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24강 (이 근호목사, 2007년 7월 13일(2), 서울의존교회)
지금까지 의존교회 강의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 되었는가? 날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슨 조치를 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오늘 강의 첫 시간에 “남을 위해서 살아라”라고 하니까, “남을 위해 안 살면 지옥 갑니까? 또 하나의 율법이 추가 된 겁니까?”라고 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나를 용납 안하고 나를 없애버리고 나를 지워버리는 사랑으로 온 사랑입니다.
나를 남겨두지 않고 내가 날 위해서 살 여지를 추호도 용서하지 않는, ‘나는 이제부터 구원받았으니까 나를 위해서 살아야지’ 라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그런 사랑으로 온 거예요. 남이 누구냐, 하는 것을 몰라도 돼요. 남이 누구냐, 하는 것은 본인이 고민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없어진다면 내가 내 생각을 안 하면 남이 누가 되었든 간에 나와 별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 말도 참 어려운 말입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남이 누가 되었든지 간에 내 왜 고민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 사람한테 잘해줘서 내가 얻어 챙길 것이 있습니까? 내가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첫째 시간 끝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정말 용서(사랑)를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사랑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왜 나를(Why me?) 이렇게 용서해주십니까?’ 했을 때, 그 사랑은 남을 위한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덮치니까 나를 죽이고, 나만 죽으면 나머지 남에 대한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남이 누가 되었든지 내가 이웃을 고를 필요가 없어요. “너 내 남(이웃) 할래?” 이렇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만 죽으면 사랑은 남에게 저절로 넘어가는 사랑이 됩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처럼 저절로 넘어가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
이 모든 것이 뭐가 빠졌냐 하면, 내 정과 욕심이 죽은 상태에서만 이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곧 사랑을 막는 골칫거리 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나를 짓밟아 버리고 사랑이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내가 밟혔다는 그 자체가 우리로서는 흐뭇해야 되고 기분이 아주 좋아야 됩니다.
‘더 이상 내가 내 문제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고 고민할 필요가 없구나. 나에게 찾아온 사랑이 나를 통해서 남에게 전달되게 하시는 구나.’ 그 작업을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죽은 놈인데 뭘 내가 합니까? 나를 죽이는 것처럼 넘어가기 때문에 나를 거쳐서 넘어가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데 만약에 내가 살아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것들은 다 그 속에 누가 들어 있어요? 자기가 안 죽고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전부 다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겠다고, 내가 나를 놓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를 붙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저는 어린이 여러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의존교회 아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길거리에 있는 어린애들이 그냥 철모르고 뛰어놀 때는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만 줘도 그렇게 좋아했던 애들인데 한 20년 넘어 지나서 스무살이 넘어보면 밤 11시 넘어 깊숙한 골목에서 술 취해서 비틀거리고 꽥꽥거리면서 토합니다.
누가 저 아이들을 저렇게 만들었는가? 술 먹고 토하고 이런 나쁜 짓을 할 줄 모르는 그 천진난만했던 아이들을 누가 저렇게 술(처)먹고 길바닥에 뒹굴고 토하게 만들었는가?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누구한테 있다고 했습니까? 자기 자신한테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누가 사랑해 주지를 않았어요. 자기 자신을 포기할 그 이상으로 큰 사랑이 자기에게 온 적이 없어요.
기껏 사랑해봐야 자기관리하의 사랑이라! 그 사랑? 그거 내가 10퍼센트 취하고, 그것? 그것도 나에게 좀 가져오고 내가 알아서 다 선택하고 내가 알아서 모아야 될 내 사랑이지 나 자신마저 완전히 포기할 그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어이 죽을 때 까지 나를 내가 지켜야 되는 거예요.
내가 지키려고 하니까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술의 힘으로, 술이 힘을 빌려서 자아를 잊어보려고 그렇게 개처럼 먹고 퍼지고 하는 겁니다. 그 모습이 바로 자기를 잊지 못하는 모습인데 자기를 그렇게 고수한다면 내가 살아나고 그렇게 되어서 결국 자기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이웃이 없고 남이 죽어 버립니다. 남이 강도를 만나든 어찌되든 나는 몰라라, 하는 식으로 남이 죽고 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20년 지나서 과음하고 토하고 길바닥에 뒹구는 식으로 살아가도록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는 겁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본인 안에 들어 있는 속성이 있어요. 갈라디아서에서는 그걸 가지고 한글자로 뭐라고 합니까? 육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육을 계속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계속 키워나가고, 남에게 안지고 다른 사람에게 이겼다고 계속 자랑하고 싶어 하는 식으로 살다 보니까 결국은 아까 살펴본 갈라디아서 5:1-21의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그것 다 깨보면 남는 것은 뭡니까? “나는 누구 앞에서도 지기 싫어! 나는 승리자가 되고 말거야!(먹고 말거야, 치토스!) 남을 위해 살다니 어림도 없지. 남을 약간 도와주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다시 세배, 네 배, 다섯 배로 이익이 돌아올 때만 남을 도와주지 나를 잊어버리고 남 생각하고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어. 왜? 나는 나니까. 내 힘으로 내가 구원받으니까. 천당 가는 것도 내 힘으로 가니까.”
이것이 바로 용서를 모르고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만나게 되면 Why me, “왜 당신은 내 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되고 그 질문의 정답은 “네가 아무리 네 힘으로 애써도 이룰 수 없는 그 용서를 내가 네 대신 죄 값을 치름으로서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따내기 위해서 이런 수난, 이런 저주를 네 대신 받고 있단다”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저주 받을 짓’이라 하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여기 사람 앞에 뭐가 붙었지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죠. 그냥 사람이 아니죠. 뭐가 붙지요? 뭐가 붙습니까? 나에게 속한 ‘나’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한 나? 그리스도 예수에 속한 ‘나’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어디에 못 박았다?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너라는 인간은 이미 죽은 자야”라는 겁니다. 죽은 자에게는 개성이 필요 없죠. 따로 뽑아낼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좀 쉽게 하겠습니다. 잠시 과학시간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구는 크게 네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지구위의 땅과 바다가 있는 것을 ‘지표면’이라고 합니다. 그 밑에 있는 것을 가지고 ‘지각’이라고 합니다. 지각의 밑에는 ‘맨틀’이라고 있습니다. 맨틀과 지각사이에 마그마가 있는데 그것이 약한 골목을 뚫고 나오면 이것이 화산이 됩니다.
그 맨틀 밑에는 핵이 있어요. 핵은 아주 뜨겁고 무거운 물질입니다. 여기서 나온 열기가 지표를 뜨겁게 만들어요. 지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구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이 세상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지표면에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다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지옥가고(지옥맨) 어떤 사람은 천국가고(천국맨), 지옥 가는 사람 따로 있고 천국 가는 사람 따로 있어요.
왜 똑같은 사람이 지표면에 살고 있으면서 똑같지 않은가? 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힘이 있어요. 그 힘의 제일 밑바닥에 바로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뭔지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좌우편으로 각각 한사람씩 배치해서 총 세사람이 십자가를 지도록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했어요.
동시에 원투쓰리가 다 십자가에 달렸는데 이 ‘투’에 해당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둘 중에 어느 쪽인지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만 이 둘 중에 한쪽은 어디로 가고? 천국으로 가고 한쪽은 지옥으로 갔어요. 이 세 사람, 지옥 가는 사람과 천국 가는 사람과 그 가운데 있는 예수님, 이것이 한 세트입니다.
이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원형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지표까지 올라가요. 올라가니까 예수님 곁에 있는 어떤 사람은 지옥 가는 것처럼 현재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이 함께 계실 때에 지옥 갈사람 따로 있고 천국 갈사람 따로 있어요. 마치 처음에 십자가 달릴 때, 어떤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지옥가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가는 그것이 그대로 위로 올라옵니다.
이 핵(십자가)이 맨틀을 통해서 지각을 통해서 지표까지 올라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내가 착해야 천당 가. 내가 나쁜 짓 하면 지옥 가.’ 이렇게 나쁜 짓 하면 지옥 가고 착한 짓 하면 천당 가는데,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다 착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쁜 짓 하는 것보다 착한 일 한 것이 더 많으면 그 많은 만큼 천국에 가서라도 더 많은 상을 받고 나쁜 짓을 해도 더 나쁜 짓을 해버리면 지옥에 가더라도 고생을 많이 하고 벌을 심하게 받는 쪽으로 몰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두리번두리번, 저희들끼리 묻는 거예요. “어떻게 천당 가는데?” 그런데 진짜 아는 사람은 두리번두리번 할 것이 아니고 발밑을 파야 되지요. 파고 또 파면 그 밑에서 뭐가 나옵니까? 십자가가 나오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5:24에 보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금 구원받은 사람 따로 있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금 저주받은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 현재 온 세상에 지금 살아가고 있는 법칙이고 진리입니다.
이 법칙 바깥으로 벗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람들끼리 있으면 ‘누가 누가 잘하나’ 이렇게 내기를 하겠지만 우리 발밑, 지구를 파고 들어가 보면 안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뜨거운 핵이 나오듯이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밑을 파고 들어가 보면 끝에 십자가가 나와요. 그 십자가에 의해서 용서받은 사람과 십자가로부터 저주 받은 사람과 그 두 종류의 사람이 현재 더불어서 50억 인구를 유지하면서 이 세상을 지금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밑바닥을 모르고 서로 서로 비교하면서 누가 착한가, 누가 못났나, 서로 비교하면서 ‘야, 너는 천당 가겠네. 좋겠다. 야, 너는 지옥 가겠다’하고 서로의 기준에 의해서, 그것이 행함인데 그 행함에 따라서 천당 가고 지옥 가는 판결을 내리는지 그렇게들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게 큰 실수에요. 큰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에게 이것을 뚫게 하는데 뭘로 뚫는가, 바로 말씀으로 뚫어요.
말씀으로, 또는 율법으로, 이것이 같은 말인데 말씀으로 이것을 뚫어 나가요. 뚫어 나가니까 자기 딴에는 “목사님! 저는 너무 겸손해요. 쟤는 수박 두 조각 먹을 때 저는 한 조각 밖에 안 먹었으니까 제가 얼마나 겸손하고 착한지”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을 더 뚫어 보니까 디모데후서 같은 경우에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
“너 저녁 먹었어, 안 먹었어?”
“먹었어요.”
“그런데 저녁 먹고 또 수박을 먹었어? 너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을 모르는 모양이다(지금 계속 먹고 있잖아).”
그러니까 말씀이 더 깊이 들어오다 보니까, “아, 내가 스스로 착하다고 여겼는데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 사람이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는 이 말씀에 비춰보니까 평소의 내 욕심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구나”하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이런 것도 욕심이고 저런 것도 욕심이고, 욕심이 잉태하여 무엇을 낳습니까? 죄를 낳는다고 했으니까 매일같이 욕심이 나에게서 마구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비춰보니까 욕심 아닌 것이 없고 다 욕심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세상에서 돈을 사랑하지 않고 무슨 직장생활을 합니까?
그러니 그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평생을 못 지키죠. 평생 돈만 주면 입이 헤, 벌어지는데 그 말씀을 평생 못 지키죠. 말씀이 들어오고 그 말씀에 비춰보니까 자기는 점점 더 부족하죠. 부족하면서 점점 더 어디에 가까이 갑니까? 저 깊은 곳을 향하여 계속 점점 더 내려가니까 거기에서 누굴 만나요? 세상에 거기서 십자가를 만나요.
“내가 과연 죄인 맞구나. 내 죄는 이만큼 크구나.” 왜? 십자가라는 것이 내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버림받아야 될 그 사건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점점 더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가 죄인 맞구나. 나는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 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 우리 발바닥에 나를 나 되게 한,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왜 나를 용서합니까, 그렇게 했지요.) 그 원인이 바로 십자가에 나왔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하나의 연기처럼 나에게 파고드니까, 내 발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오니까, 내가 다른 사람처럼 평소에 나 잘났다, 이러고 살던 내가, “내가 죄인이 맞구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하니 나는 죄인이지 뭐. 그런데 그 십자가가 어디서 올라왔지? 처음부터 있었네.”
십자가가 처음부터 날 겨냥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힘차게 힘차게 전진 또 전진, 돌격 또 돌격해서 나를 아예 밑에서 위까지 관통해서 뚫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 .”
십자가가 완전히 통과해버렸어요. 문제 나갑니다. 십자가가 통과하니까 나를 자랑해야 할까요?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까요? 문제 쉽죠? 십자가를 자랑하죠. 나를 자랑할 수 없어요. 십자가가 나를 차지했으면 십자가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십자가에서 사랑이 나온다면 그 사랑은 누구를 향한 사랑입니까? 나로 하여금 남을 위해서 살도록 만드는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남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 그런데 그 남은 내가 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정하지 않아요. 그러면 내가 정하지 않고 어떻게 정하는가? “너는 그냥 죽어만 있어. 네가 죽어 있으면 네가 사랑해야 될 남이 누구인지는 네가 죽어 있는 상태에 예수님하고 그 남하고 바로 상대해서 결정짓는다.” 고아원에 쌀을 갖다 주고 싶어서 갖다 주는데 이것은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줬어요.
주니까 고아원 원장이 나와서 “아이고, 감사합니다. 우리 성도님이 성화되어서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화평과 온유와 성령이 넘치니 쌀을 주셨군요.”
“아닌데요.”
“누가 줬습니까?”
“주께서 하셨는데요.”
“와, 성화에 겸손까지 더 하시네요. 내가 쌀가마 들고 오는 것을 봤는데 왜 거짓말을….”
"아닙니다. 저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쌀을 고아원에 줍니까? 내가 먹을 것도 없는데. 나는 그런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인 죄인인 나를 십자가의 능력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그 능력이, 2000년 전의 그 능력이 나에게 적용되니까 나의 정과 욕심이 완전히 깨져 버렸습니다. 갈라디아서 5:19 이하에 나오는 것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 깨져 버렸어요.
이 능력이 누구 능력입니까? 2000년 전의 십자가의 능력이 오니까, 나는 깨지니까 남는 것은 온유와 자비와 화평과 양선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성령의 열매지요.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쌀 뺏겨서 기분 나쁩니까? 뭐가 기분 나빠요? 나를 밟고 지나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데.
내가 내 생각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그러니까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우리는 죄만 짓고 있으면 돼요. 일은 누가 합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십니다. 이 말을 사람들이 얼마나 오해하면서 뒤에서 구시렁거리겠습니까? “봐라! 이 근호 목사는 죄만 지으라고 하지 않느냐? 예수 믿고 자-알, 가르친다. 죄만 지으라고.”
여러분, 지금 지표면에서 죄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점점 내려가면 죄 아니라고 여겼던 것도 뭐로 발각된다? 죄였구나, 라고 밝혀지고 욕심 아니라고 여겼던 것도 다 욕심으로 발각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욕심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납니까? 평생 못 벗어나요. 그러니까 죄만 짓고 있어야죠. 제 말 맞잖아요. 평생 못 벗어납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평생토록 지킵니까? 평생토록 못 지키죠. 제가 오늘 안산에 새로 오신 분이 있어서 장시간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된 줄 아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왜?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단체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 뭘 사랑합니까? 자기 가족을 사랑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옛날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고 기독교가 들어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겹살이죠. 불교 들어온 그 자리에 유교가 들어오고, 그 자리에 기독교가 들어왔어요. 불교가 들어왔을 때 효도하면 극락에 간다는 엉터리 같은 이론을 가르쳤고, 그 뒤에 유교가 들어와서 효도하는 자가 하늘의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기독교가 들어왔으니까 내 가족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용서까지 이용해야 되겠다고 나오는 겁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그 말을 사람들은 안 들으려고 해요. 그런데 그 말을 여러분은 들어야 됩니다. 왜? 지키기 때문에? 아닙니다.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봅시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들어야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저 밑바닥에 있는 십자가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말을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때려 죽여도 내 가족을 포기 못한다는 것을 본인이 철저하게 알아야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알아야 돼요. 용서받았다고 도망치고 내빼지 마시고요, 교회 와서 자꾸 말씀을 십자가로 연결시켜줘야 돼요. 연결시켜주게 되면 “아하, 내가 잘났구나.” 이게 아니라 “평생토록 나는 나만을 위해서 사는구나. 내 안에 전부 나 밖에 없구나. 내안에 자크를 열고 쫙 열어보면 예수도 없고 남도 없고 나밖에 없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 됩니다.
느낄 때, “도대체 이런 나를 왜 용서합니까?” 용서는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다? 외부에서 주신 사랑으로 왔다. 그러면 그 사랑의 주체자가 누구지요? 사랑은 예수님이 하고 예수님 앞에 남이 누구입니까? ‘나’가 바로 예수님의 남, 이웃이 됩니다. 우리는 강도만난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누가 이루십니까? 예수님만이 이것을 평생토록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내시는 겁니다.
도망치지 말라는 말이죠. “이제 복음 듣고 구원받았는데 다시 교회 올 필요가 뭐가 있겠나?” 그러지 마세요.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 이용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날마다 나를 밟아 달라고 해야지요. 내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 맞는데, 내가 뭐가 문제며 왜 나꾸 내게 욕심이 생기는지 말씀을 통해서 욕심이 생기는 족족 지적을 해 달라고 그렇게 요청하면서 의존교회 나와야 됩니다. 다른 교회 나가던 분은 그 교회 가시고.
그래야 밥 먹고 사는 것도 고마운 줄 압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대신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 죽도록 일했는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징벌을 주십니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욥기를 강의 할 때 할 겁니다.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중에 내 남편에게 교통사고를 나게 해서 나를 과부되게 하십니까?”
이런 소리가 막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지표면에서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남편 있는 사람을 보고 “어? 남편이 있네. 나는 남편이 없구나. 나는 왜 남편이 없지? 신이시여, 왜 나에게 왜 이런 저주를 … .” 어떤 사람은 소경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눈이 멀쩡해요. 그러면 자기혼자 소경인거죠. “왜 나만 눈이 침침한 소경이 되었습니까? 왜 하필이면 나를 … .”
그 사람은 뚫어야 돼요. 누굴 만나야 됩니까? 처음부터 우리 인간은 십자가의 사랑과 십자가의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증거물로 삼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었던 겁니다. 십자가의 저주의 능력과 용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다”라고 합니다.
아주 냉철합니다. 우리의 호소나 불평을 안 받지요?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 네가 왜 나한테 대드느냐? 토기장이가 어떤 것은 깨어버릴 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것은 그냥 그릇으로 만드는데 건방지게 그릇이 토기가 나에게 대드는가?” 저도 가끔은 설거지를 합니다만(해봐야 맨 날 꾸중을 듣지요. 잘 못한다고요. 밥풀이 묻어 있다고요. 하지만 가끔은 하는데), 설거지를 할 때 그릇들이 말을 안 하고 곱게 설거지가 됩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는데 갑자기 설거지 그릇이 갑자기 말을 하면서
“주인님, 저는 왜 세 번 밖에 안 씻어 줍니까?”
“이게 어디서? 내가 하는데 네가 어디서!”라고 이렇게 나무랄 겁니다.
그릇들이 저희들끼리 삐져요. ‘왜 라면 끓일 때 저쪽그릇만 사용하고 내 냄비는 사용하지 않느냐’고 삐지는 거예요. 사놓고서 한 번도 사용도 안한다고 “나 삐졌어!” 이런다고요. “삐져라! 에라!” 갖다 버려버리면 그만이죠. 주제파악을 못해요.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그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교회 수련회 주제를 <하나님의 창조>로 정했습니다. 주제파악을 하라고요. 하나님의 창조를 모르니까 자꾸 원망하는 거예요. “하필이면 나를(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저희들끼리 쳐다보면서 밑을 파고들 생각은 안하고) … 저 사람은 이번에 주식을 했는데 1300원에 산 주식이 오늘 시세가 1960원이니 대체 얼마가 오른 거야? 저 사람은 펀드해서 엄청 벌었다는데 나는 그런 것이 다 죄악된 것이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서 은행에 집어 넣어 놓았더니 지금 물가가 은행이자보다 더 높아져서 난 망했다, 망했다, 망했어!”
말씀을 통해서 뚫고 들어와서 십자가와 만나서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고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그 고백을 토해낼 때,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내 행함이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용서가 이만큼 위대함”을 드러낼 때 그것이 바로 자비의 그릇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천당 갈 그릇입니다. 그 사람은 영광 받습니다. 그것 말고 자기 행함을 주장하면 그것은 진노의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9:19-24)
더 쉽게 해 봅시다.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에게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해서, 내가 여기 따로 있어서 내가 일단 나를 사랑하고, 그 다음에 나를 사랑하는 그만큼 남을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하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게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는 사랑이 우선이지 내가 우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옥(지옥 갈 인간)도 만들고 천국(천국 갈 인간)도 만듭니다. 말씀이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나는 용서받은 사람이 되고, 사랑이 오지 않으면 저주받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랑이 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옥 갈사람, 저주 받을 사람이 등장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라는 것은 “너도 그 사랑을 받았잖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만 받을 것이 아니고 네 이웃도 받아야지”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은 “사랑하라”는 말씀의 주체가 바로 말씀 전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 됩니다. 이 말씀 전체가 “너희들은 이미 사랑 안에(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이웃이나 너나 똑같이 받게 되어 있다”는 이것을 인정하라는 말이죠. 요한복음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똑같이 같은 사랑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제가 주일 오후에 아가서를 설교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남편 있고 아내 있고 그 둘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한쪽은 남편을 만들어 냈고, 사랑이 한쪽은 아내를 만들어 냈어요.
그러면 그 남편과 아내가 만날 때, 내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를 짝으로 만들어 준 그 사랑을 같이 고백할 때, 서로가 누구를 주장하지 않겠습니까? 서로가 내 사랑이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겠지요? 부부사이에서 문제가 사라지려면 내 사랑 가지고 너를 사랑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아야 부부의 문제가 없어요.
“내 사랑 가지고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의 남편 되게 한 그 사랑이 그대로 너에게 지금 전달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말이죠. 부부의 문제가 다 어디에 있습니까? 뭐가 톡 튀어 나올 때 부부의 문제가 있습니까? ‘나’가 튀어나올 때 부부의 문제가 있습니다.
항상 그래요. 그래서 안산에서 강의할 때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에 관한 것은 다 사소한 것이고 사랑은 다 귀한 것입니다. 나에 관한 것은 무조건 사소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소한 것에서 귀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 나를 죽여 버립니다. 나를 없어지게 만들어요. 실제로 이것은 가정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인데 예를 듭시다. 아내하고 남편하고 싸웁니다.
“축구를 보자. 지금 아시안 게임인데 축구를 보자.”
“아냐. 연속극을 봐야 돼. 최 진실이 우예 되는지 봐야 되걸랑.”
“보자. 사우디하고 하는데 축구보자.”
“아이다! 지금 mbc드라마 한다. 그것 봐야 된다.”
“니, 참 고집 시다. 한 번도 양보하는 적이 없네.”
“왜 양보하는 적이 없어? 당신은 내 한테 양보했나?”
둘 다 날카롭게 ‘나’가 등장해요. 그런데 보세요. 연속극 끝나면 축구도 다 끝나버리고 에이, 못 봤다, 하고 있는데 아내가 맛있는 김치전을 구워서 오게 되면 이것은 예상 못한 거지요. “하! 이렇게 맛있는 것이….” 그렇다면 아까는 ‘네가 나에게 잘못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으면 절대 용서 안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아내가 무심코 자기 먹으려고 했고 그것을 그냥 꺼내놓은 것뿐인데, 그것은 예상 밖의 은혜가 ‘나’위주로, ‘나’중심으로 나가려고 하던 것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박살내는 방법이 그 방법입니다. 예상 밖의 은총과 감사거리가 생겨서 내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아주 좁은 소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인생을 살 때 30킬로미터 반경 안에서 살고 시간은 기껏해야 80년 삽니다. 그 안에서 얻는 지식과 경험가지고 뭘 알겠습니까?
이 지표면, 지구상에서 30킬로미터 반경 안에서, 80년을 살아본들 어떻게 그것으로 전체를 다 알겠습니까? 모르지요. 그래놓고는 이것을 안다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거, 이것은 밑에서 올라오는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그것은 다 부끄럽기 짝이 없고 미안스럽게 짝이 없죠. 그 때 ‘내가 평소에 이렇게 김치전 잘 만드는 아내가 있는 줄, 그 사랑을 왜 나는 놓쳐 버리고 기껏 축구 한게임 못 봤다고 닦달 냈던가.’ 내 자신이 그렇게 부끄럽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니까, 실화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진짜 있는 이야기처럼 해서 미안합니다만 다 지어낸 이야기니까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서 나보다 진급이 빨라서 나는 계장인데 그 사람은 과장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에 그만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새벽기도회에 가서 “왜 나보다 후배가 진급을 빨리 하도록 내버려 둡니까”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과장되더니 암에 걸려서 죽어 버렸네요.
“주여, 이 건강이 그냥 건강이 아니고 주의 은혜군요.” 예상 못한 일들이 내가 기대하지 않는 감사거리가 퍽퍽 터지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더욱더 십자가에 가까이 가게 하는 겁니다. “내가 저런 여자하고 살아? 에라, 이혼하고 치운다”라고 했던 그 사람에게 예상 밖의 큰 은총을 줄때 고맙지요.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이혼한다고 하다가 막상 이혼하고 사는 친구들을 보니까 남편이 벌어다주던 만큼의 수입이 손에 안 잡힙니다. 식당에서 죽자하고 일 해봐야 기껏 70만원, 80만원 받습니다. 애들이 공부 못한다고 너무 닦달내지 마세요. 애 아파보세요. “공부고 뭐고 그저 골목에서 공차고 뛰어 노는 것만 해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물론 5분도 못가서 건강도 하고 공부도 잘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애가 아파서 밤새도록 열이 올라서 얼음찜질을 해도 열이 안 내릴 때에는 “얘야, 제발 살아만 다오. 그동안 공부 못했다고 나무란 것이 미안하다. 다시는 그런 잔소리를 하지 않으마.” 그러다가 말끔히 나으면 싹 잊어버립니다. 성경전체는 우리 마음을 낮추고 낮추어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십자가 사랑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을 모르고, 마치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기다가 맨 날 하나님만 원망하다가 볼일 다 보는 거예요.
그 밑바닥(십자가)을 볼 줄 모르고 남들 두리번두리번 하는 대로 함께 두리번두리번 하면서 사는 거예요. 세상 전체가 날 위해서,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만족하는 것처럼 사는 그것이 바로 철딱서니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서입니다.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서는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거예요. 성령 받아서 갈라디아서를 적었다면 우리도 정말 성령 받았다면 여기에 동의해야 됩니다.
“맞습니다. 딱 내 이야기군요. 정말 나보고 지적하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서로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서로 사랑하라”에서 뭐가 남아야 된다고 했습니까? ‘사랑’만 남아야 됩니다. ‘서로’는 없어져야 됩니다. ‘사랑’이 ‘서로’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것이 기적적인 구원받은 사람의 집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시기해서 가만히 무엇을 집어넣는가? 법(율법)을 집어넣어요. 율법을 집어넣으면 여기서 갑자기 경쟁이 생깁니다. ‘나’가 없던 집단에 갑자기 ‘나’가 발생됩니다.
“너 헌금했나? 너 기도했나? 너 봉사했나? 난 했는데!” ‘너, 나’가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사랑하라”에서 ‘사랑’이 우선되다가, “사랑도 네가 한 사랑보다 내가 한 사랑이 더 세다, 네가 목사님 위하는 사랑보다 내가 목사님 위하는 사랑이 더 크다.” 이런 식으로 ‘너, 나’가 발생되지요. 목사도 교인들을 보고서 하는 말이 “여러분이 저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를 이렇게 했습니다. 당신들이 저한테 해준 것 보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심방한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너, 나’가 생겨버렸어요.
그 사랑, “나는 미안합니다. 부족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욕심만 챙기는 인간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가 평생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욕심입니다.
야고보서 1:14
“오직 각 사람은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것은 너무 정확해요. 그런 내가 구원받았다면 그것은 이유 없이 사랑하는 그 사랑, 더 이상 나에게 기대를 걸지 말라고, “너는 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남은 내가 정하지를 못해요. 왜? 내가 안정해도 되니까요. 내가 골라서 정해버리면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또 내 것으로 환수하기 때문에 그것은 안돼요. 주님의 사랑이 건너가도록 해야지 내 사랑이 건너가면 안돼요. 그러면 부부싸움 해서 안돼요.
“내가 결혼해서 너한테 이만큼 잘해 줬는데 너는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노? 그게 다가?” 이러면 곤란합니다. “나같이 부족한 것에게 이렇게 맛있는 김치 찌게를 끓여주다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듣고 아내가 감격을 할 것 같습니까? 처음에는 감격하지만 두 번째는 감격을 하지 않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고 하지요.
안산에 결혼 한지 한 3년쯤 된 가정인데, 그 방에 결혼할 때 찍은 큼지막한 사진이 걸려 있는 거예요. 제가 그랬죠. 저런 사진 차라리 안 찍는 게 낫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보면 저것이 허구라는 것이 점점 느껴지는 거예요. 지금의 현실과 처음의 망상과 점점 차이지는 것이 얼마나 허탈할 뿐입니까? 차라리 그런 것이 안보이면 확실하게 현실이 보일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당장 치우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몇 년 안가서 치우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처럼 점점 더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십자가의 깊이와 사랑을 더 알아야 되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 덩어리로 살아 있고 용서로 살아 있고 기쁨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를 받았으면 어떤 객관적인 진리에 의해서 살았는지를,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용서 받았다. 구원 챙겼다!” 하는데서 그치지 마시고 어떤 연유에 의해서 지금도 주께서는 나에게 말씀가지고 지적해서 나로 하여금 내가 이미 용서받았고, 이미 구원받았고, 이미 생명을 얻었음을 어떻게 알려주느냐, 그것을 더 깊이 아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지나간 사건, 한물간 사건, 잊어도 되는 사건, 우리와 상관없는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고 십자가로 인하여 정과 욕심을 못 박아 우리가 이미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사오니, 바로 이 십자가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남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자기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있는 그야말로 자유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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