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중심
2023년 5월 7일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2:16-19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단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을 쓸모있는 판단력으로 간주하는데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에게 믿을 만한 증거가 넉넉히 주어지면 믿지 말래도 믿어주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특징은 실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특징입니다. 우리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다들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있고 난 뒤, 제자들은 무서움을 한데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자신들이 전적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곤란했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자였습니다.
제자들이 모인 방에 문이 닫혀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냥 들어왔습니다.(요 20:19) 마침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라는 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요 20:25) 재차 주님이 오셔서 도마에게 보여준 바는 부활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증거였습니다.
즉 제자들은 부활에 대해서만 납득을 못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믿을 만한 증거를 의도적으로 피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이미 망하고 무너지고 불태워지기로 확정된 세상에서 태어난 것을 모릅니다.
세상이 무너져야 한다면 그 세상에 태어난 자도 같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창세기 3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인간보다 생명나무 과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창 3:22) 인간이 이 땅에 만들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취지를 살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은 생명나무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데서 태어나고 살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폭력적으로 인간 세계를 다루십니다. 인간 나라에서 자체적으로 구성한 천국을 파괴하시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서운 곳을 상정합니다.
그곳을 사람들은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항상 행복하고 낙원스러운 곳도 상정합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만들어낸 미래 세계를 두고 자신들이 고르고 선택을 실시합니다. 자신의 바른 선택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런 규정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한 그 천국은 지옥세계에서 통용되는 재료들로 구성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근원적으로 자신의 선택 자체가 천국에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자기를 부정해도 자기 선택에 의해 진행되는 ‘자기 의’를 도무지 부정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썩이 이(빨)와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가 무엇 때문에 썩었는지를 알려면 이가 자기 자리에서 뽑혀나와야 합니다. 발치되어야 하는 겁니다. 발치하고 보니 그 자리가 악마의 자리였던 겁니다. 악마가 인간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겁니다. 따라서 애처부터 구원이 없는 존재였던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이 예수님의 피입니다. 크게 사고난 차량이 길에 뒤집혀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거기서 연료통이 구멍이 나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더는 이 치량을 운행할 수없다는 말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신체에서 흘려내리는 예수님의 피, 곧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구원대상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숨어계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하나님 아버지도 숨어계시는 분이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초라한 육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숨어계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도 아무에게 찾아가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숨어계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믿을만한 그 어떤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바로 십자가 피흘리심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 백성을 어떤 식으로 모집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요한복음 6:50-60에 걸쳐 나옵니다. 일단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변신하십니다. “나를 먹으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당시 유대인들의 반응은 이러합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이들 유대인의 반응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반응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은 악마로부터 떼내시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곧 악마의 시도임을 분명히 하시고 천국에서 차단시키려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마저 다 떠나고 맙니다. (요 6:60) 이로서 인간들의 신앙으로 영생을 얻을 수없음을 분명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인치심’이 나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치심을 받은 원형’은 마태복음 3:16-17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잉태된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잉태치 못한 자’들로 채우시려는 겁니다.(갈 4:27) 곧 새로운 피조물로서 채우시려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인치심을 받은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행 2:35) 예수님으로부터 주님의 권한으로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인치심을 허락하시는 겁니다.(요 5:21)
이렇게 되면 성도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고후 5:17) 이 새로운 피조물 속에서 ‘〜은 지옥행이요 〜은 천국행이다’라는 말씀이 구조화되게 됩니다. 이제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특혜를 입어 구원되었기에, ‘왜 인간은 자기 선택으로 구원되지 못하느냐’를 말해주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특혜를 나의 자질로 바꾸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디모데후서 2장 16-19절(피중심)2305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16-19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16-19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사도가 복음 전하는데 이상하게 이단이 발생합니다. 정상입니다. 복음을 전하게 될 때 필히 이단이 등장해야 됩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복음 전할 때 예수님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신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예수님이 입을 열어서 뭐를 했다면 거기서 귀신들이, 마귀들이 참지 못하고 예수님을 점점 나락으로 몰아세워 가는데에 그들이 힘을 모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 자기 신상이 점점 더 처참한 죽음으로 가까이가까이 나아가게 돼요. 결국은 우리도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아무런 동조자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외롭게, 모든 만민의 비난을 한 몸에 다 받으면서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죽으셨다’ 하는 말도 맞지만 죽으셨다, 하면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도록 그렇게 이해 되는데 사라졌다는 표현을 해버리면요, 한 개인이 죽은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전체가 죽은 것이 돼요. 주님이 사라져서 다른 세계에 도착해버리면 주님이 다녀간 세상 그 전체가 죽은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린도전서 같은 데서 표현 할 때 예수님을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났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녀가서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살려낼 가치가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고 나머지는 다 죽은 자들로 확인하게 드러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전하니까 여기 나오는 후메내오와 빌라도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이 사람들이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인데요,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사도바울의 복음을 해석했어요. 해석을 해서 그걸 주위 사람에게 유포를 시켰습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이 여기 18절에 잠시 나옵니다.
“저희가 그릇되었다.” Wrong, 잘못되었다. 잘못되었는데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라는, 지나갔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도바울의 복음, 예수님에 대해서 그릇되게 해석해 유포시켰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즉 그들의 주장이 사도바울의 귀에 막 들어오죠. 들어오면서 그릇되었다고, 잘못된 거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 나온다는 말은, 우리가 이 그릇된 것이 무엇이 그릇되었느냐? 다시 말해서 ‘복음을 들을 때에 어떤 경우가 복음을 잘못 해석한 경우에 해당되는가?’를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가 복음을 잘못 알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잘못된, 그릇된 복음의 해석이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관점은 복음을 해석할 때 부활에 강조점을 둔 게 아니에요. 부활에 악센트를 준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악센트를 주었어요. 자, 차이가 뭘까요?
후메내오, 빌라도 이 이단들은 부활에 관심을 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여러분, 제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또는 사도바울의 말을 들어봤는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부활로 이끄십니다. 그러니 이 복을 받으세요.”라고 이야기 할 때, 그게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 진짜 복음과 맞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어디를 주목하고, 사람들이 어떤 소식에 기뻐하는 것을 미리 간파 해가지고 이단들이 설쳐댔는가를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돼요.
왜냐하면, 이단들의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거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단들이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우리가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성경을 보고, 예수님을 듣고, 구약을 보면서 은근히 우리가 이 이단들이 노리고 있는 것과 똑같이 노리고 있기 때문에 이 후메내오, 빌라도라는 이 주장들이 오늘날 의미 있게, 유의미하게 우리에게 다가와야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바울의 핵심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런데 이단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주 예수의 부활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것, 부활을 상품으로 걸고 사람들에게 자기 사람, 자기 팬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사람 만들기 위해서 부활 가지고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처럼 영광스럽게 고통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강점을 두고 소위 나름대로의 목회를 하는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지 않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스러운 분이 아니었었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부활을 준대.”라는 말로 그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들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인기를 얻었어요. 인기를 얻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어떻게 하느냐? 실제로 우리나라에 그런 이단도 있지만, 그 사람들에게 몰려온 그 사람들 특징이 뭐냐? 죽어도 산다는, 부활한다는 그 부활이 그게 탐이 나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게 당신 말이 실제라면 그 부활의 증거를 좀 보여주면 우리가 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겠는데 뭐 그런 거 없겠습니까?”라고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이만희도 그런 사람 아닙니까? 신천지인지, 구천지인지, 무슨 천지인지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게 그거거든요. 그 사람이 시작은 이렇게 해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다.’ 시작은 그렇게 해요. 그러면 추종자들이 “그러면 죽어도 부활됩니까?” “예. 주님은 살아계시는 영이기 때문에 죽어도 다시 그 사람을 살려냅니다. 아파도 살려냅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이 획기적인 내용에 사람들은 돈 바치고, 몸 바치고, 시간 바치고 다 바쳐가지고 ‘그래, 이게 해결책이야.’ 하고 온 거예요. 십자가에 관심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십자가에 관심 없어요. ‘내가 어떻게 죽어도 다시 사는가? 내가 어떻게 영원히 사는가?’ 거기에 관심 두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해보니까, 그 증거가 만만치 않거든요. 아프다가 나은 경우는 있지만 죽었다가 살아난다 하니까 증거를 조작해도 너무 크게 조작해야 되는 부담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면 “부활 지나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활은 지나가 버렸다.”라고 이 후메내오와 빌라도가, 일단 온 사람은 돈이 되니까, 자기의 명예가 되니까 일단 붙잡고 싶어서, 붙들어놓기 위해서 이제 말씀에 대한 변경에 들어가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해요. 모든 교회가 다들 그렇게 해요.
그런데 이러한 오류가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도 이게 제자들의 딜레마였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제자들이 무서워하면서 같이 있었어요. 로마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오야붕이거든요. 대장이거든요.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더 사회질서가 유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추종세력, 남은 추종세력까지 색출해요.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국가 질서상 합당하기 때문에 체포령이 내려올 수 있을까 싶어서 벌벌 떨었던 거예요, 제자들이.
그러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일방적으로 나타났어요. 그 자리에 도마가 있었습니다. 도마가 말하기를 “나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도마라고 하는 제자 입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인간의 믿음의 한계를 스스로 폭로를 해버린 거예요. “나는 보지 않고는 절대로 믿지 않겠다.”라고 한 겁니다.
사람들은 도마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제자들이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들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싫어한다.’ 그런 생각을 안 가졌어요. 그들은 잠시 몸을 숨긴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와 자기 세계가 떨어져 버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왜? 그동안 주님이 주신 은혜도 많고 자기도 꾸준하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정과 재산을 다 버리고 3년 동안 주님에게 충실하게 열심히 추종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을 가롯 유다처럼 전적으로 배신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관계는 이어졌다고 여겼던 거예요. 다만 부활에 대해서는 그들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부활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내가 못 믿겠고, 즉 나머지는 믿는데, 그 부활은 못 믿겠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이게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몰라서 그래요.
곧 십자가를 몰랐는데 자꾸 “부활을 못 믿었다.” 이런 핑계들을 대는데요. 부활을 못 믿는 거까지 갈 것도 없이 십자가 자체를, 왜 주께서 피를 흘렸는지를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도마가 나타날 때 주님께서는 “봐, 자 봐.” 이게 아니라 창 자국, 못 자국을 보여 준 거예요. “너는 십자가부터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피를 흘린 거거든요.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쉬워요. 차 사고가 나서 완전히 차가 뒤집어졌습니다. 큰 사고가 나가지고 차가 폐차되었어요. 폐차되고 난 뒤에 차가 도로가에 있는데 차가 망가졌으니까 연료통이 새가지고 거기서 기름이 똑, 똑, 떨어지겠지요? 이게 피에요. 왜 피가 흘러야 되는가? 차가 운행을 못 하게 됐어요. 망가져가지고 더 이상 차의 기능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피가 흐른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용해서 하늘나라, 천국에 가보겠다고 시도했는데 막상 예수님 쪽에서 대체한 것은, 예수님이 고장 나 버렸어요. 고장 났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 피입니다. 예수님은 피 외에 어떤 증거를 세상에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인간은, 그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메시아가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반길 만한 자기 쪽의 자질들을 전부 다 총동원했어요. 그걸 그들은 ‘믿음’이라고 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신의 믿음을 쓸모없는 믿음이 아니고 쓸모 있는 믿음으로 간주해서 내가 믿을 만한 것은 끝까지 찾아내서, 믿어서 내가 천국에 가려고 시도한 거예요.
제자들이나, 인간들이나. 심지어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꾸준히 예수님을 처단하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고 제발, Please, 제발 나에게 당신이 메시아임을 믿을 수 있도록 뭔가 증거를 제공해달라는 거예요, 증거를!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이 세상에 어떤 해결책도 없다는 사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 가지고 절대로 못 믿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 때는 선택하는 기준이 뭐냐? 무서운 것, 내가 앞으로 망친다든지, 깨진다든지, 완전히 무너진다든지 이렇게 무서운 것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절대로 무서운 것은 선택하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은 지옥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지옥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지옥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곳이 지옥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사람들은 무서운 곳은 지옥, 반면에 너무나 낙원적인 것, 너무나 편하고 행복한 것은 지옥 맞은편에 천국이 거기에 있다고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옥 선택할래? 천국 선택할래?” 하면 천국을 선택해요. “펩시콜라 선택할래, 코카콜라 선택할래?” 눈 감고 뭐 이렇게 코카콜라 맛 찾듯이 인간은 자기 선택을 믿습니다. 내 선택을 믿어요. 나는 내가 무서워지는 것이 제일 싫어요. 무서워지는 것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요. 지옥은 무서운 곳이에요. 천국은 너무 좋은 곳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만들어놓은 천국은 어디 있느냐면, 지옥 그 뒤편에 있어요. 지옥 맞은편에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 그 뒤편에 숨어 있는 거예요, 천국이! ‘지옥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천국이다.’ 이거에요, 주의 뜻은. 지옥을 누가 선택합니까? 인간이 구원받을 아무런 증거, 인간에게 살 수 있는 어떤 증거를 주님께서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천 년 동안 그 시대에 사람들을 향하여 사기 치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받을 어떤 증거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차량이 망가졌다니까요. 망가졌으니까 피를 흘리는 거예요. 망가졌으니까. 문제는 인간들이 그 피를 거부한 것은 본인이 안 망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왜? 망가지는 게 무섭기 때문에.
어른들은 이성적이라서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으면 ‘그래. 이것은 돌파하면 뭐 좋은 날, 좋은 일 있겠지.’ 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힘든 것을 담당하려고, 그 무서움을 헤쳐가려고 시도는 해봐요, 어른들은. 미국 대통령 험프리라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어요. “인간의 최대 실수는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닭고기 아줌마’라는 노래가 나와요. ‘닭 포기하지 마.’ 이걸 줄이면 ‘닭고기 아줌마’ 빨리 들으면 그렇게 돼요. ‘인간의 최대 실수는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하지 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피를 제시해서 아무도 천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명나무 노선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창세기 3장에 나와요. 하나님께선 인간을 내쫓았지, 생명 나무에 대해서는 일체의 양보가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포기하는 대신 생명 나무를 포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생명 나무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주께서 행사한 것은 폭력입니다. 주님의 폭력이에요.
어른들은 이렇게 무서움을 시도하는데 애들은 무서움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피하지요. 그래서 애들의 본능을 가지고 자기 사는 그 시대상을 묘사한 시가 있어요. 본명은 김해경이고 실명은 이상(1910-1937)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시가 있는데 그게 오감도(烏瞰圖)라는 시에요.
원래 이 세상에는 조감도(鳥瞰圖)라는 게 있지요. ‘오감도’라는 건 이 사람이 처음 지어놨어요. 조감도가 있어요. 그런데 일부러 제목을 바꿔요. ‘오감도’ ‘오감도’라고 하는 것은 까마귀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까마귀인데 어떤 까마귀냐면 불길한 까마귀예요. 그 시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열세 명의 아해, 아해라는 것은 ‘어린이’라는 말이죠.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시에 그렇게 쭉 나와요.
제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
이렇게 열두 명을 다 해요. 열세 명까지 다 나와요. 이 말은, 어른들은 아무리 자기를 속이고속여도, 어른들은 속이는 것밖에 내놓지 않지만 어린애는 자기의 본심을 속일 수가 없어요. 자기가 사는 그 시대, 일제시대거든요, 그 상황에 대해서 시인은 어린애의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이 시대에 대해서 산다는 거 자체를 한마디로 말해서 무섭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은 말하기를 그 막다른 골목을 달리면서, 도로를 질주하면서 무섭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 뭐냐? 도로를 질주해도 무서워요. 그래서 마지막 결론이 뭐냐?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소”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게 이게 뭐냐면, 도로를 탈출해 보려고 시도하나, 시도하지 않으나 이 세상은 불길한 까마귀의 안목에서 볼 때 그냥 아무 해결책 없고 탈출구가 없는 세상이다,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이 세상이, 사는 것 자체가 무섭다고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그 무서움에 대해서 인간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떤 해결책을 찾아요. 그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 뭐냐? 교회 다녀서 성경공부하고 말씀 듣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오해가 시작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이단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이단들이. 이단들이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게, 이단들의 주장은 이겁니다. 단출한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고 육으로 정화하면 구원된다.’는 거예요. 너무 빨리해서 천천히 해볼까요? ‘영적으로 거듭나고 육으로 정화되면, 바르게 살면 구원된다’는 겁니다.
이게 이단의 공식, 이단이에요. 왜냐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피에요. 그 제자들은 예수님 믿고 구원될 줄 알았죠. 어디에 막혔습니까? 그들은……,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내가 예수님은 다 믿는데 그 부활은 못 믿겠다.” 이렇게 나와요. 골라잡아요.
골라잡을 때 뭐냐? 자기 인생의 해결책을 위해서 동원되는 자기 믿음에 대해서, 자기 믿음을 쓸모 있는 믿음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 판단력을 쓸모 있는 판단력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나의 선택을 쓸모 있는 선택지로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요한계시록 22장에 17절,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이렇게 하고 18절에 보면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폭력적이에요. 폭력적입니다. 폭력이 동반되지 않는 그러한 생명의 보존은 없어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 돼야 돼요. 지옥보다 더 무서움이 수반되지 않는 천국은 없습니다. 지옥보다 더 무서운 게 뭐냐? 천국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무서운 지옥을 피해서 성경책을 가지고 천국을 상상해요.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고, 뭐 하늘에 맨션아파트 있고……, 자꾸 성경을 따와 가지고 천국을 상상해놓고, 지옥을 피하고 천국 가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판단에 본인이 신앙이라는 것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사야 45장에 나오는 15절의 말씀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행위에요.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다.’ 이게 결정타입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 숨어계시는 방법으로 일하세요.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몸을 드러내도 그 드러낸 자체가 숨어 있는 모습의 극단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결정타에요. 봤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람 몸으로 봤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저 하나님 말고 다른 하나님을 꿍꿍이로 상상하고 있다는 점이 모조리 들통나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나타냈지만 ‘당신 말고 난 다른 하나님’이라고 그 인간들이 말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왜 아닌 거야.’라고 배척하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모든, 어떤 인간도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 번째, 성령께서는 숨어 있는 방법으로 일해요.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다 이사야 45장 15절의 말씀에 충실합니다. ‘나는 숨어 있다.’ 숨어 있는 하나님. 숨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숨기신다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주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죽으면 산다’는 현혹될 수밖에 없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피를 흘리는 거예요, 이 땅에.
이 땅에서 피를 흘리면 이것은 그 인간 자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사람 안에, 육신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피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 거예요. 아까 그 사고 난 차량처럼. 차 안에 기름이, 연료가 있어야지 왜 기름이 바깥에, 아스팔트에 뚝, 뚝, 뚝 떨어집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그런 방식은 어떤 방식이냐면, 국민학교 어린 여자애들이, 지금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줄 넘기를 했거든요. 세 명이 줄넘기 할 때 두 명이 줄을 잡고 돌립니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 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노래 부르면 들어가는 타이밍을 찾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천국 들어오라고 줄을 돌려요. 인간은 천국 들어가려고 타이밍을 맞춰 들어가는데 못 들어가게 만들어버려요. ‘피’입니다. 들어갈 기회가 없어요, 들어갈 기회가. 피로 막아버렸으니까요. 피는 무서운 거예요. 내가 망치는 겁니다. 주님께서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은, 생명 노선에 의하면 이 세상은 애초부터 필히 망가져야 돼요, 이 세상이.
그 망가지는 곳에 누가 살고 있냐면, 거기서 우리가 태어났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망가지는 세상이 망가질 때에 거기서 태어난 우리도 같이 망가지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끝이에요. 다른 생각하면 안 돼요. 그냥 지옥에서 태어나 지옥 가면 되는 겁니다. 자꾸 다른 생각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이게 인간이 누구의 하수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밝혀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를 보존하기 위해서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등장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 말고 또 하나의 존재가 등장해요. 대화상대에서. 그게 뭐냐면 악마가 등장합니다. 뱀이 등장한다 이 말이에요. 자꾸 인간들이 악마의 예하 부대니까 인간들을 앞장세워 가지고 악마가 자기를 자꾸 뒤에 숨기고 있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망가진 세상이라 단정 지으시고 이 세상을 새로 만들어요. 새로 만든다는 게 이사야 45장 5절에서 7절에 나옵니다. 5절부터 길어서 다 읽을 필요 없고, 7절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지옥도 만들고 천국을 만드시는 분이에요. 다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이 지옥으로 무너져 가는 그 재료를 가지고 만든 천국이기 때문에 그 천국도 지옥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지옥입니다. 왜? 그 재료가 똑같아요.
인간이 이 땅에서 본인의 판단력을 활용해서, 좋은 미래를 내가 얻기 위해서 시도하는 그 모든 재료를 가지고, 내 좋은 선택이 나를 살린다는 그런 포기하지 않는 종교적 집념 가지고 뭘 하느냐? 천국을 만들고 교회는 그 천국을 상품으로 걸어가지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지옥 가지요. 코카콜라 선택해도 지옥 가고, 펩시콜라 선택해도 지옥 가고, 예수 믿어도 지옥 가고, 안 믿어도 지옥 가고, 절에 가도 지옥 가고. 이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무너져 가야 될 세상에 우리가 출생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잉태되어서 출생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숨어서 일하시거든요. 그 숨어서 일한 것을 디모데후서에선 뭐라고 되어있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19절에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곧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창조에 친히 나셨으니’ 이렇게 보면 돼요. “인침이 있어” 하나님의 ‘인치심’이 있으시다는 거예요. 차 ‘인치심’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남은 자’인데요.
‘인쳤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 맺는 관계를 ‘인쳤다.’ 혹은 ‘도장 찍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표준적 인물이 예수님인데 마태복음 3장에 나옵니다. 3장 16, 17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게 ‘인치심’이에요. 성령을 가지고 인치셨다, 이 말이죠. 인 치신 사람에게 주께서 어떻게 활동하느냐면, 치과에 가면 이빨이 완전히 고장 날 때는 뭐라고 하냐? 의사가 발치해야 한다고 해요. ‘발치’, 발치라 하는 것은 이를 뽑는 거죠. 발치가 되고 난 뒤에 주께서 발치시키는 이유가 어디에 있냐면, 발치를 시킴으로써 네 이가 꽂혀 있던 그 자리를 우리가 보게 하는 거예요. 그게 악마의 자리였던 겁니다.
내가 이 이빨이라면 그 이가 악마의 자리에 박혀서 천국 갈 소망을 키우고 있었던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런 사람, “내가 성경 말씀을 어떻게 실천에 옮기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자리는 그냥 있는데 만약에 인간이 구원받아버리면 그 자리에 있는 악마도 뒤에서 같이 딸려서 같이 천국 가는 셈이 돼요. 악마가 노리는 게 바로 그거였죠.
분리시키는 거예요. 내 자리, 내가 박혔던 자리와 뽑아낸 이. 그런데 뽑아낸 이는 어떤 이냐? 이미 썩어버린 이에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소유를 버렸다. 그리고 남은 평생을 남을 위해 희생한다. 무소유 생활하면서 남에게 희생하는 삶을 선호해서 나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경건히 하고 실천하고, (오늘 말씀처럼) 불의에서 떠나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불의에서 떠난다, 악한 데서 떠난다, 그렇게 살겠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발치되지 않았어요. 왜냐면 아무리, 아무리 애써도 뽑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자기 의예요, 자기의. 이것은 무소유가 아니고, 희생이 아니고, 헌신도 아니라 십자가에 죽어도 뽑히지 않는 게 자기 의입니다. 이유가 뭐냐?
이것은 간단한 물리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배에게다가 돛을 달아요.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속으로 한 번 맞춰보세요. 배에다가 돛을 달고 거기에 선풍기를 돌립니다. 선풍기를 돌려서 바람이 나게 하고 그 바람이 높이 꽂아놓은 돛에 부딪힐 때 배가 앞으로 갈까요, 뒤로 갈까요, 멈출까요? 셋 중에 하나에요.
같은 배에 한 쪽은 돛을 달아놓고, 다른 한쪽에서 선풍기 바람을 돛을 향하여 불게 하면 그 돛에 바람을, 힘을 받아서 배가 앞으로 갈까요, 멈춰 있을까요, 아니면 뒤로 갈까요? 이것의 물리적 실험은 좋아요. 왜? 실제로 모형 배 만들어서 해 보면 되는 거예요.
그 비슷한 문제가 그거에요.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물에서 허우적대다가 좋은 생각이 났어요. 자기 보기에 운동화 끈이 풀렸거든요. 자, 문제 나갑니다. 자기의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자기가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못 나올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의지는 악마가 준 겁니다. 악마가 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찾고 있던 어떤 구원의 증거를 주께서는 차단시켰습니다. 그게 피입니다. 그게 피에요. 십자가입니다.
이제 여러분, 이단 구분하시겠지요? 이단.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그 의미를 아시겠지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나는 너희가 예수님 죽은 거 외에는 일체 알지않기를 원한다.
이게 뭐냐면 피라는 것은, 망가졌다는 것은 인간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선택을 해도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유 의지가 있고 그런 결정권이 있다.’ “그렇다면 네가 굳이 선택 못 할 그것을 내가 증거로 제시할게.” 그게 바로 주께서 피 흘린 겁니다. 피 흘린 거예요.
자, 이러한 발치를 하게 되는데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을 차단시키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한국 교회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나를 설득하려고 내가 나한테 그동안 거짓말을 만들어 낸 거예요, 끝까지.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은 그냥 무너지게, 망하게 되어 있어요. 탈출할 수 있는 방안은 없습니다. 왜? 그래야 생명 나무가, 그 생명 나무의 가치가 유지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 위주가 아닙니다. 생명 나무 위주에요. 인간은 저주받으라고 내쳐버리고 하나님은 생명 나무 그거 보존하는 데 열중했어요.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물으면 하나님 내부에 하나님이 인친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아까 마태복음 3장에서 16절, 17절 말씀드렸죠. 하나님이 하나님께 인치심을 주는 거예요. 내리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피는 누구에게 공급하느냐? 예수님 피는 하나님 자체한테 공급해버려요. 그게 새 언약이라는 거예요.
“아버지, 제 살과 피를 받으소서.” 사람은 피를 못 믿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모두 하나님께 감추어진 존재예요. 그래야 인간이 제대로 망하고 제대로 지옥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인간 다 지옥 보내고, 그러면 하늘나라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 그 심심해서 살겠냐?’ 그렇게 주장 하겠죠.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특혜를 준 게 있어요. 그 특혜가 뭐냐? 새 언약 받고 난 뒤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 자리에 아들을 올렸어요. 주의 자리에다가. 거기 하나님 오른손 자리에 올렸습니다. 그렇게 올리고 그다음에 이렇게 했어요. 요한복음 5장에, 이제부터 네가 원하는 자를 네가 선택해라. 21, 2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걸 가지고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더 어렵게 이야기했어요. ‘하늘나라에 잉태치 않는 자만 모인다’ 천국에는 잉태치 않는 자만 모이는 거예요.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라디아서 4장 26절의 말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건지는 방법에 대해서 요한복음 6장 50절에서 쭉 나옵니다. 긴데요. 길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한 구절 한 구절 따박따박 설명해 드릴게요. 50절 “이는 하늘에서 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것이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이렇게 했어요.
영생을 보존하는 거예요. 사람을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영생의 어떤 요소, 영생의 요소가 하나님께서 주님이라고 인정할 만한 그 분을 생명의 떡으로서 하나님 내부에서 하나님의 인치심을 만들어버려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치심이 어려우면, 도장 찍었다는 말이 어려우면, 성령에 의해서 확정된 분을 만들고 그분이 자기를 뭐로 변장하느냐면 떡으로 변장해요. 떡으로 변장해서 이 떡을 가지고 ‘내가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주님 쪽에서 실시를 해버립니다.
계속해서 자기를 숨기는 방식이에요. 이 말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은 전부 다 차단된 상태에요.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는 건 성립 안 되는 이유가, 그들, 유대인들은 ‘나는 떡 있으면, 내가 먹을만하면 먹을 게’라는 자기의 믿음과 선택의지와 그리고 결정권을 자꾸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납득이 되기 때문에 결정할 수 있도록 좀 해달라는 게 인간 요구인데 인간은 같이 무너지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걸 거부하죠.
52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아……,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몰라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람의 살점을 먹느냐?” 이 말을 유대인들이, 이 고마운 유대인들이 오늘날 우리의 말을, 우리의 속마음을 대신해 주고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이야기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날 햄버거 사주고 어버이날 모여서 용돈 드리고, 그래서 교회도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만, 그냥 어린이날 해가지고 효도하는 그게 인간들의 선택지에요. 왜?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의는 포기를 못 하니까. 어떤 경우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이것만큼은 좀 하나님이 안 망치게 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위해서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내가 나의 순수함을 지키려고 하는 이 애타는 노력만큼은 좀 인정해 주면 안 되겠어요?’ 하는 그거, 그거에 대해서 주께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너 지금 안 무너지려고 하지? 네가 이 땅에 더 살려고 하지? 너 빠져나갈 마음이 전혀 없지? 그렇지?”
너무 귀한 말씀이라 또다시 할 수밖에 없어요. 유대인들이 말하되, 서로 다투어, 이때다 해가지고 예수님 반박해야 될 이때다, 해서 서로 발언권 얻어 서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살을 먹느냐는 거예요. 만약에 그 현장에 제가 주님이라면 저는 아무 소리 안 하겠어요. 이렇게 하겠어요. 박수를, “짝! 짝! 짝! 짝!”
바로 그겁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뭐 병 나았는데 기도했다, 응답받았다, 증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봤다, 정답 아니에요. 기도 빡세게 했다, 교회가 부흥됐다, 뭐 자시고 다 정답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떤 증거도, 모든 증거를 다 차단시켰어요. 아무도 못 믿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선 특혜를 베푸시고 특혜를 소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특혜를 특혜성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 내부에다 유혹 거리를 피하게 하는 게 아니고 유혹 거리를 발생시켜가지고 이것은 유혹거리고, 이거는 특혜고, 둘 다를 다 집어넣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선택보다도 말씀이 이미 선택한 결과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 겁니다.
이게 지옥이고 이거 천국이고, 그리고 천국과 지옥 속에서 나는 천국을 선택했다, 를 빼버리고 지옥을 집어넣고 천국을 집어넣어가지고 이 모든 결과는 이미 선택이 끝난, 주님의 특혜가 끝난 결과물로서 생산된 게 바로 성도라는 거예요. 이게 인치심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 죽으신 거예요. “아들아 조금만 참아라. 내 부활해 줄게.” 이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예수님을 십자가 죽게 만든 이유가, 아버지의 선택이 예수님 안에 살아있게 하듯이 오늘날 성도 안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내 모습과 그리고 값없이 주신 천국을 우리 속에 다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자리가 나의 아니라 말씀의 자리로 만들어버렸어요. 말씀이 현장 속으로 움직이는 자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일을 작업하는 그것이 53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금강산 찾아가자……” 노래 부르면서 이렇게 천국에 들어오려고 줄넘기를 하는데, 줄넘기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안 주네요. 말씀의 줄넘기인데 도무지 믿을 만한 건덕지가 없게 만들어요. 믿지를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시신이 덮쳐버리면 그 사람은 같이 없어질 세계에서 너도 같이 너도 죽으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렇게 할 때 60절에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이게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어렵다, 아무도 못 믿는다.’를, 주께서는 요한복음 6장 60절 말씀을 우리 속에 집어넣었어요.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 속에 내가 믿을 수 없는 말씀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나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안에 있기에, 믿을 수 없기에 이미 구원된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성경 말씀도 실천에 옮길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이 토해진다면 그 사람은 영생 얻은 사람이고 영생 노선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그게 이제 하나님의 의에요. 그러니까 불의한 것과 의를 다 집어넣고 우리는 불의한 쪽에 해당되지 결코 의로운 쪽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사람으로 발산케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라는 거예요. 그걸 성도라 하고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걸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새로운, 그냥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 안이란 조건이에요. 아까 요한복음 보셨죠?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그들도 내 안에 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라는 말은 내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뭘 하셨는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되는, 내가 발치가 되고 난 뒤에, 발치 된, 곧 내가 전에 꽂혀 있던 그 자리가 스스로 내가 구원되기 위해서 노력했던 악마의 자리인 것을,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 노력했던 그 자리가 악마의 자리인 것을 증거 하는 그러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예요.
끝으로 고린도후서 1장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1장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에게 아버지가 하신 그게 그대로 예수 안에 적용되는 것이고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여러분, 요새 아카시아 나무 향기가 대단하지요. 아침에 나가면 대단하거든요. 그런데 코를 막고 있어도 들어와요, 향기가. 그래서 성도는요, 가만히 있어도 아카시아나무에요. 한 그루의 아카시아나무. 복음의 향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특혜성이죠. 주께서 특별한 혜택을 입어서 내가 천국 백성 되었다는 이 향기를 여러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성도라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마귀에 속아서 어떻게든 이 고생 많은 세상 떠나서 좋은 천국 가려고 시도했던지, 남 욕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그동안 꾸준히 속여 왔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빨을 빼고 보니까 바로 그 자리가 악마의 자리이고 그 악마의 자리라는 그 이야기를 이제는 잊지 말고 우리 속에 담아서 주님의 특혜성만, 주님의 피의 공로만 드러내는 주의 증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참고로 아까 배 실험에서 선풍기 바람을 반대로 하면 배는 앞으로 갑니다, 참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