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17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8:45

갈라디아서 제 17강 (이 근호목사, 2007년 4월 13일(1), 서울의존교회)

지난 시간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 혼자 있다고 해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졌지요?

그리스도의 형상과 사람이 어떻게 결합이 되는가?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말은 굉장히 쉬워요.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과 결합되어 있는가?’라고 물으면 상당히 난감하죠. ‘사람이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형상과 결합되었느냐’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그것이 떨어져 나갔느냐’ 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원래 사람이라는 것은 이 땅에 없었습니다. 사람 자리에 그냥 흙덩어리만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사람이 됩니다. ‘흙덩어리가 어떻게 사람 되는가?’ “수리수리마수리, 얏!” 한다고 사람이 될까요? 사람이라는 것은 그냥 흙일뿐인데 이 흙덩어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을 때만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방금 제가 한 말을 여러분이 인정하신다면 “그러면, 목사님!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흙으로 다시 돌아가겠네요”라는 질문이 당연히 나와야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을 때는 사람이었는데 만약에 그 사람이 행여 혹시나 흙이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 속에서 뭐가 빠져 나간 것이 되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 나간 거지요. 그러니까 “너는 아담이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때만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을 때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흙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는 ‘코 있다. 눈이 있다’는 이것을 가지고 사람으로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코가 있고 입이 있더라도 점차 연세가 많아져서 늙어서 흙이 된다면 그것을 사람으로 보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만 사람으로 보는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롭게 피어 날 때만 그것을 사람으로 간주해요.

저보고 이런 식으로 욕하면 안돼요. “목사님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도 안 해줍니까? 걸어 다니면 사람이지 왜 그걸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까? 그러면 짐승입니까? 인간의 존엄성을 그런 식으로 모독하는 발언을 해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 속이 좀 울컥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지 않고 펼쳤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이지 ‘제가 남들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중요치 않은 이야기입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으면 사람취급을 안합니다. 아예 사람이라는 가치를 매기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다고 하니까 반대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아요. ‘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는가? 지옥가면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변태 같은 하나님이라는 소리인가? 그러면 하나님이 성격이 이상한 분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지옥에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고 구더기도 타지 않는 불에 영원히 고생하는 것을 천국에서 보면서 흐뭇해 할수 있을까?’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볼 때 조건을 걸어 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냥 흙이라고 합니다. 흙덩어리가 걸어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시대에 진정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 더 확실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죠. 하나님의 형상이 더 구체화 되어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죠.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을 경우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창조성이 담겨 있는 자기 피조물로, 자기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하나님(신)의 존재를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신은 존재한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떨어져 나간 경우가 있었어요. 그것은 죄를 짓고 난 뒤에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떨어져 나갔을 때에 ‘어떤 일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떨어져 나가서 사람이 흙이 되고 말았는가?’

사람이 흙이 된다는 것 연세가 많으면 다 흙으로 묻히게 되니까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지요? 여기 비타 500이 있는데 이것이 인어공주가 된다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안 믿지요. 비타 500이 살아 있는 생물체가 된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고 안 믿어지는 이야기지요. 마찬가지로 생물체가 딱딱한 물체화가 된다는 이것도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자주 겪다 보니까 신기하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먼지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억수로 신기한 일입니다. 참 기이한 일이에요. 그 기이한 일에 하나님께서 어떤 요술, 마술을 걸었어요. 그 마술이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너는 죽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알고 행할 수 있고 사람은 행할 수 없는 요술입니다.

마술사가 무엇인가를 숨겨놓았다가 ‘얏!’ 하면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능력이 되는 겁니다. 이로써 사람이라는 것은 내 맘대로는 안 되는 그런 신세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선악과 따먹어도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원함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구를 전혀 외면하시고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되에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에 거기서 두 번째 조건이 나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이상 생명나무는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조건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였다면 두 번째 조건은 “선악과를 따먹어도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살 수 있잖아”라는 것을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치 않았어요. 결국 사람은 흙인데 사람에게 두 가지 마술이 담겨 있죠. 아담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 흙에 보태어져서 인간이 된 겁니다.

흙에 두 가지가 들어가야 돼요. 흙+(①선악과의 비밀 ② 생명나무의 비밀) = 인간. 이 인간만 인정하고 다른 인간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다 죽어요. 죽으면 흙이 되겠지요. 제가 지난주 오후 설교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근조화환이 죽 늘어서 있고, 부조금 주 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조금만 지나면 우리가 그 장례식장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고 이 근호’ 라고 되어 있고 여러분은 혹시 부조금 들고 오실는지 그것은 모르겠어요. 은행에 가면 순번대기표를 뽑잖아요. 먼저 가신 분이 72번이라면 나는 105번쯤 되는 거예요. 번호표가 75번이라서 먼저 돌아가신 것이고 105번차례가 되면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거죠.

우리는 전부다 대기표를 쥐고 있는 거예요. 전부다 사탕 꿰듯이 굴비 엮듯이 해서 줄줄이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누군가 먼저 죽었다고 해서 “아이고, 안 되었다. 우리보다 일찍 돌아가시다니. 우리는 이렇게 팔팔하고 건강한데 이렇게 일찍 가시다니.” 이렇게 하고 있을 때 “그 다음, 72번! 들어오세요”하면 ‘가만 있자. 72번이면 내 번호네.’ 그러면 들어 가야 돼요.

어떤 경우에는 연세 많은 분이 96번인데 젊은 분이 52번 되는 수도 있어요. 대기 순서가 빨라서 젊었어도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방금 산부인과에서 애가 ‘응애!’하고 태어나면 그 순간 죽음의 대기표를 이미 쥐고 있어요. 이것을 전체로 보여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을 보지 않으면 이 세상은 황사 덮인 세상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나라에 황사가 덮쳤는데 대구가 전국에서 제일 심했어요.

30미터 앞이 잘 안보일정도로 정말 심한 황사였어요. 30미터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요. 몇 발자국 더 가면 기껏 35미터 앞까지 보입니다. 좀 더 가면 그때는 40미터 앞까지 보이죠. 그런데 앞으로는 더 보여도 뒤로는 더 안보이게 되죠. 그러니까 항상 30미터밖에는 볼 수 없어요. 사람 사는 것이 황사 속에서 사는 겁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의 장래와 번호표가 몇 번인지도 모르고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 나가면서 밥 먹고 살고 또 퇴근해서 잠자고 그 다음날 하루치를 앞으로 다가가면 또 안개처럼 막혀 있고, 또 하루 그냥 살고 또 가보면 맨 안개속입니다. 이 전체를 몰라요. 성경은 전체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사람취급을 못 받고 지옥 간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한꺼번에 다 알아야 돼요. 사람이라는 것은 인생을 오래 산다고 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흙에다가 선악과의 비밀과 생명나무의 비밀이 담긴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면 사람이 아닙니다. 이 비밀이 없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야 되거든요.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인데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까?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자식을 낳는 수고를 한다는 말이죠.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이 땅에는 없어요. 없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야 하기에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뭡니까?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비밀을 한꺼번에 간직하고 있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선악과의 비밀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생명나무의 비밀이 있는 겁니다.

그 비밀이 그리스도에서 두 언약이라는 두 갈래의 가지를 치는 식으로서 나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뿌리라면 그 뿌리에서 두 개의 나무줄기가 나와요. 하나는 약속에 속한 언약이 있고 또 하나는 육체를 따라난 율법에 속한 언약, 이렇게 두 가지의 언약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일궈낸 약속과 율법에서, 약속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고 율법에 속한 사람은 율법에 막혀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보지를 못해요.

법에 막혀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를 못해요. 법밖에 몰라요. “법을 주세요. 지킬테니까요. 법을 주세요. 지킬 거예요.” 법밖에 몰라요. 여러분! 개나리 꽃봉오리가 법 없이 피는 겁니까, 법이 있어야 피는 겁니까? 대한민국에서 ‘개나리 꽃봉오리가 피어나게 하자’고 법을 만들어서 피는 거예요? 아니면 대한민국법과 관계없이 개나리는 그냥 피는 겁니까?

그냥 피는 겁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법이 필요 없이 그냥 피어나는 겁니다. 이게 생명이에요. 그런데 ‘화단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벽돌을 사용하고 화단과 보행자 인도와의 사이에 거리를 얼마쯤 두자’고 하는 이것은 법입니까, 법이 아닙니까? 이것은 법이지요. 아름다운 개나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화단을 조성하는 것은 법으로 되지만 국가의 헌법이나 행정법이나 형사소송법 같은 법 가지고 개나리가 피는 것이 아닙니다.

“너, 개나리 안 펴? 안 펴?” 그런다고 개나리가 핍니까? 그렇게 해서 피어나면 그것은 조폭이지 개나리가 아니죠. 개나리가 법 없이 피는 것은, 어디까지가 법이며 법을 넘어서서 무엇이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생명이란 율법외의 다른 통로를 통해서, 법과 관계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법을 주신 겁니다.

성경전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전체는 법입니까, 생명입니까? 이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인데 법아래 있는 사람들은 성경전체를 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키겠다는 겁니다. 이미 꽃봉오리는 피었는데 뭘 지킵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우리가 또 뭘 이룹니까? 갈라디아서는 말합니다. ‘율법이 있을 때 어떤 인간도 율법을 통과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을 통과해서 약속 쪽으로 넘어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이란 ‘흙 + 하나님의 형상 =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어야 된다고 했지요?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비밀이 함께 들어 있는 겁니다. 선악과의 비밀만도 아니고 생명나무의 비밀만도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 했잖아요. 우리 생각은 뭡니까? ‘우리가 아무리 선악과를 따먹고 죽어도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걸 따먹으면 살지’라고 하잖아요. 그것이 허락이 안 됩니다. 선악과 따먹고 죽었잖아요. 사람들 생각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뭘 걱정할까? 이름도 생명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생명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리가! 어디서 감히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 생명나무를 따먹으려고 하는가? 저리가라.”
“왜 안됩니까? 생명좀 따먹겠다는데.”
“너는 흙이거든. 저리가!”

추방해 버립니다. 생명나무를 따먹으려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미 흙으로 돌아간 이상은 생명을 따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로서 인간되기는 틀린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와 생명나무 전체를 이루어야 되는데 그것을 아담은 못하고 두 번째 아담이 실천에 옮깁니다. 선악과의 비밀과 생명나무의 비밀 전체를 다 이루어 내십니다. 그 성취를 한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어떻게 성취를 했는가? 호두를 깨듯이 그리스도 안을 딱 깨어 보니까 거기서 두 개의 노선, 두 개의 줄기가 빠져 나옵니다. 그 두 줄기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21절부터 28절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두 줄기를 가지고 24절에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두 언약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 배에서 다리가 몇 개 나오죠? 두 개 나오죠.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통에서 언약이 두 개 나와요.

한쪽은 종의 언약이 나오고 한쪽은 아들 되는 언약이 나옵니다. 이게 두 언약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원했을까요? 영적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예요. 방금 제가 한 소리들은 학교에서 들으면 이상한 소리라고 할 거예요. 사도바울은 보통 사람에게 납득이 되는 소리를 한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영적인 사람이 누구냐? 그 영적인 사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거예요. 육적으로 해석하고 문자로 해석하는 사람들 말고, 영적으로 성경을 보고 영적으로 들을 수 있는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것을 듣고 돈을 몇 푼 더 벌겠어요, 월수입이 늘어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영적인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그게 당신이냐”는 말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돌아다니면서 대통령 하려고 설득하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설득하고 싶지도 않아요. 제가 안산공부 마치고 여기 오는 도중에 돈 100원을 주웠어요. 그 돈 100원을 왜 주웠습니까? 그게 모래가 아니고 돈 인줄 알기에 줍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전도를 가지고 뭐라고 했는가 하면, 줍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은 내가 혼자 다 할 테니까 너희(열두제자)는 내 뒤 따라 오면서 줍기만 해라.” 단 무엇과 무엇은 구분되어야 하는가? ‘돈과 다른 것이 구분되듯이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구분해서 영적인 사람은 돈 100원짜리 줍듯이 그냥 주워 담으면 그게 추수’라고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줍는 것도 못합니까? 그 일이 되려면 항상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되지요. 영적인 안목을 가지려면 뭘 알아야 합니까? 육적인 안목이 무엇인지를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되지요. 갑자기 제가 그 이야기를 끄집어 낸 이유가 있어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두 다리가 나오듯이 두 언약이 나옵니다” 하는 이야기를 그냥 해버리면 “기독교 교리 가운데 이런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실제상황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고 그냥 기독교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라는 투로 나갈까봐서 염려가 되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돈 100원 줍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돈과 다른 쓰레기와의 차이점을 아셔야 된다는 말이죠. 양쪽 다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양쪽 다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양쪽 다 아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인간은 죄짓고 난 뒤에 죄가 지배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세상신이 지배한다고 합니다. 아주 두꺼운 층처럼 악마층(세상신)이 있습니다. 이 악마층 밑에 인간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희미하게 그냥 살아갑니다. 아침에는 일어나서 돈 벌러 나가고 밤에 들어오면 지쳐서 쓰러져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나서 또 반복하면서 늙어가고 죽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세상신의 지배아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 했는가 하면, “율법에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줌으로써 어떤 인간도 율법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자기 쪽으로 돌아와요. 사람들(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신을 규명하고, 메시아를 이야기하고, 언약을 말하고, 천국, 구원, 믿음, 소망, 사랑을 다 거론해도 전부다 어디서 만들어진 것들입니까? 이것은 다 세상 신, 악마가 만들어 내지요. 이것이 종교입니다.

종교가 다 뭐 됩니까? 율법화 되지요. 그래야 사람이 납득을 하니까요. ‘아하! 시키는 대로 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쉽게 이해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신, 메시아, 천국등등의 이야기를 하면 마치 영적인 세계인 것처럼 곡해를 하지요. 그러면서 율법을 통해서 영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지요. 사실은 같은 한통속입니다.

그렇다면 육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구분됩니까? 아까 개나리의 꽃봉오리는 무엇이 없는 채 핀다고 했습니까? 법 없이 피지요. 생명은 법이 없습니다. 개나리한테 협박을 한다고 해서 개나리가 활짝 피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자기가 알아서 피는 거예요. 참새 손에다가 수갑을 채우는 것이 말이 됩니까? 강아지가 길에 오줌눈다고 수갑을 채우면 강아지가 개과천선 하겠어요?

생명이라는 것은 법이 없는 거예요. 여기 우리가 있는 층이 이렇게 두꺼운 층인데 외부에서 뭔가 뚫고 들어와야 합니다. 외부에서 성령으로 뚫고 들어온 사람만 영적 세계도 알고 그 영적세계가 나의 육적인 종교세계도 붕괴시켰다는 것을 알면서 그 두꺼운 층을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 받은 사람만이 율법외의 다른 계통의 의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영적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무엇을 압니까? 영의 세계만 아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인간에게 종교란 이름으로 어떻게 장난질을 쳤는가, 악마가 종교라는 이름을 앞장세워서 어떻게 장난질을 쳤는가?’를 다 알겠지요. 이 두꺼운 층이 뚫린 사람은 다 알겠지요. 지층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시추봉으로 뚫어 보면 그 동그란 시추봉 안에 지층이 그대로 박혀 나와요. 그걸 보면서 지하층에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지를 아는 거지요.

그처럼 이렇게 뚫어오면 그 뚫어온 모든 과정들이 표식으로 남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진짜 성령세례를 받아서 메시아를 만난 사람만이 메시아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만이 ‘율법을 왜 주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아요. ‘아, 율법이란 왜 우리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는가? 왜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왜 안 되는가?’를 아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오늘도 지키고 내일도 지키고, 이것 지키면 저것 빠지고 저것 지키면 이것 빠지고’, 혼자 바쁜 거예요. 집에서 강아지 열 마리 키우는데 그중에 도망친 한 마리 잡아오면 그 사이에 두 마리 도망쳐 있어요. 혼자서 자기 선행 관리한다고 분주한 거예요. 맨 날, “반성합니다. 회개합니다.” 회개란 그런 법적인 의미가 아니에요.

“생명을 법으로 인정한 것에 대해서 회개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을 나의 생명가지고 대체 하려고 했던 죄를 회개하는 겁니다. 영적층이 있다면 율법층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430년 후에 모세에게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그 정황을 다른 말로 이야기 한 거예요.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만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아래 지배를 받고, 다른말로 하면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통에서 두 다리가 나왔잖아요. 한 다리는 약속이고 한 다리는 뭡니까? 율법이죠.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 지배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게 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은 지옥에 가 줘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가룟유다는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롬 11:36)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엄성은 없잖아요?”
“인간 자체가 없다니까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흙이죠. 뭐.”

인간이 무엇인가? ‘흙 + 하나님의 형상 = 인간’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고, “이왕 인간이 된 것, 그냥 인간으로 좀 봐주소”라고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자꾸 자기가 인간이래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주제이면서도 자꾸 자기를 인간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대한 대기표를 받아서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이 표를 받고 있어서 순서 되면 가야 되는 거예요. 아담에 속했기에 누구나 다 죽음대기표를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다”는 소리를 하려면 대기표를 찢어 버리고 그런 소리를 해야 합니다. 자기 대기표가 있고 자기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이 있다면 독자적으로 “나는 누구다”라고 못하고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속했습니까? 아담 안에 속했고 아담에게는 뭐가 덮여져 있습니까? 죄가 덮여져 있습니다. 그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 해서 우리에게 사망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영적인 것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했던 나의 행세, 종교적인 여러 가지 죄악을 다 보여줄 때 그게 바로 영적인 사람인겁니다. “목사님! 그런 사람 누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두 언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영적인 층을 1층, 율법층을 2층, 자기가 속한 세상층을 3층이라고 해 봅시다. 이미 그 사람은 부활의 영을 통해서, 두꺼운 육의 층을 통과한 영을 받았기 때문에 1층, 2층, 3층 전부 다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3층에 매이지도 않고 2층에 매이지도 않고 오로지 1층, 주님에게만 매여 사는 사람인데 그런 사도바울을 가지고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1)

왜? 이미 영적인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의 그릇인데 이 빈 그릇에 보배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 보배가 뭡니까? 세상신을 돌파했던 그 복음이 이 빈 그릇에 보배로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그릇에 보배가 있는데 보배가 중요합니까, 그릇이 중요합니까? 그릇은 보배를 위해서 있는 거지요. 그 보배가 없으면 하나님이 사람 취급 안합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나를 봅니다.

“내가 누구입니다.”
“너 말고 네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던지는 것은 돈 100원줍기 위한 것과 같아요. 육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바꾸기 위함이 아닙니다. 육적인 세상에서 “야! 여기 돈 100원 떨어져 있다”고 아주 신기해 하면서 영적인 사람을 줍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것을 아시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지방의 이스라엘에서 잘 있는 사람을 갑자기 로마로 데려 갑니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행 19:21)는 겁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도 갑니다. “이 성에는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10) 고린도지방에 가면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가 있느니라.”(13:48) 이것은 “돈 100원짜리가 이 도시에도 있느니라”와 같은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개조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미리 깔아 놓은 사람, 영적인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3-28)

당연히 그래야지요. 왜? 자갈하고 돈하고 같습니까? 자갈은 자갈의 길을 가야 되고 돈 100원은 천국으로 가야됩니다. 알곡은 천국 곳간에 들어가야 되고, 가라지는 무서운 맹렬한 진노의 불에 살라져야 됩니다. 그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저지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 같으면 줍기만 하면 그만이지 우리가 따로 사람을 개조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1층과 2층에 얽매여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영적인 사람도 아닌데 자기 친구로 삼아서 조작을 해 보려고 해요. 결국 그 말은 뭐가 됩니까? 문방구에 가면 애들 노는 장난감 돈이 있어요. 종이에 돈처럼 그려놓고 10만원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게 10만원 짜리 돈입니까? 진짜 10만원짜리를 건져야 되는데, 하늘나라에서는 받아 주지도 않는데, 자기가 종이에다 10만원이라고 써놓고 하나님보고 봐달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안되지요.

사람을 자기 유리한쪽으로 교인 만들고 친구 만드는 식으로 하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고 찾아다니면서 성도가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혹시 압니까? 100원짜리 하나 건질지. 그러면 “반갑다. 친구야!” 하면서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야! 주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그런 사람이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하고 사모하고 모이면 교회’라고 하는데, 글쎄요? 목사 사모가 교인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지는데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까? 왜냐하면 사모는 생활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너무 복음만 챙기다가 온집안 식구가 다 자살할 지경이 되기에 나라도 정신차리자. 나라도 3층이 아닌 1층과 2층만 찾자’고 나올수가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오존층처럼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적으로 애써도 그 층을 뚫을 수가 없어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그렇게 뚫으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너희들은 사탄의 자식이다”는 욕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뱀의 새끼’라고 했으니 얼마나 인간의 존엄성, 인간자체에 대한 모독입니까?

왜?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에 다 아니까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법으로서 확정짓고 법으로서 규정하려면 그 법을 깨버리세요. 제가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설교할 때 그런 예를 들었어요. 소위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안다는 사람이 이 큰 부대에 자기가 들어 있고 그 안에 복음 집어넣고, 언약 집어넣고, 십자가를 집어넣고, 갈라디아서, 로마서 다 집어넣고 있다는 말이죠.

왜? 이런 것을 가지고 자기가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독한 자기 집착입니다. 십자가는 황산입니다. 황산이나 염산은 피부에 닿으면 피부가 녹아 버립니다. 아주 독합니다. 십자가는 그와 같습니다. 같이 들어가면 타죽어요. 우리 보고 죽으라고 있는 것이 십자가인데, 그 안에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야 되는데 자신이 기어이 살기 위해서 계속 집어넣기를 시도하는 거예요.

결국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자기는 그대로 살아 있어요. 결국 이것은 한글자로 무엇이 되겠어요? 법이 되겠지요. 나를 살리기 위한 법적 조치가 되지요. ‘나는 십자가를 안다. 무엇을 안다. 무엇을 안다. 이것들을 챙겼으니 구원되었겠지.’ 이것은 자기를 위한 법적 조치가 되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한거예요.

이것은 꼭 거북이 같다고요. “거북아! 거북아! 네 얼굴을 내밀어라.” 그러면 점점 더 고개가 들어가요. 두꺼운 껍질 안으로 더 들어가요. 쑤시면 더욱 더 안으로 숨어 들어가요. 지독한 자기방어입니다. 차라리 “나, 여기 있습니다”하고 나와야 돼요. “당신 옆에 붙어 있는 그 파스는 왠 파스입니까?” “황산이 묻어서 홀랑 타버려서 붙인 파스입니다.” “이쪽은?” “이쪽도 파스 하나 더 붙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예요. 십자가 안에 들어오면 온 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나와야 돼요. 파스 냄새가 천지를 진동해야 됩니다. 파스가 뭔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온천지에 파스를 붙이고 나와야 그 사람이 파스를 증거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나는 죄인이고 파스 덕에 시원하다”고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고 거기에 십자가의 피를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율법으로 죄인 되게 하시고 거기다가 ‘예수님의 피의 효과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생명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으로 우리의 법적조치를 뚫었는가’를 증거 하게 합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것, 즉 흙에다가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더해서 인간되게 한 것은 인간이 살아 있기에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뭔가 증거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 된 겁니다.

뭘 증거 합니까?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이렇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선악과는 따먹지 말아야 되고, 따먹었으면 생명나무도 아울러 따먹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 두 가지를 통해서 무엇을 증거 하려고 합니까? 확실한 것은 신약에서 드러났지요. 뭘 증거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함이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말이죠. 분명히 자기가 있음에도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겁니다. 달그락 달그락하는 질그릇에 그리스도의 형상인 보배가 담긴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유일한 인간종(種)으로 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당연하게 지옥에 보내십니다.

인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죠. 그냥 흙이죠. 그리스도의 형상 중에서 심판하는 형상이 있거든요. 예수님은 심판하는 분인 것은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람들은 따로 지옥에 가서 심판의 본때를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들이 받는 심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천국에 가는 사람은 ‘이것이 십자가의 효력이다’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천국에 가는 겁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좋으라고 만들어 버리면 그때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따로 따로 놀기 때문에 이 땅에 신이 둘이 되는 것인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신이 하나라면 나머지는 그 신에게 다 복속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한쪽신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저쪽은 피조물이고 이쪽은 창조주인 동시에 심판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라는 몸통에서 어떻게 두 언약이 나오는가를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서 두 개의 언약이 나옵니다. 한쪽은 약속의 언약이 나오고 한쪽은 육체로 나자, 혹은 율법에 속한 자가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 보세요.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되어 있어요.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해놓고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이렇게 이어진다는 말이죠.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요? 여러분! 아브라함때 율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브라함때는 율법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율법에 보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율법에 적혀 있지요.

율법 속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사도바울이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모든 사람에게 어떤 난해한 해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온 율법을 가지고 소급(미리 전에 있었던 일까지 다 잡아 당겨서 바라본다는 뜻으로)해서 전에 있었던 것까지도 다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율법에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아브라함보다 430년 후에 있으면서도, 나중 나온 것이 앞에 있는 아브라함까지 다 해석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 뒤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는 앞에 있는 율법도 해석하고 그보다 430년 앞에 있는 아브라함도 다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고 거기에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 - 율법 - 메시야’ 이런 순서로 봤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율법을 당기고, 아브라함을 당겨와서, 이 전체를 해석할 수 있고 그 해석만이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약속이 나오고 종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누가 종이고 누가 약속의 아들입니까?”라고 했을 때에, “이삭은 약속이고 종의 아들은 하갈의 자식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미흡합니다.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꽉 잡을 때 비로소 종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마엘만 종이 아니고 예수님만 약속이니까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서,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믿는 사람은 다 이스마엘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다 종의 자식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저주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 때문에 인류 자체가 두 갈래로 쫙 갈라지는 거예요.

한쪽은 약속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인데 이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이 한쪽에 있고 또 한쪽에는 율법이라는, 악령의 층을 뚫지 못해서 그리스도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그냥 율법에 속해서 ‘율법 지키자’는 것만 하는 사람은 하갈에 속한 자라는 겁니다.

하갈에 속한 원인이 무엇인가? 그들은 육체에 속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육체에 안 속했는가? 육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 속했는가? 그들은 이땅에 육체가 없다는 겁니다. 율법에 속한자가 육체에 속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율법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이 약속에 속한 사람인데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육체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지요. 결국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육체로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과 상관없이 왜 성령이 따로 이방인들에게 와야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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