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의 능력

아빠와 함께 2023. 6. 11. 17:54

하나님의 능력


2023년 6월 11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3:6-9

(3: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3: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3:9)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마법사의 등장은 이 세상이 이미 악마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태에서 주님이 오셨음을 말해줍니다. 마법사를 앞으로 나오게 하고 그런 자가 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려주는 식으로 진리는 세상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수님만 알면 되는게 아니라 예수님과 짝을 이룬 악마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 질 때 다들 도망가버렸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마법사의 대결은 곧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했느냐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10가지 재앙을 애굽나라에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 존재 자체가 하나님에게 부정적 대상이며 징벌과 저주받을 객체임을 분명히 합니다.

마법사는 속임수를 쓰는 자들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반응에 크게 신경쓰는 것이 이 인간세계의 생리라는 점을 알수가 있습니다. 유사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벌리므로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신을 인간들은 받아들입니다. 10재앙의 순서는 이러합니다.

⓵나일강이 피로 변하는 겁니다.
②개구리가 밥상까지 올라오는 겁니다.
③이(모기)가 사방에 들끓는 일입니다.
④파리가 설쳐댑니다
⑤끔찍한 질병으로 가축들이 죽습니다.
⑥독한 종기가 납니다
⑦우박이 떨어집니다
⑧메뚜기가 창궐합니다
⑨대낮에도 깜깜합니다.
⑩모든 장자가 다 죽습니다
이 10재앙을 인간들이 스스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다음 절차로 강제로 이동시켜줍니다. 이 취지는 이러합니다. 10재앙을 통해서 나를 없애는 과정이 되어야 마지막 10번째 재앙인 어린양의 죽음으로 야기된 참사를 견뎌낼 수가 있는 겁니다. 이는 항상 ‘최초의 주인공’인 ‘나’가 별볼일은 존재로 사라지게 하는 상황입니다.

마법사는 두 번째 재앙까지는 흉내를 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재앙은 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임금님, 이런 재앙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습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법사, 곧 악마의 활동 취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악마는 자기 본연의 임무를 허락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음”을 나타내어줍니다. 10재앙이 일어나는 기간, 히브리인들이 도리어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철저하게 악마로부터 세뇌당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된 인간은 다음과 같은 악마의 본성을 그대로 인수받았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일을 방해하면 공격하고 살해하고 파괴한다” 입니다. 이 정신이 악마의 정신이기에 악마는 먹잇감처럼 인간들을 다루어 오고 있었던 겁니다. 곧 인간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자들인 겁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죽음에 시달리기에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쫓기는 것이 인간들에게 있어 생활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평가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셈하고)하니까 그 어느 누구를 만나도 그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용대상자로 간주합니다. 이처럼 지옥에는 입구가 없습니다. 이미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천국은 입구가 있습니다. 이 세상과 별개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 10가지 재앙은 개인적인 가치나 품성을 묻지를 않습니다. 인간을 다발로 처리합니다. 다섯 번째 재앙부터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의 거주지역과 나머지 거주지역을 집단으로 구별하여 재앙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 복음 앞에서 인간들은 무차별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집 나갔다가 다시 아버지집으로 돌아온 탕자가 비로소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무차별적으로 반겨주신다는 점입니다. 즉 탕자의 자아에 구멍이 뚫린 이후에는 그는 세상에 그 어떤 차이도 털어버리고 아버지 집으로 온 겁니다. 세상에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은 자아에 구멍이 꿇리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아예 자기 자신이 빈 자리인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악마로부터 농락당하고 시달리게 됩니다. 인간들은 이처럼 쉬지도 않고 환타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안 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영생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으로서 감히 못할 일인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원하시는 것을 제공하십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수풀에 잡혀 있는 어린 양’입니다. 인간이 측정하고 관찰하고 계산하는 세계에서는 절대로 발견되지 못한 바가 ‘어린양 준비’입니다.

없는데서 홀연히 나온 겁니다. 마치 식물인간이 된 드라마의 주인공이 드라마 거의 끝부분에서 다시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죽은데서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가 이 지옥에서 천국가는 것은 성도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그 내부에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성도가 알아서 예수님의 피를 묻히는 것이 아니라 피가 성도에게 와서 피를 묻혀주시는 겁니다. 바로 이 능력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마법사도 해내지를 못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감산하지만 마법사는 인간들에게 힘을 비축시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합니다. 즉 악마는 줄곧 인간보다 홀로 살라고 독려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복음을 듣고 배워도 본인으로 인하여 본인을 자꾸만 살려내려고 하니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의 고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 능력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디모데후서 3장 6-9절(하나님의 능력)23061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6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3:6-9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여기 오늘 본문에 얀네와 얌브레라는 두 실존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세 시대의 사람입니다. 지금 사람이 아니고요. 모세 시대 사람을 왜 그 시대에 소환하느냐? 이 얀네와 얌브레가 마법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애굽에 가서 한 일이 있어요. 열 가지 재앙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 열 가지 재앙에 대해서,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애굽 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죠. 그 정도 마술은 우리 쪽에서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얀네와 얌브레는 마법사에요. 이 마법사를 왜 여기에 거론하는가? 본문의 취지가 이렇습니다. 마법사를 앞으로 나오게 해서 그 마법사가 아무것도 아님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루십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이 마법사에게 휘둘렸다는 것, 이 세상은 마법사가 설쳐대고, 마법사를 원하고, 마법사를 기다리고, 마법사에 요청하는 그런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얀네와 얌브레라는 이 마법사적인 성향의 사람을 모세와 더불어 호출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알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짝을 이루었던 이 마법사 같은, 악마의 족속 같은 존재죠. 악마의 존재를 대변해 주는 이런 마법사를 거론함으로써 너는 어느 쪽에 있느냐를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예수님이 좋은 분이니까 그분을 취득하게 되면 구원받겠지.’라는 그것은 경솔한 생각이고요. 내가 지금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는 악마가 하는 일, 악마의 존재 가치를 우리가 인정해줘야 돼요. 존중까지는 할 필요 없겠지만 인정을 해 줘야 됩니다. 이 마법사의 기운이 이 세계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라는 말이 나와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세상 신’ 이라 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이미 이런 악마의 활동 영역 안에 예속되어 있어요.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악마가 무슨 일을 하는가를 겸하여서 필히 알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지식을 알기 위해서 진리에 관심은 있지만 거기 6절에 보면, 어떤 여자들은 욕심에 끌리어서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되어 있어요. 항상 배우는데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배우는 것마저 진리를 얻을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죠? 복음을 배워도 진리에 이를 수 없다면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가 빠뜨린 게 있어요. 지금 마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를 빠뜨렸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귀는 악한 존재기 때문에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아닙니다. 마귀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얌네와 얌브레가, 그 당시 모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모세가 등장하니까 애굽의 바로왕이 얌네와 얌브레를 자기들 대표 주자로 모세 앞에 딱 등장시킨 거예요. ‘네 마법이 센지, 내 마법이 센지 한 번 겨뤄 보자.’

모세가 애굽 나라에서 한 게 바로 열 가지 재앙이라고 아까 말씀드렸죠. 첫 번째 재앙이 나일강이 피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가 개구리가 밥상에 올라오는 것이고, 세 번째가 이나 모기가 들끓는 것이고, 네 번째가 파리가 들끓는 것이고 다섯 번째가 지독한 질병에 가축들이 죽는 것이고, 여섯 번째가 심한 종기가 나는 것이고, 일곱 번째가 우박이고, 여덟 번째가 메뚜기가 들이닥치는 것이고 아홉 번째 흑암이고, 열 번째 장자의 죽음, 이렇게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하셨을 때, 애굽나라를 지배하면서도 숨어져있던 마귀의 기운이 더 이상 약이 올라 숨지 못하고 자기 본색을 드디어 모세 앞에 드러내었습니다. 모세 앞에 드러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드러냈다는 거죠. 드러내면서 그들은 따라붙었어요.

1번, 나일강이 피 되는 것, 그들이 했습니다. 마법으로, 속임수로. 사람 눈만 속이면 되니까. 2번, 개구리가 밥상머리에 올라오는 것, 그들도 속임수로 해냈습니다. 3번, 온 천지에 이와 모기가 들끓는 것, 여기서 마법사는 중단했습니다. 여기서 못 했어요. 마법사가 따라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법사가 “이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마법사 입에서 이야기했어요.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출 8:9)

여기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그 마법사 입에서 그만 고백되고 말았죠. 1번, 2번, 3번 하고 난 뒤에 4번, 파리 재앙부터 모세만 합니다. 모세만 하면서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까지는 하나님께서 애굽 나라 중에 이 히브리인들이 사는 지역과 애굽 사람이 집단 돼 있는 지역과 구분해서 히브리인들이 사는 지역에는 재앙이 안 내렸어요.

단절을 보여주고, 세 번째 모기 재앙이 안 된다는 걸, 단절을 보여주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람을 구별한 겁니다. 구별할 때 인간적인 태도나 인격을 보고 구분한 것이 아니에요. 다발로 구분한 거예요. 사람의 일은요, 인간 대 인간의 개인적 일이지만 하나님 일은 그 차이점은 뭐냐? 하나님은 인간을 다발로 본다는 거예요. 이걸 ‘무차별적이다.’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태도, 행동, 자세, 전과 몇 범, 이런 건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끼리 차별하는 그 차이를 일체 받아주지 않습니다. 사람 대 사람 사이,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전혀 모르는 바에요. 묶음으로 본다는 거예요. 무차별적이에요. 차별 없습니다.

이것은 이 열 가지 재앙의 취지가, 열 가지 재앙을 인간들이 알아서 스스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상황이 그다음 절차로 강제 이동시킵니다. 완전히 컨베이어 시스템 같아요. 그다음 차례, 그다음 차례. 마치 콜라 하나 생산하는 것처럼, 선반에 실려서.

그 열 가지 재앙의 특징이 세 가지 중요 절차로 나뉘어지는데 이게 결국 뭐냐면 ‘너’를 없애는 거예요. ‘너 자신’을 없애는 겁니다. 그 과정이 절차에요. 나한테 내가 최초의 주인공이잖아요? 최초의 주인공이 사라지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 부재하지 아니하면 마지막 열 번째 재앙, 어린 양의 죽음이 야기한 무시무시한 상황을, 환경을 인간은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살아서 목격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차이점은, 하나님의 일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환경으로 들이닥쳤다는, 실제적인 환경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에요. “어떻게 바르게 살면 구원받습니까?” 이 문제가 날아간 거예요. “어떻게 착실하게 살면, 얼마나 충성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천국 갑니까?” 이 문제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어요.

그것은 사람의 일이에요. 종교는 사람의 일입니다. 종교는 사람의 일이니까 자꾸 “내가 뭘 하면 됩니까? 내가 뭘 하면 됩니까?” 이런 쪽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애굽의 바로 왕이 모세 앞에서 마법사를 내세웠다는 거, 그리고 첫 번째 두 번째 그들이 해냈다가 세 번째에서 그들은 좌절해버렸다는 거예요.

그들 입에서 나온 고백이 뭐냐면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라는 사람의 일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을 그냥 숨김없이 터트려버리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악마의 활동의 가치를 인정해야 되는데, 악마의 활동이 항상 우리 개인적으로 인간적인 인간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언제부터 예수와 관계있었는데?” 악마가 딱 쑤시고 들어가요. “너 교회 몇 년 다녔어?” “60년 다녔습니다.” “너 뭐 예수하고 관계있어?” “관계없습니다.” 예수하고 관계없는데 교회 60년 다녔어요. 예수 아무 상관없는데 목사, 전도사, 그리고 장로, 집사 되었습니다. 물론 평신도는 기본 포함되고요, 주일학교 포함시킵니다.

예수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복음을 이야기할 때 참 재밌는 현상이 있어요. 복음 듣고 돌아간 사람이 복음 듣고 남아 있는 사람보다 열 배, 스무 배, 삼십 배, 60배, 백배나 많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 줘야 돼요. 그들은 왜 돌아갔는가? 왜 돌아갔는가. 왜 얌네와 얌브레 이 마법사는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냥 “이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하고 그러면서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는가, 그 이유가 뭐냐?

열 가지 재앙의 절차 속에서 주께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것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다.” 그게 뭐 어때서? 하나님의 일이 뭔데? 그게 뭐냐, 어린양의 출몰이고 출현이에요. 어린양이 출현하는 거예요. 사람이 있던 자리에, 그 있는 세계에 어린양이 출현하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 이전에, 히브리 되기 이전에 아브라함이 있었잖아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어요. 그 약속이 현실적으로 등장할 때 이렇게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하는 때인데, 창세기 22장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들을 죽이라 해놓고 사전에 어떤 언질도 없었어요. 그냥 “네 아들을 바쳐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시는 “네 아들 바쳐라.”에요. ‘근처 수풀에 양이 있는데, 양을 대신 받쳐라.’ 이런 이야기 없었어요. 그냥 네 아들 바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수양은 없는 존재예요. 없는 거예요.

없다는 말, 성령 받은 성도한테 가장 중요한 것……, 내가 있다는 것은 안 중요해요. 내가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게 없는 것이 나에게 등장했다는 사실, 없는 것이, 수양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수양이 왜 나와요? 자아의 가치를 망치려고 온 거예요. 자아의 가치를. 나를 감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감산이라는 말은 마이너스라는 뜻이에요. 나를 빼기, 하는 거예요. 매사에 나를 빼기, 하는 겁니다. 나를 소멸되게 하는 거예요. 그 수양이 등장하셔서,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해서 그 수양이 말씀을 해 주셨고, 이 말씀의 세계가 역시 없는 세계로 등장하는 거예요.

성경책은 우리나라에만 수천 만권이에요. 하지만 성경의 말씀이 등장하는 것은 성령 받은 성도에게는 “없는 게 등장했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없는 말씀이 등장했네?” 기독교 서점에 가면 성경책 많아요. 그것은 말씀 아니에요. 그냥 말씀이 아니고 ‘없는 말씀’이 내게 찾아온 겁니다.

병원에 가보면 장기 환자 코마 상태라 하지요, 의식 불명 상태, 의식 불명 상태를 내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드라마 같은데 간접적으로 보게 되면 주인공이 악당들에게 맞아서 거의 죽은 채로, 코마 상태로 있습니다. 코마 상태에 있는데 그게 드라마 끝이 아니고 16회 끝난다면 14회 정도에 그런 일이 있어요.

사랑하는 여자분이 자기가 사랑하는 주인공 죽었다고 울고 있을 때 손가락이 움직여요. 카메라에 그게 잡혀요. 그렇게 손가락이 움직이는데, 말씀은 살았고 생명력이 있어요. 분명히 죽었는데 말씀이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남아있는 복수극을 빨리 더 처리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나쁜 놈 다 죽여야 드라마 16회 끝날 거 아닙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그 피를 자기한테 막 적시려고 해요. 그러니까 복음 듣고 간 사람들의 특징이 그거에요. 뭐 좋은 거, 십자가라고 하면 자꾸 믿으려고 해요. 그게 아니고 우리 손에 피를 적시는 게 아니고, 피가 와서 우리 손을 적시죠. 피가 와서! 없는 게 와서 있는 나를 모독하는 겁니다. 모독하는 거예요.

왜 복음을 듣다가 이제는 안 듣는가? 자기 자신을 모독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안 망가지려고 하는 겁니다. 성경에 그것을 넓은 길이라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 넓은 길. 여기에 누구 도움이 필요하냐? 악마의 도움이 필요해요.

악마는 아침부터, 9 to 5, 끝까지 계속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심지어 밤중에도, 꿈에도 이야기 합니다. “너 예수랑 무슨 상관있는데? 너 교회 열심히 나간 거 내가 인정하겠는데, 너도 알다시피 넌 예수와 상관이 없잖아. 무슨 소용이 있는데? 아무 소용이 없잖아.” 우리가 할 말을 잃죠. 그 악마의 말 앞에.


악마는 또 이야기합니다. “너 독립적으로 살아가려고? 너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잖아.”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어떻게 반박을 해요? 매일 그렇게 살잖아요. 나 홀로 살고 싶어 하잖아요? 무슨 반박이 돼요, 이게! 코마 상태를 거쳐서 말씀이 나를 살리게 되면 더는 우리가 홀로 안 있게 된 처지, 혼자 살아가지 않는 처지가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얀네와 얌브레 그 마법사를 필요로 해서 다 지으시고, 활동케 해요. 그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스스로 뽑아낼 수 없는 자아를 우리에게서 뽑아내기 위함입니다. 빼내기 위함입니다. 열 가지 재앙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다음, 또 그다음 절차로 계속 가는데 도중에 새고 옆으로 빠지고 난리죠. 끝까지 가야 되는데.

끝까지 자꾸 가다 보니까 애굽의 바로왕도 마찬가지고, 얀네와 얌브레도 마찬가지고, 애굽 사람도 마찬가지고 뭐만 자극받느냐면, ‘진짜 복음 듣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어.’ 자기가 죽는 수가 있대요. 이 말은 뭐냐면, 인간이 그동안 악마한테 가스라이팅 당한 이유가 악마로부터 죽음에 쫓기는 자체가 삶의 동력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안 죽으려고 버티는 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살아 뭐합니까? 결국 넓은 길, 멸망의 길인데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이 이미 이 세상의 신 악마 속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제가 아까 하나님의 십자가 밑에서는 인간은 다발로 다뤄진다, 개인으로, 다발로 나눠진다고 한 거예요. 다발로 다룬다는 말은 멍청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복음 듣다가 간 사람들, 그 사람들은 뭐냐? 마법사를 찾아요. 죽기는 싫고 마귀는 싫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힘이거든요. 이 마법사가 우리에게 제안한 것은 네가 죽지 않는 방법,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네가 천국 가는 방법을 내가 알려줄게.” 그게 마법사에요. 마법사의 역할이 그거에요.

마법사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납득이 되는 이야기는 그 마법사 이야기만 이해가 되는 거예요. 마법사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동일하기 때문에. 마법사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 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늘 설득시킵니다. 이게 선악과 사건, 그 따먹었던 취지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마지막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확장시켜 유지시킨다는 뜻이에요.

선악과가 뭐냐? 선악과가 담김으로 말미암아 악마가 우리를 먹잇감으로 해서, 악마는 먹잇감을 쥐면 놓치지 않아요, 먹잇감을 쥐고 우리에게 집어넣은 악마의 동일한 마음이 뭐냐?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세 가지인데요.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공격하고 방해하고 파괴한다. 이 본성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훼방을 논다면 그게 누구든지 하나님이든 누구든지 공격하고 살해하고 파괴한다.

실제로 어떤 인공지능 회사에서 이걸 실험했어요. 인공지능을 인간의 감성적 영역까지 실험해봤어요. 지금 능력으로서는 그 기술이 되는데 실험을 했어요. 인공지능한테 싫어하는 것을 자꾸 이야기하니까 인공지능이 좀 참아요. 좀 참고 있다가 나중에 싫은 걸 자꾸 하니까 그 명령자를 인공지능이 죽여버렸어요. 물론 가상입니다만.
그래서 대비해서 인공지능보고 명령자 인간을 죽이지 못하도록 프로그램을 짜니까 이번에는 자기와 인간 사이에 명령하는 매개체인 기계 자체를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그 티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얀네와 얌브레, 하여튼 발음도 어려워요, 이 사람들이 왜 애굽이라는 거대 국가……, 국가는 통합체라는 뜻이에요. 의견이 하나같이 일치됐다는 뜻이에요. 하나같이 일치된, 하나의 집단으로 튼튼하게 그 당시 최고의 국가로서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얀네와 얌브레의 의식이 완전히 거기서 전체를 덮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개인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히브리인들도 애굽 나라 바로 밑에서 벗어나는 것은 안 된다고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어요. 배운 가락이 그거니까요. “국가가 우리를 살려주는데 네가 뭔데 애굽 나라를 공격하느냐? 이 모세, 아론아. 하나님이 너 보낸 거 맞아? 아닐 거야. 암 아니고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힘들게 할 리가 없어. 하나님이 우리를 망치게 할 일은 없을 거야.”

국가가 국가로 유지된다는 것이 이것이 가만히 논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다음 네 가지의 가치를 활용해야 국가가 유지되는데 이 네 가지 가치가 뭐냐면, 평가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하는 거예요. 평가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하고. 거기서 그들은 그거 가지고 뭐 하는데? 평가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해서 그래서 뭘 낳는데? 하나같은 것을 낳아요. 하나같은 것. 하나가 아닙니다. 1이 아니고 1 같은 것. 모든 것을 총합시키는 그 힘으로 하나를 뭉치는 그 하나를 지향하는 거예요.

‘손에 손잡고’에요. ‘We are the world’에요. 모두가 하나를 추구하는 거예요. 어떤 방법으로? 평가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하고. 누가? 마법사가. 마법사가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두가 거기에 길들여진 거죠. 인간은 모두 길들여진 의식이에요. 한순간도 마법사하고 관계 끊은 경우가 없습니다. 밥을 먹든지 잠을 자든지 매일같이 마법사가 연결 지으면서 그 하나, 최고의 하나와 연결되어 있는 판타지에, 환상에 매일같이 우리 인간은 사기당하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죠. “나는 가짜다.” 가짜 정도가 아니에요. “나는 거짓이다.” 거짓 정도가 아니에요. 인간은 가짜가 아니고 거짓도 아니고 매일같이 사기 치고 사기당하는 거예요. 인간이 사기를 왜 당하냐? 사기 치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하는 거예요. 인간은 사기 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기 치기 위해서는, 힘내기 위해서는 밥 먹어야 돼요. 콩나물국 해서 밥 먹고 또 잠을 푹 자야 사기를 칠 수 있어요. 초등학생이 신경주역 ktx 선로에다가 돌멩이를 얹어 놓는 이유가 뭐냐? 사기 치려고 한 거예요. “이 돌멩이 왜 얹어놨니?” “소년원에 가려고요.” 그 애에게는 소년원이 판타지에요. “너 때문에 수백 명 죽는 거 몰라?” 그건 난 모르겠고 나야 판타지만 오직 하나로 실현되면 그뿐이에요. 마귀로부터 그렇게 세뇌받은 거예요.

악마는 한번 잡은 고기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라도 예외가 아니에요. 누가복음 22장 31절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주님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베드로도 악마의 밥입니다. 인디언 밥만 밥이 아니에요. 악마의 밥입니다.

우리 모두가 매일같이 꿈꾸는 것은 환상 뿐이에요. 사망 보험금 들어놓고 ‘내가 언제 죽나’ 그것도 환상이에요. 하여튼 머리에 뭐 떠올랐다 하면 다 환상이라고 보시면 돼요. 오직 내가 하나같은 것, ‘as If’ 뭐 하나같은, 유사하나, 절대적인 하나. 이미 우리는 이 세상 신에게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걸 ‘죄의 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 그렇다면 복음을 안 듣겠다고 도망친 이유가 안 망가지려고 했다 이 말이죠. 안 망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바르게, 훌륭하게.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이 거룩하니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이 인도하는 하는 것은 하나같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에요, 하나. 없는 것을 출현시키는, 홀연히 나타나게 하는 어린양 하나에요. 아까 가지 재앙은 마법사가 해냈잖아요. 그 뒤엣것은 못 해냈어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에 ‘저 마법사가 재주 좋으면 뒤엣것도 할 수 있다.’ 할 수 있겠죠. 악질, 파리, 지독한 질병,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할 수도 있겠죠. 점점 더 악마가 힘이 세면.

그러나 마지막에 못하는 게 뭐냐? 장자의 죽음을 못해요. 내가 죽는 것보다 더 심한 모독이 뭐냐? 내 몸에서 나온 자식, 나는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내 자식이 먼저 죽는 거예요. 이것은 못 견딥니다. 왜냐면 평소에 자식을 위해서 부모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래서 자식이 종교처럼 되어 있거든요.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첫 번째부터 네 번째에 나일강이 피 되는 것, 개구리, 이,파리는 일시적 생활에 불편함을 주기 위한 재앙이죠. 그다음에 악질(생축에)과 독종은 직접 가축의 신체를 건드리는 거죠. 7, 우박과 8, 메뚜기 9, 흑암 10, 장자의 죽음은 직접 인간의 목숨을 노리면서 항구적인 재앙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제고할 수 있는 것은 재앙뿐이다. 이미 재앙 속에 있어요. 그 재앙 속에 하나님마저 같이 합세해서 “나도 재앙 받으마.” 하고 주님께서 먼저 재앙을 받아버렸어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는, ‘살아야겠다.’는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내가 죽는데, “내가 죽었어. 네가 뭔데 살려고 해? 나도 죽기 위해서 이 땅에서 태어났는데?” 이게 종교입니까? 그냥 사실이에요. 판타지는 있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죽음은 판타지를 제거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은 이미 죽음을 기정사실화해서 죽음 세계에서 말씀을 했기 때문에 3년 동안 따라다닌 예수님의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달리니까 전부 다 도망갔어요. 뒤늦게 본전 찾겠다고. 예수님의 제자도 그렇잖아요.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이 참 좋은 것 이야기했어요. 성경을 보고서 믿는다는 것으로 과연 제대로 된 믿음이 보장되겠느냐, 이게 불분명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소리 기능이 목격 기능보다 더 우세합니다. 보내심을 입은 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10장에서. 이 말은, 보는 기능을 이미 다 해봤는데 그게 실패로 끝났어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했거든요. 요한복음 20장에. 보는 것은 판타지를 유발해요. 꿈에 뭐 보는 거.

듣는 것이 더 우월하고,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뭘 하는 거예요. 어떤 행위를 실제로 하는 겁니다. 어떤 걸 하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거 하고 싶은 사람 별로 없을 건데 하여튼 성경에 있으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19장 9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렇게 하니까 듣던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그러면 장가 안 가면 되지. 그러면 장가갈 이유가 없네요.”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와 못 헤어진다고 하니까 거기에 반응을 나타내는데 어떤 과도한 반응을 나타내냐면 “그럴 것 같으면 장가 안 갈래요.” 이런 과도한 반응을 나타내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것만큼 힘들다’고 하니까 12 제자들의 반응이 “그럼 아무도 못 가네요, 천국.”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한방에 침으로, 숨겨져 있는 침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계시는 방충망이에요. 다 훤히 보이는데 모기가 못 들어와요. 보고 있는데 그 세계에 못 들어갑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그걸 못 해냈고, 항상 배우나 진리,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물이 포도주로 변할 수 있습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생명이 된다는 것, 그것 인간이 그걸 해낼 수 있어요?

“하나님 우리는 못하죠. 주님 그건 못합니다.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먹는다고 해도 그게 생명이, 영생이 된다, 그거 못 합니다.”라고 할 때 깐족거리는 마귀가 와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예수와 상관이 없는 거야.” 그걸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너는 예수와 상관이 없어.” 아주 깐족거리면서 우리의 약점을 더욱더 후벼 파지요.

주님의 말씀은 시침하는 것, 침을 꽂는 것처럼 우리 속에 숨겨놓은 그것을 향해서 계속 가는 거예요. 우리의 자아가 부재한지 존재한지를 확인차 들어가는 겁니다. 자아 없는 사람이 없어요. 자아가 다 있어요. 있는데, 주께서는 자아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고 자아에 구멍이 났었냐를 보는 거예요. 구멍이 뚫렸나를 보는 겁니다. 자아가 애초에 없는 인간은 없어요.

그게 뭐냐? 탕자거든요. 탕자의 특징은 자아가 없는 게 아니에요. 구멍 난 자아를 들고 온 거예요. 다시 아버지 집으로. 탕자의 특징은 구멍 난 자아를 들고 오면서 뭐를 생각하냐면, 모든 차이를 털어내고 자기 아버지 집으로 왔어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그게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 유산 들고튀어서 날린 사람이나 유산 안 날리고 아버지 옆에 붙어 있던 큰아들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는 거, 모든 것이 다발이고 무차별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고민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은 차이에서 나오는 거예요. ‘왜 나는 저 사람처럼 행복하지 못할까?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단란한 가정이 되지 못할까?’ 여러분 단란한 가정요? 남의 가정에서 사흘만 살아보세요. 못 삽니다. 자기가 살던 곳이 최고죠. 남의 가정에서 못 삽니다.

말씀은 구멍을 뚫어서 네 자아에 구멍이 난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천리만리 내빼는 게 주특기에요. 내빼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하나님이 나를 방해하면 공격하고 살해하고 파괴시켜 버린다.” 하고 내빼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지옥 가서는 무슨 말을 합니까?

지옥에는 입구가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새삼스럽게 입구가 있어요. 왜냐면 우리가 이미 지옥이기 때문에 입구가 필요 없는 반면에 천국은 지옥이 있기 때문에 입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말하고 대화하고 사귀면서 이야기하는 것, 고린도전서 6장에 그런 말씀 나오지만, 수요일에 말씀드렸는데요,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거예요. 그리고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는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사람 만날 때 그 사람을 평가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한테 이익을 얻기 위해서에요. 그 이익이 뭐냐? 사기 치려고 만나는 거예요. 이용하려고. 실컷 그래놓고 나중에 죽고 난 뒤에 지옥에서 보니까 뭐라고 하냐면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연기가 요새 많이 부족하죠.

원래 인간은 내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는데 그냥 하나님께서 주셨어요.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모든 것을 친히 주시는 분이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에요.

그렇게 교회 오래 다녀놓고도 그것도 몰라서 그렇게 속이 후련했나? 하나님은 친히 주시는 잡니다. 그런데 그럼 왜 마귀를 이렇게 풀어놨느냐? 여러분, 마을 사람들이 마을 길을 새로 닦아놓기 위해서 시멘트로 포장합니다. 물컹한 콘크리트로 해놓고 글자로, 언어로 “들어가지 마세요. 공사 중입니다.” 하잖아요.

밤에도 불 켜놓고 못 들어가게 딱 했는데, 제일 웃기는 이야기가, 강아지가, 사흘 동안 고생고생해서 해놨는데 강아지가 좋~다고 폴짝폴짝 뛰면서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세 번 가고, 가는 거예요. 강아지가. 강아지를 붙들고 “성경 말씀에 너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지옥 가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하는 게 하등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강아지는 성경 말씀을 못 알아듣는데요? 강아지는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예수하고 상관없기 때문에. 마귀하고 상관있지요. 우린 강아지 같은 거예요.

그저 ‘나 건드리면 난 죽여버린다.’ 그거 하나만, 선악과 고집, 달랑 그거 하나만 있다고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거, 마태복음에 보면 이렇게 주신다고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치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이유가 뭐냐? 깨끗이 은혜를 주신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에 강아지가 이미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 땅에 모든 것이, 너는 부재해도 존재하는 것이 있는데 마귀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마귀 하나가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 마귀의 하수인으로 같이 좋~다고 그렇고 있고요. 그저 하는 게 평가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하고. 안 죽으려고.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 보면 마귀가 인간을 다룰 때 어떻게 다루는가? 죽기 싫어하고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자아가 구멍이 뚫리지 않으면 우리는 늘 후달리고 있어요. 어떤 알 수 없는 공포에 쫓기고 있고 후달리고 있습니다.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내가 지금 마귀에게 쫓기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변명과 자기 정당성으로 나타나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다, 어떻게 잘 해보려고, 어떻게, 어떻게……. 전부 다 변명과 정당성을 풀어놓는 거예요. 그게 인간 대 인간의 대화고 한 시간 동안 하는 전화 통화잖아요, 그게.

다시 마태복음 19장 한 번 봅시다. 중요한 건데요. 19장에 계속 보면 1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주께서 뜸 들이는가? 이런 말 하려고요.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

“자, 간다!” 주께서 말씀을 던지십니다. 투수입니다. “간다! 도착했냐?” 도착해보니 고자 되라는 이야기거든요. “어어어어, 추잡스러워라.” 갖다버리죠. 내가 뭐가 못나서 고자가 돼야 돼요? 내가. 내가 왜 고자가 돼야 합니까? 무슨 말이냐면, “신이시여, 내가 원하는 걸 달라고, 내가 귀히 여기는 걸 달라고요.”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코마 상태야. 너는 식물인간이야. 이미 마귀의 마음 자세로 죽은 자에게 뭘 줘?” 너는 통과해야 한다고요, 통과.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어린양의 죽음이 기다리는 그 공간,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데리고 간 도착지점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무리 생각해도, 평가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해도 이 현장에 너와 나랑 둘이 있어요. 여기서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인간은 인간과 결합 될 수가 없어요. 이게 신체성 때문에 그래요. 신체성은 각자 자립적이고 독자적이고 독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립성이 있는 신체기 때문에 신체는 신체와 서로 이용하고 거래할 상대지 한 몸이 될 수가 없어요. 꿈을 꿔도 따로 꿔요.

그런데 인간의 이 독한 종교성, 하나가 아니고 하나같은 것이라도 뭔가 있어야 허한 것을 메꿀 수 있을까 싶어서 인간은 종교를 만들었는데, 그 종교 가운데 가장 독종의 종교가 뭐냐면 바로 힌두교입니다. 마귀의 극단은 유대교, 바리새인들이고요, 인간의 힘으로 버티는 가장 독종인 것은 힌두교에요. 힌두교의 시바신입니다.

그 시바신은 어떤 교리를 가지고 있냐면, 내가 지은 죄, 업보를 내가 회수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영원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뺑뺑이 돌다가 어지러워서 계속 영원토록 고생고생을, 태어나도 그 고생, 태어나도 또 고생, 시간의 무한 루프죠, 고생이 반복되는.

남자들은 이 악몽의 루프를 다 알고 있어요. 군대 제대한지 40년이 넘었는데 계속 군대 꿈꿔요. 식은땀이 흘러요. ‘아 제대했잖아.’ 여자들 보고 너도 군에 가라고 하는 것은 진짜 여자에 대한 크나큰 저주의 말이에요. 무한 루프.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뭐냐? 다음에 다시 악몽으로 고생하는, 생로병사의 그 고생길을 지금 내 대에 끊어버리는 방법이 뭐냐? 그 악을 내가 담고 내가 희생 제물이 되는 그 수법을 힌두교 시바 여신이 그걸 만들어 내줬어요. 아, 독하죠.

본인이 고통의 주기를 끊기 위해서 본인 자체가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방금 제가 이 종교를 힌두교라고 했죠? 기도원에 가면 많~습니다, 그런 힌두교 신자들. 교회에 많~이 있어요. “주여 교회 철거됐는데 400억 더 받게 하옵소서.” 뭐 그런 교회도 있어요. 자아에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자아에 구멍이 안 뚫리고 자아를 지킬 요량으로 교회 나옵니다.

주께서 주시는 것은 이거예요. 네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안 줘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대신 죽으심입니다, 대신 죽으심. 다시 말해서 너에 대해서 어떤 것도 내가 요구하거나, 너에게 요청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말씀으로 요청한 것은, 네가 철딱서니 없는 그 강아지처럼 뛰는 게, 악마가 네 속에 있음을, 그 흔적이 깨끗한 시멘트 포장 위에 구멍 자국이 남으로서 내 안에, ‘나는 남한테 사기 치는 마귀의 종이었구나.’라는 것을 평생동안 그것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거예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죄의 종이 아니면 우리가 의의 종이 될 수가 없어요. 죄의 종을 거쳐야 해요. 그 때문에 이 말씀 듣는 거예요. 어떤 여자들이 말씀을 항상 배우나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 그런 현상은 너무나 당연하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손에 피를 묻히는 게 아니고 피가 와서 손에 묻혀주게 되면 우리는 손가락부터 까딱까딱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살아나는 게 아니에요. 내 속에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살아나는 거예요. 그 말씀을 전하는 자세는 내가 이미 뻥~, 하고 구멍이 뚫린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구멍 뚫렸다는 것이 뭔가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천 번을 봐도 귀한 말씀입니다. 19절,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평가, 관찰, 측정, 계산 셈하는 거 다 폐하리라. 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방충망이니까 못 들어오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는데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고, 이게 바로 이미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었던 것, 우리 안에 이게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50년 교회 다녀도 천국 못 가고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겁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안 다니고 지옥 가고 우리는 교회 다니고 지옥 가고, 지옥 가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오느냐? 하나님의 능력이 와요. 인간의 능력은 죽음에 쫓기는 게 동력이라면, 에너지라면 하나님의 능력은 뭐냐?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이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이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이 약한 것, 약한 것. 그러니까 제가 수요일 이야기했잖아요. 여자여, 약해져야 해요. 여자가 강하면 안 돼요. 여자는 약해져야 돼요. 남자도 약해져야 돼요. 그 뒤에 고린도전서 1장 마지막까지가 뭐냐? 너희 중에 강한 자는 없고 전부 다 멍청하고 약한 자들, 바보 같은 인간밖에 없다. 그 바보를 자랑하라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자신의 속셈을 고맙게도 마귀가 와서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교회와는 상관있고, 같은 교인끼리는 상관있는데 예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모르는 사이였던 저희들, 십자가의 능력이 와서 이제는 나는 죽고 십자가가 날마다 살리니 더이상 세상과의 어떤 차이를 두지 말고 나도 같은 못난 자인 것을 도리어 자랑하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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