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2023년 5월 21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2:22-26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전체를 모르는 자들은 어차피 자신을 자기가 지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도 선하고 착하게 지키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렬해집니다. 전체를 아는 자들은 굳이 세상에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시간과 최후의 시간이 미리 찾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시간이나 최후의 시간이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인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때가 최초의 시간이라는 인간은 그저 피고가 되어 있는 바가 최후의 심판 시간입니다. 이 최초의 시간과 최후의 시간은 인간의 기대나 의욕이 배제된 채 일방적인 주님의 뜻만 적용됩니다.
이러한 취지가 잘 나타나 있는 내용은 ‘잃어버린 양’ 비유입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눅 15:4-6)
즉 잃어버린 양 스스로가 결코 목자에게로 올 수 없습니다. 목자를 찾아 돌아올 수 있다면 결코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얻어진 양’은 순전히 목자만 할 수 있습니다. 쭉정이와 알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쭉정이가 스스로에게 뭔가를 투여하여 알곡 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인간의 의도를 배제한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3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의인이 건져주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로 몫입니다. 이 경로로 인하여 형성된 세계가 ‘예수 안’의 세계입니다.
이 ‘예수 안’의 세계에 들어올 모든 자들은 필히 이 경로를 거쳐야 합니다. 즉 쭉정이로부터 시작을 해서 알곡되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몫입니다. 따라서 알곡되는데 있어 쭉정이 주제에 감히 성공했다 실패했다 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뿐만 아니라 로마서 8:30에도 나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알곡이 된 자는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요? 철저하게 쭉정이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치 물에 젖은 개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물들을 떨어내듯이 말입니다.
인간이 쭉정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악마의 올무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면 악마에서 사로잡힌 자입니다. 이 두 종류의 부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이 누가복음 23:39-42에 나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우리는 두 강도를 봅니다. 둘 다 볼 폼없는 자들입니다. 인생의 바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십자가 현장에 이 두 강도 말고 또 한 분이 계십니다. 이처럼 세 개의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강도가 짊어진 두 개의 십자가의 현장으로 봐야 하는 이유는 가운데 계신 예수님은 사라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는 자들은 같은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것은 대자연 속에서 마음 맞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정답게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는 자들은 타인의 시선이 이미 그들 마음을 점령했습니다. 홀로 있어도 타인의 평가가 신경쓰이는 삶입니다.
그만큼 길들여졌던 겁니다.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이 강도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태초의 시간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은 그냥 사라져버렸습니다. 더는 사람들을 찾을 수없도록 말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계속 존재해서는 안되는 존재로 넘겨주신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착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언제 사라져지는가가 중요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을 찾아오신 동방박사가 이점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별처럼 왔습니다. 별의 빛남은 어두움을 더욱 깜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왔다는 것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어떤 존재가 내려왔음을 말해줍니다. 황금과 유황과 몰약은 아기 예수님에게 드리고 그들은 홀연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동방박사 그들도 사라집니다. 이처럼 두 강도만 남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을 때, 과연 두 강도 중 누구가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일까요?
구원받은 강도는 사라지는 예수님과 동일시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이 강도는 결코 세상 사람들과 자기를 동일시할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라지듯이 자신도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강도 내부에 핵심 자리가 텅 비워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즉 말씀이 들어붙어서 그 사람이 갖고 있었던 선악지식을 떼내게 되면 생기는 현상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수치를 느끼는 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들어붙어 떼어 내게 되면 더는 율법의 지적을 받을 필요가 없는 빈 공간이 마련하게 됩니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4:10-11)
이 빈 자리에 예수님의 피묻은 옷이 들어와서 성도로 하여금 다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바로 이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인해 사로잡힌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 이루심을 통해서 우리의 바닥과 쭉정이 됨을 날마다 체험케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디모데후서 2장 22-26절(바닥)2305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22-26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22-26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쫓고, 다투지 아니하고, 온유하고, 잘 가르치며, 진리를 알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것을 한꺼번에 받아들일수 있는 방법은 원초적 시간, 최후의 시간이 미리 찾아오면 되는 겁니다. 최후의 시간, 같은 말이에요, 처음의 시간, 창조의 그 시간, 심판의 그 시간, 아직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그 시간이 미리 성도에게 찾아오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그리고 온유하고 가르치기를 잘하며, 거역하는 자도 온유하게 한다는 말은 전체를 다 알고 있으니까 충분하게 그럴 수 있는 겁니다. 살아온 걸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이 세상의 끝을 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그 순간순간 그것이 전부라고 여기고 경솔하게 살 수밖에 없죠.
그러면 그 전체를 다 아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최후의 순간이 미리 찾아온 사람은 그런 것을 웃음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된 상태, 그런 상태입니다. 최후의 순간과 원초적 시간은 인간이 없어질 시간이니까 최초의 시간, 인간이 없어질 때 그때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냐가 우리에게 오죠.
오게 되면 우리 자신이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내가 없었을 때의 하나님 계획이 나를 통제하고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으나 내가 없는 순간인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사람이 뭐 있어야 죽고 사는 게 중요하죠. 있지도 않은데 죽고 사는 것도 별 의미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자신은 사실은 ‘내가 여기 살아있고 잘 살아야 된다.’ 거울 앞에 보면 분명하게 우리 모습이 보이죠? 열심히 또 이렇게 얼굴도 가꾸고 살려고 애쓰잖아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당연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냐면, ‘가짜 뉴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은 인간이 자기 시체 얼굴 매만진다고 사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어떻게 삽니까?”라고 하지 말고 “내가 없을 때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까, 하나님?” 내가 없었을 때의 하나님은 어떤 뜻을 갖고 있었습니까, 이게 진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를 아는 데에 뭐가 방해가 되는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방해가 되죠.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로 넘겨받은 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몸이고 우리의 이 생각들입니다. 그래서 존재할 수 없기 위해서, 최초의 시간, 최후의 시간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 그 상태를 위해서 우리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존재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사는 게 전부 다 억지스러워요. 산다는 것 자체가 아주 용을 써요. 억지스럽고 용을 쓰고.
그래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에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었다, 는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처음 뜻, 최초의 시간, 최후의 심판의 순간, 주의 뜻인데 이 사로잡혔다는 이야기가 눈에 보이는 인간들 세계에서는 이게 뭐냐? 반사회적 표현입니다.
왜냐면 모든 인간은 사로잡혔다 하면 일단 정신병자로 간주해요. 누구한테 사로잡혔다, 무당, 박수 무당 이런 것, 이런 종류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성경에서 ‘사로잡혔다.’ 하는 이 말, ‘너희들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이 말 자체가 성경 전체에 대해서 존재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부정적 인식을 가져다줄 수가 있어요.
어떤 태도가 드러나게 되냐면, “그러면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으면 천국 못갑니까?” 이렇게 자기의 저항성을, 반박성을 드러내면서 “꼭 사로잡혀야 돼요? 열심히 교회 다니면 안 되는 거예요? 사로 안 잡히면 끝나는 겁니까?” 그러면 내 쪽에서 삐져서, “이제 교회 안 나온다.” 벌써 자기 쪽에서 삐졌어요, 이 성경 한 구절의 말씀 때문에.
‘사로잡힌 바 되어,’ 그런데 사로잡힌 바 되어서, 보다 더 강한 말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이 대목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존재하면서 성경 자체에 대해 굉장히 인상이 안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이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대충 6일 동안 자기 생업에 종사하고 하루쯤은 어려운 시간 내서 교회 나와주면, “대견하다, 착하다, 열심히 하는구나, 훌륭하다, 내가 너 하는 행위에 대해 보상하마.” 이렇게 좋게좋게 나오면, 인간을 구슬리면, 인간도 교회 나와주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영광 돌리고 현금 좀 내고 얼마든지 좋은 관계에 있을 수 있는데 극단적으로 나와요.
‘악마의 올무에서 벗어나’ 그러면 인간은 자기를 보죠. ‘올무? 없는데? 난 지금까지 태어나서 누구로부터 보이스피싱 올무도 받은 적이 없는데? 사기당한 적도 없는데? 올무가 있다고? 무슨 올무가 있는데?’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우리가 정말 기쁨으로 받아들이냐, 안 받아들이냐는 어디에 달렸냐면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상태가 어떤 상태냐?’부터 출발해야 돼요.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체험을 하며 살아가는가?’ 그것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의 모습은 대자연 속에서 좋은 사람 만나서 부딪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지내는 것’ 이게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거 나와서 미안합니다만,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여기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었다는 그 말하기 전에 ‘악마의,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올무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사로잡힌 바가 안 되어 있다, 그 말이죠.
따라서 여기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 여기 나오는 ‘하나님께 사로잡힌바’는 여기 나오는 ‘하나님께 사로잡힌바’의 그 뜻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됐다는 뜻을 알기 위해서는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악마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나는 악마한테 사로잡혔어.’ 이게 악마의 올무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고 ‘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 이게 악마에게 올무 잡힌 거예요. ‘나는 어떤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왜? 편한 게 편한 거니까. 조용하게 사는 게 가장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거니까.’ 이게 악마의 올무에 빠진 거예요.
그걸 가지고 ‘사람에게 사로잡혔다.’ 이 말이죠. ‘사람에게 사로잡혔다.’를 더 분석해 보면 ‘나’라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 이미 점령당한 상태가 사람하고 사귀는 거예요. 타인의 시선에 점령당한 사람. 물론 가까운 데 보면 혈육에 의해서, 우선 가족, 부모, 남편, 아내, 자식들에게 사로잡힐 수 있죠. 그러나 가족끼리 하고만 사는 거 아니잖아요? 또 다른 사람하고 사귀잖아요?
사귈 때, 그 사람 있을 때 내가 괜찮게 행동한다, 가 아니라 주변에 아무도 없고 사라져도 나는 타인이 나에게 집어넣은 타인의 시선에 이미 점령당했기 때문에 아무리 누가 나에게 눈치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내 안에 이미 접수된, 내 안에 들어온 타인의 시선에 우리는 올무 잡혀서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사로잡힌 자 아닌 자의 체험이고 특징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사로잡힌다.’ 이 말을, 사도도 같은 생각일 거예요,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와 연관시켜서 보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아니고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가 정답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그 당시 하나님에 사로잡힌 자들과 싸웠기 때문에. 예수님이 싸웠던 대적들이 한껏 모두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그 집단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에스겔을 하나님의 성소로 봤기 때문에 에스겔에 나오는 그 하나님의 신이 마지막 때에 우리 유대민족에게 준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렇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에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라는 것을 자부했던 사람들인데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사울이라는 사람이었고 나중에 그 사람이 사도가 되어서 사도 바울이 된 사람이에요.
이것은 종교에 사로잡힌 자가 악령에 사로잡힌 자와 같은 뜻이다, 이 말입니다. 왜냐면 종교에서 말하는 그 하나님이 나에게 타인의 시선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래요. “너 똑바로 안 할래?” 이런 식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상황 전체가 몽땅 다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가득 찬 사회였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쭉정이와 알곡 이야기할 때 그들은, 제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쭉정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 사로잡혔으니까,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냥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고 실천에 옮기는 그 사회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예수님께서 알곡과 쭉정이 이야기할 때 자신은 절대로 쭉정이가 아니라고 자부했던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예수님 자신이 쭉정이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도저히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쭉정이로 이 땅에 오셔서 그다음에 알곡이 되시고, 알곡이 되시기 때문에, 그다음에 알곡으로 이미 확정되고 난 뒤에는 이 땅에서 쭉정이로 사신 거예요.
그것이 로마서 8장 3절에 나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쭉정이에서 알곡, 알곡에서 쭉정이 되게 하시는 그 코스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알곡 되게 하시고 다시 자기 것으로 건져 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예수님 말씀으로 그 코스가 나타났고 앞으로 천국 갈 백성들은 그 말씀의 코스대로 종속되어야만, 그 종속된 경로에 포함되어야만 천국을 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잃었다가 얻었다’의 예가 3가지 나와 있어요. 양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 잃어버렸다, 동전 하나를 처녀가 잃어버렸다, 집에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를 탕자로 잃어버렸다.
어린양 하나를 잃어버리고 다시 되찾게 됩니다. 잃었다가 얻었기 때문에, 잃었다가 얻었다는 것은 목자 담당이에요. 그것을 목자가 해요. 양은 스스로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종교가 거짓말이에요. 종교라는 자체가, 올무를 악마가 만든 이유가 잃은 나를 잃어버린 본인이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그들이 감추고 있어요.
어떤 짓을 해도 잃었던 나를 얻는 나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변신 될 수가 없어요. 끝이에요. 안 됩니다. 지금 잃었던 나를 얻겠다는, 성경 말씀 보고 은혜받겠다고 하는 것은 뭐냐? 이게 뭐가 ‘있음’이 되는 거예요. 분명히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할 수 없는 자로 이 땅에서 넘겨받은 거예요.
“네가 있나? 거울 앞에 네 모습이 있어? 내가 없애줄게. 걱정하지 마. 없애줄게. 네가 있어서 참 힘들지? 하지 마. 내가 너를 꼭 없애줄게. 도장 찍을게. 약속. 없애줄게” 이게 원초적 시간의 주의 뜻이고 최후 심판에 주의 뜻이에요. “너 꼭 없애줄게. 그리고 없어질 때까지 힘들더라도 네가 참아야 돼.” 이거거든요.
그러면 없어지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없어지는 이유는 쭉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 쭉정이인가? 우리는 죄의 몸이거든요. 우리가 죄의 몸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어떻게 아느냐? 로마서 8장 3절, 예수님께서 죄의 몸으로 오셔서 아는 거예요.
‘이게, 안 되는구나, 이게. 그동안 안 되는 짓을 했구나. 교회 와서.’ 안 되는 짓을 한 거예요. 해도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냥 헌금만 날린 거예요. 돈만 날렸어요. 잃었다가 얻은 것은 주님의 소관, 주님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이미 잃어버렸다는 것은 확정 났고요, 목자가 개입해서 잃었던 것을 얻었다는 것도 확정 났어요.
그렇다면 나머지는 뭐가 되느냐? 잃어버리면 돼요. 우리의 남은 인생은 잃어버리는 하나의 절차죠. 매일 매일 우리는 잃어버려야 됩니다. 잃어버릴 때 어떻게 잃어버리는가? 쭉정이로 드러나서 잃어버리는 거죠. 건강한 쭉정이, 비쩍 마른 쭉정이, 공부 잘하는 쭉정이, 무식한 쭉정이, 돈 많이 버는 쭉정이, 가난한 쭉정이, 어쨌든저쨌든간에 쭉정이는 쭉정이, 교회 나가는 쭉정이, 교회 안 나가는 쭉정이 어쨌든 쭉정이에요.
쭉정이에서 알곡 되는 것은 말씀이 덮쳐서 종속되는 거예요. 그 말씀 안에는 최초의 시간과 최후의 시간이 다 들어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이미 우리는 쭉정이였고, 말씀 안에 또 뭐가 있냐면 알곡이 있거든요. 말씀 안에서 쭉정이였고 말씀 안에서 알곡이 이미 되었다는 그 순서가 말씀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없어져도 말씀이 있으면 되는 거죠. 나하고 말씀하고 바꿔치기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의 올무를, 우리가 오늘 본문에 악마의 올무가 나왔기 때문에 악마의 올무를 우리가 알아야 해요. 악마의 올무를 모르고 우리는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악마의 올무를 거쳐서 하나님께 사로잡히기 때문에 사로잡힌 자는 뒤돌아보니까 내가 악마의 올무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악마의 올무가 뭐냐? 이거에요. “너 그러다 쭉정이 된다? 알곡 안 되고 싶어?” 이게 악마의 소리예요. 악마의 설교에서 흘러나오는, 목사 입에서 나오는 악마의 소리가 그거에요. “너 알곡 되게 해줄까? 알곡 만들어 줄까?” 이거에요.
참 이게……, 이미 되었답니다. ‘이미 되었다.’인데 악마는 뭐냐? ‘되게 해주겠다.’는 차이에요. 엄청난 차이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된 거예요. 누구 덕분에? 목자 덕분에 된 거예요. 왜? 우리는 스스로 될 수 없는 잃어버린 자니까.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미 알곡이 되었어요. 내가 알곡이 된 게 아니고 말씀 안에서 알곡이 된 거예요. 그것을 ‘예수 안에서’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알곡이 된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알곡이 되었고 십자가 안에서 ‘내가 왜 내 힘으로 알곡이 못 되었나’도 나와요. 그게 뭐냐? 쭉정이기때문에 그런 거예요. ‘쭉정이가 알곡 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로 가득 찬 것이 그게 바로 예수 안이거든요. 그런데 악마에 빠진 인간들은 뭐냐면, 알곡 되게 해 주겠대요. 구원시켜 주겠답니다.
우리는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내가 없어지는 게 목적이에요. 내가 없어지는 현장에 말씀이 등장해야 하니까요. 이걸 보여주는 것이 동방박사였어요.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왔다는 것은, 별이라는 것은 깜깜한 것을 더욱 깜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요. 별 따라온 것, 동방박사가 별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그 별의 존재를 인간형으로 보여주면 동방박사, 그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제공한 것이 뭐냐? 황금과 유향과 몰약만 남기고 그들은 사라졌어야 해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합치면 그분이 바로 아기 예수입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줬다는 것은, 동방박사 사건 자체가 하늘에서 지상에게 선물을 줬다는 이야기에요. 선물이라 하는 것은 인간 것이 일체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뭔가 드린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룰 때에 주께서 주는 선물은 뭐냐? “조금만 기다려줘. 너 자체를 없애줄게.” 이 이야기, “쭉정이 같은 너, 없애줄게.” 그 이야기에요.
없애주려면 그 감사가 선물로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동방박사같이 우리가 쭉정이로 다루어져야 되죠. 뭘 해도 쭉정이임을 감사해야지요, 뭘 해도! 전도해도 설교해도 쭉정이라는 것을 기뻐해야죠. 주의 뜻이 아니면 내가 쭉정이인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난해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23장에 나옵니다. 23장 39절에서 44절에 보면, 십자가 질 때 예수님과 더불어 두 강도가 같이 십자가 진 대목이 나오죠.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빼놓고 두 강도가 십자가 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십자가 3개인데 3개 하지 말고 2개라고 생각해서, 십자가 달랑 2개인데 강도 둘이 달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왜 성경에 3명인데 2명이 달렸다고 억지를 부리느냐? 오늘날 세계에서 예수님은 사라졌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날의 세계에서. 예수님 당시에는 십자가가 3개지만 오늘날은 예수님 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빼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구원을 시도하는 존재거든요. 마치 예수님 오실 때에 그 유대인들처럼. 그런데 그 강도 둘이 있을 때 우리가 누가 봐도 강도 둘은 어떤 차이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강도 둘만 달렸을 때는요. 어떤 차이가 보이지 않는데,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로잡힌 자’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자와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가 어떤 차이를 드러내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두 강도를 예수님 중간에 두고 양쪽에 달리게 했어요. 왜냐면 강도가 3명이 있는 십자가가 장차 십자가 사건 이후 모든 세상이 그렇게 전개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일은 이렇습니다. 분류하고 소제하는 거예요. 청소하는 거예요. 분류시키고 청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분류가 처음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39절에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구원 언급을 합니다. 누가? 구원받지 못한 쪽에서.
구원받지 못한 쪽에서 구원 말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지옥 가는 이 강도는 예수님께 사로잡힌 장면이 아니에요, 사로잡힌 자가 아니에요. 예수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신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예수여, 성령이여,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라는 식으로 교회 나오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이 나에게 유익되는 것을 주세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이런 식입니다.
그럴 때 40절에서 구원받은 강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냐, 42절에서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의 특징이 뭐냐? 예수님께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자기에게 일어난 십자가 사건으로 동일시한다는 거예요. 왜? 함께 있으니까, 사로잡혔으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로잡혔다.’의 특징은 이 땅에서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천주교 성당 가는 사람들은 집에다가 마리아 제단을 쌓아둬요. 아침에 이렇게 마리아상에다가 수건 덮어놓고 거기다 성경책 펴놓고 묵주인지 이렇게 목걸이 하나 해서 이렇게 설치해놨잖아요. 그것은 특징 있게 눈에 보이는 겁니다. 유난 떨고 유별난 거예요.
그런데 이 땅에서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에게는 어떤 특징도, 어떤 유난 떠는 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할 때 방언을 한다든지, 벌벌 떤다든지 그런 것도 없고요. 헌금을 많이 한다든지 교회 출석을 잘 한다든지 그런 것도 없고요. 이 땅에서 사로잡힌 자의 특징은 사로잡힌 자 본인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사로잡혀 있다는 특징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요.
내가 어디 신학교를 간다든지, 내가 뭐 어떤 계시를 받았다느니 전혀 없습니다. ‘설명할 길이 없네.’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이 곶감이 맛있다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네요. 왜 하나님께서는 사로잡힌 것을 타인에게 멋진 간증으로 설명을 못 하게 만드는가? 자기가 쭉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쭉정이가 설명해버리면 지금 자기가 알곡인 양 착각이 되잖아요?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다음 중 육의 일이 아닌 것은? 1. 가정 일 2. 직장 일 3. 나라 일 4. 교회 일 5. 없다. 이 네 가지 항목에는 없다. 어떤 것도 육의 일이 아닌 것이 없어요. 다 육의 일입니다. 그러면 영의 일은? ‘없다’에요. 육의 일도 없고 영의 일도 없어요. 왜냐면 내가 일의 주체자가 아니기 때문에.
쭉정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쭉정이는 뭘 해도 쭉정이고 안 해도 쭉정이인데. 쭉정이 입에서 뭐 말씀 나오고, 그것은 온당치 않죠. 그래서 이 두 강도만 있다고 치고 사람들이 두 강도를 보면서 저쪽 강도 지옥 간다, 저 강도는 천국 간다, 판정을 내리고 분류를 하는 하나의 시도로서 세 개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사라져버리게 만들어요.
예수님 빠진 상태에서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와 예수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자만 현재 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왜? 인간은 나타난 것만 분석하기 때문에. 눈 뜨고 봐도 예수님은, 중앙에 있는 십자가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누가 뭐래도 그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강도는 어떤 빈자리를 쳐다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빈자리를 쳐다볼 때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에요. 주변에 교회 가는 사람보고 놀리잖아요. “꼬라지 하고는! 너 교회 가서 종교 바꾸다가 망했잖아, 너. 그래도 교회 가고 예수 믿느냐? 도대체 뭘 믿나 보자. 하나님이 얼마나 복 주나 한번 보자. 없네?”
그게 정답이에요. 없어요. 왜냐면 예수님이 없어졌거든요. 그다음 차례는 내 차례에요. 내 차례니까 내가 뭐가 있을 이유가 없죠. 내놓을 것이, 자랑할 게 없는 게 마땅하죠. 빈자리만 자랑하죠. 빈자리! 뭐 없어요, 없어. 우리교회 부흥되고 뭐 그런 되도 않는 소리. 주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사로잡힌 자, 이미 목자로 인해 양이 된, 알곡이 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율법의 의미를 준 겁니다.
율법의 의미가 일종의 패치인데요, 파스 같은 건데, 이 파스가 어떻게 작용하는가가 로마서 4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4장 10절과 11절에 보면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쉽게 말해 무슨 뜻이냐면, 율법이 와서 우리에게 딱 붙어 버리면 우리가, 그 당시 유대인들도 그렇지만, 우리가 갖고 있던 악마의 올무죠, 이 선악체계 또는 선악의 지식입니다, 이걸 패치로 딱 갖다 접촉력을 가지고 뜯어내 버려요. 뜯어내니까 할례받은 거나 안 받은 거나 그것은 아무 의미 없다가 드러나 버려요. 그게 빈자리에요.
인간은, 여러분들이 그냥 내 힘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사실은 선악 지식으로 살아가요. 그걸 윤리라고 하고 그걸 도덕이라고 해요. 집단적인 경우 윤리, 개인의 정신 상태는 도덕이라고 이렇게 강제로 구분할 수 있지만 하여튼 윤리, 도덕은 선악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선악 지식으로 아버지는 자식들을 훈계하죠.
그런데 이 선악 지식이 왜 문제가 되냐면, 선악지식은 주님께서 우리 일상에 유발하는 모든 사건들을 선악 지식을 가지고 감당을 못해요. 어릴 때 아버지의 권위가 뭐냐? 애가 “아빠 이거 먹어도 돼?” “먹지 말아야 돼.” 아빠는 모르는 게 없어요. “그거 발암물질이라 먹으면 안 돼.”
애는 발암물질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악한 것과 선한 것을 구분해서 악은 버리고 선한 쪽으로 인도하는 권위가 있어서 그다음부터 자기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전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아빠, 엄마! 이럴 때는 어떻게 돼?” 그때까지는 아빠, 엄마가 권위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걔가 커가면서 사회에서 부딪히고 있는 모든 시츄에이션, 상황들은 아빠, 엄마가 가지고 있던 구닥다리 사고방식으로 그걸 분류하기엔 모호해요. 분석, 분류하는데 이게 감이 확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100가지를 아빠, 엄마가 제대로 딱딱 분류해서 “그건 하면 안 돼.”, “이건 해야 돼.” 하다가도 한 가지 어떤 새로운, 낯선 사태가 일어나서 “아빠 이건 선에 속해, 악에 속해?” 할 때 머뭇거리면서 “아마 선일걸?” 하는 순간 100가지로 올바르게 선택했던 그 아버지의 권위는 하루아침에 추락, 와르르, ‘나 이제 친구 말 들을래. 아빠 말 안 들을래.” 아빠는 이런 상황을 제대로 조정을 못 해줘’ 권위가 확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들은 뭐가 문제냐? ‘내가 지식이 모자란다.’ 지식이 모자란 것이 아니고요, 율법이 와서 선악 패치가 되어 선악 체제 자체를 뜯어내야 되는데 그것 가지고 자식에게 끝까지 권위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그 잘못, 그게 잘못이에요. 다시 말해서 자기 안에 빈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강도는 폼 없고, 품위 없어요. 그냥 쭉정이에요. 주께서는 바닥부터 시작해요, 바닥부터. 진짜는. 왜 인간은 지옥 가는가? 바닥부터 출발 안 해서 그래요. 최초의 시간, 최후의 시간, 심판의 시간 전혀 몰라요. 어중간하게 중간쯤 해서 ‘열심히 하면, 악을 버리고 선을 쫓아가면 구원은 해주겠지.’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전체를 모르니까.
자기 안에 율법으로 뜯겨져 나간 빈자리가 없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날카로운 면도칼 같아서 우리를 뜯어버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Some say love……” ‘어떤 이들은 사랑이 강물에 던져진, 젖어버린 갈대와 같다 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은 면도날 같아서 이걸 찢어버린다고 하는데, I say love,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나의 꽃을 피우는 미지의 씨앗이다.’ 나에게 없었던 씨앗이 하나 등장하게 되는 것, 강물에 떠돌던 씨앗이 등장하고 그 씨앗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내 안에 활짝 꽃이 피는 거예요. 장미라는 팝송의 가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렇다, 하지만 우리가 재고하는 것은 우리 속에 빈 마음이 나의 핵심 부분이라는 거예요. 왜? 언젠간 우리가 없어지니까, 빈 마음이니까, 없어지니까. 없어지는데 주께서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 철저하게 우리를 농락했고 이용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용당할 때 그걸 ‘예수 안’이라고 해야 해요.
“Some say love……” 어떤 사람은 사랑이 이렇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아니고 I say, 내가 말한 것도 아니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말하려면 우리는 주님이 말하는 빈 공간, 말씀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날카로운 칼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뜯겨져 나가는 빈자리가 있어야 해요, 빈자리!
그 빈자리에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님께서 패치, 파스죠, 이 파스를 붙이듯이 자기 백성에게 그렇게 작업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어느 자리에서 만드는가?
선악 체계가 집결된 그 자리, 주께서는 찾아와서 말씀으로, 사랑으로서, 율법으로서 그것을 도려내서 빈자리를 만듭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에서 선악체계가 집결된 그러한 신체적 징후가 등장하는 장소가 어디냐? 그게 바로 치마를 입는, 옷을 입는 장소, 수치를 느끼는 그 장소에요.
수치를 느끼는 그 장소에 사람들은 조치를 했죠. 부끄러우니까 가렸습니다. 이것은 그 수치를 느끼는 장소에 선악지식이 집결돼있다는 거예요. 좀 더 쉽게 말해서 선악 체계가 집결될 때에 누가 그곳에 같이 사로잡혀 있고 함께 있느냐? 사로잡혔다는 것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악마가, 마귀가 거기에 같이 있어요.
마귀가 같이 있어 우리로, 인간들로 하여금 무엇을 촉구하느냐면, 너는 선악 지식을 위하여 순교자가 되라고 촉구합니다. ‘너 자신이 네가 보기에 얼마나 너를 흠모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 것을 평생 증거 하면서 장렬하게 죽어라, 인간아.’ 이게 악마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네가 교회 다니면서 말씀 듣고, 너 자신이 얼마나 순수할 수 있고 얼마나 훌륭할 수 있고 선할 수 있는 것을 너 스스로 노력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너의 자기 의를 위해서 장렬한 순교자가 되어라.’라고 악마가 교회를 통해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지연된 자살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교회 생활, 인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은 그냥 자기 자신을 품고 장렬하게, 딴 건 다 잃어버려도 나 이렇게 정당했다는 그거 하나 품고 장렬하게 죽는 거예요. 마치 진주의 논개가 일본 순사, 순사가 아니죠, 장군을 껴안고 물에 장렬하게 떨어져 죽듯이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나 잃어버리기 싫어. 나는 잃어버리기 싫어.’ 맨날 나올 수 있는 것은 악마의 말, “잃어버리기 싫어.” 그 말만 쏟아내면서 악마에 사로잡혀서 인간은 그렇게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나오냐면,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부자가 나와요. 부자는 지옥 불 속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자기가 부자 된 것이 자기에게 합당한 조치라 여겨서 낙원에 가 있는 나사로 보고 심부름시킵니다. “여기 물 한 그릇 좀 보내봐라.” 여기 생수 안 파는데 생수 좀 보내달라고.
왜 부자가 지옥 가서도 자기 의를 포기 못 하느냐? 이유는 단 한 가지, 최초의 시간, 마지막 시간을 그 사람은 경험하지 못해서 바닥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자기 바닥을. 쭉정이가 뭔지를 몰라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옷을 입었습니다.
옷을 입었다는 것은 옷 위에서 수치는 가로막고 수치까지 도달하기 전에 옷에다가 선악에 대한 야망과 야심을 그 옷 위에다 무늬를 넣어요. 그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는 모든 것은 옷을 밑에 깔아버리고 옷을 바탕삼아 위에 차곡차곡 다 쌓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거예요.
이러한 유혹에 여자가 먼저 끌리기 때문에 여자들은 사람을 만날 때 옷보고 만나요. 아, 이런 극단적인 발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수정하겠습니다. 여자들은 스타일 보고 만나요. 그 남자가 뭐 집안이,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묻지도 않아요. 스타일 괜찮으면 그냥 호감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여자는. 이거 또 믿지 마세요. 큰일 났다, 이거 사견이니까요. 말씀 전하면서 믿지 말라 하니까 참 그런데, 믿지 마세요.
그럼 남자는 뭐냐? 남자는 술이죠. 술의 남자가 누구냐면 노아입니다. 노아가 창세기 9장 20절에 보면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 창세기 3장에 보면 남자는 이 저주받은 땅에서 힘 있게 일한다고 권력의 피로감을 가지고 있어요.
이 피로감을 달랠 때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질 것이 없이 그냥 옳았다, 틀렸다는 그 나의 자아에 대한 가치만큼은 좀, 약간은, 잠시 그걸 놓고 싶어요. 그냥 어디에 사로잡혀 보고 싶어요. 이 근육의 고통에서 오는 피로감을 없앨 수 있는 것, 그것은 술이죠. 남자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술 만나기 위해서 친구를 만나요, 술 먹는 핑계를 얻기 위해서.
아무리 인간이 노력하고 애써도 뭘 뚫을 수 없냐면, 이 자기의 수치 대목을 딱 가로막은 그 판막, 그 막을 넘어갈 생각을 일체 하지 않아요. ‘탐스러워서 탐냈다, 왜? 먹고 싶어서 먹었다, 왜? 보고 싶어서 봤다, 왜? 그게 뭐가 나쁜데?’ 이것은 바로 선악의 수치 앞에 인간이 나름대로 막으로 떡 하니 설치해놓고 그 위에다가 자기의 모든 피로감, 이 세상 살면서 스트레스받은 거 이런 것들을 거기다가 전부 깔아놓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을 너무 잘 알아요. 그 수치스러운 거기에 율법을 줘버립니다. 율법을 딱 갖다 붙이니까 율법이 접촉력이 대단해요. 딱 붙어버렸어요. 떨어질 때 율법만 떨어지지 않아요. 드르륵 소리 나면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치가 떨릴 정도로 ‘내가 그 정도밖에 안되나’ 하는 수치스러움을, 뜯어내고 그 날 것을 그대로 들어냅니다.
아주 쉬운 예로 개가 물에 푹 젖으면 어떻게 합니까? 부르르 떨죠. 부르르 떨 듯이 주께서는 덮여있는 선악 체계를 부르르 떨게 만들어버려요. 다 떨게 만듭니다. 부지직, 하고 뜯겨져 나오니까 거기에 뭐가 있냐? 바로 나에게 빈자리가 발생되어 버리죠. 구멍이 뚫린 거예요.
딴 것은 다 내가 애써서 노동하고 돈 벌어서 뭘 할 수 있는데, 율법이 와서 뜯어낸 그 빈자리는 마치 어떤 블랙홀 같아서 내가 발을 들일 수도 없어요. 거기는 빈자리만 달랑, 훤~하게 비어 있어요. 뜯어내시고 그 빈자리에 주께서 새로운 옷으로 거기를 딱 채우십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수치를 가리기 위해, 수치에 건너가지 않도록 윤리, 도덕으로 자기를 무장해서 저항했죠. 악마가 그렇게 시켰으니까요. “죽을 때까지 너의 잘남을 붙들고 죽어라.”
선악 체계에 있는 그 자리에 딱 해놓고 그다음부터 인간들은 먹음직도 보암직도 한 탐스러운 모든 행동을 거침없이 다 하면서도 ‘내가 했다, 왜? 내가 돈 벌어서 내가 했다, 왜? 이게 얼마나 정당한데.’ 그저 정당함, 그저 의로움, 그걸로 자기 마음대로, 욕망대로 살아요.
악령에 사로잡혔으니까 악령이 시키는 대로, 악령이 시켰다는 말은 무슨 일이든지 결국 마지막 다 수입, 지출 빼고, 차변/대변, 남는 나머지 이익이 뭐냐? ‘역시 나는, 돈 좀 날리고 사기 당했지만 그래도 내 의는 유지했잖아.’ 그런 이익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았잖아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냐면, 그 자리를 뜯어내서 빈자리를 만들어 내시고 거기다가 예수님 자신의 옷, 가죽옷인데, 자신의 십자가로 그 수치를 딱 막아놨어요, 주님의 옷으로. 그다음부터는 네가 네 마음대로 하라는 거예요.
마치 옛날 선악 체제에서 네 마음대로 했듯이, 십자가 안에서 네 마음대로 해라, 이거에요. 네가 강도가 되든, 세리가 되든, 창기가 되든 그것조차도 이제는 선악 체제에 적용을 안 받는, 모든 우리의 행위가 무효가 되는, 왜 무효가 되는지, 왜 쭉정이 같은 것들이 무효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보여주는 것이 뭐냐? ‘……되기’에요. 이미 알곡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살아가는 것은 쭉정이처럼 살기. 쭉정이로 살기. 마음 놓고 무식한 쭉정이, 가난한 쭉정이, 부자 쭉정이, 어떤 것을 해도 복음으로 인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전에 마귀가 시켜서 입었던 치마 자리에 예수님의 옷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 옷으로 말미암아, 그 옷 안에 들어있으니까 그것을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 안’이라는 말씀에 예속된 거예요. 말씀 안에서, 완성 안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쭉정이처럼 살면 살수록 피어나는 것은 무엇이냐? ‘네가 알곡되게 한 것은 예수 나의 공로다.’라는 예수님께 사로잡힘만 크게 확산, 확대되게 되어있어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러니까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면 좀 알곡인데 알곡답게 살게 하면 안 됩니까?” 주께서 가만두지 않아요. ‘이미 알곡 되었는데 왜 이제는 쭉정이로 살아야 되지?’ 그게 왜 그런지 다시 말씀드리면, 쭉정이에서 알곡 된다는 건 무엇이 떨어져야 하고 왜 나란 인간은 사라져야 되는가를 쭉정이 노릇하면서 그걸 연관시켜 떨쳐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 변론하게 되면, 그냥 웃죠. ‘나도 좀 했다.’ 속으로요. ‘나도 했어. 그래,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러나 그건 악마에게 사로잡힌 거야.’ 상대방이 화나서 “너 죽고 싶어?” “그래, 죽여라, 죽여라.” 죽여도 쭉정이고 안 죽여도 쭉정이고, 뭐 내 뜻이 아니니까 주께서 목자가 되셔서 알곡 만들고 이미 얻은 천국 양이 되게 했는데 내가 거기서 방어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부모가 권위를 세우려면 이제 선악적 윤리, 도덕으로 세우지 마시고요. 그 구원받은 강도는 사라진 예수님의 시그널이에요. 천국에만 있다는, 이 지상에는 없다는, 천국에 있고 지상에 없고 가려졌던 그 생명나무의 신호가 그 강도에게 전달 되어서 강도는 생명나무의 신호체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왔지만 사실 그분은 하나님의 메시아인 것처럼, 천국, 천상의 존재인 것처럼 그걸 똑같이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어떤 일을 해도 주께서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쭉정이로 드러나서 결국 내가 지킬 나의 의는 애당초 아예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라질 인간이, 사라질 내가, 나의 의를 굳이 거기에 갖다 붙여서 그걸 지킬 이유가 없잖아요?
끝으로 로마서 4장 2절과 8절에서 10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없다. 없어요. 자 어느 정도로 없는가? 4절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쭉정이가 무슨 일을 합니까?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그 더러운 쭉정이에 현혹되지 마시고 주께서 주신 이 율법 자체도 그걸 무관하게 만들어 주시는, 율법과 무관하게 해주시는 그 사랑,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깨닫는 방법은, 아직도 남아있는 나의 의를 제거하는 용도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쭉정이와 같이 똑같이 살게 하시기 때문에 사로잡힌 자의 차이점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길이 없네. 너 사는 거 내가 사는 것하고 똑같이 살고, ‘외로우면 싫어요, 돈 없으면 싫어요’ 쭉정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신나게 마음껏 발산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 사로잡혔다는 것이 특이하게, 반사회적 표현처럼 들려서 거부감을 나타냈는데 그 거부감이 바로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거부 받는 모습인 것을 이제는 동일시할 수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