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13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4:09

갈라디아서 제 13강 (이근호목사, 2007년 2월 9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4장 8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8-11)

사도 바울이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아들 답다는 증거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안 지키는 것으로 “야 정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가 된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사도바울이 사도로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혹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는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이, ‘날과 달과 절기(안식일, 유월절, 맥추절 등등)를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라는 것으로써 내세운다는 겁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안 지키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반대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만 된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내가 당신들에게 이야기 한 것을 허투루 들었습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어떤 맘을 먹었기에 소위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감히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생각들을 다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말도 안 됩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또 한 가지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을 모를 때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제 성령이 왔고 복음을 알았고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준을 알았으면, 이제는 자진해서 “사도님! 이제 그런 것은 안 지켜도 되네요” 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와 줘야 된다’는 거죠.

지금 이야기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의 말을 듣고 정리해야 할 것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단지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불신세계 전부를 대표하는 속성을 보여주는 종교가 되며 참된 신자의 세계는 일체 여기서부터 벗어났다’는 겁니다.

안식일을 비롯해서 ‘뭘 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불신세계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신을 향하여 섬기겠다고 할 때에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라는 말이죠. ‘신은 저기에 계시고 나는 여기에 있으니까 그 둘을 연결 지을 수 있는 관계라고 하는 것은 내 쪽에서 뭔가 지키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저 위에 있는 신과 내가 연결 된다.’ 이렇게 여기는 것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현상이라는 겁니다.


특히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때 핵심이 뭡니까? 그것을 지킬 때 빈손으로 나옵니까? 뭔가를 들고 나와요. 예물, 헌물을 들고 나옵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정성입니다. “받으소서.”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 정성을 바치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나는 복음을 모릅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과 똑같은 소리라는 말이죠. 여기서 사도 바울은 탄식을 합니다. “그동안 뭘 배웠느냐? 하나님을 알았느냐? 예수님을 알았느냐? 거짓말 하지 마라.”

“나는 하나님을 안다, 예수님을 안다.” 그렇게 백날 해도 “정성을 드리겠다” 고 나온다면 전혀 복음을 못 알아듣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시편 50편 8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 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얘야! 네가 나에게 제물을 바쳤는지 안 바쳤는지 그런 것을 가지고 너를 책망하지 않겠다. 좋은 것을 바쳤는지 나쁜 것을 바쳤는지 그런 것 가지고도 책망하지 않겠다” 는 이야기죠.

왜냐하면 “제물은 네가 나에게 가져다 바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짐승은 그 위치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 는 겁니다. 이삿짐센터가 이삿짐을 옮긴다고 그 짐이 자기 것이 되는 겁니까? 주인의 것을 여기서 저쪽으로 이동시킨 것뿐이죠. 따라서 구약에서의 제물 바치는 마음가짐의 특징은, “주님의 것이 여기에 있었는데 이렇게 이동 했습니다” 라는 그 의미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 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0-12)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왜 안 바치느냐?’라는 것을 가지고 저주하고 벌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어떤 특정 시간을 잘라서 “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출애굽기의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들은 무엇인가?(출 23:14-17)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인간의 정성과 노력을 대표해서 희생하는 그 장소에 그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것은 드리는 쪽에서 뭔가를 드리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친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린 것 말고 외부에서 따로 준비한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게 ‘대신 바침, 대신 드림, 대신 하나님께서 죽으심’입니다. 우리가 바쳐도 안 받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드린 것만 받습니다. 그것을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에 올라와서 그 점을 확인하라는 겁니다. “받으소서”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준비한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는 거죠.

날과 달과 절기와 해의 모든 행사를 한마디로 축약해서 말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데 자기가 아이디어를 낸 겁니까?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한다는 그 기획이 노아의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노아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방주를 만들어서 물에서 구원하겠다는 그 계획안은 순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획안이죠.

노아가 따로 자기 머리에서 나온 계획을 가지고 “이 방주 가지고는 안 되고요. 구축함을 만들어야 됩니다”라고 했다면 그것을 언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그 출처와 근원지가 일체 사람의 머리에서 안 나왔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할 때만 언약이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언약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처음에 언약을 제시 할 때부터 그 안에 이미 담겨서 제공됩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언약에 대한 내용조차도 사람에게서 나온 계획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획안입니다. 두 번째는 그 언약을 성취하는 능력까지 병행해서 이미 언약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 증거가 뭡니까? 노아는 그냥 방주를 탔습니다. 심판이 왔을 때 노아는 그냥 방주 안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노아가 방주의 노를 저은 것이 아닙니다.

그 방주가 언제 육지에 도착하고, 언제 물이 빠진다는 모든 기획도 이미 ‘방주를 만들라’ 고 하신 하나님의 계획속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다시 갈라디아서로 돌아와 보면 여기서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의 목적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목적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뭉개서 없애 버리고 구원이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무슨 방도가 없을까?’ 하고 있던 차에 ‘그래, 저게 괜찮겠다’ 싶어서 본인이 골라서 구원받는 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목적 입니다. 언약 속에는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낯선 목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저런 좋은 일이 생긴다’ 고 상상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입니다. 막상 언약에 들어가서 그 언약이 실천되는 과정에서 교체작업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때 갖고 있던 그 마음가짐이 순전히 일방적인 나의 목적 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목적에 의해서 그것이 깨지는 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은 예수 믿고 나서 이런 좋은 일이 생기고 이런 좋은 것을 얻었다고 하던데 나도 은근히 그런 것을 한번 고대해 봐?’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그런 나의 목적이 하나님의 새로운 목적 앞에 무참하게 침몰 당한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침몰당할 때 무엇이 부서지고, 무엇인가가 우리 앞에 크게, 더 크게 부각되는 겁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은 뭉개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네가 못하는 것을 내가 다 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나날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불신세계가 날과 달과 해를 지킨다는데, 이것이 왜 불신세계를 대변하는 것이 되는가? 이것은 그 자체에서 문제점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니잖아”라고 하는 그 반대쪽 세계인 복음의 세계에서 볼 때에 그것이 엉터리라는 겁니다. 복음의 세계가 뭐냐 하면, ‘인간이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셔서 이루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했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란 ‘내가 할 수 없는데 누군가 내 대신 일을 다 처리했다’고 할 때이며 그것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지 않습니까? 제가 안산강의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까? 미래의 일을 현재의 내가 나를 떠밀어서 미래까지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힘에 부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담하는 겁니다.

미래에 계신 주님께서 그 미래에 완료된 힘을 가지고 우리를 잡아당기는 식으로 구원합니다. 미래에서 나를 구원하는 것도 모르고 현재의 내가 엉덩이 밀듯이 나를 밀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시도를 하니까 그게 얼마나 어설픕니까? 그렇게 해서 구원받겠다는 사람에게 물어 보고 싶어요.

“당신이 잘해서 당신을 구원 한다면서요?”
“그래요.”
“그러면 당신은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습니까?”
“석장이요”
“다섯 장씩 읽으면 속도가 더 빨라질 텐데 석장만 읽습니까? 그러면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씩 합니까?”
“두 시간씩 합니다.”
“세 시간씩 했다면 벌써 천국에 당도했지 않았을까요? 두 시간만 해서 됩니까? 좀 더 쓰시죠. 세 시간씩 하는 사람들 보면 미안스럽지 않습니까?”

좀 비꼬는 듯이 들릴지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요즘 ‘하이킥’이라는 드라마에서 잘 꼬는 인물이 나와서 “그 부지런한 선생님 나오셨냐?” 하고 비꼬던데 이런 경우에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를 가지고 세상에서 뭐라고 하냐면 ‘대략난감’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나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난감~하죠. 이런 사람들.

만약에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헌금 열심히 하고, 하루에 십일조에서 더해서 십의 이조를 하고,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이라고 했으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사람이 불신세계의 사람이라는 욕을 얻어먹을 이유가 없어요. 약간 실력이 떨어진다든지, 조금 미흡하다는 욕을 얻어먹을지언정 불신세계라는 말을 듣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불성실하고, 구원된 신앙인은 아주 성실하기 때문에, ‘성실한 사람은 구원, 덜 성실한 사람은 덜 구원’이 되니까 덜 성실한 사람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뭡니까? 예수님이 몽땅 자기가 대신 피를 흘리심으로 구원 받았다면 이 사람은 열심을 내면 낼수록 “나는 불신자입니다” 라는 대략난감을 더욱 더 표내고 있는 겁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할 때 그 답변은 ‘당신은 아직 다 이루지 못했다. 지키려면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 다 못 지켰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당신은 틀렸다” 라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 하신다는데 당신은 지금 뭐하고 있느냐” 말이죠.

“이미 천국에서는 주께서 대신해서 일을 다 치렀는데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습니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비판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사도 바울이 그 당시 불신세계를 향하여 퍼붓는 비판입니다.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일체 우리 자신에게 어떤 행위를 강요하거나 스스로 뭔가를 독려하는 것으로써 나를 천국으로 밀어 넣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그 소식이 들려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손을 놔야 합니다. ‘내가 안 되는 짓을 하려고 애를 썼구나’ 하고 손을 놔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 는 소식이 들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자기를 조금이라도 더 달라지게 변화시키겠다고 시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복음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전혀 복음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신세계에 그냥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면 왜 안 되는가? 왜 그것이 복음에 위배되는 것인가? 복음을 알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해서, 이제는 구원받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성도로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사의 현상으로서 특정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말라” 고 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어떤 목적을 안 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때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은근히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이고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 성탄절기를 지킵니다. 그게 왜 흠이 되고 비난 받을 일이 됩니까?” 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뭘 놓치고 있습니까?

그런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목적이 병행해서 수반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인은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함’ 이라고 아주 고상한 목적이라고 장담을 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목적은 이런 식의 영광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사심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서 드린다’ 는 그것이 충분히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의 기도가 영광이고, 너의 헌금이 영광이 되고 너의 찬송이 영광이 된다’ 는 것을 지지해주는 기준 삼을 만한 것들을 성경에서 수백 군데의 구절을 다 끌어내서 이것들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으면서 제시할 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 는 겁니다.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떤 목사님이 복음을 알고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설교를 합니다.“여러분! 복음이 이것입니다.” 그때 옆에서,

“어이! 복음 아는 목사!”
“예!”
“이제는 목사를 하지 말지. 복음을 알았으니까.”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알았으니까 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요. 내가 달리 봉사할 것도 없고 말씀봉사 해야지요.”

이렇게 이야기 할 때 그러한 순수한 고백에 누구 토를 달고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습니까? “함께 더불어 영광 돌리세.” 이것은 전부 다 동의하고 논리상 맞는 이야기로 들리겠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을 요구 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복음 전하고 설교하는 목사가 영광 돌리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설교 하면서, ‘내가 설교 할 자격도 없는 쓸모없는 인간’ 임을 자각하는 겁니다.

방향이 정 반대죠. ‘나는 설교할 자격도 안 되는 인간이며 내가 설교를 잘했다는 이유 때문에 다음번에도 단에 세워진다는 것이 해당되지 않는다. 설교를 잘했다 혹은 못했다는 그것을 판단하는 것조차 그 자체로 나에게 죄가 된다. 설교를 어떻게 했든지 구원은 주님께서 하시지 내 설교와 전혀 무관한 사항이다. 왜? 나는 쓸모없기 때문에.’

세상의 논리는 ‘나는 쓸모없기에 주께서 안 쓰신다’ 는 논리인데, 하늘나라에서는 ‘나는 쓸모없기 때문에’ 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계속 쓰시는 거예요. 언제까지. 쓸모없는 것을 진정으로 고백할 때까지. 제가 말해 놓고도 너무 어렵게 이야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말씀이 성도, 또는 말씀을 전하는 자, 설교자를 통과할 때 그냥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위력이 이 성도와 설교자를 부수면서 통과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전하는 자와 성도를 완전히 박살내면서 말씀은 말씀대로 전파되는 겁니다.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동원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그 말씀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나는 이미 복음 알았다. 그러니까 설교하는 것이 영광이다.’ 그런 영광은 성경에 없습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다 언약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다 모세언약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언약의 달성자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언약의 첫 번째 원칙, 언약의 계획자, 언약은 누가 만들어 냈다고요? 하나님이죠. 두 번째 원칙, 언약의 완성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모세언약인데 그 언약을 누가 지킵니까? 언약은 레위인이나 제사장이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지키는 겁니까? 결국 하나님이 지키지요.

하나님이 지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 당시 레위인이나 제사장보고 지키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지키라는 이유가 무엇이었겠어요? ‘우리 힘으로 못 지킨다’는 그 정도 겸손은 유대인들도 다 압니다. 왜 못 지키는 그것을 우리 보고 지키라고 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언약 지키는 주님과 우리 사이가 ‘못 지킨다, 지킨다’는 사이가 아니고 ‘우리는 죄인이고 그분은 의인’이라는 관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죄인이라는 겁니다.

‘한번 지켜보자. 꼭 지켜보자’ 하다가 ‘못 지키네. 그러니 죄인 맞네.’ 그런 식이 아닙니다. 못 지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인인줄 알고,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예요. 못 지킨다는 것과 죄인이라는 것과는 달라요. 못 지킨다는 것은 못 지킨다고 겸손해 하면 그만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네가 숙제를 할수 있나?
“선생님! 제가 숙제를 못 하겠습니다.”
“아이고! 겸손도 해라. 네가 숙제는 못했어도 인간은 되었구나. 왜냐고? 겸손하니까.”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수학숙제 해라.”
“제가 조폭인데요.”

이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을 두들겨 패고 싶습니다”라고 적극적으로 죄를 드러내는 것 하고, “선생님의 명령하시는 그 사정을 제가 압니다만 제가 기초실력이 안되니 도저히 못 지킵니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 지키고 싶은데 정말 실력이 없어서 못 지킵니다”라는 답을 듣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이 법 어느 놈이 줬나? 이 법을 누가 준거야?”
“하나님이”
“그 하나님은 가짜네. 인간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어? 언약 없이 우리에게 양심이 있으니까 양심대로 행동해서 천국과 지옥을 우리가 결정하겠단 말이야.”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주어지면, 어떤 경우에는 탐을 낸 것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탐을 안 낸 것이 되죠. “탐내지 말라” 라는 율법이 주어졌을 때 탐심인 경우와 탐심이 아닌 경우의 결정을 누가 합니까? 다 본인들이 하잖아요. 본인들이 판단하고 결정해서 “주여! 저는 평생을 탐심을 내고 있군요.”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꿀밤을 줘 버리는 겁니다. 본인이 결정을 내려서 “저는 평생 탐심을 냈습니다” 하는 그 법칙이 주님 보시기에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같은 자기 기준입니다. 우리는 “탐내지 말라” 는 율법을 받게 되면 “저는 못 지켰습니다” 하는 겸손에 까지 머무는 것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이면 다인가? 이렇게 횡포를 부릴거야?”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주 고상하게 무엇으로 바꾸는가? “주여! ‘탐심하지 말라’ 를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는데 인간이 연약한 지라, 제가 천사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예수도 아닌데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못 지킵니다. 부족합니다.” 이정도 선에서 머물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이 법 어느 놈이 준거야? 나는 이 법을 외면하고 내가 따로 법을 만들거야.” 이 수준까지 내려가 줘야 솔직한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세계입니다.

선생님이 수학문제를 줄 때 “못 풀겠습니다. 답답합니다.” 이러면 착한 사람이죠. 그 정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예 시험지를 엉망으로 찢어 버리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찢어 버린 거예요. “아! 문제 간단한 것을 가지고 괜히 고민했네. 성경 그깟 것을 안 본 것으로 하면 간단한 것을. 괜히 그것을 보고 ‘못 지켰네. 부족 하네’ 그렇게 할 것이 뭐가 있어? 처음부터 안본 것으로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지.”

적극적인 하나님에 대한 대적, 원수가 우리의 본성입니다. 어중간하게 걸치지 마세요. ‘부족하니 도와주세요’라는 겸손의 티를 내는데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더 내려 가야 됩니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듯이 더 지하로 내려가세요. 밑바닥을 치세요. 그것은 뭡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손으로 예수를 죽이고 싶었다.’ 그 선까지 우리가 손을 대야 되지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언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지킵니다. 우리가 못 지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주신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죄를 규정하면 지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준 계획에 대해서 우리는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글타이핑을 빠른 속도로 하는 아이가 컴퓨터가 뭔지도 모르는 할머니한테 “할머니! 나처럼 타자 칠 수 있어?” 그러면 할머니가 “아이고! 안타깝구나. 내가 20년만 젊었어도 너같이 타이핑을 할 수 있는데” 하면서 안타까워서 웁니까? “얘야! 나는 그런 거 모른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은 도무지 내 취향에 안맞다’ 는 이것을 끝내 버려요. “예수님! 어떻게 하면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신자입니다.

‘꼭 예수를 믿어야 되는가? 그냥 신을 믿으면 되지.’ 추상적인 하나님을 쥐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거부해 버려요. 그 당시 율법,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라고 준 것은, 인간들이 그것을 지킬 때 이미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마저 지켜 냈다’ 는 그 자기 의로움이 누적이 되고 쌓여서 그것으로 하나님마저 내 앞에서는 입 다물게 할 수 있다고 보는 그것이 인간들 안에 숨겨진 채 내장되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동기였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 동기를 폭로당하고, 오늘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갖고 있는 상상의 세계, 우리 나름대로의 목적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게 만든다’ 는 것을 알게 하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비타 500의 뚜껑을 못 열어서 쩔쩔 맬 때 “목사님! 제가 도와 드릴게요” 했다면, ‘아하! 저분이 힘이 세니까 이 뚜껑을 꼭 열어 주겠지’ 라는 기대와 목적을 가지게 되겠지요.

그런데 실컷 도와주겠다고 와서 그만 제풀에 죽어 버렸어요. ‘그러면 비타 500은?’ 하나님께서, “비타 500을 열려고 하는 그 목적이 뭔데?” 하십니다. 그 목적 자체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훼방하고 무시하는 자기만의 상상의 세계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대신 죽음의 세계이고, 그 세계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로 인하여 우리의 무엇이 뭉개져야 합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세계가 무너져야 하는 거예요.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 믿어야 되겠다는 이러한 조합, 혹은 세트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생각한 그 목적과 전혀 엉뚱한 상상한 세계를 펼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겠다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 상상은 진짜 주께서 말씀을 줄 때 그것이 부서지는 겁니다. 어떻게? 내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창세전부터 선택해서 구원되었다는 쪽으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시작한 분도 하나님이고 중간도 하나님이고 마감도 하나님이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시작한 분은 여기 와 있지만 그 다음에 마중 나가는 것은 내 몫이고 그 다음에 둘이 합작해서 함께 동행해서 나간다’ 는 이런 시나리오는 성경에 없습니다. 없는데도 그런 생각을 말씀을 보는 이유는 아직까지 우리의 개인적인 목적이 안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뭔가는 노림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들의 노림수였습니다.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린다’ 는 그 틀입니다. 그 틀이 ‘은혜로 구원받고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킴으로서 영광된다’ 는 틀인데, 그 구조를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초등학문” 이라고 합니다.

초등학문이라는 것은 구원의 보조적인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3절에,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여기에서 초등학문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종(a slave)이라는 개념입니다. 종이라는 개념은 결코 아들일수가 없다는 것을 확정짓는 노예문서 같은 겁니다. “너는 종이야” 라는 말은 “너는 아들이 아니다” 는 뜻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아들이 될 수 없다는 확정입니다.

초등학문은, 다른 말로 하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초등학문은, 종으로 하여금 영원히 아들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영역 안에 갇혀 있는 셈이 되는 거예요. 어떤 이는 “우리가 이 초등학문의 인도를 받아서 밖으로 나가면 될 것 아닌가요?” 라고 합니다. 종은 인도를 받아서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현재 이 초등학문에서 ‘이게 초등학문이구나. 이제 중학교학문을 배워야지’ 라고 생각하는 초등학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중학생이 되어도 초등학생입니다.

‘이정도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워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배워도 초등학생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종이고 대학생이 되어도 종이고 맨 종입니다. 그러면 초등학생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이쪽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영이 왔을 때만 아들 되는 거예요. 아들의 영이 왔을 때는 대신 죽으심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런 인식의 구조, 틀 자체가 날아가 버립니다.

아무리 “내가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라고 우겨도 이런 구조를 유지하는 한 그 사람은 아들이 아니고 종입니다. 초등학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못 받아서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대신 책임지시는 분이 있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할 말은 그것 밖에 없어요. 대신 다 처리하는 처리반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다니요? 그러면 죄를 마구 지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걱정을 하시면서 그런 걱정을 하면 곤란합니다. 왜? 걱정한다는 것은 이 초등학문을 안 벗어나려고 걱정하는 것 밖에는 안 되니까요.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벗어난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다. “과거에는 이랬더랬습니다” 라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자는 말이죠.

과거에 조심스럽게 살고, 하루에 성경 세장씩 읽고, 예배 꼬박 꼬박 참석하고요.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인줄 알았죠. 그런데 그렇게 지켜야 된다는 초등학문적인 인식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름대로의 상상한 예수님을 거기에 그냥 끼워 맞추려고 애를 쓴 겁니다. 옛 부대에 새 술을 담으려고 시도를 하다가 부대가 찢어진 꼴이 된 겁니다. 새 부대도 주님이 주셔야 되고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겨서 와야 되는 겁니다. 오게 되면 뜯어보니 거기에 “대신 다 처리했다” 가 들어 있습니다. ‘대신 죽었다’ 는 말은 ‘어떤 죄가 있든지 그 죄는 이미 대신 처리했다’ 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되어 있지요. 그게 누구의 목적입니까? 우리목적 입니까, 하나님목적 입니까? 하나님 목적 아닙니까? 그 하나님목적이 왔을 때 우리가 따로 우리의 목적을 다 융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하는 분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계약을 해서 처리했는데 제 삼자가 건방지게 왜 낍니까? 끼어들겠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초등학문적인 아이디어의 가치를 매겨달라는 식으로 우기는 것 밖에 안 되잖아요. 지금 두 분이 계약을 하는데 제 삼자가 끼어들지 못합니다. 두 분이 서로 의논해서 계약 다 끝나서 천국가고 지옥 가는 일이 다 결정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름대로의 자기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게 초등학문인데 누구든지 초등학문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아마 영광이 될거야’ 라고 나름대로 정리된 것이 있었는데, 저쪽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다 의논해서 “네 죄는 다 처리했고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다” 고 하면서 왔을 때는, 그 때까지 내가 만들고 유지했던 목적은 깨어 져야지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설교 본문에 설교하는 본인이 깨어져야 된다고요. “주여! 설교는 합니다만 이 설교 잘했다고 해서 주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스스로 느끼면서 설교를 해야 돼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 38절, 39절에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이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고 되어 있단 말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잖아요. 그런데 그 목적을 누가 방해합니까? 목회자들이 전심으로 방해를 해요. “‘주여! 제가 심방을 못 갔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다음 주부터 교회 안 나올 거예요. 제가 주의 일을 방해 했습니다’ 라고 여기는 그 생각으로 나의 일을 방해하는 구나.”

내가 심방을 안 갔다고 해서 구원될 사람이 구원 안 되는 법이 없고(왜? 주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내가 심방 한번 더 간다고 해서 구원 안 될 사람이 더 된다는 그런 법은 없는 거예요. 괜히 목사 본인이 근심을 하는데 그 근심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목사 본인이 초등학문적인 사고방식(뭔가 지켜야 된다는 것)으로 내가 몇 번 심방해서 몇 명을 교인 만든다는 규칙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굴레를 뒤집어 씌워서, “주여! 제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습니다” 하면서 혼자 까불고 닦달 내고 엎어져서 울고 기도하고 철야 하고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아이고! 한심스럽다. 이 일이 니 할 일이가?(경상도 말로) 걱정을 해도 내가 하지 왜 네가 하느냐?” 이 말이죠. 대신 죽으심을 잊어버릴 경우에는 반드시 초등학문이 툭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주부가 아침에 설거지를 하면서 “주여! 건강 주셔서 지금 설거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이 설거지를 잘함으로 말미암아 저 큰 딸(설거지 한번도 안하고, 청소도 안하는)이 아름다운 이 부모의 모범적인 모습을 본받아서 나중에 내가 없더라도 설거지를 잘 하게 하옵소서. 제가 지금 잘하고 있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옛날에 익숙했던 초등학문을 그대로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초등학문을 안 할 수는 없습니까?” 깨어져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이 또 어려운 것인데 이 어려운 문턱을 또 넘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죽을 때 까지 초등학문대로 살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깨지기 때문입니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초등학문 짓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벗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초등학문 짓이다’ 하는 것을 성도만이 확인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아닌 사람은 실컷 초등학문 짓을 하면서도 그게 초등학문 인줄을 모르고 있어요.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가 그 차이입니다. 성도는 자기가 하는 모든 짓이 사도 바울이 그렇게 지적했던 초등학문의 수준이라는 것을 압니다. 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 일부러 율법을 안 지키려고 애를 써요. 방탕한 생활을 해 보려고 까지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이렇게 하시면 초등학문에서 벗어난다” 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구원받은 분들 맞지요?” “예.” “그렇다면 초등학문이 뭔지 알려 드릴까요?” “예.” “이것이 초등학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이런 것을 지키지 말라’ 는 것이 아니라, 이런 조로 되거든 ‘아하! 이것이 초등학문이구나 우리가 옛날에 저기에 얽매여 있었지.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구원 되었다’ 고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크리스마스 안 지킵니다” 라는 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지킵니다” 라는 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저는 십일조를 안 합니다.” 그게 초등학문입니다. 왜? 십일조를 안 하는 것이 영광 되는 줄 알고 착각했다 이 말이죠. 자기의 목적이 십일조 안함으로써 영광돌리겠다는 목적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름대로 뭔가 하고 안함으로써 영광돌리겠다’는 것이 주님의 대신 죽으심을 모독하는 하나의 초등학문이 된다는 말이죠.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 같으면 자기의 하는 행동을 십자가로 판단해 볼 수 있어요.

십자가로 판단해 보면 초등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살아가는 인생 전부가 초등학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늘 얻어먹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주여! 저 쓸데없는 인간 맞습니다. 설교 백날 하고 강의를 백날 해 봐야 쓸데없는 인간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만!’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참 잘 하셨습니다’ 하고 박수 치겠습니다.” 이런 태도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안 들고, “주여! 제가 설교를 열심히 해서 교인들이 은혜받고 감동을 했는지 설교 후 점심 먹을 때 ‘오늘 목사님 설교 좋았다’ 고 칭찬을 했는데 그 다음 주일 되니까 열 댓명이 쑥 빠졌습니다. 이래서 무슨 보람으로 주의 일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노렸습니까? 하나님만의 언약에 자기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고 착각을 한 거예요.

다가오는 2월 18일이 설날이죠? 설날이 오면 목사님들이 비상이 걸립니다. 주일 낮 예배를 몇 시에 할 것인가? 과연 오후 예배를 할 것인가? 어떤 교회는 교회 올 교인이 몇 안 되기에 아예 그날 예배를 폐지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반대의견도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식으로 설날은 예수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세상 풍속인데 그 풍속에 의해서 교인들이 과연 좌지우지 되는지를 봐서 교인들의 믿음을 파악할 수 있는 멋들어진 기회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 예배에 참석여부를 가지고 정말 핍박이 와도 순교할 믿음의 사람인지, 믿음 있다고 표시만 내는 거짓말쟁이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예배를 밀어붙이는 교회(목사)도 있더라는 겁니다. 그것은 둘 다 아무 의미 없는 우리(교회)만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은 주님의 목적 앞에서 의미 없습니다. 의미 없다는 말은, 막상 그때가 되어 보면 안 한다고 해도 올사람은 오게 되고, 안 한다고 해도 오게 되면 예배 드리기 마련입니다. 하자고 해 놓고도 한 명도 안 오면 자연 안 하게 되겠지요. 주시는 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자, 말자’ 가 별 의미가 없어요. 얼마나 쉽습니까?

사람들은 현재에서 미래로 밀어내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계획에 자꾸 의미를 줘요. “주여!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늘부터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겠습니다.” 그렇게 계획을 세웠지만 주님께서는 그 계획을 초등학문으로 취급해서 그런 것을 지키는 와중에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얼마나 좋은지를 우리 성도에게는 깨닫고 또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 피 믿었으면 걱정을 하등 하지 마시고 그냥, 그냥 사시면 됩니다. 그냥 사시면 말씀으로 매일 같이 깨어지게 되어 있어요. 깨지는 그 재미, 그 재미로 삽시다. 스스로 규칙 만들고 그것이 의미 없음이 드러나고, 또 규칙 만들고 의미 없음이 드러나고요. 그렇게 깨지는 재미가 아주 쏠쏠합니다. ‘내 대신 돌아가신 분이 계시는데 왜 내가 쓸데없이 계획 세워서 나댔는가?’ 그렇게 깨지는 재미.

‘애들은 이렇게 키우겠다’는 자기 계획과 규칙이 애들이 뜻대로 안자라고 말 안 듣고 공부 못함으로 말미암아 깨어지는 그 재미. ‘남편을 이렇게 다루겠다’는 그 계획이 전혀 안 먹히는 그 재미. 그게 얼마나 재미있다고요. 사람이 깨어지는 재미를 느낄 때, 비로소 그는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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