마 이름이 <나쁜 엄마>에요.

“네가 이 땅에서 나빠야 네가 그래도 살아남는 거야. 나빠야 살아남는 거야. 비굴해야 살아남는 거야.” 우리의 자기 의로서는 감당 안 됩니다. “더러워서! 이 더러운 세상” 욕하지요. 그게 바로 자기 의예요. 자기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을 모르고 자기가 의로운 자인 줄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알았던 이스라엘은 그 율법이 다른 나라와 자기 나라를 특화시켜서 자기 나라가 의롭고 거룩한 나라로 행세하기 때문에 우리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 민족을 지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연하게 그걸 받아드렸어요.

이건 몰락 아니죠. 추락 아니죠. 그래서 얼추 살만하니까, 자기가 자기의 수고와 자기의 노동의 값을 가지고 그만큼 하나님께 보상받았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그 미래와 관련돼서 중요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6장에 중요한 시점에서 남기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는 ‘나의 피를 마셔라. 나의 살을 먹으라.’ 하는 언약을 세우는 그 장면이고 그다음 장면에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포도나무에서 생산된 것이 뭐냐? 예수님의 억울한 피 값이에요, 피 값.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너는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다.’ 하거든요. 미래가 우리한테 미리 오게 되면 우리는 소유권이 날아가 버립니다. 소유권이 날아가고 뭔가 값을 주고 주께서 우리를 취득했어요.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말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뭐냐? 값을 값답게 지켜야 된다, 그것을 증거 해야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방해하는 게 뭐냐면, 나의 노동과 나의 수고와 나의 봉사의 값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포도나무에서 흘린 그 피 값을 누가 방해하고 훼방하느냐? 내가, 바르게 살고, 반듯하게 사는 내 노동, 내 복음적인 지식, 내 성실함, 이것이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의 영광을 빙자해서 자기의 영광을 취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전체 사고방식을 완전히 거덜 내게 만들었어요. 들통나게 만들었습니다. “바리새인 착해?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가는 거야. 하늘나라는 그렇게 가는 게 아니야. 바리새인? 그건 뱀의 자식이야. 망하는 건, 지옥 가는 것은 저렇게 망하는 거야.” 예수님께서 자체가, 자신이 말세 유발자예요. 말세를 만들어버립니다. 말세를 끄집어내 버려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만하니까 그들이 그다음부터는 십일조 내지도 않아요. 레위 지파는 토지가 없기때문에 동냥 얻듯이 십일조 얻어야 밥 먹고 사는데, 레위 지파가 이제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사사기 19장 29절에서 30절 보니까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 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레위 지파 사람의 첩이 윤간을 당해서 죽었어요. 죽으니까 화가 난 레위 지파 사람이 그걸 12토막으로 쪼개서 각 지파로 새벽특송으로 보내버려요. 무슨 팡? 새벽특송으로 다 보내버렸어요. 빠른 속도로 다 보냈습니다. 이래서 이스라엘 내란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나요. 레위 지파는 말세 유발자예요. 지금 끝장을 보자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살만하니까 이런 거예요. 말라기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레위 지파에 대해서 단호하게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너희들에게 레위 지파, 다시 말해서 말세 유발자가 계속해서 발생 되는 이 계약을 나는 너를 향해 취소할 의지가 없다.

끝까지 말세 유발자를 만들어 내겠다는 거예요. 그 레위 지파 계약에 따라서 오신 분이 바로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께서 그 잔과 그 떡을 떼면서 ‘이제는 지금 포도나무에 난 것을 하늘나라 올 때까지 마실 필요가 없다.’ 이 말은, 이 예수님의 피, 말세를 유발할 수 있는 피가 마지막에 너희들이 기어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임을 드러내는 이 작업에서 예수님의 피와 살이 양보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에요.

너희들은 이 피를 간직하고, 그걸 증거 하고, 그걸 계속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이제 신약에 있는 성도 자체가 레위 지파의 그 업무를 인수인계받은 마지막 때의 말세 유발자예요, 우리 성도가. 예수님 피가 있으니까요. 주님이 몰락했잖아요. 인간들이 모르는 인간들의 그 인간의 원래 자리에,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 자리에 하나님이 주신 예수님께서 그 하늘 영광 버리고 추락해서 그냥 떨어진 거예요.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시대에 그냥 자기 의에, 자기 노동에 값에 취해가지고 놀기 바빠요. ‘기아나’라는 나라에서 어느 생물학자가 조사를 해보니까 정글 안에 개미 집단에서 이상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은 개미들이 하나의 개미가 흘린 페로몬이라는 생체 호르몬을 따라서 그 앞에 개미 가는 뒤에 무작정 계속 따라가는 거예요.

개미는 페로몬이라는 것을 통해 협업하고 정보를 교환하거든요. 하나가 가니까 계속 따라가는데, 계속 뱅뱅 도는 거예요. 둘레를 재보니까 둘레가 370m, 제일 바깥쪽의 개미 한 마리가 도는데 시간 계산을 해보니까 2시간 30분. 언제까지 도나? 다 기진맥진해서 다 몰살할 때까지 돌아요. 뺑뺑이 도는 거예요.

하나가 내뿜는 그 유혹의 페로몬에 의해서 모조리 뺑뺑 돌면서 다 같이 몰살하는 거예요. 인간 세상입니다. 인간 세상이에요. 마귀 꼬랑지에서 뿜어낸 그 유혹에 모든 인간이 전부 다 머리 박고 다 따라가요. 뱅글뱅글 돌아요. 죽어가도 계속 돌아요.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몰라요.

인간이 아는 것은 코앞, 눈앞에 있는 것밖에 모릅니다. 젊은 애들의 모든 모습은 예능 프로에 다 나와 있어요. 걔들은 미래도 모르고 과거도 몰라요.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인간은 개뿔도 아무것도 없는데 불구하고, 지킬 것도 없는데, 지킬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스스로 몰락의 길로 가요.

인정받아 뭐 하려고? 인정받아 뭐 합니까? 인정받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고 심지어 인정받기 위해서 자살도 마다하지 않는 자. 자살도, 자살을 마다 안 해요. 인정받기 위해서. 그거 페로몬입니다. 악마가 내뿜는 페로몬이에요. 다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다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악마가 뭐를 뿜어냈습니까?

자기의. 자기 의를 뿜어내는 거예요. ‘너는 너 잘난 맛에 산다.’ 그거 외에는 이 세상에서 뿜어낼 게 뭐가 있어요? 악마가 그걸 뿜어냈죠. 거기에 다 말려든 거예요. 잘나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그게 바로 본질상 지옥에서 끄집어낸 천국입니다. 그것은 천국이란 이름이 지옥이에요. 젊은 애들 출세 못 해서 환장했어요. 출세를 잘하고 못하고 문제가 아니라 “네가 출세할 근본 이유를 대봐라.” 없습니다.

안개같이 아무것도 아닌 게 출세? 출세할 건덕지가 있어야지. “너 뭐 잘났는데 출세하는데?” 인간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고통하는 때를 언약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예언에 의해서, 복음에 의해서 유발하는지를 몰라요. 모르고, 그냥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누가 출세하고 누가 돈 버는지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비트코인이 어쩌고저쩌고.

어떤 미친 사람이 바깥이 어떤가, 비상구를 한번 열어봤어요. 비상구를 열어보니까 “으아악!” 지금 아직 공중이라, 지금 추락 중에 있어요. 착륙도 아닌데 문을 열어버렸어요. 어떤 30대가. 이 미친…….

주께서 준비하신 것은 감람나무입니다. 창세기 8장 11절, 12절에 “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 한 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비둘기를 보냈는데 비둘기 입에서 미래가 물려 들어온 거예요. 지금 노아가 비둘기를 보낸 시점은 온 천지가 물바다에요. 물밖에 없어요. 비상구를 열어보니까 물밖에 없어요, 전부다. 아, 이게 지금 추락 중입니다. 추락하고 있어요. 추락하는 것이 그게 부담되거든 비상구를 닫아버리고 자기들끼리 비행기에서, 노아 방주 안에서 파티하면 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은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누가 마지막 때에, 말세에, 저주의 날을 누가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말씀이, 복음 자체가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인간은 복음 전해주면 자기의 노동의 값, 수고의 대가를 가지고 그것을 막 밀어냅니다. ‘내가 이렇게 애써서 이 정도 누릴 만하지 뭐. 그 피 이야기 그만해라.’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새를 물어올 때, 서서히 감람나무가 마지막에, 노아가 비록 물 위에 있지만 그 새로운 땅에서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에서는 노아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그곳에 감람나무가, 생명체가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를 비둘기가 와서 알려줬어요. 그 비둘기가 성령입니다. 그 감람나무를 가지고 성경에서 ‘남은 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남은 자, 남은 자.
마지막 때에 잘라낼 자를 잘라내고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 반편성 하듯이 따로 편성하는 것은, 그 망해야 될 자에게 말씀을 증거 하면서 성사되는 거예요. 이사야 6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식으로 마지막 때까지 밀어붙이고 고통에 밀어 넣는가가, 그 원칙이 나와 있어요.
원칙이 뭐냐? 6장 9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나님의 이 남은 자는, 자기가 깨달아서 남은 자는 일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아무도, 자진해서 남은 자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본질상 진노의 자리까지 가야되기 때문에. 처음 자리까지 가야 돼요.

그러면 처음 자리에 우리가 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금부터는 무척 쉽습니다. 정말 쉬워요. 왜냐면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9장 11절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얼마나 쉬운지를 몰라요.

뭐냐면, “목사님 제가 뭘 믿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천국 가게끔 남은 자 속에 제가 합류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 왈, 하시는 말씀이 “너한테는 방법이 없느니라. 왜? 네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네가 아직 뭔가 한 것도 없을 때 이미 결정 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좀 허망하십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 하는 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구원될 자격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는 말씀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하는 것은 아무도 몰라요. 오직 주님께서 하늘에서 하강해서 어디까지 떨어지냐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떨어져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그다음에 생긴 것이 뭐냐면, 아까 말한 포도나무에서 난 피입니다.

그 피의 의미는, 요한복음 19장에 나온 말씀처럼 ‘다 이루었다.’에요. 성도는 뭐냐면, 매일매일, Everyday, 그 다 이루심에 고개 숙여 굴복하는 삶만 살면 되는 거예요, 그 다 이루심에!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가는 그 노선, 절차에.

하강했거든요. 그 십자가로 하강했잖아요. 그 십자가로부터 어린 양, 그 당사자 되신 분이 계신 하늘까지 하강한 다음에 상승이 되는 거죠. 상승 될 때 어떻게 상승하느냐? 치약 짜 올리듯이 상승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복음 받을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분, 치약 안 나오면 “치약아 부탁한다. 제발 치약아 부탁한다. 치약 좀 나와줘. 지금 바빠. 빨리 양치질하고 출근해야 돼.” 이렇게 합니까? “에이 이 못된 치약!” 엄지손가락 동원해서 밑에서부터 짜 올립니다. 치약은 아파도 너무 아파요, 치약이. 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자기 모습이 나오니까 안 아플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 의라는 괴물이 집어넣은 자기 성깔이 나오니까, 이 괴물이 집어넣은 자기 의는 안 나오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데 주께서는, 성령께서는 밀어 올리죠. 그 자기의 올려서 빠져나오니까 그렇게 속이 시원한걸. 뭐 민트? 박하사탕?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아, 주께서 이런 여행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친히 내려오는 여행을 하셨구나.’ 주님의 여행 코스들을 그대로 밟아 나가서 주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우리를 다루어 줌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합시다.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우리한테 어떤 행위도 원하지를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그 남은 자를 가지고, ‘은혜로 남은 자’ 이게 감람나무입니다. 이게 감람나무에요.

시편 52편 8절에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감람나무는 노아가 노아한테 그냥 배달될 뿐이에요. 성령을 통해서, 비둘기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잖아요. 그냥 미래에 감람나무만 여기 천국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1장에 보면, 그 감람나무에 대해서 주께서 어떻게 하냐면, 돌 감람나무에서 새 감람나무를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진짜 여호와와 만남으로서 가짜 여호와를 끄집어내는 것이 하나의 방식이라면, 내가 가짜 인간이에요. 왜? 인간은 없어요. 주께서는 인자 속에서 진짜 인간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을 끄집어내고, 야곱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고, 사울에서 스데반 집사를 끄집어내면 그게 사도 바울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고통 하는 때에 주님의 고통을 유발하시면서 짜 올리죠. 그 마지막 감람나무가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3절에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그런데 이 두 감람나무가 그 뒤에 모습 보면 사람에게 맞아 죽습니다. 맞아 죽는 데 맞아 죽는 그 자리가 소돔이고, 애굽이고, 십자가 지신 곳이에요. 십자가의 그 과정과 절차를 주께서는 반복하십니다. 되풀이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제가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만, 우리는 천국에서 일어나서 매일같이 지옥에 출근하고 다시 저녁 되면 천국에서 죽은 자로 잠을 잡니다.

제가 괜히 한 소리가 아니고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4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 11장의 말씀처럼 이렇게 이미 우리는 죽었고 생명이 있는데, 있는 이들이 요한계시록의 이 땅에서 지옥, 마지막 때에 소멸돼야 할 이 지옥에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 하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출근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매일 같이 그렇게 출근하고 계시죠? 묻는 게 지금 힘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믿음의 선배들이 갔던 그 길이 뭐냐? 11장 13절 유명한 말씀 나오죠. 이들은 외국인이었고, 나그네였고, 그들은 떠돌이였던 거예요. 그들이 나온 고향이 있다면 그게 피난처로 간 것이 아니고, 도피처로 간 것이 아니고 도피성으로 간 거예요.

도피성은 특징이 뭐냐면 제사장의 죽음에 합류할 때만 그 도피성에서 나올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 ‘네가 당했던 살인죄라는 억울한 죽음, 억울하지? 그 체험이 바로 최후의 순간에 비로소 알 수 있는, 미리 너에게 찾아온 예수님의 억울하기 짝이 없는 체험에 같이 참여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우리의 기억 속에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만 기억하게 되죠.

성도는 뭐냐? 포도나무 전달체, 운반체, 그 피를 운반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네가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했죠. 값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종이 되지 말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23)

우리 안에 피만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이 말씀처럼 이런 신앙의 선배들은 15절에 보면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상승하고 있습니다. 상승하면서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수모와, 얼마나 많은 오해와, 곡해와 억울함을 당했는지를 성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억울함에 동참하게 만드는, 체험하게 만드는 그 일을 하게 하셨던 거예요. 하지만 그 성도들은 비록 그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본질상 자기 진노의 자녀에게 주님께서 피로서 사함을 받게 했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동참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성령께서 감람나무 잎사귀를 우리 안에 집어넣고 우리 속 안에 담음으로써 비로소 알게 된 거죠.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그 값이 피로 되어 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선행이 아니고, 복음 아는 우리의 착함이 아니라 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어떤 것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뭐로 밀어붙이는가? 네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본질상 나올 수밖에 없는 너의 의, 너의 의에 대해서 내가 나의 의로, 그리스도의 의로 그것을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그 투쟁의 장이 일어나는 겁니다. 밀어붙이는 거예요.

우리한테 뭘 요구하지 않는데 자꾸 우리는 주님께 드리려고 해요. 주께서는, 너의 것은 안 받는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말씀 참 고맙습니다. 안 받으면 그러면 안 하면 되지.’ 안 하면 된다는 내가, 그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본색을 유감없이 다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사세요.

하늘을 나는 새들
푸른 저 하늘 위에서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날아서
희망을 찾아 가네
바람 따라 떠나리 저 먼곳에
고향 떠난 철새처럼
그리워 못 잊어 떠나면
사랑하는 내님 날 반기리

하남석이 불렀던 <바람에 실려> 라는 노래입니다. 바람에 실려, 비둘기에 실린 감람나무처럼,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가 이미 생명입니다. 이미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 소유하지 마시고 생명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내려왔다가, 몰락했다가 어떻게 상승되는가, 주님이 가신 그 절차를 보여주는 그 모습으로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십자가 피로 시작해서 피로 말미암아 십자가 피로 전달하는 그 전달체, 피의 운반체.

끝으로 그럼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되느냐? 그러면 어떻게 노력하면 우리가 주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누가복음 21장에 나와 있습니다. 깁니다. 제가 짧게, 간략하게, 단출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여기서 다섯 자입니다. 26절 “기절하리라.” 세상에서 내가 고대하고, 내가 성공을 기대하고, 내가 출세, ‘아이고 자식 어떻게 저렇게 잘 키웠어요?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렇게 집도 든든하게 아파트 사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여생을 보냅니까? 세상에 얼마나 공직에서 말썽 안 부리고 불의에 아부했으면 저렇게 연금도 타고 합니까?’ ‘나 지금 주의 은혜로 편안하게 삽니다.’

이렇게 하다가 기절할 지경이 나와요. 여기 기절한다는 말이 나와요.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기절할 정도로 임할 것이다. 주님께서 치약 밑에서부터 짜 올릴 때 그 치약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 나 잘난 맛, 나의 의만 우리 몸을 통해서 마구 쏟아내시면 되는 겁니다.

아~ 이걸 가지고 노폐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육의 노폐물. 주께서 육 속에 들어와서 영으로 살린 것처럼 우리가 맨날 육만 보여주면서, 더러운 노폐물만 드러주면서, 나의 잘남만 보이면서 주께 영의 길로 가시는 그런 자유로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하셨다’라는 그 말씀 앞에 그 어떤 상황이라도 고개 숙여 굴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상상 못 하고 예상 못 한 하나님이 주신 영생의 자유인 것을, 이제는 더는 죽기 무서워서 발발 떠는 마귀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만 증거 하는 주의 자녀로서, 종으로서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서 그것마저 주의 은혜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즐거움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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