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15강 (이 근호목사, 2007년 3월 9일(1), 서울의존교회)
성경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은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사람밖에 없지요? 이 세상에 사람밖에 없다고 해서 성경이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성경이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사람에게 오고 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이 말이죠. 그런데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보입니다.
사람만 보이고 사람밖에 없고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생각 안 해도 살 수 있고, 하나님 생각 안 해도 맛있는 것 먹을 수 있고, 하나님 생각 안 해도 공부만 잘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이고, 착하다. 참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 주니까 하나님 같은 것은 빼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야기하면서 잘 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어떻게 연결 되는가’를 잊어 버렸어요.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사귈 때 어떻게 사귀는가?’ 여러분은 친구하고 사귈 때 어떻게 사귑니까? 서로 이야기하면서 사귀겠지요. 그러면 친구끼리 서로 알아듣는 겁니다.
그냥 허공을 향하여 “친구야! 반갑다!” 그런다고 친구가 오는 겁니까? 그렇지 않지요. 전화번호 찾아서 눌러서 ‘신호가 가는가’ 확인합니다. “전화 받으세요. 전화 받으세요(신호음 가는 소리).” 그 다음에 친구가 전화를 받아서 “왜 전화 했는데?” 하면 그때서 이야기가 되지요. 연결이 된 거지요. 이렇게 친구하고는 전화를 하든지 만나서 대화하면 연결이 되는데, 하나님하고 사람하고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무척 어렵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어려운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하고 연결하는 방법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모른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끊어진 상태에서 사람끼리는 잘 지내는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가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언제 끊어집니까?
A라는 친구와 B라는 친구와 서로 사귀고 놀다가 헤어져서 집에 가는데 갑자기 차가 들이닥쳐서 A라는 친구를 받아서 그 친구가 죽어 버렸어요. 그 친구는 화장터의 재로 사라져 버리니까 더 이상의 사귐이 끊어져 버립니다. 더 이상 사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사이가 끊어지는 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도 죽음이 있습니다. ‘나, 하나님 그런 것 몰라. 하나님이 있다고 해도 연락할 방법도 나는 몰라. 연락해 봐야 소용도 없어.’ 이런 경우를 가지고 죽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에 두 가지 종류가 있지요? 첫 번째의 ‘죽었다’는 것은 교통사고를 당해서 흙으로 돌아간 경우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죽었다’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 밖에 모르잖아요. 누가 ‘죽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의 숨이 끊어졌다’는 것밖에는 모르지요?
그런데 여기에 두 번째 ‘죽었다’가 있지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를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을 보고 “너, 죽었다”고 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내가 왜 죽어? 내가 이렇게 살아 있잖아. ‘내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하면서 말도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잖아.” 이렇게 마구 대들겠지요. “오! 그래 너는 살아 있어. 말을 하는 것 보니까 안 죽었구나”라고 하겠지요.
여러분이 하얀 병원침대에 누워있는데 친구가 와서 “의사 선생님! 얘가 죽었어요. 내가 쿡쿡 찔러도 얘가 깨어나지를 못해요. 얘가 죽었어요.” 그러면 잠자고 있던 여러분이 화가 나서 “내가 왜 죽어? 병원에 누워 있다고 다 죽은 거야? 나는 아직 살았다” “의사 선생님! 얘가 말을 해요. 살았나 봐요”라고 이야기를 하겠지요. 이처럼 사람이 말을 하고 움직이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움직이고 밥 먹고 전화하고 시시덕거리면서 살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그것을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둘 중에 어느 말이 맞습니까? ‘살아 있으니까 살았다’는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면 죽었다’라는 그 말이 맞습니까? 다시 들어 보세요. 학교갈 때 빗질해서 머리 다듬고 옷매무새 다듬고 꾸미는데 하나님은 그걸 보시면서 “너는 아무리 꾸며도 죽은거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거울 보면서 ‘나는 참 예뻐’ 이러고 있는데 여러분의 친구가 “얘! 너는 죽었어”라고 한다면 우리는 화를 덜컥 낼 거예요. “내가 왜 죽어? 이렇게 살아서 거울을 보면서 나를 꾸미고 있는데”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죽은 사람입니다.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들은 죽은 것이다”라고 할 때 사람들이 수긍을 했습니까, 화를 냈습니까?
화를 냈어요. “예수 네가 뭔데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를 보고 ‘죽었다’고 하느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소경이 본다고 하면 소경이고 ‘나는 본다’고 하면 그것은 소경이 아니다”(요 9:39)라고 아주 어려운 말을 했어요. 반대로 이야기 했어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우리가 지금 친구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살았다, 죽었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을 안 해줍니다. 사람은 사람들끼리 보면서 “너는 죽었어. 혹은 너는 살았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끼리만 보는 것이 아니고 여기 있는 이 전부를 다 봅니다. 전부를 다 보다 보니까 하나님과 끊어지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현재 죽어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죽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시킬 사람은, 그냥 100살 혹은 200살 이런 식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진짜 산 사람, 하나님과 관계가 다시 이어진 사람, 하나님과 안 끊어진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산 사람으로 만들어요. 어린이 여러분들이 약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들끼리 ‘죽었다. 혹은 살았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정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체를 다 보고 있는데 사람들은 전체는 안보이고 자기가 똑같이 닮은 꼴, 닮은 사람만 보이다 보니까 숨만 쉬면 ‘살았다’고 보고 숨 끊어지면 ‘죽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체를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살았다’고 보지 않고 ‘죽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았다고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그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평생을 거지로 살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거지가 하나님은 알았어요. 그 거지가 평생 거지로 살다가 죽자 다른 사람들이 “아이고! 저 거지가 죽었구나”하면서 가슴 아파 할 때, 그 사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그 사람은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죽었느니 살았느니 하는 것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남들이 “쯧쯧! 거지 나사로가 죽었구나”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 거지 나사로는 그런 말을 안 들어요.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살아 있어요. 거지 나사로는 전체를 다 볼수 있기 때문에 전체를 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하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성경책을 펼친 이유가 있습니다. 친구들끼리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죽은 것을 살릴 수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을 제대로 살릴 때 ‘이렇게 살립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책이 성경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하나님이 하는 일은 우리가 죽어도 산 사람으로 만들어 줄 정도의 이야기다’라고 해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도 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덮어 버리면 ‘죽으면 어떡해? 죽으면 안 되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다 헛일이야.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어가죠. 그러다가도 성경을 보게 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구나. 진짜 하나님의 생각은 그런 뜻이 아니구나’ 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를 처음부터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어떻게 해서 내가 산사람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우리 생각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앞선 안산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남편이 코를 골아요. 코골이 남편이 너무너무 심하게 코를 골아서 아파트 위아래 층까지 소리가 날정도로 소문난 남편입니다.
그런데 이웃이 와서 “와우! 댁의 남편이 코를 심하게 골던데요”라고 할 때, “제가 열심히 기도를 해서 그렇게 제 남편이 코를 많이 골았습니다”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아내가 기도를 하나 안하나 남편은 코를 골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해야지요. 제가 기도를 안 해도 제 남편은 코를 잘 골아요. 그 코골이를 구원해주는 ‘구원의 능력’이라고 봅시다.
그 남편이 코를 골 때 마다 “나는 다시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드르렁). 너는 이미 구원받았다(드르렁)”이라고 코를 곤다면 옆에 있는 아내가 그 코를 골 때마다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자기가 기도, 전도, 헌금 안 해도 남편이 일방적으로 계속 구원의 능력을 주고 있지요. 그럴 때 그 아내가 옆사람과 이야기할 때, “당신의 남편이 코를 잘 골던데 누구 능력으로 코를 잘 고는 겁니까?” “제가 잘나서 남편이 코를 잘 고는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틀린 거지요.
맞는 것은 뭡니까? “우리 남편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그냥 코를 잘 골아요.” 그분의 주특기, 그분이 하는 일이 그 일이란 말이죠, 제가 이런 예를 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했지요? 죽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나면 그 사람은 죽은 자가 아니에요. 죽은 자는 아예 죽어 있어야 합니다.
드라마에서 죽은 사람이 숨 푹푹 내 쉬면서 산사람처럼 하고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가 없어요. 꼼짝 안하고 죽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 꿈틀거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지요. 죽은 자 라면 죽은 자 시늉이라도 해야 돼요.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어떻게 스스로를 꼬집어서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자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사람의 가장 생생한 현실은 죽음입니다. 죽음 빼놓고는 나머지는 다 환상입니다. 사람이 아프다가 죽게 되면 자기가 자기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완전히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죽어서 부활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그 부활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 그 앞에 있는 죽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만 생생하게 주의 능력으로만 부활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안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도 잘하지, 헌금도 잘하지, 전도도 잘하지, 춤도 잘 추고 공부도 잘하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고 내가 펄펄하게 살아 있다’는 겁니다. 이러다 보니 무엇을 놓칩니까? 생생한 현실, 죽어도 부활되고 죽고 난 뒤에 생명의 세상이라는 것을 자꾸 놓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가 코 안 골고 잠을 푹 잘 때, 다시 말해서 남편이 코를 골 때는 남편이 코고는 소리가 잘 들리지만 남편이 코를 곤다고 자기도 같이 골아 버리면 남편이 코 고는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안 들리겠습니까? 안 들리죠. 자기의 코고는 소리가 더 심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편께서는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었다”고 코를 골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코를 심하게 골면서 “드르렁! 내 기도는 귀한 기도, 드르렁! 내 헌금은 귀한 돈, 드르렁! 내 전도는 너무 끝내줘.” 이래 버리면 남편이 주는 용서가 들리겠습니까? 하나도 안 들려요. 들릴 리가 없어요. 그러면 가만있는 남편이 좋은 남편이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남편 같으면 발가지고 차면서 “조용히 해! 내가 골 때는 가만있어. 내가 코 고는데 왜 네가 골아. 너는 내 코고는 소리나 감상해” 하겠지요?
그렇게 발길로 차는 그 기간이 보통 90년 갑니다. 평생가요. 좀 오래 사는 분 같으면 95년 갑니다. 평생 우리가 살아가면서 뭐 합니까? 예수님이 일하신 공로를 누가 방해를 놓습니가? 내가 방해 놓습니다. 이유가 뭐지요? ‘나는 지금 이런 일을 통해서 살았다’고 우기니까 그것을 뭉개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해서 구원 한다”고 하니까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압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저 인간이 코를 고는구나. 내가 골면 될 일을 혼자서 또 고는 구나” 하죠. 사람이 갑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지갑에 돈이 떨어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웃 사랑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몸이 아프면 기어가는 개미조차 귀찮아요. 날아다니는 모기는 물론이고요.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친구도 다 귀찮아요.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몰려와서 부르는 찬송가도 귀찮아서 마귀의 노래처럼 들리고 성경말씀 들려줘도
‘빨리 좀 가 주세요. 제발 혼자 있게 놔두세요. 이제 그것도 마이(많이) 묵었다(들었다). 고마 해라(그만 해라). 이제 아예 내가 설교해볼까? 예수고 삼위일체고 십자가고 다 귀찮다.’ 내 몸 아프면 모든 것이 귀찮아요. 그리고 돈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적개심과 분노로 와요. ‘돈 있으니까 교회도 다니지 나같이 돈 없으면 무슨 수로 교회를 다니나’하는 식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터지죠.
신학을 한다, 성경을 많이 봤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들어가면 달랑 두 가지가 남아요. 하나는 ‘몸 아프고 배고픈 것’을 위인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평소에 신앙생활 한 것은 뭡니까? 몸 안 아프고 배 안 고픈 상태에서 철저하게 덮어씌운 포장지죠. 위장술, 위선들입니다. 그 위선들을 가지고 우리는 마치 구원받은 것 인양 으스대면서 교인행세 꽤나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리 봐도 ‘저 인간은 지금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인데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니까 그것으로 자꾸 ‘자기는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래도 우길래?” 하면서 또 한 꺼풀을 벗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시련을 주었지만 나는 욥처럼 견뎌낼 것입니다’하고 버티거든요.
“그래? 욥처럼 이라고? 욥이라고 했지?” 그리고 또 한 꺼풀 벗겨냅니다.
“주여, 이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면 제가 교회 안 나가는 수가 있습니다.” “슬슬 본색이 나오는구만. 자, 한 번 더 갑니다.”
“평생 예수 믿고 난 뒤에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제 내 앞에서 예수 소리 하지 마라. 이제 나는 예수와 작별했다.”
“진작 그러지. 진작.”
비로소 그 순간에 남편의 코골이가 들리게 합니다. 죄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자기 생각이 죄입니다. 성경에서 죄가 뭐냐? 자기 생각입니다. 중요한 거니까 적어 놓으세요. 근거가 뭡니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읽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
죄라는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생각이 보통 몇 년 갑니까? 보통 평생 갑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다룰 두 언약에 대해서 기초를 다지기 위함입니다. 오늘 강의가 어렵기 때문에 코골이에서부터 쉽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남편이 코를 고는데 그 내용이 뭡니까? “너희의 죄를 용서했다”고 코를 곱니다. 이 말은 “죽어 마땅한 너희를 내가 내 피로 살린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코고는 남편의 옆에 있는 아내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내가 왜 죽었다고 하느냐? 이상한 분이네 죄를 안 지으면 그만이지. 죄를 용서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죄를 용서했다니?” ‘아하, 내가 몇 가지 평소에 살면서 잘못한 것을 용서해 준다는 그 말이겠지.’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닙니다. “너밖에 모르는 죄를 내가 대신해서 짊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너는 구원 된다”고 매일 밤마다 코골이 하시는 거예요. 죄를 안 짓게 해서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죄는 죄대로 나오되 그 죄를 대신 계속해서 자기 쪽으로 퍼 담아서 옮기고 또 옮기고, 나오면 옮기고 나오면 옮기고 계속해서 퍼 담으시는 남편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개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염을 기르고 있다든지, 어떤 사람은 머리전체가 허옇게 되었다든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개성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개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죄를 뒤집어쓰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남의 죄 뒤집어쓰기 바쁜 사람이 무슨 개성이 있겠습니까?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이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던가요? 환경미화원 한다면서 자기 개성 살린다고 온갖 것 처바르고, 치장하고, 자기 개성을 살려서 온다면 환경미화원 제대로 하겠습니까? 환경미화원은 도리어 개성을 없애는 겁니다. 하도 쓰레기를 뒤집어쓰기 때문에
모자도 꾹 눌러 써야 하고, 주황색 제복을 입습니다. 쓰레기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완전히 자기를 감춰버려야 돼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쓰레기 같은 우리 죄를 뒤집어쓰기 때문에 개성이 없어요. 그냥 뒤집어 쓰고 매일 억울하게 당하면서 오해 받고 곡해 받고 핍박 받고 모멸당하고 멸시 당하는 식으로 계속 살아 온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는 모든 말씀, 예수님께서 한평생 살아오면서 보인 모든 행적과 기적은 어떤 노선에 서야만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가 짊어 졌기 때문에 억울하게 욕을 얻어먹는 그 노선, 바로 십자가의 노선에 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과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 노선 말고 다른 노선에 서면 개성이 철철 넘치고, 자기 자존심이 철철 넘치고, 자기 고집이 대단합니다. 이런 사람이 말씀을 이해한다고요? 이해 못합니다.
심지어 한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써 5천명을 먹이니까 ‘예수님에게 떡을 얻어 먹겠다’고 마구 달려드는 거예요. “너는 예수 모르지. 나는 예수 알아. 오늘도 떡 얻어먹으러 가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 자존심과 자기 개성을 더욱 살리고 더욱 훌륭하고 가치가 더 큰 사람이 되었다’고 우쭐댈 그 때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너희가 내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자기 생각이 죄입니다. 구원을 해주신 다는데 왜 자기가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까? 나는 이것이 이해가 안돼요. 그래 놓고는 믿는다니 무슨 그런 믿음이 다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것은 오기지요. 참 이것이 안타까운 이야기인데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나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원수지간이 되었느냐’ 이말 입니다. ‘참된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에 삐져서 원수가 되었느냐’ 하는 말이죠. “사실 너희들은 나에게 눈이라도 빼 줘야 돼. 전에는 나를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반겼잖아.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어서 눈이라도 빼어 줘야 할 사람을 가지고 원수로 간주하느냐?” 그 말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영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사람들은 자꾸 육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육’이란 ‘살아 있는 나를 더 멋지게 살려줘’라는 것이 육입니다. ‘영’은 ‘너는 죽은 자야’라는 것이 영입니다. 살려주는 것도 죽은 자가 요청한 그대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요청한 그대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어이 눈 빼줘.” “예.” 하면서 눈 빼주고, “손가락 빼줘” “예.” 하고 손가락을 빼줘야 영적인 존재라는 말이죠. 그 반대가 육적인 겁니다. “이거 아까운데요. 이거 내건데요. 이것은 나의 손가락인데요.” 나, 나, 내 것, 이것이 계속 유지되면 그것은 자기 생각이 아닙니까? 그것은 육적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를 해석하면서 이런 자기 개성이나 자기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은 갈라디아서가 폐쇄하고 그 사람을 ‘오지 말라’는 식으로 밀어 버립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갈라디아서를 보지도 말라는 겁니다. 왜? “만약 너의 개성과 자질과 가치를 높이는 식이라면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이 증거 하는 복음과 원수가 된다”는 식으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에다가 복음을 집어넣어서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육적인 노림수를 가지고 사도바울을 기대하고 해석하니까 “아이고, 천사님! 아이고, 예수님” 하면서 영접할 때는 아주 기분 좋게 영접을 했지요.
“아이고, 이런 소리 첨 들었습니다. 멋있습니다. 이제 나는 잘되겠지.”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사도바울이 실상과 본뜻을 이야기 하니까 “그런 소리 하려거든 가소. 다시는 그런 소리 필요 없습니다” 하고 밀쳐 버리는 겁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지난 번 유성에서 했던 십자가마을 수련회, 로마서강의를 대폭 수정하고 보충해서 제목을 “정죄함이 없느니라”는 제목으로 낼 예정입니다. 거기에 이런 것을 보충해 놓았습니다.
한국에 종교가 들어오면 전부다 가족중심주의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게 혈연 중심입니다. 이스마엘이죠. 이스마엘이기 때문에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효중심, 가문중심, 자기 핏줄 중심으로 다 바뀌어져 버립니다. 거기에다 이삭(복음)을 이야기 하면 된통 혼이 나고 교회에서 쫒겨나 버립니다. ‘우리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신, 혹은 부처는 우리에게 무엇을 도와 줄수 있느냐?’ 철저하게 자기 혈연, 가족, 가문중심을 주장하고 절대로 포기를 못해요.
교회를 와도 헌금을 잘 안하는 이유가 자기 가족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송곳처럼 찌르는 말입니다. 이런 말 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말 듣는 사람은 ‘욱’하고 올라오게 됩니다. ‘교회는 천국이고 진짜 형제와 자매는 함께 예수 믿는 우리다’라고 백날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찬송가 부를 때뿐입니다. 우선은 내 핏줄입니다. 집에 있는 나의 애들이고 남편이고 아내가 우선입니다.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다 바뀌었어요. 불교 들어와도 그런 식으로 다 바뀌었습니다. 부처는 “세상은 더럽다. 떠나자”고 했어요.
통일신라 때의 불교는 ‘출가’(出家)가 아니고 ‘제가’(齊家)입니다. ‘가정에서 불도를 섬겼더니 복을 받아서 효도를 더 잘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모든 불교가 ‘효’로 다 바뀌어졌어요. 그것을 보면서 눈치 채는 거죠. ‘아, 이제는 기독교 차례구나.’ ‘이왕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다고 해 주세요’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바울은, 또 복음은 “네가 살았다고 하는 그것이 착각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숨을 쉬고 힘차게 달리기를 해도 지금 죽은 채로 달리기를 하는 겁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과거-현재-미래’가 있다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과거에 이미 규정된 것을 그냥 시간으로 늘려서 확인하는 그것뿐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어요. 미래는 과거의 재탕입니다. 과거에 이미 십자가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존재로 봤어요. 십자가가 무슨 일입니까? 내 죄를 가져갔더니 내 죄를 가져가신 분이 저주받은 사건이 십자가사건 아닙니까?
그분이 십자가를 진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내 죄를 가져 가셨기에 돌아가셨잖아요. 내 죄를 안 가져가셨으면 안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 그분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사실은 누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죽어야 되잖아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그런 관점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봤습니다.
황혼의 그림자를 아시지요? 황혼에 비추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잖아요. 이미 죽은 우리가 여기 있는데 그 긴 그림자가 죽을 때까지, 미래까지 계속 여기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 따로 없어요. 새로운 것을 기대할 것이 따로 없고 ‘왜 우리는 십자가 아니면 구원을 못받는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숨겨진 죄와 예수님의 은혜가 같이 병행해서 계속 끝까지 가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 집 애가 어떻게 자라서 효도를 하는지 안하는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결국 나라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확정된 운명, 확정된 존재구나’ 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해 가는 겁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우리교회 집사님 한분이 영화표를 주셔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 이름이 <바벨>인데 이것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까 이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 이 영화 보고 저더러 영화평을 쓰라는 거지요? 갑시다.” 그래서 갔습니다. 영화가 두 시간 동안 상영되는데, 영화 평을 써야 되기 때문에 그 두 시간 동안은 졸수가 없습니다. 영화평을 거짓말로 쓰면 안 되거든요. 바짝 정신을 차려서 어두운데서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영화 내용을 순서대로 다 기록해야 합니다.
이 무슨 고역인지 모르지만 그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세 네식구 모여 사는 가정의 작은 행복도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냥 두지 않고 완전히 박살을 내더라는 말입니다. 소박하고 욕심없는 가정의 조그만 행복도 엄청난 파도 같은(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IMF같은 경우)것이 덮치면 다 날아가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IMF때 자살한 사람들 많잖아요. 그 사람이 무슨 욕심을 낸것도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재벌 되겠다고 설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일을 했는데, 다른 외부의 조건이 쳐들어 와서 박살을 낼 때, 그때 소통의 단절이 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거예요. 언어가 소통이 안 되는 그것을 가지고 감독은 영화제목으로 <바벨>(혼란, 혼선, 혼돈이라는 뜻이죠)이라고 표현했어요. 각자각자 작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저쪽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해 보면 이야기가 안 되는 거예요.
각각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부딪히니까 힘센 사람은 정복하고 힘이 약한 사람은 거기서 깨어지면서 조그마한 행복이 다 부서지는 절망을 느낄 때 감독이 말합니다. “도대체 이 절망을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없지요.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신이 내린 팔자이고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바벨>, 이 세상은 ‘혼란의 시대’라는 겁니다.
“전체를 모르고 내 것만 알고 있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져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행복마저 박살낼 수 있는 그런 사건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소통단절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 해결책 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취지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서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어요. ‘세상의 현실을 이렇게 넓게, 그리고 제대로 본 사람이 또 있겠느냐’라고 점수를 준거지요.
‘현실을 더욱 더 답답하게 만들고, 절망을 더욱 더 절망되게 해서 그 절망의 원인을 캐보자’는 이야기죠. 원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원인이 없다는 말은 해결책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그냥 막가는 겁니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교육할 것이 하나뿐입니다.
“아버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막 살아라.”
왜? 세상 자체가 막가는 거예요. 대통령 되어서 “바르게 하겠습니다”해도 1년 지나고 1년 6개월 지나면 막갑니다. 밑에 있는 참모들이 우려먹을 것 다 우려먹고 차지할 것 요직 다 차지해 버립니다. 그야 말로 막가는 겁니다. 그렇게 막 갈 때 같이 막 가줘야지 혼자 바르게 살면 그 사람만 깨집니다. 세상 막 갈 때 같이 막 가는 수밖에 없지요.
어떤 교회는, 전도 많이 한 구역은 보너스로 단체로 태국에 해외여행 보내줍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가난한 교회 교인이 큰 교회로 갈 수밖에 없지요. 공짜로 태국을 관광할 수 있잖아요. 막가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뽑을 때 중고등부 몇 명을 채우면 재계약하고 못 채우면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중고등부 채우기 위한 방법은 뭡니까? 돈으로 해결 보는 겁니다. 행운권부터 시작해서 교회 등록하면 마치 학원처럼 가방주고 선물주고 온간 것을 줍니다.
강남의 학원들이 학생들 유치 경쟁을 하면서 돈 주고 빼오는 것처럼 교회마다 돈을 주고 돈으로 도배를 하듯이 해서 다른 교인들을 다 데려와서 교회를 채워야 그 전도사와 부목사가 잘리지 않고 재계약됩니다. 그냥 막가는 겁니다. 이유가 없어요. ‘이유 없는 세대에 살고 있다.’ 그것이 바벨입니다. 그런데 그 감독이 불신자이기에 모르는 것이 있어요. 사람은 신(하나님)보다 더 너그럽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절망해도 ‘시간이 약이죠. 세월이 지나면 ‘팔자려니’ 하고 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고 살아가는 겁니다. 상처났을 때 후시딘 연고를 바르면 다시 회복하듯이 사람은 희망이 그냥 힘이 되죠. 그것을 교회에서는 ‘비전’이라고 합니다. 어느 교회 보니까 ‘비전이 능력이다’라고 써 붙여 놓았어요. 아예 강당 이름을 ‘비전 홀’이라고 이름 붙여 놓았어요.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게트의 작품인데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요)라는 연극에 보면 희망이 오지 않습니다. 희망대로 되지 않지만 ‘단지 지금 희망한다는 그것이 사람을 살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희망하는 것이니까 ‘희망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묻지를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는 예가 있어요. 어떤 마을에 희망의 중심터가 있어요. 그 터는 성스런 영역이라 아무도 가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거기서 희망이 솟아 나온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나가던 엔지니어가 사람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런 것은 미신이다’고 하면서 거기에 가봤어요. 가보니까 소파 두 개 놓여 있고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였습니다. 그래서 술집에 가서 “당신들이 신령한 힘이 나온다는 그 터에 가보니까 그게 폐가(廢家)더라. 믿지 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를 때려 죽여 버렸습니다. 왜 죽였겠습니까? 희망의 샘터를 공격해 버렸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이 누군지는 몰라요. 다만 하나님이 희망을 준다는 그것 때문에 그냥 빈터로 남겨두고 계속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 4천 7백 5십 6번 넘어져도, 4천 7백 5십 7번 일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냥 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이미 과거에 규정된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갈 때 까지 가보는 겁니다. 막 사는 거예요. 깨지면 또 일어서고 깨지면 또 일어서고.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이미 죽었다.” 왜요? “네 죄를 가져가신 예수님이 죽었잖아. 저주 받았잖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라. 그러니 이미 죽은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볼 때 3장을 놓치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할 때 그 십자가는 이미 우리의 미래조차 다 확정해 버렸어요. 다른 미래는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나는 것 외에 다른 미래는 없어요. 그 미래가 뭐냐?
‘우리는 비록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살아 있었구나’라는 것을 순간순간 확인하는 그런 미래가 되겠지요.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의 영이 왔다는 것은 ‘이미 우리 죄는 청산 되었구나. 우리 죄는 이미 다 없어졌구나’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이미 너는 정죄함이 없다”는 그 코골이 소리를 우리가 들어가면서 ‘이미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미 해결 났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결 난 것이 무엇인가? ‘죽은 우리를 살렸고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죽음이 무엇이며, 왜 내가 펄펄 살아 있는데도 죽었다고 하며, 죄는 무엇이며, 내 생각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데 왜 내 생각이 죄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 이게 내 생각을 하지 말고 영적인 생각을 해야 되겠구나.’
사도바울이 왔다고 할 때, 자기 생각을 안 하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 생각하면서 “눈이라도 빼드리겠습니다”라는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은 지금 요구하는 거예요. “나는 영으로 갔는데 너희는 왜 육으로 돌아오느냐. 영으로 갔으면 영으로 돌아 와야지, 왜 영으로 갔는데도 육으로 돌아오느냐” 이 말입니다. “정말 당신들이 영을 안다면 육적인 눈이라도 빼 줬을 것이다”는 말이지요.
지금 눈 빼주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들한테 갈 때. 너희들은 ‘사도바울이 와서 우리 교회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고 시기와 분쟁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분쟁이 나야 그게 정상이다”라고 합니다. “분쟁이 나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학원 같으면 수강료 내고 “6개월만 공부하면 (복음)다 압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중장비 학원, 혹은 제빵 제과 학원을 다닌다면 학원을 다니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나가 있으니까 이것은 무슨 생각? ‘나’가 있다는 것은 자기생각 아닙니까? 교회는 ‘나’생각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6개월만 다니면 복음 다 뗍니까? 그러면 6개월만 다니고 교회 안 나오겠습니다. 목사님 말 들어보니 교회 안 나와도 구원받는다면서요. 수강료 내고 6개월만 듣겠습니다.” 이것은 원수지간이고 복음을 너무나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육인데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들어가면 “주여! 이제부터 나의 눈을 빼든지, 팔을 자르든지 주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위해서.” 이게 영적인 사람이지요.
“아이고, 아까워라.” 이게 아니라 “내생각 안하고 저는 주님 생각 할 테니까, 주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자유이십니다. 그저 저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습니다.” 그것을 네 자로 줄이면 뭡니까? “까라면 까”겠습니다. 그게 믿음 아닙니까? 이미 영적인 세계에서는 나의 것이 없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겠습니다. 눈 빼드리죠.”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왜 그게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안타까워서 “나는 그것을 기대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왜 당신들의 반응은 나를 왜 원수취급 하느냐? 교회 분란 일으켰다고 왜 원수취급 하느냐?” 이 말이죠. 그런다고 내가 열심을 안 낼것인가 천만의 말씀 더욱더 열심내서 너희에게 나아가리라 그것이 19절이죠.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히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갈 4:17-20)
“너희가 그런다고 해서 내가 절대로 포기 안한다. 왜? 너희들 속에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너희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날 때까지 나는 포기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디서부터 발생되어서 어떻게 되는가를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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