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경건의 능력

아빠와 함께 2023. 6. 4. 20:18

경건의 능력 

2023년 6월 4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3:2-5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도는 경건을 둘로 나눕니다. 이는 그동안 인간 세계에서 경건을 강조해 왔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자신이 수행한 경건을 자기 에게로 가져와서 그것을 죽어가는 자기를 살리려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방법에 대해서 사람들은 본래의 인간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본인으로 지옥으로 데려갈 뿐입니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경건을 가지고 사도는 ‘경건의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이 미지막 때에 끊임없이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고통의 요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처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이런 방식입니다. 즉 “경건하게 살면 덜 힘든 인생이 되겠지”라고 고대하면서 경건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께서 죽음으로서 다녀가신 곳입니다. 쉽게 말해서 화장실 천장에서 쥐가 죽어 냄새가 나면 그 냄새는 화장실 전체에 파급되는 것처럼, 이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죽으심으로 이로서 모든 인간들은 죽음의 가스에 도취되어 하나 둘씩 쓰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죽음의 시작이고 모든 인간의 죽음은 그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스스로 살려고 경건에 나서는 것은 이 또한 하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모독하는 행위에 해당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 중, 특히 도마는 평소의 예수님 말씀 하나하나에 이 세상의 구원이 불가능함을 감지했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 14:5)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천국으로 가는 것이 막혀 있고 또한 본인들이 알지 못하는 쪽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바는 경건 생활입니다.

하지만 그 경건생활이 천국가는 길이 안됨을 도마는 인정한 겁니다. ‘경건의 능력’은 인간쪽에서 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경건의 능력’은 인간들이 벌리는 ‘경건의 모양’의 실상을 들추어내는 기능으로 일하십니다. 인간들은 말씀대로 살면서 실은 자기 주체를 살리려 합니다.

즉 어느 정도 경건하게 되면 더는 말씀에 대해서 눈 돌려버립니다. 복음에 대해서 알만큼 알았으니 나를 산채를 유지하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싶었던 겁니다. 불신자들은 자기에게 복종하고 자기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0.99999…은 결코 1이 아닙니다.

경건스러운 것은 결코 경건의 능력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경건의 모양’ 안에서 ‘돌려막기’하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경건의 모양을 못버리고 여기에 매여삽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지킬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의’입니다. 원래 인간은 창조될 때, 자기 의를 갖출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악마를 만나고 난 뒤 ‘자기 의’가 마음 속에 자리잡은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악마를 보내십니다. 그 ‘자기 의’를 그냥 악마에게 돌려주라는 겁니다. ‘자기 의’가 빠져 나간 자리는 더 이상 본인이 지킬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소위 “망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의’ 건사하겠다고 평소에 자기에게 몸 바쳐 왔는데 그 잘난 자기 의가 남아 있지 않으니 인간은 뭘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길은 말씀이 말씀으로 자기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입니다. 즉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의 휴식’입니다. 하나님께서 힘들게 노동해서 획득한 그 결과가 안식이요 말씀의 완성입니다.

“다 이루었다”의 능력이 안식의 공간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겁니다. 히브리서 4장 전체에 걸쳐 다음과 같은 순서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다 이루시고 안식처에서 자기 백성을 기다리고 계시다.
둘째, 그곳으로 가는 노선이 개설되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에서 말씀으로 이어지는 노선이다.
셋째, 그 말씀 안에서 새로운 입체적 공간이 발생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개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들어선다.
넷째, 그 공간 안에서 성도는 말씀에 의해서 조각나서 벌거벗은 존재가 된다.
다섯째, 이제 성도는 스스로 구원될 길이 없다. 하지만 대제사장이 그 말씀의 공간에 하신 일이 있다.
여섯째, 성도는 드디어 은혜가 그동안 흘러보낸 그 ‘은혜의 보좌’에 당도하게 된다.

여기서 네 번째에 해당되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따라서 성도는 더는 자기 자존심이나 자존감이나 자기 의를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 공간에는 예수님의 피가 ‘말씀의 완성형’으로 능력을 제공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동안 ‘말씀의 그릇’으로서 예수님에 의해 친히 활용당하고 온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매순간마다.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감사하면 됩니다.

왜 성도는 세상이나 주님에 대해서 분노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죽음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모양’으로 버틸 때까지 버터보자는 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망하되 아주는 안 망하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망함 뒤가 바로 천국의 언저리입니다. 예수님처럼 성도도 아주 망해야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쉴새없이 쏟아지는 말씀의 알갱이의 유입에 순응하고 복종합니다. 그 말씀은 쉬지도 않고 성도로 하여금 자기 것이 없음을 밝혀줍니다. 주님은 말씀만 전파하기 위해서 성도를 붙들어주십니다. 성도는 힘주어 자기를 정착시키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흘러가는 강물에 휩쓸려가듯이 매일같이 주신 말씀 안에 머물면서 말씀의 도착지점으로 같이 휩쓸려가고 있음을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서 가신 주님의 피만 바라보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디모데후서 3장 2-5절(경건의 능력)230604-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2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3:2-5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the power thereof: from such turn away.

여기 본문에 하나님의 경건에 대해서 그냥 경건만 말씀하시면 되는데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경건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경건의 모양, 또 하나는 경건의 능력, 이렇게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전부가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러면 경건의 능력은 어디에 나오느냐? 경건의 능력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집어넣어 준 거예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주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대로 아버지 관계 사이에서 경건하게 살았잖아요. 그 경건하게 산 그것이 우리에게는 능력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말씀에 전문가들이었어요. 그 말씀 가지고 그들이 만들어 낸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경건의 모양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이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은 대립 관계고, 반대 관계고, 대치 관계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경건의 모양한테 튕겨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이 땅에는, 이 인간세계에는 경건의 모양만 있어요.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여하게 되면 경건의 모양만 있는 이 세상에 경건의 능력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경건의 능력이 하는 일은 뭐냐? 경건의 능력이 뭐냐?”라고 이렇게 묻게 되면 경건의 능력이 할 일은 경건의 모양을 들추어내는 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보통 연고자 없는 시신이 길에 있을 때는 시체를 그냥 놔두지 않고 거적때기로 덮어주죠. 비 오면 썩고 날짐승, 새들이 와서 뜯어먹으면 안 되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경건의 능력은 우리를 덮고 있는 우리라는 시체를 덮고 있는 거적때기를 들추는 일을 하는 겁니다. 시원~하죠. 더울 때 거적때기 덮으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우리의 경건을 들춰내는 거예요. 들춰내면,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되는데……, 구더기가, 날 파리들이 얼마나 거기에 꼬여 있겠습니까? 그걸 들춰내는 거예요.

그래서 이 경건의 능력을 묻기 전에 인간들은 평소부터 경건의 모양을 해왔던 겁니다. 경건의 모양을 한 이유가, 3장 1절에 보면 힌트가 나와 있어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마지막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유도돼 모든 것이 고통스러운 이 세상에서 인간은 이 고통을 어떻게 하면 극복하고 버텨낼까 싶어 말씀 가지고 경건을 생산해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경건의 모양이에요.

‘조금 더 나한테 불행을 줄이고 저주를 줄이고 하나님의 징벌을 없애는 방향으로 가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 옳다구나, 말씀을 지키면 되겠구나.’ 그 말씀 지키는 거 바리새인은 안 했습니까?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는데?

그리고 이 경건의 모양을 하는 이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 했겠어요? 열심히 필기 해가면서 열심히 경건의 모습을 하죠. 우리 교인들의 특징이 설교 시간에 필기를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주 기쁩니다. 왜냐면 필기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에. 설교 필기해서, 공부 잘한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경건의 모양을 했는데, 요한복음 14장 5절에 도마가 아주 결정적인, 결정타를 날리는 질문을 던집니다. 14장 4절, 5절에 보면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예수님께서 운을 먼저 뗐거든요.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가 이 이야기 할 때요, 너무 중요하니까 한 번 더 하겠습니다. 도마가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떻게 알겠삽나이까.” 도마가 하는 이야기에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어요. 하나는, ‘우리가 필기해서 공부하고 배웠고 경건한 것이 이게 길이 아님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절대로 길이 아님을 우리 제자는 낌새를 챘다는 거예요. 이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할 때 첫 번째 잊어버리지 마세요.

첫 번째는, 인간이 아무리 해도, 경건하게 노력하고 말씀 지켜도, 바리새인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 해도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두 번째는 뭐냐? 그 길을 모른다는 사실. 첫째는, 인간이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주께서 넌지시 계속해서 낌새를 줬다는 것을 도마가 감을 잡았어요. 도마는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종합해보면 ‘구원이 안 돼. 천국 못가.’ 이게 반복해서 말씀 속에 내용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도마가 눈치 챈 거예요. 내가 너한테 말씀하면 그걸 잘 적어서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계속해서 주께서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는 것은 “없어. 안 돼. 못 가, 천국은. 너는 지옥 가야 돼.” 그걸 반복해서 예수님께서 꾸준히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그걸 도마가 대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그 길을 모른다는 거예요. 첫째는 불가능하고 두 번째는 무지하고. 뭐 둘 다 구원은 끝난 거죠. 두 가지 요소 합치면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함축해서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예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있는데 인간의 길은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 생각과 인간 생각이 지금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떠나려고 해요. “나 갈게.” “어디로 가십니까?” “너는 그 길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저희들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구원의 길이 없다는 거, 그게 제자들이 갖춰야 될 기본 소양입니다. 구원이 없다는 거,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돼요.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다음에 길을 이야기 할 때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구원이 안 되고 불가능하고 그 길을 모르는 이유가, 네가 점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이 땅에 멈춰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시하는 길은 뭐냐? 흐르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멈추지 말고 흐르는 인간. 말씀이라는 강물에 몸을 실어서 말씀이 흘러가는 곳으로 그냥 흘러가야 된다는 거예요. 멈추는 인간 말고 어디로 떠내려가는 인간. 이걸 일종의 폭주트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냥 질주하는 기차라고 할 수 있고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 거고 성경에서는 기차로 표현하지 않고 여객선으로, 배로 설명했어요.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거기 배 한 척이 나와요. 이탈리아로 가는 여객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탈리아 가는 여객선 안에 276명, 사도바울 포함해서 277명이 타고 있어요. 그 배의 의미는 사도행전 27장 23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천사가 같이 동승하고 있어요.

천사가 동승하면서 어느 날 밤에 사도바울에게 천사가 일러줍니다. 사도바울이 먼저 천사가 알려준 결과를 그들에게 이야기하죠.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배가 손상된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천사를 통해 알려준 내용은 인생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것이라, 이거에요. 내 자리를 확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경건의 모양은, 바리새인뿐만이 아니고 오늘날 모든 인간의 경건의 모양은 뭐냐면, 내 자리를 떠날 생각을 안 해요. 확보할 생각을 하고 멈춰 있는 겁니다.

내 자리가 멈춰 있으면서도 구원될 수 있는 방안을 멈춘 상태에서 계속 꾸역꾸역 말씀가지고 조립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신학을 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런데 백날 해 봐야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요, 경건의 모양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경건의 모양은 인간 행위의 한계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올 때 바로 그런 경건의 자기 모양을 갖추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질문한 게 있어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니고데모야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했어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께서 던졌죠. 던지니까 이제는 니고데모가 자신의 본심을 감추지 못하고 거기에 대한 계획을 그만 무심코 입으로 토했어요. “내가 엄마 뱃속에 갔다가 어떻게 다시 나올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어요.

니고데모의 아이디어를 한 번 들어보세요. ‘나는 어른이다. 그런데 엄마 뱃속에 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되기 때문에 나는 축소된다. 작아진다.’ 아무리 작아져도 역시 나는 살아있죠. 그리고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역시 살아있다. 10개월 동안 태아로 있다.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10달 후에 다시 내가 해산 돼서 살아 나왔다. 산 채로 들어갔다가 배 안에서 살아 있다가 자궁 안에서 살아있던 내가 다시 바깥에 살아있다.’

그 여정 가운데서 니고데모가 죽은 대목이 어디입니까? 없어요. 죽은 대목이 없는 거예요. 경건의 모양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기 위해서 자기가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게 불신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산 사람으로 확고히 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기 자아를 만들어 내는 작업, 이게 바로 기껏 만들어 내봐야 경건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말씀을 연구해도 자기가 죽어야 마땅함은 아예 자기 생각에서 완전 날아가 버렸어요. ‘죽기는 내가 왜 죽어? 말씀 지키면 되잖아? 말씀 지켜서, 복음 믿어서 살아있는 나를 살아있는 천국으로 보내면 되잖아? 내가 뭐가 부족해서 죽어? 난 죽기 싫어. 산 채로 하나님 말씀을 믿고 싶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말씀을 주신 것은, 여기에 오늘 3장 2절에서 4절에 보면 총 항목이, 리스트가 18가지입니다. 아까 여러분 성경 보실 때 지루한 느낌 안 들었어요? 꼭 다시 한 번 해야 합니까? 1. 말세에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2. 돈을 사랑하며, 3. 자긍하며, 4. 교만 하며 5. 훼방하며 6. 부모를 거역하며 7. 감사치 아니하며 ……, 이런 식으로 계속 리스트 나오죠.

이 말씀은 우리 보고 망하라는 이야기에요. 니고데모는 자기가 망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망해?’ 지금 마지막 때에 자기를 사랑하며, 이 말뜻이 무슨 뜻이냐면 너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돈을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거는 망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질겁을 해요. 기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속에 있는 것을 솔직히 이야기해서 어떤 목사가 설교에서 “경건하세요.”라고 설교하면 그 목사 죽이고 싶어요. ‘뭐야 저거?’ 살인 충동을 느낀다니까요!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 본인의 자기 자리가 확고해져요. 주체 자리가 확고해진다고요. 망하기 위해서 말씀 지키는 사람 없어요. 안 망하기 위해서 말씀 지켜요.

어떤 사람은 저에게 말하죠. “목사님 이러다 망하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해요. “왜 망함의 뒤편을 생각 안 합니까?” 자, 망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뭐? 그래서 그 뒤편에는? “안 돼, 망하면.”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밤이 깊을 때 벌써 새벽 언저리에 와 있는 거예요. 망함의 뒤편을 생각해야 해요. 지금 열두 제자가 생각 못 한 게 이거에요.

수요일 말씀 드렸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 망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 그럴 일은, 망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베드로에게 이야기 했어요. “사탄아, 네가, 네 짓이 그 짓이다.”

왜 망한 뒤를 생각 안 합니까? 망한 뒤가 천국인데요. 다 왔어요. 다 왔다고요. 천국 가는 그 문턱이 뭐냐? 나답다고 여겨 왔던 것, 경건의 모양으로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고 버텨왔던 경건의 모양, 그게 나로 하여금 길을 막았다는 거예요. 주께서 제시한 그 천국 길을 내가 막았어요. 내가 망하면 되는데 안 망하려고 버티는 것이, 그게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내 할 도리를 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경건스럽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경건스러운 것은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스러운 것은 경건의 모양이지 경건의 능력이 아니에요. 0.999999는 결코 1이 아닙니다. 수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0.999999는 1, 근사치 1이라고. 아니에요.

인간의 사고 그것은 진화론에서 나온 겁니다. “양적 축적이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혁명과 혁명을 반복하다 보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천국으로 바뀐다는 그 주장을 한 거예요. 마르크스의 그 주장, 공산주의 사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진화론에서 나왔어요.

옛날에 기린이 땅딸막했는데 잎을 못 먹어서 환장을 했는데 자꾸 먹고 싶다, 먹고 싶다, 해서 목이 길어져서 기린 됐다는 이야기에요. 라마르크가 이야기 한 거지만 그걸 정리해서 다윈이 또 주장한 거예요. 오늘날 책에는 전부 그 이야기 밖에 안 나옵니다. ‘하고 싶다, 하고 싶다, 하면 기어이 네 꿈은 이뤄질 것이다.’ 별표 팍 찍고. 꿈은 이루어진다. 4강, 4강 되잖아요. 박지성 한 골 넣어서 4강 됐잖아요. 그게 교회까지 들어온 거예요. 마귀가 뭐 달리 마귀가 아니라 그게 마귀예요.

그럼 경건의 능력은 뭐냐? 경건의 능력은 휴식입니다. 휴식이에요. 다 이루었고 쉬는 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편히 쉬는 거예요. 그것은 시작한 말씀이 마지막 종착점이 있고 목적지가 있는데, 말씀이 우리를 집어넣고 말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마지막이 휴식입니다.

제가 휴식이라고 했지만 성경에서는 휴식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어요. 히브리서에서 그게 뭐라고 돼 있냐면 ‘안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안식’. ‘너희들 중에 하나님의 휴식에 참여할 자가 없구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자가 없구나.’ 안식이라는 말을 휴식이라는 말로 쓰는지 제가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만 던져놓은 것이 아니고 말씀에 관해서 주님이 친히, 열심히 노동을 하셨기 때문에 그 휴식은 일단 주님의 휴식이에요. 일한 자에게는 휴식할 권한이 있습니다. 주님이 노동하시고 주님이 다 성과를 이루었던 휴식에 참여할 자가 누가 있느냐? 그때 말씀의 같이 떠내려온 자만 휴식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휴식이 앞당겨서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을 가지고 경건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경건의 능력, 누구 경건? 주님의 경건의 효과, 효능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 말씀을 줬을 때 인간들은 자기에게 있는 어떤 내부적, 정서적 불안정과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게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기껏 하는 아이디어가 교회 남아서 목사님 말씀 듣고 순종해서 내 형편, 좀 살림살이 나아지고 살기 행복한 마음과 안정된 마음을 누리고자 열심히 경건 활동 하거든요. 그게 바로 경건의 모양이에요.

교회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 많이 내놓잖아요. 제가 보기엔 교회가 경건의 모양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 디자인을 설정한 엑스포 같아요. 전시회 같아요. “어느 모양이 여러분들 취향에 맞습니까? 여러분 편한 대로 제자 훈련에 참석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거예요. 그러면 이제 돈도 이만큼 주는 모양이지요.

인간은 말씀을 보면서 자기의 주체를 니고데모처럼 안 망하려고 발악하기 때문에 말씀가지고 ‘어느 말씀을 지키면 내가, 경건스럽게 하는 나의 수고가 여기서 멈춰도 되는 수준인가’ 그걸 자꾸 지정해요. 그러니까 말씀에 떠내려가지 않고 말씀을 이렇게 자꾸 취득해요. 마치 초밥집에 회전하는 접시를 보고 맛있다고 자꾸 먹다보면 나중에 7만 5천 원 막 나오고 접시 마구 천장까지 쌓이고 이러거든요.

그게 왜 그러냐면 ‘이 정도 알았으니까 더는 말씀을 안 들어도 되는 수준이 되었다. 나는 이제 천국 가는 자신감 생겼다.’ 그러고 난 뒤에는 말씀을 안 들어요. 이것은 말씀에 푹 잠겨서 같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에게 필요한 말씀, 내가 어떤 목표에 도달할 때 까지만 필요한 말씀만 듣고 그다음부터는 말씀을 안 듣고자 하는 거예요. 말씀을 또 외면해 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본인의 주체성이에요.

사도행전 27장에서 하나님께서 이탈리아로 가는 배, 276명이 배를 타고 가면서 중간중간에 주님께서 모든 걸 다 버리라고 하는 거예요. 네가 버리려고 하지 않는 짐이 주님의 계획된 말씀의 항해를 방해하는 거예요. “안 버리면 너 죽어. 버리면 버리는 것은 버리더라도 네 생명은 내가 책임져 줄게.” 이게 바로 사도 바울과 동행했던 276명의 운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있고 천사가 동승하면서 그들이 자기 짐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앙탈하는 그 모습, ‘야, 이거 이러면 망하는데.’ 자기 망하면서 불안불안해하는 그 모습을 천사가 다 지켜보고 있어요. 기어이 그 사람들은 구원을 어떻게 받았는가? 사도바울은 그 폭풍 속에서 구원을 어떻게 받았는가? 강제로, 강제로 짐을 버리게 하고 심지어 뭐까지 버렸냐면 타고 온 배까지 파선하게 만들었습니다.

망해도 이것은 뭐, 비빌 언덕조차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요. 홀딱 망했어요. 내가, 지금 살아있는 내가 앞으로 더 살 수 있는 아이디어가, 걸쳐 있는 모든 관계자체가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비로소 모든 것을 버렸을 때 그들은 뭐만 쳐다봤냐면, 사도바울만 쳐다보는 거예요. 동물들중에 천성이 한쪽으로 쳐다보는 동물 있죠? 미어캣. 전부 한 쪽으로 사도바울만 쳐다봐요. “뭐? 왜 나 쳐다보는데?”

사도바울은 주님 쳐다봅니다. 주님에게서 날아든 하늘나라 source(원천), 그쪽을 쳐다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길은 없었습니다. 길은 없었는데 말씀이 스스로 길의 윤곽이 드러나도록 하는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망해야 된다는 조건.

망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지 마세요. 왜냐면 처음부터 망했던 거니까 새삼스럽게 망한다고 울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Why me? 왜 나에게?” 그러지 마세요. 그것은 아직도 그동안 망해야 된다는 사실을 감추고 내 배를, 내 차를 내가 자꾸 붙들고 있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했는가? 원래 인간은 자기를 붙잡을 수 있는 그런 권한도 자격도 없고요, 그러한 형편도 되질 못 합니다. 주님께서 그 말씀의 세계를, 그 길을 낼 때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켰는데요, 화장실에서 쥐가 죽었어요. 쥐가 죽어서 화장실 천장이 얼룩덜룩하면서 죽은 사체의 물기가, 액체가 고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냄새도 같이 밑에 퍼지지요.

주님의 뜻은 뭐냐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었어요. 그 시체, 죽었다는 죽으심으로, 연속적으로 모든 인간이 죽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죽는 현상이 일어났었어요. 인간에 속한 시대에 보면 옛날부터 죽었고 예수님은 나중에 지금으로부터 2000년 뒤에 죽었다, 이렇게 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시간의 시작을 예수님의 죽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기에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다 죽고, 그 죽음이 어디까지 오느냐? 인간의 자아의 막까지 와요.

거기까지 오게 되면 그 죽음이 우리에게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문에, 우리 자아 중심 정신 내부에 저주와 심판과 그리고 죽음이 자아내는 얼룩 같은 것이 우리의 정신세계까지 여기서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알 수 없는 공포가 일어나는 겁니다.

주님께서 길을 찾는 방법은 네가 불안불안하고 초조하고 알 수 없는 공포에 있을 때 네 정신세계 바깥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최종 말씀의 완성이라는 입장에서 무슨 일을 발생시켰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수요일 이야기 했지만 그게 바로 예수님이 사람에게 맞아죽은 사건입니다. 주님의 사건이에요. 죽음 사건이에요.

이 세상이 수상한 거예요. 위험한 겁니다. 왜 우리가 불안한지를 몰라서 열심히 성경 말씀, 교회 다니면서 목사 시키는 대로 충성, 봉사하고 헌금도 하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난리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난리를 피우면서 경건하고자 ‘거룩 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그 거룩하는 것을 왜 하고자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거룩 하라 했으니까 우리도 거룩해야지요.”라고 이야기 한다면, 당신이 언제부터 하나님을 좋아하고 말씀과 친하다고 성경에서 거룩하라고 한다고 거룩하려고 시도하느냐 이 말이죠. 네가 무서워서 그렇잖아, 무서워서. 주님을 사랑해서 좋아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그래, 무서워서. 왜 무서워합니까?

지독한 사채업자가 찾아왔기 때문에요. 그 지독한 사채업자가 그게 악마입니다. 악마가 다스리는 세계, 악마가 우리를 찾아올 때 달라고 오는 거예요. 방법은 간단해요. 악마가 달라고 하는 게 뭐냐면, 자기 의거든요. 인간 조상이 악마와 결탁이 되어서 생긴 것이 자기 의입니다.

그러면 자기 의를 악마가 달라고 할 때 주세요. 그냥 줘버리세요. 자기 의는요,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나님이 집어넣은 것이 아니고 악마가 집어 넣어준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악마가 집어 넣어준 이 무서운 폭탄을 내부에 지니고, 악마가 오니까 “저리가, 저리가! 하나님, 악마가 왔어요.” 악마가 자꾸 이렇게 협박합니다. “너 기도 안하면 망한다. 네 애 고3이지? 너 교회 출석 안 하면 애 성적 안 나온다?” 자꾸 내부에서 내가 망한다는 쪽으로 협박을 하니까 하나님, 어떻게 열심히 철야 할 테니까 저 악마 쫓아내라고 하는 거예요.

악마의 자세가 이래요. 멀뚱해요. ‘지금 내 거 찾으러 왔는데? 자기 의 줘버리세요, 악마한테. 그냥 줘버리라고요. 그런데 주는 것보다도 악마한테 길들여져서 내빼는데 급급합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던질 테니까 속으로 한 번 답변해보세요.

어느 부부가 고민 상담하러 왔는데 일요일 결혼식이 세 군데가 있어요. “하나는 11시 반에 사촌 시동생이 결혼식하고, 12시에 고등학교 동기가, 12시 30분에 대학 동기가 결혼식 하는데 도사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물어 보살에게 찾아온 거예요. 서장훈하고 이수근한테 찾아온 거예요.

사촌 시동생은 수원에서 결혼하고, 고등학교 동기는 반포에서 하고, 대학 동기는 역삼동에서 결혼식을 합니다. 이수근이 상담하기를 ‘일단 세 개는 복잡하니까 이항으로 줄이자. 일단 예선전 한 번 치러서 줄이자.’ 줄이는 방법이 뭐냐? ‘사촌 시동생 결혼식은 남편을 보내라.’ 이렇게 해서 일단은 됐어요.

됐고 그다음에 남아있는 것이 두 개에요. 고등학교 결혼식에 가느냐, 대학 동기 결혼식에 가느냐? 문제는 둘 다 자기들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거고, 둘 다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이건 사진을 찍어야 돼요. 축의금 6만 원 내고 끝날 문제가 아니고 사진을 찍어야 돼요. 난~처한 입장, 이러한 갈등. 이게 문제가 뭐냐? 자기 의입니다. 이게 자기의에요.

인간은 인생 살면서 자기의에 범벅이 되어서 시궁창 속에, 진흙 속에서 힘들어 하며 살아갑니다. 이리 가도 자기의, 저리 가도 자기의. 전부 다 자기 의에요. 치매 환자가 집을 나섰습니다. 집을 나서 보니까 자기가 느끼는 것은 자기 몸뚱이가 남았어요. 집을 나서서 50미터도 안 왔는데 딱 서있어요.

보니까 자기 앞에 동쪽, 남쪽, 서쪽, 북쪽 딱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그게 기억 속에서 날아가 버렸어요. 치매니까. 움직일 수는 있어요. 동으로 갔다가 ‘아닌 것 같은데?’ 또 남으로 갔다가, 이렇게 자기 몸은 움직이는데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갈곳을 잃어버렸어요. 갈 곳이 없어요.

왜 가려고 하느냐? 왜 찾아가려고 하느냐? 남은 것 딱 하나 남았어요. 어떤 경우라도 나는 여기서 망하면 안 되고, 여기서 내 인생 종치면 안 된다는 의식, 그거 악마 사채업자가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나오는 모든 행동과 말씨 같은 게 전부 다 자기 의에서 나온 거예요. 자기 의에서.

어떤 사람 말 하는 거 보면요, 말하나 행동 하나에 분노가 막 나와요. 자기 의가 굳어져 버리면 바위 같거든요. 바위 같아서 말하는 것이 바위 한 조각이 뚝뚝 떨어져 나오는 것 같아요. 듣는 사람 얼마나 아픈지. 딱딱한 자기 의가 막 날아와요. ‘그래서 어쩌라고!’ 막 이런 식으로.

인간은 왜 그리 분노합니까? 지킬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뭘 지키는데요? 자기의. 경건의 모양 하니까 자기 의가 더 딱딱해지죠. 그래서, 아까 물어 보살 이야기 마무리해야죠. 서장훈이 말하기를, 일단 반포하고 역삼까지는 멀지 않기 때문에……, 이거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설교하면서 이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데 여러분이 궁금할까 싶어서 이야기합니다.

일단 반포에서 12시 결혼식 마치고 사진 후딱 찍고, 밥 먹지 말고 역삼동으로 와서 12시 반 결혼식이니까 거기서 사진 또 찍고 다시 밥 먹으러 반포로 가라, 이게 해결책이었어요. 사람은 자기 의가 손상되지 않기를 위하는데 내 의가 손상되면 내가 산 게 아니라 죽은 거예요.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남한테 욕 얻어먹고는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해결합니다. 히브리서 4장에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4장 잠시 봅시다. 거기 이야기할 것이 많기 때문에 같이 보셔야 돼요.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주신 약속이 있다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말씀이 도착지점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히브리서 4장, 손에 받쳐 놓고요, 신명기 12장 9절에서 10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도착지점이 나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내 이름이 멈추는 곳에 나도 안식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12장 9절에서 10절에 보면 거기에 내가 너를 동승해서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지금 길은 없습니다. 도마가 알듯이 동서남북은 없어요. 입체적으로 길이 나와야 되는데 입체적 길을 찾아내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완전히 절단되어 있어요. 없어요. 인간은 3차원밖에 모르니까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그것은 길이 아니거든요. 동서남북의 3차원 말고 또 달리 나온 길을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 거예요.

여기서 도마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죠. 뛰어나도 그 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다시 히브리서 4장으로 돌아와서요, 주께서 안식할 수 있는, 화합할 수 있는 그 쪽으로 갈 때 4장 3절에서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그리고 7절에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다윗이 이야기한 시편 이야기인데, 시편 95편 9절의 이야기인데요.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간추려서 제가 틀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히브리서 4장 전체 내용이 뭐냐? 하나님이 먼저 휴식, 안식에 들어가셨다. 두 번째, 안식으로부터 어떤 노선이 나오는 거예요. 철도선. 폭주하는 트레인, 기차이니까 선이 나오는데 그 선이, 약속의 노선이 나와요. 말씀의 노선이 나오고 세 번째가 뭐냐면, 말씀 세계 속을 형성해요.

말씀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벌거벗음과 같이 드러내신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살고자 하는 주체기 때문에 말씀을 그냥 평면적으로, 3차원적으로 보지만 말씀 자체에서 입체적으로 이게 확대되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말씀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내요. 말씀 스스로가 하나의 튜브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입체적 구조로 말씀 스스로 만들어지게 되면 그 안에서 인간은 벌거벗은 존재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의 폐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알갱이처럼. 그러면 우리 폐 속에서 팍팍 터지겠죠. 알알이 주스 있잖아요, 캔 주스. 그 알갱이 포도알 터질 때 청량감이 괜찮아요. 내 안에,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끊임없이 주입되는 거예요. 그게 말씀의 순종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순종이 아니고 말씀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말릴 수가 없는 상태, 이게 말씀에 대한 복종이고 순종입니다.

‘나 얼추 말씀 알고 신학 아니까 이제는 안 들으련다. 그만해라. 난 말씀 안 듣겠다.’가 아니라 끊임없이 들어오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지키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내가 경건하게 살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경건하게 살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경건에 자신감이 붙어서 말씀을 안 듣게 돼요. 듣더라도 신선함이 없어요. 새로움이 없어요.

그러면 그때 또 슬쩍 사채업자가 또 어슬렁거립니다. 마귀가 슥 오죠. 마귀가 오니까 인간들은 이렇게 해요. ‘마귀야, 나 안 넘어지려고, 마귀에게 지지 않고 나는 지옥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결사적으로 지금 노력하는 중이야. 이 마귀야.’ 그러면 사채업자가 떠납니까? ‘갚으려고, 그 말씀대로 다 지켜서 갚으려고 착하게 하려고 갚아주려고 애를 쓰고 있어. 그러니 마귀야 지금은 찾아오면 안 돼. 내가 착하게 되거든 그때 바르게 살게.’ 마귀가 떠납니까? 방금 이 이야기가 로마서 7장에 나온 이야기에요.

내가 선하고 싶어서 내 속에 악을 대하면서 “악마야, 내가 계속 선한 모습이 안 보이냐? 착한 내 모습이 보이잖아. 그러니까 대충하고 그냥 좀 가줘! 기도 열심히 하고 앞으로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하고 이렇게 봉사할 테니까 좀 가줘!” 여러분 이게 휴식입니까?

우리 폐 속에 들어간 알갱이 있잖아요, 그냥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에요. 완성된 채로 들어와요. 그 알갱이 말씀 안에 들어온 주의 휴식, ‘다 끝났어. 다 이루었어.’ 다 이루었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우리는 알알이 알갱이 캔이에요. 알알이 하니까 메주 생각나는데 우리는 말씀이 동동 떠다니는 캔으로 주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활용해 주시는 거예요.

주님의 휴식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겁니다. 그 휴식이 들어오려면 우리가 조건이 있어요. 벌거벗어야 돼요. 내 의가 떠난 자리는 벌거벗은 자리요, 내가 예상 못 한, 망해도 완전히 망해버린 자리에요. 내가 가난하다고 망한 것이 아니고, 몸이 아파서 망한 것이 아니고, 남한테 치사스러운 욕 듣고 남한테 비난 듣는다고 망한 게 아니고, 내가 챙길 나의 의가 떠난 빈자리가 망한 자리에요.

여러분 그런 망한 자리라면 백번이나 망하세요. 천 번이라도 망해도 괜찮아요. 남들이 “너는 배알도 없어?” 이럴 때 이렇게 하세요. “배알이 뭐지?” “너는 자존심도 없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 있는데, 자존심이 뭐지? 자존심이 뭐지?” “너는 자존감도 없어?” “그게 뭔데?”

우리의 노력은요, 기껏 경건의 모양밖에 안돼요. 경건의 능력은 경건의 모양을 들춰내는 거예요. 더러운 거적때기를 들춰내서 그 안에 자기의 간수하려고 구더기가 꼬여 있는, 더러워서 못 보는,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남에게 욕 안 얻어먹고 착실하게 살았다, 그 이야기 들으려고 매일 청소기 위잉~ 해서 돌리는 이 가련한 이 모습을 성령이 와서 들춰냅니다. ‘주님이 맞아죽었어. 네가 뭐야?’ 주님이 맞아 죽었으면 연쇄적으로 우리도 죽어가는 것은 이 땅에 속성으로서, 생리로서 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면, 여기 12절에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해요. 쪼개버리면 우리는 애초부터 ‘우리가 처음 만들어놓은 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라는 것을 날마다 자인해서 내가 나를 붙들고 있어야 될 하등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붙들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나 어디로 가지?’ 내가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말씀에 휩싸이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야 될 곳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안식하는 곳에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도마의 걱정이 우리의 걱정으로 전달되죠. “내가 길이다.” “주님, 그 말을 이해하겠습니다. 우리가 3년 동안 따라 다녔지만 그것은 너는 못 온다는 이야기로 들리니까 이해하는데 문제는 그 길이 어딘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할 때 히브리서 4장에 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아니요’가 두 개씩이나 들어갈 정도로 강조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거예요. 왜? 이미 우리는 우리의 주체를 믿기 때문에, 믿는 자리에 이미 주체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주님을 믿을 틈이 없어요. 들어올 틈이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게 있어요. 그러나 내가 원하는 곳은 지옥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곳은 천국이에요.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어떤 상황을 만드냐면,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복을 주시죠.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뭐 인상들이 별로 좋아하시지는 않는데. 우리는 자꾸 정착하려고, 멈추려고 해요. 힘줘서 멈추려고 해요. “주님 이만하면 신앙인이잖아요.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멈추려고 해요. 그러나 주님은 떠나라고 합니다.

독일에 어떤 관광지가 있는데 그 관광지가 ‘피리 부는 사나이’ 동화를 광장에 만든 곳이 있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왜 피리를 불었냐면 어느 조그만 도시에 쥐가 많아서 ‘쥐 다 떨쳐내면 내가 보상해줄게.’ 하는 광고를 보고 돈 벌려고 그 피리를 불었는데 삐리리~ 부니까 쥐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쪼르르 따라다니거든요.

그래서 사나이가 숲으로 가니까 쥐가 싹 따라가서 깨끗하게 마을에 쥐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장 보고 돈 달라고 하니까 깨끗하게 되었는데도 돈을 안 줍니다. “너 피리 분다고 돈 얼마나 들었냐?” 그냥 대충 용돈으로 “차비라도 해서 빨리 꺼져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불었는데 이번에는 동네 아이들이 다 따라나섭니다. 애들을 데리고 숲 속으로 사라졌어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뭐 했다고 예수를 믿어야 되나? 예수님이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 우리는 직사하게 돈 벌려고 이렇게 힘들고 있는데, 예수님은 뭐 했는데? 그 피 흘리는 게 뭐 그리 심한 노동이라고. 죽으면 되지. 죽어서 피 흘리는 그게 몇 푼 들었다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마을 시장처럼. 피리 배워서 피리 부는데 그거 돈 얼마나 들었다고 돈 달라고 하느냐는 식인 거예요.

예수님의 피는요, 온 천하보다 더 값진 거예요. 그 가치가 우리의 의에 밀려서, 우리 노동에서 나오는 우리의 잘남에 밀려서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의, 사채업자, 악마한테 줘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피의 피리 노래를 불러요.

피를 가지고 하게 되면 거기에 따라가는 편입된 사람이 같이 합류해서 피의 마지막 종착점 천국에, 어린양의 죽음의 보좌가 있는 곳까지 피의 피리가 부르는 그 길을 따라서 자기 백성들만 그 의미를 알고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주님은 피리 부는 사나이에요. 송창식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누가 믿겠어요?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자기 의에 미쳐가지고, 환장해가지고 맨날 ‘망하면 안 돼, 망하면 안 돼.’ 여러분 망했단 경우를 상상을 다 해보세요. 상상을 다 해보시고 그다음에 그 뒤에 뭐? 그게 뭔데요? 망했다 치고 그 뒤에 가보세요. 예수님의 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고했다. 드디어 네 눈에 피가 보이는구나. 네가 그런 식으로 오도록 내가 조치했다.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대제사장의 이 공로, 피 흘린 노동, 그것에 합류하라.”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그걸 가지고 ‘은혜의 보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휴식하는 곳, 하나님이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는 그곳, 따라서 “목사님 우리는 앞으로 평소에 어떻게 살면 됩니까?”

이렇게 사시면 돼요. ‘모든 것을 주께서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러면서 말씀 속을, 여러분들이 목표를 향하여 거침없이 달리는, 쉬지 않고 폭주하는 그 기관차, 그 말씀의 기관차에 몸을 실으면서 우리가 내뱉을 수 있는 건 이겁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하셨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더이상 저의 것이 아닙니다. 주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를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그런 그릇으로 우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끝부분이 요한복음 5장 28절에 나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 음성을 나중에 듣지 마시고 지금 성경 말씀을 통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능력이 나의 경건의 모양을, 경건스럽다, 를 작살을 내시고 ‘오직 예수님의 경건이 피’라는 능력으로 우리를 완성된 안식으로 지금 멈추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멈추지 않게, 우리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게 만들고 계속 매일같이 망하는 즐거움을 주시는 이 말씀, 망해도 벌거벗었으니까 우리 손해 아니니까, 이미 죽은 자니까 그 망한 것에 대해서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는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 가슴이 떨려오네요~” 갑자기 설운도로 끝나버리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그 일을 맞이했던 도마가 하는 고백이 너무나 중요한 고백이었고 우리의 심성을 대변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주님, 길은 어디 있습니까?’ 주여, 길을 찾지 말고 길 속에, 다 이루었다는 길 속에서 주와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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