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25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8:56

갈라디아서 제 25강 (이 근호목사, 2007년 09월 14일(a), 서울의존교회)


오늘은 갈라디아서 5:13부터 보겠습니다. 그 전에 갈 5:4을 먼저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율법 안에서”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율법 안”이니까 이 전체가 율법이라면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율법 안”이라고 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로다.” 여기는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그림을 그렸잖아요.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의 영역이죠. 그리스도의 영역이 따로 있고, 율법이라는 영역, 또는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역이 따로 있고 율법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이 생각은 인간들이 의논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공간을 두 개로 나눈 거예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지 않더라도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따로 만들어진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수긍을 좀 해 주셔야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역과 율법영역이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북한에도 미국에도 그런 헌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안 만든 것은 없다고 여기는 못된 버릇이 있는데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수용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구태여 어떤 체제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 쪽에서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체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수용을 해 줘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보면서 제일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머리 맡 대고 연구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사람에게 어떤 의견을 개진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따로 영역을 만들어 버렸어요.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안 만들고 내가 생각하지도 않은 영역을 내가 왜 구태여 동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황소고집과 관련되어 있지요? 사람은 내가 한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지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마다 다 자기 자존심이 있는데, “싫어요. 내가 안 만들었는데 왜 일방적으로 강요하십니까?”라고 황소고집을 부릴 수가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사도바울은, “사람에게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고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두개의 영역을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영역을 만든 것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그냥 다가섰고 덮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우리는 섭하지. 우리하고 의논도 하고 영역을 만들든지 해야지 일방적으로 만들어서 마구 들이대시는 그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일을 그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하시면 우리 인간으로서는 버거워서 수용하기가 참 난처합니다. 앞으로 이야기 하실 때는 사전에 우리와 의논하고 ‘너희들은 이것이 이해가 되느냐? 이해가 될것 같으면 너희들에게 안겨줄게’ 이런 쪽으로 나와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제가 지금 다섯 번도 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영역과 그리스도영역은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들이닥친 영역입니다. 무조건 수용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율법 안, 그리스도 안, 이렇게 틀을 잡아 놓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율법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로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도발적으로 나와 버린 거예요. 지금 우리 사람들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뭐냐 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라고 교회 나왔어요. 교회 나온 것이 일종의 노동이 아닙니까? 그 노동의 대가를 어느 정도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바쁜데 만사 제쳐 두고 교회에 쪼르르, 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했다, 그러면 한 주 동안은 복의 부스러기라도 뭔가 몇 조각 챙겨야 그 다음 주일날 또 보상을 얻는 재미로 다음 주일에 또 올 것이 아니냐는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전부 다 우선 나에게 이득이 되고 나 좋아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신이시여, 우리는 어떤 영역에 있습니까?” 그것이 궁금해서 교회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떤 영역에 있든지 골치 아픈 그런 것은 관심이 없고, 교회 안 나오다가 교회 나오니까 “사업 잘되게 해주시고 애 공부 잘하고 애 아픈 몸을 건강하게 해 주시면 다음에 또 나오겠습니다”라는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교회 나오는 재미가 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봉사한 만큼 주머니에 두둑하게 챙겨져야 ‘아하,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 맞구나. 내가 이런 기적을 받다니, 내가 그동안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줄을 몰랐네. 이렇게 열성을 내니까 복을 주는구나. 목사님의 말이 다 맞네. 앞으로 목사라고 부르지 말고 목사님이라고 불러야지’하면서 그 다음에 또 교회 나올 이유를 찾을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일방적인 생각이고, 만약에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 같으면 교인들이 자기 이득을 위해서 교회 오는 것을 뻔히 알아요. 뻔히 알면서도 갈라디아서 펴놓고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두 가지의 영역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사전에 어떤 힌트라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역이 궁금해서 온 것이 아닌데요. 왜 목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십니까? 우리가 원치 않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겁니까?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죠. 우리가 별로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왜 하십니까?”라고 나올 거예요.

그럴 때 목사님이 하시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촐랑대고 까불든지 간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기입장밖에 모릅니다. 왜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들은 토기니까. “당신 생각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목적을 노리고 교회에 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하나님이 발걸음을 인도해서 교회에 오게 했다”는 겁니다.

벌써 여기서부터 차이가 나지요? 인간은 ‘내가 내 의지로 왔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교회로 완전히 몰아 세워버렸다. 들어가! 들어가!”하고 몰아 세웠다는 겁니다. 내가 왔으면 내 이익을 챙기는데, 오기 싫은 교회를 강제로 왔다면 그 강제성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어떤 의도, 어떤 계획으로 왔던 간에 그 계획과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뭡니까?”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을 너희에게 알려줄게”
“그러면 그 비밀이 뭡니까?”

“이 세상은 두 가지 영역이 있다.”

이세상은 두 가지 영역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교회에 온 노림수, 나는 이 교회에 와서 복 받아야지, 하는 그 노림수와 계획은 완전히 묵사발 되는 겁니다. 그것은 부도수표같이 소용없는 것이 찢어 버려야 됩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에게 걸려든 겁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걸려들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구원받기로 걸려들어야 됩니다.

걸려든 사람은 내가 걸려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왜 걸려든 사람이 걸려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모든 자기 인생을 통해서 추호도 하나님이 내 뜻을 안 이루어주는 쪽으로 계속 인도하시더라는 겁니다. ‘내 뜻을 안 이루어주는 쪽으로 인도하시더라.’ 여기에 강조점(엑센트)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 뜻을 안 이루어주는 쪽으로” 이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그 다음에 “인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동행하심이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한 것처럼. 내 뜻이 안 되는 쪽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쪽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이 성도의 모습이라면, 여기서 두 가지를 알아야 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한다면 ‘내 뜻’도 알아야 되고, ‘아버지의 뜻’도 알아야 되고 둘 다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성도는 둘 다를 알아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이제 예수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밖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내가 미처 나도 모르는 은밀한 욕망의 뜻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엄마가 애들한테 “얘야! 너는 숙제를 잘 해서 공부를 잘 하는 어린이가 되기를 원한다.” 애가 있다가 “나도 그러기를 원해요. 엄마 뜻하고 내 뜻하고 같네요.” 이럽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엄마의 비위를 맞추면 거기서 얻어지는 보상이 크더라는 겁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사준다든지, 내가 가고 싶은 곳에(놀이공원 같은) 보내준다든지, 그런 것이 애 본인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면 은밀하게 들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냥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뜻 이거 맞지?”
“맞습니다.” “내가 기어이 안 되게 해줄게. 고맙지?”
“별로 안 고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너의 뜻은 절대로 안 이루어지는 쪽으로 인도해줄게”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나갑니다.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우리가 내 뜻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갈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내 뜻을 꺾고 주의 뜻을 맞춘다는 이런 것은 우리가 성도가 아니라 성도 생활을 백년을 해도 우리에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예 포기하세요. 없습니다.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행복해도 괜찮아요.

내 뜻대로 내 뜻을 누른다든지 그럴 자질도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고 그것이 오늘 강의의 주제가 되는 자유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자유,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내가 내게 기대를 거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자유입니다. 내가 나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욕망대로 나오지만 그 기대대로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겁니다.

말을 좀 쉽게 하면 “율법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고 할 때에,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내 뜻은 율법이고 뭐고 그런데 관심 없고 교회 나와서 복 받고 돈 잘 버는 것 밖에는 없었는데, 하나님의 뜻이 임해보니까 두 가지 영역이 있더라는 겁니다. 한쪽은 율법의 영역이 있고 한쪽은 그리스도의 영역이 있는데, 율법의 영역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는 것도 주의 뜻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율법 안에 있는 내가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 말입니다. 제가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없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는 그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율법에서 안 벗어나려고 해요. 왜?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우리의 뜻이니까.

거기에서 우리가 안 벗어나도 된다는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미 자유가 우리 속에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 됩니다. 지금 자유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에서 우리가 맥을 못 춰요. 우리가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상 외로 자유로워요.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되어 있지요? 자유라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나에게 어떤 힘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라 하는 것은 자유의 혜택을 마음껏 입고 있는 거예요.

“술을 끊으려고 하는데 술이 안 끊어집니다.
“본인이 자기 힘으로 술 안 끊어진다는 것을 아셨지요?”
“예!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술이 안 끊어지는 그런 세계에서, 더 이상 내가 내 힘으로 술 끊을 필요가 없는 그런 영역에 당신이 속해 있습니다.”

두 가지 영역이니까, 우리는 이 영역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가려고 애를 쓰는데, 자기 힘으로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율법의 영역에서 못 벗어날 때는 그리스도의 영역이 이쪽을 덮쳐 버리지요. 덮쳐버리면 이 그리스도의 영역을 가지고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가 우리 위에 덮쳐 버립니다. 그러면 본인은 비록 율법 아래 있지만 자유의 영역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을 이기지 못하면 율법은 어떻게 되는가? 율법의 관계는 따로 처리반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됩니다. 율법이 있고 그리스도가 있다. 그것은 둘다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와 관계없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덮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될 그런 문제가 아니라서 자유로워요. 어느 정도로 자유로운가? 과분할 정도로 자유롭습니다. 주님께서 과도하게 베푸신다고 느낄 정도로 과분하게 사랑을 받아요. 그것을 사랑의 강권이라 합니다.

제가 지난 오후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아가서에 보면 너무 자기 신부에 대해서 사랑에 관해 너무 과도한 치장의 표현을 해 놓았어요. 모든 것이 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예쁘다는 거예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한 순간도 ‘주님께서 나에게 너무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너무 과분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고 느끼시거든 그 사람은 이미 어떤 것으로부터도 이미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과분한, 남아도는 사랑이 넉넉하고 남아도는 용서가 넉넉할 때는 우리가 구태여 세상일로 인해서 얽매일 필요가 없잖아요. ‘아, 나는 술을 못 끊어서 큰일이다’라는 그런 고민도 과분한 사랑으로 인하여 “누가 너 보고 술 끊으래?” 라는 식으로 다가올 때는 “주님께서 너무 과분하게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할 때 “원래 사랑이란 과도하게 보이는 거야” 라고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자유를 주께서 준비하셨다. 우리가 상상하고 또 상상하고 또 상상해도 그 상상으로 다 미치지 못할 정도로 그 보다 더 큰 자유함을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신 거예요. 그걸 평소에 왜 우리가 못 느끼느냐 하면, 우리는 이 율법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맨 날, 내가 어느 정도까지 선한가, 어느 정도까지 악한가, 덜 선하고 덜 악하고, 이런 것만 신경 쓰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여름에 홑이불 덮다가 두꺼운 겨울이불 덮어 보세요. 따뜻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 솜이불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지요. 마찬가지로 그 솜이불보다 더 두꺼운 것이 뭐냐, 자유라는 겁니다. 자유! 자유의 부르심을 받고 자유가 오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걱정했던 모든 것 이상으로 과분한 사랑과 용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또는 의도를 가지고 교회를 찾는 그런 생각보다도, 평소에 우리가 세상 살면서 내 위주로 살던 그러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늘도 복음 앞으로 몰아 넣어버렸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것은 율법을 덮어씌우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으니까. 여기 인간이 있다면 율법이라는 홑이불, 얇은 이불을 덮어씌우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갑자기 따뜻해져요. 자유라는 이불을 덮어씌우니까 이러한 율법을 지키냐, 마냐 하는 이 소소한 모든 것이 자유 앞에 무의미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갈등, 투쟁이란 게 “거 뭐, 애썼다. 얘! 평생 말씀대로 산다고 수고는 했다마는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인데 네 자존심과 경쟁했지. 그냥 교회 가면 미안스러우니까 말씀 몇 가지 지켜본다고 애썼는데 처음부터 나는 기대를 안했다. 그것은 해도 소용없는 거야.” 해도 소용없는 짓을 우리가 계속 하고 있죠.

그런데 해도 소용없는 짓을 해도 그게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목사님,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제가 심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무 심합니다. 우리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너무 큰 은혜를 베풀어요. “목사님, 그러면 방종할 게 아닙니까?” 뭘 잊지 말라고 했습니까? 인도. 두 가지 영역가운데 하나는 무슨 영역? 율법의 영역, 율법의 영역은 우리가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냥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주신 것.

그러면 자유의 영역은 그냥 만드는 겁니까? 그냥 주시는 겁니까? 그냥 주신 것을 여러분이 믿을 것 같으면 자유의 영역을 믿어야지요. 우리가 자유를 만든 게 아니잖아요. “아, 율법대로 안 되는데 율법을 안 지켜도 구원받는 방법이 없을까?” 이렇게 까불대면서 하나님과 타협해서 “율법으로 말고 그냥 용서받는 길을 주세요”라는 식으로 의논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올 때 우리는 복 받고, 돈 더 벌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런데 난데없이 율법의 능력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덮쳐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렇게 무서운지를 몰랐어요. 성경말씀 전체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사람이 배고플 경우에는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도 족할 줄을 압니다.

일단 배부르고 나면 다른 것을 찾기 마련입니다. 어느 인간이 디모데전서 6장을 지킵니까?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어느 인간이 이것을 24시간 매일 같이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것을 누가 지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이것을 누가 지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화를 버럭 내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숙제로 내서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최선을 다 해 보기는 하겠습니다만 24시간 돈을 사랑하지 않는 그것은 정말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너는 어찌 영역이 율법영역만 있는 줄로 알고 그렇게 화를 내느냐? 다른 영역이 있는 것을 한번 봐라. 뭐가 보이느냐?”
“자유 영역이 있네요.”
“그것은 누가 만들었는데?”
“주님이 만들었네요!”
“왜 만들었을까?”
“우리에게 덮치려고 만들었습니다.”
“그럼, 덮쳤음을 네가 믿나?”
“믿습니다.”
“그러면 너는 자유자다.”

왜 처음부터 자유를 주지 않느냐 하면, 율법에 매이지 아니하면 자유가 의미가 없어요. 율법을 주지 아니하면 자기가 자기의로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양 착각을 해요. “역시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더니 그만한 보상을 해 주시는구먼. 그렇지 하나님께서 자기형상대로 만든 인간을 버릴 리가 있겠어? (이렇게 까불어 대면서) 거기다가 나는 십자가까지 믿어주니까 얼마나 대견스러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율법으로 짓이겨 놔야, “나는 내 힘으로는 못 벗어날 정도로 ‘나는 죄인중의 괴수 맞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세상에 그것마저 구원으로 쳐주는 과도한 구원의 영역을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서 우리에게 줬습니다. 두 가지 영역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율법영역, 또 하는 무슨 영역? 자유의 영역. 이상하게 사람들은 율법영역 가지고 시비를 많이 걸어요.

최근에 나온 책, 「성도의 삶에 대한 질문과 답변 」(이근호저, 대장간, 2007. 8)을 보고 어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아직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질문은 한국교회에서 계속 되풀이해서 나올 겁니다.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 책의 질문을 보니까 답변을 어떻게 할지 가슴이 조마조마 하다”는 겁니다.

왜 질문에 대해서 가슴이 조마조마 하는가 하면, 그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들이 평소에 내가 묻고 싶은 것들만 골라서 질문해 주니까, ‘십자가도 맞고 이 말도 맞고 둘 다 맞잖아’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마조마 한 거예요.

사람들은 율법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영역에 내가 속하면, 전에는 없었지만 이제는 마치 율법의 영역에 내가 없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잘 들어 보세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은 율법의 영역에 있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율법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이제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 들어 있으니까 율법의 영역에는 더 이상 내가 없다는 거예요. 율법의 영역안에 내가 없다고 해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주여,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들을 제가 지키겠나이다”라고 또 법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버릇이 그대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영역을 몰라서 그래요. 자유 안에서는 지키는 것이 없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나,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나 둘 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입니다(갈 2:17, 5:4).

둘 다 자유라는 솜이불을 덮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율법 안’이라는 홑이불을 덮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만 자유를 위해서 부르심을 입은 솜이불이 덮씌워집니다. 성도에게만. 성도가 아닌 사람은 홑이불(율법)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도 아닌 교회의 특징은 뭐냐? 법을 줍니다. 법을 줘서 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법을 안 지키면 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들 전체가 하나의 법이 됩니다. 법으로 지키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유대인들이 했던 그 행위의 되풀이입니다. 지금 아직까지 자유의 영역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강조하는 것이 뭐냐, 내 힘으로 내가 법 지키고자 하는 그 버릇이 평생토록 우리에게서 지워진다, 안 지워진다?

평생토록 법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절대 안 떨어져 나갑니다. ‘전에는 세달 만에 한번 교회를 나갔는데 이제는 두 달 만에 나가니까 나도 참 신앙성숙 많이 되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뭔가를 지키겠다는 속성을 우리는 떼쳐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그 버릇을 떼쳐버리지 않아도 구원이 되는 그 상태를 자유라고 합니다.

“내가 법에서 벗어나야지”라는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영역(공간)이 들이 닥쳐서 그 자체로서 이미 구원된 상태, 그것이 자유의 상태입니다. 내가 더 이상 나에게 손질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제 남은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자유라는 그런 대단한, 과도하고 과분한, 분에 넘치는 혜택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습니까?”라는 그 질문만 남아 있지요. 자신이 스스로 이제는 법에서 벗어났다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80이든, 90이든 인간은 자기 의를 포기를 안 합니다.

인간은 자기 의를 만들어 낼 것이고 만들어 낸 자기 의는 누적이 될 것이고, 그 누적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복을 따내려는 심보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절대로 없어지지 않아요. 따라서 “옛날에는 교회 와서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 줄을 알았는데 의존교회 오니까 헌금 안해도 복 받는 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헌금 안해야지”라고 한다면 그 헌금 안해야지, 그것이 뭐가 됩니까? 새로운 법을 만들었지요?

그것처럼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어떤 법을 지켜내서 그 지켜낸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인정받고 싶은 그 심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원되었다는 그 상태가 구원의 상태이니까 그 상태를 여러분은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참새가 창공을 날 때 참새가 하늘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진 그 하늘을 그냥 맘껏 날아다닙니다. 날아다니면서 ‘내가 날개 짓을 너무 하면 하늘이 좀 좁아질 것인데…’라고 걱정을 하면 그 참새는 못된 참새지요. 어느 정도로 하늘이 넓으냐 하면, 참새가 똥을 싸도 그것을 다 수용할 정도로 하늘은 넓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까불면서 “나는 두 개 지켰다, 세 개 지켰다”고 까불어도 그것마저 과분한 사랑으로 하늘같은 넓은 사랑으로 그런 되도 않는 똥마저 다 치워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것이 하늘같이 넓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자유이고 그 자유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하나님을 부르려고 했는데 막상 교회 와서 보니까 하나님이 날 처음부터 불러냈어요.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모든 것은 율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유의 영역에서 다 행사를 하는 겁니다. 세상에 어느 신랑신부가 결혼식 할 때 자기가 부케 만들고 그럽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신부입장 할 때 자기가 피아노앞에 앉아서 반주도 하고 그 다음에 입장도 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미 다 마련된 곳에 신랑 신부로 입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너무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과분하니까요. 자꾸 예수님 하시는 것을 뭔가 흉내 낸다고 생각하니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네’라고 이따위 생각을 하는 거예요. 테레사 수녀처럼. 평생토록 구제해도 주님의 사랑 근처도 안 갔어요. 그것은 하나의 새똥 같은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구제 안해도 구원받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 영역이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갈라디아서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여기 보면 할례를 행하세요, 라고 율법을 증거 했더라면 내가 전한 십자가도 여러분에게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뜻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게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인지를 여러분이 좀 알아야 됩니다. 율법, 할례, 안식일 같은 것을 다 지키자고 설교하고 가르쳤다면, 십자가를 믿으라는 것이 그렇게 거부반응이 안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무엇과는 어울리지 않고 섞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을 지키세요”라는 동네는 “십자가를 믿으세요”라는 동네와 절대 함께 섞일 성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증거 하려면 반드시 “여러분이 법 지켜서는 소용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날 때부터 나이 90이 넘도록 까지 법을 지키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끝까지 우리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소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껄끄러운 소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법을 지키세요”라는 투로 “십자가를 믿으세요!”라고 한다면 그들은 쉽게 거부반응 없이 십자가를 믿었을 겁니다. 왜? 십자가를 믿는 것도 뭐가 되기에? 법을 지키는 그런 버릇 중에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까짓 거 다른 것도 지키는데 십자가는 못 믿을까?” 이렇게 믿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고 십자가가 아니고 가짜라는 말입니다. 진짜 십자가라면 인간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법 지키고 싶어서 환장해요. 심지어 도둑놈도 강도도 자기가 의리 있다고 여기는 의리 지킨 법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한 인간들에게 “그것이 소용없습니다” 하고 나서는 그것이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모든 인류에게 거치는 것, 거북스러운 것, 듣기 싫은 소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를 믿었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은 것이 여러분들이 재주껏 믿은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유의 영역에서 능력이 흘러 나와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럼 목사님, 자유의 영역에서 왜 능력이 흘러나오는데요?” 그것은 자유의 영역을 만들 때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자기 숙제, 자기 과제가 있어요.

그 과제중의 하나가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개입. 안산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어떤 곳을 보든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즉 “주여, 우리에게 뭘 또 퍼부으려고 하십니까”라는 쪽으로 보게 되면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아하, 이런 은혜를 퍼부으려고 하는구나”라고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자기 개입으로 보면서 “주여, 오늘 어느 말씀을 어떻게 지킬까요?”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개입을 느끼지 못한 채 엉터리 해석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자기한테 부담이 되는거죠. 시편도 그렇고 성경 어떤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공짜로 준다. 자, 오늘도 어떤 말씀이 공짜의 은혜를 주실까’ 이런 마음으로 보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여, 내가 이것을 또 꼭 지켜야 됩니까? 열심히 지키겠습니다”라는 쪽으로 보게 되면, 볼 때 마다 본인도 압니다. 온전치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그래서 두 번 다시 성경이 꼴도 보기 싫게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니엘서에 나오는 벨사살왕이 있습니다. 그가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승전의 전리품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것들로 건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통도 없는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지금 검은 천을 이렇게 뒤집어쓰고 이렇게 손만 등장하면 이것은 귀신이 나타난 거죠.

그 손가락이 벽에다 글씨를 씁니다. “벨사살 왕, 너는 끝났다. 망했다”고 썼을 때, 만약에 벨사살이 성도라고 했다면 ‘아, 내가 망하는 것도 주의 뜻이 맞구나’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벽에 쓴 것은 무슨 말씀? 성경말씀! 그 성경말씀대로 나에게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이면 내 쪽에서 할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맘이 편하잖아요.

기분 좋지 않습니까? ‘아, 앞으로 나에게 저런 일이 들이 닥치겠구나. 주여, 나는 토기이니까 토기장이 맘대로 하옵소서.’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과제가 아니고 자기 과제로서 다가오니까 여기서 난리가 났어요. “못 지킵니다. 우리보고 어떻게 지키라고요. 너무 심합니다. 좀 약한 것을 주세요. 너무 셉니다.” 호들갑을 떨어요.

호들갑을 떤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이 아니고 ‘약한 것을 주면 우리도 지킬 수가 있는데 라는…’ 율법의 영역에서 나오는 버릇입니다. 아주 더러운 버릇이 속에 있다가 갑자기 말씀이 들이 닥치니까 발동을 하면서 난리가 났어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헌금을 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라.”

그러면 헌금을 할 때 기쁜 마음, 자발적으로 하라는 그것이 누구의 과제입니까? 주님의 과제지요? 그러면 언젠가는 그런 기쁜 마음을 주시고 자발적인 마음을 주시겠지요? 왜? 주님은 자기 말씀을 실패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의 개입 아닙니까? ‘아, 이 말씀을 앞장세워서 하나님께서 개입하는구나. 나중에 언젠가 자발적으로 할 때는 주님이 하셨다고 그렇게 증거 해야지.’

이렇게 마음가짐을 가지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을 가지고, “기분이 더러운데 어떻게 기쁜 마음이 됩니까? 돈이 아까운데 무슨 수로 헌금을 해요. 자발적으로 하라는데 자발적으로 하라는 말 듣기도 싫어요. 아예 퍼센트로 수입의 얼마라고 딱 정해주세요. 자발적으로 하라고 하면 우리가 부담됩니다.” 누가 뭐랬어요? 왜 난리입니까?

자기들끼리 오해를 해가지고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 자기의 능력을 집어넣어서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드니까 “너무 심합니다. 너무 과중한 율법을 주셨군요. 좀 더 믿음이 좋아지면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할게요. 지금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무 탓하지 마세요.” 이래놓고는 삐져서 교회도 안 나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는 장면인데요. 거기에 롯의 가정이 나옵니다. 롯의 가족이 네 식구입니다. 롯이 있고, 롯의 처가 있고, 두 딸이 있습니다. 사위들은 천사의 말을 안 따르겠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네 명은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천사의 말을 듣고 네 명이 탈출 할 때에는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 구태여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추가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 성을 떠나라고 했고, 그 말씀대로 그 성을 떠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뒤돌아보지 말라는 그 말씀을 왜 집어넣었을까요? 나중에 보니까 네 명이 분명히 구원될 줄 알았는데, 그 넷 중에서 롯의 처가 뒤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되지 못할 자가 구원되는 식으로 절대로 섞이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갈고리 가지고 찍어 내는 것처럼 확 잡아 당겨내면서 “너는 아니고!” 하니까, 결국 네 명중에서 결국 세 명이 되잖아요. 75퍼센트!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선별작업입니다. 이 선별작업에 하나님의 추호의 실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교회 개척할 때 50명이 되었는데 일 년이 지나고 나니까 20명이 되었다고 할 때, 박수쳐야 됩니다.

“와, 나는 교회 오면 다 성도인줄 알았는데, 제가 깜빡 속을 뻔 했습니다. 하나님은 참 빈틈이 없네요.” 하나님은 식약청 직원같이 도사입니다. 중국산인지 한국산인지 대번에 알아 냅니다. 이 고사리가 중국산인지 국내산인지 다 압니다. 우리는 몰랐는데 하나님은 다 알아요. 지금 그런 선별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분노하지 마세요. 특히 목회자가 분노하지 마세요.

주께서 선별작업을 해 놓았는데, 목사가 옆에서 “주님, 저 사람은 끼워 넣읍시다”라고 간섭하지 마세요. 괜히 끼어들다가 “네가 한번 당해 볼래?”소리 듣습니다. 주님 하시는 일에는 하자가 없어요. 실수도 없고. “너, 왜 똑바로 안 해. 내가 시킨 것은 이것인데 왜 이것을 똑바로 못해” 하고 우리 보고 당부하고, “똑바로 해야 되는데 네가 이따위로 해서 나도 못하겠다”고 책망하면 그렇게 하겠는데,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자유의 영역에서 실시해야 될 그 업적들이기 때문에 주의 일에 오류나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선별작업, 가라지는 가라지, 알곡은 알곡으로 구분하는데 귀재이고 도사입니다. 그 과분한 사랑을 오로지 자기의 친 백성에게만 주기를 원하지, 진노의 자녀에게는 한 방울도 하나님의 자비가 섞이는 것을 애초부터 허용한다든지 용서하는 적이 없습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했으면 이제는 그 코스대로 밀어부치는데 그 모든 과업의 완성자는 우리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이 우리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자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유의 영역에서 어떻게 선별작업을 해 내는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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