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그릇

아빠와 함께 2023. 5. 14. 19:55

그릇

2023년 5월 14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2:20-21


(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집에 그릇이 있는 것하고 오늘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누구의 그릇’이라고 싶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이든지 늙은이든지 나는 나이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이 주인장이 되는 거주지를 따로 만듭니다. 소위 ‘내 집’에 집중합니다.

내 집은 나의 세계입니다. 그 어떤 그릇이 천하든 귀하든 그것은 내가 쓰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그릇’ 이야기는 일체 인간들에게 먹히지 않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주저없이 이 그릇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세상을 최대한도로 크고 넓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출현되는 모든 인간은 그저 그릇일 뿐이라는 겁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 9:21-23)

왜 인간들은 사도 바울처럼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사람하고만 만나고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같은 사람만 만나는 이유는 계속 살고 싶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죽여서 무덤에 집어넣으면 그것으로 활동 끝인줄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인간 세계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이는 곧 이 인간 세상 자체가 거대한 무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 무덤 속에서 높은 빌딩을 짓고 고급스러운 주택을 짓고서는 세상 다 살은양 자랑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한 일은 이 지옥 속에서 새로운 집을 짓는 일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성전을 기본 프레임으로 해서 짓게 됩니다. 성전에는 많은 제사에 필요한 기구나 그릇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여서 ‘그릇’으로 만드는 식으로 자신의 천국에 들어주십니다. ‘사람’ 당사자를 죽어야 하는 이유는, 산 채로 천국의 사람이 되고자 우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짐승과 비교해서 자신이 잘난 존재로 여깁니다. 짐승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있는 존재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에게 보다 가까이 대드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겁니다. 옷이란 수치를 감지했다는 겁니다.

수치란 인간 나름대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데서 비롯된 감성입니다. 인간들이 자기에게 당당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자기가 저질은 죄보다 죄 아닌 선하게 산 게 많기에 하나님께서 이점을 고려해서 심판해 주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죄가 되는 죄의 세계 그 안에서 출생했습니다.

따라서 선한 일을 통해서 악한 죄를 상쇄하거나 감산받는 식으로 좋은 곳에 가고 이 생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전을 만드신 이유는, 성전의 주인공만이 오직 참된 인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존재들은 그 성전집의 주인장을 위해 쓰임받은 그릇에 해당됩니다.

인간에서 그릇이 되어 성전 안의 존재가 되려면 필히 죄씻음을 받아서 깨끗해야 합니다. 이 죄 씻는 방식은 인간의 선행이 아닙니다. 오직 희생제물의 피입니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0-22)

피로 씻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세척제 안에서 헹궤야합니다. 헹궤서 나올 때는 자신의 인간됨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피의 관계만이 나와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정결함이 세상 시체가 묻는다는 성전 안에서 그 그릇은 깨어져야 마땅합니다. (레 6:27-28/11:
31-33)

사람들은 자신이 그릇됨을 기어이 거부하는 하면서, ‘말씀 지키는 사람’, 혹은 ‘하나님 잘 믿고 예수님 잘 믿고 말씀대로 믿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는 ‘말씀의 세계 안’으로 들어선 사람입니다. 즉 날마다 사람하고 상대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사는 자를 뜻합니다.

사도가 ‘그릇’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 이유는, 인간 세상의 일반 집에서 그릇들의 다양하게 차별되고 사용되어 짐과 연관짓기 위해서입니다.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 그릇들의 다양한 기능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쪽이 어느 쪽인지 방향성을 나타냅니다.

즉 천한 쪽에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라 귀한 쪽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성전 안에서 질그릇→나무 그릇→놋 그릇→은 그릇→금 그릇 방향으로 잡힌 쪽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금그릇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극대화하는 일이 벌어지는 쪽입니다.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출 25:38)

그리고 향을 담는 것은 금으로 만들어져고 성전의 가장 깊숙한 곳, 곧 지성소의 언약궤는 당연히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최고로 쳐주는 귀한 금속으로서 인간이 가능성에서 벗어나는 초월적 일을 표현하시는 방식입니다. 반면에 천한 그릇이란 이 성전이 있는 구역에서 떨어진 방향에서 사용되는 그릇입니다.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레 14:5) 인간의 가능성이 듬뿍 담긴 흔한 재료의 그릇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고귀함보다는 시선을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오직 주님만이 해내신 그쪽으로 방향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많이 죄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사함받은 영혼이기에 그 어떤 경우에서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4강-디모데후서 2장 20-21절(그릇)2305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20-21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집이 있는데 그릇들이 다양하게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큰 집에서 이렇게 그릇을 따로 성경에서 주목을 하는 이유는, 그 집 주인이 있을 것이고요, 그리고 그 집에 여러가지 일꾼들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여기 그릇이 있다고 이야기 한 거예요.

집주인이 있고 그 집안에 여러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은 무슨 관계가 되냐면, 사람 대 사람 관계로 움직이는 집이 될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면 사람 가운데 사람 같은 사람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사람 같지도 않은데 사람과 상대해 무슨 낙을 보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릇으로 바꾸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 같지도 않은 이 인간들 속에 제대로 된 사람 한 분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어요. 그분만이 사람입니다. 그분이 이 집에 주인장 되시는 분이에요.

어떤 집이 있는데 ‘그 집에 여러 사람이 있다.’가 아니라 그 집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집이 돼요. 단 한 사람을 위한 집. 그럼 나머지는 뭐냐? 가재도구죠. 그냥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의 난관이 있는데 첫 번째 난관이 뭐냐?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라지고 그릇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끝내는 거예요. 사람으로는 끝을 내자. 그리고 사람 자체를 이 주인장 되시는 분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으로 행세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는 오늘 나오는 이 집, 큰집 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나오는 이 큰집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를 못해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사람마다 집을 짓잖아요. 도시에 가면 집이 많잖아요. 그 사회에 사람들이 다 살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들은 뭐고 그 집들은 뭐냐? 하나님은 말합니다. “내가 없애줄게. 깨끗하게 없애줄게.” 불살라서 없애 버립니다.

그 사람들, 사람이라 여기고 내가 살 집을 짓는 것을 제거하는 그 절차가 구약 성경에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집 말고는 다른 것을 일체 사람으로 간주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이 싸울 때는 상대방을 진멸해버리죠. 진멸이라고 하는 것은 씨를 말려 버리는 거예요. 아예 어린애부터 해서 다 죽여요. 갓난아이까지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통해서 하나님이 거기 합세한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사람 같은 사람,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사람 말고는 없다. 다른 민족은 생겨먹은 것은 똑같이 사람같이 생겼더라도 나는 그것을 이스라엘 위해서 그들은 진멸되고 소멸되고 없어져야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입니다. 단호한 뜻이에요.

그러면 오늘날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에 오늘날도 이 원칙이 유효하냐, 적용되느냐? 적용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 무엇을 구분하느냐면, 하나님의 집에 들어올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 집 밖에서 지옥 불에 들어갈 사람인지를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생긴 것들은 다 끌어모으고 심판대 앞에 불러모으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마지막 심판 앞에서.

그래서 이게 인간에서 그릇 된다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스스로 본인의 노력으로서는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왜냐면 전체를 다 보거든요. 여기 오늘 본문 2장 20절에서 큰 집에 금과 은그릇이 있다고 할 때 큰 집은 어디서 만들어졌냐면, 기존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 세상을, 나중에 하나님께서 불로 지구를 멸망시켜 버리면 이 멸망되는 세상 안에서 멸망 당하지 않는 새로운 집을 그 멸망 당한 속에서 끄집어 내는 거예요. 이 세상은 멸망 당하는 거 맞는데 이 멸망 당한 이 세상 속에서 새로운 집을 하나를 또 만드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 들어가신, 자신이 태어나셨을 때 육으로 가셨던 마지막 몸이 뭐냐면, 바로 무덤으로 가는 거예요. 자신의 몸이 무덤으로 가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냐면, 난 아버지께 간다고 했어요. 자기는 무덤으로 가는데, 누가 봐도 무덤으로 가시고 제자들 보기에도 무덤으로 가셨는데 예수님은 주장하기를,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뭐 아무도 안 믿었어요. 예수님 제자들, 막달라 마리아도 믿지 않고 아무도 믿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하고 다른 두 명의 마리아가 예수님 시신 잘 있는가 싶어서 찾아봤지요. 뭐 시체로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그런데 사흘 뒤에 갔는데 시체가 없어요. 시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이 세상이 예수님 담기에 한계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 담기에 한계가 있었다는 건데 그 한계가 뭐냐? 인간의 한계가 뭐냐? 자기가 무덤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인간의 한계였습니다. 살아도 무덤 속이에요. 무덤 속에 각자 자기 집을 짓고 있습니다.

어떤 층은 128층짜리 건물도 있고, 어떤 건 70층, 뉴욕에 맨하탄에는 110층, 짓는데 그 짓는 터가 무덤 속에 그렇게 고층 건물을 지었던 겁니다. 고급 아파트 같은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 갔느냐는 거예요. 찾을 수가 없지요.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무덤 속에 인간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인간들은 예수님을 못 붙잡는가? 인간이 본인들을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그릇을 원하는데 사람들은 어떤 그릇이라는 사물체거든요. 물건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자기 집에 그릇을 원했는데 인간들은 사람이라고 우기면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사람이었죠. 사람이었는데 그게 실수였던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 보기에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 보기에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던 거예요. 왜냐면 죽음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이라는 것은 기존에 사람들이, 제자들도, 상상을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기인지요. 본인이, 자기가 속이는 것도 몰라요, 아니 본인은 알아요. 안 믿는다는 거 본인은 아는데 다른 사람은 다 모르죠. 안 들키지 싶죠. 왜 예수 믿는 게 사기냐면, 본인이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게 예수님 믿는데 장애요소로 막혀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냥 예수 믿을 생각하지 말고 ‘나는 주님의 집에 그릇이다.’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게 구약에 보면 성전입니다. 성전에서는 그릇이 필요해요. 성전에 그릇이 필요한데 사람은 필요치 않습니다. 사람이 걸어 들어오려면 여기에 뭐가 주어졌느냐면 제단에서 흘렸던 제물의 피 뿌림이 있어줘야 돼요.

인간들이 보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의 그릇되기라는 것은 불가능하죠. 왜냐면 씻어줄 피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에다가 피 뿌리면 그릇되는 거예요.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인간 시절은 끝났어요. 이제는 그릇입니다. 어느 그릇?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의 그릇이 되는 거죠.

그게 히브리서 9장 20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피=그릇’ 간단한 공식이에요. ‘사람+피=그릇’이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공식에 대해, ‘사람+피’가 그릇이 되는 그 공식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에 왜 분노할까요? 인간이 그 일, 복음에 분노하는 이유 첫째는 뭐냐면, 죄의 사함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으면 선을 행함으로서 이걸 처리하면 된다는 겁니다. 죄 조금 지었으면 착한 일 많이 하게 되면 너끈하게 죄지은 것도 처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자비로워서 용납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첫 번째 문제는 선악 지식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게 문제가 돼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두 번째 하면 첫 번째 잊어버릴까봐 걱정이 되는데, 선악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는 것이 스스로 장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굉장히 장하고 거룩한 이유가, 선이 뭐고 악이 뭐고 그래서 악은, 죄는 덜 짓고 선은 착하게 살도록 노력하는 이 내 모습이 장해도 너무 장한 거예요. 너무너무 장한 거예요. 그 장함 가운데서 교회 나와서 예수까지 믿어주니 이런 장함, 이 착함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간단하게 말해서 뭐냐면, 죽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피는 뭐냐? 죄를 세척하는 방법은, 착한 일을 해서 죄를 세척하는 것이 아니고 세척하는 것이 피입니다. 피라는 것은 일종의 액체에요. 액체가 세척제가 되는 겁니다. 세척제를 가득 담아놓고 세척제에 접시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헹궈야 해요. 푹 젖었다가 나와야 해요, 코팅하듯이.

죄를 찍어 발라서 죄 용서받는 게 아니고, 매일 같이 피 흘린 그 제물의 죽음 속에 푹 잠겨서, 꼬르륵 잠겨서 빠져나오고 또다시 잠겨서 빨리 또 빠져 나와야 되고요, 이게 세례인데요, 침례라고 하죠.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은 무덤이고 이것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어요. 죽음으로 가득 찬 이유는, 죄의 위력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죄의 능력이, 죄의 세력이.

죄라는 것은 내가 지을 때마다 생기는 것이 아니고요, 태어난 장소가 죄라는 것으로 가득 찬 곳에서 태어난 거예요. 일종의 수족관이라고 보는 거예요. 아쿠아리움, 수족관, 어항. 죄 없는 곳이 없어요. 물론 거기 악마가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죠.

죄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려면 죄를 내 착함으로, 악마가 이야기하는 선악 지식으로는 세척이 안 돼요. 그릇 닦아내 봐야 또 묻어요. 닦아내는 식으로 세척 하는 것은 어디서 주로 하냐면, 불교에서 그렇게 많이 해요. 불교나 천주교에서 많이 해요. 신부한테 죄 고해서 오늘 또 처방전 받고 “새벽기도 나오시고 주기도문 다섯 번 외우시고……” 처방전 받고 집에 가면 깨끗해지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고 죄의 세척은 예수님의 정결한 피로 되는 거예요. 피가 되면,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피가 묻어 있어요. 피가 묻어 있으니까 그 피를 언급하면 자연적으로 나는 인간 같지도 않다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같이 겹쳐서 이야기해서 복음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 아는 나도 인간도 아니고, 십자가 믿던 나도 인간 같지도 않고, 복음 안다는 나도 이게 사람이 아니야.” 계속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때는 뭐가 빠지냐면 ‘선악, 양심, 윤리? 웃기고 있네. 내가 사람 같지도 않은 거,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왜 자꾸 끝까지 괜찮은 사람, 착한 사람, 의로운 사람, 훌륭한 사람, 믿는 사람, 자꾸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 그것은 생각하는 그 범주가 좁아서 그래요. 만나는 게 사람만 만나서 그래요, 사람만. 자꾸 사람만 만나고, 식구만 만나고, 친구만 만나고, 동료만 만나고, 교인들만 만나니까 속으로 ‘너보다는 내가 착해질 수 있다.’ 자꾸 경쟁관계, 대비 관계에 있어서 ‘돈은 없지만 나는 구원 받았다.’ 이런 식으로 타인을 의식하는 거예요.

자꾸 보는 범위가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코앞에,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과 경쟁하는 식으로 그들만 상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그릇이 되지 못하고 자꾸만 사람으로 머물고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으로서 기껏 주장하는 것이 뭐냐면, “말씀만 믿으면 안 되겠습니까? 말씀을 지켜주면 되잖아요? 말씀만 믿으면 되잖아요?”

왜 이러한 발악을 하냐면, 말씀 믿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아보려고 아주 환장을 하고 있어요. 그릇이 되면 되는데, 예수님의 집에 그릇되면 되는데, 끝까지 사람으로 남으려고 버티는 겁니다. “말씀 잘 지키고 말씀 믿어주는 사람 되면 되잖아요. 성경에 보면 새 사람 있다며? 새사람 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 새 사람이 주님 만나면, 복음 만나면 분노를 유발해요. 사람의 분노가 왜 일어납니까? 안 죽고 싶어서 분노하는 거예요. 죽기 싫어서 분노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데 벌써 죽어야 해? 안 돼, 절대로 안 돼.’ 가정에 연세 많은 부모들이 잘 계시다가 자식들이 힘드니까 “요양병원에 좀 가시면 안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열이면 열 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내 집 놔두고 어딜 가냐는 거예요. “내가 뭐 어때서?” 버티죠. “내 집 놔두고 어디 가는데? 이거 내 집이야. 내 집의 주인장이 나라고!” “저 어머님, 아버님 이제는 사람 아닙니다. 이제는 본인을 사람으로 여기면 안 되고요, 시신이라고 여기고 좀 가주시면, 좀 거처를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이 차마 그 말을 못 하죠. 되지도 않는 효도 한다고 설치는데 그 이야기를 하겠어요? “아유, 어머니 좋을 대로 하세요.” 좋은 게 뭔데, 인간이 평소에는 좋을 대로 안 했어요? 자기 좋을 대로 해 왔는데요.

인간은 버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 잘 지키는데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입니까?”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것도 버티기에 들어간 거예요. 주님께서는, 네가 말씀 잘 지키는 사람, 믿는 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사람, 말씀 안에 들어가는 사람 되면 돼요. 말씀을 내가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또 말씀 믿는 사람, 그건 안 받아줍니다.

말씀 안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더이상 사람이 아니고 달그락거리는 하나의 그릇이 돼요. 만약 그래도 버티는 사람이 있잖아요? “말씀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그 말씀대로 움직이는 그릇이 되겠습니다.” 할 때 “아 이 선악을 아는 나는 자존심 상해.” 이렇게 버티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것은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깨버립니다.

그래서 이 구약성경 레위기에 보면, 예수님의 제단의 피를 더럽히는 사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그릇에 시체가 닿아있는 경우, 그럴 경우에 “그 그릇 깨버려라. 죽음을 처리하겠다는데, 어디 죽음까지 끌고 들어와. 깨버려.” 이게 구약성경 레위기 11장 35절, 레위기 6장 27절, 28절에 나옵니다.

시간이 가겠지만 레위기 11장 35절, 주검이라고 하는 것은 시체를 말합니다. “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36-38절, “샘물이나 방축물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주검에 다닥치는 것만 부정하여질 것이요 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질찌라도 그것이 정하거니와 종자에 물을 더할 때에 그것이 그 위에 떨어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

하나님에게서는, 네가 사람이냐를 묻는 게 아니고 나의 깨끗하게, 정결하게, 세척하는 세척제가 너에게 묻어 있느냐, 그것만 보는 거예요. 주님은 자기 세척제만 보는 거예요. 왜? 그게 히브리서 9장의 언약의 피니까. 약속된 거니까. 인간이 인간끼리 한 약속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과 계약한 거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세 계약이든, 월세 계약이든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뭐냐면, 내가 어떻게 사는 데에 있어요.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만나면 안 돼죠. 하나님이 살려주지를 않으니까. 누굴 만나냐? 사람 만나야 돼요. 사람을 만날 때 사람들은 사는 요령을 터득했어요. 그게 뭐냐? 의리만 챙기면 된다는 거예요. 의리! 그 의리.

그 의리 지키는 그러한 품새, 그러한 인간성을 가지고 어디까지 나오냐면, 교회까지 진출해요. 교회 나와서 평소에 사람끼리 의리 지키고 양심 지키는 그 인간성 가지고 ‘하나님한테도 먹히겠지.’라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나 살기 위해서 다져진 내 몸과 영혼, 심지어 성경에서는 영혼까지 사물체로 봐요. 마음까지 사물로 봐요. 그릇으로 본다고요.

몸만 죽으면 그만이다. 그거 아니에요. 마음까지도 다 하나의 사물체라고요. 그런 자세로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만난다? 뭘 가지고 만나는데? 뭐 있어요? 하나님이 어디 동네 친구입니까? 술친구입니까? 부담 없이 만날 대상이 아니에요.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죠. ‘예수님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놓쳐 버렸다.’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 같은 사람을 잃어버렸어요. 이 땅에 사람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의미 있는 것은 ‘네가 내 집에 들어올 그릇이냐, 아니면 그릇 아니냐?’ 그 둘이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이 그릇을 가지고,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면, 사람이 과연 그릇이 될 수 있느냐? 불가능하죠. 그릇이 될 수 있는가? 두 번째는 그릇과 그릇 사이에서 또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인간들은 교회 나오나 집에 있으나 왜 인간임을, 왜 자기가 사람인 것을 포기 못 하는가?

그것은 제가 아까 사람들하고 만나서 그렇다고 했는데, 그래, 사람들만 만나는데 왜 저 사람은 나랑 똑같은 생각,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누굴 만나도 ‘인간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이 변함없이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그 내용도, 그러한 오류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인간들은 짐승과 자기를 비교해서 자기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누구하고 시합을 하냐면, 짐승하고 대비해가지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런 짓하는 것을 아시고 짐승과 인간과 공통적인 요소를 전부 없애버립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잖아요? 잘 키우려고 애를 쓰죠.

이거 짐승도 그 짓 해요. 짐승도 자기 새끼 키울 줄 압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식 잘 키운다고 사람 대우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짐승도 그렇게 해요. 새도 자기 새끼에게 먹이려고 가시덤불 속에서 상처받아가면서 먹이 하나 주려고 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인간아, 유난 떨지 마라.” 그건 짐승도 하는 짓이에요.

일가친척끼리 정답게 지내는 것, 그거 짐승도 그런 짓 해요. 그걸 가지고 뭐 사람답고, 어쩌고 그러면 안 돼요. 짐승도 그런 거 해요. 오히려 하나님은 반대로 나가십니다. 짐승이 못 할 짓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무슨 오해를 하냐면, 짐승보다 나으니까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위치해 있다고 우기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짐승보다 가까이 있는 건 맞는데 어떻게 가까이 있느냐면, 악마의 얼굴을 하고 가까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대들고 반발하고 공격하는 그 가장 최전선에 인간들이 포진되어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 옷에 있습니다. 옷을 입는 거예요. 인간들이 왜 옷을 입습니까? 저는 그 개 키우는 사람들이 개 옷 입히는 거 보고, 동물 학대도 그런 학대가 없습니다. 무슨 개한테 옷이 필요합니까? 이게 뭐냐면, 인간이 개를 낮춰서 봐서 그래요.

그래서 잠언서에서 지혜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혜는 도리어 짐승에게 있다고 잠언서 30장 24절부터 28절까지 있습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너구리같은 거죠.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전부 다 인간이 얕잡아 보는 땅의 빌빌 기는 짐승들이에요. 이 짐승들을 가지고 지혜롭다고 이야기해요. “인간아, 너는 짐승들이 갖고 있는 지혜도 없어, 인간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보여주는, 결국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다면,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악한 것만 남아있죠. 짐승이 저지르지 못하는 악한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낮추기 위해서 마태복음 7장에서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개, 돼지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장 7절에서는 바리새인, 천하보다 말씀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 보고 뭐냐? ‘독사의 자식들아. 뱀 자식들아!’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망치게 하는 영적 존재가 뱀으로 찾아온다는 사실, 뱀으로 왔어요. 인간이 기껏해야 뱀에 꾀임을 당하는, 뱀의 지시를 따르는 그런 존재로 이미 전락해버렸다는 거예요. “존경하려면 뱀이나 존경하고, 존경하려면 짐승이나 존경해라 인간아.”

그래서 인간은 뭐냐면, 불로써 멸망해야 하는 이 세상, 이 피조물의 세계의 가장 껍질에 속해요. 그래서 인간은 표면에 존재해요, 껍질에. 이 세상은 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고 분노하는지를 보여주는 제일 표면에, 그 존재층에 인간들이 포진해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겠습니까? 당연히 안 받죠. 지금 우리 자신이 누구냐를 제가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 41절에 보면,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2천년 교회 완전히 거덜 났습니다. ‘나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 동안 교회가 뭐 했어요? 주님이 안 받겠다는데 자기가 왜 억지로 바칩니까? 찬송하면서. “나는 안 받겠다.” 사람에게서 어떤 것도 안 받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영광은 어떤 영광이냐? 요한복음 12장 28-30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로부터 영광 받았어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사람 빼는 거예요. 사람 빼버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냐면,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사람 같지도 않은데 사람이라고 우기니까 하나님 앞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어요. 죄지어놓고 사람이라고 우기는 그 인간에 대해서 일체 하나님께서 그냥 저주 외에는 퍼부을 게 없어요. 뭐 나라가 잘 되게 해주시고, 뭐 우리나라 잘살게 해주시고 우리 가정이 잘 풀리고 몸 건강하게 해주시고 교회 부흥해 달라고요? “네가 뭔데? 뭔데 네가 그런 짓을 해? 뭔데?”

지금 무덤 속에 있다는 말은 살아도 죽은 거예요. 아니 살 자격도 없어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지도 않습니다. 주께서 살려주는 것은 우리에게 뿌려준 세척제, 예수님이 흘린 그 피를 살리죠.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죠.

사도바울이 그릇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첫째는, 어떤 인간도 그릇이 될 마음이 없다는 것과, 두 번째는 그릇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지고 뭐라고 사용하냐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서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방향을 보여주는 데 사용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요. 큰집에는 금, 은그릇이 있을 뿐이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는 거예요. 귀히 쓰는 것과 천히 쓰는 것, 이것은 한쪽 방향, 곧 금은은 귀한 쪽 방향을 가리키고요, 저쪽 또 다른 반대쪽은 뭐냐, 하나님 보시기에 천하다고 규정한 쪽은 어느 쪽인가를 보여줘요.

그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보통 일반 사람들 가정에 그릇들이 있으니까 그릇들로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거예요. 첫 번째는, 사람은 그 누구의 그릇되기를 아주 싫어해요. 자기가 주인장이기 때문에 누가 그냥 쓰시는 대로 쓰인다는 것은 이건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를 일으키는 거예요.

그런 예가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핫의 자손이 모세에게 분노해 대들었어요. “너만 주의 종인가?” 대들었습니다. 고핫 자손인 고라가 모세에게 왜 대들었을까? 너도 내가 보기에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인간끼리 차별하는 것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식이죠. ‘너만 하나님 믿나? 우리도 하나님 믿는다.’ 고라와 그 무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우리 애굽 나올 때 똑같은 자격으로 나왔다.” 이게 고라의 주장입니다. 과연 똑같을까요?

민수기 12장에 보니까, 12장 8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세 누나가 있는데 누나가 모세 장가가는 데 흑인 여자와 결혼하니까, 구스 여인과 결혼하니까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하나님 나타나서 그 누나를 문둥병자 만들었어요. 모세 누나도 그렇고, 고라도 그렇고 이 모세가 하나님의 집의 그릇인 것을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인간인 줄 알았죠.

그래서 민수기 12장 8절에 보면 “그는 나의 형상을 보았다. 너는 봤느냐? 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봤어? 모세는 형상을 본 거야. 그래서 그는 알아”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하나의 사물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세는 알고 있는데 모세 주변 인간들은 몰라요.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해요.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똑같은 인간이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상대하고 너는 사람을 상대하잖아.” 어떻게 그게 똑같습니까? 모세가 히브리서 3장 5절에 보면, 세우는 집이 있고, 그 세우는 집은 이 지옥 같은 데서 새로 만드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새로 만들듯이 이 세상은 하나의 무덤 속이고 죽음의 세계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는 집을 이 세상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뭐가 필요하냐? 그릇이 필요해요. 거기는 사람이 자기가 주인공 노릇 하는, 내가 나 잘났다는 인간은 필요치 않아요. 그런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지옥 가서 부자가 하는 주장이나 하라는 말이죠, 지옥 간 부자나. 지옥 가도 나사로 보고 심부름 시키는 그 부자 같은 사고방식, 똑같은 거예요. “내가 어딜 봐서 죽었냐?”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히브리서 3장 5절에 보면 모세는 자기 주인이 있어요. 모세는 종입니다. 모세가 온 집에 사환이라고 했어요. 여기 3장 5절에,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종으로 충성을 했다 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러니까 이 종이라는 말은 쓰임 받는 자에요. 그러면 모세를 쓰는 자와 쓰임 받는 자의 관계가 모세에게는 살아있어요. 모세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나타나니까 모세는 알았죠. ‘나는 쓰임 받는 일종의 그릇이다.’ 이렇게 본 거예요.

로마서 9장에서 모세는 이것을 전체 세계로 확산시켜 나갑니다. 로마서 9장 21절 23절에 보면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세상에 전체를 확대시켜요. 하나님의 성전을 확산시켜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인간은 없고 두 종류의 그릇만 남아요.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그릇, 하나는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가 담겨 있는 그릇, 딱 두 종류 그릇밖에 없습니다. 그릇 집에 가서 다른 그릇 찾지 마세요.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전부 다 그릇이에요. 이게 확대되어서 그래요.

그러면 이 그릇을 통해서, 사용해서 얻고자 하는 의미가 방향을 보여주는 데요. 그 방향이 뭐냐면, 이쪽은 천한 쪽, 이쪽은 고귀한 쪽이라는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반 사람들이 그릇을 사용하는 방법을 사도바울은 또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방향이라는 것은 인간은 그 자리에 멈춰 서면 안 된다는 뜻의 방향입니다. 몸을 어디로 틀어야 되느냐면, 고귀한 쪽으로 몸을 틀고 살아가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자기 뒤쪽은 뭐냐? 천한 쪽이 되겠죠. 그러면 그 천한 것과 고귀한 것, 어느 쪽이 고귀한 것이고 어느 쪽이 천한 쪽인가? 그것은 바로 성전 구조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성전 구조 안에 그릇들이 나오는데 그 그릇들이 금 그릇도 있지만, 은그릇도 있고 놋그릇도 있고 당연히 나무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습니다. 먼저 질그릇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레위기 14장 5절에 보면,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자, 질그릇은 이스라엘에서 어떤 때 사용 하냐면, 성전이 있는 공간과 격리된 공간에서 사용해요.

성전 쪽이 아니고 반대쪽, “너는 저주받아. 저주받은 것끼리 모여.” 그럴 때는 질그릇을 사용해요. 그러면 금그릇, 은그릇은 어디에 사용하느냐?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제 쉽게 알 수 있죠. 금 그릇, 은그릇은 어디에 사용하냐면, 성전 안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은 금 그릇, 특히 하나님 제단의 심판을 보여주는, 어떤 무섭고 맹렬한 하나님의 심판성과 가까이 있는 것은 금으로 만듭니다.

출애굽기 25장 38절에 보면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찌니.”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자기가 정해놓은 희생양,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기 위해서 준비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은 희생양입니다. 그 희생양을 하나님이 만난다는 것은 곧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는 그 자리는요, 인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높고 귀한 재료, 금속에 해당되는 금으로 만든 거예요. 향을 담을 때도 금으로 만들어요. 귀하게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에서 아들은 이미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는 거예요. 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금속에 해당되는 거예요. 가장 높은 곳, 값어치 있는, 최고로 값이 있는 금속이 금이잖아요.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하늘 쪽과 가깝다는 것을 표시할 때 동원되는 금속이 금, 그다음에 은이 되는 겁니다. 그만큼 이 일은 핵심 부분에 approach, ‘가까이 근접하고 있다, 얘들아.’ 하고 이렇게 낌새를 주는 거예요. ‘네가 지금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굉장히 고귀하게 받아주는 그 일이고, 그 지점에 도달하고 있어, 접근하고 있어.’라고 낌새를 주는 거예요.

그게 금이에요. 그게 향이라든지, 불집게를 금으로 만들고, 언약궤는 말할 것도 없이 금박을 입혀놨죠. 하나님이 직접 만나는 장소인 언약궤. 그게 하나님 직접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에 가면 갈수록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것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기를 깨끗하게 해서 금 그릇이 된다는 말에 대해 여러분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렇게 금처럼 쓰이나, 궁금하겠죠?

그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좋은 예시가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 27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 말은 뭐냐면, 인간 세계의 서열로 봐서 무가치한데 인간 세상들이 아무리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인간에게서 생산되지 않는 불가능한, 초월적인 능력을 입은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낮아짐을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에요. 그 사람이 금 같은 믿음이라고 한 게 베드로전서 1장,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고 했어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거기에 막달라 마리아인지 어떤 여자인지, 그 동네에서 아주 더럽게 산다고 소문난 여자가 예수님 발 앞에 와서 울면서 모아놓은 향수를 뿌리며 눈물 흘릴 때 주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탕감받은 것을 누가 좋아하느냐?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좋아할 것이 뻔하지 않으냐?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 이 여자는 자신의 전부를 주었다.”

그래서 47절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주께서는 인간이 가능한 것을 받질 않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세척제를 받습니다. 그 세척제의 위력이 더 추가되면 추가될수록, 우리가 금쪽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기 자신은 천하디천한 존재인 것을 기쁨으로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요한3서 1장 2절에 보면 그걸 가지고 영혼이 잘 됐다고 이야기해요.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할 때 어떤 경우가 영혼이 잘 된 것이냐? 나는 인간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때 가장 영혼이 잘 된 거예요. 따라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범사니까, 몸이 아프고 사업이 망하여도, 전세금 떼이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범사에 감사하고,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그 영혼은 주님의 사랑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강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불속에 들어가도, 물속에 들어가서도 살아날 수 있어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천하디천한 자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게 영혼이 잘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가 인간이라고 여기고 성경 해석하니까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이것도 반대로 구라를 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매사가 그래요. 모든 성경을 볼 때 그렇게 해요. 사람 같지도 않은 게 사람 행세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그걸 성경이 아니면 누가 이야기해주겠어요?

고린도후서 1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쉬운 말 같은데 굉장히 어려운 말을 지금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서 20절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저에게는 예만 된다.’ 여기 ‘예’와 ‘아니오’라는 말이 나와요. ‘예’는 Yes라는 뜻이고 ‘아니오’는 영어로 No라는 뜻이거든요. 무슨 뜻이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모든 것이 Yes, Yes, Yes의 연속의 인생을 살았다, 이 말이죠.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어, 좋았어, 굿! 굿! 좋아! 그거야! 바로 그거지!, 라는 것이 연발, 연발하면서 하루도 주님의 Yes가 아닌 날이 없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게 이게 예수 안에서의 삶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이 말씀을 보고 어떻게 지키는가? 주께서는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합니다.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의 세계, 말씀의 수족관에 집어넣어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이 말씀이 이렇게 돼요. 내가 나를 지킬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니요.”라고 말해요. 그걸 바꾸라 이 말이죠.

내가 나를 지키고 싶을 때 “주님 그건 너무합니다. 그건 제가 감당 안 되겠는데요? 그러면 진짜 나 망하는데요? 주여,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난 아니요, 라고 말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말씀과 반대가 되어버려요. 주께서 나를 개, 돼지로 만들 때 “Yes!”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을 때 그때는, “주님 그건 아니지요!”가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봅니다. “모든 사람이 너를 칭찬할 때 너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잘 지켜서 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세계 안에서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용납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Yes!”라고 우리가 하는 ‘아멘’이죠, “아멘!”이라고 받아들여야 돼죠. 그게 바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능력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걸 초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집, 이 지옥 같은 곳에 새로 생성된 하나님의 집의 그릇이라면, 그것도 금 그릇이라면, 질그릇 말고, 주님의 십자가가 날이 갈수록 더 크게 보이는, 성전에 더 크게 접근되어있는 금 그릇이라면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앞, 뒤 가르지 말고 주저 없이 전하세요. 책임은 주님이 집니다. 앞뒤 가리지 마세요. 앞뒤 가린다는 말은 내가 아직도 챙길 게 있고 지킬 게 있다는 그러한 자기의 본능을 드러내는 거예요. 앞뒤 가리지 마시고 주저 없이 외쳐야 돼요. 왜? 모세도 그렇게 했고 우리 주님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럴 때 주변 사람이 얼마나 우리에게 분노하겠습니까? 그 분노를 받을 때, 여러분들은 그 분노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사람이 아니고 하나의 물건이고 사물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 같지도 않은 게 그동안 사람 행세한다고 얼마나 뱀처럼, 마귀처럼 살았는지, 그러나 그것조차도 주께서 다 아시고 예수님의 피라는 세척제로 매일같이 풍덩 담갔다가 끄집어내 주시기에 이제는 예수님의 피만 묻어 있는 하나님의 그릇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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